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복슬복슬 부드러운 아칼리파 Achalypha hispida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한 화단에 빨간 털복숭이가 눈길을 끄네요.
‘여우 꼬리’라는 별명을 가진 아칼리파 히스피다(Acalypha hispida, 붉은줄나무)입니다.
복슬복슬한 게 정말 아기 여우의 꼬리 같지요? 가을 햇살을 받으면 화분 가득 풍성해지는 털 뭉치를 볼에 살짝 가져다 대세요.
여리고 부드러운 감촉에 온몸이 간질간질 금세 웃음이 터져 나옵니다. 키우기도 쉬워서 따뜻한 곳에서 햇볕만 잘 쬐어주면 일년 내내 꽃을 볼 수 있습니다.

햇빛 직사광선 또는 그에 가까운 밝은 햇빛을 많이 보여줘야 꽃 색이 선명해집니다.

물주기 화분의 겉흙이 말랐을 때 한 번에 흠뻑 주세요.

번식 꺾꽂이(삽목)나 포기나누기를 하세요.

글, 사진 성금미 <산타벨라처럼 쉽게 화초 키우기>의 저자

셰어링 워터 Sharing Water

이름은? Sharing Water(셰어링 워터).

식물이 흡수하고 남은 물을 화분 간에 서로 나눈다는 의미이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공유’라는 주제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보다가, 단순히 자연 친화나 부의 재분배가 아니라 화분이 물을 빨아들이고 배출하는 행위와 속성을 보고 구상하게 되었다. 어쩌면 완벽한 기능의 제품이라기보다는 다분히 감성적 의도가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사용 방법은?

일반적인 도기 재질이나 플라스틱 재질로 모두 제작이 가능하다. 물 조리개와 크기가 맞는 일체형으로 제품을 제작하여 서로 물을 나누면서 사용할 수 있다.

중점을 둔 부분은?

물 조리개의 모양과 화분의 모양을 그대로 유지해서 누구나 각각의 기능을 쉽게 알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동시에 상반되는 모양이 맞물려서 그 자체로 흥미를 주고자 했다.

주변의 반응은?

몇 회의 국내 전시를 한 후에 런던의 주영문화원에서 주최한 ‘My Perfect Neighbor’라는 주제 전시를 한 적이 있었다. 거기에서 가상의 정원사가 Sharing Water로 이웃들과 공유하는 장면을 연출했는데, 실제 사용에 대해 호기심이 아주 많았고, 상용화에 대한 문의도 많이 받았다.

아쉬웠던 점은?

상용화되지 못한 점이 가장 아쉽다. 제품을 디자인해도 상품성 면이나 다른 문제 때문에 곧바로 상용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상용화를 계획 중이다.

만든 사람: 신태호 32세. 디자이너

해리포터, 그동안 고마웠어, 이제 안녕~!

김정현 22세. 미국 메사추세츠주 SMFA 재학 중

영화 해리포터의 마지막 편이 드디어 개봉했습니다. 1997년 영국에서 책으로 발간된 후 성경 다음으로 많은 부수가 팔렸고, 한국에서 발간된 번역 서적 중 이문열의 삼국지 다음으로 많이 팔린 해리 이야기의 대장정이 끝을 맺은 것입니다.

아쉬움에 가슴 한켠이 시린 이는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초등학교 때 처음 접한 해리포터는 모범생에다 지루하기만 했던 제 삶에 생동감을 불어넣어 준 존재였습니다. 우연인지 책 속의 해리와 나이까지 같았던 저는 전 권을 세 번 이상 읽고 주문을 달달 외울 만큼 해리포터에 푹 빠져 살았습니다.

그런 해리포터 이야기가 2001년 영화로 나왔을 때는 실망도 컸습니다. 해리 삼총사의 이야기 속에 알알이 심겨 있는 환상과 마법, 퍼즐을 맞추듯이 조목조목 세심하게 이어진 에피소드를 영화에서는 거의 볼 수가 없었으니까요. 책의 방대한 분량 때문에 줄거리를 따라가는 데 급급하다는 느낌이었죠. 하지만 한편으로는 혼자만 상상하던 이미지와 음악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좋았습니다.

특히 해리 삼총사는 오랫동안 보고팠던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며 주위 사람들을 사랑할 줄 아는 해리, 특출난 것 없이 구박받으며 자랐지만 해리에게만큼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어주는 론, 그리고 해리와 론을 하나로 뭉쳐 앞으로 나가게 하는 헤르미온느. 용감하고 두려울 것 없는 이 악동들을 보며 동질감도 느끼고 대리 만족도 느꼈습니다. 10년을 한결같이 함께해준 다니엘(해리 역), 엠마(헤르미온느 역), 루퍼트(론 역)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뿌듯했죠.

고1부터 시작된 외로운 유학 생활 중 해리포터는 추억이 가득한 한국을 떠올리게 해줬고, ‘용기를 내라’며 저를 다독이는 철든 동생 같았습니다.

8편의 영화 중 마지막 편인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의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는 제 안의 두 목소리가 싸우기도 했습니다. 궁금해 죽겠으니 빨리 보자는 독촉의 소리와 이야기가 끝나는 게 두렵다는 아쉬움의 소리. 이 이야기가 끝날 때쯤이면 나도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했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고민투성이 아이었거든요.

데이빗 예이츠 감독이 연출한 마지막 편은 1, 2부로 나누어져 원작을 가장 잘 반영한 작품이었습니다. 해리가 자신의 죽음을 무릅쓰고 악당 볼드모트와 싸울 때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사람들 역시 자신의 모든 걸 던집니다. 아무리 강하고 두려울 것 없는 볼드모트라 해도 사람들의 그런 사랑 앞에서는 승리자가 될 수 없었죠.

영화가 끝나자 곳곳에서 박수소리가 들렸습니다. 연령, 국적, 나이에 상관없이 수많은 이를 사로잡은 역사적 작품과 함께했다는 고마움에 저도 아쉬움의 눈물을 닦고 크게 박수를 쳤습니다.

그동안 해리포터를 보면서 참 행복했습니다. 소설과 음악, 일러스트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고, 나도 어른이 되면 아이들이 아이다울 수 있는, 공간과 기회를 주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조금은 거창한 꿈을 갖게 되었지요.

그리고 지금 해리포터의 끝은 저의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자신을 다 던지고 어른이 된 해리처럼 저도 어린 시절의 환상은 버리고 현실 속에서 제가 원하는 삶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엔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서면 그 어떠한 야무진 생각도 냉철한 판단도 필요 없어지는 듯합니다. 그저 아~ 하고 바라보는 것밖에는…. 저 붉은토끼풀처럼 말입니다.

