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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사는 내가 참 좋아요” 동대문시장에서 만난 열혈 청년 박상준, 라재원씨

패션의 중심지 동대문시장. 의류를 비롯해 옷의 기초 자재인 원단부터 단추, 레이스 장식 등 부자재를 파는 이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손님들과 도소매 상인들로 늘 북적인다. 일명 총성 없는 전쟁터라 불리는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는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뛰어들었다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중 박상준(31)씨와 라재원(25)씨를 만나보았다.
취재 김혜진 사진 최창원

“4년간 경비 업체에서 일했어요. 청와대 경호원으로 일하는 삼촌이 멋있어 보여서 경호원이 되고 싶었던 건데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너무 다르더라고요. 영화에 나오는 보디가드처럼 누군가의 안전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기계가 다 해주고 출동해서 가면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회의를 많이 느꼈죠.”

박상준씨가 동대문 시장과 연이 닿은 건 4년 전. 이곳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게 계기가 됐다. 보기엔 1~2평 남짓한 자그마한 매장이지만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보람 있다”는 주위 분들의 조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과도 통했다. 박상준씨의 후배 라재원씨도 자기 얘기를 덧붙였다.

“친구들 보면 좋은 대학 나와서 취업하는 게 다잖아요. 자기가 뭘 해야겠다는 게 없고, 그게 싫었어요. 부모님은 공부해라, 했지만 내 인생을 남들처럼 떠밀려서 살고 싶지 않았어요.”

라재원씨는 옷을 사러갔다가 가게 직원으로부터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듣고 재미를 느껴 동대문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한다. 평소 월급의 반은 옷을 살 정도로 옷에 관심이 있고 좋아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순간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 일식집 주방에서 일하면서 월급도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상준씨가 있는 점포로 라재원씨가 후배 점원으로 들어오면서 만나게 된 것. 라재원씨는 원단 보는 일, 영업 등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던 박상준씨를 가리켜 “든든한 지원군이자 의지가 되는 고마운 형”이라고 말한다. 이에 박상준씨의 라재원씨에 대한 칭찬이 이어진다.

“대개 여기 오는 젊은 애들 보면 10명 중 8명이 이틀 만에 그만두거든요. 그만큼 힘든 일이에요. 이 친구도 보니까 얼굴이 하얗고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며칠 못 버티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항상 웃으면서 열심히 하는 걸 보니까 마음을 열게 되더라고요.”(웃음)

이곳에 처음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속칭 ‘밑바닥 일’은 바로 원단 정리다. 밤새 지방에서 올라온 10~13kg이 넘는 수많은 원단을 창고로 나르고 자르고 정리하는 것. 하루에 많이는 200절(개)까지 나르는 등 고된 작업이지만,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도 묵묵히 하시는 걸 보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한다.

“시장 일은 다음 날이 없어요.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날 일은 그날 마무리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거든요. 부지런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곳이죠. 나이, 지위 관계없이 사장님도 직접 원단을 나르는 걸 보니까 정말 대단해 보이고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하루 일과는 아침 8시부터, 하지만 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다. 창고의 원단 정리, 점포 관리, 거래처 관리, 영업 등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하루가 간다. 일주일에 2~3번 동대문 밤시장(의류도매시장)으로 영업을 나가는 날엔 새벽 1시까지 일하는 게 다반사. 때론 힘들지만 발로 뛴 만큼 거래처 사장님들이 먼저 알아봐 주신다거나, 자신들이 다룬 원단이 옷으로 만들어지고 그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볼 때면 보람을 느낀다 한다.

“예전 같으면 조금만 힘들면 그만뒀을 거예요. 근데 이젠 그런 삶이 제일 두렵다는 걸 알죠. 인내가 주는 기쁨을 배우는 것 같아요. 요즘은 새벽 5, 6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데 부모님이 부지런해졌다고 인정해 주실 때 기분 좋죠.”

두 청년은 “몸은 고되지만, 선택한 일에 대해 후회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막연히 남들처럼 살아야겠다며 직장 생활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게 너무 아까웠다는 그들은, 이곳에서 결코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하나하나씩 일궈가면서 자수성가를 하신 어르신들을 뵈며 삶의 겸허함을 배우고, 자신들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시는 동료이자 선배들의 깊은 애정 속에서 사람 사는 정을 깨닫고,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땀의 결실을 인정해주는 이곳이 그들에겐 가장 소중한 일터이자 삶의 현장이라 한다.

이들의 앞으로의 계획은 동대문시장에 내 가게를 차리는 것.

“어른이 되어가는 거 같아요. 예전엔 참 개념이 없이 살았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제 모습이 참 좋아요.”(라재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마음 자세가 달라져요. 하나라도 더 알아야 손님들한테 다가갈 수 있으니까 뭐든지 열심히 배우려고 하죠. 열심히 해서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요.”(박상준)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망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박상준, 라재원씨. ‘뿌린 만큼 거둔다’는 진리를 매 순간 목격하며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운아가 아닐까. 비좁은 공간, 매캐한 먼지 속에 하루를 보내면서 흘리는 땀방울들이 진짜 삶의 결실로 무한히 빛나고 있었다.

뽀얗게 빛나는 하얀 굴젓의 기품

저의 집은 외가는 내지, 친가는 바닷가였습니다. 덕분에 내륙 음식과 해산물을 다 접해볼 수 있었지요. 어릴 적 친가에 가면 종지에 양념되지 않은 하얀 굴젓이 올라왔습니다. 첫 친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저는 백일이 지나고부터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할아버지 밥상을 공유했는데요, 특히나 굴젓을 잘도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하얀 굴젓을 다시 먹어볼 수가 없었지요. 레시피를 찾다가 할머니 댁에서 가사를 도와주셨던 ‘성관이 아지매’가 생각났습니다.

“아주머니, 안녕하셨어요? 정복입니다.” “아이고~ 반갑다야, 니 인자 몇 살이고?” (중간 생략)

“굴젓은 말이다, 생굴을 사다가 소금에 절여가지고 일주일만 두면 된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소금에만 절여도 물이 충분히 나오고 일주일간 실내에 두면 숙성이 딱~ 알맞다.
그 뒤에는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먹을 때는 무를 얇게 썰어가지고 같이 먹으면 시원하고 좋지.”

 

보통은 굴 1kg에 소금 3큰술이 적당합니다.
일반 소금 대신 해독 작용을 돕는
죽염을 사용하면 더욱 좋답니다.
죽염은 반 큰술 더 넣어주세요.

12월이 제철인 굴은 폐와 피부에도 좋고 칼슘이 많아서 뼈에도 좋습니다. 대부분의 해산물은 찬 음식이고 쉽게 상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젓갈을 많이 만들었는데요, 찬 성질의 해산물을 숙성시키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할 뿐더러 위장이 찬 사람도 잘 먹을 수 있도록 발효가 됩니다. 여기에 고추나 무 등의 맵고 따뜻한 성질의 양념이 첨가되면 비린 맛도 없애주며 한열, 음양의 조화를 맞추어 우리 몸을 더욱 이롭게 해준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울랄라 세션’과 ‘임윤택’에게 경의를…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울랄라 세션’은 <슈퍼스타 K3>에 출연해 까칠한 심사 위원 이승철로부터 “너무 프로라서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극찬을 들을 만큼 실력파 그룹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2세의 리더 임윤택은 위암 4기의 환자로, 나날이 파리해지는 그의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옥죄게 합니다.

10월 28일 방송에선 심사 위원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미션이었는데, 울랄라 세션은 이승철의 ‘서쪽 하늘’을 선택했습니다. 영화 ‘청연’의 OST 곡으로, 여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장진영은 몇 년 후 위암으로 세상을 하직했지요. 임윤택은 의사로부터 자신의 병이 고 장진영과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했습니다. 그  후 임윤택은 ‘서쪽 하늘’을 무척이나 많이 불렀다더군요.

