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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이웃들과 53년, 독일인 하 안토니오 몬시뇰 신부

취재 문진정 사진 홍성훈

부산항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산동네에는 50년이 넘게 그곳을 지키고 있는 동항성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의 나이만큼이나 오래도록 이곳의 역사를 함께 일구어온 한 독일인이 계시지요.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한국본부장을 맡고 있는 하 안토니오(90) 몬시뇰 신부입니다. 여전히 크고 강인해 보이는 체격, 호호백발의 하신부는 그곳에 오는 누구든지 손을 맞잡으며 온화한 미소로 반겨줍니다.

하신부가 한국에 온 것은 1958년. 당시 부산은 한국전쟁 이후 모여든 피난민들이 구호물자로 어렵사리 끼니를 이어나가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신부는 젊은 시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4년간 포로 생활을 겪었기에 굶주림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요.

그는 신부가 되자마자 낯선 한국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도로서의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곧장 먹을거리를 들고 집집마다 방문했습니다. 신자와 비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배고픈 사람에게는 밀가루를, 헐벗은 사람에게는 자신의 옷을 내주었습니다. 어느 날 중풍 환자 한 사람이 돼지우리에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단숨에 달려가 직접 목욕을 시키고 자신의 옷으로 갈아입힌 후 돼지우리를 말끔히 치우고 다다미를 깔아주었습니다.

또한 고아, 앞을 못 보는 아이 등 7명의 아이들을 사제관으로 데려와 함께 생활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사무국장 배경준(62)씨입니다. 14살 때 하신부를 만난 배경준씨는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했고, 퇴임 후 이곳에 돌아와 하신부 곁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모님을 일찍 여의고 정이 그리웠던 때에 신부님을 만났습니다. 8년 간 7명의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학교 공부, 생일은 물론이고 물질적인 부분으로 채워질 수 없는 공허함까지 친아버지처럼 채워주셨습니다. 신부님 덕분에 사회의 일원으로 성장할 수 있었지요.”

이밖에도 하신부가 가난한 이웃을 위해 해온 일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린이들을 위한 급식소를 지었고, 기술학원을 설립했으며 교회 조산원을 지어 무료로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했습니다.

사람 간의 장벽을 없애고 세계 평화를 실천하는 데 오래전부터 뜻이 있었던 하신부는 1964년,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한국본부를 창단합니다. 그리고 1974년부터 지금까지 평화 통일을 위한 기도회를 열고, 전국을 돌며 강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하신부는 말합니다.

“천주교 신자와 회교도 신자가 우물을 팝니다. 땅속 깊은 곳에서 물이 나옵니다. 그 물은 천주교 물입니까, 회교도 물입니까? 그것은 그냥 사람을 위한 물입니다. 이처럼 진리는 하나인데, 종교나 인종, 물질문명 때문에 사람 간의 벽을 만드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하 안토니오 신부의 바람은 한 가지, 온 세상 사람들이 한 가족으로서 사랑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평생을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이곳 한국에서 사랑과 평화를 실천하며 살 것이라고 합니다. 모든 이들의 축복을 빌어주는 간절한 기도를 멈추지 않을 거라 합니다.

하 안토니오 몬시뇰 신부는 1922년 독일에서 태어나 1958년 사제 서품을 받은 직후 한국으로 왔습니다. 1959년부터 20년간 부산 동항성당 주임신부로 재직했으며 현재 파티마의 세계사도직 한국본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부산광역시는 올해 그의 공로를 인정해 부산명예시민증을 수여했습니다.

꼭두각시에서 벗어나다

사는 게 못마땅했다.   세상엔 잘난 사람들도 많은데 왜 우리 집과 형제들은 늘 고만고만한 삶에 허덕일까. 게다가 지체장애를 앓는 아들은 크나큰 걱정거리였다. 학교로 보낸 후에도 친구들에게 놀림받거나 괴롭힘을 당할까 봐   내 마음은 늘 아들에게 머물러 있었다.       머리엔 항상 수많은 안테나를 달고 사는 기분이었다.   “저녁에 뭐 해먹을까” “시어머니 생신날인데 뭘 해야 하나….” 무기력증으로 온몸에 힘이 없었던 내게 의사는 “마음이 아파서 아프다”는 진단을 내렸고,    나는 마음수련을 시작했다.

마음으로 버리라는 말에 한 방 맞은 기분이었다. “도대체 마음이 뭐지?”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순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마음이 힘들다, 마음이 아프다…. 수많은 말을 해왔으면서도 나는 마음이 뭔지도 모르는 바보였다.   때문에 사는 게 왜 힘든지도 몰랐다. 주마등처럼 살아온 삶들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해마다 봄이 되면 시골에서 지낸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친구들과 쑥 캐고 냉이 캐고 놀던 그때가 너무 좋았기 때문이다. 친구들은 고향을 떠나 그곳에 없는데도   나는 여전히 옛것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었다. 과거 어린 시절과 같은 행복이 내 삶의 기준이 되었다. 엄마라는 ‘책임감’도 없던 자유롭던 시절이었으므로….    그러니 현실은 늘 괴로웠다. 하지만 그 탓 또한 주위 사람들에게 돌리고 있었다. 내 맘대로 따라주지 않는 남편, 내 뜻대로 자라주지 않는 아이들을 원망했었다.

