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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가 행복이다

요즘 KBS-2TV 프로그램 <개그콘서트> 중 ‘감사합니다’라는 코너가 인기입니다. “세상에는 감사할 일들이 참 많습니다”라고 시작되는 이 개그는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지루했는데, 비가 오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수능 시험 날, 아는 문제도 틀릴까봐 걱정했는데, 아는 문제가 하나도 없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라며 웃음을 주고, 덕분에 아이들 사이에서 ‘감사합니다’ 놀이가 유행이라니, 참으로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제 학자들은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뇌가 감사한 이유를 찾아서, 정말로 감사하게 만들어준다고 합니다. “감사합니다”가 언어 습관이 되면, 의식은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좋은 면이나 작은 행복에 초점을 맞추어 감사의 마음이 생기는 것이지요. 감사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모아보았습니다.

_ 편집자주

‘감사하는 마음’이

심장을 가장

편안히 만들어준다

감사하기 훈련의 과학적 효과는 신경심장학이라는 학문 분야를 통해 입증되었다고 합니다. <회복탄력성>(김주환/위즈덤하우스)에서는 그 연구 결과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신경질적이고 짜증을 많이 내는 사람은 심장이 약해서, 심장의 박동수가 불규칙하기 때문인 경우도 많다. 즉 화가 나서 심장박동수가 불규칙하다기보다 불규칙한 심장박동수가 그 사람을 불안하고 짜증 나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심장박동과 감정의 관계에 주목한 학자들은 심장박동수를 가장 이상적으로 유지시켜주는 긍정적 정서가 무엇인지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감사하는 마음’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보통 성인의 심장박동수는 1분에 70번을 기준으로 미세하게 변화한다. 분노나 좌절감 등 부정적 감정을 느낄 때에는 매우 불규칙하게 변화하지만, 감사한 마음을 느낄 때 심장박동수는 매우 규칙적으로 변하게 된다. 편안한 휴식, 심지어 수면 상태에 있을 때보다도 감사할 때, 가장 편안한 심장 상태를 유지했다.’

출처_ McCraty & Childre(2004)(<회복탄력성>에서)

매일매일

‘감사할 일’ 찾기가

가져다준,

왕복 200분의 변화

2011년 ‘서울메트로 스토리텔링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은 윤보라(23)씨의 체험담.

‘집에서 학교까지 전철로 100분. 지방대에 다니는 나는 전철이 점점 서울에서 멀어지고 차창 밖으로 드넓은 밭과 논이 나타나면, 그만큼 주류에서 떨어져 있다는 불안함과 자격지심, 열등감으로 무기력해졌다. 왕복 200분의 통학, 그것은 200분의 자학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에게 노트 한 권을 건네시며 말씀하셨다.

“꽃다운 청춘이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뭐든 생각하기 나름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지하철에서 멍하니 있지만 말고 오늘부터 감사일기를 한번 써봐.”

느닷없이 감사일기라니. 도대체 감사할 만한 게 뭐가 있다는 건지. 처음에는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아주 사소한 것을 대충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전철에서 운 좋게 앉아 갈 수 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오늘은 날씨도 정말 좋고, 저녁노을이 정말 예뻤어요. 감사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감사합니다’란 단어를 쓸 때마다 진짜로 감사한 마음이 생기는 것 아닌가. 신기한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지고 점점 쓸거리가 많아졌다. 무탈했던 하루, 계절의 아름다움, 내 친구들 등등 나를 둘러싼 소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생겼다. 왕복 200분의 긴 통학, 나의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전철 안에서 자학하지 않는다. 오히려 학교 성적과 교우 관계 등 학교생활에도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전철의 진동마저 작지만 끊임없이 뛰고 있는 내 심장처럼 천천히 그러나 힘 있게 나를 응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감사의 분량이 행복의 분량이다. – 마하트마 간디

제가 아는 한 사장님은 직원이 실수를 하여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히면 질책을 하는 대신에 ‘이번 일로 무엇을 배워 감사한지’를 정리해서 제출하라고 합니다. 잘못한 것이야 당연히 본인도 느끼고 있을 테니, 그 실패를 회사의 자산으로 끌어안고자 하는 사장님의 지혜인 것이지요.  – 북코치 권윤구

둥근 지구의 꼭대기에 앉아 더 높은 곳만 쳐다본다. 눈앞의 즐거움은 안 보이고 자꾸 남의 떡만 크게 보인다. 몸은 여기에 있는데 생각은 저기에 가 논다. 내 손에 쥔 것, 지금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잊은 지가 참 오래되었다. 더 가지고 다 가지기 위해 아등바등하다가 가진 것을 다 잃는다. 기쁨은 먼 데 딴 데 있지 않다. 즐거움은 코앞 발밑에 있다. 그것을 찾아라.  – 다산 정약용 <다산어록청상>(정민|푸르메)에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 두려움을 모른다. 감사하는 마음은 빛이 어둠을 뒤덮어 버리듯 두려움을 뒤덮을 수 있다. 둘째, 거만해지지 않도록 막아준다. 감사의 마음은 조용하고 겸손한 인간을 만든다. 삶이 선사한 조그만 선물에도 기뻐하게 만든다.  – <여자는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보도 섀퍼|21세기 북스) 중에서

