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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 마을 학교 교장 선생님 김봉민씨

라오스 수도 비엔티안에서 북쪽으로 30km쯤 떨어진 시골 마을 후웨이남옌. 매일 아침이면 뿌연 흙먼지 사이로 맞벌이 엄마들의 오토바이 행렬이 이어집니다. 서너 살 먹은 어린아이를 앞에 태우고 달려가는 곳은 마을의 탁아소이자 초등학교인 ‘푸른하늘배움터’. 이곳에 아이를 맡겨두고 나서야 마음 놓고 일터로 향할 수 있습니다.

이 학교를 만들고 운영하는 사람은 바로 한국인 김봉민(58)씨입니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던 그는 십 년 전 라오스를 여행하다가 길에서 우연히 산후부종으로 고통받는 어린 산모를 보게 되었다 합니다.

“열 서너 살쯤 됐을까, 아이가 온몸이 퉁퉁 부어 잘 서 있지도 못하는 겁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싶어 눈물이 많이 났어요. 얘들을 위해서 무얼 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을 했죠.”

2000년대 초, 라오스에는 한 가정에 대여섯 명의 아이들을 두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대부분 학교 공부보다는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거나, 거리를 배회하며 하루를 보내는 아이가 많았지요. 이를 안타깝게 여긴 김봉민씨는 젊은 시절의 야학 경험을 살려 형편이 어렵거나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모아 영어를 가르칩니다. 그리고 더 어린 아이들을 위해서는 유아원을 만들어 라오스어를 가르쳤습니다. 학교에 필요한 학용품과 교재는 양계장을 직접 운영하며 그 수입으로 조금씩 마련했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자 학생 수도 늘고 자금도 모아져 2008년 여름, ‘푸른하늘배움터’는 정규학교로 인정을 받게 됩니다. 많은 지식을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다양한 경험을 선물하고자 했던 김봉민씨는 라오스에는 없었던 소풍과 예절 교육, 봉사 활동 시간도 만들고 아이들을 위해 공연 팀을 모셔오기도 했습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가정 형편이 좋은 아이들의 입학도 늘어나면서 학비와 후원금으로 운영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재정도 안정이 되고 모두 400여 명의 학생들과 10여 명의 교직원이 함께 생활하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가 되었습니다.

푸른하늘배움터에 대해 입소문이 나자 다른 학교에서 김봉민씨를 찾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직접 방문하여 선생님, 이장님들의 의논 상대가 되어줍니다.

요즘에는 운영 회의에서 필요한 라오스어를 배우기 위해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김봉민씨는, 불과 7년 전 야학에서 영어를 배웠던 장난꾸러기들이 어느새 어엿한 대학생이 되어 거꾸로 자신을 이끌어주고 있다는 사실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봉사라는 말 자체가 참 부끄러울 정도로 너무 많은 걸 배웁니다. 부족해 보이는 환경에서도 항상 만족하면서 사는 법을 배우고, 어떤 사람에게도 함부로 하지 않는 모습에 감동도 많이 하죠.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만족할 줄도 모르고 내가 참 정신적으로 모자란 사람이었구나, 더 낮은 마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언제나 환한 미소로 고마움을 전하는 순박한 라오스 사람들. 그들과 함께하는 동안 예전엔 미처 몰랐던 행복을 찾았다는 김봉민씨는 아이들의 이름을 불러주며 남은 생을 보내고 싶다고 합니다. 그들의 천진한 마음을 닮고 싶다고 합니다.

김봉민씨는 2002년 라오스를 여행하던 중 아이들의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교육자로서의 제2의 인생을 시작합니다. 라오스에서 축산업을 하며 그 수익으로 2008년 ‘푸른하늘배움터‘라는 정규 학교를 만들었으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경일대학교 간호학과 김미한 교수

