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벌레 걱정 끝~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식충 식물 ‘벌레잡이 제비꽃’

장미 모양의 연두색 잎과 낭창낭창 흔들리는 가녀리고 예쁜 꽃대…. 식충 식물은 냄새가 난다거나 특이하게 생겼을 것이라는 선입견을 단번에 날려주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식충 식물 벌레잡이 제비꽃입니다. 여름을 제외하고는 일년 내내 꽃을 보여주고 한번 피면 한 달 이상 모양을 유지한답니다. 잎의 표면에 송글송글 점액이 맺혀 있어서 날벌레가 꼼짝없이 붙어 있다가 며칠 후면 어느새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어요. 클레오파트라가 벌레 퇴치를 위해 침대 곁에 두고 잤다는 식물이 바로 요녀석이랍니다. 벌레도 잡아주고, 키우기도 쉽고, 예쁘기까지 해, 두루두루 사랑받는 성격 좋~은 식물입니다.

물주기 건조에 강해서 겉흙이 말랐을 때 뿌리만 젖을 정도로 아주 조금 주거나,

화분의 흙이 모두 말랐을 때 흠뻑 주세요.

햇빛 햇빛을 아주 좋아해요. 집 안의 가장 밝은 곳에 두세요.

번식 포기 나누기를 하거나 건강한 잎을 떼어 흙 위에 두면 새잎이 나온답니다.

관리 비료 없이 물과 햇빛만으로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비교적 강한 편으로

영상 5도 정도면 거뜬하게 월동합니다.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플랜츠 어스 Plant’s Earth’ 흙으로 되돌아가는 화분

만든 사람: 권민주 26세. 디자이너

이름은?

Plant’s Earth. 식물의 지구라는 뜻이다. 화초는 자라면서 여러 번 분갈이를 거치고 나중에는 땅에 심겨지게 된다. 처음 함께한 화분의 흙이 땅까지 함께 간다는 의미에서 ‘식물의 지구’라고 지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부모님이 화원을 운영하셔서 어릴 때부터 식물에 관심이 많았다. 분갈이 때마다 몸살을 앓는 식물을 위한 디자인을 생각하다가 친환경적이면서도 식물이 죽을 때까지 처음의 흙과 함께할 수 있는 화분을 만들게 되었다. 버려지는 플라스틱 화분이 없으니 환경에도 좋고, 식물의 뿌리가 자라 화분이 갈라질 때쯤, 더 큰 흙 화분에 넣어주기만 하면 되니 화초를 키우는 사람에게도 편리한 것 같다.

중점을 둔 부분은?

화학 본드를 사용한 ‘무늬만 흙 화분’을 만들 수는 없어서 대체할 접착제를 찾다가 밀가루 풀을 추천받았다. 직접 풀을 쑤어 반죽해 보니 접착이 잘되었다.

주변의 반응은?

3년 전쯤 이 아이디어가 떠올라 2~3개월 시행착오 끝에 완성했다. 2008년 3월 일본에서 전시를 하게 되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2009년에는 서울에서 전시와 함께 판매도 했다. 지금은 물건이 모두 동이 난 상태이지만 관심 있는 분들은 집에서 간단히 만들어볼 수 있다.

만드는 방법은?

배양토에 직접 쑨 밀가루 풀을 적절한 비율로 섞어 되직한 수제비 반죽처럼 만든 다음, 화분 틀에 안쪽부터 붙여 넣어 모양을 만든다. 틀을 떼어내고 모양을 잡아준 다음 바람이 잘 통하는 그늘에서 3~4주 정도 말리면 완성이다.

아쉬운 점은?

흙 화분의 단점은 물에 약하다는 것이다. 물을 많이 줘야 하거나 아예 물에 담가서 수분을 공급해줘야 하는 식물은 심을 수 없다. 하지만 다육 식물이나, 산세비에리아, 선인장 등 건조하게 관리하는 식물에는 아주 적합하다

카란 조하르 감독의 인도 영화 ‘내 이름은 칸’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할리우드 영화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이라크전’을 다룬 영화, 혹은 그렇지 않은 영화로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상에 더하여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새로운 기준이 하나 더 있었으니, 바로 2001년 9월 11일의 9.11테러다.

그러나 무수히 쏟아졌던 이라크전을 소재로 한 영화들, 혹은 9.11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들 대부분은 철저히 미국인들의 시각에서 그려졌다. 미국인, 특히 참전한 미군들의 정신적 피해나 충격, 그로 인한 사회 부적응 등 그들의 피해만을 부각시킨 것이다. 그런데 여기 그런 할리우드 영화들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낸 영화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내 이름은 칸’이다.

아스퍼거장애를 앓고 있는 영화 속 주인공 ‘리즈완 칸’. 어딘가 어눌해 보이고, 걸음걸이, 말투 등 모든 면에서 정상인들과 차이점을 보이지만, 무엇이든 고장 난 것도 척척 고치고, 뛰어난 숫자 개념과 집중력 등 방대한 지식을 소유한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오로지 이분법이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좋은 행동을 하는 사람과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

칸에게 있어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오로지 그 사람의 행동이다. 종교도 피부색도 언어도 그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런 그가 미국 대통령을 만나야 한다며, 아니 만나겠다며 커다란 배낭 하나를 멘 채, 무작정 ‘워싱턴 D.C’로 향해 간다. 바로 이 영화의 첫 장면이다. 이렇게 시작된 영화는 ‘칸’의 내레이션과 함께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그리고 대통령을 꼭 만나야 한다는 그의 절박한 이유 속에 바로 9.11테러가 있음이 밝혀진다.

칸은 한눈에 반한 여성 ‘만디라’ 그리고 그녀의 아들 ‘사미르’와 알콩달콩 예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이내 산산조각이 난다. 바로 칸이 ‘무슬림’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9.11테러 후 미국에서의 무슬림은 함께 살 수 없는 악의 화신, 분노의 대상, 소외시켜야 할 차별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했다. 그 혼란의 와중에 맞게 되는 사미르의 비통한 죽음. 만디라는 칸을 향해 울부짖는다.

“그 아이는 성이 칸이라서 죽었어. 내가 당신과 결혼하지만 않았다면 죽지 않았을 텐데. 가서 미국 대통령에게 말해! 우리 아이는 테러리스트가 아니라고!”

“My name is Khan. I’m not a Terrorist!”

칸은 오직 이 한마디를 미대통령에게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것이 사랑하는 아내를, 그리고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아들을 위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이 영화가 많은 부분에서 감동을 주는 이유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IQ 168의 아스퍼거증후군을 가진 한 남자가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벌이는 고군분투에 빠져들고, 이윽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를 때쯤 우리는 우리의 의식 안에서 어떤 작은 변화가 일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편견을 깨뜨리는 의식의 변화! 한쪽 방향에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입장까지도 바라볼 줄 아는 넓은 의식으로의 전환이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판단할 때, 보편적, 일반적 기준들을 들이대지 않는가. 보통 흑인들이 그렇다더라, 무슬림들이 그렇지, 동양인들은 다 그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감독 ‘카란 조하르’는 그렇게 세상 사람들이 어떤 판단을 할 때 들이대는 일반화의 오류, 그 편견이 가져오는 참극과 비극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배정희 문화칼럼니스트

배정희님은 1974년생으로 계명대 회계학과를 졸업했으며, 2009년부터는 자신의 블로그에 ‘누비아’라는 이름으로 영화, 드라마, 예능의 리뷰를 쓰고 있습니다.

