나는 누구인가요? 나를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진짜 나를 찾아가는 사람들의 가슴 찡한 이야기들입니다.

 

나는 소방관이다

신동철 35세. 서산소방서 119구조대

“몸 조심해야 돼.” 출근할 때면 아내는 늘 그렇게 이야기한다. 언제나 위급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것이 소방관의 일이다.

“그래, 알았어.” 아내를 안심시키지만, 막상 위급한 상황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 몸을 사릴 겨를이 없다. 그냥 자동적으로 몸이 반응한다. 몸이 먼저 앞선다고 우리 구조대에서는 나를 행동대장이라고 부른다. 사실 구조 현장에서 내 안전을 위해 이것저것 따지면 사람을 구하기 어렵다. 그리고 현장에서 몸을 사리면 오히려 더 큰 부상을 당할 수 있다.

성경에 ‘죽으려고 하는 자는 살고, 살려고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쩌면 우리 구조하는 데도 맞는 말일지 모르겠다. 이 힘든 상황을 이겨내야겠다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구해내면, 다음에 또 같은 상황에서 나만의 노하우가 쌓이고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2004년부터 그동안 1,000번이 넘는 화재 현장과 구조 현장에 출동했다. 그리고 숱하게 많은 사람들을 힘을 합쳐 구해냈다. 정말 위험한 순간도 많았다.

몇 년 전, 부탄가스 공장에 화재가 났을 때다. 화재 진압 도중 가스통이 여기저기서 터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하지만 도망갈 수는 없었다. 불을 꺼야 했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을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그것이 자동적인 소방관의 본능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작년 3월, 가야산 산불 진압에 나섰을 때였다. 산불이 크게 나서 비번이던 나도 긴급 출동되었다. 그런데 진화 작업을 하던 소방 헬기가 저수지로 추락했다는 속보가 들렸다. 급하게 달려갔는데, 헬기는 이미 두 동강 나 있었고, 저수지에 빠져서 허우적대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정말 급박한 상황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물속으로 바로 들어갔다. 솔직히 구명환을 가지고 들어가야 하지만 그것을 챙길 겨를도 없었다. 차가운 물살을 헤치고 열심히 헤엄을 쳤다. 한 명을 구조하고, 다시 동료와 함께 나머지 한 사람을 가까스로 구해왔다.

이 일을 계기로 작년 말, 최고영웅소방관으로 선정이 되었다. 민망했다. 나보다 더 위험한 곳에서 공적을 세우신 분들이 많은데, 너무 과분한 상을 주신 것이다. 누구나 그 상황이었다면 똑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묵묵히 맡은 역할을 다하는 대한민국 소방관 3만7400명 모두가 영웅소방관이라 생각한다.

소방관이 되고부터는 매일 운동을 한다.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구조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늘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아주 위험한 상황을 경험하고 나면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특히 사망자가 생길 경우, 우리가 조금만 빨리 출동했다면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사실 우리나라는 선진국에 비해 소방 환경이 열악한 편이다. 하지만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왜냐면 모두가 목숨을 걸고 출동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노력하는 만큼 우리 후배들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근무하리라 믿는다.

하면 할수록 소방관은 정말 매력적인 직업이라 생각한다. 내가 이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게 자랑스럽다. 다른 사람들이 힘들다 어렵다 하며 피하는 일을 우리가 한다. 위험해 보이지만, 그 속에서 느끼는 몇 배의 행복과 보람이 있다. 사람을 위급한 상황에서 구한다는 건 정말 멋지고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올해 아들이 태어났다. 아내는 반대하지만, 나중에 아들이 소방관이 되고 싶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후원해주고 싶다. 아들에게도 한 생명을 구하는, 돈으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보람과 기쁨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이런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천생 소방관이구나 싶다.

 

신철 작 <여름밤의 꿈> 캔버스 위에 아크릴. 31.8×31.8cm. 2011.