항암 치료 중인 그는 멤버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봐 검진 결과도 비밀로 합니다. 하지만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도 깊어지는 병세를 숨길 방법은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괜찮아요.” 임윤택의 미소가 담담할수록, 지켜보는 가슴은 더욱 미어졌습니다.

자신은 천생 노래하는 놈이라 무대에만 올라가면 다 잊게 된다는 임윤택. 과연 무대에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매번 힘과 열정이 넘치고 신이 났습니다. 하지만 ‘서쪽 하늘’을 부를 때의 분위기는 너무나 절절하게 아팠지요. 대기실에서 통곡이라도 하다 나왔는지, 다른 멤버들의 퉁퉁 부은 눈매는 울었던 기색이 역력한데, 오직 임윤택의 얼굴에만 눈물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서쪽 하늘로 노을은 지고… 이젠 슬픔이 되어버린 그대를… 다시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또 한 번 불러보네….”

지금은 4명의 멤버가 나란히 서서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이름을 다정히 부를 수 있는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사랑하는 날… 떠나가는 날… 하늘도 슬퍼서 울어준 날….” 이미 모든 집착을 내려놓은 듯, 삶과 죽음에 초연한 듯한 임윤택의 표정과 너무 잘 어울리는 가사는 더욱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최종 3팀에게는 ‘100만 원을 알차게 사용하라’는 소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울랄라 세션이 찾아간 곳은, 임윤택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의 소아 병동이었습니다.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깜짝 공연을 하려는 것이었죠. 자그마한 몸에 환자복을 걸치고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어린아이들은, 기대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울랄라 세션이 꾸미는 작은 무대를 지켜보았고 마음껏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임윤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떤 친구에게 ‘다음 입원은 언제야?’ 그랬더니 ‘저 다시 안 올 건데요’라고 하더군요. 그런 데서 제가 더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이 긍정적으로 자신이 나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저도 제 자신이 꼭 일어날 거라 믿습니다.”

진실한 희망은 1%의 확률을 100%로 바꾸어 놓을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디 이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함과 믿음이 모여서, 기적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임윤택씨를 보며 삶의 소중함을 떠올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도 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임윤택씨. 경의를 표합니다, 울랄라 세션.

백두산에서

백두산에 갔습니다. 천지의 축소판인 소천지에 이르자 수피가 하얀 나무들이 파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자작나무 사촌 격인 사스레나무였습니다. 사스레나무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만 자라는 낙엽활엽수입니다. 거친 바람에 밀려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던 사스레나무. 흰 껍질은 거칠게 벗겨져 있고 굽은 가지는 아무렇게나 뻗어 있을지언정, 백두산만은 내가 지키겠노라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습니다.

백두산. 2006년 11월

“저 낭구레 연인 낭구라요.” 조선족 사진작가 맹철(길림성 안도현) 선생의 설명입니다. “바위에 뿌리를 박아 먼저 크고서니, 죽으면서 솔씨를 키워준다 말이오.” 그러고 보니 사스레나무들이 거친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몇몇 사스레나무 주위에는 소나무 종류인 이깔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척박한 땅에 먼저 뿌리를 내리고, 자신은 죽어가도 솔씨를 키워내는 사스레나무. 저 두 나무를 왜 연인 나무라 부르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큰 것은 늘 작은 것을 끌어안는 법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배울 뿐입니다.

사진, 글 김선규

백두산 정상에서 사스레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거센 바람과 모진 추위를 이겨내면서 자라는 나무, 그 강인함으로 바위를 뚫고 자라면서 새로운 생명 또한 품어주는 나무, 이 사스레나무 앞에서 무슨 소원이, 어떤 다짐이 소용 있을까요. 그저 사스레나무처럼 살아야겠습니다.

백두산. 2006년 11월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부산 “오이소~ 보이소~ 또 오이소~”

산이 솥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부산(釜山). 부산의 명소 중 하나인 용두산공원에 오르면 말 그대로 무쇠 솥 같은 산들이 바다와 접하며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만들고 있다. 가파른 산비탈에는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고 앞바다는 어선, 여객선, 무역선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자갈치시장, 깡통시장 등 길게 늘어진 삶의 터전에서 울려 퍼지는 아지매, 아저씨들의 진한 외침. 불과 60년 전의 전쟁의 아픔도 희망으로 일구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온 곳. 그래서 언제든 찾아가면 한 바구니 가득 희망을 담아오는 곳이기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향했다.

사진 홍성훈 글 문진정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걸 보여주마.’

부산 하면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 하면 부산. 시린 겨울 칼바람에도 새벽부터 나와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아지매들을 보며 ‘삶이 힘들 때면 새벽 시장에 가보라’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자갈치시장은 남포동의 ‘자갈치시장’ 신축 건물과 ‘수협자갈치공판장’을 중심으로 하는 갯가 시장 일대를 일컫는데, 해안가에 자갈이 많아 자갈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자갈치시장의 난전에 들어서면 아지매들의 우렁찬 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이소~!”

“아침 6시부터 저녁까지 백 오십여 자루를 갑니다. 칼을 딱 보면 누꺼라는 거 다 알죠. 열심히들 사시니까 일년이면 칼이 다 닳아져요. 몸이 아파도 나와야죠. 제가 안 나오면 할매들이 불편하니까.” 30년 넘게 시장 아지매들의 칼을 갈아주는 칼갈이 김선팔(55)씨. 20년지기 이웃 상인 김선남(57)씨와 기념 사진 한 장 찰칵~!

자갈치 생활 10년은 돼야 자갈치 아지매라 불릴 수 있고, 자갈치 생활 30년은 오래된 것도 아니라는 자갈치시장 아지매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장사를 하고 있는 아지매들에게 이곳은 살아가기 위해서 억척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먼저 인사를 건네고 먼 데서 왔다며 감을 손에 덥석 쥐어주시는 아지매들의 넉넉한 인심에 금세 마음은 푸근해졌다.

 


“내가 요 자리 있었는 지가 53년 됐어요. 22살 때 와서 이 사람들 아무도 없을 때부텀 내가 요기 있었지. 6.25 때 배운 붕어빵 기술로 지금껏 하고 있는 거야.” 속 뜨듯해지는 붕어빵 아지매 안복순(74)씨.

50년 전만 해도 부산은 한국전쟁의 아픔을 지닌 곳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은 용두산공원 근처의 영도다리,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일대로 판자촌을 형성하여 아끼던 물건들을 시장에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그 유명한 깡통시장이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등 각종 과자류를 팔면서 ‘깡통’시장으로 이름 붙여진 이곳은 베트남 전쟁 이후에 군수 물자가 몰려들며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은 좁은 골목길에 모여 있는 70여 곳의 책방을 말한다. 광복 이후 일본인들과 미군들이 남기고 간 잡지뿐만 아니라 피란길에 짊어지고 온 책을 사과 궤짝에 올려놓고 팔던 게 헌책방 거리로 발전했다. 과거 누군가가 보았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보수동 책방 골목. 앞으로 누군가에겐 또 다른 추억으로 남을 수많은 책들이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네들은 고마 꾸준~하이, 건어물 하나 하면 꾸준히 하고 곰장어 장사 하면 꾸준히 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여. 내 할 꺼만 이래 하고 있는 거여.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새해에도 건강하고 애들 착하게 살면 되는 기라.” 건어물 가게 ‘완도집’ 차영복(70) 아지매의 소박한 새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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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생활한 지가 40년이고 내 배를 장만한 게 23년째야. 7~8년 남 밑에 있다가, 원양어선, 참치 잡는 배, 오징어 배 기관장 좀 하다가 처음엔 조그만 배 장만해서 지독한 놈이다 소리 들으면서 알뜰히 살았어. 낮 두세 시에 나가면 아침 7시나 돼야 들어오지. 어군 따라서 무작정 가는 거지. 깨끗하게 자기 분수에 맞게 착하게 살면 돼! 뭐든지 잘못되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내 탓이요, 하면서 열심히 사는 거지.” 오징어잡이 배 김일용(57) 선장님의 인생 철학.