꽃 꽂아드릴까요?

사진, 글 김선규

“꽃 꽂아드릴까요?”

머리에 노란 꽃을 꽂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립니다. 엄마는 비닐하우스로 일 나가시고 저희들끼리 골목에서 놀던 아이들입니다. 담벼락 아래에 환하게 피어 있는 민들레처럼, 누가 돌봐주지 않아도 아이들은 씩씩하게 뛰어놀며 영글어갑니다.

경북 성주. 2007년 4월

“영감, 나 예뻐요?”

양원역 철길을 따라 걷다 보니 할머니 한 분이 민들레를 캐고 계십니다. 속병 걸린 할아버지 약해주려고 캐신답니다. 할머니가 노란 민들레꽃을 머리에 꽂으며 할아버지께 농담을 건네십니다. “영감, 나 예뻐요?”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피식 웃고 맙니다. 민들레 뿌리를 다듬으며 할머니는 민들레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민들레가 참 질겨요. 밟아도 살고, 호미로 캐고 나면 또 살아 나오고.” “그래 약이라 안하나.” 무뚝뚝하지만 할아버지 대답 속엔 정이 듬뿍 배어 있습니다.

강원도 양원역. 2007년 4월

사랑은 깊어만 가고…

마을 최고령이신 전우석(93) 어르신이 볕이 잘 드는 마루에서  윤순분(79) 할머니가 들어준 거울을 보며 흡족한 미소를 짓습니다. 할아버지께 할머니는 시집왔을 때 어떠셨냐고 여쭙자, “어떤 분이 마누라 식구 잘 데리고 다니라고 그랬어. 어디로 도망갈지도 모른다고…. 정말이야. 정말 예뻤다니까… 얼굴에 살이 뽀얗게 된 것이 아주 예뻤어요.” 할머니도 좋아라 하시고, 할아버지도 더욱 활짝 웃으시네요. 세월의 깊이만큼이나 노부부의 사랑도 깊어만 갑니다.

전북 무주군 설천면 불대마을. 2009년 2월

“우리도 찍어보세요~^^”

섬마을 바다 끝자락에서 작은 분교를 만났습니다. 전교생이 8명뿐인 목포 유달초등학교 율도 분교장입니다. 조용한 운동장에 피아노 반주 소리와 순박한 아이들 노랫소리가 들려옵니다. 3학년 반에서 들려온 것입니다. 학생은 단 두 명. 선생님이 반주를 하고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고 조그만 걸상에 앉아 보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추억에 젖는 순간, 낯선 사람 구경 나온 사내 녀석들이 창밖에서 들여다보며 시끌시끌합니다. 멋지게 웃어주겠으니, 우리도 한번 찍어보라는 거지요.

전남 신안군 지도읍 태천리 율도. 2007년 3월

그 순수 자체로 빛나는 동물, 그리고 아이들

자연 그대로의 삶, 그들이 좋다

나는 동물들이 좋다. 그들의 가식 없는 순수가 좋다. 그들은 내 여행의 오아시스이다. 그들은 기꺼이 내게 다가와 친구가 되어주었다. 내가 외로울 때는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내가 힘들어할 때는 나의 무거운 짐을 들어주고, 내가 배고파 할 때는 기꺼이 그들의 젖을 나누어주며 우리는 설산을 넘고 큰 강을 건너고 사막을 지났다. 난 그 동물들의 단순함이 좋다. 우리 인간들처럼 그렇게 복잡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그들의 삶이 좋다.


파키스탄 와칸. 2007년

유목민 소녀가 새끼 양을 포근히 안고 있다. 어린 양을 보살펴주는 소녀의 사랑이 가득하다.

인도 카슈미르. 2001년

이 지역의 소녀들은 학교도 다니면서 동생도 돌보고 아기 당나귀도 돌봐야 한다. 재갈을 물린 어린 당나귀가 안쓰러웠는지 소녀가 펜넬 꽃을 꽂아주었다.

인도 수루벨리. 2001년

양 치는 소년들과 함께 다니다가 우연히 포착한 순간이다. 염소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들꽃 향기를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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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카슈미르. 2001년

‘구자르족’ 유목민은 물소의 먹이를 찾아 이동한다. 원래는 인도 평원에서 살았는데 언제부터인가 히말라야 위쪽으로 올라와 생활하고 있으며, 그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고 한다. 유목민 가족들은 물소의 젖을 짜고 치즈를 만들면서 물소와 함께 생활한다.

인도 바라나시. 2003년

인도에는 주인 없이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개들이 많다. 소년을 찍으려는데 물끄러미 개가 쳐다보고 있어서 같이 찍게 되었다. 소년은 사랑스럽게 개를 안았고, 그 마음에 보답하듯 절묘한 순간에 개가 윙크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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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라자스탄. 2007년

사막 지방에서 만난 양 치러 나온 소년들과 개. 애들보다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던 개는 마치 아이들의 큰형님 같았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혀를 쏙 내밀며 익살맞은 표정을 짓는 것이, 아이들에게 사진 찍을 땐 이렇게 포즈를 취하라고 알려주는 듯해 재미있었다.

사진가 이종선님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대학과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했습니다. 인도, 네팔, 몽골 지역 등을 여행하며 사람과 동물의 삶과 그 주변의 모습을 친근하게 담아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이종선의 사진전 <너는 나에게로 와서>가 5월 15일까지 갤러리 류가헌(02-720-2010)에서, <우연한 만남> 사진전이 5월 27일까지 인도문화원(02-792-4258)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둥지 세탁소

맑은 날에는 걸어서 출근한다. 도시의 길은 아침과 낮과 저녁의 모습이 판이하게 다르다.

가로수 속 새소리가 선명한 아침 거리는 도로 저 먼 곳까지 시원하게 열려 있어서, 무심결에 스쳐간 사물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사거리 모퉁이에 국수집이 새로 생겼고, 동네에 하나뿐인 줄 알고 있던 약국이 하나 더 있었고, 시내버스 정류장 옆에 하늘색 공중전화 박스가 그대로 있음을 알게 해준다.

이 도시에 이사 오고 얼마 안 되어 작은 일상의 기쁨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아침 출근길에 만나는 작은 세탁소이다. 여느 세탁소와 다름없이 실내 가득 꼬리표를 붙인 옷가지가 주렁주렁 걸려 있고, 긴 줄로 이어진 스팀다리미가 칙칙거리고, 딱 한 사람만이 서서 일할 수 있는 좁은 공간에 언제나 그가 있었다. 지난겨울 사방이 아직 어슴푸레한 이른 아침. 나는 종종걸음으로 출근하였고 우연히 그 세탁소를 처음 보게 되었다.

