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문진정
치열한 일터에서 물러나 손자들의 재롱을 즐길 나이에, 편안한 노후를 마다하고 해외 오지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사람이 있습니다. 필리핀에서, 그리고 네팔에서 ‘성자’라 불리며 8년간 봉사 활동을 해온 신찬수(71)씨입니다.
‘못 먹고 못살았던’ 1950년대, 전북 부안의 어촌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신찬수씨는 가난 때문에 서러움을 겪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며 늘 측은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합니다. 자연스레 농촌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고, 당시 미국에서 파견된 평화봉사단 단원들은 그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었지요.
그렇게 해외 봉사의 오랜 꿈을 키워온 신찬수씨는 31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마친 후 틈틈이 영어와 전문지식을 공부하여 한국국제협력단(KOICA)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2001년 당시 최고령 봉사 단원으로 뽑히게 됩니다.
“한국 전쟁 직후엔 우리나라가 말도 못하게 가난했어요. 그때 선진국의 원조 덕분에 잘 살게 되었으니 하나라도 보답을 해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첫 근무지인 필리핀에서 그는 가난한 어촌 마을을 1순위로 선택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그에게 고향의 이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의 발전 사례를 보여주며 주민들을 설득했고 도로를 넓히고 우물을 파는 등 그간 쌓아온 농촌 운동의 경험을 모두 쏟아 제2의 새마을 운동을 펼쳤습니다. 그 결과 4년 후에는 그 지역 최우수 마을로 선정될 만큼 많은 발전이 있었지요. 그 외에도 자신의 생활비를 모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장학금을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필리핀을 짊어지고 갈 생각을 하니 생활은 좀 불편해도 마음만은 가뿐했다”는 신찬수씨. 그의 헌신적인 노력은 현지 신문 1면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4년간의 활동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세계 최빈국이었던 네팔에 관한 기사를 읽고 4개월 만에 다시 출국을 결심합니다. 해외에 다녀올 때마다 부쩍 야위어가는 모습에 아내와 두 아들은 만류했지만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굳은 의지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다행히 네팔에서 생활하는 4년 동안에는 한 번도 앓아누운 적이 없을 정도로 건강했습니다. 또한 정신적으로도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 시간이었다 말합니다.
“처음엔 네팔 사람들에 대해 불만이 많았어요. 밭을 공들여 일궈서 작물을 심어놨는데 정작 농약도, 비료도 주지 않고 방치해 잡초가 무성하고는 했거든요. 그런데 그 잡초로 염소를 키우는 게 소득에 훨씬 도움이 된다는 걸 뒤늦게 알고서는, 나이를 먹고 경험이 많을수록 오히려 상대를 더욱 존중하고 겸손해야 하는구나 다시금 느꼈었지요.”
2011년, 8년의 봉사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그에게는 해외 봉사 자문단이라는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이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지금은 대학원에서 사회복지학을 배우며 전문가 과정을 준비 중이라는 신찬수씨. 그에게 있어 배움과 봉사는 삶의 이유이며 기쁨인 듯합니다.
“세 살배기 손자에게도 모르는 건 배워야지요. 배움에는 부끄러운 게 없어요. 그리고 평생 배운 것을 어디든 쓸 수 있다면 그게 큰 보람이지요. 남은 인생도 해외 봉사하면서 후배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