그렇게 마음으로 찍은 기억에 휘둘려 과거 속에 살고 있었던 나는 정작 가장 찬란하게 빛나야 할 지금 이 순간을 놓치고 있었다. 삶의 주인공으로 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며 항상 관객 입장에서 이렇다 저렇다 번뇌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무수한 사진(기억)들에 휘둘려 울고 웃고 춤추었던 꼭두각시. 그게 바로 나였다.

삶의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것은 꼭두각시처럼 휘둘렸던 수많은 끈들을 끊어버리는 거였다. 나를 속박했던 끈들을 하나하나씩 풀기 시작했다. 과거 행복한 어린 시절의 끈을 놓았다. 아픈 아들을 원망하던 끈도 놓았다. ‘엄마’라는 이름의 부담감도 놓았다. 그러자 마치 새장에 갇혀 있던 새가 자유를 얻은 듯 내 마음에서 작은 날개가 퍼덕였다.   몸은 저절로 움직였고, 무기력증도 점차 좋아졌다.

점차 주변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얘기부터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할머니의 소리까지…. 말이 많다고 꾸중했던 아이의 말은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는 거였고, 나를 변화시키는 충고의 말이었다.   그렇게 세상은 나를 살리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었는데, 나란 벽에 갇혀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거였다.    오늘도 가족들을 위해 장아찌를 담그고,   종알거리는 아이의 말도 귀담아 들어본다. 이제야 비로소 내 삶을 사는 기분이다.

김정미 46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이 일을 할 것인가.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 잡스(1955-2011)는 늘 자신에게 위와 같은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는 2005년 스탠포드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여러분도 언젠가는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기 삶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파묻혀,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잃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돈, 학벌, 외모, 경력, 멋진 결혼…. 우리가 추구하는 대부분은 내면의 기쁨보다 외부의 시선을 만족시키는 것이 많다.

비우기를 통해 내면의 소리를 들어라.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거에 대한 후회, 현재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조차 모른다. 오늘 아침 편의점에서 불친절했던 직원의 말 한마디는 현재 실재하지 않음에도 자기 마음속에서는 계속 생각이 나면서 하루 종일 불쾌하게 만든다. 심리학자 워런에 따르면 보통 사람들은 1분에 평균 1,300단어로 혼자서 수다를 떤다고 한다. 늘 떠오르는 생각에 휘둘려 현실이 아닌 자기 마음속 세상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쓸모없이 혼자서 끊임없이 수다를 떠는 그 생각들을 비워내야, 비로소 내면의 소리에 집중할 수 있다.

‘나는 과연 언제 가장 기뻐했는가’를 찾는다.

살면서 가슴이 벅차오르거나, 존재의 기쁨을 얻었을 때가 언제인가? 생각해보자. 아름다운 자연과 마주하고 있을 때, 갓난아이에게 젖을 주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힘들다 어렵다라는 생각조차 잊은 채 어떤 일에 몰입하여 끝냈을 때, 누군가에게 대가 없는 도움을 줬을 때 등등. 보통 많이 가져야 잘사는 거라 생각하지만 돌아보면 그 순간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돈, 직위 등 자기만의 목표점에 도달해도, 기쁨은 순간일 뿐 그것을 지키기 위해 불안해졌던 경험은 누구나 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나를 내려놓을수록 충만감을 느낀다. 진짜 삶을 찾고 싶다면, 자꾸 ‘나라는 자기만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연습을 해야 한다.

최상림 마음코칭센터 이사

“열심히 사는 내가 참 좋아요” 동대문시장에서 만난 열혈 청년 박상준, 라재원씨

패션의 중심지 동대문시장. 의류를 비롯해 옷의 기초 자재인 원단부터 단추, 레이스 장식 등 부자재를 파는 이곳은 전국에서 모여든 손님들과 도소매 상인들로 늘 북적인다. 일명 총성 없는 전쟁터라 불리는 이 치열한 삶의 현장에는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뛰어들었다는 청년들이 많았다. 그중 박상준(31)씨와 라재원(25)씨를 만나보았다.
취재 김혜진 사진 최창원

“4년간 경비 업체에서 일했어요. 청와대 경호원으로 일하는 삼촌이 멋있어 보여서 경호원이 되고 싶었던 건데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너무 다르더라고요. 영화에 나오는 보디가드처럼 누군가의 안전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기계가 다 해주고 출동해서 가면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회의를 많이 느꼈죠.”