감사를 더 잘 이해하게 될수록 분노와 우울, 그리고 절망의 피해를 덜 받는다. 감사하는 마음은 소유하고 지배하기를 원하는 아상의 딱딱한 껍데기를 점차 녹여주는 약과 같은 구실을 하여, 우리를 관대한 존재로 바꾸어줄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은 영혼의 연금술로 우리를 도량이 넓고 고결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한다.  – 샘 킨. 철학자

범칙금과

아이스크림

양경만 46세. 제주도 제주시 연동

어느 날 운전을 하다 신호 위반을 하게 되었다. 경찰차 한 대가 따라붙었고, 경찰관에게 면허증을 보여줬는데, 경찰관이 면허증과 내 얼굴을 수차례 번갈아 보는 게 아닌가.

“혹시 양경만 선생님 아니십니까?” 물었다. “윽! 맞는데요. 저를 아세요?” “알다마다요! 제가 어찌 잊습니까. 일단 차를 저쪽으로 움직이십시오.” “혹시 95년도에 OO 경찰서 정문의 의경, 기억 안 나십니까?”

순간 어렴풋이 뇌리를 스쳐가는 얼굴이 있었다. 벌써 15년 전의 일이다. 당시 친구의 사무실 일을 도와주었는데, 그 근처 경찰서 정문에서 매일같이 보초를 서던 의경이 있었다. 뜨거운 여름날 늘 벌겋게 상기된 얼굴, 게다가 아스팔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도 부동자세로 가만히 서 있으니 보기에도 정말 힘들어 보였다. 친구와 나는 점심을 먹으면 식당 옆에 있는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을 사곤 했는데, 순간 더운데 고생하는 의경이 생각났다. 처음 아이스크림을 건넸을 땐 한사코 마다했지만,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시민이 사주는 것인데 무슨 문제가 있냐”고 설득한 끝에야 어렵게 받아주었다. 그 일은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15년이 지난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경찰관이 바로 그때의 그 의경이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머나먼 타향에서 군 생활을 하던 때 낯모르는 사람에게서 건네받은 아이스크림 한 개에 눈물을 왈칵 쏟아냈던 당시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일은 힘들었던 군 생활에 너무나도 힘이 되었고, 친형보다도 더 애틋했던 정을 잊을 수 없어 제대를 하고서도 다시 이곳을 찾아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범칙금 딱지 안 끊느냐?”는 말에 그 돈으로 조카들 아이스크림 사주라고 하는 경찰관. 설마 이런 사연으로 경찰관이 직무 유기라고 문제 삼지는 않겠죠?^^

살아 있음에 감사할 때 기분이 최고로 좋아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감정은 모든 것에 감사할 때 생겨난다.

–  루이스 스미디스

우리 엄마는 해피바이러스

조화익 29세. 취업준비생.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

나와 엄마와의 숨바꼭질은 중1 때부터 고1때까지 계속됐다. 엄마는 공부에 별 뜻이 없는내 의지와 상관없이 영어, 수학 학원에 덜컥 등록하고는 했다. 나는 미꾸라지마냥 빠져나왔고, 어떤 학원도 한 달 이상 다닌 적이 없었다. 엄마는 당신이 이루지 못한 걸 자식에게 기대하고 압박하고 부담을 주셨는데, 특히 공부에 있어서는 아주 엄격했고 무서웠다.

가게 일로 바쁜 엄마는 하루에 한 번 볼 때도 “공부는 어떻게 하고 있니?” “학원 갔냐?”가 인사말의 전부였다. 그런 엄마가 점점 싫어졌다. 나중엔 엄마만 봐도 화가 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고2 때 엄마는 갑자기 마음수련을 하러 일주일간 논산에 있는 교육원에 가겠다고 했다. 아싸! 숨통이 트이는 듯한 이 해방감, 엄마의 빈자리가 정말 감사했다.

얼마 후 엄마가 돌아왔다. 엄마의 미묘한 변화가 감지됐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가족들은 반신반의했다. 에이, 설마~! 하지만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도 엄마는 진짜 변해 있었다. 우선 엄마가 화를 내지 않는 게 신기했다. 게다가 나를 이해해주는 엄마의 말들과 눈빛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전엔 “학원 갔다 왔냐?” 하면서 오직 결과만 묻던 엄마가 “아픈 데는 없니?” “먹고 싶은 것은 없어?” 하면서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주었다.

특히 아빠와 농담하는 게 놀라웠다. 아버지는 평소 유머러스했지만,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유머라 엄마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음으로 받아들이는 엄마를 보며 온 가족이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전 엄마 아빠의 관계는 뭐랄까 사이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애정이 많다고는 볼 수 없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미안해요” “제가 할게요” 하는 엄마의 초긍정과 따스함 덕분에 우리 집은 어느새 화목해졌다.

