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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은 긍정을, 부정은 부정을 부른다 -긍정을 부르는 말 ‘감사합니다’

 ‘말의 힘’에 대한 밥 실험

긍정은 긍정을, 부정은 부정을 부른다

권정은 서울 성수고등학교 교사

지난 5월, 우리 반에서 흥미로운 실험 하나를 했다. 두 개의 유리병을 준비해, 밥 두 숟갈 정도를 담아 밀봉한 후 한 병에는 ‘감사합니다’, 다른 한 병에는 ‘짜증 나’라고 써놓았다. 교실 뒤에 놓고 지나다닐 때마다 ‘감사합니다’ 병에는 “고마워, 사랑해” 등의 긍정적인 말을, ‘짜증 나’ 병에는 “미워, 싫어” 등의 부정적인 말을 하도록 했다.

3주 만에 결과가 확연히 나타났다. ‘감사합니다’ 병에는 아주 예쁜 흰 곰팡이가 피었고, 발효된 향긋한 냄새가 났다. 반면 ‘짜증 나’ 병에는 검푸른 곰팡이가 보기 흉하게 피었다. 개봉을 하니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지독한 냄새가 났다.

그 결과에 나도, 우리 반 아이들도 모두 놀라워했다. 교사로서 최근 오륙 년 사이 아이들의 변화가 정말 급격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무한 경쟁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승자가 되기 위한 아이들의 몸부림은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어깨의 짐이 무겁다 보니 거친 행동들을 하기도 하고 때론 무기력증에 빠져 ‘짜증 나’ ‘귀찮아’ 등의 말을 달고 사는 것 같다. 긍정적인 생각과 언어가 중요하다 강조해도 아이들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백번의 설명보다 직접 확인한 실험 결과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보이지 않지만 부정적인 에너지가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내가 부정적인 마음을 품으면 상대한테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 알게 되었다고도 했다.

아이들이 부정적이거나 험한 말을 할 때, “그렇게 말하다가 네 몸에 검푸른 곰팡이가 피면 어떡하니? 그걸 상상해 봐” 하면 금세 표정이 변하며 긍정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긍정을 부르는 말 ‘감사합니다’

구효식 47세. 울산시 남구 달동

10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주말부부로 지내면서 언제부턴가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더욱이 내가 하는 일은 울산화학단지 내 노후 시설물 해체라는 다소 위험하고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 매일 수십 미터 높이의 공장 지붕 위에서 안전 로프 하나에 몸을 맡긴 채 노후 배관을 교체하는가 하면 낡은 슬레이트 제거 작업을 해왔다. 항상 긴장감 속에 있다 보니 갈수록 신경이 날카로워져갔다. 집에 가면 가족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에 가장으로서의 대우만 받으려고 했다. 내 생각과 맞지 않으면 무조건 ‘잘못됐다’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말만 해왔다.

이런 날들에 힘들어하던 중 아내의 권유로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마음수련은 한마디로 ‘감사함’을 알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항상 모든 면에 부정적이던 내가 ‘감사합니다’의 참뜻을 깨칠 수 있었고, 내 중심적인 사고도 우주처럼 넓은 마음으로 변해간 것이다.

덕분에 예전에는 작업 능력이 떨어지는 직원이 있으면 무턱대고 꾸짖기만 했지만, 요즘은 이렇게 함께해주는 동료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의 마음으로 그 직원이 하는 작업을 대신해 보면서 문제점을 찾아 해결해주는 것을 우선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작업 능률이 떨어지는 데는 다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면, 작업 공간이 협소하다든지 아니면 작업 위치가 불안전한 곳에 있든지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작업자를 꾸짖기에 앞서 작업자를 이해할 수 있는 선배가 된 것이 기뻤다.

이제 가정에서도 ‘당신이 있어 정말 감사합니다’의 마음으로 대한다. 그런 마음가짐은, 나비의 날갯짓이 폭풍을 발생시킬 수 있다는 나비 효과 이론처럼 내 주변을 밝은 에너지로 바꿔줄 것이라 생각한다.

오우, 예스~! 난 이제 마음속까지 긍정적인 사람!

정선아 건국대학교 신문방송학과 4학년

옛날에 내가 가장 잘하던 말 ‘싫어!’