박상준씨가 동대문 시장과 연이 닿은 건 4년 전. 이곳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게 계기가 됐다. 보기엔 1~2평 남짓한 자그마한 매장이지만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보람 있다”는 주위 분들의 조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과도 통했다. 박상준씨의 후배 라재원씨도 자기 얘기를 덧붙였다.

“친구들 보면 좋은 대학 나와서 취업하는 게 다잖아요. 자기가 뭘 해야겠다는 게 없고, 그게 싫었어요. 부모님은 공부해라, 했지만 내 인생을 남들처럼 떠밀려서 살고 싶지 않았어요.”

라재원씨는 옷을 사러갔다가 가게 직원으로부터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듣고 재미를 느껴 동대문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한다. 평소 월급의 반은 옷을 살 정도로 옷에 관심이 있고 좋아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순간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 일식집 주방에서 일하면서 월급도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상준씨가 있는 점포로 라재원씨가 후배 점원으로 들어오면서 만나게 된 것. 라재원씨는 원단 보는 일, 영업 등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던 박상준씨를 가리켜 “든든한 지원군이자 의지가 되는 고마운 형”이라고 말한다. 이에 박상준씨의 라재원씨에 대한 칭찬이 이어진다.

“대개 여기 오는 젊은 애들 보면 10명 중 8명이 이틀 만에 그만두거든요. 그만큼 힘든 일이에요. 이 친구도 보니까 얼굴이 하얗고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며칠 못 버티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항상 웃으면서 열심히 하는 걸 보니까 마음을 열게 되더라고요.”(웃음)

이곳에 처음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속칭 ‘밑바닥 일’은 바로 원단 정리다. 밤새 지방에서 올라온 10~13kg이 넘는 수많은 원단을 창고로 나르고 자르고 정리하는 것. 하루에 많이는 200절(개)까지 나르는 등 고된 작업이지만,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도 묵묵히 하시는 걸 보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한다.

“시장 일은 다음 날이 없어요.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날 일은 그날 마무리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거든요. 부지런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곳이죠. 나이, 지위 관계없이 사장님도 직접 원단을 나르는 걸 보니까 정말 대단해 보이고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하루 일과는 아침 8시부터, 하지만 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다. 창고의 원단 정리, 점포 관리, 거래처 관리, 영업 등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하루가 간다. 일주일에 2~3번 동대문 밤시장(의류도매시장)으로 영업을 나가는 날엔 새벽 1시까지 일하는 게 다반사. 때론 힘들지만 발로 뛴 만큼 거래처 사장님들이 먼저 알아봐 주신다거나, 자신들이 다룬 원단이 옷으로 만들어지고 그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볼 때면 보람을 느낀다 한다.

“예전 같으면 조금만 힘들면 그만뒀을 거예요. 근데 이젠 그런 삶이 제일 두렵다는 걸 알죠. 인내가 주는 기쁨을 배우는 것 같아요. 요즘은 새벽 5, 6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데 부모님이 부지런해졌다고 인정해 주실 때 기분 좋죠.”

두 청년은 “몸은 고되지만, 선택한 일에 대해 후회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막연히 남들처럼 살아야겠다며 직장 생활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게 너무 아까웠다는 그들은, 이곳에서 결코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하나하나씩 일궈가면서 자수성가를 하신 어르신들을 뵈며 삶의 겸허함을 배우고, 자신들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시는 동료이자 선배들의 깊은 애정 속에서 사람 사는 정을 깨닫고,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땀의 결실을 인정해주는 이곳이 그들에겐 가장 소중한 일터이자 삶의 현장이라 한다.

이들의 앞으로의 계획은 동대문시장에 내 가게를 차리는 것.

“어른이 되어가는 거 같아요. 예전엔 참 개념이 없이 살았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제 모습이 참 좋아요.”(라재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마음 자세가 달라져요. 하나라도 더 알아야 손님들한테 다가갈 수 있으니까 뭐든지 열심히 배우려고 하죠. 열심히 해서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요.”(박상준)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망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박상준, 라재원씨. ‘뿌린 만큼 거둔다’는 진리를 매 순간 목격하며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운아가 아닐까. 비좁은 공간, 매캐한 먼지 속에 하루를 보내면서 흘리는 땀방울들이 진짜 삶의 결실로 무한히 빛나고 있었다.

뽀얗게 빛나는 하얀 굴젓의 기품

저의 집은 외가는 내지, 친가는 바닷가였습니다. 덕분에 내륙 음식과 해산물을 다 접해볼 수 있었지요. 어릴 적 친가에 가면 종지에 양념되지 않은 하얀 굴젓이 올라왔습니다. 첫 친손자로서 할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저는 백일이 지나고부터 할아버지의 무릎 위에 당당히 자리를 잡고 할아버지 밥상을 공유했는데요, 특히나 굴젓을 잘도 받아먹었다고 합니다. 아쉽게도 친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하얀 굴젓을 다시 먹어볼 수가 없었지요. 레시피를 찾다가 할머니 댁에서 가사를 도와주셨던 ‘성관이 아지매’가 생각났습니다.