경일대학교 간호학과 김미한(41) 교수는 2년 동안 마음과 질병과의 관계를 연구한 결과, 마음수련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에게서 스트레스, 우울, 불안 지수 등 부정적인 감정들이 상당히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 합니다. 때문에 위기상황에 처한 환자들의 불안과 화, 짜증 등의 극한 감정을 고스란히 받는 간호사들이 보다 좋은 간호를 하기 위해서는 마음수련 프로그램을 반드시 간호 교육에 도입시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삼십이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되었죠. 주위에서도 많이 부러워했어요. 저도 빨리 꿈을 이뤄서 너무 좋았어요. 근데 그건 잠깐이고, 별로 행복하지 않은 거예요. 여전히 또 다른 목표를 향해 뛰어야만 하는 삶…. 다른 사람들과 끊임없이 경쟁, 비교하며 살다 보니 만족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사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 간호학과 대학원 박사 과정 수업을 듣고 있었을 때 교수님께서 건네주셨던 마음수련 책자가 문득 떠올랐어요. ‘인생의 쉼표를 찍어보자’는 말이 맘에 와 닿아서 2002년 여름 방학 때 마음수련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항상 저는 내일은, 또 이번 주에는, 무엇을 해야 되는지 계획을 세우고 앞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병원에서 간호사로 3교대 근무할 때도 하루 24시간이 응급실 근무, 잠, 공부로 채워졌습니다. 그런 생활은 교수가 돼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업 준비, 학과 일, 학생 상담 등 여전히 쳇바퀴 도는 듯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간호사란 직업은 남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사명감보다 의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답답함을 느껴 교수를 꿈꿨습니다. 그러다 보니 잘 따라오지 못하는 학생들을 보면 못마땅했습니다. ‘성적이 좋아야 좋은 병원에 취직하고 보다 인정받을 수 있을 텐데….’ 제가 지위와 명예를 추구하던 방식 그대로 학생들도 따라오길 바랐습니다. 내가 살아온 삶이 정답인 양 학생들에게 강요했던 모습, 게다가 교수라는 직함에 익숙하여 항상 남에게 지시하기 급급하였지 거기에 겸손은 없었습니다.

항상 경쟁하고 잘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논문 발표를 하고, 세미나에 참석하고,

오직 김. 미. 한. 이름 석 자를 드러내기 위해 살아온 삶이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학생들을 가르친 건지…. 수련을 통해 이름 석 자를 지워나갔습니다.

그동안 나만 생각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 주고 살았던 삶이 참회가 되었습니다.

사실 간호사는 환자가 가장 힘들고, 위급한 상황일 때 처음 만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헌신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간호사가 피곤하고 힘들다고 해서 환자의 이해를 요구하거나 하소연할 수는 없습니다. 환자는 늘 간호사보다 더욱 위기 상황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환자들의 불안과 짜증, 화를 고스란히 받는 간호사에게 평정심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마음수련을 하면서 가장 좋았던 건 우리가 본성을 되찾으면 모두가 하나임을 알기에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풀릴 거란 확신이 생겼다는 겁니다.

단지 간호 처치를 기술적으로 잘하는 간호사를 넘어서 인격적으로 성숙하고 환자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전인간호를 할 수 있는 간호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혼자 잘 먹고 잘살기 위함이 아닌, 세상에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라야 의미 있다는 인생의 큰 해답을 얻은 것이, 저에게도 가장 큰 행복이었듯이 말이지요.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임종을 앞둔 환자나 암 환자, 심리적 원인으로 인해 아픈 환자를 대상으로 마음수련 명상을 적용한 간호를 개발, 적용하여 환자들이 가장 힘든 순간에 편안한 간호를 받도록 돕고 싶습니다.

나이 든다는 것

흔히들 ‘하루살이 인생’ 같다는 말 자주 합니다. 하지만 그 하루살이도 6개월 내지 3년 동안 애벌레 시기를 거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그 긴 세월 동안 허물벗기를 여러 번 하고, 물속에서 온갖 위험을 이겨낸 후에야 비로소 하루일지언정 화려한 날개를 달고 눈부신 태양 아래를 날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살이를 빗대어 고작 하루를 살면서 생로병사와 번뇌가 있느냐며 가소롭다 말하지만, 잠시의 영화를 위해 70~80년을 애쓰다 허무하게 가는 우리네 인생과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실 우주의 끝없는 시간 속에서 보면 인간의 삶 역시 0.00000001초의 찰나에 불과할 테니까요. 그 짧은 시간 어찌 살까. 무엇을 하며 살까. 어떤 모습으로 나이를 먹는 게 좋을까. ‘행복하게 나이 잘 먹기’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편집자 주>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 자신에게 그렇습니다. 이젠, 사람이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말하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다고 문득문득 생각하게 됩니다.
– 공지영. 소설가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중에서

