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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암 극복한 김영애씨

김영애 37세. 보건교사

‘마음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그리고 과거, 나를 아는 사람들 모두를 다 지우고 싶다. 왜 나한테 이런 시련이 닥쳤을까. 너무 자만해서일까. 괜찮다고. 좋아질 거라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더 기도한다. 하지만 한순간 물밀듯이 차고 올라오는 슬픔과 분노들이 나를 참 많이 힘들게 한다. 내 마음인데도 왜 내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지. 사람이 이렇게 살려고 태어난 건 아닐 텐데,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까.’

2005년 초, 내가 쓴 일기의 내용이다. 당시 나는 갑상선암 판정을 받고, 성대까지 잘라내는 큰 수술을 한 상태였다. 매일매일 우울하고 땅속 깊숙이 꺼져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주변에서 걱정을 해주며 챙겨주는 모습조차 다 가식적으로 보였다. 내 자존심에, 힘든 내 마음을 들키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는 밝은 척했다. “뭐 어때, 더 큰 병도 있는데…. 괜찮아 나는 아무렇지 않아….” 하지만 이렇게 내 자신을 속이는 동안 마음은 점점 시커멓게 변해갔다.

수술 후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학교생활을 했지만, 나는 결국 병가를 냈다.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바로 이게 지옥이구나, 내 마음이 지옥을 만들고 있구나, 뼈저리게 느꼈다. 정말 이 마음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언니가 “마음을 비울 수 있다더라”며 마음수련을 이야기해주었다. 마음을 비울 수 있다고? 이곳에 가면 모든 걸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바로 수련을 시작했다.

나는 언니와 남동생, 농사짓는 부모님 밑에서 참 평범하게 살았다. 운도 잘 따라줘서, 1998년 IMF라 모두 취업하기 어려울 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보건교사 발령을 받았다. 항상 모든 일이 뜻대로 이루어졌고, 그러면서 나름으로는 잘났다는 마음이 많았다. 그런데 서른 살이 될 무렵 몸이 점점 피곤해지고 목이 붓더니, 갑상선암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수술 후, 점차 목소리가 돌아오고 회복될 거라 했지만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작고 낮은 허스키한 목소리, 그리고 갑상선 기능 저하가 오면서 몸은 계속 피곤하고 부어 있었고, 70kg이 넘게 살이 쪘다. 이대로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대로 계속 살이 찐다면, 불안하고 또 불안하고, 모든 것이 억울하고 분해서 미칠 것 같았다. 그냥 가만히 있다가 행복을 도둑당한 기분이었다.

수련을 하며 나는 처음으로 내 모습과 솔직하게 대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았다. 빙산 덩어리 같은 열등감이 내 내면을 붙잡고 있었다는 것을. 그 열등감을 들키지 않기 위해 행복하게 보여야 했고, 성격 좋은 척했고, 다른 사람이 나를 부러워하길 바랐다.

열등감의 원인이 된 사진들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열등감을 느끼게 한 건 언니였다. 언니는 예쁘고 똑똑한 데다, 집안의 첫아이라 되게 많이 사랑을 받았다. 둘째로는 아들을 원했는데, 그게 나였다고 한다. 나를 낳고 바로 아빠가 술 마시러 갔다는 이야기를 할머니께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작은 교실에 앉아, 공부를 진짜 열심히 잘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장면도 뚜렷이 떠올랐다. 그래야 부모님께 사랑받을 수 있고, 주변에 인정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매 순간이 그랬다. 사실은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불안해하고, 내 자신, 내 부모, 내 학벌. 모든 것에 열등감을 갖고 살았으면서도, 항상 나를 포장하며 살고 있었다.

카멜레온처럼 언제나 달라졌던 내 모습, 싫어도 좋은 척, 안 부러운 척, 긍정적인 척… 척….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양파 껍질 같은 탈을 쓰고 모든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내 자신에게조차 솔직한 적이 없었고, 그저 어떡하면 나를 드러낼까만을 생각했던 삶, 이렇게 온갖 욕심과 집착의 마음을 쌓아놓고 살았는데,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한 것이었다.

참 많이 울었다. 내 몸에 잘못했고, 가족에게 잘못했고, 내 주변 모든 사람들한테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스러웠다. 열등감, 자존심, 자만심, 체면, 두려움… 세포 구석구석에 나를 지배하는 묵은 때가 끼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 마음을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마음이 보이지 않는 감옥이었고, 이 마음들을 버리지 않는 한 나는 이 마음들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버리고 또 버리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목 안 깊숙이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항상 가슴을 누르고 있던 돌덩어리 같은 것이 꿈틀거리며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온몸을 막고 있던 기혈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 낮은 ‘솔’ 음 이상 나오지 않던 목소리가 크게 나왔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아아아… 소리도 질러보고, 이게 내 목소리인가 몇 번을 확인했다. 아무리 용을 써도 들리지 않던 목소리였는데. 이제 드디어 목소리를 찾았구나~!

살도 점차 빠지고, 몸도 정상으로 회복이 되어갔다. 몸도 쓰면 쓸수록 소모되는 소모품이라 생각하니까, 병은 신체의 일부고 몸이 아픈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면서 몸에 대한 집착도 많이 놓여졌다. 고장 나면 고쳐 쓰면 되는 것이다. 의사는 앞으로 노래 부르기는 힘들 거라고 했지만, 난 지금 동호회의 합창단에서 노래하고 있다. 체력도 눈에 띄게 좋아졌다. 예전에는 밤 10시를 넘기지 못하고 쓰러졌다면, 지금은 새벽 한두 시에 자도 7시면 거뜬히 일어난다.

2006년, 나는 다시 학교로 복직했다. 주변에 갑상선 질환에 걸린 사람들이 많다. 갑상선은 특히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수술을 해서 제거하면 겉으로 보이는 건 없어지지만 ‘있다’라는 마음에 묶여 있는 이상은 그 병에 끌려다니면서 살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을 버려야지만 그 병에서 진짜 벗어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 모두 공감을 한다.

마음수련으로 건강도 찾았지만, 정말로 감사한 것은 진짜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너무 힘들 땐, 사람은 왜 태어나 이렇게 고통 짐을 받고 살아야 하나, 원망했었다. 그런데 고통과 짐은 내가 만든 내 중심적인 마음들로 인해 생긴 것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만 버리면, 나만 버리면, 영원불변 살아 있는 진짜 존재가 드러나고, 그 모습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꼬마였을 때부터 “너 꿈이 뭐야” 물으면 항상 “잘 살고 싶어요” 대답했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요!” 당돌하게 말했던 기억이 있다. 이제 마음수련을 하면서 나는 그 꿈을 이루었다. 어찌 보면 갑상선암이라는 그 병이 나를 진짜 삶으로 안내한 것이다.

표고버섯덧밥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저희 집에 오실 때면 어머니께서 꼭 만들어 드렸던 요리가 바로 표고버섯덮밥입니다. 버섯 향과 소고기가 어우러진 담백한 맛으로, 마치 일본식 ‘돈부리’ 같은 음식이지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셔서인지 특히 즐겨 드셨고 덩달아 제 입맛에도 딱 맞아서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만드는 법도 간단해서 아무리 바쁜 와중에도 한 끼 식사로 금세 만들어 먹을 수 있다고 어머니는 늘 강조하신답니다.