“우리는 고마 꾸준~하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여.”

50년 넘게 곰장어를 팔아 오신 할머니, 40년 넘게 오징어잡이 배를 타온 아저씨, 30년 이상 보수동 책방 골목을 지켜온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변함없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분들이 있기에 부산은 누구에게나 푸근한 고향으로 기억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새해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사람들.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아지매들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우린 은~제든지 예 있을 꺼니께, 은~제든지 오이소~!”

영희이모

어린 시절, 엄마 손 잡고 외갓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두메산골 외갓집에는 외증조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작은 외할머니 슬하로, 입대를 앞둔 큰삼촌부터 여섯 살 꼬맹이 이모까지, 모두 열두 명의 식솔이 와글와글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 영미이모와 영희이모는 참 대조적이었다. 열다섯 살 영미이모는 산골 소녀답지 않게 얼굴이 예쁘장하고 손도 빨라 시키는 일을 척척 잘했다.

하지만 촌스럽게 생긴 열네 살 영희이모는 실수가 많고 동작도 굼뜬 탓에, 식구들한테 자주 지청구를 들었다. 영희이모는 심지어 나와 한동갑인 아홉 살 영옥이 이모한테도 말싸움에서 밀렸다. 나는 영희이모가 부엌에서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래서일까. 영희이모의 두 눈은 밤새 실컷 운 아이처럼 부어 있었다. 나는 영희이모가 오로지 밉게 생겨서 식구들에게 타박을 맞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내가 영희이모 편이라는 걸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정주간으로 갔다. 매캐한 부엌 안에서 영희이모는 혼자 나무를 때서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영희이모는 아궁이 불빛보다 환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아이구, 우리 형식이 왔구나. 추운디 멀라고 왔냐.” 이모는 부뚜막 앞에 나를 앉히고, 내 두 손을 모아 쥐고 호호 입김을 불어 주었다. 그리고 아궁이 불에 고구마를 구워 주었다. 나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앉아 노란 속살로 가득 찬 군고구마를 먹었다. 외갓집에 있는 동안, 나는 아홉 살 동갑내기 영옥이 이모보다 열네 살 영희이모와 훨씬 더 친했다.

그리고 며칠 후, 외갓집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날도 나는 마른 솔가지 툭툭 타는 아궁이 앞에서 영희이모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마솥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 나오고 뜸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모가 솥뚜껑을 열고, 한 솥 가득 있는 보리밥 한쪽에 모여 있는 쌀밥을 주걱으로 펐다. 그리고는 그 뜨거운 쌀밥을 맨손으로 굴려 주먹밥 하나를 뚝딱 빚어내더니, 참기름을 얇게 발라서 내게 주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큰일 날 일이었다. 흰쌀밥은 오로지 외증조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희이모 등 뒤에 숨어 주먹밥을 먹었다. 그 후 우리 집이 멀리 이사를 하는 바람에 방학이 되어도 외갓집을 못 갔고 이모가 만들어주는 따끈하고 고소한 주먹밥을 다시 맛볼 수 없었다.

내가 영희이모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내 결혼식장에서였다. 이모는 평탄치 않는 자신의 삶이 민망한 듯, 있는 듯 없는 듯 다녀가셨다. 친척과 함께 찍은 결혼사진 속에 촌스럽게 서 있는 이모가 쓸쓸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다시 이십 년이 지난 후, 영희이모가 병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과년한 나이가 되어서 촌부의 재처로 들어갔다는 집이었다. 영희이모는 병석에서 몸을 일으켜, 그 옛날 외갓집 부엌에서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아랫목으로 나를 끌어 앉혔다. 그리고 그 옛날 아홉 살짜리 조카를 만난 듯 부뚜막같이 웃었다. 나도 사십 년 전으로 돌아가 열네 살짜리 이모의 거친 손을 잡았다. 타박타박 타박네 같은 영희이모는 다다음해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이모가 건네준 그 주먹밥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다.

최형식

정덕영, 찌아찌아족의 첫 번째 한국인 한글 교사

정덕영

“인도네시아 부톤 섬에는 찌아찌아족이 삽니다. 그들은 말은 있지만 글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말을 지키기 위해, 많은 문자를 사용해 보았으나 한글이 그 말에 가장 적합하다 하는군요.
이제 우리 훈민정음의 대단함을 나누기 위해서 갑니다.”

2010년 1월, 나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향해 서서 마음으로 말했다. 찌아찌아족은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으로, 부톤 섬에 약 8만 명이 살고 있다. 독특한 전통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글이 없다 보니 그들의 말로 된 역사서도, 동화책도 하나 없었다. 고유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들은 지난 2008년 8월 한글로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따리마까시(감사합니다)’, ‘인다우뻬 엘루이소오(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한글은 미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바람 소리, 학이나 닭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도 능히 써낼 수 있다” 했던 것처럼, 한글은 다른 나라의 언어도 써낼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내가 아는 한 물리적인 영향력 없이 한 나라의 문자가 다른 나라로 전파된 일은 한글이 처음 아닐까 한다.

2010년 3월, 드디어 까르야바루 초등학교에 들어선 나는 4학년 2개 반을 중심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우선 24개의 자, 모의 명칭과 음가를 가르쳤다.  ‘ㄱ, ㄴ, ㄷ, ㄹ…’ ‘기역, 니은, 디귿, 리을…’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하게 발음을 들려주고 또박또박 써주었다. 24개의 자모음을 다 이해한 후에는 ㄱ+ㅏ, 자음+모음을 하면 ‘가’가 되는 원리를 가르쳤다. 받침 없는 한 글자를 익힌 후에는 두 글자 단어, 받침 있는 한두 글자 단어를 가르쳤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낄 수 있도록, 그림도 그리고, 동요도 가르쳐주는 등 즐겁게 수업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숙제를 내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삐뚤빼뚤 써온 아이도 있다. 한결같은 고집으로 백지를 내밀며 씩 웃는 아이도 있다. 눈이 깊고 이마가 툭 튀어나온 암시르는 장난은 심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글 공부도 열심히 한다. 막물함자는 과묵하고 점잖다. 반면 막물함자와 단짝인 알까기닝은 말썽 부리는 학원에라도 다녔는지 한번 발동 걸리면 내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하띠까는 학교 앞 문구점집 딸로, 어떤 숙제를 내도 묵묵히 해오는데, 반듯하게 써내려간 글씨를 보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아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웃음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한글 수업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찌아찌아어로 ‘사팡가’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친구’라는 뜻인데 ‘ㅁ’을 붙이면 ‘너(당신)의 친구’가 된다. 웃음을 띤 채 나에게 ‘사팡감’이라며,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이마에 뺨에 내 손등을 갖다 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들에게 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한글을 정말 잘 가르쳐야겠구나 하는 책임감이 더욱 커지곤 했다.

까르야바루 초등학교는 각 학년마다 두 반씩 있는데, 한 반에 열댓 명 정도여서 우리나라 시골 분교 같았다.

나는 한글 교사가 되기 전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하지만 늘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점점 나이를 먹기 전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한 후, 직장을 그만두고 평소 관심 있었던 우리말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문화가족센터에서 결혼 이주민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커다란 보람이었다. 그러다 2009년 훈민정음학회에서 찌아찌아족 어린이들의 한글 교사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특별한 월급 없이 체류비만 지급되는 자원봉사였지만, 기사를 보는 순간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것 같았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다짐했다. 내 인생의 한 토막은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겠다고. 우리나라와는 기후와 풍습이 전혀 다른 이곳에서 생활하며 티푸스와 플루로 인한 두 번의 입원, 더위에 체력이 고갈되어 건강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나날….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 반드시 그곳에는 그 뜻을 도와주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사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한글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은 완벽하지 못할지라도, 찌아찌아족의 문자로서 한글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그날을 위해 초석을 다지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야 했다.