“아주머니, 안녕하셨어요? 정복입니다.” “아이고~ 반갑다야, 니 인자 몇 살이고?” (중간 생략)

“굴젓은 말이다, 생굴을 사다가 소금에 절여가지고 일주일만 두면 된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소금에만 절여도 물이 충분히 나오고 일주일간 실내에 두면 숙성이 딱~ 알맞다.
그 뒤에는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먹을 때는 무를 얇게 썰어가지고 같이 먹으면 시원하고 좋지.”

 

보통은 굴 1kg에 소금 3큰술이 적당합니다.
일반 소금 대신 해독 작용을 돕는
죽염을 사용하면 더욱 좋답니다.
죽염은 반 큰술 더 넣어주세요.

12월이 제철인 굴은 폐와 피부에도 좋고 칼슘이 많아서 뼈에도 좋습니다. 대부분의 해산물은 찬 음식이고 쉽게 상하기 때문에 예로부터 젓갈을 많이 만들었는데요, 찬 성질의 해산물을 숙성시키면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할 뿐더러 위장이 찬 사람도 잘 먹을 수 있도록 발효가 됩니다. 여기에 고추나 무 등의 맵고 따뜻한 성질의 양념이 첨가되면 비린 맛도 없애주며 한열, 음양의 조화를 맞추어 우리 몸을 더욱 이롭게 해준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1981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동의대 한의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울랄라 세션’과 ‘임윤택’에게 경의를…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울랄라 세션’은 <슈퍼스타 K3>에 출연해 까칠한 심사 위원 이승철로부터 “너무 프로라서 이런 오디션 프로그램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다”는 극찬을 들을 만큼 실력파 그룹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2세의 리더 임윤택은 위암 4기의 환자로, 나날이 파리해지는 그의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마저 옥죄게 합니다.

10월 28일 방송에선 심사 위원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미션이었는데, 울랄라 세션은 이승철의 ‘서쪽 하늘’을 선택했습니다. 영화 ‘청연’의 OST 곡으로, 여주인공을 맡았던 배우 장진영은 몇 년 후 위암으로 세상을 하직했지요. 임윤택은 의사로부터 자신의 병이 고 장진영과 유사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했습니다. 그  후 임윤택은 ‘서쪽 하늘’을 무척이나 많이 불렀다더군요.

항암 치료 중인 그는 멤버들의 마음이 흔들릴까 봐 검진 결과도 비밀로 합니다. 하지만 보여지는 모습만으로도 깊어지는 병세를 숨길 방법은 없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보다,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 괜찮아요.” 임윤택의 미소가 담담할수록, 지켜보는 가슴은 더욱 미어졌습니다.

자신은 천생 노래하는 놈이라 무대에만 올라가면 다 잊게 된다는 임윤택. 과연 무대에서 보여주는 그의 모습은 매번 힘과 열정이 넘치고 신이 났습니다. 하지만 ‘서쪽 하늘’을 부를 때의 분위기는 너무나 절절하게 아팠지요. 대기실에서 통곡이라도 하다 나왔는지, 다른 멤버들의 퉁퉁 부은 눈매는 울었던 기색이 역력한데, 오직 임윤택의 얼굴에만 눈물의 흔적이 없었습니다.

“서쪽 하늘로 노을은 지고… 이젠 슬픔이 되어버린 그대를… 다시 부를 수 없을 것 같아… 또 한 번 불러보네….”

지금은 4명의 멤버가 나란히 서서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이름을 다정히 부를 수 있는 날은 얼마나 남았을까요?

“사랑하는 날… 떠나가는 날… 하늘도 슬퍼서 울어준 날….” 이미 모든 집착을 내려놓은 듯, 삶과 죽음에 초연한 듯한 임윤택의 표정과 너무 잘 어울리는 가사는 더욱 슬펐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주, 최종 3팀에게는 ‘100만 원을 알차게 사용하라’는 소미션이 주어졌습니다. 울랄라 세션이 찾아간 곳은, 임윤택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의 소아 병동이었습니다. 소아암 환자들을 위해 깜짝 공연을 하려는 것이었죠. 자그마한 몸에 환자복을 걸치고 감염 방지용 마스크를 쓰고 있는 어린아이들은, 기대와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으로 울랄라 세션이 꾸미는 작은 무대를 지켜보았고 마음껏 웃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임윤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떤 친구에게 ‘다음 입원은 언제야?’ 그랬더니 ‘저 다시 안 올 건데요’라고 하더군요. 그런 데서 제가 더 많이 배우는 것 같아요. 그 친구들이 긍정적으로 자신이 나을 거라고 믿는 것처럼, 저도 제 자신이 꼭 일어날 거라 믿습니다.”

