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씩 짝을 지어 한 사람은 받쳐주고, 한 사람은 뒤로 넘어지는 게임이 있습니다. 불안에 떨지 않고 완전히 넘어진다는 것은 상대가 나를 받쳐줄 것이라 믿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지요. 삶에서, 일상에서, 그렇게 서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요. ‘만일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겨지라 하면 옮겨질 것이요, 또 너희가 못 할 것이 없으리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먼저 나를 온전히 내던질 때 진정한 믿음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믿음으로 몸 마음이 치유되고, 불가능을 가능케 했다는 사례는 참으로 많습니다. 믿음의 힘, 그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편집자 주>
★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 “내가 살아오는 동안, 나는 허황된 계획을 꾸민 적도 있었고,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진 때도 있었소. 그러나 아내는 한 번도 불평을 하지도, 의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나를 믿어주었답니다. 오늘의 내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렇게 나를 믿어준 아내의 덕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지요.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기를 믿어주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든든한 일입니다.”
★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것 배신하지 않는 것 오락가락 왔다 갔다 변하지 않는 것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결같은 것 손짓, 발짓… 상대를 위해 뭔가 하려고 계속 노력하는 것 믿기 어려울 때 더욱 믿음을 갖는 것 기존의 관념조차 뛰어넘는 것 내가 손해를 볼지라도 진실로 나를 던지는 것 내가 없어지는 것 그 사람을 위해 희생해도 즐거운 것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 언제나 감사하는 것 나보다 상대가 더 소중한 것 우리가 하나임을 믿는 것
★ 사람으로서 믿음(信)이 없으면 그 사람됨을 도무지 알 길이 없다. 큰 수레에 끌채고리(?)가 없고, 작은 수레에 연결고리(?)가 없다면 무엇으로써 그 수레를 갈 수 있게 한단 말인가?(子曰 人而無信?不知其可也. 大車無小車無?其何以行之哉)
★ 어린 시절에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경험은 평생을 간다.
우리에게 훌륭하고 멋진 엄마와 온전히 하나가 되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어린 시절, 좋은 양육자와 애착 관계를 맺었다면, 어른이 된 뒤에도 좋은 짝을 만날 확률이 높으며 애정을 유지하기 위해 환상에 기댈 필요가 없어진다. 어린 시절, 사랑하고 사랑받은 경험. 그에 버금가는 것이 ‘믿어준’ 경험이다. 나의 재능을 믿어주고 나의 꿈을 믿어준 사람, 그렇게 믿어준 부모나 스승과 더불어 온전히 하나가 된 경험, 그 경험이 평생 동안 나를 만들어간다.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중을 한 몸에 받는 사람으로 이끌어간다.
★ 환자에게서 ‘믿음’을 배우다
어느 날 십 년째 이명증을 앓고 있는 40대 여자 환자 한 분이 찾아왔다. 이명(耳鳴)으로 여러 의료 기관에서 치료를 받다 오셨는데, 어떻게든 치료받고 싶은 간절한 환자를 보니, 나 역시 어떻게든 치료해주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생겼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최근에 스트레스를 엄청나게 받고 있었다. 일단 수면 시간을 늘리고, 평상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렸다. 환자는 진심으로 나의 처방을 믿고 따랐다. 약도 잘 먹고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을 했다. 그 이후 스트레스로 인한 증세들이 없어졌다.
문제는 고질적으로 있었던 이명이었다. “이 병을 낫는 것은 시간이 걸린다, 같이 힘을 합쳐 물리쳐 보자”며 꾸준히 반신욕을 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는 등 생활 습관을 바꾸라고 권했다. 보통 습관을 바꾸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인데, 그분은 하나하나 열심히 실천했다. 그만큼 의사의 말을 믿으신 것이다. 그 결과 6개월 만에 이명이 완전히 없어졌다.