“넌 할 줄 아는 말이 ‘싫다’밖에 없니?”라며 항상 꾸지람만 들었던 아이, “학교 가기 싫어” “공부하기 싫어” “친구랑 노는 것도 싫어” 싫다는 말만 하던 아이가 바로 저였습니다. 항상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무엇을 나에게 제시하든 그 모든 것들이 다 싫었어요.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고 하더라도 완벽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너무나 많았거든요.

그런 마음은 어릴 때 환경의 영향도 있었던 것 같아요. 어릴 적 친구들은 부모님께서 도와주셔서 너무나도 멋지게 방학 숙제를 해오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모님은 독립심과 자립심을 길러주시기 위해 혼자의 힘으로 하라고 하셨어요. 혼자서 과제를 하다 보니 늘 친구들과 비교가 되었고 그게 정말 싫었어요.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도전하기를 두려워하고 망설이기 시작했던 거죠. 친구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너무 어려웠어요.

‘나를 싫어하지는 않을까’ ‘키가 작다고 만만하게 생각할지도 몰라’ ‘나 같은 아이를 누가 좋아하겠어’ 하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왔답니다.

긍정적인 ‘척’이라도 하자!

학교생활을 하게 되면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긍정적으로 바뀌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한 건 항상 부정적인 말만 하는 제게 어머니께서 초등학교 때 해주신 말씀 덕분이었어요. 어머니께서는 “네가 이겨낼 수 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는 만큼의 일이 너에게 생기는 거야”라고 하셨지요. 그 말이 너무나도 마음에 와 닿았어요. 그렇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어요. 대신 저는 항상 긍정적인 아이인 척, 걱정이 없는 아이인 척, 일부러 더 웃으며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는 아이처럼 지내기 시작했죠.

마음에 안 들더라도 나중에 어딘가에는 쓰일 친구겠지 하면서 이 친구 저 친구 가리지 않고 사귀기 시작했고, 조별로 뭘 할 때도 아이들에게 뭐든 예스(yes) 하는 친구가 되기 위해 조원들이 나눠 가져와야 하는 준비물조차 혼자 다 챙겨가기도 했어요. 그래놓고는 많아진 내 일들에 속상해하면서 밤마다 남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고는 했습니다. 내가 먼저 하겠다고 해놓고 왜 이러고 있나, 이렇게 인생을 살아야 하나, 하며 불만도 쌓여갔습니다. 친구 관계도 이 친구는 이래서 마음에 안 들고 저 친구는 저래서 마음에 안 들고 항상 불만을 가진 채 친한 척만 했으니 진정한 친구는 하나도 없었어요.

긍정적인 아이처럼 보이기 위해 많은 애를 썼고, 사람들에게 ‘넌 정말 긍정적이구나’라는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만 나와는 맞지 않는 ‘억지 긍정’은 점점 스트레스로 쌓일 뿐이었습니다. 그 스트레스를 집에 와서 동생한테 다 풀었어요.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서 사소한 것조차도 막 시비를 걸었고, 당연히 동생과의 사이도 멀어져 갔습니다.

마음 없이 사는 게 진짜 긍정적인 삶!

어느 날 어머니께서 마음수련을 권했습니다. 방학을 맞아 수련을 시작한 저는 비로소 그 모든 것이 가면이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긍정적인 척하고 살던 모습이 더욱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한 거죠.

하고 싶은 말도 못 하고 겉으론 좋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진짜 긍정적인 게 아니라면, 진정 긍정적인 건 어떻게 사는 것일까 궁금했습니다.

그리고 수련을 하며 완벽해 보이려 했던 나의 욕심과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했던 마음들을 하나둘씩 버리기 시작했답니다. 그렇게 마음을 버리게 되면서 제 삶은 ‘불행 끝! 행복 시작!’이 되었어요. 마음을 버린 만큼 사람들 대하는 것도 편안해지고 무슨 일을 맡더라도 당당하게 해결하게 되었거든요.

방학이 끝나 학교에 갔을 때였습니다. 학교 선배들이 J.S.A 제 이름 이니셜을 가지고 공동 경계해야 하는 아이라며 제 외모를 비하하고 뒷담화한다는 소리를 친구로부터 듣게 되었어요. 순간 신기하게도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선배들의 기준이야 어떻든 나 자신에게 당당해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어요.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긍정적으로 보이려 하기보다 제 자신을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요즘 내가 가장 잘하는 말 “네~^^ 할 수 있어요!”