1979년 9월, 한적한 시골 마을에 8명의 노인이 도착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돌아간 것처럼 1959년의 풍경으로 가득 꾸며진 집에서 70~80대의 노인들은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이 발사되는 장면을 흑백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카스트로의 아바나 진격을 놓고 토론을 벌였으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냇 킹 콜의 노래를 들었다. 식단을 스스로 결정하는 데서부터 요리와 설거지, 청소 등 그간 제지당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일상생활을 보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자, 놀랍게도 노인들은 50대로 돌아간 것처럼 시력과 청력, 기억력, 악력이 향상되고 체중이 느는 등 실제로 ‘젊어졌다’.

이렇듯 ‘시계 거꾸로 돌리기 연구’를 통해 나이와 노화, 질병 등은 생물학적 숙명이 아닌 우리 몸과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고정관념이며, 이런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증명했다.

– <마음의 시계>(엘렌 랭어/사이언스 북스) 중에서

일반적인 편견과 달리 노인은 젊은이보다 사교 활동이 활발할 뿐 아니라 나이가 들면 들수록 행복감이 커진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눈길을 끌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사회학자 양양은 지난 1972년부터  2004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18세~88세의 미국인 2만 8천여 명을 대상으로 한 주기적인 대면 인터뷰를 토대로 이 같은 결과를 발표했다.

노화로 인한 통증과 사별 등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이 든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젊은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가진 것에 더 만족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듀크대학의 노화전문가 린다 조지는 나이 든 사람들이 기대를 낮추고 자신의 성과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에 만족감이 더 커진다고 설명했다.

사람들의 행복감은 경기 침체와 호황에 따라 변동을 보였으나 모든 시대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나이 든 사람들이었다.

– 미국사회학리뷰 2008년 4월호 게재

마음의 나이는 시작만 있을 뿐입니다. 아침에 뜨는 태양처럼…. 보이지 않는 가치를 깨달아 갈 때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어른이 되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깨닫게 된 것 중 하나가 중요하고 의미 있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희망, 사랑, 꿈, 시간, 진실 같은 게 그렇습니다. 이들은 한 번에 가치를 알아챌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들은 긴 시간 동안 느끼고, 매번 새롭게 깨달아가야 한다는 것, 그래야 우리가 ‘진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 탁소. 그래픽 디자이너

나이 들면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장 먼저 느끼는 것 같아요. 나부터도 길게 설명하는 건 듣기가 힘들어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새로운 것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노인이라고 안 할 수는 없으니까 따라가야 하잖아요. 그러니까 젊은이들이 한 시간 배울 거 우리는 열 시간 배워야지요. 나이에 빼놓지 말고 생각해봐야 될 게 남은 날들을 어떻게 살 건가 하는 문제예요.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어요? 다 늙어서 그때 이렇게 살 걸, 그런 회한을 줄이는 비결은 이웃에 눈을 돌리면 되는 거예요. 크게 생각할 것도 없어요. 해결 방법은 제시해주지 못해도 내가 자기 말에 귀 기울여줬다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더라고요. 또한, 주변 사람들과 좋게 지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해요. 내가 다른 사람들한테 상처를 많이 받고 살았지만 저 또한 남들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줬겠어요?

어떤 사람이 출근길에 가죽 가방 가장자리에 쇠고리를 댄 걸 들고 뛰는데 나를 치고 가서 멍이 시퍼렇게 들고 너무 아팠거든요. 그런데 그 사람은 내가 그런 상처를 입었다는 걸 모르잖아요. 내 인생길에서도 나도 모르게 남한테 준 상처는 또 얼마나 많겠어요.

남은 날들은 이웃을 돌아보면서 따뜻한 할머니, 웃는 할머니, 좋은 할머니로 생을 마감하고 싶어요.