“냄비에 참기름을 두르고 소고기가 살살 익도록 볶고, 그다음에 당근을 버섯 길이로 얇게 총총 썰어서 달달 볶아.
거기다 물을 넉넉하게 넣어서 끓이고 양파랑 버섯도 두툼하게 썰어 넣고 팔팔팔~ 끓이면 국물이 뽀얗게 올라오면서 맛이 날 거야.
간은 양조간장이랑 소금 후추로 하고 거품 같은 건 걷어내고. 다 익었다 싶으면 다진 파랑 계란을 섞어서 국물 위에다가
살살 부어서 덮은 다음 불을 끄고 먹으면 되지.”

버섯은 소고기와 궁합이 잘 맞아 잡채나 불고기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버섯의 성질 때문인데요, 음지에서 자라는 포자식물인 버섯은 차가운 성질을 가지고 있어, 따뜻한 육류인 소고기와 아주 잘 어울리는 조합이지요. 또한 몸 구석구석 노폐물을 배출해 피를 맑게 합니다. 표고버섯덮밥처럼 파, 당근, 계란, 양파 등의 다양한 재료와 함께 요리하면 청적황백흑 오색의 영양이 위장, 폐, 심장 등 오장에 고루 에너지를 전달해줍니다. 한 그릇의 간단한 음식이지만 영양과 균형, 남녀노소 입맛까지 만족시켜주는 오감 만족 요리라 할 수 있습니다.

마른 표고버섯을 우려낸 물을 그대로 사용하면 맛과 향이 더욱 좋습니다.

한의사 서정복님은 현재 서울 강동구에 있는 동평한의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한의학만큼이나 요리하는 것도 좋아하는 마음씨 따듯한 청년입니다.

프리커터(Free Cutter)

만든 사람 진준호 28세. 계명대학교 산업디자인과

이름은?
Free Cutter(프리커터). 가위나 칼을 통틀어 커터라고 부르는데, 자유롭게 자를 수 있다는 의미로 프리커터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평소에도 생활 속에서 소비자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디자인을 많이 생각하는 편인데, 어느 날 초등학생인 사촌동생의 숙제를 도와주게 되었다. 자신의 명함을 만들어 오라는 것이었는데, 칼과 가위가 항상 같이 쓰이게 되는 걸 보고 ‘칼은 직선, 가위는 곡선적인 걸 잘 다룬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융합형 디자인을 생각하여 이른바 ‘칼 가위’를 만들게 되었다.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단순하면서도 실생활에 필요한 아이디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적으로 어필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칼과 가위를 함께 제작하는 거라 많은 비용을 예상했고 색은 다양하되, 가장 심플한 기하학적 도형 형태로 구성하게 되었다. 칼질을 하기 위해서 검지손가락이 자유롭게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한쪽 손잡이를 개방형으로 만들었다. 이 부분에서 ‘손가락의 자유’라는 키워드를 생각했고 이것이 프리커터라는 이름이 지어진 두 번째 이유이기도 하다.

주변의 반응은?
2010 Pin Up 공모전에서 수상했는데, 내 인생에서 첫 국제공모전 수상권에 진입했던 작품이라 더 특별하고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제작 의뢰는 아직 들어오지 않았지만, 현재 2011 예비기술창업자로 선정되었기에 차후 기회가 된다면 직접 개발을 하고 싶다.

하고 싶은 말
‘칼 가위’처럼 일상생활에서 고칠 수 있고, 또 고쳐야 할 부분은 정말 많다. 하지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방법이 과연 타당한지, 기존의 방식보다 나은지 등을 스스로 찾아 나가면서 타당하고 근거 있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제 제품을 생산하다가도 제작 금액 때문에 한계에 부딪치는 경우가 있다. 단가, 개수 등을 고민하다 보면 결국 디자인이 돈을 따라가는 경우가 많은데, 유능한 디자이너라면 이러한 부분을 잘 간파해서 가장 합리적인 금액, 쓰임새, 판매가 조화를 잘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화 ‘블랙’

문진정

 “내 이야기 속의 세상은 좀 다릅니다. 소리는 침묵으로 변하고, 빛은 어둠으로 변하는 세상. 이게 나의 세상입니다.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는 세상. 그 세상에 어울리는 유일한 이름은 ‘블랙’입니다.”- 미셸

 

2005년 인도에서 만들어져 전 세계 언론의 극찬을 받았으며, 2009년 뒤늦게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 <블랙>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그야말로 암흑천지 ‘black’ 속에서 살아가는 한 소녀의 성장 이야기다. 허리에 종을 매단 채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고 있는 8살 미셸 앞에 나타난 사하이 선생. 그는 손가락과 입 모양, 소리의 진동으로 말과 글자를 가르치고, 미셸이 배운 첫 단어는 워터(Water)다. 지식을 배우고 꿈을 갖게 해줌으로써 미셸도 한 사람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준 사하이 선생이 미셸에게 가르치지 않은 유일한 단어는 바로 ‘불가능’. 사하이 선생은 미셸을 처음으로 인간으로 대우해준 빛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세월은 흐르고 사하이 선생이 알츠하이머병에 걸려 일체의 기억을 잃게 되자, 이번에는 미셸이 그에게 선생님이자 빛이 되어준다.

어둠의 색이라 단정 지었던 ‘블랙’은 눈이 아닌 마음의 색일 뿐이라는 것을, 두 사람의 소통을 통해 깨닫게 해주는 영화. 곳곳에 숨겨진 감동적인 대사는 수많은 이야기를 압도하고 가슴에 남는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도 ‘불가능은 없다’고 말해주는 듯하다. 어떠한 명문장보다 아름다운 대사들로 만나보는 산제이 릴라 반살리 감독의 영화 ‘블랙’이다.

“빛이 없으면 눈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미셸을 가르치는 동안 배웠어요. 어둠 속에선 눈도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음은 번개처럼 와요. 초에 불을 켜듯이 일단 불이 붙으면 온 집 안을 빛으로 채우게 되죠. 믿으세요. 그런 기적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사하이

“미셸! 이 어둠을 뚫고 지나갈 거야. 네가 살아온 이 어둠을. 그 어둠 속에 남아 있지 마. 빛 속으로 들어와. 빛, 빛 말이야! 알파벳은 원래 a, b, c, d, e 로 시작되지만 너에겐 B.L.A.C.K.로 시작되지. 블랙. 블랙. 네 세상은 달라. 그리고 넌 다르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 넌 내 마지막 희망이야. 미셸.”- 사하이

“난 떠난다, 미셸. 어둠이 필사적으로 널 집어삼키려 할 거야. 하지만 넌 항상 빛을 향해 걸어가야 돼. 희망으로 가득한 네 발걸음이 날 살아 있게 할 거야.”- 사하이

“어릴 적에 전 항상 뭔가를 찾았습니다. 하지만 결국 어둠뿐이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저를 모르는 사람의 팔에 넘기셨습니다. 그는 세상 누구와도 달랐습니다. 그분은 마술사였습니다. 수년 동안 그분은 나를 어둠에서 빛으로 이끄셨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면 우린 모두 장님입니다. 여러분 중 누구도 그분을 보거나 듣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전 하나님을 만져봤습니다. 난 그분의 존재를 느꼈습니다. 나는 그분을 ‘티(티쳐)’라고 부릅니다. 제겐 모든 게 검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선 검은색의 새로운 의미를 알려주셨습니다. 검은색은 어둠과 갑갑함뿐이 아닙니다. 그건 성취의 색입니다. 지식의 색입니다.” – 미셸