치료를 할 때 의사와 환자와의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한다. 환자가 얼마나 의사를 믿느냐, 또 의사가 얼마나 자신의 처방으로 환자가 나을 것이라 믿느냐에 따라 치료의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환자를 무거운 물건을 혼자 밀어야 하는 사람이라 친다면, 어느 방향으로 밀어야 할지 살짝 도와주는 사람이 바로 의사다. 결국 몸을 치유하는 것은 환자 자신인 것이다.
의사 생활을 하면서, 아무리 난치병이라 해도 의사가 정성을 다하고 환자가 마음을 열고 최선을 다하면 병마를 이겨낼 수 있는 경우를 많이 본다.
학창 시절 교수님은 “첫째는 한의학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는 환자와의 소통이 중요하다”라고 늘 강조하셨다. 첫째는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믿음, 그다음에는 환자를 아끼고 진심으로 낫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내가 할 수 있음을 믿고, 내 안의 본성이 나를 이끌어줄 것임을 믿고, 함께하는 사람을 믿을 때, 그 마음이 진심일 때,
어떤 어려운 상황도 헤쳐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교무부장님은 분위기 메이커
나영선 51세. 전남중학교 교사
우리 학교에는 조율의 달인 조대웅 교무부장님이 있다. 한 학교의 교무부장이라 하면 모든 행정 문제를 책임지고 선생님들과 교장, 교감 선생님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중간 관리자 역할이면서, 학교 전체 분위기를 좌우하는 사람이다. 여느 직장과 마찬가지로 학교에서도 의견 충돌은 종종 일어난다. 아이들 지도뿐 아니라 교육청이나 교육부에서 내려오는 요구 사항과 업무도 대단히 많은데, 50명 가까이 되는 선생님과 30개 학급의 학생들, 학부모들의 의견을 모아 합리적인 방안을 도출해낸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학교 폭력이 문제가 될 때 부모님들이 관여하면서 어른들 싸움이 더 크게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조선생님은 그런 험한 상황에서도 재빨리 ‘돌변’하여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음의 안정을 찾는 분이었다. 부드러운 상담으로 부모들을 이해시키고, 학생들은 따로 불러서 차분하게 코칭하는 등 마음을 안정시키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채 5분을 넘지 않았다.
2년 넘게 조선생님과 근무해오면서 ‘저 선생님은 어떻게 저렇게 마음을 잘 다스릴까’ 하는 궁금증이 커졌고 하루는 선생님을 붙잡고 물었다.
그러자 조선생님은 3년 전부터 마음수련을 하고 있다고 했다. 매년 쉴 틈 없이 교무·연구·학생 부장을 번갈아 맡아오면서 교과 수업에서는 내로라하는 실력을 갖추었지만, 승진에 매달리며 아이들과 점점 멀어지는 자신을 보며 ‘도대체 뭐하고 사는 건가’ 하는 회의감도 컸던 차 학교로 날아온 ‘교원자율연수’ 공문을 보고 마음수련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꾸준히 마음을 버리니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게 되면서 여유가 생겼고,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아졌다고 했다.
그 후에도 시간이 갈수록 조선생님의 변화는 두드러졌다. 밝은 얼굴과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 분위기를 주도하는 명랑함까지. 그리고 그런 조선생님의 권유로 나 역시 지난겨울 마음수련 교원자율연수에 참가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으로 마음을 빼는 방법을 배웠던 1주일. 칠팔십 대 할머니도 아이들도 누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방법은 간단하고 쉬웠고 마음은 금세 편안해졌다.
25년간의 교편생활을 깊이 있게 돌아보았다. 아이들 입장에 서기보다 내 감정, 내 생각이 항상 우선이었다. 그동안 아이들의 안 좋은 수업 태도를 마음에 담고 있었으니 비슷한 모습만 봐도 오해가 생기고,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됐고, 우리 아이들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반성이 많이 되었다.