하늘공원. 2008년 8월

안녕하세요, 쪼매난 예쁜이들이에요~^^

풀 냄새, 흙냄새, 물소리는 언제나 이 세상이 살아 숨 쉬고 있음을, 나 또한 그러함을 일깨워줍니다. 한차례 소나기가 지난 후였습니다. 물속에서 쏙쏙 고개를 내민 쪼매나고 예쁜 노랑어리연꽃들이 ‘사람’이라 불리는 또 다른 생명체를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한국자생식물원. 2008년 7월

그늘 밑 나무 의자에

야영 수련 활동 이틀째, 그 아이가 기어코 사고를 쳤다. 불현듯이 달려들어 반 친구 종윤이를 때린 것이다.
돌발적인 폭력 행사에 놀란 야영 수련원 강사들은 그 아이를 수련원 사무실에 따로 떼어 놓았다.
연락을 받고 서둘러 사무실로 가보니 아이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눈물이 쏙 빠지게 야단치리라던 다짐이 또 흔들렸다.
아이는 내가 다가가자 “언제 과자 사 먹으러 가요?” 하고 물었다.
나는 질문을 무시하고 왜 종윤이를 때렸냐, 안 그러기로 약속하지 않았느냐며 다그쳤다.
아이는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내 손을 잡고 만지작거렸다. 과자에 대한 불안정한 집착이었다.

착한 종윤이는 그 아이의 손찌검에 한 번도 맞붙어 싸우거나 되받아치지 않았다. 그때마다 쫓기는 고양이처럼 친구들 사이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애써 웃었다. 우리 반 아이들은 그랬다. 마땅히 우리가 그 아이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작은 악동을 일으켜 다시 실습실로 데리고 갔다.

아이들은 한참 나전칠기 공예 체험에 열중하고 있었다. 나는 강사들의 우려스런 눈길을 피해 그 아이를 제자리에 앉혔다. 맞은편 종윤이도 아까 일을 까맣게 잊은 듯 제 나전칠기 목걸이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핀셋으로 바늘처럼 얇은 자개 조각을 집어, 동전 크기의 나무 목걸이 면을 꾸미는 활동이었다.

그런데 자개가 너무 얇고 가늘어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아이의 이름 석 자를 새겨 보려고 하는데, 설상가상 안경마저 없으니 작은 재료들이 자꾸만 핀셋 끝에서 미끄러졌다. 그러다가 얼떨결에 조별로 함께 쓰는 접착제를 쏟아 버렸다. 그래서 허겁지겁 끈끈한 액체를 닦아내는데…. 갑자기 서글픔 같은 것이 와락 달려들었다. 나는 망연히 앉아 있는 아이 손을 잡고 실습장을 나왔다.

우리는 야영 수련원을 빠져나와 동네로 향하는 내리막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이도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래서 아이한테 대체 왜 또 종윤이를 때렸냐고 물었다. 아이는 미간을 좁히고 잠시 생각하더니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말했다.

“종윤이한테 아이스크림 사줄 거예요.”

동네 슈퍼마켓에서 아이는 제 돈으로 과자 한 봉지와 아이스크림 두 개를 샀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이 녹을까 싶어 서둘러 수련원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이를 수련원 뜰 앞 나무 의자에 앉혀 놓고 실습장으로 갔다. 목걸이 공예는 막바지 과정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나무 목걸이에 모양을 다 꾸민 아이들이 줄을 서서 유약 칠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속에 키 작은 종윤이가 보였다.

종윤이도 자신의 작품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줄을 서 있었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종윤이 손바닥에는 나무 목걸이가 두 개나 있었다. 가만 보니 그중 하나는 아까 우리가 만들다 포기한 나무 목걸이었다. 그 나무 목걸이에는 자신을 끈질기게 손찌검하던 친구의 이름 석 자가 온전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아! 가슴이 뭉클했다.

“네가 만든 거냐?”

아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우리는 수련원 뜰 앞에 있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화사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그 햇살이 자디잘게 부서져 내리는 나무 의자 위에, 멀대 같은 어른 한 명과 날개를 숨긴 천사 두 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어린 천사들은 약간 녹은 아이스크림과 과자 한 봉지를 뽀시락뽀시락 맛있게 나누어 드시고, 멀대 같은 어른은 저 혼자 행복에 겨워 헤벌쭉 웃고 있었다.

최형식 일러스트 유기훈

 

전북 완주군 용복마을의 행복한 마을 만들기

성현옥
‘완주 문화의 집’ 운영자

나의 고향은 전북 완주군 경천면 용복마을이다. 천년 사찰 화암사 어귀에 위치한 국도 변 마을, 어린 시절 우리 마을은 집집마다 인삼과 감 농사를 지었고 인근 마을 중 가장 풍족하고 정이 넘치던 마을로 기억한다. 집집마다 피어 있는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쪽두리꽃들은 내 어린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었다.

그런 고향을 떠나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고 졸업하고 결혼도 했다. 그리고 문화 예술 분야 일을 하며 다시 찾은 내 고향. 그 사이 고향은 너무 달라져 있었다. 100여 가구였던 마을은 40가구로 줄어 있었고, 꽃이 소담하게 피어 있던 마당과 흙길은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다. 그 많던 꽃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꽃씨를 나누어주시던 마당 넓은 집 할머니가 그리워졌다. 옛날에는 부잣집이었음을 엿보게 하는 높은 담장들은 흉물이 되어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친구들과 동네 언니 오빠, 삼촌들은 다 어디에…?”

이장직을 맡으셨던 친한 친구 아버님께 옛 이야기를 띄우며 “동네에 생기 넘치는 일 한번 해볼까요?” 하니 “이제 뭐 어떻게 해볼 수 있겠어, 다들 나이가 들어서…” 하며 말끝을 흐리셨다. 그러다 2007년, 근무하던 문화의 집 협회의 공모 사업이 있었다. 부족하지만 마을 이야기를 담아 나이 든 아버지의 뒷모습 같은 골목에 꽃씨를 뿌릴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어르신들께 작게라도 시작해 보자며 설득했고, 비슷한 사례로 성공을 거둔 다른 지역을 견학하신 어르신들의 생각도 조금씩 바뀌었다.

그렇게 2007년 7월부터 5개월간의 ‘마을 꾸미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마을 구석구석 방치돼 있던 쓰레기를 치우고, 썩은 이끼가 붙은 담벼락도 깨끗이 털어냈다. 청소만 했는데도 마을은 환해지는 것 같았다. 어르신들과 교회 청년부의 도움으로 페인트도 칠하고 돌을 주워다 길가의 나무 화단도 둘러주고, 문화의 집 미술 강사들과 아이들, 동호회 회원들의 마음이 모아지기 시작했다. 높은 골목 담들에는 동화 속의 그림들이 그려졌다.

“아이들의 조잘거림과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라며 인근 교회 사모님은 요새는 아이와 함께 매일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이야기 나눈다고 하고, ‘우리가 뭘 하겠어?’ 하며 멀리서 바라보던 어르신들도 점차 다가오기 시작했다. 작업하는 이들에게 새참을 가져다주며 신나게 마을 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옛날엔 여기 우물이 있었는디, 집집마다 물 길러 여기로 다 모였당께.” “우리 용복마을이 복이 들어오는 마을이여, 이름 안에 용이 누워 있다고도 하고….”

어르신들의 옛이야기가 길이 되어, 우물이 있던 그 자리엔 우물을 그리고, 오래된 방앗간엔 방아 찧는 토끼 간판이 걸렸다.