내적으로 긍정적으로 바뀌자, 하루하루가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마음수련으로 무거웠던 마음의 짐과 스트레스들을 버리면서 동생과의 사이도 가까워졌습니다. 스트레스를 주체하지 못해 유치하고 사소한 걸로 일부러 시비를 걸던 것이 사라진 겁니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다른 사람 일조차도 제가 하겠다고 했다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며 허둥댔지만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최선을 다해 처리를 하고 많은 일들은 순서를 정해 하나둘씩 처리해가는 지혜도 생겼답니다.

덕분에 한동안 입에 달고 살았던 ‘싫어!’ 대신 지금은 “네~ 할 수 있어요” “네~ 가능해요” 하면서 차근차근 즐겁게 일들을 해나가고 있습니다.

한번은 친구와 함께 마케팅 회사에 아르바이트로 일하게 되었을 때예요. 친구가 5시간 동안 100개의 글을 올린다면 저는 2시간 동안 100개의 글을 올리고 그사이 다른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그렇게 빠르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을 언제 다 끝내나?’ 대신 ‘이 일을 제대로 해낸다면 언젠가 다른 일을 할 때도 도움이 되겠다, 그럼 재밌겠다’ 하며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했기 때문이었어요. 덕분에 그 회사 부장님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었답니다.

지금은 지난날 저 나름대로 힘들었던 시간들에 감사합니다. 그 시간이 있었기에 오늘의 이런 마음가짐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 이제 겨우 20대 초반인 나이에 진짜 긍정적인 게 뭔지 알고,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아보카도 검은콩 샐러드

비타민E가 풍부하게 들어 있는 아보카도는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하여 매끄러운 피부를 만들어주고 노화 방지에 효과가 뛰어납니다. 또한 식물성 섬유질이 풍부하여 장 건강에도 좋습니다. 이런 아보카도에, 모발에 윤기를 더하고 여성호르몬 작용을 돕는 이소플라본이 풍부한 검정콩까지 더하여 샐러드를 만들어보니, 그야말로 오감 만족 샐러드입니다.

이양지 자연요리연구가

 
재료 준비
검정콩(서리태) 1컵, 아보카도 1개, 크림치즈 100g, 요구르트 드레싱(플레인 요구르트 150g,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 2큰술, 꿀 1큰술, 레몬즙 2큰술, 소금 조금)

만들기
① 검정콩은 깨끗이 씻어 하룻밤 물에 불린 후 냄비에 물을 넉넉히 붓고 함께 넣어 끓어오른 뒤로 3분 정도 더 삶는다.
부드럽게 삶아 체에 밭친다.

② 아보카도는 칼날을 길게 돌려 넣어 비틀어 반으로 갈라 씨를 빼고 껍질을 벗긴 다음 1cm 크기의 주사위 꼴로 썬다.
③ 크림치즈는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것을 작게 썰고 부드러운 것은 그대로 사용해 검정콩과 버무린다.
요구르트 드레싱 재료를 섞어둔다.

④ 검정콩과 아보카도, 크림치즈를 섞은 것을 요구르트 드레싱에 버무려 낸다.

자료 제공 <우리 가족 면역력 높이는 103가지 레시피> (도서출판 소풍) 자연요리 전문가인 이양지씨가 모든 병을 예방해주는 영양소들은 우리가 늘 먹는 식재료에 들어 있다는 요리 철학으로, 면역력을 높이는 레시피를 소개하고 있다. http://www.macrobiotics.co.kr

 

복슬복슬 부드러운 아칼리파 Achalypha hispida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한 화단에 빨간 털복숭이가 눈길을 끄네요.
‘여우 꼬리’라는 별명을 가진 아칼리파 히스피다(Acalypha hispida, 붉은줄나무)입니다.
복슬복슬한 게 정말 아기 여우의 꼬리 같지요? 가을 햇살을 받으면 화분 가득 풍성해지는 털 뭉치를 볼에 살짝 가져다 대세요.
여리고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이 간질간질 금세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키우기도 쉬워서 따뜻한 곳에서 햇볕만 잘 쬐어주면 일년 내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햇빛 직사광선 또는 그에 가까운 밝은 햇빛을 많이 보여줘야 꽃 색이 선명해집니다.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말랐을 때 한 번에 흠뻑 주세요.