“오늘 사하이 선생님께서 우리의 첫 단어를 기억해내셨습니다. ‘워터’. 선생님은 다시 한 번 보여주셨어요. 세상에 불가능이란 없다는 것을. 누군가를 위해 산다는 것이 수많은 행복을 준다는 걸 알려주셨어요. 이젠 제가 선생님의 어둠과 싸우겠습니다. 제게 알려주신 모든 것을 선생님께 알려드리겠습니다.”- 미셸

아름다운 구담마을에서

폴짝폴짝 개구쟁이 3형제가 바삐 바삐 징검다리를 건넙니다. 맑고 깨끗한 강물 아래로 자기들 모습 비치는 줄도 모르고 말이지요. 섬진강 오백 리 상류가 끝나는 즈음에 자리한 아름다운 구담마을, 이곳에 할머니 댁이 있어 놀러왔답니다. 무슨 일이 있기에 찬 바람도 아랑곳 않고 저리도 급히 가는지 아이들 뒤를 쫓아가 보았습니다.

사진, 글 김선규

맨손으로 얼음 잡기, 배꼽이 빠져라 웃기

바쁠 만했습니다. 개울물에 작은 돌멩이 날려 물수제비도 떠야 하고, 피라미도 잡아야 하고, 얼음장 들고 박치기도 해야 하는데, 겨울 해는 짧기만 하니까요. “감기 든다, 어여 들어와~!” 할머니의 손자 걱정 메아리치건만, 뭐가 그리 우스운지 배꼽 빠지는 겨울 아이들. 그 웃음소리, 섬진강 물결 따라 굽이굽이 퍼져갑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구담마을. 2007년 1월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안녕하세요, 저는 ‘하프물범’이에요

1990년, 하프물범을 찍기 위해 처음으로 캐나다 남동부에 위치한 세인트로렌스만(灣)을 방문했다.
당시 나는 보도 사진가로서 겪는 슬픔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었고, 마침 지인이 보내 준 아기 물범 사진이 담긴 엽서 한 장이 나를 동물 사진가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영하 20도의 추위마저 잊어버릴 정도로 촬영에 몰입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기 물범 사진을 발표하던 날, 한 여성이 잡지에 실린 물범 사진을 정성스레 오려 수첩에 보관하는 걸 보게 되었다. 순간 나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는 동물 사진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 이후 아기 물범이 태어나는 매년 2월이면 세인트로렌스만의 유빙(流氷, 떠다니는 얼음)을 찾았고 올해로 벌써 23년이 흘렀다.

사진, 글 오하라 레이(Ohara Rei) 번역 오쿠토미 코우지

태어난 지 하루 된 아기 물범. 갓 태어난 새끼를 옐로우 코트라고 하는데, 어미의 양수로 인해 털이 노랗게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바다 생물인 하프물범은 얼음 위에서는 잘 보이지 않아 엄마와 아기 물범은 냄새로 서로를 확인한다.

생후 10일 이내의 새끼는 털색이 하얗기 때문에 화이트 코트라 부른다.

태어난 지 2주일이 지나면서 하얀 솜털이 빠지며 짧고 검은 털이 나기 시작하는데 이를 그레이 코트라 부른다.

헤엄치기 시작한 아기 물범. 온몸에 부력이 있고 지방이 많아서 둥둥 뜬다.

태어난 지 약 10일 정도 되면 어미는 아기에게 헤엄을 가르친다.

10년 전만 해도 유빙 위로 헬리콥터가 착륙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10년간 얼음이 점점 얇아지면서 유빙에 오르는 것조차 어렵고 촬영도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유빙의 감소는 새끼 하프물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얼음 위에서 태어난 아기 물범은 어미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약 4주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그러나 어미 물범과 아기 물범이 함께하는 시간은 불과 2주. 그동안 어미는 식음을 전폐하고 옆에 꼭 붙어서 아기만 보살피며, 헤엄치는 법을 가르치는 등 아기가 혼자 독립할 수 있도록 돕는다.

그 시간이 지나면 어미는 무리를 따라 북쪽의 바다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2주 동안 아기 물범은 유빙에서 지내게 되는데, 유빙 밑에는 유빙이 끌고 온 플랑크톤 덕분에 물고기가 많기 때문에 먹이 잡기가 쉬워서이다. 최근에는 지구 온난화의 영향으로 유빙이 줄어들거나 빨리 녹으면서 해에 따라 수십만 마리의 아기 물범이 죽고 있다. 과학자들은 향후 30~40년이 지나면 지구상에 유빙이 생기지 않을 거라 예상한다.

아기가 태어난 지 2주가 지나면 어미는 아기를 두고 수컷 무리에 합류해 북쪽 바다로 되돌아간다.

20년 넘게 물범들과 유빙을 찍으면서, 지구 온난화를 막을 수 있는 첫 걸음은 ‘좋아하는’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좋아하는 건 소중하게 대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좋아하게 되면 결국 자연을 지키는 것과 연결된다. 아이들에게 자연을 좋아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게 내 역할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기 물범이 너무나 좋아서 시작했던 일, 그러나 결국 물범과 유빙의 사진을 통해 환경 문제를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는 나는 다시 보도 사진가로서의 길로 회귀하고 있다.

생후 4주 된 아기 물범.
어미는 떠났다. 이제 아기 물범은 홀로 살아내야 한다.

오하라 레이 1961년 도쿄 태생. 이바라키 대학을 졸업하고 천안문 사건, 걸프 전쟁 등을 취재하는 보도 사진가로 활동하다가 슬픔과 괴로움을 전하는 사진가 역할에 한계를 느끼던 중, 1990년 새끼 하프물범과의 만남을 계기로 동물 사진가가 되었다. 이후 백곰, 매너티, 반디 등을 촬영하고 있으며 특히 20년에 걸친 새끼 하프물범과 유빙의 촬영을 통해 지구 온난화 문제 등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있다. 저서로는 <애기 하프물범> <매너티 꿈의 인어> <반디 Light of a Firefly> <유빙의 이야기> 등이 있다. www.reiohara.com

책상 줄을 맞추며

얘들아.

맑은 겨울 수요일 아침이다. 교실에는 토수가 제일 먼저 와서 혼자 책을 읽고 있다. 신입 사원처럼 단정한 토수와 인사를 나누고, 휴게실에 가서 커피 한 잔을 타서 다시 교실로 돌아오니 우진이와 주환이가 아침 인사를 한다. 둘은 입을 맞춘 듯 내게 “선생님 오늘 뭐 해요?” 하고 물었다. 오늘은 졸업 예행 연습하는 날이라고 대답하니, 둘은 멀뚱한 표정으로 “졸업식 연습을 왜 해요?”라며 반문한다. 내일의 주인공이 자신들임을 아직 모르는 초딩들.

올 한 해 너희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새삼스럽다.