한 해가 지난 봄이었다. 국도 변 마을 회관 입구에 꽃들이 만발했다.

“면에서 해주었어요?”라고 묻자 “아녀, 언제 했는가 모르게 의사할머니가 만들었어” 하는 말에 깜짝 놀란 적이 있었다. 마을 회관 앞집에 홀로 사시는 팔순 넘으신 할머니의 솜씨였다. 힘들지 않았냐는 물음에 “농사도 안 징게 살살 만들었지….”

차들이 쌩쌩 달리는 국도 도로가에 꽃밭을 만들기 위해 지팡이를 짚고 노구를 이끄시며 왔다 갔다 하셨을 걸 생각하니 마음이 먹먹해졌다.

처음 심었던 꽃들이 다 지자 할머니는 다시 가을에 피는 과꽃나무를 심으셨다. 그런데 가을이 되자 국도 변을 오가는 차량들, 차를 멈추고 꽃 따가는 손놀림이 신나셨다. ‘아니, 저걸 할머니가 어떻게 심으신 건데….’ 나는 속상했지만 할머니는 오히려 흐뭇하게 바라보셨다.

이외에도 흐뭇했던 일은 우리 동네 수호신 같은 정자나무 이야기다. 아무리 더운 날도 그 나무 아래에 누우면 세상 부러울 게 없던 정자나무 이파리가 말라가며 점점 힘을 잃고 있었다. 모두 속상한 마음만 있을 뿐 보호수로 지정된 나무이니 함부로 손댈 수도 없고 나무를 덮고 있는 콘크리트를 보아도 한두 푼의 예산으로는 어찌 해볼 여력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마을 순회를 하던 군수님이, 이쁜 마을 만들겠다고 더운 날 땀 흘리는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요청하는 나무 살리기에 감탄해 해결할 수 있는 길을 터 주셨다.

마을의 역사이자 상징인 정자나무가 살아나서일까. 그 후 우리 마을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오가던 사람들이 예쁜 마을이라며 사진 찍어 블로그에 올리면서 점차 소문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생겼고, 마을 분들은 ‘우리 집을 찍어갔다’며 굉장히 뿌듯해하셨다. 어느 날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 2위에 있는 걸 보고 나 역시 놀란 적이 있다.

“컴퓨터에도 나오고 유명해졌는디 어찌 기분이 안 좋을 수 있댜. 옛날에는 쳐다도 안 보던 우리 집구석도 이쁘다고 항게 자꾸 청소도 하고… 일은 많아졌어도 좋당게.”

2008년 용복마을은 농림부 ‘예쁜 마을 콘테스트’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잘 그린 그림이어서가 아니고 동네 주민들의 애정이 담긴 구석구석 이야기가 좋았다고 한다.

2009년에는 완주군에서 지원한 ‘참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 사업’에 선정되어 마을 공동 사업장인 두부 공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집집마다 콩 농사를 하고 남은 콩을 활용해 마을 공동 사업으로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동네 두부 참 맛있다고 난리여…’ 자랑을 늘어놓는 어머님들의 행복을 어찌 말로 표현할까.

요새 어르신들은 컴퓨터를 배우러 다닌다. “마을 일 하다 본께 배워야겠더라고… 그 참에 손자들이랑 메일도 주고받고, 새끼 난 강아지 사진 찍어서 보내주면 난리여, 좋아서….”

복이 들어오는 곳, 용복마을. 한동안 잃었던 제 이름을 찾은 걸까. 어릴 적 기억을 풍요롭게 해주던 나의 고향, 언제까지나 어르신들의 행복한 삶의 터가 되길 바라본다.

고려대장경, 천 년의 지혜를 담아온 큰 그릇

사진, 글 서헌강 도움말 고려대장경연구소

수다라장 장경판전을 들어서면 맨 앞쪽에 보이는 건물이다. 정면의 가운데에는 연화무늬를 연상시키는 아름다운 문을 맞이할 수 있다.

장경각 내부 경판꽂이 각 단마다 약 80장 전후의 경판이 들어 있다. 오랜 세월 경판을 보존해온 비밀의 핵심은 통풍이다. 장경판전 벽면의 아래위, 건물의 앞면과 뒷면에 있는 창의 크기가 저마다 다르다. 내부로 들어온 공기가 맞은편으로 바로 빠져나가지 않고 아래위를 골고루 돌면서 적정한 습도를 유지하도록 한 것이다. 또 바닥을 깊이 파서 소금 숯 찰흙 모래 횟가루를 층층이 쌓아 다졌다. 습도가 높으면 바닥이 습기를 빨아들이고 가물 때는 바닥이 습기를 내뿜도록 한 것이다.

<대반야경> 600권 종장 8만 장에 이르는 고려대장경 경판은 대부분 산벚꽃나무와 산돌배나무이다. 약 3년간의 가공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판목을 세로 24cm, 가로 68~78cm, 두께 2.8~3.4cm 크기로 다듬고, 경판의 앞뒤로 글자를 23행 14자씩 배열하여 새겨 넣었다. 경판의 양끝에는 마구리가 달려 있다. 일종의 손잡이로 판목의 뒤틀림을 방지하고 보관 시 바람이 잘 통하도록 제작되었다.

 

올해는 고려대장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 천 년이 되는 해이다. 천 년은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을 기념하는 것으로,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인들의 지혜와 역량이 총결집돼 1011년 판각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70여 년을 거쳐 완성된 대장경이 몽고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자, 1236년에 다시 제작하였다. 그것이 바로 해인사에 있는 고려재조(再雕)대장경이다.

7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거의 완벽한 목판본으로 남아 있는 고려재조대장경(팔만대장경)은 현존하는 목판대장경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목판은 81,238판으로, 대장경 목판을 한꺼번에 쌓으면 그 높이가 약 3,200m로 백두산(2,744m)보다 높으며, 길이로 이어 놓는다면 150리(약 60km)에 달한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經)·율(律)·논(論)의 삼장(三藏)을 집대성한 것이다. 석가모니가 제자와 중생을 상대로 설파한 내용인 ‘경’, 제자들이 지켜야 할 윤리 조항과 공동생활에 필요한 규범인 ‘율’, ‘경’과 ‘율’에 관해 읽기 쉽게 주석한 ‘논’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시대상, 역사, 그림, 설화, 사전 등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 인문·서지학 등 이외에도 중요한 우리나라 문화 콘텐츠의 보물 창고이기도 하다. 고려대장경은 오늘날에도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우리 민족의 찬란한 문화유산이다. 세계 유네스코는 1995년 경판을 봉안한 장경판전 (국보 제52호)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2007년 고려대장경판(국보 제32호)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했다.

해인사 장경판전 해인사 장경판전은 13세기에 만들어진 세계적 문화유산인 고려재조대장경판을 보존하는 보고로서 해인사의 현존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장경판전은 정면 15칸이나 되는 큰 규모의 두 건물을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하였다. 장경판전 남쪽의 건물을 수다라장, 북쪽의 건물을 법보전이라 하며 동쪽과 서쪽에 작은 규모의 동·서 사간판전이 있다.