수련을 마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는 이제까지 쌓아왔던 선입견에서 벗어나 완전 새로운 시각으로 아이들을 바라볼 수 있었다. 지도하는 것이 편안해지니 아이들도 나를 편하게 대했고 반 전체의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상승 작용이 일어났다. 이번 학기부터 매일 아침 20분간 마음 버리기를 한다. 공부거리도 많고 사춘기라 예민한 중학생 때에 마음을 빼기하는 방법을 알고 조금이나마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올해도 여전히, 하지만 이례적으로 조대웅 선생님은 3년째 교무부장을 맡으셨다. 언제나 Yes를 외치는 예스맨이자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톡톡히 하셨듯이 올해도 특유의 유머러스함과 더 크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려심 가득한 학교로 만들어주길 기대해본다.
스팸깻잎주먹밥
스팸깻잎주먹밥은 ‘무스비’라는 하와이 음식에서 유래한 네모난 김밥입니다. 집에 있는 재료 중에 배합이 잘 맞는 것으로 스팸과 깻잎을 골라봤어요. 하지만 이외에도 좋아하는 재료 뭐든지 선택하셔도 됩니다. 재료가 간단해서 부담도 없고, 특별한 조리가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싱글들도, 초보 엄마들도 예쁜 소풍 도시락을 만들 수 있답니다.
{ 재료 }
스팸 싱글 1개, 깻잎 8장, 통깨 약간, 밥 1과 1/3공기, 참기름 약간
{ 만들기 }
① 스팸은 반으로 잘라 마른 팬에 굽는다. ② 깻잎은 세로로 칼집을 낸 뒤 돌돌 말아 썬다. 밥에 깻잎, 통깨와 참기름을 넣고 버무린다. ③ 비닐을 깐 뒤 ①의 스팸보다 조금 넓은 면적으로 ②의 밥을 깐다. 스팸을 올리고 다시 스팸 두께 정도의 밥을 올린다. ④ 비닐을 접어 네모반듯한 모양이 되도록 누른다. ⑤ 먹기 좋은 크기로 썬다.
밥과 속의 양념 간을 잘 맞추는 것, 네모 각을 잘 맞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뿌리가 살아 있는 친환경 부케
어떻게 이런 생각을?
처음에는 옥수수, 한지 등 자연 소재의 섬유에 표백과 형광 처리를 하지 않는 등 친환경 웨딩드레스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결혼식 전반을 친환경으로 바꿔달라는 문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콩기름 인쇄 청첩장’ ‘화분 꽃 장식’ ‘공정신혼여행’ 등 하나 둘씩 친환경으로 바꿔 보던 중 부케도 한 번 쓰고 버리지 않고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뿌리가 살아 있는 부케를 플로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제작하게 되었다.
장점은?
우선 버리지 않고 계속 기를 수 있어서 자연을 해치지 않고, 2~3일 정도 심지 않고 물을 뿌려만 줘도 되는 식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물 키우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쉽게 가꿀 수 있다. 일반 부케와 비용은 비슷하지만 친환경 부케는 예식 후에 분리해서 심었을 때 작은 화분으로 10개 정도 만들어 오래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더 경제적이다.
주변의 반응은?
특히 어른들께서 많이 좋아하신다. 보통 부케는 친구에게 던져서 선물로 주는데 친환경 부케는 촬영 후 직접 가져가는 신부님들이 많다. 식물에 물을 줄 때마다 결혼할 때의 추억을 생각할 수 있어서 더 소중히 여겨진다고들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친환경 결혼식이 너무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또는 비쌀까 봐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환경을 생각하게 되고 하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혼식이 아닌 신랑 신부가 직접 만들어가는 결혼식이라는 점에서 그 과정 자체가 좋은 추억이 된다. 요즘 친환경 결혼식이 알려지면서 지방에서도 요청이 오는데 아직 여력이 부족해 못 해드리는 경우가 있다. 늦어도 내년 초에는 지방에서도 친환경 결혼식을 할 수 있도록 계획 중이다.