생전 처음 남자 담임 선생님을 만나 잔뜩 긴장하던 가휘의 커다란 눈망울부터, 이제 청소년 티가 완연한 정주의 잔잔한 미소까지 우리는 그동안 참 많은 희로애락을 나누어 가졌다. 영빈이의 소젖 짜기 발언과 종민이의 찢어진 바지 사건, 그리고 교실을 왁자지껄하게 만든 잔디파 놀이.

끼리끼리 어쩜 그렇게 잘 노는지, 마치 덤불 속과 하늘을 거침없이 휩쓸고 다니는 참새 떼 같았다.

무엇보다 내 입장을 잘 이해하고 말을 잘 들어준 착한 아이들아. 고맙다. 너희들이 아니면 나는 아마 폭삭 늙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희들이 예쁜 짓 고운 짓을 할 때마다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른다. 내가 선생님으로 느낀 즐거움은 다 너희들이 준 선물이다. 이제 학교를 떠나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도, 너희가 내게 준 그 고귀한 선물을 고루 나누어주기 바란다.

까불고 말썽 피우던 아이들아. 너희들도 수고 많았다. 네 녀석들과 아옹다옹 싸우다 보니 어느새 새록새록 정이 들었다. 생각하면 그 성장기에 맞춰 그 수준만큼 만끽한 미운 짓이었는데, 내가 왜 그렇게 뾰쪽하게 반응하고 닦달했는지 모르겠다. 성격 좋고 뒤끝 없는 너희들이 이해해다오. 난 네 녀석들 덕에 미운 정도 고운 정만큼 깊고 따뜻한 감정임을 깨달았단다.

이제 너희들이 떠나고 나면 빈 교실에 있는 책상과 의자 그리고 서랍에 남겨진 색종이 한 장마저도 소중한 기억으로 옮겨 갈 것이고, 때로 너희들이 그립겠다. 하지만 보고 싶은 건 얼굴이 아니라 그 눈짓이나 몸짓 또는 미소나 손길 같은 것이란다. 부디 해맑은 눈빛과 풋풋한 미소 그리고 다정한 말투를 오래오래 간직하기 바란다.

얘들아.

오늘은 너희들이 없는 금요일이다. 창문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은 화사한데, 졸업식이 끝나고 선생님은 빈 교실에 혼자 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주인 없는 빈 책상과 걸상의 줄을 맞추고 있다. 이젠 진짜 이별이구나. 안녕! 작은 친구들!

최형식

 

개미마을 ‘무지개빛청개구리’ 아이들 이야기

오승관 24세.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끝자락, 고층 빌딩들 사이에 낮게 모여 있던 비닐하우스들. 사람들이 ‘개미마을’이라 불렀던 그곳이 나의 고향이자 나의 마음을 길러준 뿌리이다. 개미마을은 1980년대, 집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빈 비닐하우스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생긴 마을이었다. 판자를 대고 그 위에 비닐을 덧씌운 판잣집들이었는데, 내가 갓 돌이 지날 무렵 우리 집도 사정이 어려워지며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다.

사람들 눈에는 ‘가난’한 마을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마을이 좋았다. 주변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고, 작은 도랑과 큰 나무들 그리고 많은 들꽃들이 있는 곳, 마치 도심 한가운데의 시골 같았다.

인심도 정말 좋았다. 어른들은 마치 동네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보살피셨다. 지저분한 교복이나 놀다가 찢어진 교복을 보면 무료로 세탁해주고 수선해주던 세탁소 아줌마, 아이들의 머리는 언제나 반값에 잘라주던 미용실 누나…. 그리고 달팽이건설 아저씨들이 있었다. 지물포집, 철물점, 인테리어 하시는 아저씨들이 마음을 모아 조합을 만들어, 사정이 어려운 집의 벽지도 발라주고, 장판도 깔아주고, 고장 난 곳도 고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꿈나무학교’라는 곳도 있었다. 부모님이 거의 맞벌이를 하셔서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는 집이 많았기에,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항상 어른들께 받기만 하며, 또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란 나는, 나도 모르게 함께 나누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체득이 되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나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았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점점 위축이 되어갔다. 하굣길이면 친구들과 갈림길에 서는 나. 친구들은 높디높은 패밀리아파트로 향하고, 나는 개미마을로 들어선다. 점차 나를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도,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는 것도 부끄러워져갔다. 항상 전해지는 철거 소식, 불안해하는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 가난한 자와 부자로 나뉘는 사회의 시선들 속에서 겪게 되는 억울함과 분노, 열등감….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쌓여갔다.

그러다 내가 고1이 되었을 때 우리 마을에 ‘무지개빛청개구리’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정식 공부방이 생겨났다. 이곳에 전담 교사로 오신 이윤복 선생님이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밴드를 꾸리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낮아진 자존감을 끌어올려주고, 자신감도 심어주고, 서로 간에 끈끈한 정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곳을 줄여서 ‘무청’이라 불렀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셨다. 기타, 베이스기타, 키보드, 드럼…. 내가 배운 것은 드럼이었는데, 처음에는 악기가 없어서 폐타이어를 가지고 연습을 했다. 음악을 잘 몰랐지만, 그렇게 연습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무지개빛청개구리(줄임말: 무청)는 청개구리처럼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각자 자기만의 다양한 색깔을 가진 아이들이 무지갯빛처럼 아름다운 빛깔로 함께 어우러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은 이름이다. 현재 이곳에 등록한 학생이 45명. ‘청개구리밴드’는 그동안의 나눔 활동들을 인정받아, 2010년 대한민국휴먼대상 휴먼네트워크상을 수상했다. 무청 아이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 ‘즐거운가’ 입구에 도움을 주신 분들의 그림을 새겨 넣었다.

“왜 우린 여기서 태어난 거죠?” “불쌍하게 보지 마.” “우릴 그냥 내 버려둬요.”…

노래를 하며 우리 속에 맺혀 있던 그런 것들을 풀어갔던 것 같다. 우리는 평소에는 걸어 다니면서 차비를 모으고,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다. 거기에 어른들이 후원해주시는 비용을 보태 점차 악기들도 구비가 되어갔다.

두 달 만에 첫 공연,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청개구리밴드’가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우리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마을 할머니들을 모시고, 또 우리와 비슷한 비닐하우스 촌에 응원 공연도 갔다. 일년에 한 번씩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모금 공연도 했다. 드럼을 칠 때마다, 사람들이 환호해줄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나는 가난하니까, 나는 과외를 받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가 안 되니까, 그렇게 탓하고 핑계를 대기보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찾아 하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싹터갔다.

이제는 그렇게 같은 시기를 보냈던 친구들과 동생들이 다들,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었다. ‘우리에게 ‘무청’ 같은 공간이 없었다면?’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어떤 반항을 해도 언제나 그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안아주던 선생님, 몇 번의 철거 위기 때마다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도와준 마을의 어른들, 아무 대가 없이 우리의 공부를 봐주던 대학생 선생님들….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꿈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이곳에 온다.

‘즐거운가’. 무지개빛청개구리 아이들, 마을 사람들 누구나 와서 차도 마시고 쉬어갈 수 있는 마을의 사랑방 같은 곳. 2010년 9월, 개미마을의 철거 소식으로 무청의 공간이 없어질 위기에 처하자, 마을 분들이 힘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나(왼쪽)는 밴드실에서 후배들을 가르친다.