 

서헌강님은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샘이 깊은 물>에서 사진기자로 활동하다가 1986년 ‘고교생활전’을 시작으로 ‘보트피플’(1989), ‘도자예술의 혼’(2001), ‘신들의 정원’(2011) 등 다양한 주제로 개인전을 열어왔습니다. 현재 프리랜서로 활동하면서 문화 다큐멘터리 관련 사진을 주로 촬영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중요무형문화재 시리즈 <제와장> 외 18권, 빛깔 있는 책 시리즈 <계룡산> <한국의 탈> <우리 놀이 백 가지> 등이 있습니다.

백청강, MBC 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의 우승자

작년 11월에 시작한 MBC ‘위대한 탄생’은 세계 각국의 참가자들이 서바이벌 형식으로 노래 실력을 겨루는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를 꿈꾸던 연변 청년 백청강(23). 탁월한 가창력의 소유자였지만 그가 처음부터 주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평범한 외모, 눈을 가리는 앞머리와 왠지 위축된 듯한 모습…. 하지만 끊임없이 노력하며 자신에게 지적된 단점을 고쳐나가던 그는, 7개월 후 최종 우승자가 된다. 아무도 예상 못 했던 반전, 그의 우승은 묵묵히 자신의 꿈을 향해 달려가는 모든 이들의 희망이기도 했다. 가수로서 새로운 시작을 꿈꾸는 백청강씨를 만나보았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우승했을 때 기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고 여러 가지 마음이었을 것 같아요.

무엇보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겠구나 싶어서 행복했어요. 괜히 우쭐해하고 그러지 않을까 걱정하는 분도 계시지만, 저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오디션에서 우승했을 뿐이지 그야말로 진짜 신인이잖아요. 지금부터 제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가수의 길이 열리느냐 끝이냐가 달려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진짜 큰 스타가 된다 해도 그땐 그게 또 시작이라고 생각할 거 같아요. 그냥 항상 열심히 하고 최선을 다하는 게 좋은 것 같아요.

많은 소속사에서 연락이 왔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결국 부활엔터테인먼트를 선택했지요.

이름을 밝히기는 그렇지만 큰 소속사에서는 다 연락이 왔었어요. 처음에는 고민을 조금 했어요. 제가 댄스를 좋아하잖아요. 부활은 댄스는 아닌데, 어떡해야 하지…. 그런 고민이요. 그런데 제가 계속 생각해왔던 게 일단 노래보다 인간성이거든요. 가수든 뭐든, 우선 사람 됨됨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근데 김태원 선생님한테 가면 인간성은 무조건 배울 수 있을 거고, 또 저를 여태까지 끌어주신 고마운 분이니까 바로 결정했죠.(웃음)

상금 중 상당한 액수를 보육원 등에 기부했잖아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생각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내가 한국 분들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받았으니, 한국의 어려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백청강은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기 좋아하는 아이었다. 9살 때부터 한국으로 돈 벌러 가신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외로움에 홀로 우는 시간도 많았지만 노래할 때만큼은 행복했다 한다. 그런 시간들 덕분에 마음을 담아 노래할 줄 알게 되고 다른 이의 어려움을 생각할 줄 아는 속 깊은 배려도 생긴 듯 보였다.

가수를 꿈꾸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음악 학원에 입학,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운다. 록가수 김경호를 너무 좋아해 로커를 꿈꾸던 그에게 댄스그룹 HOT는 또 한 번의 충격이었다. 어떻게 춤추면서 노래할 수 있지? 그는 하루에 10시간 이상 춤과 노래를 연습한다. 클럽에서 노래하며 생활비를 벌며, 각종 오디션에도 참가했다. 연변가요무대 1등, 연변TV 전국청소년오디션 1등…. 출전하는 대회마다 대부분 1등을 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중국이 워낙 크다 보니 지방 대회에서 1등 하는 것만으론 이름을 알릴 수 없었고, 또 소수민족이기에 그 기회도 적었다. 점차 자신감이 떨어져갈 무렵 ‘위대한 탄생’ 중국 오디션 소식이 들려왔다. ‘노래’만이 전부였지만, 출구를 찾기 힘들었던 청년에게 한 줄기 빛 같은 소식이었다.

오디션이 열리는 중국 청도는 기차를 타고도 꼬박 하루, 그리고 반 이상 더 가야 하는 거리에 있었다. “한국에 노래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네가 가냐”며 만류하는 엄마를 설득해,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걸어보자는 마음으로 오디션장으로 향했다.

드디어 오디션 날, “가장 쉽게 노래하는 사람 중 한 명을 만났다”며 그의 가창력은 높이 평가되었지만, 콧소리로 인한 부정확한 발음, 모창에 대한 지적이 쏟아졌다. 하지만 결과는 합격.

“좋습니다. 기쁘고요, 어머니 아버지 열심히 해서 좋은 가수가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자신의 꿈을 향해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드디어 한국 입성, 1차 예선에 통과한 100여 명이 경합을 벌인 후, 다섯 명의 멘토가 각각 제자로 맞을 4명의 참가자들을 선택하게 되었다. 마지막 멘토 결정의 순간, 상대적으로 덜 주목받던 백청강의 멘토를 하겠다는 사람은 없었고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순간 “제가 선택하겠습니다” 손을 든 이는 바로 김태원씨였다. 그의 안에 담긴 누구보다도 강한 노래에 대한 열정과 끼를 알아본 것이다.

김태원을 멘토로 만난 백청강은 마치 날개를 단 듯 그만의 강점을 살려나간다. 매 경합마다 콧소리, 음정 불안 등에 대한 지적은 계속되었지만 끊임없는 노력으로 단점을 고쳐나갔다. 아이돌의 댄스 음악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는 무대에서는 지난 시절, 그가 얼마큼 가수가 되기 위해 땀을 흘렸는지도 느끼게 해주었다.

마음을 움직이는 간절한 떨림이 있는 목소리, 맑고 깨끗한 음색, 체구는 작아도 무대를 감싸는 파워, 약해 보이지만 강단 있는 모습과 순수함…. 그 안에 감춰진 보석 같은 매력들이 점차 드러났고 팬 층도 두텁게 형성되었다. ‘상처받은 어린 야수’ 같았던 처음의 그의 모습은 사람들의 관심 속에서 치유되고 변화해 갔다.

방송이 진행되면서 점점 청강씨를 좋아하고 아끼는 팬들이 많아졌어요.

처음 중국 오디션 방송이 나간 다음 팬 카페가 생겼어요. 그전까지는 데이비드 오 팬 카페가 유일하게 있었거든요. 그때 솔직히 부러웠어요. 얘는 역시 다 되니까, 잘되는구나 했는데, 저도 생긴 거예요. 처음에는 실감이 안 나고 저를 좋아해주니까 고맙고 한마디로 진짜 좋았어요. 팬 여러분들, 항상 저를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진짜 너무 감사한 마음이에요. 저를 좋아해주시는 게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하겠습니다.(웃음)

바로 앞에서 콧소리, 음정 불안, 모창 등을 지적받으면 굉장히 위축됐을 것 같아요.