만든 사람 이경재 디자이너. 사회적기업 (주)대지를위한바느질 대표 www.ecodress.net
‘SBS-TV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하롤트 뮐러 원작의 연극 ‘로젤’에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여주인공 로젤이 한 친구를 만나 모든 걸 털어놓은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고맙다. 너 같은 사람이 꼭 하나 필요했었어. 아무도, 단 한 번도 지금까지 내 진실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누군가에게 내 진실을 다 말하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아무것도 없어. 너한테 다 말하고 나니까 너무 행복해. 정말 살 것 같아!”
놀랍게도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음보다 깊었던 사랑의 상처와 배신의 아픔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런 일은 아니었다.
진정한 힐링, 즉 마음의 치유는 작위적인 설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젤처럼 우리의 가슴속에는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 가득 쌓여 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기에, 쌓아두고 있던 말들은 점점 마음의 병이 된다. 따라서 그 말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치유인 것이다. ‘힐링캠프’ 제작진은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 즉 촬영 장소를 게스트가 임의로 정할 수 있게 한 것부터가 대단한 파격이다. 게스트는 가장 마음 편한 장소를 스스로 정하고,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듯 가슴속의 말을 털어놓는다. MC들은 이따금씩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게스트의 말에 차분히 귀를 기울인다. 세 명 MC 또한 게스트가 마음 편히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최상의 조합이다. 이경규의 넉넉한 연륜은 인생 선배의 든든함을, 김제동의 섬세한 배려는 좋은 친구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게다가 진지하면서도 엉뚱 발랄한 한혜진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 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부담 없이 꺼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최근 ‘힐링캠프’에 출연한 게스트들은 자신의 마음을 치유받고 돌아갔을 뿐 아니라, 보고 듣는 이의 마음까지도 치유해 주었다. 자기 잘못으로 빚을 지게 된 것이 아닌데도 지난 20년 동안 빚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신은경의 진실한 속사정과 긍정적 태도는, 억울한 이유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따스한 격려가 되어줄 수 있었다. 데뷔 초부터 높은 인기만큼이나 루머와 차가운 시선에 시달려왔던 이효리 역시 진솔한 내면을 털어놓음으로써 상당 부분의 오해를 벗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과의 1:1 결연을 촉구했던 차인표의 경우는 수많은 타인의 힐링까지 이루어낸,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치유받은 사람, 힐링에 성공한 사람은 그 자체로서 빛을 내뿜기 때문에 마치 등불과 같다. 등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밝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진심으로 들어준다면, 상대 또한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어둡고 험한 세상을 밝히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아주 작은 일일지 모른다. ‘힐링캠프’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소중한 진리다.
글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무럭무럭 ‘하늘빛 꿈’이 자랍니다
사진, 글 김선규
학교에서 키우는 하얀 강아지 ‘똘이’가 교실 문틈으로 수업을 엿듣고 있네요. 정말 동화 속 이야기처럼 머지않아 똘이도 구구단을 외울 것 같습니다.
주동기 총각 선생님은 “이곳 아이들은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하고, 뭘 갖고 싶다고 떼쓰는 일이 거의 없다”며 자랑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5학년 오다애와 2학년 오준영, 1학년 백예닮 어린이는 천사의 눈망울과 미소를 가졌습니다.