길가의 점포들이 모두 잠들어 있는 이른 아침에, 그 세탁소만이 환하게 실내등을 켜고 있었다. 세탁소 안에는 머리가 백발인 초로의 남자 주인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혼자서 다림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다려서 입고 있는 하얀 와이셔츠가 눈에 확 들어왔다. 풀을 먹여 곱게 다려 입은 한산 모시옷처럼 눈부셨다. 남자의 옷차림이 어쩌면 저렇게 단아할까. 성성한 백발과 눈부시도록 밝은 흰 와이셔츠가 묘한 조화를 이루며 세탁소 유리창을 수놓고 있었다.

어떤 이의 소소한 모습이나 행동으로 인해 내가 각별한 느낌을 받는 일은 행운이다. 그에게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서 해왔던 일상이었겠지만, 그날 내가 느낀 감흥은 특별했다. 마치 한가로이 길을 걷다가 소담하게 쌓인 눈을 바라보거나 부드러운 바람결에 전해오는 은은한 연꽃 향을 맡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 나는 자주 걸어서 출근하였고 그 세탁소를 지날 때마다 발걸음이 가벼웠다.

햇빛이 동쪽 산마루에서 나지막한 사선으로 내려와 건물 끄트머리에 앉는 요즘 출근 시간, 나는 이제 세탁소를 지나갈 때 드러내놓고 세탁소 유리창 쪽을 바라본다. 어쩌다가 가끔 창밖을 바라보는 세탁소 주인과 눈길이 마주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 가볍게 목례를 나눈다. 나는 가끔 아내를 대신해서 세탁물을 맡기러 간 터이라, 우리는 정식으로 인사를 나눈 적은 없어도 서로에게 익숙하다.

그 나이쯤 되면 나도 변두리쯤에 세탁소를 차리고 싶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실내등을 환히 켜고 첫 손님에게 다리미의 따스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옷을 건네주고 싶다. 작은 일상에 감사하며 아침을 열고 싶다. 그래서 내심 내가 차릴 세탁소 이름도 지어놓았다.

친절 봉사로 여러분을 모시는 ‘둥지 세탁소’이다. 먼 훗날 혹시 어느 지방을 지나다가 상쾌한 아침 거리에서 반짝이는 ‘둥지 세탁소’라고 쓴 작은 간판을 보거든 꼭 한번 들려주시기 바란다. 따끈한 모닝커피 한잔 대접하겠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죽음의 레이스 250km, ‘사하라 사막’ 앞에서 겸허해지다

송경태 50세.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 관장, 사막 마라톤 그랜드슬래머

지난 2005년, 나는 6박 7일 죽음의 레이스라 불리는 250km 사하라 사막 마라톤에 도전했다. 23개 나라에서 온 107명의 레이서들과 함께였다. 배낭의 무게는 18.5kg. 이 안에는 의류, 침낭, 의약품 외에도 6박 7일 동안 내가 사막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이 들어 있다. 나는 자청해서 나의 레이스 파트너가 되어준 김인백씨의 배낭과 연결된 1m의 생명줄을 잡고 첫발을 내디뎠다.

58℃를 웃도는 살인적인 더위, 딱딱한 지표면을 지나면 모래구릉으로 이어지고, 모래구릉을 넘어서면 곧 가시덤불 길을 지나고, 뾰족한 돌들을 딛고 넘어야 했다.

앞으로 나아간 만큼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발톱이 빠졌다.

상처 입은 발에서 통증이 느껴질 때마다 스물두 살의 불행을 떠올렸다. 굉음, 섬광…. 내게서 빛을 앗아가 버린 그때의 절망에 비하면 지금 내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의 고통 끝에 희망이 있지 않은가.

1982년 7월 20일, 군인이 된 지 한 달째였다. 집중호우로 인해 부대의 심장과 같은 탄약고에 물이 찼고, 여덟 명의 전우들과 함께 빗물에 젖은 탄약들을 정리했다. 탄약들을 조심스레 옮기던 순간, 탄약고 한쪽에서 섬광과 굉음이 동시에 일었다. 찰나의 순간, 뜨겁고 예리한 쇠꼬챙이가 내 두 눈을 찌르는 심한 통증을 느꼈다. 빛과 영원히 결별하는 순간이었다.

여섯 달 동안 치료를 받은 후 제대를 했다. 이웃집 할머니는 혀를 끌끌 차면서 ‘평생을 해주는 밥이나 먹고 방 안에 갇혀 살아야 할 팔자구나’라고 했다. 마음마저 캄캄해졌다. 너무 고통스러워 여러 차례 죽음에 이르는 길을 찾기도 했다. 이러한 내게 정신의 나래를 펼 수 있게 해준 사람이 죽마고우 최낙관이었다.

"넌 지금 알 속에서 부화를 앞둔 새와 같은 존재야. 스스로 껍데기를 깨고 나와야지, 그 누구도 밖에서 껍데기를 깨어주지 않아."

그렇다! 지금 나를 에워싸고 있는 어둠을 그 누구도 걷어줄 수는 없는 일. 어둠을 헤치고 나올 수 있는 힘은 오직 내게만 있는 것이다. 나는 ‘자살’에서 ‘살자’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사하라는 가혹하면서도 잔인한 땅이다. 작렬하는 태양, 일렁이는 염열, 숨 막히게 하는 복사열. 해가 뜨면 금세 더워졌다가 해가 지면 금세 기온이 뚝 떨어진다. 모래폭풍의 공격이 시작될 때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일정한 방향도 없이 휘몰아치는 기류를 따라 집요하면서도 잔인하게 공격을 계속했다. 입안에서 모래가 서걱거렸다. 옷 사이로 침투해 들어온 모래가 땀과 엉켜 살갗을 아프게 갉아대었다. 더욱 고통스러운 것은 질식할 것만 같은 호흡 장애였다. 눈, 코, 입 어디 할 것 없이 모래 입자들이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왔다.

모래 산을 넘어야 할 때는 과연 내가 이 모래 산을 넘을 수가 있을까 하는 걱정이 발목을 잡기도 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면 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실명 이후 가장 힘들었던 분기점이 볼 수 없는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걸 현실로 받아들이고 나서부터 마음의 눈이 조금씩 뜨이기 시작했다. 내가 서 있는 곳의 풍경을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터득한 게 있다면 보이지 않는 저 너머에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점이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암흑이 처음에는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지만, 어느 순간 그 암흑이 한계가 없는 무한으로 느껴졌다.

그 이후 나는 도전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5km 단축 마라톤 코스를 완주했다. 그러자 10km, 20km도 달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 자신감으로 석 달에 걸쳐 미 대륙 횡단을 했고,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을 했다. 캐나다의 로키산맥 스쿼미시 치프봉 거벽 등반, 목포에서 임진각까지 518km 국토 도보 종단도 했다. 점차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사하라 레이스에 참가하겠다고 했을 때 열이면 열 사람 모두 반대를 했다. 내가 앞을 볼 수 없다는 그 사실 하나가 반대를 하는 사람들의 보편의 잣대이자 기준이었다. 그러나 보편의 잣대나 기준에 맞추어서 산다면 그 보편이라는 안이함 너머에 있는, 새롭고 값진 삶의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무미건조한 삶에 불과할 것이다.