솔직히 맨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럽고 놀랐어요. 근데 점점 그걸 받아들여 고쳐나갈 수 있게 된 거 같아요. 사실 모두 저 잘되라고 해주신 말씀이잖아요. 특히 콧소리에 대한 지적은 힘들었어요. 제가 태어날 때부터 콧소리가 원래 있었거든요. 아, 유전인데 어떻게 고치지 싶더라고요. 하지만 아무리 유전이라도 고칠 수는 있을 거다 생각하고 계속 연습하다 보니까 조금씩 되더라고요. 지금도 무대에 설 때는 해주셨던 조언을 생각해요. 예를 들어 이은미 선생님께서 ‘반주 따로, 목소리 따로 분리되어 있다며, 노래할 때 음악에 젖어서 같이 하라’는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는데, 지금도 항상 생각해요. 그리고 음정이 불안하다고 조금씩 계속 낮아진다고 하셔서, 모니터를 해봤는데 진짜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그것도 계속 연습하고 있어요. 또 제스처를 하려면 제대로 하고 어설프게 하려면 아예 하지 말라는 신승훈 선생님 말씀도 항상 생각해요.

멘토들의 말씀 하나하나를 마음에 새기셨군요.
특히 김태원 선생님과의 인연이 정말 특별한 것 같아요.

저한테 김태원 선생님은 진짜 은인이에요.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만큼. 너무 감사하죠. 특히 저한테 ‘초심을 잃지 마라’ ‘자만을 경계하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막말로 조금 크면 자기가 잘났다고 그러다가 무너지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래서 초심이 진짜 중요한 거 같아요. 초심 때는 어떤 일도 다 하다가 이젠 가수니까, 니네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안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항상 김태원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많이 새겨요. 저는 초심을 잃지 않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는 가수가 돼야 한다는 계약을 저 친구와 저는 마음으로 했었습니다. 그 약속을 지키기 바랍니다.” 백청강의 우승 발표 후 김태원씨는 그렇게 축하의 말을 대신한다. 사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조선족 청년의 우승은 그 사실만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방송이 진행되는 동안 조용하던 연변 사회는 들썩였다. ‘앙까’라는 연변 말까지 유행시킨 그는 단순히 가수를 꿈꾸는 청년 이전에 연변 우리 조선족들의 자부심이었고, 또한 한국 사람에게는 조선족을 이해하는 다리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연변에선 백청강씨가 롤모델이 됐다고 해요.
중국에 있는 친구들, 그리고 앞으로 있을 위대한 탄생2 참가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힘들어도 꼭 이겨내고 꿈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그 꿈을 이룰 때까지 피땀을 흘리면서 노력하면 언젠가 꿈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이건 또 저한테 하는 말이기도 해요. 그리고 이제 곧 ‘위탄2’를 하는데, 많이 떨리겠지만 그걸 극복해서 침착하게 한 순간 한 순간 하면 좋겠어요. 오늘은 내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무대 위에서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거죠. 저도 그랬거든요.

백청강씨에게 노래란 무슨 의미인가요?

저에게 노래란 길이에요. 제가 선택한 길이 노래고, 또 제가 걸어야 할 길이 노래예요.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 꿈을 잃지 않게, 용기를 주고 싶어요. 노래를 통해서.

백청강은 최근 MBC 드라마 <계백>의 메인 테마곡을 부르며 본격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많은 좌절도 경험했기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다는 백청강. 오직 노래에 대한 열정 하나만으로 여기까지 달려온 청년, 이제 그는 가수 백청강으로서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모두의 바람대로 진정 초심을 잃지 않는 가수란 어떤 모습일지를 보여줄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서는 길, 그의 미래가 상상되었다. ‘톱스타 백청강’의 콘서트장, 무대에 선 그가 특유의 선한 미소를 띠며 관객들에게 묻는다.

“여러분, 제가 위대한 탄생 우승자였던 거 앙까?”

백청강님은 1989년 생으로 중국 연변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가수를 꿈꾸던 그는 초등학교 졸업 후 음악학원에 입학하여 하루 10시간 이상씩 노래와 춤을 연습합니다.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연변TV 전국 청소년 오디션 1등, 제1회 청소년신인가요제 대상 등을 타며 그 실력을 인정받던 그는 2010년 말부터 시작된 MBC 스타오디션 프로그램 ‘위대한 탄생’에 참가하여, 7개월간의 경합 끝에 최종 우승자가 됩니다.

한 번쯤 그 입장에서 생각해준다면, 서로의 차이는 오히려 서로를 알게 되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요?

도로 위의 무법자 ‘김여사’가

내 아내일 줄이야

이대영 42세. 직장인. 충남 아산시 배방읍

몇 개월 전 퇴근 후 집에 오니, 아내가 조용히 나에게 말을 한다. “당신, 며칠 차 타지 마.” “왜? 사고 났어?” “아니, 주차장에서 차 빼다 기둥을 박아서 문짝이 찌그러졌어. 좀 심해. 펴올 테니까 다음에 타.” “끙~~”

그리고 고친다 고친다 하더니 바쁘다며 안 고친 지 3일째. 둘째를 학교에 태워다 줄 일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주차장에 내려갔다. 순간 허걱! 오마이 갓뜨! 어찌 이럴 수가!

운전석 문짝 부분이 푸~욱, 조금 찌그러졌겠지 했는데 이건 상상 초월이었다. 어떻게 이 지경까지 갔는지 물어보니, 차를 빼는데 재채기가 나왔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으로 보고 말로만 들었던 김여사가 내 아내일 줄, 진정 난 몰랐다. 결혼 후 운전면허를 딴 아내는 그렇게 잊을 만하면 한 건씩 터트리며 ‘김여사’를 떠올리게 했다.

결혼 전에는 장점이, 결혼 후에는 단점이 보이며 환상이 깨지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단다. 나 또한 그러했다. 금전적인 어려움으로 아픔을 겪었던 나는 신용을 목숨처럼 중요시한다. 은행의 대출금은 물론이고 공과금 회비 등 금전적인 거래는 절대로 연체를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아내는 달랐다. 납기가 지나 가스가 끊어진다고 연락이 와야 부랴부랴 가스 요금을 내고 한두 달 연체는 기본으로 아는 대범(?)한 여자다. 일과 가사 육아 등 다른 일에는 똑 부러지는 아내인데 왜 유독 그 부분에만 그런지 이해할 수 없었다.

황주리 작. <안경에 관한 명상> 안경 위에 아크릴릭. 2004.

하지만 아이를 기를 때 보면 엄마는 역시 다르구나, 느낄 때가 많다. 초등학교 3학년인 큰아들은 올 초 피아노 콩쿠르에서 2위를 하고, 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약할 정도로 피아노와 바이올린에 재미를 붙이고 있다. 그런 큰아이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2학년 초 바이올린이 하기 싫다며 엄마에게 짜증을 낸 것이다. 난 “하기 싫으면 때려쳐”라고 야단을 쳤지만 아내는 달랐다. 큰아이를 작은방으로 데려가 왜 하기 싫은지 들어보고는 문제점을 찾았다. 레슨 선생님이 내주는 너무나 많은 숙제에 스트레스를 받아왔고 그것이 폭발을 하고 만 것이었다. 숙제를 반으로 줄이자 아이는 더 이상 짜증을 내지 않았고 점점 실력이 향상되어갔다.