– 황안나(73). 도보여행가

갑상선암 극복한 김영애씨

김영애 37세. 보건교사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그리고 과거,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를 다 지우고 싶다.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너무 자만해서일까. 괜찮다고. 좋아질 거라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더 기도한다. 하지만 한순간 물밀듯이 차고 올라오는 슬픔과 분노들이 나를 참 많이 힘들게 한다. 내 마음인데도 왜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지. 사람이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닐 텐데,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2005년 초, 내가 쓴 일기의 내용이다. 당시 나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성대까지 잘라내는 큰 수술을 한 상태였다. 매일매일 우울하고 땅속 깊숙이 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걱정을 해주며 챙겨주는 모습조차 다 가식적으로 보였다. 내 자존심에, 힘든 내 마음을 들키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는 밝은 척했다. “뭐 어때, 더 큰 병도 있는데….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 내 자신을 속이는 동안 마음은 점점 시커멓게 변해갔다.

수술 후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학교생활을 했지만, 나는 결국 병가를 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바로 이게 지옥이구나, 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있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이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마음을 비울 수 있다더라”며 마음수련을 이야기해주었다. 마음을 비울 수 있다고? 이곳에 가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나는 언니와 남동생,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참 평범하게 살았다. 운도 잘 따라줘서, 1998년 IMF라 모두 취업하기 어려울 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보건교사 발령을 받았다. 항상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졌고, 그러면서 나름으로는 잘났다는 마음이 많았다. 그런데 서른 살이 될 무렵 몸이 점점 피곤해지고 목이 붓더니, 갑상선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 후, 점차 목소리가 돌아오고 회복될 거라 했지만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고 낮은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갑상선 기능 저하가 오면서 몸은 계속 피곤하고 부어 있었고, 70kg이 넘게 살이 쪘다. 이대로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계속 살이 찐다면, 불안하고 또 불안하고,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행복을 도둑당한 기분이었다.

수련을 하며 나는 처음으로 내 모습과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빙산 덩어리 같은 열등감이 내 내면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그 열등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행복하게 보여야 했고, 성격 좋은 척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길 바랐다.

열등감의 원인이 된 사진들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열등감을 느끼게 한 건 언니였다. 언니는 예쁘고 똑똑한 데다, 집안의 첫아이라 되게 많이 사랑을 받았다. 둘째로는 아들을 원했는데, 그게 나였다고 한다. 나를 낳고 바로 아빠가 술 마시러 갔다는 이야기를 할머니께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작은 교실에 앉아, 공부를 진짜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장면도 뚜렷이 떠올랐다. 그래야 부모님께 사랑받을 수 있고, 주변에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이 그랬다.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해하고, 내 자신, 내 부모, 내 학벌. 모든 것에 열등감을 갖고 살았으면서도, 항상 나를 포장하며 살고 있었다.

카멜레온처럼 언제나 달라졌던 내 모습, 싫어도 좋은 척, 안 부러운 척, 긍정적인 척… 척….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양파 껍질 같은 탈을 쓰고 모든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내 자신에게조차 솔직한 적이 없었고, 그저 어떡하면 나를 드러낼까만을 생각했던 삶, 이렇게 온갖 욕심과 집착의 마음을 쌓아놓고 살았는데,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참 많이 울었다. 내 몸에 잘못했고, 가족에게 잘못했고, 내 주변 모든 사람들한테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열등감, 자존심, 자만심, 체면, 두려움… 세포 구석구석에 나를 지배하는 묵은 때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 마음을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이 보이지 않는 감옥이었고, 이 마음들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이 마음들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목 안 깊숙이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항상 가슴을 누르고 있던 돌덩어리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온몸을 막고 있던 기혈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낮은 ‘솔’ 음 이상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아아… 소리도 질러보고, 이게 내 목소리인가 몇 번을 확인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들리지 않던 목소리였는데. 이제 드디어 목소리를 찾았구나~!

살도 점차 빠지고, 몸도 정상으로 회복이 되어갔다. 몸도 쓰면 쓸수록 소모되는 소모품이라 생각하니까, 병은 신체의 일부고 몸이 아픈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몸에 대한 집착도 많이 놓여졌다. 고장 나면 고쳐 쓰면 되는 것이다. 의사는 앞으로 노래 부르기는 힘들 거라고 했지만, 난 지금 동호회의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있다. 체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예전에는 밤 10시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면, 지금은 새벽 한두 시에 자도 7시면 거뜬히 일어난다.