우선 초급 한글을 배운 아이들이 1년 후에 배워야 할, 중급편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 찌아찌아어 사전’을 만드는 준비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진행한 것은 찌아찌아족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사 양성 과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찌아찌아 마을의 다른 4개 학교에서도 한글 교육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그 대안으로 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것이다.

2010년 12월 2일, 까르야바루 초등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어느새 1년이 흐른 것이다. 나에게 한글을 배웠던 4학년 아이들이 모두 교복을 차려입고 왔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교복을 입는데, 고작 1년 있던 한글 선생이 떠난다고 교복까지 차려입고 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서투르게나마 한국어 혹은 한글로 쓴 편지를 주는 아이들, 가슴이 뭉클해지고 목은 자꾸 멨다.

한글 교사 양성 과정에 참여했던 선생님들은, 한글을 접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한글이 우리 찌아찌아족의 공식 문자가 된 것이 맞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학교에도 한글 교육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서는 내 손에 땅콩 두 봉지와 부톤 섬 지도를 쥐어주었다.

부톤 섬의 지도는 언제나 가슴에 남아 있다. 1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 전해주고 보여줘야 할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부톤 섬, 이곳에 한글을 만난 찌아찌아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한글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하는 찌아찌아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길의 표지판이 한글로 적혀 있다. ‘잘란’은 찌아찌아 말로 길. 이 길의 이름은 ‘띵까하을리ㅂ우’라는 뜻이다. 사진 제공 <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서해문집)

정덕영 님은 서울 생으로 제약회사에 20년간 근무했습니다. 평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님은 서강대 한국어 교원 양성 과정을 이수한 후, 2년 가까이 결혼 이민자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으며, 2010년 한 해 동안 인도네시아 부톤 섬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2011년 초 귀국 후 다시 찌아찌아족 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님은 최근 첫 번째 저서, <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서해문집)를 펴냈습니다.

언제나 웃길 준비가 되어 있는 개그맨 김원효

의 ‘꽃미남 수사대’ ‘비상대책위원회’ 등의 코너를 통해 인기를 끌며 최근 그가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피곤한 내색이라고는 없이,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재미난 표정을 지으며, 최선을 다해 답변해 주었기에, 그와 함께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웃음을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개그맨 김원효씨의 삶 그리고 마음 이야기.

최창원,  사진 홍성훈

범인들이 고등학교에 독가스를 살포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10분 안에 학생들을 대피시켜야 하는 상황. 그런데 비상대책위원회의 본부장은 안 된다는 타령만을 늘어놓는다.

“야, 안 돼! 방독면 500개를 언제 구해서 어떻게 씌우고 어디로 대피시키냐? 어? 그러면 우리가 위에 가서 예산 결재해 달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내가 청장님한테 가서 ‘결재 좀 부탁드립니다’ 이러면 청장님이 ‘야! 방독면이 우리 거냐? 비상 물품 아니야? 국방부로 가봐’ 그럼 내가 국방부로 가면 ‘에이, 그건 구호 물품이잖아, 보건복지부로 가야지’ 그럴 거 아냐, 어?” 원맨쇼를 하듯, 속사포처럼 빠르게 이어지는 본부장의 대사에 박장대소하는 사람들.

지난 8월, KBS 2TV <개그콘서트>에 신설된 코너 ‘비상대책위원회’는 관료 조직을 풍자하는 내용과 김원효를 비롯한 최고 개그맨들의 뛰어난 연기력에 시작하자마자 인기를 끌었다.

요즘 인기 최고시죠? 축하드려요.

뜻밖에 너무 많은 사랑을 받게 돼서 몸 둘 바를 모르겠어요. 근데 기분은 되게 좋은데 한편으로는 조심스러운 면도 있어요. 살면서 보면 뭔가 되게 잘될 때 사건, 사고도 많이 터지더라고요. 항상 그걸 되새기면서 겸손하게, 늘 열심히 하겠습니다.

‘비상대책위원회’ 같은 코너는 어떻게 생기게 된 걸까, 궁금해요.

이번 여름에 홍수 피해가 많았잖아요. 뉴스를 보는데, 좀 높은 사람들은 탁상공론을 많이 하더라고요. 되게 급해 보이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아 보이고. 사람이 물에 빠졌는데 빨리 구해야지, 저럴 시간이 있을까, 생각만 많고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만 하고 있네, 그러는 사이 사람은 죽어 나가고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면서 답답했고, 그걸 웃음으로 표현해보고 싶었어요. 제가 코너 속에서 안 돼, 안 돼~ 외치는 건, 정말 ‘안 돼’가 아니고 다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개그를 짜는 거예요.

대사 분량이 굉장히 많던데요, 어떻게 외워요?

보통 한 회 녹화분이 A4용지 두 장 정도 돼요. 외우고 또 외우고 100번도 넘게 외워요. 대사가 저절로, 알아서 나올 때까지 외우는 거죠. 저도 제가 이런 능력이 있는 줄 몰랐어요. 처음엔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했는데, 그냥 해야지, 하면 되지,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까 외워지더라고요. 이 코너는 아이디어 회의도 장난이 아니에요.

제 부분은 제 입맛에 맞게 따로 정리하는데, 이번에도 부산 갔다 올라오는 길에 차 안에서 타이프를 쳤어요. 월화 리허설, 수요일 녹화, 목금 아이디어 회의, 토요일 정리…. 계속 그렇게 돌아가는 거죠. 한 코너, 몇 분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일주일 내내 고생해요. 매 주마다 발명품 하나씩 만드는 거잖아요. 그래도 무대에 딱 섰을 때 많은 분들이 웃어주시면 고생 같은 건 싹 사라져요. 개그맨들은 그때 최고의 쾌감을 느끼죠.

의외로 김원효씨는 학창 시절 매우 조용한 성격이었다 한다. 하지만 연기하는 것을 좋아해 성격파 배우가 되는 게 꿈이었던 그는, 2003년 무작정 부산에서 서울로 상경한다.

연극, 뮤지컬….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보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다 우연히 개그 쪽으로 먼저 인연이 닿았고, 2005년 <개그사냥> ‘진상소방서’로 데뷔한다. 소방서에 걸려온 전화를 진상으로 받는 어눌한 소방대원의 모습으로 자신을 알렸지만, 그것도 반짝이었다.

그 후 <폭소클럽2> 등에서 간간히 코너를 했지만 주목받지 못했고 먹고살 길이 막막했던 그는 피자 배달, 호프집 전단지 돌리기 등 각종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런데 점점 개그보다 아르바이트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어느 순간 ‘이게 아니다, 굶어 죽더라도 개그 아이디어 짜는 데 시간을 더 많이 내자’ 결심했다 한다.

차비가 없어 2시간을 걸어 방송국에 가는 등 어려운 시절도 보냈지만 2007년, 그의 노력은 결실을 맺게 된다. <개그콘서트>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 코너에서 범죄자의 협박에 엉뚱하게 대답하는 형사 역할로 엄청난 인기를 끈 것이다.

그해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남자 신인상까지 받았지만, 또다시 침체기를 맞았다가 올해 다시 전성기를 맞는다. ‘꽃미남 수사대’의 현란한 패션으로 중무장한 경찰서장, ‘9시쯤 뉴스’의 회색 트레이닝에 5대5 가르마를 탄 엉뚱한 기자로 다시 한 번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것이다. 엉뚱한 반전, 어리버리한 말투, 독특한 표정…. 사람들은 ‘김원효’ 하면 떠오르는 ‘김원효식’ 개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웃음을 준다는 건 참 대단하면서도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아이디어는 어떻게 찾으세요?