 

나는 위기의 인문학도다

윤보라 25세. 취업 준비생.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2동

처음 전공을 선택하고 대학을 다닐 때 평소 알고 지내던 사람들이든 처음 본 사람들이든, 내 전공을 듣고 나서는 백이면 백 이런 말을 했다.

“국문학 배워서 뭐 먹고살 건데? 요즘 인문학 전공해서 어떻게 밥 벌어먹고 살아?”

진심으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머릿속에 생각이 있어도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 일쑤였다. 교양 수업으로 평소 관심 있었던 철학이나 종교학, 예술사 수업을 선택해 들을 때도 주위 친구들은 배부른 생각 그만하고 취업에 도움이 되는, 스펙을 쌓을 수 있는 실용적인 과목을 들으라 충고했다.

나 역시 때때로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기도 했다. 정말 그런가? 내가 생각을 잘못한 걸까? 늦기 전에 전과를 해볼까? 자격증을 딸 수 있는 교양을 찾아볼까? 그러면서도 인문학 관련 수업과 인문학 서적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대학교 2학년 때 나는 홀로 마운드 위에 서 있었다.

2회 초, 내 인생은 너무 일찍 홀로 감당하기 힘든 위기를 맞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께서 머리를 싸쥐고 쓰러지셨다. 어머니께서는 건강이 나빠져 교외의 병원에 요양차 입원 중이셨다. 남동생은 고3 수험생이었다. 나는 대학교가 있는 아산에서 집이 있는 안양까지 매일 통학하며 공부를 하고, 집안일과 가족을 돌봐야 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내적인 상황이었다. 외면하려 해도 현실에 대한 원망과 외로움, 미래에 대한 불안감, 환경에 대한 열등감 등이 한 번씩 쓰나미처럼 나를 덮쳤고, 그럴 때마다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서럽게 울 수밖에 없었다. 매일매일 있는 힘을 다해 전력투구했지만 단 하나의 공도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가지 않았다. 불행이라는 견고한 타자는 볼을 골라내며 조소를 흘렸다. 9회 말까지 버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만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운드에서 내려오고 싶었다. 순간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타자를 향해 데드볼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여전히 마운드 위에 서 있다. 다시 홈런을 맞는다 해도 상관없다는 듯 2회 말을 향해 가고 있다. 더 이상 불안해하지도, 서럽게 울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어설프게 동조하지도 않는다.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지금 이렇게 나를 지탱하고 있는 것, 위기와 상관없이 꿈꿀 수 있게 한 것은 4년의 대학 공부에서 쌓은 인문학적 정신 때문이라고. 강의 시간에 배웠던 인문학 속에는 내 고통을 후벼 파는 정직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 안에 깃들어 있었던 참다운 인문정신은 얼기설기 대충 꿰매어 놓은 내 곪은 상처를 날카로운 메스로 터뜨리고 그 내용물을 바로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진정한 나 자신과 대면할 수 있게 해주었다. 많이 아팠지만 참 열심히 공부했다. 인문학 수업이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었다. 어느 순간 머리가 서서히 차가워지면서 다시 스트라이크 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인문학 전공해서 뭐에다 쓸 수 있냐’고 말한다.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빙긋이 웃을 뿐이다. 지식은 넘쳐나지만 지혜는 없는 시대, 너도나도 실용과 스펙을 외쳐대는 숨 막히는 상황 속에서 많은 친구들이 쫓기듯 살고 있고, 작은 상처에도 크게 아파하며, 쉽게 좌절하고, 어설픈 자기 연민이나 위로 속에 빠져 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잃어간다. 그런 모습들을 볼 때 나는 내가 더 이상 위기의 인문학도가 아님을 느낀다.

고통과 위기가 없는 삶은 없다. 내 키를 훌쩍 넘기는 불행을, 위기를, 나는 잡아낼 수도, 외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인문학은 불행과 위기의 순간을 담담하고 유연하게 관찰할 수 있는 힘을 주었고, 흔들리지 않는 마인드 컨트롤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삶을 살면서 위기가 서 있어도, 불행이 서 있어도, 직구를 던질 수 있는 힘을 길러준 것이다. 이건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스펙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위기가 찾아와도 그 고통과 직접 대면할 수 있는 통찰과 지혜를 겸비한 나는, 기회의 인문학도다.