2006년, 나는 다시 학교로 복직했다. 주변에 갑상선 질환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갑상선은 특히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수술을 해서 제거하면 겉으로 보이는 건 없어지지만 ‘있다’라는 마음에 묶여 있는 이상은 그 병에 끌려다니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을 버려야지만 그 병에서 진짜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모두 공감을 한다.

마음수련으로 건강도 찾았지만, 정말로 감사한 것은 진짜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너무 힘들 땐, 사람은 왜 태어나 이렇게 고통 짐을 받고 살아야 하나, 원망했었다. 그런데 고통과 짐은 내가 만든 내 중심적인 마음들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만 버리면, 나만 버리면, 영원불변 살아 있는 진짜 존재가 드러나고, 그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꼬마였을 때부터 “너 꿈이 뭐야” 물으면 항상 “잘 살고 싶어요” 대답했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요!” 당돌하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마음수련을 하면서 나는 그 꿈을 이루었다. 어찌 보면 갑상선암이라는 그 병이 나를 진짜 삶으로 안내한 것이다.

표고버섯덧밥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저희 집에 오실 때면 어머니께서 꼭 만들어 드렸던 요리가 바로 표고버섯덮밥입니다. 버섯 향과 소고기가 어우러진 담백한 맛으로, 마치 일본식 ‘돈부리’ 같은 음식이지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셔서인지 특히 즐겨 드셨고 덩달아 제 입맛에도 딱 맞아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만드는 법도 간단해서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한 끼 식사로 금세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어머니는 늘 강조하신답니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가 살살 익도록 볶고, 그다음에 당근을 버섯 길이로 얇게 총총 썰어서 달달 볶아.
거기다 물을 넉넉하게 넣어서 끓이고 양파랑 버섯도 두툼하게 썰어 넣고 팔팔팔~ 끓이면 국물이 뽀얗게 올라오면서 맛이 날 거야.
간은 양조간장이랑 소금 후추로 하고 거품 같은 건 걷어내고. 다 익었다 싶으면 다진 파랑 계란을 섞어서 국물 위에다가
살살 부어서 덮은 다음 불을 끄고 먹으면 되지.”

버섯은 소고기와 궁합이 잘 맞아 잡채나 불고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버섯의 성질 때문인데요, 음지에서 자라는 포자식물인 버섯은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따뜻한 육류인 소고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요. 또한 몸 구석구석 노폐물을 배출해 피를 맑게 합니다. 표고버섯덮밥처럼 파, 당근, 계란, 양파 등의 다양한 재료와 함께 요리하면 청적황백흑 오색의 영양이 위장, 폐, 심장 등 오장에 고루 에너지를 전달해줍니다. 한 그릇의 간단한 음식이지만 영양과 균형, 남녀노소 입맛까지 만족시켜주는 오감 만족 요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른 표고버섯을 우려낸 물을 그대로 사용하면 맛과 향이 더욱 좋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프리커터(Free Cutter)

만든 사람 진준호 28세. 계명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이름은?
Free Cutter(프리커터). 가위나 칼을 통틀어 커터라고 부르는데, 자유롭게 자를 수 있다는 의미로 프리커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평소에도 생활 속에서 소비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어느 날 초등학생인 사촌동생의 숙제를 도와주게 되었다. 자신의 명함을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는데, 칼과 가위가 항상 같이 쓰이게 되는 걸 보고 ‘칼은 직선, 가위는 곡선적인 걸 잘 다룬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융합형 디자인을 생각하여 이른바 ‘칼 가위’를 만들게 되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단순하면서도 실생활에 필요한 아이디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적으로 어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칼과 가위를 함께 제작하는 거라 많은 비용을 예상했고 색은 다양하되, 가장 심플한 기하학적 도형 형태로 구성하게 되었다. 칼질을 하기 위해서 검지손가락이 자유롭게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한쪽 손잡이를 개방형으로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 ‘손가락의 자유’라는 키워드를 생각했고 이것이 프리커터라는 이름이 지어진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주변의 반응은?
2010 Pin Up 공모전에서 수상했는데, 내 인생에서 첫 국제공모전 수상권에 진입했던 작품이라 더 특별하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제작 의뢰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현재 2011 예비기술창업자로 선정되었기에 차후 기회가 된다면 직접 개발을 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
‘칼 가위’처럼 일상생활에서 고칠 수 있고, 또 고쳐야 할 부분은 정말 많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과연 타당한지, 기존의 방식보다 나은지 등을 스스로 찾아 나가면서 타당하고 근거 있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제품을 생산하다가도 제작 금액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단가, 개수 등을 고민하다 보면 결국 디자인이 돈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유능한 디자이너라면 이러한 부분을 잘 간파해서 가장 합리적인 금액, 쓰임새, 판매가 조화를 잘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블랙’