아내와 처음 만난 건 1996년 제주도에서였다. 5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했는데 그때 금전적으로 참 힘든 시기였다. 아내는 내가 처한 상황을 알면서도 나를 평생의 반려자로 선택해주었다. 힘들어할 때마다 “함께 헤쳐 나가자”며 용기를 준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와 내 가족이 누리는 행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남녀의 차이로 인해서 벌어지는 문제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부부는 서로의 반쪽이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줘야만 완전한 하나가 될 수 있는 불완전한 관계인 것이다. 남녀가 가치관과 생각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존경할 때 하나의 부부로서 완전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을 것이다. 여보, 연체를 해도, 주차장 기둥을 박아도 괜찮다, 당신을 만난 것만으로도 난 행복한 남편이니까.

 

진정 갈대 같았던 건

여자 아닌 내 마음이었어라

이진석 34세. 직장인.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고3 때 나는 익산에 사는 한 여자아이와 펜팔을 했다. 그러던 중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고, 친구들과 함께 3:3으로 만나기로 했다. 드디어 여자아이들이 나왔다. 내 펜팔 친구는 작은 키의 귀여운 아이, 정말 맘에 쏙 들었다. 이후 펜팔은 계속되었고, 전화 통화도 했다.

그러던 중 대학 문제로 정신이 없을 때였다. 며칠간은 집중해야 할 것 같아서 펜팔 친구에게 전화해 대학 진학 문제로 당분간 연락을 못 할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일주일쯤 후 다시 연락을 했는데, 반응이 쎄~ 하면서 “내가 보낸 편지 못 받았어? 편지로 이야기 다 했으니 그만 연락해”라고 하는 게 아닌가.

띵~. 날벼락을 맞은 것 같았다.

갑자기 왜 그런 거지? 난 정말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을 뿐인데. 대학 문제를 마무리하고 멋지게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그게 서운했던 걸까? 내가 자기를 마음에 안 들어 한다고 생각한 걸까? 어떻게 이렇게 쉽게 변하지?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대학 진학을 했다. 동아리 활동을 하며 친구들과 허물없이 지내던 중 한 여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도 왠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대학교 축제 때 동아리를 대표하여 댄스 대회에 나갔다. 그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더욱 열심히 연습했다. 아~ 하늘이 그걸 알았나, 대상까지 타 버렸다.

축제가 끝난 후 뒤풀이로 술자리가 만들어졌다. 운명처럼 그 친구 옆에 앉게 된 나는 그 자리에서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하지만 친구 왈 “나 결혼 안 할 거야. 우리 동기잖아.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무튼 이 반응은 거절, 그러면 그동안 나에게 했던 행동들은 뭐지?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황주리 작. <식물학>

캔버스에 아크릴릭. 91x117cm. 2009.

2학년이 되었다. 신입생 중 정말 맘에 드는 여자 후배가 한 명 있었다. 그 후배는 군대 갈 때 입대 장소까지 따라와 주고 편지도 전해주었다. 훈련 중에 편지도 주고받고 정말 좋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첫 휴가를 받고 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친구들 말이 그 후배가 나를 좋아한다며 고백하더란다. 더 망설일 게 없었다. 고백하기로 마음먹고 만났는데 후배가 먼저, “생각해 봤는데… 전 그냥 선후배 사이였으면 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띵~. 나는 한마디도 못 했는데. 그 뒤 더욱 황당했던 한마디. “선배와 전 같은 성이잖아요.”

이건 또 뭔 소리? 나한테 그동안 그렇게 예쁘게 편지를 보낸 건 뭐지? 나를 좋아한다고 얘기했다면서? 내가 군대에 있었던 게 문제인가? 좋아한다면 나라면 기다릴 텐데. 아~ 정말 여자를 모르겠다.

제대 후에도 그렇게 또 많은 여자를 만나고 헤어졌다. 다른 사람은 잘만 사귀는 것 같은데, 나는 번번이 연애 초입에서 이별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여자 문제로 힘들면 혼자 이겨보려고 노력도 많이 했다. 자전거 여행도 가고, 노래방에서 소리도 질러보고 남녀의 차이에 대해 다룬 책도 보고, 선배들에게 상담도 많이 했다. 외모를 멋있게 하기 위해 술도 안 마시고 다이어트에 돌입해 보기도 했다. 때론 이러면 여자들이 안 좋아했잖아, 이래야 여자들이 좋아하잖아, 하고 얽매이는 마음 때문에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더욱 힘들었다. 아, 결국 나는 더 이상 여자에 연연하지 않고 쿨~하게 이 세계를 떠나기로 결심했으니….

그렇게 마음에서 여자를 놓는 한순간 불현듯 깨침이 왔다. 내가 정말 몰랐던 건 진정 여자였을까? 정작 갈대와 같았던 건 내 마음이 아니던가?

나부터 알아야겠다, 나부터 알아야 참사랑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남자는 하늘이 되고픈 어린아이,

사랑해주고 기다려주면 돼

김정숙 68세.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괴안동

나는 7남매 중에 맏딸로 태어났다. 아버님이 한학자셨는데 남자와 여자의 도리에 대한 교육을 항상 시키셨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여자는 결혼하면 그 집의 귀신이 되어야 한다’ 등의 이야기를 늘 들으며 자랐다. 그런 문화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새 남자들을 어려워하고 함부로 하지 못하는 마음이 있었다.

결혼해서도 그런 생활은 이어졌다. 연애 시절 포근하고 자상한 사람이었는데, 결혼해 보니 완전히 달랐다. 친구 좋아하고 술 좋아하고…. 가정은 그냥 하숙집이었다. 매일 밥상 차려놓고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일이 반복되니까 속상하고, 가정을 꾸렸으면 가정에 충실해야지 남자들은 왜 그러나 싶고 참 힘든 시절이었다. 언성을 높이며 싸우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저 순종하며 사는 게 도리인 줄 알았다.

아들 둘을 낳았다. 남편한테 기대했던 것이 어긋나니까 자식한테 내 모든 바람이 갔다. 사랑이라 생각하며 이런저런 간섭을 하니 아들들도 힘들어했다.

나이가 먹어갈수록 내가 불쌍하고, 외롭고 고독했다. 그래도 세월이 지나면 사람이 변한다더니 남편이 육십이 넘으면서 조금씩 변해갔다. 내가 몸이 아파서 수술도 하고 그러면서 부인의 소중함이나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한 많은 여자의 일생으로 남을 뻔했던 나의 기구한 인생, 그즈음 아들 소개로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마음을 버리며 남편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미움이 한꺼번에 확 올라와 힘들기도 했지만 버리고 버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아가던 즈음 남편도 수련을 시작했다.