학원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방과 후 활동이라면 주동기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섬 한 바퀴를 걸어서 도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 고사리도 따고 예쁜 야생화 이야기도 한다는군요. 저 외딴 곳 작은 섬마을에도 천사들의 하늘빛 꿈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옥의 창문_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소통한다
한옥에서는 창과 문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창문이다. 창문은 안과 밖을 연결한다. 소통의 통로이다. 특히 한옥의 백미는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분합문이든 바라지창이든 광창이든 크고 작은 창문을 통해 세상 밖을 보면 다양한 자연과 인간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문틈 사이로 아기자기한 장독들이 눈에 들어오고, 여름이면 붉은빛을 토해내는 백일홍이 바람에 춤을 추고, 가을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이, 겨울엔 하얀 눈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할 만큼이나 아름답다. 사진, 글 이태훈
우리 한옥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를 많이 따르고 있다. 특히 ‘창문(窓門)’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외국 건축물에서는 창(Window)과 문(Door)은 엄격하게 역할과 기능이 다르며, 명칭도 각각 다른 반면, 우리 한옥에서 창문은 때로는 창이 되고, 문이 되기도 한다. 대개 창은 채광과 공기 순환을 담당하고 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우리 한옥의 창문은 서양 건축에서 말하는 창과 문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좌우상하 대칭으로 만들어진 창문들을 밖에서 보면 균제의 미와 절묘한 공간의 분할이라는 선현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대부분 오래된 한옥에는 종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 많다. 그래서 한옥을 촬영하다 보면 종손이나 종부님들과 친해지지 않으면 사진 한 장 찍기가 쉽지 않다. 봄이면 나무를 심어주거나, 가을걷이 때는 호박이나 쌀자루 등을 광으로 날라주기도 한다. 때론 홀로 사시는 종부님과 차 한잔 하며 말벗도 되어준다. 종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되고, 그 집안의 가풍과 역사를 함께 배울 수 있어 좋다.
언제나 자연과 소통하게 할 수 있는 구조가 바로 한옥의 진면목. 덕분에 옛 선비들은 창문을 여는 순간 자연과 하나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을 구현하고, 지혜와 용기를 배울 수 있었다. 창문은 세상의 변화를 깨닫게 하고, 닫히고 열리는 문의 기능처럼 때로는 절제와 때로는 개방으로 사람을 대하게 하고, 편협하지 않고 균형 잡힌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함을 상징했다. 한옥의 창문은 그렇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진리를 이어주는 숨길이었다.
색종이 놀이
미술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 활동은 ‘색종이를 오려 모양 꾸미기’입니다. 형형색색 색종이를 교사용 책상에 펼쳐 놓고 은근히 아이들의 창작 욕구를 자극합니다. 당장 제 손에 없는 것은 언제나 샘나는 아홉 살 눈망울들이 초롱초롱 예쁩니다.
색종이 한 장을 집어 올려, 이리저리 마음 가는 대로 접습니다. 그리고 싹둑싹둑 오려냅니다. 그런 다음에 활짝 펼치니 정사각형 색종이가 멋진 문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꼬마들의 탄성과 박수가 쏟아집니다.
이번에는 아이들 차례입니다. 아홉 살 인생들에게 당부합니다. 제발 덤비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하지만 말 떨어지기 무섭게 한 아이가 앞으로 나옵니다. 그 사이를 못 참고 뎅강뎅강 오려버린 색종이를 새것으로 바꾸어 달랍니다. 이럴 때는 본보기로써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지만, 미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옛다!’ 하고 인심을 씁니다.
잠시 뒤, 또 한 아이가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 맞나요?” “저렇게 하면 맞나요?” 연거푸 질문을 합니다. 하나하나 가르치고 수정해줍니다. “잎사귀 모양은 이렇게 자르면 되나요?” “저렇게 자르면 어떨까요?” 질문이 끝이 없습니다. 너무 소중한 색종이라서 선뜻 가위질 못 하는 참새가슴입니다. 급기야 손가락이 아프다며 가위질을 못 한다고 엄살을 피웁니다. 이러다가는 내가 다 해줄 판입니다. 그때 똘똘한 아이가 나서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 도와주면 감점되지요? 그렇죠? 선생님.”
아주 감사하고 적절한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 테니 각자 스스로 노력하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제일 처음에 나왔던 아이가 손을 내밉니다.
“선생님, 망쳤어요. 한 장만 더 주세요.” “안 돼! 넌 벌써 두 장 다 썼어!”
아이는 멈칫하며 손길을 거둡니다. 그리고 입을 삐쭉거리면서 교탁 위의 색종이와 나를 번갈아 봅니다.
슬프디슬픈 눈에서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공공의 약조지만 색종이 한 장 때문에 아이를 울릴 수 없습니다. 필요한 색깔로 딱 한 장만 더 가져가라니까 얼른 초록색 색종이를 집습니다. 아이는 색종이 한 장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저 혼자 발레를 하듯 빙그르르 한 바퀴 돕니다.