번식 꺾꽂이(삽목)나 포기나누기를 하세요.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셰어링 워터 Sharing Water

이름은? Sharing Water(셰어링 워터).

식물이 흡수하고 남은 물을 화분 간에 서로 나눈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공유’라는 주제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보다가, 단순히 자연 친화나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화분이 물을 빨아들이고 배출하는 행위와 속성을 보고 구상하게 되었다. 어쩌면 완벽한 기능의 제품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감성적 의도가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용 방법은?

일반적인 도기 재질이나 플라스틱 재질로 모두 제작이 가능하다. 물 조리개와 크기가 맞는 일체형으로 제품을 제작하여 서로 물을 나누면서 사용할 수 있다.

중점을 둔 부분은?

물 조리개의 모양과 화분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해서 누구나 각각의 기능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동시에 상반되는 모양이 맞물려서 그 자체로 흥미를 주고자 했다.

주변의 반응은?

몇 회의 국내 전시를 한 후에 런던의 주영문화원에서 주최한 ‘My Perfect Neighbor’라는 주제 전시를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가상의 정원사가 Sharing Water로 이웃들과 공유하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실제 사용에 대해 호기심이 아주 많았고, 상용화에 대한 문의도 많이 받았다.

아쉬웠던 점은?

상용화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제품을 디자인해도 상품성 면이나 다른 문제 때문에 곧바로 상용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상용화를 계획 중이다.

만든 사람: 신태호 32세. 디자이너

해리포터, 그동안 고마웠어, 이제 안녕~!

김정현 22세. 미국 메사추세츠주 SMFA 재학 중

영화 해리포터의 마지막 편이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1997년 영국에서 책으로 발간된 후 성경 다음으로 많은 부수가 팔렸고, 한국에서 발간된 번역 서적 중 이문열의 삼국지 다음으로 많이 팔린 해리 이야기의 대장정이 끝을 맺은 것입니다.

아쉬움에 가슴 한켠이 시린 이는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한 해리포터는 모범생에다 지루하기만 했던 제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 존재였습니다. 우연인지 책 속의 해리와 나이까지 같았던 저는 전 권을 세 번 이상 읽고 주문을 달달 외울 만큼 해리포터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 해리포터 이야기가 2001년 영화로 나왔을 때는 실망도 컸습니다. 해리 삼총사의 이야기 속에 알알이 심겨 있는 환상과 마법, 퍼즐을 맞추듯이 조목조목 세심하게 이어진 에피소드를 영화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책의 방대한 분량 때문에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급급하다는 느낌이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자만 상상하던 이미지와 음악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해리 삼총사는 오랫동안 보고팠던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주위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해리, 특출난 것 없이 구박받으며 자랐지만 해리에게만큼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는 론, 그리고 해리와 론을 하나로 뭉쳐 앞으로 나가게 하는 헤르미온느. 용감하고 두려울 것 없는 이 악동들을 보며 동질감도 느끼고 대리 만족도 느꼈습니다. 10년을 한결같이 함께해준 다니엘(해리 역), 엠마(헤르미온느 역), 루퍼트(론 역)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뿌듯했죠.

고1부터 시작된 외로운 유학 생활 중 해리포터는 추억이 가득한 한국을 떠올리게 해줬고, ‘용기를 내라’며 저를 다독이는 철든 동생 같았습니다.

8편의 영화 중 마지막 편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의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는 제 안의 두 목소리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궁금해 죽겠으니 빨리 보자는 독촉의 소리와 이야기가 끝나는 게 두렵다는 아쉬움의 소리.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나도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고민투성이 아이었거든요.

데이빗 예이츠 감독이 연출한 마지막 편은 1, 2부로 나누어져 원작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었습니다. 해리가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악당 볼드모트와 싸울 때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사람들 역시 자신의 모든 걸 던집니다. 아무리 강하고 두려울 것 없는 볼드모트라 해도 사람들의 그런 사랑 앞에서는 승리자가 될 수 없었죠.

영화가 끝나자 곳곳에서 박수소리가 들렸습니다. 연령, 국적, 나이에 상관없이 수많은 이를 사로잡은 역사적 작품과 함께했다는 고마움에 저도 아쉬움의 눈물을 닦고 크게 박수를 쳤습니다.