평소에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발상의 전환을 많이 해요. 처음 진상소방서 할 때도, 보통 소방서에 장난 전화를 많이 하는데, 오히려 소방관이 장난을 하면 어떨까? 상상했어요. “불이 났어요, 빨리 와주세요” 하는데, “죄송한데요, 저희가 밥을 시켜놔서…” 이런 식으로. 그리고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도 보통 항상 형사들이 범인한테 끌려다니는데, 거꾸로 범인이 “내가 네 딸을 데리고 있다” 하면, 형사는 “잘 부탁해” 이런 식으로 가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있는 허점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더 크게 보이게도 하고요. 비상대책위원회에서의 경찰 본부장도, 정복은 입었는데, 5대5 가르마로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면 거기서 웃게 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는 코너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몰랐던 의뢰인의 잘못까지 다 얘기하는 그런 바보 같은 변호사를 해볼까 구상 중이에요.(웃음)

정작 본인이 스트레스받을 때 어떻게 하세요?

아이디어를 실컷 짰는데, 잘렸다거나 하면 스트레스받죠. 하지만 그런 일적인 부분은 순간이고, 마음이 힘든 게 제일 힘든 거 같애요. 제가 개그맨 생활을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건 올해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예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께서 키워주셔서 굉장히 친했거든요. 근데 서울에 올라오고 나서는 잘 못 뵙고 그러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날, 부산에 내려가서 뵀어요. 그런데 발인 다음 날이 바로 녹화 날인 거예요. ‘9시쯤 뉴스’ 할 때였는데, 사람들 앞에서 바보 분장을 하고 ‘네, 김원효 기잡니다, 이렇게 웃길 수 있을까’ 온갖 고민이 드는 거예요. 그러다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할머니한테 그동안 해드린 것도 없으니, 오늘 빵빵 터트려서 요걸 선물로 드려야겠다. 다행히 녹화도 잘됐고, 좀 뿌듯하더라고요.

개그맨,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가진 분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있다면요?

뭐든지 최고보다는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에요. 그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최고가 과연 어디까지가 최고인지를 모르겠더라고요. 또 최고가 되기 위해서만 달리다 보면 서로 도와주지 못하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요. 그래서 그냥 뭐든지 최선을 다하자, 마음먹었어요. 사실 요즘 사람들이 참 야박하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인기 하나에 대우가 확연히 달라지니까. 2007년에도 조금 느꼈지만,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올라가 보니까 그런 것들을 많이 느끼게 되더라고요. 잘나가든 잘 안 나가든 항상 최선을 다하자, 그런 마음으로 살려고요. 그러려면 이 책 이름처럼 항상 마음을 수련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주변 평도 그렇고 참 긍정적이고 성실하신 것 같아요.

아버지가 항상 저한테 뭘 하든지 “감사합니다” 생각하고 살라고 하세요. 한번은 방송 촬영 중에, 귀에 황토가 들어가서 한쪽 귀가 잘 안 들린다고 했더니, “그래도 남은 한쪽 귀가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하고 살아라 하시고, 차 왼쪽을 누가 박았다 하면 “오른쪽은 멀쩡하니까 감사합니다” 해라 하시고. 그래서 우리 집 유행어가 그거였어요. ‘감~ 사합니다.’(웃음) 그렇잖아도 이게 재밌을 것 같아서 코너를 만들면 좋겠다 했는데, 정태호 형이 먼저 ‘감사합니다’ 코너를 만든 거예요. 사람이 생각하는 게 다 비슷하구나 싶었죠.(웃음) 그리고 아버지가 항상 문자도 보내주세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하나하나 차근차근 하다 보면 뜻을 이루게 된다’ 그런 운세 문자요. 제가 결혼한 뒤에는 저희 와이프한테도 보내주세요. 그런 것 보면 아버지는 참 부지런하세요. 저도 답을 매일 보내드려야 하는데 ‘예,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말고는 뭐라 표현할 게 없는 게 죄송하죠. 늘 아버지 덕분에 힘도 얻고, 마음도 고쳐먹게 돼요. 아버지한테 배운 심성, 사랑을 나중에 제 아이한테도 가르쳐주고 싶어요.

김원효씨는 지난 9월 25일, 동료 개그맨 심진화씨와 극장에서 주례 없이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신랑, 신부 모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례자가 없는 한, 차라리 부모님 덕담을 듣는 것이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외동아들이라 외로움을 많이 느끼면서 컸던 그는, 늘 ‘소중한 가정을 이루고 남들과 나누며 사는 것’이 목표였다 한다. 아내 심진화씨 역시 이미 결혼 전부터 고아원 등에서 많은 봉사를 해왔다 한다. 검소하고, 예의 바른, 비슷한 가치관을 지닌 아내와의 결혼 후 훨씬 더 안정되고, 힘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요?

요즘 개그만 하지 말고, 버라이어티로 외도도 하면서 인기도 얻고 돈도 많이 벌지 그러냐는 말을 많이 들어요. 그런데 저는 개그 쪽으로 쭉 열심히 하려고요. 개그에서 나도 미처 몰랐던 나의 능력들을 계속 발견하고 계발해보고도 싶고, 그냥 방송하면서 내 즐거움을 찾아가며 살고 싶어요. 제가 드릴 수 있는 것은 웃음밖에 없으니까, 매 분 매 초 매 시간 매일을, 여러분들을 웃길 수 있는 준비를 하는 데 바치겠습니다.

그는 요즘 운전할 때도 되도록 한 차선으로만 쭉~ 간다고 한다. 옆 차선이 잘 뚫리는 것 같으면 사람 마음이 이쪽으로 갈까, 저쪽으로 갈까, 생각하지만 결국 도착하는 시간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다른 차선에 신경 쓰다 보면 오히려 마음만 복잡해지고, 상황이 더 꼬이기도 하지 않느냐며 웃는다. 단순하게, 성실하게, 어떻게 보면 바보처럼 하나만 보고 살고 싶다는 그에게서 개그맨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졌다.

웃음기 쫙 빠진 진지한 얼굴로 웃음에 대한 각오를 이야기하는 개그맨 김원효. 순간 그 앞에서 책상을 탁 치며 이렇게 말할 뻔했다.

“안 돼~ 그 약속 안 지키면 안 돼~!” 아, 이런 천생 개그맨 김원효에게 중독되었나 보다. 그를 떠올리면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개그맨 김원효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2005년 KBS 2TV <개그사냥> ‘진상소방서’로 데뷔했습니다. 2007년 KBS 2TV <개그콘서트> ‘내 인생에 내기 걸었네’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그해 ‘KBS 연예대상’ 코미디 부문 남자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최근 <개그콘서트>의 ‘9시쯤 뉴스’ ‘꽃미남 수사대’ ‘비상대책위원회’를 통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그는, 언제나 초심으로, 최선을 다해, 매 분 매 초 웃음을 준비하겠다는 천생 개그맨입니다.

이제 비밀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여섯 가지 비밀 이야기.

 

꼭꼭 숨겨둔 비밀을 고백한다는 것만으로

이희윤 24세. 고려대학교 <쿠스파> 동아리 팀장. ‘포스트시크릿 코리아’ 진행

“난 수영할 때 쉬하는 걸 좋아해.”

흥겨운 물놀이 때 화장실 가는 시간도 아까웠던 꼬꼬마.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귀여운 고백으로 시작된 이 영상은 미국의 ‘포스트시크릿’이라는 프로젝트 소개 영상이었다.

자신의 비밀을 익명으로 엽서에 적게 했고 이것은 수많은 미국인들의 고해성사 창구가 된 것이다. 프로젝트가 시작된 2004년부터 지금까지 수십만 통에 이르는 엽서들이 모였다.

작년 말, 이 영상에 푹 빠진 나는 즉시 ‘포스트시크릿’ 책을 구입했다.