이웃과 내가 모두 행복해지는 ‘치과’
홍수연 치과의사, 서울이웃린치과 원장
서울이웃린치과에서는 토요일이면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진료를 한다.
무료 진료에 힘을 기울일수록 좋은 시설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 병원에는,
개원 당시 전국에 5대밖에 없었다는 고가의 CT 촬영기도 있다.
비싼 치료비 때문에 치과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200여 명의 환자들이,
틀니, 임플란트, 잇몸 치료 등을 받고 다시 웃음을 찾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 때문에 아픔 참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홍수연 원장.
“내가 살고 싶은 어떤 세상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살아보자” 다짐했다는
그녀의 이야기. <편집자주>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내가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것이 아마도 내가 나 외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 첫 경험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 어쨌든 공부를 잘하자. 공부해서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공부해서 남 주자.’ 그렇게 입시 준비를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으셨다. “어차피 이런 시대에 대학을 제대로 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혹시 시대가 좋아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게 어떻겠니?” 그것은 내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985년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의 대학 시절은 집회와 시위의 연속이었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고, 군사독재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1987년 6월, 한국 사회는 거대한 시위의 물결에 휩쓸렸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서 민주화 시위의 중심은 넥타이 부대와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동하였다. 2학기가 되어 학교로 돌아온 나는 고민과 회의를 거듭했다. 과연 이런 교과목들이 민중의 고됨을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갔다. 열악한 현장 생활, 2년 동안 나름 공장의 여동생들과 즐겁게 지냈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래, 공부해서 남 주자.’ 중학교 시절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치과 공부를 하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필수적인 치과 치료의 많은 부분이 건강보험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먹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하는 수준의 진료에 수백만 원씩 갖다 부어야 하다니! 평소 내는 세금, 건강보험료, 이런 걸로 최소한의 실질적 보장이 이뤄질 수는 없을까?
그래서 치과대학 졸업 후 보건학, 공공정책 등을 공부했다. 하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낸 정책들은, 번번이 정권에 의해, 관료들에 의해 무시당했다. 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때가 내 나이 갓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내 삶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늘 불편했다. 마치 이 세상에 빚 같은 걸 남겨놓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온 힘은 이웃과 세상에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병약했지만 온 동네 할머니들이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함께 키워주신 덕분에 큰 탈 없이 잘 웃고 잘 노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아낌없는 사랑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된 것이다. 그 이웃들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
그즈음 간디가 자신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인정했던 제자, 인도의 비노바 바베의 말이 가슴을 쳤다. ‘당신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지금부터 그 꿈꾸는 세상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라.’
그 후 지역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수백 명의 아이들에게 무료 치과 진료와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의만 갖고 무료 진료를 하는 것은 자칫하면 일회적인 행사가 되기 쉬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예 ‘공익형 병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2009년 1월, 우여곡절 끝에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평일에는 치과종합병원, 토요일에는 무료진료병원으로 운영되는 치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약 20여 개의 사회단체들에서 의뢰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한다.
이가 아프면 온몸이, 마음까지 아파지기 쉽다. 고가의 치료비 때문에 치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저소득층 환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주말엔 장애인, 독거노인, 새터민, 외국인노동자 등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다. 치료비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의 목표는 부디 씹는 기능만이라도 회복하여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번은 설암(舌癌)으로 인해 혀는 물론 구강 기관이 모두 상실된 장애인이 온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단 한 개의 치아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혀에 발생하는 암인 설암은 초기에 발견하면 방사선요법을 통해 쉽게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주변의 무관심과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그 시기를 놓치고, 오랜 시간 방치된 터였다.
치과의사라서 행복하다. 삶이 즐겁다. 환자들이 치료 전과 치료 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 볼 수 있어서 좋고, 내가 내 마음에 꽉 차게 잘할 수 있는 게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의 삶이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쁘다.