진실한 희망은 1%의 확률을 100%로 바꾸어 놓을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부디 이 수많은 사람들의 간절함과 믿음이 모여서, 기적을 만들어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임윤택씨를 보며 삶의 소중함을 떠올리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다짐도 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임윤택씨. 경의를 표합니다, 울랄라 세션.

백두산에서

백두산에 갔습니다. 천지의 축소판인 소천지에 이르자 수피가 하얀 나무들이 파란 연못에 발을 담그고 있었습니다. 자작나무 사촌 격인 사스레나무였습니다. 사스레나무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만 자라는 낙엽활엽수입니다. 거친 바람에 밀려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워 있던 사스레나무. 흰 껍질은 거칠게 벗겨져 있고 굽은 가지는 아무렇게나 뻗어 있을지언정, 백두산만은 내가 지키겠노라는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졌습니다.

백두산. 2006년 11월

“저 낭구레 연인 낭구라요.” 조선족 사진작가 맹철(길림성 안도현) 선생의 설명입니다. “바위에 뿌리를 박아 먼저 크고서니, 죽으면서 솔씨를 키워준다 말이오.” 그러고 보니 사스레나무들이 거친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위태롭게 서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몇몇 사스레나무 주위에는 소나무 종류인 이깔나무가 함께 자라고 있었습니다. 척박한 땅에 먼저 뿌리를 내리고, 자신은 죽어가도 솔씨를 키워내는 사스레나무. 저 두 나무를 왜 연인 나무라 부르는지 선뜻 이해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큰 것은 늘 작은 것을 끌어안는 법이라는, 자연의 이치를 배울 뿐입니다.

사진, 글 김선규

백두산 정상에서 사스레나무를 생각했습니다. 거센 바람과 모진 추위를 이겨내면서 자라는 나무, 그 강인함으로 바위를 뚫고 자라면서 새로운 생명 또한 품어주는 나무, 이 사스레나무 앞에서 무슨 소원이, 어떤 다짐이 소용 있을까요. 그저 사스레나무처럼 살아야겠습니다.

백두산. 2006년 11월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부산 “오이소~ 보이소~ 또 오이소~”

산이 솥 모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부산(釜山). 부산의 명소 중 하나인 용두산공원에 오르면 말 그대로 무쇠 솥 같은 산들이 바다와 접하며 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만들고 있다. 가파른 산비탈에는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있고 앞바다는 어선, 여객선, 무역선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자갈치시장, 깡통시장 등 길게 늘어진 삶의 터전에서 울려 퍼지는 아지매, 아저씨들의 진한 외침. 불과 60년 전의 전쟁의 아픔도 희망으로 일구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온 곳. 그래서 언제든 찾아가면 한 바구니 가득 희망을 담아오는 곳이기에,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부산으로 향했다.

사진 홍성훈 글 문진정

‘여자는 약해도 엄마는 강하다는 걸 보여주마.’

부산 하면 자갈치시장, 자갈치시장 하면 부산. 시린 겨울 칼바람에도 새벽부터 나와 삶의 터전을 지키고 있는 아지매들을 보며 ‘삶이 힘들 때면 새벽 시장에 가보라’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자갈치시장은 남포동의 ‘자갈치시장’ 신축 건물과 ‘수협자갈치공판장’을 중심으로 하는 갯가 시장 일대를 일컫는데, 해안가에 자갈이 많아 자갈치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바다 내음 물씬 풍기는 자갈치시장의 난전에 들어서면 아지매들의 우렁찬 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이소~!”

“아침 6시부터 저녁까지 백 오십여 자루를 갑니다. 칼을 딱 보면 누꺼라는 거 다 알죠. 열심히들 사시니까 일년이면 칼이 다 닳아져요. 몸이 아파도 나와야죠. 제가 안 나오면 할매들이 불편하니까.” 30년 넘게 시장 아지매들의 칼을 갈아주는 칼갈이 김선팔(55)씨. 20년지기 이웃 상인 김선남(57)씨와 기념 사진 한 장 찰칵~!

자갈치 생활 10년은 돼야 자갈치 아지매라 불릴 수 있고, 자갈치 생활 30년은 오래된 것도 아니라는 자갈치시장 아지매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불을 밝히고 장사를 하고 있는 아지매들에게 이곳은 살아가기 위해서 억척스럽게 변할 수밖에 없는 전쟁터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겉으로는 무뚝뚝해 보여도 먼저 인사를 건네고 먼 데서 왔다며 감을 손에 덥석 쥐어주시는 아지매들의 넉넉한 인심에 금세 마음은 푸근해졌다.