그동안 해리포터를 보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소설과 음악, 일러스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고, 나도 어른이 되면 아이들이 아이다울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조금은 거창한 꿈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지금 해리포터의 끝은 저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다 던지고 어른이 된 해리처럼 저도 어린 시절의 환상은 버리고 현실 속에서 제가 원하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서면 그 어떠한 야무진 생각도 냉철한 판단도 필요 없어지는 듯합니다. 그저 아~ 하고 바라보는 것밖에는…. 저 붉은토끼풀처럼 말입니다.

하늘공원. 2008년 8월

안녕하세요, 쪼매난 예쁜이들이에요~^^

풀 냄새, 흙냄새, 물소리는 언제나 이 세상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나 또한 그러함을 일깨워줍니다. 한차례 소나기가 지난 후였습니다. 물속에서 쏙쏙 고개를 내민 쪼매나고 예쁜 노랑어리연꽃들이 ‘사람’이라 불리는 또 다른 생명체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한국자생식물원. 2008년 7월

그늘 밑 나무 의자에

야영 수련 활동 이틀째, 그 아이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불현듯이 달려들어 반 친구 종윤이를 때린 것이다.
돌발적인 폭력 행사에 놀란 야영 수련원 강사들은 그 아이를 수련원 사무실에 따로 떼어 놓았다.
연락을 받고 서둘러 사무실로 가보니 아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치리라던 다짐이 또 흔들렸다.
아이는 내가 다가가자 “언제 과자 사 먹으러 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질문을 무시하고 왜 종윤이를 때렸냐, 안 그러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다그쳤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과자에 대한 불안정한 집착이었다.

착한 종윤이는 그 아이의 손찌검에 한 번도 맞붙어 싸우거나 되받아치지 않았다. 그때마다 쫓기는 고양이처럼 친구들 사이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애써 웃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그랬다. 마땅히 우리가 그 아이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작은 악동을 일으켜 다시 실습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한참 나전칠기 공예 체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강사들의 우려스런 눈길을 피해 그 아이를 제자리에 앉혔다. 맞은편 종윤이도 아까 일을 까맣게 잊은 듯 제 나전칠기 목걸이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핀셋으로 바늘처럼 얇은 자개 조각을 집어, 동전 크기의 나무 목걸이 면을 꾸미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자개가 너무 얇고 가늘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아이의 이름 석 자를 새겨 보려고 하는데, 설상가상 안경마저 없으니 작은 재료들이 자꾸만 핀셋 끝에서 미끄러졌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조별로 함께 쓰는 접착제를 쏟아 버렸다. 그래서 허겁지겁 끈끈한 액체를 닦아내는데…. 갑자기 서글픔 같은 것이 와락 달려들었다. 나는 망연히 앉아 있는 아이 손을 잡고 실습장을 나왔다.

우리는 야영 수련원을 빠져나와 동네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이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서 아이한테 대체 왜 또 종윤이를 때렸냐고 물었다. 아이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하더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종윤이한테 아이스크림 사줄 거예요.”

동네 슈퍼마켓에서 아이는 제 돈으로 과자 한 봉지와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싶어 서둘러 수련원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이를 수련원 뜰 앞 나무 의자에 앉혀 놓고 실습장으로 갔다. 목걸이 공예는 막바지 과정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무 목걸이에 모양을 다 꾸민 아이들이 줄을 서서 유약 칠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 키 작은 종윤이가 보였다.

종윤이도 자신의 작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종윤이 손바닥에는 나무 목걸이가 두 개나 있었다. 가만 보니 그중 하나는 아까 우리가 만들다 포기한 나무 목걸이었다. 그 나무 목걸이에는 자신을 끈질기게 손찌검하던 친구의 이름 석 자가 온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 가슴이 뭉클했다.

“네가 만든 거냐?”

