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정덕영
“인도네시아 부톤 섬에는 찌아찌아족이 삽니다. 그들은 말은 있지만 글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말을 지키기 위해, 많은 문자를 사용해 보았으나 한글이 그 말에 가장 적합하다 하는군요.
이제 우리 훈민정음의 대단함을 나누기 위해서 갑니다.”
2010년 1월, 나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향해 서서 마음으로 말했다. 찌아찌아족은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으로, 부톤 섬에 약 8만 명이 살고 있다. 독특한 전통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글이 없다 보니 그들의 말로 된 역사서도, 동화책도 하나 없었다. 고유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들은 지난 2008년 8월 한글로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따리마까시(감사합니다)’, ‘인다우뻬 엘루이소오(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한글은 미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바람 소리, 학이나 닭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도 능히 써낼 수 있다” 했던 것처럼, 한글은 다른 나라의 언어도 써낼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내가 아는 한 물리적인 영향력 없이 한 나라의 문자가 다른 나라로 전파된 일은 한글이 처음 아닐까 한다.
2010년 3월, 드디어 까르야바루 초등학교에 들어선 나는 4학년 2개 반을 중심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우선 24개의 자, 모의 명칭과 음가를 가르쳤다. ‘ㄱ, ㄴ, ㄷ, ㄹ…’ ‘기역, 니은, 디귿, 리을…’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하게 발음을 들려주고 또박또박 써주었다. 24개의 자모음을 다 이해한 후에는 ㄱ+ㅏ, 자음+모음을 하면 ‘가’가 되는 원리를 가르쳤다. 받침 없는 한 글자를 익힌 후에는 두 글자 단어, 받침 있는 한두 글자 단어를 가르쳤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낄 수 있도록, 그림도 그리고, 동요도 가르쳐주는 등 즐겁게 수업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숙제를 내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삐뚤빼뚤 써온 아이도 있다. 한결같은 고집으로 백지를 내밀며 씩 웃는 아이도 있다. 눈이 깊고 이마가 툭 튀어나온 암시르는 장난은 심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글 공부도 열심히 한다. 막물함자는 과묵하고 점잖다. 반면 막물함자와 단짝인 알까기닝은 말썽 부리는 학원에라도 다녔는지 한번 발동 걸리면 내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하띠까는 학교 앞 문구점집 딸로, 어떤 숙제를 내도 묵묵히 해오는데, 반듯하게 써내려간 글씨를 보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아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웃음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한글 수업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찌아찌아어로 ‘사팡가’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친구’라는 뜻인데 ‘ㅁ’을 붙이면 ‘너(당신)의 친구’가 된다. 웃음을 띤 채 나에게 ‘사팡감’이라며,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이마에 뺨에 내 손등을 갖다 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들에게 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한글을 정말 잘 가르쳐야겠구나 하는 책임감이 더욱 커지곤 했다.
까르야바루 초등학교는 각 학년마다 두 반씩 있는데, 한 반에 열댓 명 정도여서 우리나라 시골 분교 같았다.
나는 한글 교사가 되기 전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하지만 늘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점점 나이를 먹기 전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한 후, 직장을 그만두고 평소 관심 있었던 우리말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문화가족센터에서 결혼 이주민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커다란 보람이었다. 그러다 2009년 훈민정음학회에서 찌아찌아족 어린이들의 한글 교사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특별한 월급 없이 체류비만 지급되는 자원봉사였지만, 기사를 보는 순간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것 같았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다짐했다. 내 인생의 한 토막은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겠다고. 우리나라와는 기후와 풍습이 전혀 다른 이곳에서 생활하며 티푸스와 플루로 인한 두 번의 입원, 더위에 체력이 고갈되어 건강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나날….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 반드시 그곳에는 그 뜻을 도와주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사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한글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은 완벽하지 못할지라도, 찌아찌아족의 문자로서 한글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그날을 위해 초석을 다지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야 했다.
우선 초급 한글을 배운 아이들이 1년 후에 배워야 할, 중급편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 찌아찌아어 사전’을 만드는 준비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진행한 것은 찌아찌아족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사 양성 과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찌아찌아 마을의 다른 4개 학교에서도 한글 교육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그 대안으로 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것이다.
2010년 12월 2일, 까르야바루 초등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어느새 1년이 흐른 것이다. 나에게 한글을 배웠던 4학년 아이들이 모두 교복을 차려입고 왔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교복을 입는데, 고작 1년 있던 한글 선생이 떠난다고 교복까지 차려입고 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서투르게나마 한국어 혹은 한글로 쓴 편지를 주는 아이들, 가슴이 뭉클해지고 목은 자꾸 멨다.
한글 교사 양성 과정에 참여했던 선생님들은, 한글을 접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한글이 우리 찌아찌아족의 공식 문자가 된 것이 맞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학교에도 한글 교육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서는 내 손에 땅콩 두 봉지와 부톤 섬 지도를 쥐어주었다.
부톤 섬의 지도는 언제나 가슴에 남아 있다. 1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 전해주고 보여줘야 할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부톤 섬, 이곳에 한글을 만난 찌아찌아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한글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하는 찌아찌아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길의 표지판이 한글로 적혀 있다. ‘잘란’은 찌아찌아 말로 길. 이 길의 이름은 ‘띵까하을리ㅂ우’라는 뜻이다. 사진 제공 <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서해문집)
정덕영 님은 서울 생으로 제약회사에 20년간 근무했습니다. 평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님은 서강대 한국어 교원 양성 과정을 이수한 후, 2년 가까이 결혼 이민자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으며, 2010년 한 해 동안 인도네시아 부톤 섬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2011년 초 귀국 후 다시 찌아찌아족 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님은 최근 첫 번째 저서, <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서해문집)를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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