문진정

 “내 이야기 속의 세상은 좀 다릅니다. 소리는 침묵으로 변하고, 빛은 어둠으로 변하는 세상. 이게 나의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세상. 그 세상에 어울리는 유일한 이름은 ‘블랙’입니다.”- 미셸

 

2005년 인도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 언론의 극찬을 받았으며, 2009년 뒤늦게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블랙>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암흑천지 ‘black’ 속에서 살아가는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다. 허리에 종을 매단 채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 8살 미셸 앞에 나타난 사하이 선생. 그는 손가락과 입 모양, 소리의 진동으로 말과 글자를 가르치고, 미셸이 배운 첫 단어는 워터(Water)다. 지식을 배우고 꿈을 갖게 해줌으로써 미셸도 한 사람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준 사하이 선생이 미셸에게 가르치지 않은 유일한 단어는 바로 ‘불가능’. 사하이 선생은 미셸을 처음으로 인간으로 대우해준 빛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사하이 선생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일체의 기억을 잃게 되자, 이번에는 미셸이 그에게 선생님이자 빛이 되어준다.

어둠의 색이라 단정 지었던 ‘블랙’은 눈이 아닌 마음의 색일 뿐이라는 것을, 두 사람의 소통을 통해 깨닫게 해주는 영화. 곳곳에 숨겨진 감동적인 대사는 수많은 이야기를 압도하고 가슴에 남는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 ‘불가능은 없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어떠한 명문장보다 아름다운 대사들로 만나보는 산제이 릴라 반살리 감독의 영화 ‘블랙’이다.

“빛이 없으면 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셸을 가르치는 동안 배웠어요. 어둠 속에선 눈도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음은 번개처럼 와요. 초에 불을 켜듯이 일단 불이 붙으면 온 집 안을 빛으로 채우게 되죠. 믿으세요. 그런 기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사하이

“미셸! 이 어둠을 뚫고 지나갈 거야. 네가 살아온 이 어둠을. 그 어둠 속에 남아 있지 마. 빛 속으로 들어와. 빛, 빛 말이야! 알파벳은 원래 a, b, c, d, e 로 시작되지만 너에겐 B.L.A.C.K.로 시작되지. 블랙. 블랙. 네 세상은 달라. 그리고 넌 다르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 넌 내 마지막 희망이야. 미셸.”- 사하이

“난 떠난다, 미셸. 어둠이 필사적으로 널 집어삼키려 할 거야. 하지만 넌 항상 빛을 향해 걸어가야 돼. 희망으로 가득한 네 발걸음이 날 살아 있게 할 거야.”- 사하이

“어릴 적에 전 항상 뭔가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를 모르는 사람의 팔에 넘기셨습니다. 그는 세상 누구와도 달랐습니다. 그분은 마술사였습니다. 수년 동안 그분은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우린 모두 장님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그분을 보거나 듣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전 하나님을 만져봤습니다. 난 그분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나는 그분을 ‘티(티쳐)’라고 부릅니다. 제겐 모든 게 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검은색의 새로운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검은색은 어둠과 갑갑함뿐이 아닙니다. 그건 성취의 색입니다. 지식의 색입니다.” – 미셸