아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우리는 수련원 뜰 앞에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화사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그 햇살이 자디잘게 부서져 내리는 나무 의자 위에, 멀대 같은 어른 한 명과 날개를 숨긴 천사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린 천사들은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과 과자 한 봉지를 뽀시락뽀시락 맛있게 나누어 드시고, 멀대 같은 어른은 저 혼자 행복에 겨워 헤벌쭉 웃고 있었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전북 완주군 용복마을의 행복한 마을 만들기

성현옥
‘완주 문화의 집’ 운영자

나의 고향은 전북 완주군 경천면 용복마을이다. 천년 사찰 화암사 어귀에 위치한 국도 변 마을, 어린 시절 우리 마을은 집집마다 인삼과 감 농사를 지었고 인근 마을 중 가장 풍족하고 정이 넘치던 마을로 기억한다. 집집마다 피어 있는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쪽두리꽃들은 내 어린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런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문화 예술 분야 일을 하며 다시 찾은 내 고향. 그 사이 고향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100여 가구였던 마을은 40가구로 줄어 있었고, 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던 마당과 흙길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 많던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꽃씨를 나누어주시던 마당 넓은 집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옛날에는 부잣집이었음을 엿보게 하는 높은 담장들은 흉물이 되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친구들과 동네 언니 오빠, 삼촌들은 다 어디에…?”

이장직을 맡으셨던 친한 친구 아버님께 옛 이야기를 띄우며 “동네에 생기 넘치는 일 한번 해볼까요?” 하니 “이제 뭐 어떻게 해볼 수 있겠어, 다들 나이가 들어서…” 하며 말끝을 흐리셨다. 그러다 2007년, 근무하던 문화의 집 협회의 공모 사업이 있었다. 부족하지만 마을 이야기를 담아 나이 든 아버지의 뒷모습 같은 골목에 꽃씨를 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어르신들께 작게라도 시작해 보자며 설득했고, 비슷한 사례로 성공을 거둔 다른 지역을 견학하신 어르신들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었다.

그렇게 2007년 7월부터 5개월간의 ‘마을 꾸미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마을 구석구석 방치돼 있던 쓰레기를 치우고, 썩은 이끼가 붙은 담벼락도 깨끗이 털어냈다. 청소만 했는데도 마을은 환해지는 것 같았다. 어르신들과 교회 청년부의 도움으로 페인트도 칠하고 돌을 주워다 길가의 나무 화단도 둘러주고, 문화의 집 미술 강사들과 아이들, 동호회 회원들의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높은 골목 담들에는 동화 속의 그림들이 그려졌다.

“아이들의 조잘거림과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라며 인근 교회 사모님은 요새는 아이와 함께 매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이야기 나눈다고 하고, ‘우리가 뭘 하겠어?’ 하며 멀리서 바라보던 어르신들도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업하는 이들에게 새참을 가져다주며 신나게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옛날엔 여기 우물이 있었는디, 집집마다 물 길러 여기로 다 모였당께.” “우리 용복마을이 복이 들어오는 마을이여, 이름 안에 용이 누워 있다고도 하고….”

어르신들의 옛이야기가 길이 되어, 우물이 있던 그 자리엔 우물을 그리고, 오래된 방앗간엔 방아 찧는 토끼 간판이 걸렸다.

한 해가 지난 봄이었다. 국도 변 마을 회관 입구에 꽃들이 만발했다.

“면에서 해주었어요?”라고 묻자 “아녀, 언제 했는가 모르게 의사할머니가 만들었어” 하는 말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마을 회관 앞집에 홀로 사시는 팔순 넘으신 할머니의 솜씨였다.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에 “농사도 안 징게 살살 만들었지….”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 도로가에 꽃밭을 만들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노구를 이끄시며 왔다 갔다 하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처음 심었던 꽃들이 다 지자 할머니는 다시 가을에 피는 과꽃나무를 심으셨다. 그런데 가을이 되자 국도 변을 오가는 차량들, 차를 멈추고 꽃 따가는 손놀림이 신나셨다. ‘아니, 저걸 할머니가 어떻게 심으신 건데….’ 나는 속상했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이외에도 흐뭇했던 일은 우리 동네 수호신 같은 정자나무 이야기다. 아무리 더운 날도 그 나무 아래에 누우면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정자나무 이파리가 말라가며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모두 속상한 마음만 있을 뿐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이니 함부로 손댈 수도 없고 나무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를 보아도 한두 푼의 예산으로는 어찌 해볼 여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마을 순회를 하던 군수님이, 이쁜 마을 만들겠다고 더운 날 땀 흘리는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요청하는 나무 살리기에 감탄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셨다.

마을의 역사이자 상징인 정자나무가 살아나서일까. 그 후 우리 마을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가던 사람들이 예쁜 마을이라며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서 점차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고, 마을 분들은 ‘우리 집을 찍어갔다’며 굉장히 뿌듯해하셨다. 어느 날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 2위에 있는 걸 보고 나 역시 놀란 적이 있다.