이곳에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한 아이들이 있다. 소극적이고, 자신 안의 열정은 있지만 스스로를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친구들…. 태곤이는 직장을 다니는데, 퇴근하면 항상 이곳으로 와서 동생들을 챙긴다. 미술을 전공하는 성욱이는 만화 동아리를, 성국이는 베이스기타를 가르쳐주고, 운동을 잘하는 상신이는 아이들과 같이 체육 활동을 한다.

나는 밴드 후배들을 가르치며, 몇 달 전부터, 동네 주부 밴드인 ‘꿈마밴드’를 만들어서 가르치고 있다. 주부님들이 스스로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다. 우리는 이런 활동들을 통해 한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느껴가고 있다.

“꿈을 꾸면 온 우주가 너를 지지해줄 거야.” ‘무청’ 선생님들께 늘 듣던 말이다. 이 말은 늘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말이다. 좁은 골목 끝에도 푸른 하늘은 언제나 공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금 거창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공평하게 온 세상이 평화로워질 꿈을 꿔본다.

이제 실제의 ‘개미마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2005년부터 법조타운 등이 조성될 예정으로 철거를 한다는 공고를 하다,
얼마 전 완전히 강제 철거를 해버린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마음속에 ‘개미마을’에서 배운 사랑은 영원할 것이다.

칠예가 전용복, 옻칠에 생명을 불어넣다

옻칠, 전통 가구에 칠해지는 천연의 갈색 도료로만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 옻칠의 고정관념을 깨주고,
다채로운 색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보여준 칠예가 전용복(61).
그의 열정은 일본 최대 국보급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해내면서 빛을 발하기에 이른다.
23년간 일본에서 활동해오다가 옻칠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칠예가 전용복씨를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옻은 옻나무의 수액을 말한다. 15년 이상 자란 옻나무에 상처를 내면 상처 치유를 위해 스스로 나무가 만들어내는 것으로, 100일간 20회에 걸쳐 채취하는 양은 불과 150g. 종이컵 한 컵 정도의 적은 양이라 작가에겐 더없이 귀한, 최고의 순수 자연 도료이며 접착제이다.

1502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를 그렸고 세월이 흘러 군데군데 금이 났지만, 1500년 전 고구려 벽화나 700여 년 전의 팔만대장경이 잘 보존된 이유는 무얼까? 답은 바로 옻칠이다. 옻칠은 제대로 잘 발라놓으면 만년이 가는 데다 아름다움을 가장 오래도록 간직하게 해준다. 그런 옻칠의 매력에 푹 빠져 자신의 전 생애를 바쳐 옻칠의 위대함을 되살리려는 작가가 바로 칠예가 전용복이다. 그가 내딛던 발길은 곧 옻칠의 역사였다.

1991년 일본의 최대 연회장 메구로가조엔 복원과 함께 세계적인 칠예 작가로 인정받은 이후, 그는 또 다른 일에 도전한다. 4년간 피나는 연구 끝에 세계 최초로 옻칠 시계를 선보인 것이다. 4개월 만에 최고가 8억 4천만 원 시계를 포함한 24개 전량이 팔린 기록을 세웠다. 순수예술 작품뿐만 아니라 시계, 전자기타, 피아노 등 생활과 밀접한 영역까지 옻의 영역을 무한대로 넓혀갔던 칠예가 전용복. 그랬던 그가 2년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 일본 땅이 아닌, 고국에서 우리 고유의 옻칠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우기 위해서다.

옻칠이 다양한 분야에서 유용하게 쓰인다는 게 신기합니다.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300년 이상 음색이 변하지 않는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바이올린이 있는데, 사실 나무는 조금만 습기가 있어도 금방 뒤틀리거든요. 그런데도 어떻게 원래의 형태와 음색을 유지할까 궁금해서 조사해서 유추해 보니 옻칠이란 결론이 났어요. 사실 나무로 만든 악기는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을 때 소리가 가장 아름다워요. 그렇다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으면 1년도 버티지 못하고 뒤틀리고, 화학성 도료를 바르면 마치 비닐을 씌운 것처럼 소리의 울림을 막아버리거든요.

그는 독일의 한 제조 회사에 악기를 주문했다. 직접 옻칠을 하기 위해서다. 미세한 음감을 구별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음악 공부를 시작했다. 일반 화학 도료와 옻칠판의 소리 차이를 비교하는 등 꼬박 3년간 옻칠 악기에 몰입한 끝에 그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옻칠의 두께를 찾아냈고, 바이올린, 비올라와 첼로, 피아노 등 옻칠 악기를 탄생시켰다. 유럽과 일본에서 실내악 연주로 명성이 높은 세계적인 연주가 ‘노부작 트리오’는 “처음 연주하는 악기에서 어떻게 이렇게 오래된 악기 소리가 나지요? 사람을 매혹시키는 친숙하고 은근한 음색이 돋보였다”며 감탄했다.

이렇게 좋은 옻칠이 그동안 제대로 쓰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실 옻칠을 다루는 건 힘이 듭니다. 옻은 나무에서 뽑아낸 생물인데, 말리는 방법이 계절마다 또 어느 나라 옻이냐에 따라 다릅니다. 옻 속에 안료를 개어 넣고 배합할 때도 상당한 시간이 걸려요. 막상 만들어도 옻칠의 특별한 건조 방법으로 인해 색상이 변해버리곤 하죠. 그 과정이 어렵다 보니 수십 년 동안 옻칠 이미지가 검은색이나 붉은색 정도로 인식된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깨고 싶은 고정관념 중 하나가 옻칠은 다양한 색상을 표현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사실 이미 선조들은 벽화나 불당에서 화려한 색을 써왔어요. 정성을 다해 전통적인 방식으로 정제해 바르면 다른 어떤 도장재도 따라올 수 없는 아름다운 빛깔이 나타납니다.

선생님 작품을 보면 자연, 마음, 우주 등 영원한 것을 주제로 하시는데, 옻칠의 특성이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 같습니다.

‘옻칠은 만년의 빛이다’ 란 말을 한 것도 그 뜻이죠. 자기가 만드는 것이 10, 20년 만에 소멸된다면 신중함도 10, 20년 가지만, 내 작품에 내 이름이 적힌 것이 만년 이상 간다고 생각하면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어요. 옻칠 자체가 워낙 영원한 거니까 작품에도 생명을 불어넣어 보고 싶었어요. 정지되어 있는 것 같지만,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고 살아 있는 것 같은 작품. 평생을 이걸 한 거죠.