어느 순간 궁금해졌다. ‘마음수련이 도대체 뭐기에 엄마가 저렇게 바뀐 거지?’ 그리고 막연한 기대가 생겼다. 나도 수련하면 지금의 내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나는 참 우유부단했다. 뭘 하나 배워도 끈기 있게 해나간 적이 없었다. 남들이 잘하는 게 뭐냐고 물으면 수박 겉핥기로 이것저것 한다고 했지만 정작 제대로 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 덕분에 마음수련을 하게 되면서, 마음수련만은 꼭 끝까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뀌고 싶다고 말만 했을 뿐 늘 제자리였던 내가 지긋지긋했기 때문이다. 수련을 하며 세상 탓, 남 탓하며 사는 게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 수 있었고,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이 시간이 참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무렵 나는 자격증 시험 실패로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수련이야말로 나 자신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다행히 올해 나는 한결 좋아진 집중력으로 자격증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요즘은 친구들에게 엄마 자랑을 많이 한다. 내겐 엄마는 둘도 없는 친구다. 지금도 엄마는 “네가 하고 싶은 게 생기면 후회 없이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만 하신다. 늘 지켜봐주시는 엄마의 사랑은 우리 가족 모두를 그리고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해피바이러스다.

살아날 확률 8%의 행운, 백혈병 극복한 배종건씨

“만성골수성백혈병입니다.”
2000년 겨울, 배종건(62)씨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이 떨어졌다. 19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은행에 입사,
30년간 한길을 내달려왔던 그는 능력과 성실함을 인정받아 그해 초 지점장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백혈병 진단을 받게 된 것이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순간 인생이 확 돌아가는 느낌과 동시에 헛살았구나 싶었죠.”

설상가상 1년 만에 병은 만성에서 급성으로 급속도로 악화됐다. 백혈병 치료 방법은 골수이식뿐이었지만, 골수가 맞는 사람도 찾지 못했었다. 그 무렵 희소식이 들려왔다. 글리벡이라는 백혈병 신약이 처음 나온 것이다. 그러나 살아날 확률은 불과 8%. 그나마 약을 복용해도 내성이 생기면 소용없었다. ‘언제 죽나’ ‘언제 내성이 생길까’ 늘 불안해하며 지내던 날들….

죽음 앞에서 삶은 단지 물거품이란 사실에 허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지….

백혈병으로 인해 지점장직도 그만두고 은행연수원에서 근무를 하던 때였다. 금융감독원이 주최한 연수 프로그램에서 마음수련 강의를 듣게 되었다.

무엇보다 마음이 버려진다는 말이 와 닿았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막막한 상황, 천근만근 무거운 마음부터 내려놓고 싶었다. 그는 1주 휴가를 내서 논산에 있는 마음수련 교육원에 들어갔다. 모처럼의 휴가였다. 이렇게 자신과 마주하고 지난 삶을 돌아본 게 언제였던가.

‘세상엔 나쁜 놈도 많은데 왜 하필 내가 이런 병에 걸리나…’ 하늘을 원망하고 자신의 처지가 너무 가여워 울분을 토했던 지난 시간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저놈 참 안됐다, 하는 그런 말도 듣기 싫었어요. 다 가식적으로 들렸으니까요.”

처음엔 세상에 대한 분노, 그동안 자신을 힘들게 한 사람들을 탓하는 마음들이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렇게 한바탕 태풍이 지나가서였을까. 수련으로 혼잡한 마음들을 걷어내자 비로소 자신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면서 학교 다니기도 힘들었던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한다’며 무수히 다짐했던 시간들. 은행에 취직해 받는 월급 족족 부모님께 드렸다. 사업하는 형제들도 도와주었다. 그건 결혼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스스로는 돈 한 푼 없이 지낼 때도 있었지만 그게 도리라 여겼다 한다.

“돈 벌어서 가족들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어요.”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도와줘도 못사는 형제들을 보면 답답했고, 경제적으로 손해를 끼친 형제들과의 관계도 갈수록 서먹해졌다. 돈을 못 받을까 전전긍긍했고, ‘도와줄 수 있는 한계가 있는데 다들 나한테만 기대하고 힘들게 하는구나…’ 불만이 커져갔다. 40대 후반이면 퇴직을 준비해야 한다, 그 이후 자식들 결혼과 노후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런저런 생각이 40대 가장의 마음을 더 무겁게 했다. 하지만 가족은 그의 마음을 몰라주는 듯했다.

가족, 형제 등에 대한 마음들을 버려나갔다. 돌아보니 그가 가졌던 생각들이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내가 집안의 중심이니까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기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않으면 잘 못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각자 열심히 살고 있는 형제들의 모습을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을 뿐이었다.

도와주었다는 마음은 형제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열심히 사는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며 가족을 무시한 건, 오히려 자신이었다.

“주위 형제 가족들에게 참 많이 미안하더라고요. 그러면서 가족을 참으로 사랑한다는 게 뭔가 돌아봤지요.”

결국 마음을 잘못 먹고 살아온 대가가 병으로 나타난 거였다. 이제 버리면 되었다. 일주일 수련을 마치고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다녀온 그는 동네에 있는 지역 수련원에 다니며 계속 마음수련을 이어갔다.