“컴퓨터에도 나오고 유명해졌는디 어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댜. 옛날에는 쳐다도 안 보던 우리 집구석도 이쁘다고 항게 자꾸 청소도 하고… 일은 많아졌어도 좋당게.”

2008년 용복마을은 농림부 ‘예쁜 마을 콘테스트’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잘 그린 그림이어서가 아니고 동네 주민들의 애정이 담긴 구석구석 이야기가 좋았다고 한다.

2009년에는 완주군에서 지원한 ‘참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 공동 사업장인 두부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집집마다 콩 농사를 하고 남은 콩을 활용해 마을 공동 사업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동네 두부 참 맛있다고 난리여…’ 자랑을 늘어놓는 어머님들의 행복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요새 어르신들은 컴퓨터를 배우러 다닌다. “마을 일 하다 본께 배워야겠더라고… 그 참에 손자들이랑 메일도 주고받고, 새끼 난 강아지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난리여, 좋아서….”

복이 들어오는 곳, 용복마을. 한동안 잃었던 제 이름을 찾은 걸까. 어릴 적 기억을 풍요롭게 해주던 나의 고향, 언제까지나 어르신들의 행복한 삶의 터가 되길 바라본다.

고려대장경, 천 년의 지혜를 담아온 큰 그릇

사진, 글 서헌강 도움말 고려대장경연구소

수다라장 장경판전을 들어서면 맨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다. 정면의 가운데에는 연화무늬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문을 맞이할 수 있다.

장경각 내부 경판꽂이 각 단마다 약 80장 전후의 경판이 들어 있다. 오랜 세월 경판을 보존해온 비밀의 핵심은 통풍이다. 장경판전 벽면의 아래위, 건물의 앞면과 뒷면에 있는 창의 크기가 저마다 다르다.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맞은편으로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아래위를 골고루 돌면서 적정한 습도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또 바닥을 깊이 파서 소금 숯 찰흙 모래 횟가루를 층층이 쌓아 다졌다. 습도가 높으면 바닥이 습기를 빨아들이고 가물 때는 바닥이 습기를 내뿜도록 한 것이다.

<대반야경> 600권 종장 8만 장에 이르는 고려대장경 경판은 대부분 산벚꽃나무와 산돌배나무이다. 약 3년간의 가공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판목을 세로 24cm, 가로 68~78cm, 두께 2.8~3.4cm 크기로 다듬고, 경판의 앞뒤로 글자를 23행 14자씩 배열하여 새겨 넣었다. 경판의 양끝에는 마구리가 달려 있다. 일종의 손잡이로 판목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보관 시 바람이 잘 통하도록 제작되었다.

 

올해는 고려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 천 년이 되는 해이다. 천 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기념하는 것으로,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인들의 지혜와 역량이 총결집돼 1011년 판각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70여 년을 거쳐 완성된 대장경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1236년에 다시 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해인사에 있는 고려재조(再雕)대장경이다.

7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완벽한 목판본으로 남아 있는 고려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목판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은 81,238판으로, 대장경 목판을 한꺼번에 쌓으면 그 높이가 약 3,200m로 백두산(2,744m)보다 높으며, 길이로 이어 놓는다면 150리(약 60km)에 달한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집대성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인 ‘경’, 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 조항과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인 ‘율’, ‘경’과 ‘율’에 관해 읽기 쉽게 주석한 ‘논’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역사, 그림, 설화, 사전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인문·서지학 등 이외에도 중요한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의 보물 창고이기도 하다. 고려대장경은 오늘날에도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세계 유네스코는 1995년 경판을 봉안한 장경판전 (국보 제52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2007년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재조대장경판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 사간판전이 있다.

 

서헌강님은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샘이 깊은 물>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다가 1986년 ‘고교생활전’을 시작으로 ‘보트피플’(1989), ‘도자예술의 혼’(2001), ‘신들의 정원’(2011) 등 다양한 주제로 개인전을 열어왔습니다.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문화 다큐멘터리 관련 사진을 주로 촬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시리즈 <제와장> 외 18권, 빛깔 있는 책 시리즈 <계룡산> <한국의 탈> <우리 놀이 백 가지>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