남편이 수련하고 한 달쯤 지났을 때였다. 남편이 “정말 나 만나서 고생 많았다.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내 생애 이렇게 울어보기는 처음이다. 내가 왜 이렇게 살았는지 후회를 많이 했다”며 미안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 자존심이 강해 잘못해도 잘못했다는 말을 못 하는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나도 너무 놀랐다. 그 이후로도 남편은 참 많이 변했다.

황주리 작.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60x80cm. 2000.

매사에 내 의견을 물으며 인격적으로 대해주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는 공사 때문에 더운물이 안 나왔는데, 내가 샤워를 한다니까 물을 데워서 갖다주었다. 너무 놀라 “내가 먼저 죽었으면 이런 호강을 다른 사람이 할 뻔했네” 하며 웃었다.

이제 와 보면 젊었을 때 왜 그렇게 잠 못 자고 신경 쓰며 들들 볶고 난리를 치며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때 되니까 가정으로 돌아오건만 조금만 남자의 세계를 이해하고 기다려줬으면 어땠을까.

우리 시대야 남자, 여자가 달랐지만 지금은 여자든 남자든 똑같이 공부하고 사회생활도 똑같이 한다. 여자는 자기 없이 살아온 세월이 있어 시대의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데 권위주의적인 습관이 밴 남자들은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맞벌이를 하는데도 아직도 가사는 여자 몫인 가정도 많은 것 같고, 어디 모임에서도 보면 아직까지도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남자들도 많이 본다. 그렇게 권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변화가 더디고, 힘들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설령 남자가 변화하지 않더라도 여자는 남자가 빨리 이 시대에 따라올 수 있게끔 좋은 얘기로 설득을 하며 기다려주는 게 필요하다.

남자는 어린애 같아서 잔소리하기보다 칭찬해주면서 “힘드니까 좀 거들어줘” 하고 부탁하면 잘 들어준다. 아무리 여자 남자가 다르더라도, 서로 인격적으로 대해주고 아껴주면 누구나 재미난 가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한 번쯤 그 입장에서 생각해준다면, 서로의 차이는 오히려 서로를 알게 되는 큰 기쁨이 되지 않을까요?

‘지윤’이와

‘윤식’이 사이

윤지윤 30세. 선박검사관. 부산시 수영구 수영동

나는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는 말에 유감이 많다. 여성은 여성이고, 남성은 남성이지, ‘스럽다’라는 표현은 왜 필요했을까? 이미 짐작했겠지만 나는 남자 같은 아이었다.

갓난아기 때 나의 어머니는 “아드님이 참 잘생기셨어요”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사촌들도 모두 남자였다. 남자 형제들 사이에서 오빠들의 옷을 물려 입고, 권총 장난감을 들고 뛰어다니며 오빠들이 노는 대로 놀면서 컸다.

그러다 중학교, 고등학교는 모두 여자들만 있는 학교로 갔다. 나는 여전히 외모도 성격도 ‘남자 같은’ 아이였다. 교복이 아니면 거의 체육복을 입고 다녔다. 내가 여자였지만, 오히려 여자 아이들을 보면서 이해가 안 되는 부분도 많았다. 사소한 것에 삐치고, 질투하고, 뭔가 한 단계를 더 거친 후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역시나 이과 계열 쪽에 흥미를 느낀 나는 공과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 남자 동기들도 선배들도 후배들도, 여자애들에게 느끼는 불편함 없이 나를 대해주었다. 짧은 머리에 바지만 입고 다니며 남자들을 스스럼없이 대하는 나는 거의 여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공강이 생길 때면 인문대학 앞에서 선배들과 앉아 지나가는 여자들의 외모에 점수를 같이 매기곤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그 여자 분들께 참 미안하다.

결국 나는 선배로부터 남자 이름을 하사받게 된다. 바로 ‘윤식’이다. 2학년 때 그 이름을 받았으니, 3년간 윤식이라 불렸다. 여학생은 항상 첫 줄에 앉아야 한다는 궤변을 펼치던 한 교수님이 계셨는데 이상하게도 나에게만은 그 첫 줄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공식적으로 윤식이로 명(!) 받던 때가 그때였다.^^

황주리 작.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62cm. 2010.

졸업 후 나는 역시나 남자들이 득실거리는 조선(造船) 쪽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불편한 건 없었지만, 간혹 여자라서 받는 편견도 있었다. 선박 설계 감리를 한 후, 검사자의 이름을 찍는데, 내가 여자라는 걸 알고 나면 담당자를 바꿔달라고 하는 것이다. 자신이 설계한 것을 감리한 사람이 여자라는 것을 알고, “배 잘 알아요?” “몇 년 일했어요?” 하며 대놓고 무시한 분도 있었다.

그럴 때면 ‘왜 남자들은 여자를 무시할까?’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내 안에도 그런 마음이 똑같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마음수련을 하면서였다.

자라면서 ‘남자 같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들었고, 그럴 때면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나보다 더 크고 더 힘이 세고 더 빠르게 달리는 오빠들을 보면서 나도 저런 강인한 남자였으면 하는 생각이 무의식중에 생겼던 것이다. 예쁜 것에 관심 많은 여자들의 취향에 나는 아닌 척하면서 남성성을 동경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너무 한쪽으로만 지나치게 치우치며 살았구나 하는 반성도 되었다.

수련을 하며 그런 마음들을 덜어내고 나니 예전엔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구두나 여성스러운 옷들도 예뻐 보였다. 좀 꾸미고 다니라는 소리도 많이 들었는데, 지금 옛날 친구들을 만나면 다들 사람 됐다고 한다. 여성스러워졌다는 말일 것이다. 굳이 ‘여성스러워져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굳이 남자 같아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어느 사회나 여성과 남성이 있고, 어느 사람에게나 여성성과 남성성은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잘 조화를 이루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아내의 잔소리가

4절까지 이어질지라도

백일성 41세. 직장인.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석수1동

며칠 전 중학생 아들 녀석 학원 문제로 아내와 얘기를 나눴습니다. 종합반으로 옮기게 되면서 부담스러워진 학원비 걱정에 아내의 푸념이 이어졌습니다. 남자인 저로서는 이왕 옮기기로 결정한 거 더 이상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를 막고자 아내에게 넌지시 한마디 했습니다.

정말 맹세코 좋은 뜻에서 내뱉은 한마디였습니다. 제 좌뇌의 중추 신경을 따라 측두엽을 거쳐 구강 구조의 세 치 혀를 통해 무심코 흘러나온 그 한마디는 다름 아닌 “아껴 써…” 딱 이 세 음절이었습니다. 이 세 음절이 아내의 달팽이관을 거쳐 아내의 전두엽 감각 중추를 자극하였는지 아내의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습니다. 짧은 순간에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아내의 말은 느낌만 표현하자면 이렇습니다.

“아껴 쓰라고?… 내가 언제 흥청망청… 요즘 물가 생각이나 해봤… 우리 살림에 더 이상 뭐… 15년 동안 허리띠 졸라… 남들 다 한다는….”