 


“내가 요 자리 있었는 지가 53년 됐어요. 22살 때 와서 이 사람들 아무도 없을 때부텀 내가 요기 있었지. 6.25 때 배운 붕어빵 기술로 지금껏 하고 있는 거야.” 속 뜨듯해지는 붕어빵 아지매 안복순(74)씨.

50년 전만 해도 부산은 한국전쟁의 아픔을 지닌 곳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민들은 용두산공원 근처의 영도다리, 남포동, 광복동, 중앙동 일대로 판자촌을 형성하여 아끼던 물건들을 시장에서 팔아서 생계를 유지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곳이 바로 그 유명한 깡통시장이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통조림’ 등 각종 과자류를 팔면서 ‘깡통’시장으로 이름 붙여진 이곳은 베트남 전쟁 이후에 군수 물자가 몰려들며 더욱 번성하게 되었다.

보수동 헌책방 골목은 좁은 골목길에 모여 있는 70여 곳의 책방을 말한다. 광복 이후 일본인들과 미군들이 남기고 간 잡지뿐만 아니라 피란길에 짊어지고 온 책을 사과 궤짝에 올려놓고 팔던 게 헌책방 거리로 발전했다. 과거 누군가가 보았던 손때가 고스란히 묻어 있는 보수동 책방 골목. 앞으로 누군가에겐 또 다른 추억으로 남을 수많은 책들이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네들은 고마 꾸준~하이, 건어물 하나 하면 꾸준히 하고 곰장어 장사 하면 꾸준히 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여. 내 할 꺼만 이래 하고 있는 거여. 크게 바라는 것도 없고 새해에도 건강하고 애들 착하게 살면 되는 기라.” 건어물 가게 ‘완도집’ 차영복(70) 아지매의 소박한 새해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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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생활한 지가 40년이고 내 배를 장만한 게 23년째야. 7~8년 남 밑에 있다가, 원양어선, 참치 잡는 배, 오징어 배 기관장 좀 하다가 처음엔 조그만 배 장만해서 지독한 놈이다 소리 들으면서 알뜰히 살았어. 낮 두세 시에 나가면 아침 7시나 돼야 들어오지. 어군 따라서 무작정 가는 거지. 깨끗하게 자기 분수에 맞게 착하게 살면 돼! 뭐든지 잘못되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고, 내 탓이요, 하면서 열심히 사는 거지.” 오징어잡이 배 김일용(57) 선장님의 인생 철학.

“우리는 고마 꾸준~하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거여.”

50년 넘게 곰장어를 팔아 오신 할머니, 40년 넘게 오징어잡이 배를 타온 아저씨, 30년 이상 보수동 책방 골목을 지켜온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변함없이 그 자리를 묵묵히 지켜온 분들이 있기에 부산은 누구에게나 푸근한 고향으로 기억된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그러했듯 새해에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사람들.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아지매들의 목소리가 생생하다.

“우린 은~제든지 예 있을 꺼니께, 은~제든지 오이소~!”

영희이모

어린 시절, 엄마 손 잡고 외갓집에 가는 길은 멀고도 멀었다. 두메산골 외갓집에는 외증조할머니와 외할아버지 그리고 작은 외할머니 슬하로, 입대를 앞둔 큰삼촌부터 여섯 살 꼬맹이 이모까지, 모두 열두 명의 식솔이 와글와글 살고 있었다. 그중에서 영미이모와 영희이모는 참 대조적이었다. 열다섯 살 영미이모는 산골 소녀답지 않게 얼굴이 예쁘장하고 손도 빨라 시키는 일을 척척 잘했다.

하지만 촌스럽게 생긴 열네 살 영희이모는 실수가 많고 동작도 굼뜬 탓에, 식구들한테 자주 지청구를 들었다. 영희이모는 심지어 나와 한동갑인 아홉 살 영옥이 이모한테도 말싸움에서 밀렸다. 나는 영희이모가 부엌에서 혼자 울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래서일까. 영희이모의 두 눈은 밤새 실컷 운 아이처럼 부어 있었다. 나는 영희이모가 오로지 밉게 생겨서 식구들에게 타박을 맞는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눈치 못 채게 내가 영희이모 편이라는 걸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일어나 정주간으로 갔다. 매캐한 부엌 안에서 영희이모는 혼자 나무를 때서 아침밥을 짓고 있었다. 영희이모는 아궁이 불빛보다 환하게 나를 맞이해 주었다.

“아이구, 우리 형식이 왔구나. 추운디 멀라고 왔냐.” 이모는 부뚜막 앞에 나를 앉히고, 내 두 손을 모아 쥐고 호호 입김을 불어 주었다. 그리고 아궁이 불에 고구마를 구워 주었다. 나는 얌전한 고양이처럼 앉아 노란 속살로 가득 찬 군고구마를 먹었다. 외갓집에 있는 동안, 나는 아홉 살 동갑내기 영옥이 이모보다 열네 살 영희이모와 훨씬 더 친했다.