 

신철 작 <기억풀이_ Be Happy> 캔버스 위에 아크릴. 45.5×53.0cm. 2010.

 

나는 발명가다

현태섭 19세. 충남 논산시 연산면. blog.naver.com/xotjq2006

중학교 시절, 나는 소위 ‘문제아’였다.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려 다니며 말썽을 피웠다. 가정적으로 불우한 환경의 영향이 컸다. 어떤 것도 하기 싫었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처음엔 그런 생활이 이어졌다. 어떤 아이와 시비가 붙어 싸웠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마음이 편치 않았다. 더는 아이들과 싸우고 싶지도, 학교에 부모님이 소환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또 그동안 내가 힘들게 했던 나의 가족들을 위해 무엇인가 하고 싶었다. 더 이상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혼자 방 안에서 울고 있었을 때였다. 갑자기 중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생각났다. 당시 나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물건 같은 것을 만들어, 아이들을 괴롭히곤 했었다. 그래서 많이 혼났지만, 선생님은 한편으로 내 창의성을 인정해주셨다. 내가 철이 든다면, 그 손기술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쓰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던 것 같다.

발명 동아리에 들어갔다. 처음 과제는 주변에서 쉽게 이용할 수 있는 발명품을 개발해오라는 것이었다.

어떤 게 좋을까 생각하던 중, 우연히  바람이 가득 차 날아가고 있는 비닐 봉투를 보게 되었다. 그때 ‘아, 비닐 봉투나 바구니가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늘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집에 있는 스타킹과 펀칭기, 고무 조각, 작은 갈고리 등을 이용해서 사용자가 원하는 만큼 팽창의 정도를 정할 수 있는 바구니를 만들어냈다. 그것을 본 동아리 스승님은 극찬하셨고, 지역 공동 발명 영재에 지원해보라 하셨다. 그렇게 영재 시험에 합격한 이후, 나는 계속 발명을 해나갔다.

책상 속에 넣어둔 교과서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일반 책상을 보안 책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장치, 점선을 쉽게 그릴 수 있는 필기구 등 20여 종류의 생활 발명품을 만들었다. 가끔 코피를 쏟기도 하고 몸살에 걸리기도 했지만 ‘발명’을 하는 순간만큼은 행복했다. 그 결과 46건의 산업재산권(특허, 실용신안, 디자인) 실적과 현재 아직도 대기 중인 1,400여 개의 아이디어가 있다. 발명을 한 2년 동안, 발명 대회에서 많은 수상도 했다.

나는 더 큰 세계로 진출을 시도했다. ‘마스터 현’이라는 닉네임으로 발명 블로그를 운영한 것을 시작으로, 현역 발명계 사업에 지원하여 한참 위의 선배님들과 함께 강의 등의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정말 현역 발명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발명 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하여 현재는 현역 발명가로써 활동 중에 있다.

나는 발명가다. 나는 열정적으로 기존의 것을 새롭게, 더 유용하게, 행복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을 생각한다. 그렇게 발명을 할 때 나는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해진다. 그래서 발명은 ‘모두의 꿈과 희망, 행복을 만드는 창조’라고 생각한다.

발명을 함으로써,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고 지금은 내일을 바라보는 내가 되었다. 발명은 ‘문제아’라는 손가락질을 칭찬과 격려로 바꾸어주었다. 이제는 나의 재능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발명품을 만들고자 한다.

누구나 각자의 어려운 시절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 또한 이것을 역경으로부터 이루어내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오래전, 강의 중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자들이 있고,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그들은 수많은 고난과 좌절을 겪는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라. 좌절과 고난의 눈물을 흘린 사람이야말로,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

 

신철 작 <date> 캔버스 위에 아크릴. 70×140cm.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