“오늘 사하이 선생님께서 우리의 첫 단어를 기억해내셨습니다. ‘워터’.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보여주셨어요.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이 수많은 행복을 준다는 걸 알려주셨어요. 이젠 제가 선생님의 어둠과 싸우겠습니다. 제게 알려주신 모든 것을 선생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미셸

아름다운 구담마을에서

폴짝폴짝 개구쟁이 3형제가 바삐 바삐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맑고 깨끗한 강물 아래로 자기들 모습 비치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요. 섬진강 오백 리 상류가 끝나는 즈음에 자리한 아름다운 구담마을, 이곳에 할머니 댁이 있어 놀러왔답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찬 바람도 아랑곳 않고 저리도 급히 가는지 아이들 뒤를 쫓아가 보았습니다.

사진, 글 김선규

맨손으로 얼음 잡기, 배꼽이 빠져라 웃기

바쁠 만했습니다. 개울물에 작은 돌멩이 날려 물수제비도 떠야 하고, 피라미도 잡아야 하고, 얼음장 들고 박치기도 해야 하는데, 겨울 해는 짧기만 하니까요. “감기 든다, 어여 들어와~!” 할머니의 손자 걱정 메아리치건만,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꼽 빠지는 겨울 아이들. 그 웃음소리, 섬진강 물결 따라 굽이굽이 퍼져갑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구담마을. 2007년 1월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안녕하세요, 저는 ‘하프물범’이에요

1990년, 하프물범을 찍기 위해 처음으로 캐나다 남동부에 위치한 세인트로렌스만(灣)을 방문했다.
당시 나는 보도 사진가로서 겪는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마침 지인이 보내 준 아기 물범 사진이 담긴 엽서 한 장이 나를 동물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영하 20도의 추위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촬영에 몰입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기 물범 사진을 발표하던 날, 한 여성이 잡지에 실린 물범 사진을 정성스레 오려 수첩에 보관하는 걸 보게 되었다. 순간 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동물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아기 물범이 태어나는 매년 2월이면 세인트로렌스만의 유빙(流氷, 떠다니는 얼음)을 찾았고 올해로 벌써 23년이 흘렀다.

사진, 글 오하라 레이(Ohara Rei) 번역 오쿠토미 코우지

태어난 지 하루 된 아기 물범. 갓 태어난 새끼를 옐로우 코트라고 하는데, 어미의 양수로 인해 털이 노랗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 생물인 하프물범은 얼음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엄마와 아기 물범은 냄새로 서로를 확인한다.

생후 10일 이내의 새끼는 털색이 하얗기 때문에 화이트 코트라 부른다.

태어난 지 2주일이 지나면서 하얀 솜털이 빠지며 짧고 검은 털이 나기 시작하는데 이를 그레이 코트라 부른다.

헤엄치기 시작한 아기 물범. 온몸에 부력이 있고 지방이 많아서 둥둥 뜬다.

태어난 지 약 10일 정도 되면 어미는 아기에게 헤엄을 가르친다.

10년 전만 해도 유빙 위로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얼음이 점점 얇아지면서 유빙에 오르는 것조차 어렵고 촬영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유빙의 감소는 새끼 하프물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얼음 위에서 태어난 아기 물범은 어미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약 4주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그러나 어미 물범과 아기 물범이 함께하는 시간은 불과 2주. 그동안 어미는 식음을 전폐하고 옆에 꼭 붙어서 아기만 보살피며,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는 등 아기가 혼자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미는 무리를 따라 북쪽의 바다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2주 동안 아기 물범은 유빙에서 지내게 되는데, 유빙 밑에는 유빙이 끌고 온 플랑크톤 덕분에 물고기가 많기 때문에 먹이 잡기가 쉬워서이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유빙이 줄어들거나 빨리 녹으면서 해에 따라 수십만 마리의 아기 물범이 죽고 있다. 과학자들은 향후 30~40년이 지나면 지구상에 유빙이 생기지 않을 거라 예상한다.

아기가 태어난 지 2주가 지나면 어미는 아기를 두고 수컷 무리에 합류해 북쪽 바다로 되돌아간다.