그리고 며칠 후, 외갓집을 떠나는 날이 되었다. 그날도 나는 마른 솔가지 툭툭 타는 아궁이 앞에서 영희이모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가마솥에서 뜨거운 김이 뿜어 나오고 뜸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모가 솥뚜껑을 열고, 한 솥 가득 있는 보리밥 한쪽에 모여 있는 쌀밥을 주걱으로 펐다. 그리고는 그 뜨거운 쌀밥을 맨손으로 굴려 주먹밥 하나를 뚝딱 빚어내더니, 참기름을 얇게 발라서 내게 주었다.

다른 사람한테 들키면 큰일 날 일이었다. 흰쌀밥은 오로지 외증조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위한 것이었다. 그날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희이모 등 뒤에 숨어 주먹밥을 먹었다. 그 후 우리 집이 멀리 이사를 하는 바람에 방학이 되어도 외갓집을 못 갔고 이모가 만들어주는 따끈하고 고소한 주먹밥을 다시 맛볼 수 없었다.

내가 영희이모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이십여 년이 지난 내 결혼식장에서였다. 이모는 평탄치 않는 자신의 삶이 민망한 듯, 있는 듯 없는 듯 다녀가셨다. 친척과 함께 찍은 결혼사진 속에 촌스럽게 서 있는 이모가 쓸쓸해 보여 마음이 아팠다.

다시 이십 년이 지난 후, 영희이모가 병상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과년한 나이가 되어서 촌부의 재처로 들어갔다는 집이었다. 영희이모는 병석에서 몸을 일으켜, 그 옛날 외갓집 부엌에서 그랬던 것처럼, 따스한 아랫목으로 나를 끌어 앉혔다. 그리고 그 옛날 아홉 살짜리 조카를 만난 듯 부뚜막같이 웃었다. 나도 사십 년 전으로 돌아가 열네 살짜리 이모의 거친 손을 잡았다. 타박타박 타박네 같은 영희이모는 다다음해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하지만 이모가 건네준 그 주먹밥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따스한 온기를 품고 있다.

최형식

정덕영, 찌아찌아족의 첫 번째 한국인 한글 교사

정덕영

“인도네시아 부톤 섬에는 찌아찌아족이 삽니다. 그들은 말은 있지만 글이 없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말을 지키기 위해, 많은 문자를 사용해 보았으나 한글이 그 말에 가장 적합하다 하는군요.
이제 우리 훈민정음의 대단함을 나누기 위해서 갑니다.”

2010년 1월, 나는 광화문 세종대왕상을 향해 서서 마음으로 말했다. 찌아찌아족은 인도네시아의 소수 민족으로, 부톤 섬에 약 8만 명이 살고 있다. 독특한 전통 문화를 간직하고 있었지만, 글이 없다 보니 그들의 말로 된 역사서도, 동화책도 하나 없었다. 고유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그들은 지난 2008년 8월 한글로 자신들의 말을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따리마까시(감사합니다)’, ‘인다우뻬 엘루이소오(사랑합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 “한글은 미치지 않는 바가 없어서 바람 소리, 학이나 닭의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도 능히 써낼 수 있다” 했던 것처럼, 한글은 다른 나라의 언어도 써낼 수 있을 정도로 폭이 넓었다. 내가 아는 한 물리적인 영향력 없이 한 나라의 문자가 다른 나라로 전파된 일은 한글이 처음 아닐까 한다.

2010년 3월, 드디어 까르야바루 초등학교에 들어선 나는 4학년 2개 반을 중심으로 수업을 시작했다. 우선 24개의 자, 모의 명칭과 음가를 가르쳤다.  ‘ㄱ, ㄴ, ㄷ, ㄹ…’ ‘기역, 니은, 디귿, 리을…’ 한 글자 한 글자 정확하게 발음을 들려주고 또박또박 써주었다. 24개의 자모음을 다 이해한 후에는 ㄱ+ㅏ, 자음+모음을 하면 ‘가’가 되는 원리를 가르쳤다. 받침 없는 한 글자를 익힌 후에는 두 글자 단어, 받침 있는 한두 글자 단어를 가르쳤다.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낄 수 있도록, 그림도 그리고, 동요도 가르쳐주는 등 즐겁게 수업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들은 정말 각양각색이었다. 숙제를 내도 한 글자 한 글자 정성스럽게 써오는 아이가 있는가 하면, 삐뚤빼뚤 써온 아이도 있다. 한결같은 고집으로 백지를 내밀며 씩 웃는 아이도 있다. 눈이 깊고 이마가 툭 튀어나온 암시르는 장난은 심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글 공부도 열심히 한다. 막물함자는 과묵하고 점잖다. 반면 막물함자와 단짝인 알까기닝은 말썽 부리는 학원에라도 다녔는지 한번 발동 걸리면 내 머리가 지끈지끈해진다. 하띠까는 학교 앞 문구점집 딸로, 어떤 숙제를 내도 묵묵히 해오는데, 반듯하게 써내려간 글씨를 보면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 아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웃음에 인색하지 않다는 것이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한글 수업 내내 웃음이 끊이질 않는다.