조정래 감독_ 국악 하는 아이들의 합창, 영화 ‘두레소리’
국악 하는 청소년들이 합창을 한다? 국악을 소재로 하면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개봉도 되기 전부터 주목받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2008년 처음으로 생긴 합창 동아리 ‘두레소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두레소리>다. 국악과 양악이 조화된, 아이들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내는 순수하고 풋풋한 합창, 그 과정 속에 드러나는 아이들의 갈등과 고민, 그리고 성장…. 실제 고수로 활동하며, 많은 국악 공연과 국악인들의 삶을 다큐로 담아왔던 조정래 감독은 늘 국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한다. 2009년 운명처럼 ‘두레소리’ 합창단과 만났다는 조정래 감독을 만나보았다. 글 최창원 사진 홍성훈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우리의 소리를 배우고자 국악의 미래들이 모여 있는 곳.
하지만 성적, 레슨, 대학 입시 이렇게 세 단어로 규정되는 고3 수험생의 현실은 다른 학교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요즘 누가 국악 듣냐? 아이돌 노래 듣지”라는 국악에 대한 자조적인 인식마저 팽배할 때, 고3 여름 방학, 이 학교에 합창단이 만들어진다. 생소할 수밖에 없는 서양 합창의 악보, 하지만 아이들은 국악의 장단을 넣어 부르는 합창에 빠지기 시작하고, 혼자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익숙했던 아이들은, 함께하는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간다. 개성 강한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그들만의 목소리로, 하나 되어 부르는 노래를 듣노라면 관객들 역시 친구, 부모, 선생님과의 갈등, 미래에 대한 고민들도 녹아들어 가는 듯하다.
전문 연기자가 아닌 실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출연, 저예산 영화의 투박함 속에서도 진정성만은 통한 것일까. 이 영화는 2011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등에 초청돼 큰 호평을 받았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이후, 20여 년만에 나온 희귀한 국악 소재 영화” “생얼 미인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국악이 생소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였구나 느끼게 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나도 꿈을 꾸게 됐다” 등 쏟아지는 호평 속에서 지금 최고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는 조정래 감독이다.
이런 반응 예상 못 하셨을 것 같은데, 이 영화의 어떤 점 때문일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 처음 내봤는데, 보면서 우시는 분들도 있고, 어떤 분은 아예 일어나질 못하시는 거예요. 왜 그럴까. 일단 음악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국 극장 개봉까지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감사하죠.
만들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함현상 음악 선생님에게 ‘두레소리’ 1기 아이들의 공연을 영상으로 담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처음 노래를 듣는데 소름이 돋더라고요. 국악아카펠라라고, 국악인들 사이에 그런 작업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부르니까 다르게 다가오는 겁니다. 나중에 함선생님이 “이 아이들 얘기가 영화 같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처음에 합창단 모집 공고를 냈는데 속 좀 썩이는 애들이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거칠고 결석도 많았던 아이들이 전공 음악에 대한 영감도 얻고, 생활 태도가 바뀌는 모습이 혁명처럼 느껴졌대요. 하지만 처음엔 영화로 찍는 것까지는, 확신이 없었어요. 저는 당시 단편영화로 데뷔를 했고, 다큐멘터리 작업만 해왔기 때문에 겁이 났지요. 일단 애들이 부른 노래 ‘이사 가는 날’을 영상으로 찍어 외국의 UCC 포털 사이트에 올렸는데 그 반응이 놀라웠어요. “이게 어떤 음악이냐?” “너무 좋다” “정말 눈물이 난다” 그렇게 감동하는 걸 보면서 이게 가능성이 있구나,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아이들과 촬영하셨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두레소리 1,2,3기의 이야기를 2,3,4기가 연기를 했어요. 더운 날씨에, 몇 번씩 반복해서 찍어야 했기 때문에 강행군이었지요. 힘든 부분은 있었지만, 실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거다 보니 영화 만드는 내내 축제 같았던 것 같아요. 처음엔 아이들과 친해지는 게 중요했어요. 그래서 리허설한다 해놓고 제가 먼저 북을 쳤더니,