20년 넘게 물범들과 유빙을 찍으면서,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첫 걸음은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좋아하는 건 소중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좋아하게 되면 결국 자연을 지키는 것과 연결된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게 내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기 물범이 너무나 좋아서 시작했던 일, 그러나 결국 물범과 유빙의 사진을 통해 환경 문제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나는 다시 보도 사진가로서의 길로 회귀하고 있다.

생후 4주 된 아기 물범.
어미는 떠났다. 이제 아기 물범은 홀로 살아내야 한다.

오하라 레이 1961년 도쿄 태생. 이바라키 대학을 졸업하고 천안문 사건, 걸프 전쟁 등을 취재하는 보도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슬픔과 괴로움을 전하는 사진가 역할에 한계를 느끼던 중, 1990년 새끼 하프물범과의 만남을 계기로 동물 사진가가 되었다. 이후 백곰, 매너티, 반디 등을 촬영하고 있으며 특히 20년에 걸친 새끼 하프물범과 유빙의 촬영을 통해 지구 온난화 문제 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애기 하프물범> <매너티 꿈의 인어> <반디 Light of a Firefly> <유빙의 이야기> 등이 있다. www.reiohara.com

책상 줄을 맞추며

얘들아.

맑은 겨울 수요일 아침이다. 교실에는 토수가 제일 먼저 와서 혼자 책을 읽고 있다. 신입 사원처럼 단정한 토수와 인사를 나누고, 휴게실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타서 다시 교실로 돌아오니 우진이와 주환이가 아침 인사를 한다. 둘은 입을 맞춘 듯 내게 “선생님 오늘 뭐 해요?” 하고 물었다. 오늘은 졸업 예행 연습하는 날이라고 대답하니, 둘은 멀뚱한 표정으로 “졸업식 연습을 왜 해요?”라며 반문한다. 내일의 주인공이 자신들임을 아직 모르는 초딩들.

올 한 해 너희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새삼스럽다.

생전 처음 남자 담임 선생님을 만나 잔뜩 긴장하던 가휘의 커다란 눈망울부터, 이제 청소년 티가 완연한 정주의 잔잔한 미소까지 우리는 그동안 참 많은 희로애락을 나누어 가졌다. 영빈이의 소젖 짜기 발언과 종민이의 찢어진 바지 사건, 그리고 교실을 왁자지껄하게 만든 잔디파 놀이.

끼리끼리 어쩜 그렇게 잘 노는지, 마치 덤불 속과 하늘을 거침없이 휩쓸고 다니는 참새 떼 같았다.

무엇보다 내 입장을 잘 이해하고 말을 잘 들어준 착한 아이들아. 고맙다. 너희들이 아니면 나는 아마 폭삭 늙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희들이 예쁜 짓 고운 짓을 할 때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내가 선생님으로 느낀 즐거움은 다 너희들이 준 선물이다. 이제 학교를 떠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가 내게 준 그 고귀한 선물을 고루 나누어주기 바란다.

까불고 말썽 피우던 아이들아. 너희들도 수고 많았다. 네 녀석들과 아옹다옹 싸우다 보니 어느새 새록새록 정이 들었다. 생각하면 그 성장기에 맞춰 그 수준만큼 만끽한 미운 짓이었는데, 내가 왜 그렇게 뾰쪽하게 반응하고 닦달했는지 모르겠다. 성격 좋고 뒤끝 없는 너희들이 이해해다오. 난 네 녀석들 덕에 미운 정도 고운 정만큼 깊고 따뜻한 감정임을 깨달았단다.

이제 너희들이 떠나고 나면 빈 교실에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서랍에 남겨진 색종이 한 장마저도 소중한 기억으로 옮겨 갈 것이고, 때로 너희들이 그립겠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건 얼굴이 아니라 그 눈짓이나 몸짓 또는 미소나 손길 같은 것이란다. 부디 해맑은 눈빛과 풋풋한 미소 그리고 다정한 말투를 오래오래 간직하기 바란다.

얘들아.

오늘은 너희들이 없는 금요일이다.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화사한데, 졸업식이 끝나고 선생님은 빈 교실에 혼자 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주인 없는 빈 책상과 걸상의 줄을 맞추고 있다. 이젠 진짜 이별이구나. 안녕! 작은 친구들!

최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