물론 다른 레이서들에 비하면 불리한 것이 많다. 다른 사람이 세 발걸음을 뗄 때 나는 고작 한 걸음을 뗄 수 있었고 다른 사람이 발바닥의 통증을 줄이기 위해 평지를 골라 발을 디딜 때 나는 뾰족한 돌부리도 밟아야 했다. 다른 사람들이 스틱을 짚어서 체력 소모를 줄이며 레이스를 할 때 나는 발 앞의 장애물을 확인하기에 급급해야만 했다. 하지만 사하라의 지표면에 널려 있는 돌들을 밟을 때마다 점자들을 생각했다. 점자를 해독하기 위해 손가락 끝에 온 신경을 모아서 하나하나 짚으며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깨알 같은 점자와 사하라의 돌은 내게 똑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점자 하나, 돌 하나가 내게 준 고통의 의미는 같은 것이었다. 점자 하나하나가 머릿속에 입력되어 마침내 마음의 눈을 뜨고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듯이 사하라의 돌들을 밟고 나면 또 다른 세계를 볼 것이다.

사막을 꼭 달려야 할 절대적인 이유는 없다. 하지만 사막을 달리며 나 자신에 대해 묻는 것이다. 자연이 내게 주는 시련을 이겨낼 수 있느냐고 나에게 묻는 것이다.

사막의 모든 게 장애인인 나에게 장애였다. 사막뿐이겠는가. 장애라고 생각하면 이 세상에 장애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을. 체력과 정신의 최대치를 발휘하며 달리고 있었지만, 결국 레이스를 중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힘겨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고통의 고비를 한 번씩 넘기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몸이 가볍고 정신이 명료해졌다. 극한의 사막의 상황이 내 몸을 정화시키는 것 같았다.

나는 엿새 동안 사막의 힘을 온몸으로 느꼈다. 사막을 달리겠다고 온 자신감이 오만이었다는 걸 깨닫고 나자 한없이 겸허해질 수밖에 없었다. 겸허해지지 않고는 단 한 시간도 사막을 달릴 수가 없었다. 겸허에서 우러나온 힘은 자연의 여건에 적응하는 물과 같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명 이후 내가 살아온 길도 물의 흐름 같은 삶이었다. 내 몸의 장애는 물론 한 걸음 움직이는 데도 장애물이 있었다. 장애물에 부딪칠 때마다 나는 돌고 또 돌아야 했다. 그것이 바로 겸허의 힘이었다. 생명의 본질은 물처럼 순리대로 사는 것. 사막은 내게 겸허의 소중함을 새롭게 일깨워주었다. 내가 빛을 잃은 이후 더 밝은 빛을 찾았다는 걸 사막의 신비와 경이로움이 일깨워주었다.

"송경태, 당신은 위대한 레이서다"라는 함성과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렸다.

사하라 사막 250km의 레이스가 끝났다.

송경태님은 1961년생으로 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 관장, 시인이며 수필가입니다. 1982년 군 복무 중 수류탄 폭발 사고로 두 눈을 잃었지만, 불굴의 도전 정신으로 사하라 사막 마라톤 250km를 완주하였으며, 고비 사막과 남극 나미브 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마라톤도 완주함으로써 장애인 세계 최초 4대 극한 사막 마라톤 그랜드슬램을 달성합니다. 전북 최초로 시각장애인을 위한 도서관 설립과 신문을 발행하였으며, 저서로 <삼 일만 눈을 뜰 수 있다면> <희망은 빛보다 눈부시다> <신의 숨결 사하라> 등이 있습니다. 사진 제공_ <신의 숨결 사하라>(공간루 발행)

재능기부 모임 ‘레몬트리 공작단’ 결성한 가수, 박혜경

레몬 향처럼 싱그러운 목소리가 매력적인 17년 차 중견 가수 박혜경.
7개의 정규 앨범과 27편의 CF 배경음악으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목소리인 그녀가
요즘 음반 활동 외에 관심을 기울이는 분야가 있다.
바로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는 재능기부 봉사다.
그녀가 트위터를 통해 결성한 ‘레몬트리 공작단’에는
그녀의 생각에 공감하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단다.
레몬처럼 상큼하고, 동화처럼 맑은 세상을 꿈꾼다는
가수 박혜경을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지난 4월 말 화요일, 강남의 한 카페로 레몬트리 공작단 회원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레몬트리 공작단’은 가수 박혜경씨가 지난 1월 트위터(twitter)에 올린 글에 공감한 사람들의 봉사 활동 모임으로, 그녀의 히트곡 ‘레몬트리’에서 이름을 따왔다.

‘더 새롭게 더 예쁘게 온 세상을 상큼하게 할 거야~♪
가슴에 가득히 내 꿈에 숨겨온 널 위해 가꿔온 노란 빛깔 레몬 트리 Lemon Tree~♬’

현재까지 모인 회원들은 전국에 7~8백여 명, 그들은 레몬트리 노래 가사처럼 예쁘고 밝은 세상을 꿈꾼다. 이날 모임은 오는 5월 아이들과 함께하는 걷기 행사 준비를 위한 자리로, 대학생부터 주부, 직장인까지 한자리에 모인 30여 명의 회원들은 마치 오랫동안 만나온 친구처럼 편안해 보였다.
그 중심에서 이들의 마음과 재능을 하나로 모으고 있는 가수 박혜경씨는 “자주 보지 않아도 끈끈하게 느껴진다”면서 레몬트리 공작단을 ‘뜻을 함께하는 친구’라고 표현한다. 어린이재단을 후원하는 일부터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가족들의 심리 치유 상담과 갤러리 콘서트까지 다양한 영역을 넘나드는 그녀의 재능기부 활동은 큰 주목을 받았고, 아이들의 꿈과 희망이 되어주고 있었다.

어떤 계기로 레몬트리 공작단을 결성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해부터 일주일에 한 번은 다른 사람을 위해 시간을 보내보자고 마음먹었어요. 결혼식에서 축가를 부르거나 독거노인분들도 찾아뵙고, 미혼모의 아이들도 돌봐주고…. 그러면서 그날 있었던 소감이나 이야기들을 트위터에 올렸는데, 함께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는 걸 알았고, 그걸 연결해주고 싶었어요. 시작은 혼자였지만 지금은 우리 레몬트리 공작단이 파트별로 나누어서 잘하고 있어요 제가 일을 저질러 놓으면 그분들이 다 수습하시고 그러는 거죠.(웃음)

여러 기부 방법 중에도 특히 재능기부를 가장 좋아한다고 하셨는데요?

재능기부가 좋은 건 섞인다는 거예요.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자꾸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서로 똑같아져요. 재능기부란 특별한 게 아니에요. 같이 밥 먹고, 이야기 나누고, 손잡아주는 거거든요. 알면서도 바빠서 못 하고 마음은 있어도 어색해서 잘 못 하고 그러던 것들이 생활이 되면서 자연스러워지는 거죠.