수련을 하며 무엇보다 병에 대해서 잊고 산다는 게 좋았다. ‘내가 죽으면 가족은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죽으면 끝이라는 두려움과 공포에서도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마음은 점차 가벼워졌고, 늘 피로감에 휩싸이던 몸도 회복되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온갖 미련에 잔뜩 겁을 먹고 있었던 자신은 ‘진짜 나’가 아니라는 걸…. 그동안 돈, 명예, 출세를 위해 살았던 삶이 왜 그토록 허망한지도 알 수 있었다 한다.

스스로가 만든 수많은 조건과 인연에 끌려다니느라 ‘진짜 나’로 한 번도 산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이 뭔지도 모른 채 살아왔는데, 병이 저를 돌아보게 한 겁니다. 사람이 아파봐야 세상 이치를 알고 겸손하게 살겠구나 싶을 정도로, 저는 내 자신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산다는 게 직장 다니고 돈 버는 건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더라고요.”

2009년 정년퇴직을 한 후 현재까지 건강하게 노후를 보내고 있는 그는 진실로 나를 돌아볼 수 있었기에 아픈 것조차 감사하다고 했다. 이제 욕심과 집착이 아니라, 상대방의 입장을 생각하며 마음 없이 도와줄 수 있게 되어 진정 행복하다고 했다.

그렇게 가볍고 편안한 마음을 유지한 덕분일까. 약을 복용한 지 11년째이지만 흔히 나타나는 발진이나 근육통 등 부작용도 없고, 내성조차 없는 그를 보고 의사는 ‘기적’이라 했다.

“의사가 그래요. 선생님은 골수이식한 사람보다 경과가 더 좋은, 8%에 들어간 행운아라고. 하지만 전 그 8%의 힘은 바로 마음수련에서 나왔다고 생각해요. 세상에 대한 분노와 죽음이란 어마어마한 공포와 스트레스를 마음을 비우지 않았다면 어떻게 견뎠겠습니까. 이제야 정말 사는 것 같고, 요새는 뭘 해도 행복해요. 다른 분들은 저처럼 아프기 전에 인생의 참 의미를 알고,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지 알고 살았으면 좋겠어요. 하하.”

안팎의 귀신 쫓아주던 동지팥죽의 효과

어머니는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동짓날이면 잊지 않고 팥죽을 해주셨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찬 팥죽 한 그릇을 먹고 밖으로 놀러 나갔던 기억, 신나게 새알을 빚어서 팥죽에 넣어 먹었던 것도 재미난 추억입니다.

 
 
 
 
 
 
 
 

“우선 팥에 돌이 섞였을 수 있으니까 흐르는 물에 돌을 골라내는 작업을 꼭 해야 돼. 그리고 팥을 불려서 끓이는데 중불에다가 푹 삶은 다음 소쿠리에다가 짓이겨서 껍질을 걸러낸 후에 부드러운 앙금만 남겨. 거기다 불린 쌀을 섞어서 물을 좀 많이 잡아서 오래오래 끓이면 된다. 팥 앙금은 타기가 쉽기 때문에 계속 저어주고, 어느 정도 끓기 시작하면 찹쌀로 만든 새알을 넣어야지. 새알이 다 익으면 위로 뜨는데 그때 소금 간해서 먹으면 돼.”

예로부터 팥은 귀신을 쫓아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사를 가면 팥을 뿌리기도 하고 시루떡을 해서 돌리기도 했지요. 그런 의미에서 동짓날이면 팥죽을 해먹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악귀는 쫓아내고, 새해엔 좋은 기운만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한의학적으로는 집 밖의 귀신만을 쫓는 건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신장이 콩팥이라 불리는 이유는 콩처럼 또는 팥처럼 생겼기 때문이지요. 한의학에서는 음식이나 약을 먹으면 형색기미에 따라 오장육부로 가는 효능이 달라진다고 보는데요, 실제로 팥은 ‘적소두’라 불리며 신장으로 가서 이뇨작용을 돕는 역할을 합니다. 혈액 속에 있는 독, 즉 불필요한 수분(습사)을 원활히 배출시키기 때문에 잘 붓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쉽게 피로해지는 사람에게 좋고, 각기병을 예방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우리 몸의 독소를 쫓아내주는 팥은 달리 말하면 내 안의 귀신을 쫓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동짓날이면 좋은 팥을 고르고, 삶고, 짓이기는 수고로움을 마다 않고 팥죽을 먹으며 안팎으로 귀신들을 몰아내는 것은 우리 선조들만의 지혜라 아니할 수 없겠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영화 ‘완득이’

김현승 문화칼럼니스트

2008년 여름 한 카페에서 무심코 집어 들었던 책 <완득이>. 내용도 쉬웠지만,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어느 하나 매력이 없는 인물이 없었기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읽는 내내 혼자서 배우 김윤석과 유아인을 캐스팅하고 장면을 상상했는데, 주연 배우가 그렇게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가 커졌다. 그리고 동시에 책의 내용이 얼마나 성공적으로 영화화될 것인가에 대한 걱정도 생겼다.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뚜껑을 열어보니, 보글보글 잘 끓인 된장찌개처럼 구수한 향기가 코를 찌른다. 맛도 기가 막히다. 오랜만에 진하게 사람 냄새 나는 착한 영화를 만났다.