그가 정식으로 옻을 접한 건 1980년이라 한다. 부산에서 태어나 목재 회사에 다니던 그는 이 세상에 하나뿐인 가구를 만들고 싶어 회사를 그만둔 뒤, 예린공예사를 차려 가구를 만들어 팔았었다. 그러나 운영이 어려워지자 활로를 모색하던 중 그는 우연히 토기 위에 옻칠을 한 ‘와태칠 기법’을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치는 가구보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작업을 찾았던 그에겐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와태칠을 하면서 옻칠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이후 순수 옻칠 작가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그러다 1987년,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한 일본인이 ‘오젠’이란 밥상을 수리해 달라며 가져왔던 것. 수리를 의뢰한 곳은 다름 아닌 1931년에 지어진 일본의 최대 연회장인 메구로가조엔이었다. 이후 그는 그곳을 방문하면서 엄청난 놀라움을 경험하게 된다. 일본의 한 시대를 대표하는 미술품이 총망라된 그곳은 옻칠 작품 5천 점이 벽과 천장,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결국 메구로가조엔은 이 땅에서 건너간 옻칠로 일본인들이 피워 올린 옻칠 문화의 불꽃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처음 들어서는데 천마도가 있는 거예요. 말의 근육을 전복 껍질의 질감으로 표현했는데 기가 막힙니다. 유일하게 한국에만 있는 기법이죠. 일본에 끌려간 장인들이 나라 잃은 설움과 울분을 삭이며 한 톨 한 톨 자개를 새겨 넣었을 걸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겁니다.”

당시 메구로가조엔은 도시의 하천 확장 문제로 철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직원은 혹시 있을지 모를 복원 사업 계획을 그에게 귀띔해 주었다. 철거보다는 복원 가능성이 클 것이라 예상한 그는 ‘선배 장인들의 혼이 담긴 작품들을 반드시 살려내리라’ 다짐하기에 이른다.

메구로가조엔 복원이 결정된 뒤, 일본인들을 상대로 설득할 때 ‘이 일에 목숨을 걸었다’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벌이나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걸 수 있는 건 목숨밖에 없었죠. 오히려 아무것도 없었기에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게 행운이었어요. 그래서 더 끊임없이 연구, 실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몸으로 체득하는 길밖에 없었어요. 이런 엄청난 과정을 통해 터득한 옻칠 기법이 지금의 저를 있게 했고 옻칠의 무한한 가능성을 알게 된 거죠. 그때 저는 역사에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천혜의 기회인데,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거든요. 아마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는 먼저 일본어 공부를 시작했다. 완벽한 일본어 구사를 위해 34살에 대학에 입학, 일본에서 노숙을 하면서 일본인들에게 무조건 말을 건네며 일본어를 익혔다. 또한, 일본을 무수히 드나들며 메구로가조엔의 모든 작품을 꼼꼼히 조사, 분석하며 연구를 거듭했고, 일본 전국 각지의 옻칠 산지를 순례하며 장인들을 만나 기법을 귀동냥했다. 그런 치열한 준비 과정을 거쳐 그는 1989년 3,000명의 일본 장인을 물리치고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 총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지진으로 인해 목재 문화가 발달한 일본. 일본을 뜻하는 ‘Japan’을 소문자 ‘japan’으로 쓰면 그 뜻이 옻칠일 정도로, 옻칠 문화의 자존심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한국인에게 그 일을 맡긴 것이다.

1조원대의 엄청난 공사, 3년간 연인원 10만 명이 투입돼야 해낼 수 있는, 무려 10톤의 옻칠이 사용된 거대한 작업. 그는 한국에서 데려간 장인 300명과 함께 3년 만에 메구로가조엔 내의 4~5천여 점의 작품들을 완벽하게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그중 2/3는 단순 복원이 아닌 그의 창작품으로 채워졌다.

세계 최대 규모의 옻칠 작품인 <이와테의 혼> 18×2.42m. 이와야마 칠예미술관 소재.

드디어 1991년 11월 13일 메구로가조엔이 다시 문을 열었다. 이후 그는 자신에게 일할 기회를 준 일본인들에 대한 보답으로 세계 최고의 옻칠 미술관인 이와야마 칠예미술관을 혼자 힘으로 7년간 운영해 왔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시 여러 장인들이 마음을 모아 일할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합니다.

사실 장인들은 각자 개성이 뚜렷해요. 그래서 이야기했죠. 옛날에 일본에 왔던 선조들이 우리만큼 대우를 받았을까, 아니다. 이 좋은 환경에서 우리 조상들이 했던 걸 되살려 놓으니 얼마나 보람된 일이냐, 우리의 작품이 영원히 남을 수도 있다고 했죠. 기술도 중요하지만, 마음가짐이 앞서지 않고는 안 되거든요.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 않았나 싶습니다. 짧은 역사관이었지만 선조들이 남긴 이야기를 하던가, 시간이 나면 일본의 역사 문화 탐방을 다니면서 견뎌냈죠.

복원 때 함께한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옻칠에 대해 더욱 연구하게 되셨다고요.

복원 작업을 하는 동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고통 속에서도 수많은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 나를 돕고, 믿고 따라주었습니다. 저는 비록 이름 석 자라도 남길 수 있었지만, 그들은 다시 무명의 장인으로 돌아가 열악한 현실을 살아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들이 조금이나마 옻칠로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보답하는 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일본에서 부와 명예를 누릴 수 있으셨을 텐데 다시 한국으로 오셨지요.

일본에서 귀화 요청을 했지만, 그건 아니더라고요. 비행기를 타고 가다 우리 산하를 보면 강과 못이 보여요. 그걸 볼 때마다 우리 조상님들의 어떤 한 맺힌 발자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옛날엔 제대로 대우도 못 받고 진흙탕 속에서 퍽퍽하게 살았잖아요. 그 발자국이 굳어졌고, 그 발자국에 옻물이 고이기 시작해 전용복은 그걸 퍼서 먹고 있는 거고요. 세월이 흘러 시간을 잘 만나서 나같이 부족한 인간이 이런 대우를 받구나 싶어 황송하고 황공스러워요. 조상님들이 아니면 제가 어떻게 있겠습니까. 그러면 후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남겨야 하고 정리해서 전해줘야죠.

후학 양성에 힘쓰시고 계신데, 제자들에게 가장 강조하는 점은 무엇인가요?

사람들이 옻칠을 잘 모르는 게 안타까웠어요. 밥상, 가구 만드는 게 다가 아니라는 걸 같이 알리자고 하죠. 선조들이 물려준 기법은 이어가되, 표현은 지금 시대를 해라, 가장 현대적인 것이 가장 전통적이다, 그래야 100, 200년 후에 새로운 전통이 될 것이다, 라고 하죠. 제자들의 열정도 대단합니다. 옻이 올라도 열심히 하는 학생들을 보면 우리 미래는 밝구나 싶어, 너무 기쁩니다.(웃음)

사실 선생님이 하신 일들은 ‘옻의 재발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 같습니다.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옻이라는 전통문화를 심도 있게 알리고 남겼다는 말만 듣는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습니다. 또 옻이란 어떤 물질인지, 살균력이 뛰어나고, 전자파를 흡수하고, 새집증후군도 없애주는 등 얼마나 이롭고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 물질인지를 체계적으로 남겨놓고 갈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하겠습니다.

옻칠 작품만 있어도 공기가 정화되며,

옻칠에서 나오는 원적외선은 두뇌를 맑은 상태로 유지해준다.

메구로가조엔 복원 공사 시 막바지 6개월 동안

살인적인 노동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그곳이 완벽한 옻칠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인천의 한 가구 회사와 손을 잡고 옻을 생활공간에 접목해 친환경 도장재로 쓰이도록 연구 중이다. 이 땅의 옻칠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불꽃처럼 살고 싶다는 칠예가 전용복. 이름 없이 사라져간 선조들의 발자국을 잇고자 하는 그의 대장정은 어쩌면 지금부터 시작인지 모른다.