최근에 쌍용자동차 파업 후유증으로 인해 갑자기 부모 잃은 남매들을 도와주셨지요?

특별한 뭔가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사연을 접하고 걱정이 돼서 연락해 보았는데, 아이들이 응해줘서 그냥 친구 만나듯이 만나서 밥도 먹고 같이 미용실 가서 머리도 하고, 그러면서 놀았어요. 사실 쌍용자동차 가족 분들은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힘이 된다고 좋아하세요. 2009년 77일간의 전쟁 같은 파업과 대규모 정리 해고로 평범한 일상을 잃어 버리고, 깊은 절망 속에서 가족의 고통, 동료들의 죽음마저 지켜봐야 했던 분들이잖아요. 큰 상실감 때문인지 우는 것조차 힘들고,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거에 익숙하지 않다고 하세요. 요즘엔 이분들 심리 치유 상담을 8주간 진행하는데 그분들이 치유받는 동안 아이들을 돌봐주고 있어요. 다행히 조금씩 자기 아픈 것도 말하고, 감정을 표현할 줄 알아지시는 것 같아요. 서울에서 평택까지 매주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도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선생님을 비롯해서, 그 주에 시간이 되신 분들 20~30명이 늘 함께해주고 계세요.

박혜경씨에게도 어려울 때 힘이 되어준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럼요. 그동안 나를 지탱해준 건 가족이었어요. 내 인생을 잘 꾸려가야 한다는 책임감도 도움이 되었고요. 최근에 읽은 책에 나온 내용인데요, 아프리카 사람들이 강을 건널 때 무거운 짐을 들고 가잖아요. 강 건너는 것도 힘든데 무거운 짐을 들고 건너야 하니까 더 힘이 들 것 같지만 오히려 강 물살에 흔들리지 않고 똑바로 건널 수 있다고 해요. 그것처럼 때로는 나에게 주어진 책임감들이 날 지탱해주었던 것 같아요. 물살에 흔들리지 않게. 뿐만 아니라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마주친 사람부터 친구들까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손을 잡아준 많은 분들이 있었어요. 지금 레몬트리 공작단 분들도 그렇고요.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혹은 갑작스런 사고로 인해 자기의 꿈을 줄이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외로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고 한다.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신해 엄마를 돕고, 동생들의 학비를 대면서 지내야 했던 시간들. 그럼에도 어려운 시절을 잘 지낼 수 있었던 건 주변에 좋은 분들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시절, 혼자 서울로 올라와 지내고 있을 때 격려해주셨던 자취방 주인아주머니부터, 독서실에서 만난 선배, 선생님, 친구들에 이르기까지….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도 어려움에 처한 아이들에게 언니, 누나가 되어주고 싶었다 한다. 가다가 꺾일 수도 있고, 다칠 수도 있고, 시들해질 수 있던 아이들이 제대로 피어나도록 햇빛과 물을 주는 일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라는 것. 다행히도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자고 손을 내밀어 주었다.

“혜경씨는 마음만 있고 선뜻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나도 이웃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는 것 같아요. 쉽게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을 열어준 거지요. 저 역시 트위터를 통해 가입해 하루 정도만 갔다 오지 뭐, 하고 시작했다가 어느새 또 가게 되고, 또 가게 되더라고요. 봉사가 특별한 일도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고요. 저 같은 경우는 뉴스도 잘 안 봤거든요. 그러다가 아이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의 아픔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문제란 생각이 들었어요.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세상을 보는 시야 자체가 넓어진 거 같아요.” 레몬트리 공작단 회원 엄태기씨의 말이다.

자신이 타고 다니던 차까지 팔면서 재능기부 활동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박혜경씨가 하고자 하는 일의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고 싶다는 게 제일 커요.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 꿈을 포기하거나 방향을 아예 바꾸게 되잖아요. 그게 안타까워요. 그 꿈을 지켜주고 싶어요. 무언가 거창한 게 아니라, 그냥 관심 있게 바라봐주고 호응해주고 격려해주고 싶은 거죠.

박혜경씨의 꿈은 원래 가수였나요?

네. 6살 때쯤인가부터 꿈이 그냥 가수였어요. 어릴 때 교회에서 합창을 하면 선생님들이 제 목소리가 특이하다고 하셨어요. 합창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거죠. 그래도 노래를 부를 때 제일 신이 났어요. 연예인이 되었으면 하는 막연한 꿈도 있었어요. 노래를 잘해서 스타가 되면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해지고, 삶도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했죠.

가수라는 꿈을 이루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궁금합니다.

중학교 때 시골에서 처음 와서는 가수가 되는 길을 잘 모르니까 대학로에서 뮤지컬 연극이나 아동극 무대에 많이 올랐어요. 대학에 들어간 것도 강변가요제에 나가기 위해서였고…. 각종 팝 경연 대회 등 무대에 많이 서려고 노력했어요. 덕분에 상도 많이 받았고요. 데뷔한 후에는 오로지 일만 생각하면서 살아왔던 것 같아요. 잘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이게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좀 더 아름답고 의미 있게 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결론이 나눔과 봉사로 나던데요.(웃음)

팬들은 가수로서의 박혜경씨도 보고 싶어 합니다.
요즘 인기인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주면 좋겠다는 의견들이 많던데요.

아유, 부끄러워라.(웃음) 그 프로가 장단점이 있지만 저는 좋은 쪽으로 생각해요. 노래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잖아요. 옛날 노래도 찾아보게 되고, 노래라는 게 뭔지 생각해 보게 하고….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단지 노래만이 아닌 독특한 프로그램의 방식으로 극적인 스토리를 만들어내려 한다는 거죠. 우린 언제나 똑같이 노래했는데, 마치 지금에서야 가수다운 가수를 보는 것같이 만들잖아요. 하지만 노래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자체만으로 좋은 거 같아요.

박혜경씨의 노래를 들으면 기분이 맑고 상쾌해집니다.
최근에 발표한 ‘라라, 소년을 만나다’도 그렇고, 한 편의 동화 같기도 하고요.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너무 감사하죠. 동화는 우리를 지탱해주는 작은 힘이라고 생각해요. 그 작은 힘이 무엇을 해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막연히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무엇….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될 수도 있고, 내 양심을 지켜주는 작은 희망일 수도 있고요.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어릴 적의 맑고 순수한 마음이 바로 동심이죠. 그 마음이 있기에 바빠서 표현 못 하거나 잊고 있다가도 기회만 오면 바로 자기 역할을 해내는 것 같아요. ‘남을 도웁시다’ 한마디에 이렇게 모이는 것처럼요.

결국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동심을 깨어나게 하고 모으는 역할을 하시는 거네요?