이한 감독 연출의 영화 ‘완득이’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온 질풍노도의 고등학생 남자아이가 앞집에 사는 선생님이자 인생의 멘토 동주를 만나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언제부턴가 교육계에서, 심지어 예능에서까지 ‘멘토’ 열풍이 불어온 것은 ‘스승’이라 부를 수 있는 인생의 조언자를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무한 경쟁 시대의 불안한 청춘들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래서 동주의 캐릭터가, 완득의 캐릭터가,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완득에게 동주는 스승이자 멘토였고, 친구였다.

김춘수의 시를 패러디한 영화 카피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처럼 동주는 완득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러대고, 완득은 그럴 때마다 동주를 없애 달라 기도한다. 그렇지만 “얌마, 도완득!” 하는 그 부름은 사실 꼬여도 한참 꼬여 엉켜 있는 완득의 삶을 동주가 자신의 투박한 손으로 천천히 함께 풀어보겠다는 인간미 넘치는 구원의 손길인 셈이다.

꼽추 아버지와 필리핀 어머니 사이에서 완득은 세상에 등을 돌리고 스스로 외톨이가 되지만, 동주의 도움으로 세상에 한 걸음씩 발을 내딛고 소통을 시작한다. “햇반 하나 던져봐라” 할 때 같은 그 말투로 동주는 완득에게 필요한 조언들을 또 툭툭 던진다. 그러나 “가난을 부끄러워할 게 아니라 가난을 부끄러워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느끼게 될 거다. 신체적인 장애가 아니라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부모들이 세상에 더 넘쳐난다, 대학교가 대학이 아니라 세상이 대학이다” 하는 동주의 대사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교사가 폭력을 휘두르고, ‘야간자율학습’은 ‘야간강제학습’이 된 지 오래고, 한 번 문제아로 낙인 찍히면 영원히 문제아가 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만큼 지뿌둥한 현실에 ‘완득이’는 어퍼컷을 날리고 희망을 외친다.

영화 속 모든 인물들은 소외된 약자다. 필리핀에서 시집온 완득의 어머니를 비롯한 외국인 노동자들, 꼽추 아버지, 카바레에서 꽃을 팔다가 가족이 된 민구 삼촌, 가난한 욕쟁이 화가 앞집 아저씨, 무협 작가 호정. 그리고 여기에 사업가 아버지의 배경조차 마다한 채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는 사회 교사 동주가 있다. 그리고 그에게는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겠다는 ‘진심’이 있고 자신의 뜻을 잃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깡’도 있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춤’이다. 영화는 꼽추인 완득의 아버지가 카바레에서 탭댄스를 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카바레가 없어지고 나서도 아버지와 민구 삼촌은 오일장을 돌며 춤을 추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젊은 시절 춤을 ‘예술’이라 생각했다던 완득 아버지에게 이제 춤은 자신의 유일한 희망인 완득을 위해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생계 수단이 되었다. 모든 갈등이 해소된 후, 완득이의 집에서 온 가족과 이웃들이 모여 서로를 응원하며 조촐한 잔치를 벌인다. 한잔 걸친 채 신나게 춤을 추는 모습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우리는 이 영화가 주려는 메시지를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완득이’에서의 춤은 ‘희망’과 ‘화해’ 그리고 ‘가족애’다.

돋보기 역할해주는 ‘줌 인 테이프’

이름은?
‘줌 인 테이프(Zoom in Tape)’ 글씨를 크게 확대해서 볼 수 있는 테이프이다. 누구나 쉽게 뜯어서 바로 쓸 수 있는 시력 보조 기구인 셈인데, 작은 프린트가 되어 있는 곳 위에 붙이면 돋보기 같은 역할을 한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시력이 나빠진 노인들은 작은 글씨를 읽는 데 어려움을 넘어 두려움까지 생긴다고 말한다. 나이가 젊은 사람들도 난시 등의 시력 장애로 인해 작은 글씨가 안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확대경 역할을 하는 테이프이다. 특히 노인들이 자주 접하게 되는 의약품의 경우, 복용 방법이나 유통기한이 아주 작은 글씨로 쓰여 있는데 이것을 제대로 읽지 못할 경우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

중점을 둔 부분은?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투명한 실리콘을 사용했고 표면을 불룩하게 만들어 확대 효과를 냈다. 돋보기를 일일이 찾는 수고로움 없이, 글씨가 안 보이는 곳 어디든지 손으로 뜯어서 붙일 수 있도록 테이프 형태로 제작했다.

아쉬운 점은?
테이프의 가운데 부분에 비해 가장자리는 글자가 아주 크게 보이지 않는 점이 아쉽다. 이 부분을 기술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전문가의 자문을 구할 것이다. 대량 생산을 하기 전에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

쉬찡팡(Xu Jingfang, 許瀞方) 23세. 제품 디자이너, 린췬차오(Lin Qunchao,林群超) 45세. 제품 디자이너

한 해를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시작하는 어느 한때 참으로 고요한 찰나를 만났습니다. 잠시 숨 고르기라도 하는 걸까 참으로 고요한 새벽이었습니다. 안개 사이로 비쳐지는 시리디시린 하얀 풍경… 이렇게 아름다운 세상에 우리 함께 있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일산 호수공원. 2010년 1월

사진, 글 김선규

눈보라 몰아치는 추운 겨울. 농가를 기웃거리는 작은 새를 위해 농부는 호두 부스러기를 소쿠리에 담아 내어줍니다. 그리고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자식 입에 먹을 것 들어갈 때 제일 좋다는 엄마 미소입니다. 땅의 마음, 농부의 마음, 엄마의 마음은 역시 하나인가 봅니다.