책의 구성은 매우 간단했다. 이제까지 도착한 엽서들을 모은 것인데, 그림이 반이요, 글자는 한두 줄이었다. 하지만 난 그처럼 한 장, 한 장에 담긴 무게감에 넘기기 어려운 책을 본 적이 없었고, 여러 밤에 걸쳐 눈물을 흘리며 읽어야 했다.

“아들이 내가 게이란 걸 알게 될 게 두려워요. 그리곤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까 봐”…. 어떤 사연에는 깊이 공감을 하며 위로받고 있었고, 또 한편으로 상당수의 사연에는 공감할 수 없음에 감사했다.

서평에도 말해놓았듯이 꼭꼭 묻어둔 비밀을 어딘가에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쓰는 사람에게는 치유를, 읽는 사람에게는 위로를 주는 것이다.

카이스트 대학생 자살 문제가 끊이지 않던 올해 초, 나는 ‘포스트시크릿’을 한국에서 직접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는 자살 방지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신건강협회로부터 상을 받은 적도 있었다. 먼저 프로젝트 원작자인 프랭크 워렌씨께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허락을 받았고, 마음이 맞는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올해 7월 9일, ‘포스트시크릿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작은 사서함과 블로그를 열었다. 그리고 우선 대학가에 우표를 붙인 엽서 2,000장을 배포했다. 그로부터 3개월, ‘포스트시크릿 코리아’에는 2백여 통의 사연들이 도착했다.

“난 공무원이 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단지 부모님께 부끄럽지 않은 큰딸이고 싶어요. 그래서 그와의 사랑도 자꾸 망설여요. 부끄럽게 생각하실까 봐…” “초라한 내 모습.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아요. 모두들 외모만 따져요. 나도 예쁘다는 말 듣고 싶어요” “나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을 것 같지 않아 너무 두려워요”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엄마를 때리는 게 미워서” “도와주세요, 자신이 없어요” “내가 자살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상처 주지 않을 수 있어서 기뻐요”…. 사연들을 읽으며 같이 울고, 때로 같이 웃는다.

익명의 사람들이 비밀을 공유하며 서로 위안해주는 것을 경험하기도 했다. “3년 전 심장병을 앓던 우리 아가가 천사가 되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가가 우리에게 준 사랑은 영원할 거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아이를 잃은 엄마의 사연을 홈페이지(www.postsecret-korea.blogspot.com)에 올렸고, 얼마 후 자식을 잃은 또 다른 어머니로부터 메일을 받았다. “약이 아니라 이 엽서의 내용 하나가 저를 그렇게 위안해주네요.”

그때 느낀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것이 내가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였으니까.

사람들이 내게 비밀을 적어 보내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랍고 여간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엽서를 통해 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할 수 있었고, 시각을 넓히게 됐다. 낯선 이에게 이처럼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비밀을 고백해주는 모든 분들께 감사하다고 전하고 싶다.

 

몬드리안 작. <선의 구성: 흰색과 검은색의 구성> 유화. 108.4×108.4cm.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국립미술관

 

어머니와 자취방

신호진 29세. 대학생. 서울시 광진구 자양4동

나는 지방 출신 서울 유학생이다. 처음엔 학교 근처의 친척 집에서 신세를 지던 나는 친척 집이 이사를 가게 되는 덕분에 결국 자취를 허락받게 되었다. 얼마나 신났는지 바로 돈을 타와 집을 계약하고, 어머니께서 사주신 부엌살림과 이불과 전기장판 등을 싣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아들 사는 곳을 한번 봐야겠다며 상경을 하셨고, 꼬박 이틀 동안 아들의 첫 자취방 구석구석을 쓸고 닦으셨다.

내가 생각하기엔 참 깨끗하게 잘 정리해놓은 것 같은데, 어머니께서는 “사내놈이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 놓고 사는 게 없어 보인다”고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는 두 번째, 세 번째 자취방으로 이사할 때마다 상경해 며칠씩 청소를 해주셨다.

그러다 대학교 3학년, 내 나이 27살 때였다. 나는 의류학과라는 전공을 살려 옷을 디자인해서 파는 사업을 친구들과 해보기로 했다. 처음 다녔던 학교가 안 맞아, 다시 재수를 하는 바람에 거의 삼수나 마찬가지로 학교에 들어간 나는 남들에 비해 늦었다는 조바심도 있었고, 더 늦기 전에 뭔가 자리를 잡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집에선 모르게 사업을 하겠다며 휴학을 했고 자취방 보증금 1,000만 원도 쓰고 말았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다짐을 했었다. ‘반드시 돈을 벌어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하면 그때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뭔가 꼭 보여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 다짐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친구 4명이 함께 시작한 동업은 점차 힘들어지자 두 명이 포기했고, 나와 다른 친구는, 또 집에는 비밀리에 한 학기 등록금을 받아 사업 자금으로 쏟아부었지만 결국 폐업을 하고 만 것이다.

그때의 좌절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부모님 모르게 돈만 까먹고,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고. 그 힘든 마음을 몇 달간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조금씩 내 마음을 돌아보니 정말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한방에 큰돈을 벌어보자, 하는 조급함뿐이었으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학교 4학년, 졸업반이 된 지금 일을 배울 수 있는 직장에 들어가 학교 공부와 직장 생활을 병행하고 있다. 예전에는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며 힘들어했지만, 지금은 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하게 되었다.

내가 사업을 접었을 때는 집에는 막 사업을 시작했다고 알린 후라, 폐업 소식은 그 후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말씀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이런 반전의 말씀을 하셨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지난 학기까지 학교 안 다녔지? 별것도 아닌데 왜 말 안 했어.”

이럴 수가! 어머니께서는 내가 사업과 함께 비밀로 부쳤던 휴학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그래도 아들을 믿는 마음에, 아무 소리도 안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자취방에 대해서만은 말씀드릴 수가 없었다. 지금 나는 방만 각자 있고 거실과 주방은 다른 친구들과 공용으로 쓰는 하우스메이트로 지내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나만의 자취방에서 지내는 걸로 아신다. 내가 사업을 시작할 때쯤부터 어머니의 일이 바빠지면서 서울에 올라오지 못하셔서인데, 철없어 보일지 모르겠지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지금의 작은 방에 앉아 있으면 어머니가 청소해주셨던 나의 자취방들이 떠오른다. 혼이 나더라도 어머니께 솔직히 말씀드리고 다시 한 번 손을 벌릴까도 생각해봤지만 ‘이것도 인생 수업이다’ 생각하고 어머니께 번듯한 집을 보여드릴 수 있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하려고 한다.

“어머니! 죄송하고 사랑합니다. 앞가림 잘하는 아들이 될 때까지 기다려주세요. 그리고 다음 자취방 구하면 올라오셔서 꼭 다시 청소해 주세요!”

 

몬드리안 작. <구성 제VI> 캔버스에 유채. 95.2×67.6cm. 1914년. 바젤, 바이엘러 컬렉션

 

외톨이는 아량이 없었다

이계승 50세. 작가. 서울시 마포구 대흥동

어릴 때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냈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B라는 친구가 생겼고 완전 죽이 맞아서 다녔다. 둘 다 책과 음악을 좋아했고, 그의 집에는 맘대로 크게 들을 수 있는 전축과 레코드판이 잔뜩 있었다. 둘의 집은 1.5km쯤 떨어져 있었는데, 놀러 가면 저녁밥까지 얻어먹고 밤이 깊은 줄 모르고 놀았다.

B는 늘 형 자랑을 했다. 머리가 엄청 좋아서 공부 따위는 열심히 안 했는데도 서울공대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러나 머리 좋은 사람 특유의 괴짜스러움도 갖고 있어서 그의 주변에서는 크고 작은 소동이 끊이지 않았다고 했다. 야구장에서 응원하면서 박수를 어찌나 세게 쳤던지 시계가 고장 나 버렸고 그걸 고친답시고 뜯었다 조립했는데 초침과 시침이 바뀌어서 1초에 한 시간이 가버렸다는 에피소드는 몇 번을 다시 들어도 배꼽을 잡곤 했다.