그런 마음을 깨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시면 너무 좋아요. 어른들은 누구나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피터팬을 동경하잖아요. 저 역시 노래를 하든, 봉사를 통해서든, 희망과 사랑, 행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항상 내가 피터팬이란 생각을 하고 살아요. 모습이 아니라 마음이….(웃음)

“당신의 나라엔 어둠이 내려도 조금도 무섭지 않네요~ 작은 별들 모두 이곳으로 와 우릴 밝혀주죠.
당신의 세상엔 천둥이 쳐도 하나도 겁나지 않네요~ 아름드리 나무 커다란 키로 우릴 감싸주죠~♪” 박혜경의 노래 <동화> 중에서

그녀의 노래 가사가 그녀와 꼭 닮은 듯하다. 마치 동화 속의 요정이 요술 봉을 들고 나타나 사람들의 동심을 일깨워 주듯이, 그녀는 빨간 머리 피터팬처럼 사람들의 동심을 깨울 것이다. 이 세상이,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 마음이 레몬트리처럼 상큼한 향기로 가득해지는 그날까지.

가수 박혜경님은 1974년 전북 진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95년 강변가요제 본상 입상 후 2인조 그룹 ‘더더’를 결성하면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1999년 솔로로 전향, 1집 <+01> 음반을 발표했으며, 그동안 7장의 정규 음반과 디지털 싱글 <Hello 허니> <새 남자친구> 등을 냈으며, 최근 디지털 싱글 <라라, 소년을 만나다>를 발표했습니다. 현재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재능기부 모임 ‘레몬트리 공작단’ 활동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간절히 원하는 바로 그것을 찾았을 때, 누구나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기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어떤 것이 사회를 위한 진정한 길일까?

평생의 의문, 그 답을 찾다

최상림 55세. <마음코칭센터> 이사,

전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대학 시절 야학 교사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학생들은 늦은 밤, 하루 12시간 일하고 온 피곤한 몸으로도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공부했다.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가난해서 공부 못 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내 한 몸 바쳐보자 결심했다. 졸업 후 교사 발령이 났지만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노동자 스스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신념 하나로 20년 이상 한길을 걸어왔다.

그러다 40대에 접어들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원하는 사회 변화가 금방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사회는 변화되지 않았다. 더더구나 내 마음이 문제였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겠다 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에는 정의가 없었다. 같은 뜻을 실현하려고 모인 사람들 속에서도 늘 남과 비교했고, 내 뜻대로 맞춰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사람에 대한 편견,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무리 사회가 변한다 해도 내 마음이 그대로라면? ‘너가 잘못했어’ 하며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자꾸 나의 내면으로 맞추어졌다. 어떤 것이 사회를 위한 진정한 진리일까, 그걸 찾고 싶었다.

명상 서적을 읽고 관련 강의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마음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다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무척 어려워 가르침의 본질에 다가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스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 질문을 했다. 스님께서는 "동양의 가르침은 책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으면 시간을 내어 그런 프로그램을 직접 하십시오. 직접 하면서 본인이 느낀 깨달음의 내용을 가지고 삶을 사십시오"라는 답을 해주었다.

과연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마음수련을 택했다.

45년의 살아온 내 인생이 비디오 한 편처럼 펼쳐졌다. 나는 내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보고 버리고, 보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내 무의식의 뿌리를 보게 됐다. 사회 변화를 위해, 여성 노조원들을 위해 일해 왔다고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해 왔던 내 모습. 내 일생 전체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잘것없는 지식과 알음알이로 세상을 다 아는 양 판단하고 주장하며 살아왔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버리고 또 버렸다. 그렇게 버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수련실에서 나와 바깥 풍경을 보는데, 일체 사물의 구분이 없어져 버렸다. 마당에 있는 차도, 소나무도, 하늘도, 바위도 그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로 다가왔다. ‘너와 나의 경계는 내 마음이 만든 거였구나, 그 마음이 없으니 일체가 하나인 본래이구나.’

세상은 하나의 본성에서 나와 완전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세상에 내가 이미 살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모든 관습과 규율을 벗어나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진정한 혁명은 내 자신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거로구나! 순간, 나는 내가 평생 동안 갈구했던, 정의롭고, 평등하고, 따듯한 세상이 되는 방법을 찾았음을 알았다. 각자가 내 마음부터 버리면 원래 세상은 하나였음을 알게 되고, 자연히 남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살필 줄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박정민 작. <언덕에서>

Oil on Canvas. 32×36.5cm. 2008.

친구야,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장현동 45세. 충청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

충남 예산군 신암면

"김상원~! 정말 오랜만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니?"

김상원! 17년간을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등학교 친구다. 간절한 그리움이 통했던 것일까. 스무 살에 헤어졌던 그 친구를 삼십 대 중반을 넘기고 다시 만났으니 말이다.

1982년, 상원이와 나는 대구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경북 예천에서 친구는 경북 군위에서 대구로 유학을 온 것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상원이는 항상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말수도 별로 없었던 그에게는 강인함과 순수한 인간미 같은 게 있었다. 자취방이 없어서 독서실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살면서도 언제나 의연했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어떤 지원 없이도 공부도 굉장히 잘했다. 그런 친구가 대단해 보였다.

고3 때는 같은 반, 내 짝이 되었다. 같은 시골 출신이어서 그런지 상원이와는 처음부터 통하는 면이 있었다. 도시락도 나눠 먹고, 공부도 함께 했다. 당시 나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난 상원이에게 아예 나랑 같이 자취를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지내는 동안은 힘든 고3 생활 속에도 의지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박정민 작. <사랑의 노래>

Oil on canvas. 72×60cm. 2009.

그러던 중, 대입 시험을 앞두고 시골에 계신 어머니께서 막내아들을 뒷바라지한다며 대구로 오셨다. 한동안은 잘 지내시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두 명의 수험생이 한솥밥을 먹고 시험을 치면 한 명은 대학에 떨어진다는 속설을 털어 놓으시면서 걱정을 하셨다. 이 말을 듣게 된 상원이는 그 다음 날 자취방을 떠났고 나는 죄책감에 친구를 찾아 나섰다.

참 추운 겨울날이었다. 한참을 찾다가, 해가 지고 어두워질 무렵 학교 교실에서 친구를 발견했다. 돌아가자는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나의 간곡한 설득에 친구는 다시 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속설과는 달리 우린 둘 다 모두 대학에 합격했다. 친구는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영광을 안기까지 했다. 친구는 서울에서, 나는 대전에서 대학교 1학년을 보냈다. 그리고 여름 방학 때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친구는 과가 맞지 않아, 공과대학으로 다시 지원해서 가야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해, 재수를 준비하는 그를 대구의 어느 독서실 앞에서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이후부터 소식이 끊어진 채로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대학 생활, 군대, 제대, 복학, 취직, 결혼…. 바쁜 생활 중에도 문득 친구 생각이 날 때면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우리가 만난 것은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때였다. 우연히 경북 군위가 고향인 사람을 만나, 그의 고향집 전화번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어머니를 통해 그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를 만난 날, 난 잃어버린 기억을 찾은 것 같아 정말 기뻤다. 1박 2일을 함께 지냈다. 친구는 대학 자퇴 후, 돈을 벌기 위해 원양어선도 타고, 죽을 고비도 넘기는 등 이런저런 인생의 고비를 거쳐 왔다고 했다. 가정환경이 워낙 어려워서 혼자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다가 좌절도 했었다. 그러나 그 고비를 거쳐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요, 안정된 직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평탄하지는 않은 삶을 살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그 모습과 행동 그리고 마음 씀씀이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몇 번을 만났다. 그리고 만나지 않을 때도 종종 그 친구를 떠올리면 참 좋다.