충북 영동군 상촌면 궁촌리. 2007년 1월

인디언들은 말을 달리다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뒤돌아본다 하지요. 뒤늦게 오는 자기 영혼을 기다리는 것이라 합니다. 자기가 걸어온 눈길을 뒤돌아보는 저 비둘기. 한 해 동안 정신없이 걸어온 길을 반성하게 합니다. 혹 내 영혼은 두고 껍데기만 온 건 아닌지….

창덕궁 후원. 2005년 12월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종 만드는 사람 50년, 주철장 원광식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70) 선생. 21살 때부터 종을 만들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종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50년간 한길을 걸어온 그는, 그동안 2만여 개에 이르는 종을 만든 우리 종의 산 역사다.

그가 본격적으로 종과 인연을 맺은 건 1963년이었다. 8촌 형님은 종 만드는 회사 대표로, 마침 사찰과 교회가 급증하면서 종 만드는 일손이 부족해져 함께하게 된 것. 하지만 종을 만들수록 종소리에 대한 아쉬움은 커져갔다고 회고한다.

“초등학교 때 수원 용주사 새벽 예불 때 듣던 종소리가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게 참 좋았는데, 내가 만드는 건 그런 소리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던 1969년 어느 날이었다. 1200도가 넘는 쇳물이 폭발하며 한쪽 눈을 잃고 절망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예산 수덕사 범종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3년간 종과 씨름하면서 만든 노력의 대가일까. 종소리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사찰과 관공서에서 그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때 정말 열심히 종을 만들면서, 나는 평생 종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지요.”

우선 그는 우리 종소리를 과학적으로 연구, 재현하기 위해 1976년에 한국범종학회를 설립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종의 주조 방식의 맥이 끊기면서 일본식으로 종을 만든다는 사실에 답답했기 때문이다.

‘소리와 미학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라는 성덕대왕신종 소리의 비밀을 풀기 위해 크고 작은 종들을 수없이 만들어야 했다. 당시엔 무늬 하나를 배치하는 데도 종소리를 따져가며 새겼던 터라, 그가 만든 종으로 학자들은 완벽한 소리에 필요한 종의 구성 성분과 두께, 문양의 위치, 모양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데이터를 구축해갔다.

그중에서 특히 거푸집의 흙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흙과 쇠의 절묘한 합방을 통해 비로소 아름다운 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흙을 찾아 나섰다.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는 물론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을 뒤진 끝에 결국, 경주 일대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거푸집을 만들 때 흙의 배합이 중요해요. 도자기처럼 점도가 강한 흙으로 만들면 공기가 안 통해 1000도가 넘는 쇳물이 들어가면 녹아버리거나 터져버리거든. 근데 경주 옥돌은 물을 묻히면 문양은 정교하게 잘 새겨지고 마르면 단단해지는 성질이 있어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어요. 결국 경주 토양이 좋기 때문에 통일신라 때 좋은 종을 만들 수 있었던 거지요.”

10여 년이 넘게 흙을 빚고 쇳물을 녹여 붓기를 수만 번…. 옥돌을 갈아 거푸집을 만들자,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렇듯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거의 모든 종을 재현해왔다. 보신각종을 비롯해 산불로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 국내 최대 규모인 화천 ‘세계 평화의 종(37.5톤)’ 등 그가 재현하고 만든 큰 종만 7천여 개, 작은 종까지 하면 2만여 개에 이른다.

“무엇보다 종을 만들 때 어떤 마음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해요.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좋은 종소리를 들을 수 없거든. 나란 인간을 만들어준 게 종인지, 종을 위해 산 게 나인지 모르겠지만, 가급적 시비 안 하고, 말, 행동 조심하며 살려고 해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처럼, 천년의 소리를 이어가기 위한 그의 노력은 어쩌면 지금부터 일는지도 모른다.

“아직 종을 알려면 멀었어.” 한쪽 눈을 잃고도 50년을 한결같이 걸어온 장인의 마지막 말은, 깊은 울림을 전하는 종소리처럼 긴 여운이 되어 남았다.

세상을 일깨우는 천상의 소리, 종

우웅~ 종소리가 울린다. 세상만물을 향해 깊게, 넓게, 크게 울린다. 불교에서 말하는 범종(梵鐘)의 범(梵)자는 우주 만물, 진리란 뜻을 지닌다 한다. 또한 고대 인도 신화의 브라흐마Brahma신을 뜻하는 대범천(大梵天)의 범으로 하늘이라는 의미가 있다. 결국 범종이란 ‘하늘의 종’으로서 ‘진리의 소리’로 세상을 일깨운다는 뜻이다. 하기에, 우리는 33번의 엄숙한 타종과 함께 새해를 맞는다.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무엇을 향해 나아갈 것인지, 고요히 마음 저편을 울리며 세상과 나를 일깨우던 종소리…. 2012년 임진년(壬辰年) 새해를 맞으며 그 의미를 되새긴다.