그런 형님을 만나 장래의 진로 같은 것도 묻고 싶었지만 형은 워낙 바쁘게 사는 인생이라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우리는 중학생이 되어서도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외톨이 중학생이었고 2학년이 되기까지 B와 더욱 밀접하게 붙어 다녔다. 학년이 바뀌어 서로 다른 반이 되자 약간 소원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주말마다 도서관을 같이 다니거나 시험공부를 같이 하고 수영장에도 놀러 가고 스케이트를 타러 다녔다.

교우 관계가 여전히 단출했던 나와 달리 B는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렸다. 고등학생이 되자 B에겐 여자 친구도 생겼다. 그런데 녀석은 그녀의 청순함과 사랑스러움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만 할 뿐, 명색이 가장 가까운 친구인 나에게조차 소개를 해주지 않았다. 무척 서운하였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고3이 되면서 우린 한 달에 두어 번 만날 정도로 바쁜 인생이 되었다. 우리보다 4배쯤 인생이 바쁜 서울대 형님은 결국 얼굴 한 번 안 보여주고 군대를 가버렸고 녀석은 여자 친구와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잠정적으로 헤어지기로 했다고 근황을 말해주었다.

B는 수학을 잘했다. 그래서 가끔 그의 도움을 받곤 했는데 어느 날 어려운 함수 문제를 가지고 그의 집에 갔다. 있겠거니 하고 연락도 없이 갔지만 마침 그날따라 녀석은 귀가가 늦었다. 기다리는 동안 B의 어머니께 형님 소식을 물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뜨악한 얼굴로 “형이라니, 누굴 말하는 거냐?”라며 되묻는 것이었다.

“서울공대 다니다 군대 간 형님 말이에요.” “얘가 무슨 소리를? 우리 B는 형이 없어. 걔가 우리 집 장남이라구.”

그 말을 들으면서도 어머니가 나를 놀리는 줄 알았다. 갑자기 정신이 멍해지면서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인사조차 없이 황급히 집으로 왔다. 그리고 그 후 심하게 앓았다. 학교에도 안 가고 며칠 끙끙 앓아누웠는데 B가 찾아왔다.

나는 누워서 아는 체도 않고 눈조차 뜨지 않았다. B도 한동안 아무 말 않고 앉아 있더니 조심스럽게 가공의 형에 대한 고백을 했다.

“미안해, 형 얘기…. 너한테만 그런 게 아냐. 다른 애들한테도 그랬는데… 처음엔 그냥 재미로 그랬어. 근데 너한테는 정말 미안했다….”

독백처럼, 방백처럼 B는 더듬더듬 고백을 해나갔다. 열등감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속으로는 ‘여자 친구 얘기도 틀림없이 너의 소설일 뿐이었지?’라고 쏘아붙이고 있었지만 한마디 대꾸도 않는 것이, 그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유일한 복수라고 생각했다.

B는 할 수 없이 방문을 나서며 휴~ 하고 한마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 소리가 어떤 미안함이나 회한보다는 마음의 짐 덩어리를 내려놓았다는 안도의 한숨으로 느껴졌고, 비밀이란 발설하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게 더욱 약이 올라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정작 나는 그 후로 오랫동안, 훨씬 몇 배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친구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고하는 B에게,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토닥이는 아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몬드리안 작. <브로드웨이 부기우기> 캔버스에 유채. 127×127cm. 1942/43년. 뉴욕, 근대미술관

이제 비밀이 아닌 것이 되어버린 여섯 가지 비밀 이야기.

 

그 겨울, 대학 입학 원서비 유용 사건

유연철 33세. 직장인.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1998년. 혹독하게 힘들었고 너무나도 길었던 고등학교 3년이 끝난 후 새로운 해가 시작되었다. 당시 우리 또래에게는 수능을 보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동안의 억압된 청춘의 로망, 이성 교제를 하는 것이 유행이자 희망이었다.

나 역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수능 점수 발표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저녁, 친구에게서 소개팅에 나오라는 연락을 받게 됐다!

동네 근처-떡볶이 집, 빵집은 말도 안 되고ㅋㅋ-호프집에서 당당히 만났다. 2:2 소개팅으로 만난 그녀는 평범했지만 맘에 들었고 계속 만나는 관계로 급속도로 진행이 되었다. 그동안 못 해본 연애의 한풀이를 하듯 매일 만나 놀러 다녔다.

하지만 돈이 어디 있었겠는가! 당시는 IMF까지 터진 마당이라 집안에도 돈줄이라고는 말라붙은 상황이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궁색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다. 아르바이트 월급날은 아직 멀었고. 그런 나를 강하게 유혹한 건 대학 입학 원서 비용이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 원서를 낸다며 돈을 받아, 한 건 한 건 유용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가정통신문을 위조하던 실력으로 원서 접수증을 훌륭하게 만들어 집에 보여드린 것이 7~8건. 금액으로 보면 50만 원 정도 되는 큰 액수였다. 그 돈으로 데이트를 할 때 밥값을 내고, 마음껏 놀러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을 참 힘들게 보낸 나는, 노력해도 될 것 같지 않은 세상 앞에 ‘될 대로 되라지’였다. 대학은 가서 뭐하나,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그런 허무주의로 가득 찬 나였기에 그런 거짓말쯤은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정시 모집하는 대학들이 마감될 때쯤, 그래도 안전장치는 해야겠다는 생각에 서울의 모 전문대학에 입시 원서를 넣었다. 장학금이나 받아서 다니다, 나중에 후일을 도모하자는 생각이었다. 슬슬 원서 접수했다고 거짓말한 대학들의 합격자 발표가 나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에겐 일부는 떨어졌고 일부는 과가 마음에 안 든다며 거짓말을 했다. 점점 들키면 어떡하지?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더 괴로운 건 떨어졌다고 하면 너무나 순진하게 믿으며 안타까워하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친구들이 하나씩 합격되어갈 때쯤 유일하게 넣었던 원서, 모 전문대의 발표 날이 다가왔다. 충격! 100점이나 하향 지원을 했는데, 전체 장학생은커녕 과 장학생도 못 되었다. 당시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하향 지원을 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이다.

처음으로 후회가 몰려왔다. 어려운 형편에도 그 비싼 원서 비용을 마련해준 부모님과 누나에게 죄송하고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소개팅녀와는 100일을 앞두고 자연스럽게 헤어졌고, 그 달콤한 유혹의 대가는 내 마음의 빚과 비밀로 남게 되었다. 대학 생활도 재미있을 리 없었다. 여전히 나는 세상을 향해 냉소적이었다.

그러다 대학 1학년 가을, 어머니가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더욱 후회가 몰려왔다. 왜 이렇게 살았을까, 이제 제대로 살아보자. 나를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비밀 같은 건 만들지 말고 살자.

어느덧 10년이 훨씬 지났다. 한동안은 말할 용기가 안 나서 못 했고 시간이 지난 후엔 잊혀져간 사건이 되어버려서 못 하고, 지금까지 비밀로 묻혀 있던 그 일.

아버지, 누나! 죄송해요. 철없는 막내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용서를 비네요. 어쩌면 다 알고 계시리라 생각도 들었어요. 늘 묵묵히 봐주시고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사랑합니다.

 

몬드리안 작. <큰 빨강 색면과 노랑, 검정, 회색, 파랑의 구성> 캔버스에 유채. 59.5×59.5cm. 1921년. 헤이그시립미술관

 

제가 먹어도 살찌지 않는 이유, 그 비밀을 밝힙니다

유윤서 26세. 직장인.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나는 키 169cm에 몸무게 50~51kg의 늘씬 날씬한 26살 처자이다. 나에게는 가족에게도 말 못 하는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4.4kg의 우량아로 소위 ‘떡대’를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못 먹는 것 없이 잘 먹고 일주일에 3번 이상은 고기를 먹을 정도로 육식을 사랑하는 대식가였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키 161cm에 50kg이 넘는 장신(?)이 되더니, 고등학교 때는 키 169cm에 몸무게 74kg의 거구가 되어 버렸다.