무엇이 그토록 그 친구를 찾아 헤매게 했던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나의 다른 반쪽을 그 친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그 순수함을 그토록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원아.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께 서로의 꿈을 향해 힘차게 살아가자. 피보다 진한 우정을 간직하자.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라.

인생 마지막 길에서 찾은 희망

추수연 83세. 서울시 방화11종합사회복지관 일본어 강사

비가 내립니다. 소리 없이 촉촉이 내 가슴에 비가 내립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구슬비는 내 가슴에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잃어버린 60년. 전란의 6·25사변. 그날도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요. 북한 인민군의 총소리가 내 인생의 영원한 한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꿈 많은 여대생으로 상경하여 1950년 5월에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교수를 꿈꾸며 석사 과정을 밟으며 명륜동 단칸 하숙집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6월 25일 새벽 총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습니다. 총대는 남자가 쥐고 전란의 바람은 여자가 맞고. 내 청춘도 움트지도 못하고 포(砲) 소리에 묻혀 버렸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며 교수의 꿈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국군이던 윤덕봉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종전 3개월 전에 부상을 입고 이후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었기에 반세기를 함께 살았습니다.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고에서 교편 생활도 하고, 기자 생활도 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내 얼굴에는 주름이 가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남편도 3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작년 12월부터는 우리 동네의 복지관에서 정가든(‘정이 가는 든든한 우리 마을’ 활동) 회원을 대상으로 매주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민들에게 일어를 가르칠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지원을 했지요. 왜정시대 때 일본어로 교육을 받다 보니 일어에는 익숙했으니까요. 어린애를 데려와서 배우는 주부도 있고, 세상 물정에 싫증이 난 사람도 있고, 환자도 있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어도 일어지만 그네들의 인생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박정민 작. <만남>

Oil on Canvas. 145×112.6cm. 2005.

"인생을 즐겨라, 팔십 고개 지나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 체면 저 체면 잘난 척 못난 척, 다 필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된다. 울지 마라. 인생은 잠깐이다. 어느 시점에는 나를 버리고 간다. 내 식구를 사랑하고 내 주위를 사랑하고 인생을 즐겨라. 인생은 결국 간다. 살 사이에 즐겁게 살자."

그렇게 이야기하며 내 살아온 경험도 말해줍니다. 팔십 세가 넘은 사람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가르치니 희망을 가지게 되나 봅니다. 때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내 인생이 멋지지 않았지만 남의 인생이라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네들의 슬픔에 위안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기초를 가르치지만 싫증이 안 나게끔 간단한 문장도 가르쳐줍니다. 일본 사람하고 단 한마디라도 대화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배울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하는 게 줄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 마지막 길에서 내가 찾은 희망입니다.

한국의 보배 신세대들이여, 즐겁게 사십시오. 나와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이 나라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시옵소서. 인생은 순간입니다.

간절히 원하는 바로 그것을 찾았을 때, 누구나 그 순간을 경험할 수 있기에, 인생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내 삶의 방향 찾게 해준 바다의 메시지

이동호 33세. 직장인.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7가

24살, 이제 몇 개월 후면 제대를 앞두고 휴가를 나왔다. 강렬한 햇살이 따가울 정도인 8월 초순, 친구들과 함께 동해안 경포대 해수욕장에 놀러온 나는 시원한 파도에 몸을 던졌다. 언뜻 오늘은 바람이 거세니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안내가 들렸으나 우리 중 누구도 그 말에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더 들어갔다. 그런데 순간 몸이 바닷속으로 쑤욱 들어갔다. 얼굴마저 들어가자, 아차 싶었다. 땅에 발이 닿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땅을 박차면서 육지를 향해 있는 힘껏 헤엄쳤다. 하지만  밀려갔다 밀려오는 강한 파도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서 헤엄을 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주변에 1m 거리를 두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다급하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외쳤다. 하지만 손을 뻗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아, 아직 죽고 싶진 않은데, 이렇게 죽는 건가? 크윽. 입과 코, 귀로 바닷물이 계속 들어왔고, 힘이 자꾸만 빠져나갔다.

이렇게 죽는 거구나. 살기 위한 버둥거림을 멈추고 죽음을 수용했다. 그러자 그 순간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산 삶이 영화 필름처럼 순식간에 지나갔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신문팔이, 주유소 아르바이트 등 항상 많은 일을 해야 했다. 그러면서 학원 한번 제대로 못 보내주시는 부모님을 원망했고, 나는 왜 이런 조건이냐며 모든 것에 불평만 하고 있었다. 내가 돈을 벌어야 가정을 꾸려 나갈 수 있어, 군대도 산업체를 선택했다. 하지만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매일 술을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했다.

24년간의 짧은 삶…. 항상 나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항상 내 위주로 판단하고, 항상 나만을 위해 살아온 세월이었다. 단 한 번도 남을 위해 살아본 적도 없었고, 부모님께 효도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렇게 죽을 것을, 왜 그렇게밖에 못 살았을까….

이제 정말 죽는구나 싶을 때였다.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옆에 있던 친구가 장난이 아님을 알고 손을 뻗어준 것이다. 하지만 강한 파도가 덮치는 바람에 친구조차 함께 위험에 빠져 버렸다. 다행히 구조 대원이 나타났고, 우리는 살았다.

박정민 작. <여름찬가>

Oil on Canvas. 92×72cm. 2009.

온몸에 힘이 빠진 상태라 친구와 난 바닷가 모래사장에 누워서 한참을 있었다.

왠지 다시 태어난 기분이었다. 물속에 빠졌을 때 그 순간 예전의 나는 죽었다고 생각하니, 앞으로는 다르게 살아보고 싶었다. 이제 남을 위해 좋은 일도 하면서.

일상으로 돌아온 후, 우리 동네 복지시설을 찾았다. 부모가 없거나 부모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된 아동들을 자립할 때까지 보호, 양육하는 아동복지시설이었다. 적은 돈이지만 나도 내가 번 돈의 일부를 매달 후원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이 지나자 후원에 감사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왔고, 분기별로 한 번씩 어린이들이 직접 그린 그림도 받아보니, 참 기분이 좋았다. 그때 남을 위해 사는 삶이 행복하다는 걸 처음 배운 것 같다.

복학 후에는 전공도 바꾸었다. 취직을 고려해서 기계산업과를 선택했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은 경영이었기 때문이다. 내 삶을 더 행복하게 만들어가고 싶다. 지금도 종종 삶에 불만이 생기려고 할 때면, 그 순간을 떠올려본다. 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그 순간을.

잃어버려도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찾아줄게

박영자 48세. KT CS 상담사.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

차를 어디에 주차해 놨더라? 그걸 어디에 뒀더라?