사진 홍성훈 글 김혜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상원사 동종(통일신라 725년. 국보36호)의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이 종은 현재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 상원사에 있으며, 2006년 주철장 원광식 선생이 재현해내어 진천 종박물관에 전시한 것을 촬영하였다.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 왼쪽은 커다란 공후를 끌어안고 연주하고 있으며 오른쪽은 생황을 불고 있는데 하늘로부터 하강하는
부드러운 동세가 느껴진다. 상반신에는 영락瓔珞을 드리웠고 팔과 허리 아래로는 얇은 천의天衣를 걸친 모습이 매우 섬세하고 우아하다.

하늘과 땅을 울리고 지하 세계까지 울려 삼계의 모든 유정 무정을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 나른다는 범종 소리.

우리나라에서 범종은 삼국 시대 불교의 전래 이후 제작, 사용되었으나 현재 남아 있는 것은 통일신라 8세기 이후에 만들어진 범종이다. 대개 한국의 종은 신라 종으로 통하며, 오늘날 한국 종이 코리안 벨(Korean bell)이라는 세계적인 학명을 얻게 된 것도 신라의 독창적이고도 아름다운 조형성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의 종에는 그만의 특별한 소리의 비밀이 담겨 있다. 즉, 종 표면의 당좌(撞座)를 치면 잡음이 종 내부에 뚫린 음통으로 빠져나가고 좋은 소리는 땅 밑 움통에 반사돼 다시 새로운 진동을 만들며 그 여운을 길게 이어가는 것이다.

그 종의 소리가 파동 치듯 길게 이어지며 ‘우우웅~ 우우웅~’ 하는 맥놀이 현상이 나타난다. 맥놀이 현상이란 맥박이 뛰는 것 같은 리듬을 탄다는 뜻에서 이름 붙여진 것으로, 진동수가 다른 두 개의 소리가 서로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하며 울리는 현상을 말한다. 맥놀이의 주요 원인은 종 두께의 불균형. 서양 종은 내부를 고르게 깎아 소리가 일정한 데 비해 우리 종소리는 두께가 고르지 않고, 표면에 장식되는 각종 문양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만들어진다. 웅장한 타격 음, 그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여음의 파고는 세상 어떤 종도 낼 수 없는 천상의 소리인 것이다.

우리 종의 생김새, 각종 문양의 뜻과 의미, 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등을 살펴보다 보면, 천상의 소리를 내기 위한 선조들의 노력과 지혜에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당좌(撞座)

종을 치는 자리. 당목과 직접 닿는 부분인 당좌는 종신의 하대에 별도로 마련되어 도드라지게 배치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종 하부를 타종할 때 종소리가 가장 크고, 상부로 올라갈수록 소리가 작아진다. 당좌가 종구의 밑에서 가장 불룩한 부분에 위치하도록 했으며, 이 부분을 칠 때 가장 좋은 소리가 난다.


용뉴(龍紐)

용을 종에 장식한 까닭은 좋은 소리를 얻기 위한 것으로 「문선(文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바닷속에는 큰 물고기가 있는데 고래라 하고, 해변에는 용의 자식이 있으니 포뢰라 한다. 본디 포뢰는 고래를 두려워하여 고래가 나타나면 큰 소리를 내어 운다. 무릇 종은 소리가 커야 하므로 그 위에 포뢰를 만들고 고래 형상을 깎아 당봉(撞棒)으로 하였다.”



연곽과 연뢰(蓮廓 蓮雷)
연꽃 봉오리 형태로 돌출된 장식을 연뢰라 하고, 그 장식을 감싸고 있는 방형곽을 연곽이라고 한다.

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와 소리를 울리는 몸체(종신:鍾身)로 구분된다. 종의 고리는 종뉴(鍾紐)라고 하는데 용의 형상을 하고 있어 용뉴(龍紐)라고도 부른다.

용뉴(龍紐)는 용머리와 휘어진 목으로 구성된 종을 매다는 고리이다. 일본과 중국 범종은 하나의 몸체로 이어진 쌍용인데 반해 우리나라의 범종은 한 마리의 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용머리가 ∩형태여서 마치 범종 전체를 물어 올리는 듯하다.

종의 몸체를 살펴보면, 종 윗부분을 둘러싼 것을 상대(上帶)라 하고, 맨 아랫부분을 둘러싼 띠를 하대(下帶)라고 한다. 상대와 하대에는 불교에서 이르길 극락정토에서만 피어난다는 가상의 꽃 당초 무늬를 새기는 게 보통이었다.

종신에 새겨진 비천상(飛天像)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천인으로 불교 미술품에서 천상 세계를 표현한다.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하고 있으면 주악천인상(奏樂天人像)이라 부른다.

통일신라 시대 범종에는 주로 악기를 연주하는 주악천인상이, 고려 시대 범종에는 비천상, 불, 보살좌상이, 조선 시대 범종에는 보살입상 등을 장식했는데 그 섬세함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 범종은 지상에 낮게 띄워 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종 아래쪽 땅이 움푹 패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움통이라 하여 종에서 빠져나온 공명이 메아리 현상으로 다시 종신 안에 반사되며 여운이 길어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움통 또는 명동(鳴洞)
종 아래쪽 땅이 움푹 패인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우리 종만의 특징이다.