찌아찌아어로 ‘사팡가’라는 단어가 있다. 우리말로 ‘친구’라는 뜻인데 ‘ㅁ’을 붙이면 ‘너(당신)의 친구’가 된다. 웃음을 띤 채 나에게 ‘사팡감’이라며, 존경의 표시로 자신의 이마에 뺨에 내 손등을 갖다 대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이 아이들에게 이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할 수 있도록, 한글을 정말 잘 가르쳐야겠구나 하는 책임감이 더욱 커지곤 했다.

까르야바루 초등학교는 각 학년마다 두 반씩 있는데, 한 반에 열댓 명 정도여서 우리나라 시골 분교 같았다.

나는 한글 교사가 되기 전 20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한 평범한 샐러리맨이었다. 하지만 늘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점점 나이를 먹기 전에 뭔가 결단을 내려야겠다고 결심한 후, 직장을 그만두고 평소 관심 있었던 우리말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문화가족센터에서 결혼 이주민에게 우리말을 가르쳤는데, 그것은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커다란 보람이었다. 그러다 2009년 훈민정음학회에서 찌아찌아족 어린이들의 한글 교사를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특별한 월급 없이 체류비만 지급되는 자원봉사였지만, 기사를 보는 순간 심장이 두방망이질하는 것 같았다.

이 일을 시작하면서 나는 다짐했다. 내 인생의 한 토막은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겠다고. 우리나라와는 기후와 풍습이 전혀 다른 이곳에서 생활하며 티푸스와 플루로 인한 두 번의 입원, 더위에 체력이 고갈되어 건강한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던 나날…. 하지만 그때그때마다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다. 그때 알았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겠다고 결심한 순간, 반드시 그곳에는 그 뜻을 도와주는 손길이 있다는 것을.

사실 1년이라는 기간 동안 한글을 제대로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당장은 완벽하지 못할지라도, 찌아찌아족의 문자로서 한글이 그 역할을 하게 될 그날을 위해 초석을 다지는 심정으로 차근차근 준비를 해나가야 했다.

우선 초급 한글을 배운 아이들이 1년 후에 배워야 할, 중급편 교과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 찌아찌아어 사전’을 만드는 준비 작업을 했다. 마지막으로 진행한 것은 찌아찌아족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사 양성 과정을 만드는 것이었다. 찌아찌아 마을의 다른 4개 학교에서도 한글 교육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지만,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그 대안으로 교사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것이다.

2010년 12월 2일, 까르야바루 초등학교에서 마지막 수업이 있었다. 어느새 1년이 흐른 것이다. 나에게 한글을 배웠던 4학년 아이들이 모두 교복을 차려입고 왔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교복을 입는데, 고작 1년 있던 한글 선생이 떠난다고 교복까지 차려입고 나온 아이들을 보니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서투르게나마 한국어 혹은 한글로 쓴 편지를 주는 아이들, 가슴이 뭉클해지고 목은 자꾸 멨다.

한글 교사 양성 과정에 참여했던 선생님들은, 한글을 접하게 해주어서 고맙다고 거듭 말했다. 그리고 물었다. “한글이 우리 찌아찌아족의 공식 문자가 된 것이 맞나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다른 학교에도 한글 교육을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 돌아서는 내 손에 땅콩 두 봉지와 부톤 섬 지도를 쥐어주었다.

부톤 섬의 지도는 언제나 가슴에 남아 있다. 1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 아니라, 내가 한국에 전해주고 보여줘야 할 곳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부톤 섬, 이곳에 한글을 만난 찌아찌아족이 살고 있다. 그리고 한글을 더 많이 만나고 싶어 하는 찌아찌아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길의 표지판이 한글로 적혀 있다. ‘잘란’은 찌아찌아 말로 길. 이 길의 이름은 ‘띵까하을리ㅂ우’라는 뜻이다. 사진 제공 <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서해문집)

정덕영 님은 서울 생으로 제약회사에 20년간 근무했습니다. 평소 우리말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님은 서강대 한국어 교원 양성 과정을 이수한 후, 2년 가까이 결혼 이민자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으며, 2010년 한 해 동안 인도네시아 부톤 섬에서 한글과 한국어를 가르쳤습니다. 2011년 초 귀국 후 다시 찌아찌아족 곁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며, 고려대 교육대학원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는 님은 최근 첫 번째 저서, <찌아찌아 마을의 한글학교>(서해문집)를 펴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