그러던 중 같은 학교 농구부 오빠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안 보던 거울을 보며 외모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유행하는 다이어트는 다 해보며 끊임없는 살과의 전쟁을 치렀다. 하지만 먹던 습관과 생활 패턴을 바꾼다는 건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 힘들었다. 키도 크고 잘생기고, 운동까지 잘하던 그 오빠는, 나 같은 외모의 아이가 접근하기에는 너무 높아 보였다. 그렇게 고백도 못 한 채 졸업하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부터 외모 콤플렉스가 깊이 자리 잡았다. 육지로 나와 대학 생활을 시작하며 나는 인생의 숙제와도 같은 다이어트를 본격적으로 하게 되었다. 굶는 것부터 줄넘기, 달리기, 테니스, 스쿼시, 수영, 킥복싱…. 운동이란 운동은 안 해본 것이 없었다. 좌절, 실패, 좌절, 실패…를 반복하던 중 점차 살이 쭉쭉 빠지기 시작했다. 요가 자격증을 따서 강사 생활까지 하다 보니, 몸매는 균형이 잡혀갔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늘씬한 외모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그것으로 해피엔딩이었으면 좋으련만, 여기서 나만의 비밀을 고백하고 싶다.

항상 내 안에는 다시 살이 찌면 어떡하지, 예전으로 돌아가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함이 깊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불안함을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다. 때문에 자유롭게 먹는 것 같아도, 먹은 만큼 운동을 해야 한다는 강박감이 늘 있다. 누가 조금이라도 살이 찐 것 같다고 하면,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만 아무도 몰래 당장 운동을 한다.

2년 전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와서도, 나는 가족들 몰래 운동을 하고 있다. 하루에 많게는 네 시간, 적게는 두 시간씩, 가족들이 일어나지 않은 새벽과 가족이 모두 잠든 깊은 밤 시간에 자전거를 타는 것이다. 나의 이런 피나는 노력을 모르는 지인들은 “체질이 변했네” “먹는 만큼 살이 안 쪄서 부럽네” 등등 나를 먹어도 살이 안 찌는 복 받은 사람으로 분류하여 버렸다.

하지만 나는 먹으면 살이 찌는 체질이다. 그럴수록 나에게 아침 운동과 밤 운동은 쉴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모든 것을 오픈하고 싶지만 열심히 운동한 만큼의 결과를 보여주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매일매일 아무도 모르게 나 자신과 싸움을 한다.

“운동을 그렇게 했는데 그것밖에 안 빠졌어?” “운동을 하는데도 살이 찌네” 라는 소리를 듣는 게 가장 두렵기 때문이다.

정말 가벼워지고 싶어, 용기를 내어 <마음수련>에 처음으로 고백을 해본다. 이 글이 실린다면, 괜히 말했나? 하는 후회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정말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싶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졸리면 자고, 운동하기 싫을 때는 좀 안 하기도 하고, 살에 대해서 그냥 편하게 말하면서, 자유롭게 행복하게 다른 것들에도 집중하며 살고 싶다.

 

몬드리안 작. <백합> 종이에 수채. 25×19.5cm. 헤이그시립미술관

 

다시는 비밀 같은 거 만들 일 없기를

팔천사 50세. ‘팔천사’ 블로그(blog.naver.com/a508004) 운영

지난 6월의 일이다. 운전 중 옛날에 같이 근무했던 직원의 딸이 주유소에 일하고 있는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어라, 이 시간이면 학교에 있어야 하는데 왜 저 아이가 주유소에 있지? 이제 고등학교 2, 3학년 정도 되었을 텐데.’ 아무래도 이상한 기분이 들어 그 직원에게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란다.

주변에 수소문해 보니, 그 직원이 알콜 중독자가 되어 매일 술이나 마시고 폐인이 되었다 한다. 참 성실했던 친구인데 자기 사업하면서, 부도도 맞고 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겨우 집 전화를 알아내 부인과 통화를 했다.

부인에게 큰딸아이는 학교에 잘 다니냐고 안부처럼 물었다. 부인은 은정이가 가출한 지 5개월이나 되었다며 울었다. 아빠는 매일 술이나 마시고 경제적인 능력도 없고, 학교생활도 할 수 없어서 자퇴를 하고 집을 나갔다는 것이다.

가슴이 시려왔다. 부인이 공장에 다니며 은정이 밑으로 둘이나 더 있는 아이들과 겨우 생활하는 듯했다. 부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한 후 함께 주유소로 가서 은정이를 만나게 했다. 얼싸안고 우는 모녀를 보니, 나 역시 눈물을 참기 힘들었다.

은정이가 동생과 아빠의 안부를 묻는다. 혼자 힘으로 돈을 벌어서 검정고시도 보고 대학도 들어가겠다고 엄마를 안심시킨다. 저렇게 맑고 착한 아이가 있다니, 오히려 내가 고마웠다.

하지만 아직 부모의 그늘에서 보호를 받아야 할 아이를 그냥 두고 갈 수는 없었다. 은정이를 한 시간 동안 설득해서 타협을 봤다. 일단 아빠에게는 비밀로 하고, 은정이는 근처에 있는 이모네 집으로 가, 이모 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하고 학원에도 다니기로 약속을 했다. 내 덕분에 아이를 찾았다고 감사해하는 부인에게 은정이 아빠는 기술이 있어, 마음만 잡는다면 살아갈 능력이 되니까 둘이서 다시 좋은 아빠로 만들어 보자고 했다.

우리 셋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나는 은정 아빠와 통화를 했다. “일 좀 해볼래?” 하니 바로 대답을 한다. “안 그래도 형님 한번 만나서 의논 좀 할라고 했습니다.” “내가 자네 소문은 들었어. 일단 일주일 동안 금주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지방 건축 현장에 기사로 보내줄게.”

나의 약속에 은정 아빠는 지금 너무 힘들게 살고 있다면서 꼭 금주하고 새롭게 태어나겠다고 몇 번씩 이야기를 했다. 큰아이가 자기 때문에 가출까지 했다며 울었다. 그것이 더 괴로워서 계속 술로 살았다고 했다. 나는 마음잡고 열심히 살아간다면 아이도 함께 찾아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일주일 후에 만나기로 했다. 부디 일주일만이라도 버텨주기를 바라며.

일주일 후, 그는 정말 술을 먹지 않고 나타났다. 나는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모로서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는 거라며, 신신당부를 하고는 지방에 일자리를 마련해 보내주었다.

그리고 한 달 후, 그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보았다. 다행히 그는 술을 뚝 끊고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은정이와 은정이 엄마와의 비밀을 털어놓았고, 지금은 은정이와 가족 모두가 그 친구가 있는 지방으로 내려가 오순도순 예전처럼 살고 있다.

“형님 고맙습니다. 늦게라도 정신 차리고 가정을 다시 꾸릴 수 있게 해줘서 고맙습니다.” 서울로 올라가는 나에게 그 친구가 나직이 속삭인다. 괜시리 눈물이 핑 돌며 돌아서는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은정아, 은정이 어머니, 다시는 우리끼리 비밀 같은 거 만들 일 없게 행복하게 사세요.’

 

몬드리안 작. <그리드 5의 구성: 색채 마름모 구성> 캔버스에 유채. 대각선 84.5cm. 1919년. 오테를로, 크뢸러-뮐러 국립박물관

몬드리안 작. <그리드 3의 구성: 마름모 구성> 캔버스에 유채. 대각선 121cm. 1918년. 헤이그시립미술관

그림 출처_ <피트 몬드리안>(수잔네 다이허 | 마로니에북스)

<몬드리안(재원 아트북 24)>(재원아트북 편집부 | 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