칠예가 전용복님은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1980년 예린칠예연구소를 설립했으며 1986년 한국 현대미술전 대상 수상으로 본격적으로 옻칠 작가로 활동한 님은 1991년 일본의 메구로가조엔의 옻칠 작품을 3년에 걸쳐 복원하면서 세계적인 옻칠 작가로 명성을 얻습니다. 23년간 일본에서 활동하다 한국의 옻칠 문화 발전을 위해 2년 전 한국에 돌아온 이후, 옻을 생활공간에 활용하기 위한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아빠’ ‘아버지’… 가슴 깊이 불러봅니다. 괜스레 마음이 뜨거워지는 우리 시대 아버지 이야기.

 

어느 추운 겨울 아침 청승

김수련 38세. 직장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서구 대화동

박수근 작 <아기 보는 소녀>

Oil on Hardboard.

48.2×22.2cm. 1960년대.

날이 차다. 그래서 하늘이 더 시리다. 기러기 두 마리 날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 “기~러~기 울어에~는 하늘 구만~리 / 바람이 서늘도 하여 가을은 깊었~네 / 아~아~ 아~아~ 너도 가하고 나도 가한다”

한 맺힌 울 아버지의 18번이다. 울 아버지는 음량 좋은 음치다. 목소리는 되게 크고 울림이 좋은데 음이나 박자가 제멋대로다. 노래를 좋아하는 울 엄마가 강요해서 노래방에 가게 되면 얼큰히 취하신 음성으로 꼭 저 노래를 부른다. 정말 박자도 음정도 하나도 안 맞게 느리고 굵은 목소리로. 외로운 당신의 인생처럼.

아버지는 열두 살에 전쟁을 겪으셨다. 5남 2녀의 어린 가장이었던 내 아버지는 그 나이에 동생 셋의 죽음을 겪었다. 홀어머니와 남은 2남 2녀의 가족들은 함께 살 수 없어 뿔뿔이 흩어졌다. 외할머니의 손에 키워지던 아버지는 그마저도 어려워 보육원에 보내졌다.

소아마비를 앓아서 한쪽 다리가 불편하신 아버지. 사람들은 아버지를 ‘한쪽 다리를 저는 침놓는 사람’이라 했다. 당신이 건강에 불편함이 많았기 때문에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하셨는가 보다.

아버지랑 같이 일한 지 15년째가 되어간다. 난 아버지를 매일 보아왔다. 아버지의 삶을, 일하는 아버지를, 그리고 아버지 속의 어린 아버지를.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 섞이지 못하셨다. 운동회, 졸업식, 입학식장에 아버지는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버지가 항상 거기에 계셨다는 것을.

며칠을 치통 때문에 앓았다. 어제는 약을 한 보따리 주셨다. 소금에 송진과 유향을 넣어 볶아서 물고 있으라고 하셨다. 그 때문인지 이상하게 콧물이 줄줄 흐른다. 근데 아침엔 눈물이 그런다. 그 소금 때문이다. 아버지가 주신 그 소금.

금요일 아침부터 주책이다. 내가. 근데 이 마음이,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이, 내가 외로워서, 아버지의 무게 다른 걸음 소리가 가슴 아파서. 한 번도 단 한 번도 아버지께 사랑한다 말씀드리지 못했다.

“아빠! 제가 아버지의 딸이라서 자랑스럽고 또 사랑합니다!”

산타가 되신 나의 아버지

최상진 27세. 유니온프레스 기자

박수근 작 <골목 안>

Oil on Canvas. 80.3×53cm. 1950년대.

매년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아버지 생각이 가슴에 가득해집니다. 유치원도 다니기 전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머리맡에 놓아 있던 케이크 하나. 산타가 없는지조차 모르던 꼬마는 로봇 대신 케이크를 놓고 가던 산타를 원망했지요.

아버지께서는 “산타 할아버지는 못된 일을 많이 하는 아이에게는 선물을 안 주고, 조금만 착한 아이에게는 과자나 로봇을, 가장 착한 아이에게만 온 가족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케이크를 주는 거야” 말씀하시며 매년 저를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로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셨던 여섯 살 무렵의 크리스마스, 속셈 학원 원장님과 나타난 산타 아저씨는 제게 이순신 전기 한 권만을 주고 가버렸습니다. 위인전을 손에 쥔 어린아이는 ‘내가 그동안 착한 일을 덜 해서 아버지도 아프시고 케이크도 안 주나 보다’ 하며 지난날들을 후회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산타 할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선물을 나눠줄 산타가 부족했는지, 아버지까지 하늘로 데리고 올라가 버렸습니다.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저는 새벽에 케이크를 선물해주던 이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크리스마스 때 어머니께서 동생 세진이의 머리맡에 장난감과 책을 놓고 잠드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세진이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습니다. 세진이가 물었습니다.

“형, 착한 일 많이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원하는 선물을 다 주는 거야?” “그럼. 너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말해봐.” “아빠 만나는 거.” “아빠는 산타 할아버지랑 선물 나눠주러 다니느라 바빠. 다른 거 말해.” “없어, 그럼.”

세진이는 방으로 들어가서 하루 종일 시무룩해 있었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동생의 그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동생이 너무 안타까워 다음 날 어머니랑 세진이 몰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써놓으신 편지를 몇 번이나 읽으며 눈물을 삼켰습니다.

아버지가 홀연히 가족을 떠나간 지도 이제 20년이 다 되어갑니다. 초등학교 1학년이던 큰아들은 어느새 군대를 제대하고, 기자가 되어 하루하루를 바쁘게 살아가고 있고, 4살배기였던 둘째도 예비역 복학생이 됐을 만큼 훌쩍 자랐습니다.

지난 20년 동안 아버지의 몫까지 해내야 한다고 다짐하며, 야간학교 교사 생활도 하고, 심리학을 전공하며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 되고자 했습니다. 주변에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이 있다면 앞장서 달려가고, 사회의 불의를 놓치지 않고 취재해왔습니다.

크리스마스 때면 산타가 되어 무료 공부방 아이들을 찾아가기도 했지요. 아버지처럼 케이크를 사들고 말이지요. ‘너희들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아이들이구나’라는 멘트도 잊지 않고 써넣었습니다. 7천 원짜리 귤 한 박스를 내려놓기 무섭게 몰려들던 아이들. 단지 귤 3개를 받았을 뿐인데도 더없이 행복해하던 아이들의 모습에 눈물이 울컥 났습니다.

내가 겪은 과정을 이 아이들도 그대로 감내해내야 할 것임을 알기에, 가슴 한편이 아려오지만, 아버지가 그러하셨듯이 내가 그들의 산타가 되어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나의 영원한 산타이신 아버지…. 어느덧 장가갈 나이가 되어버렸건만 아직도 아버지의 손길이 그립기만 합니다. 뵙고 싶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목소리

박도 67세. <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저자

아들아, 오늘은 몇 년 전 함께 망가진 화단을 손질하던 순간이 떠오르는구나. 뒷산 기슭에서 너는 한 번도 쉬지 않고 흙을 퍼다 날랐지. 나는 네가 흙을 담아 재빠르게 내려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너의 성장에 뿌듯함과 함께 나도 이제 늙어 내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린다는 서글픈 두 마음이 교차했었다.