언제부터인지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것이 내 일상이 되어 버렸다. 30대까지만 해도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닐 정도의 기억력을 자랑했었다. 그런데 40대에 들어서부터 건망증이란 놈(?)이 내 오만함을 경고하듯 찾아들었다. 처음엔 있을 수 있는 일이려니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심각성을 느끼기 시작한 건 그 범위가 넓어지고 있다는 걸 감지하면서였다.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차를 주차해 둔 장소가 떠오르지 않아 삼십여 분을 찾아 헤매던 날 한숨을 쉬며 도로에 주저앉아 버렸다.

결국 남편에게 SOS를 청했다. 남편에게 연락이 되면 절반은 성공이다. 남편은 수사관처럼 내 행선지를 물은 후 추적을 시작한다. 그리고 바람처럼 들려오는 환호성.

"걱정했지? 찾았어!" ‘아니 그럴 리가?’

차가 아파트 주차장이 아닌 도로변에 떠억(?)하니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얼마 후의 일이다. 집 근처 병원에서 진료를 받은 후 운전을 하고 돌아왔다. 차를 주차시키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려는 순간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분명 병원에서 진료비를 지급하고 바로 왔는데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남편에게 구조 요청을 했다.

"신랑! 내 지갑!" "어디에서?" "평화동 00병원." "알았어!"

남편은 숙달된 솜씨로 114에 물어 병원 전화번호를 알아낸 후 잃어버린 물건 찾기에 들어갔다. 그리고 걸려오는 남편의 전화. 딱 6분 만이었다.

"걱정했지? 아까 그 병원에 가봐. 간호사가 보관하고 있대." "와!"

박정민 작. <오후의 풍경>

Oil on Canvas. 53×33.4cm. 2007.

건망증의 우울함으로 빠져들었던 나에게 남편의 "찾았다!" 외침은 희망의 전령이었다. 처음엔 물건을 잃어버려도, 아무렇지 않은 척 혼자 해결을 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게 반복되다 보니 몸도 지치고 기분까지 우울해졌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남편이 보디가드를 자청했다.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을 테니 깜빡하면 무조건 연락하라고.

그 후 몇 년째 반복되는 실수가 있었지만 남편은 짜증 한번 낸 적이 없다. 건망증.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가족들의 이해와 사랑 그리고 진득한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건망증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 어느 날이었다. 한번은 남편이 빨래를 가지런히 개어놓았다. 평소 집안일을 하는 건 ‘남자 망신시키는 일’이라는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었기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멍하니 바라만 보았다.

"당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못난 남편 만나 가정을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살았잖아. 좀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잘해줄게…."

코끝이 찡했다. 22살 때 남편을 만났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았던 서글서글한 눈망울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그리고 결혼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언성을 높인 적이 없었다. 다툼이 생길 때마다 이유 없는 패자의 자리에서 돌부처가 되어주었던 남편. 그동안 남편에게 무한정 받았던 사랑은 앞으로 내가 갚아가야 할 빚이 될 것 같다. "여보! 미안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히말라야가 내게 준 선물

이어진 21세.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도촌동

올해 초 히말라야에 다녀왔다. 스물한 살의 나이, 하고 싶은 일이 있었지만 선뜻 내 자신을 던지지 못해, 하루의 반을 잠으로 때우는 의미 없는 나날을 보내던 때였다. 총 10일간의 일정 중, 6일이 히말라야 트레킹 코스였다. 네팔 포카라에서 중간 거점 격인 울레리를 거쳐, 최종적으로 히말라야 산의 장관을 잘 볼 수 있다는 푼힐 전망대까지 오르는 것이다. 일정 내내 날씨가 좋지 않았다. 거의 마지막 푼힐 전망대로 가기 바로 전 코스인 고라빠니까지 가서도 여전히 날씨는 흐렸다. 대장님은 다음 날 아침 일찍 상황을 봐서 구름이 없어진다면 푼힐로 올라갈 거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날씨 때문에 장관의 경치를 보여주지 못할까 걱정하셨다. 그 걱정은 현실이 되어가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구름은 가시질 않았던 것이다.

마지막 트레킹을 앞두고는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언젠가부터 현재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했다. 지나간 과거에 대한 추억과 후회 때문에,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현재로부터 눈을 감고 쫓겨나듯 도망쳤었다.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대장님이 일행들과 대화하는 소리에 깼다. 대장님은 "더 자도 돼. 어차피 구름 때문에 보이지도 않아"라고 말했다. 눈을 감으니 어제의 잡념들이 다시 찾아왔다. ‘내가 마음을 무겁게 먹고 있으니, 산도 무거운 구름을 머금고 있구나.’

어쩌면 트레킹 내내의 날씨는 내 마음의 반영이 아니었을까.

초등학교 6학년 때 마술을 시작했다. 운이 좋았는지 마술 대회에서 상도 여러 번 탔다. 그땐 마술이 너무나도 좋았고 평생 마술을 하며 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좋아하던 마술도 도망치듯 그만뒀다. 가끔씩 무대로 올라가기 전의 두근거림과 무대의 불빛, 관객들의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가 그리웠다. 하지만 가장 그리운 것은 그것들을 위해 준비했던 열정과 노력의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았다. 대학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재능을 살려 나의 길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선뜻 세상을 향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상념에 젖어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크게 말했다. "산이 보여요. 다들 빨리 나와 보세요." "어디 어디?" "참말로 산이 보이나?"

얇은 벽 사이로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렸고 곧 분주한 발걸음 소리가 쿵쿵쿵 울렸다. "히말라야의 여신이 자비를 베푸시는구나!" 대장님의 말씀대로 흰 눈으로 뒤덮인 산맥들이 히말라야 여신의 선물로 느껴졌다.

산은 두 시간 남짓 모습을 비추고 다시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나에게 그 두 시간은, 이제 다시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라는, 지금 이 순간 너의 열정을 모두 쏟으라는, 대자연이 주는 용기와 사랑이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세상은 온통 어둠으로 변할 뿐이다. 더 이상 현실에서 도망치지 말자, 제대로 현실을 마주하고 눈을 뜨자, 결심했다.

귀국을 앞두고, 네팔 분들에게 마술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다. 몇몇 일행 앞에서 시작한 것이 순식간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이다. 내 마술 실력은 6년 전에서 멈춰 있었다. 과연 멈춰 있는 건 마술 실력뿐이었을까. 도망치듯 그만둔 이후로 그때만큼의 열정으로 산 적도 없었다.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다. 어느새 공연이 끝났고 박수 소리가 들렸다. 몇 사람들이 악수를 청했다. "놀랍군요. 이렇게 신기한 마술은 처음 봤습니다." 분명 예전에 비하면 아주 작은 무대였지만, 나에게는 가장 큰 무대였다.

나는 히말라야가 내게 준 선물을 가슴에 품고 돌아왔다. 그 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일단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리고 나의 장기를 살려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공모전에 사업 계획안을 제출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더 이상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두렵기도 하다. 분명 좋은 일만큼 안 좋은 일들도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두려운 만큼 기대도 된다. 앞으로 어떤 사람들을 만날까? 어떤 경험을 하게 될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 나는 나아갈 것이다.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 않고. 그것이 내가 히말라야에서 찾은 것이니까.

박정민 작. <만찬>

Acrylic on Acrylic board.

91×72cm.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