1절이 끝난 듯 잠시 숨을 몰아쉬고 애국가 2절에 들어갑니다. “남산 위에 저 소나무~도 하물며 철갑을 두르는데 내 몸에 걸칠 옷 한 벌 사려고 해도 몇 번을 들었다 놨다, 결국 애들 옷 사들고 오는 심정을….”

그 이후 3절, 4절도 이어졌습니다.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아내의 말에 문득 네덜란드의 구멍 뚫린 둑을 주먹으로 막았다던 소년에게 지금 제 아내의 입도 한번 막아 달라는 부탁을 해보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결혼 15년 차 남편인 제가 오른 학원비만큼 좀 더 절약하자고 그냥 무심코 던진 ‘아껴 써’라는 세 음절이 아내에게는 애국가 4절의 한숨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 긴 한숨 소리 앞에 입을 꼭 다문 저에게 아내의 눈빛이 뭐라고 대꾸 좀 하라는 눈치입니다. 하지만 딱 한마디 하고 애국가 4절을 들었는데 주어, 동사, 목적어로 구성된 3형식 문장이라도 한마디 했다가는 아내는 팔만대장경이라도 낭독할 기세입니다.

그 이후로 우리 부부는 화성 남자 금성 여자처럼 멀리 갈 것도 없이 거실 남자 안방 여자가 되어 몇 시간을 보냈습니다. 불편한 몸을 소파에서 뒤척이다 안방 문을 살며시 열었습니다. 어두운 방 TV 불빛에 얼굴만 환히 비추고 있는 아내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합니다.

황주리 작. <돌에 관한 명상>

돌 위에 아크릴릭. 2004.

“형우 엄마 맥주 한잔 하러 갈까?” 제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내는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습니다. 시원한 밤공기를 마시며 집 앞 호프집으로 향하는 저의 팔짱을 끼고 아내가 방향을 바꾼 곳은 편의점 앞이었습니다.

“아껴 쓰라며? 캔 두 개만 사와.” 뽀로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는 아내를 뒤로하고 캔 맥주 두 개를 사와서 아파트 분수대 앞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캔을 따달라며 내미는 아내. 15년 동안 아직도 맥주 캔을 못 따고 항상 저에게 맡깁니다. ‘치~익’ 소리를 내며 약간의 거품이 올라오자 제 손에서 캔을 낚아채 거품을 빨아 먹는 것도 15년 동안 한결같습니다. 입술에 거품을 묻힌 채로 아내가 입을 엽니다.

“자기야~ 내가 당신한테 무슨 해결책을 듣겠다고 돈 타령한 건 아니야. 난 그냥 부부간에 서로 말하고 들어주고 같이 고민해 달라는 거야.”

분수대에 흩날리는 물방울 때문인지 아내의 눈망울이 촉촉합니다. 무심코 내뱉은 말의 미안함을 전하며 아내에게 건배를 제안했습니다. 아내는 맥주 한 캔을 시원하게 목구멍으로 넘깁니다. 그 모습에 제가 한마디 했습니다.

“여보… 아… 껴~~~~~ 먹어~” ㅎㅎㅎ

남녀로 만나서 연인이 되고 부부라는 이름으로 15년을 살았는데도 아직도 의사소통에 미흡한 점이 많아 이렇게 다툴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바라보고 있는 분수대처럼 같은 공간에서 끝없이 순환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늘도 아내의 입술에 묻은 맥주 거품을 손으로 닦아줍니다.

 

우리 반 남자애들은

‘아이돌 스타’가 아니었던 것이다

정화경 고등학교 3학년. 충북 청주시 상당구 율량동

나는 언니만 두 명 있고, 여중을 나와서 남자들하고 지낼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다 드디어 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을 가게 되었다. 앞으로 한 반에서 남자아이들이랑 함께 생활하겠구나 생각하니, 설레기도 하고 쑥스럽기도 했다.

나는 FT아일랜드라는 그룹을 좋아한다. FT아일랜드는 밥을 먹을 때도 잠에서 막 깼을 때도 멋있고 생활 하나하나가 화보처럼 아름다울 것 같고 나한테도 언제나 너그러울 것 같았다. 그렇게 막연히 아이돌 스타를 보면서 동경해 마지않던 남자들. 하지만 환상은 와르르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자다가 일어날 때면 반쯤 풀린 눈으로 침을 질질 흘리질 않나. 점심시간엔 반찬 하나도 누구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집념으로 무장한 채 초스피드로 밥을 먹고, 다 먹은 후에는 엄청난 트림으로 소화됐음을 알려준다. 스스럼없이 방귀를 뀌어대며 오늘 뭐 먹었는지를 적나라하게 알려주는 남자애들. 도대체 남자애들은 왜 이러는지, 정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학교에서 빵 만드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는데, 여자 후배들은 “빵이 이 정도로 부풀어 오르면 되는 건가요? 앞으로 어떡해요?”라며 세세하게 물어본다면, 남자 후배들은 “누나, 이거 다 됐어요?” 하며 딱 필요한 것만 묻는다.

동아리에서 봉사 활동도 많이 가는데, 그럴 때도 남녀의 차이를 많이 느낀다. 봉사 활동을 가면 적적했던 어르신들이 반갑다고 맞아주시는데 남자아이들은 쑥스러운지 선뜻 다가가서 “감사합니다”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뒤로 숨는 것이다. 반면 여자애들은 뭐든 도와드리려고 하고 말도 싹싹하게 한다. 청소 등 여러 가지 일을 도와드릴 때 어르신과 말 한마디 안 하고 묵묵히 일만 하는 남자아이들을 보면서 “으이구, 봉사 활동까지 와서 꼭 이런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쑥스러움을 많이 타던 남자아이들도 공연이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어르신들이 신청하는 노래도 멋지게 불러드리고 더욱더 오버해서 춤도 추며 즐겁게 해드린다. 결국 끝나고 돌아갈 때쯤에는 남자아이들이 우리보다 더 어르신들께 많은 도움을 드리고 가는구나 싶다.

말을 안 할 뿐 남자아이들은 마음속으로 미리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행동하는구나 하는 걸 느낄 때면, 칠칠치 못하게 보이던 애들이 아이돌 스타처럼 멋있어 보일 때가 있는 것도 솔직히 사실이다.ㅋㅋ

여자들끼리 있으면 속에 있는 이야기까지 다 할 수 있어서 좋고, 남자와 같이 있으면 재밌게 놀 수 있어서 좋다. 남자아이들이 이해가 안 갈 때도 있지만, 그래도 우리가 쉽게 들지 못하는 무거운 물건을 들어서 우리가 원하는 곳까지 가져다주고 고맙다고 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넘어가줄 때, 집까지 가는 길이 많이 어두우면 집 앞까지 바래다주고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을 볼 때 남자들의 묵묵함이 왠지 감사함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TV 속의 화려한 스타보다, 든든하게 옆에 있어준 우리 반 남자아이들이 더 멋있을 때도 꽤 있었다.ㅋㅋ

황주리 작. <그대 안의 풍경> 캔버스에 아크릴릭. 130x162cm.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