아버지도 군 복무 때는 완전군장을 하고 밤새 행군을 해도 끄떡없었는데, 이제는 50미터도 안 되는 곳에 양동이로 흙을 나르며 한두 번은 쉬어야 되는 체력의 노쇠함에 숙연해졌다.

30년 넘게 중고교생들을 가르치면서, 부모와 자식 간의 세대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다. 부모는 부모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고 불만을 이야기한다. 나 또한 너희에게 “세대 차이가 난다” “나는 아빠처럼 안 살 거야”라는 말을 들었을 때 무척 섭섭했으나 곧 그것이 인류 문화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긍정으로 이해하였다. 집안이 잘되려면 자식이 부모보다 나아야 되고, 나라가 융성하려면 자라나는 세대가 구세대보다 나아야 한다. 어차피 다음 세상은 너희 것이기에.

박수근 작 <맷돌질하는 여인>

Oil on Hardboard. 21.5×27cm. 1940년대.

너희의 예리한 눈으로 볼 때 아버지를 비롯한 기성세대의 삶이 못마땅하고 모순덩어리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 세대를 건전하게 비판은 하되 부정하지는 말아라. 아버지와 대화가 안 된다고 피하지만 말고 한 번이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아버지에게 접근해 봐라. 파란 많은 삶을 살아온 아버지를 이해하고 다가가면 아버지도 반갑게 너희를 맞을 것이다. 자식이 아버지를 진정으로 이해해줄 때, 아버지는 가장 삶의 보람을 느낀다. 아버지는 누구냐? 아버지는 너희에게 가장 귀한 생명을 주신 분이다. 너희가 나무라면 아버지는 뿌리다.

“아버지는 백 사람의 스승보다 낫다”고 한다. 이는 자녀에 관한 한 아버지만한 사람이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아버지 세대가 다 잘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다고 했는데, 그동안 나는 무슨 일이 그리도 바빴는지 너희에게 밥만 갖다 주는 아버지에 지나지 않았구나. 사람은 밥만으로 살 수 없는 줄 알면서도 우선 너희에게 풍족하게 해주려고 다른 것에는 소홀히 한 점을 솔직히 사과한다. 아이들은 밥과 사랑을 먹고 자라는데 너희에게는 밥만 있었지 진지한 사랑이 부족했던 것 같다. 뒤늦게나마 너희 남매에게, 그리고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구나.

아버지는 고교 시절, 집안이 어려워 타지에서 홀로 신문 배달을 하며 학업을 이어갔었다. 그때 아버지는 객지에 있는 아들이 안쓰러웠던지 자주 편지를 보내주셨다. 아버지의 편지글에는 늘 “초년고생은 은을 주고 사라”는 말씀이 적혀 있었다. 그때 나는 그 글귀가 아버지로서 책임을 회피한 말로 들려 무척 짜증스러웠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런 아들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매번 빠짐없이 그 글귀를 써 보내셨다. 아마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아버지로부터 그 글귀가 적힌 편지를 수십 번은 더 받았다.

어느새 나도 그때의 아버지보다 나이를 더 먹었고, 내게 그런 글을 보내주시던 아버지가 이승을 뜨신 지도 벌써 십수 년이 지났다. 내가 새삼 지난 얘기를 들추는 것은, 앞으로 너희에게 부닥칠지 모를 ‘젊음의 뒤안길’을 피하거나 돌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다.

젊음의 뒤안길이란 ‘인종(忍從, 묵묵히 참고 따름)의 인생길’로 젊은 날의 방황과 시련, 고뇌를 말한다. 어느 분야든지 정상에 우뚝 선 사람들의 인생 역정을 살펴보면 대부분 젊음의 뒤안길을 묵묵히 걸어왔다. 또 그런 길을 거쳐 온 사람들은 웬만한 역경에도 좀처럼 쓰러지지 않는단다. 그분들이 정상에 오른 것은 요행이나 우연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딸들아, 아들들아, 내일을 준비하는 젊은이가 되라. 어차피 다음 세상은 너희 것이다. 이 세상은 네가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네 운명이 달라진다. 이런 세상에서 네 꿈을 한번 멋지게 펼쳐라. 너를 대신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기에 참으로 위대하다. 그렇기에 아무렇게 살 수는 없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주어진 삶이기에.

 

아빠와의 추억, 다시 만들어가려고요

장희지 25세. 직장인. 대구시 북구 고성동3가

2009년 10월 15일 목요일. 저녁이 지나도 밤이 되어도 아빠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엄마한테 여쭤보니 모르겠다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신다. 다음 날 저녁이 되어서야 엄마는 아빠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에 상처를 입어, 1주일간 병원에 있어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다. 그 소식을 듣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글썽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빠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어렸을 때 동생과 아빠랑 산에 올라 산책을 자주 했다. 무슨 이름 모를 꽃도 보고, 운동도 했다. 산에서 내려올 땐 100원짜리 요구르트를 나와 동생에게 사주시고 아빠는 마시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항상 놀이터에서 놀다 집으로 갔다.

가끔은 자전거로 등교도 시켜주셨다. 충분히 걸어서 가도 된다 해도 아빠는 자전거 뒤에 타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아빠와 함께했던 기억은 어릴 때가 전부였다. 늘 함께 있었지만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 어느 순간부터 아빠가 보이지 않았다.

10월 17일 토요일. 엄마와 함께 병원에 갔다. 아빠는 손가락 하나를 못 쓰는 것이 여러모로 불편하다며 내게 양말을 신겨 달라고 했다. 아빠에게 양말을 신겨 드리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순간 내가 그동안 아빠께 해드린 것이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안경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항상 아침 일찍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셨고, 야근도 자주하셨다. 그렇게 일해서 삼 남매를 키우셨다.

박수근 작 <모란>

Oil on Canvas. 40.9×53cm. 1960년대.

하지만 나는 항상 아빠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다른 가족이 재밌게 TV를 보고 있는데도 아빠가 보고 싶은 것으로 채널을 돌려버리는 아빠, 가족들의 의견에는 별로 귀 기울이지 않는 아빠. 너무 자기중심적이라 생각했다. 그런 아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병상에 누워 있는 아빠를 보니,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고 있는 피붙이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지금껏 버텨왔을 아빠가 보였다.

가족을 위해 아끼기만 했던 아빠. 아빠의 작고, 초라해진 그 모습에 마음이 아파왔다. 아빠의 헌신과 희생으로 나는 자랄 수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해드린 게 없었다. 아빠의 입원을 계기로 아빠를 보려고 찾으려고 노력하는 딸이 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아빠의 퇴원 후 아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장녀로서 나도 그렇게 사근사근한 성격은 아니지만, 아빠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찾았다. 휴대전화 문자 쓰기, 컴퓨터 타자, 인터넷 검색하는 것도 가르쳐 드렸다.

그 후 2년이 지났다. 이제는 퇴근 후에 아빠와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간혹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셔도 우리 아빠만의 특징이라 생각하며 가벼이 웃고 지낸다.

어느새 아빠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과 마음의 관점에도 변화가 생겼던 것 같다. 아빠가 오래오래 사셔서 못 해본 것 많이 해보셨으면 좋겠다. 앞으로 열심히 돈도 모아서, 여기저기 구경도 많이 많이 시켜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