상대와 하대(上帶, 下帶)
불교에서 이르길 극락정토에서만 피어난다는 가상의 꽃인 당초 무늬를 새기는 게 보통이었다.

불교에선 부처님 말씀은 경(經)에만 있지 않고, 소리를 통해서도 진리의 말씀이 전해진다고 보았다. 이를 무성설법(無聲說法)이라 하여 법고, 목어, 운판, 범종을 통해 세상에 전했다. 법고(法鼓:큰북)는 땅에 사는 중생을, 목어(木魚)는 물속에 사는 중생을, 운판(雲版)은 하늘에 사는 중생을, 범종(梵鐘)은 지옥에서 신음하는 중생을 구원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한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살고 있는가. 극락인가, 지옥인가. 그곳이 어디이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한 듯하다.

종이 소리로서 세상만물을 일깨워주듯이, 우리도 서로의 종이 되어 서로를 깨워주는 것.

겸허함으로 상대 앞에 무릎 꿇고, 오직 사랑으로 인내하며…. 서로에게 이렇게 말해줄 수 있다면 어떠한가.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고려 동종(보물 277호)
전북 부안 내소사 소재
이 종이 내소사로 오게 된 경위와 관련하여 흥미로운 설화가 전한다. 종을 원하는 곳으로 보내기 위하여 종에게 개암사,실상사,부안 월명사 등을 차례로 물으며 종을 쳤으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내소사로 가겠느냐고 묻고 타종을 한 후에야 비로소 소리가 울려 이 절로 옮겨졌다고 한다.

파랑새처럼

아이가 바삐 강당 계단을 올라간다. 깡총깡총 내딛는 발걸음이 얼마나 날렵한지, 파랑새가 실개천을 스쳐 나는 듯하다.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갖지 못한 가벼움의 미학이 있다.

아침이었다. 열한 살 지우양이 교실에 들어오면서 제 자랑을 쏟아놓았다.

“선생님, 우와! 나 어제 대박 났어요.” “뭔데?” “원호가요, 나를 좋아한대요. 문자로 그랬어요.”

덜렁이 원호가 여학생한테 관심을? 그 개구쟁이가? 아무래도 뻥일 것 같았다. 그래서 ‘어디 한번 보자’고 했더니, 망설임 없이 제 휴대폰 화면을 공개하였다.

헐! 진짜였다. 휴대폰 액정 화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열한 살 원호군의 파격적인 사랑 고백이 새의 지저귐으로 내 귀에 들렸다. 나는 놀란 마음을 감추지 않고 지우한테 “오, 대단한데!”라고 말해주었다. 지우양도  ‘뭐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라는 도도한 눈빛을 보내고 휘리릭 제 자리로 돌아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서은이가 부러운 듯 내게 말했다.

“선생님, 지우 대따 인기 좋아요. 민혁이도 좋아하고요, 다른 반 남자아이도 좋아해요.”

민혁이까지? 이건 진짜 장난이 아니다. 민혁이가 누군가! 작은 얼굴에 오뚝 선 콧날. 검은 띠 3품을 자랑하는 어린이 태권왕. 지난봄, 우리 반이 공원으로 소풍을 갔을 때, 우연히 같은 장소로 소풍을 온 여중생들이, 제발 사진 한 판 같이 찍자고 졸졸 따라다니던 바로 그 얼짱 아닌가.

마침 노란색 물들인 머리카락을 날리며 민혁이가 교실로 들어왔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덜렁덜렁 제 자리로 가는 녀석을 불렀다.

“민혁이, 너 지우 좋아한다며?”

순간 노랑머리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았죠?’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대답 대신 빙긋 웃고 자리를 피했다.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는 감추고 싶은 것보다 드러내고 싶은 것이 훨씬 많다. 첫 시간 수업이 끝나자마자, 지우가 또 내 주위를 얼쩡거렸다. 할 말이 있다는 신호다. 지우는 새끼손가락을 치켜들고 다가왔다.

“손가락 다쳤어요.”

겨우 살짝 긁힌 정도의 상처다. 나는 ‘호’ 한 번 해주고 나서, “남자애들이 왜 너를 좋아하냐?”고 물어보았다. 지우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모르겠다며 살짝 튕겼다. 나는 기어코 열한 살 꼬마 아이의 명쾌한 답을 듣고 싶었다.

“선생님이 비밀 잘 지키는 것 알잖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진짜!”

아이를 향해 귀를 활짝 열고 기다렸다. 그랬더니 조심조심 다가와 내 귀에 속삭였다.

“예쁜가 봐요. 어제 민혁이가 전화했어요. 내가 예쁘다고요.”

파랑새의 사랑 놀이가 그렇게 곱고 가벼울까. 교실에서 아이들 노는 소리가 짹째글짹째글 들렸다. 맑은 실개천을 따라 돌과 수풀과 바람 사이를 자유로이 날아다니는 파랑새처럼.

최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