애들이 깜짝 놀라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공감대가 형성된 거죠. 대본도 아이들 언어로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대본을 보더니 “우린 평소에 이렇게 말 안 해요” 하더라고요. 또 아이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단독 샷, 투 샷 빼고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놓고 다큐를 찍듯이 영화를 찍었어요. 애들 쉬고 있는데도 찍고, 리허설한다 하면서도 찍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화면이 흔들리거나 안 좋은 것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오히려 연기가 너무 잘 나온 거, 예쁘게 나온 건 다 버렸어요. 아이들의 리얼한 모습, 이상이 나온 것만 모아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 담고 싶고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청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요즘 청소년 하면, 청소년 문제, 비행 청소년, 하면서 인식 자체가 부정적인 게 많잖아요. 그렇지만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우리 어릴 때랑 똑같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은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어른들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알고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대화의 끈을 얻었으면 했습니다. 한편으로 어른들도 자신의 꿈을 되새김질 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영화 속에서 아름이를 키워온 이모가 “내가 왜 이러고 사는데, 너 때문인데…” 하잖아요.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게 살아왔죠. 하지만 이 영화 보면서, 나 이제라도 밸리댄스 배우러 갈래, 하는 이런 작지만 행복한 변화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1992년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에 입학한 조정래 감독은, 대학교 1학년 때 캠퍼스에서 우연히 여학생의 판소리를 듣고 국악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다. 그 소리가 정말 ‘살아 있는 소리’로 다가왔던 것. 영화 <서편제>에 감동받아 몇 번이나 보고 또 본 그는 극중 송화(오정해 분)의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속편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으며 민족영화연구회, 국악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이 사회에서 영화학도로서 해야 할 일, 국악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2001년부터는 인간문화재 성우향 명창의 다큐영상을 찍은 것을 계기로, 아예 북과 소리를 배우고 익혔다. 그 이후로는 판소리공장(共場) ‘바닥소리’에서 고수로 활동하며,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와 노숙자, 장애우 등 사회 곳곳에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 위로 공연을 하고 있다. 언제나 사회와 호흡하며, 낮은 바닥에서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길 꿈꾸며.
영화감독으로서의 본업도 잊지 않았다. 국악인들의 삶을 다큐로 제작하고, 국악클레이애니메이션 <청개구리 이야기>를 만드는 등 어떻게 하면 우리 음악과 소리를 대중들에게 많이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2009년 ‘두레소리’와 만났다. 처음에 제작비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찾아가는 제작, 투자 회사마다 시나리오조차 보지 않고 퇴짜를 놓았고, 우여곡절 끝에 대학 선배가 제작비 8,000만 원 전액을 투자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전체 제작 기간 1년 6개월, 촬영 기간 두 달에 걸쳐, <두레소리>가 만들어진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합창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고 합니다.
실제 동아리 지도 교사인 함현상 음악감독님이 직접 출연하고 음악도 만들었기 때문에 더 감동적인 거 같아요. 특히 주제곡 <두레소리 이야기>는 두레소리 영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어요. 전형적인 서양식 합창곡이지만, 초반부의 선율은 중요무형문화재 1호인 종묘제례악의 선율을 차용하였고요. 중반부 이후에 판소리창법에 의한 솔로를 넣어, 새로운 양식의 음악적 효과를 보이고자 했다고 해요. 원래부터 국악은, 예를 들어 판소리는 혁명적인 당시의 이야기들이었거든요. 함현상 선생님이 나중에 꼭 하고 싶은 게, 국악 안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해요. 학생 주임한테 혼난 이야기, 남자 친구랑 싸운 이야기. 그런 것들이 자꾸 나오면 관객들도 아이들 소리를 듣지 않을까. 애들도 자신들의 전공에 대한 고민도 많았는데, 스스로 우리가 더 좋은 음악을 해야 한다,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두레소리가 6기까지 있는데, 학교의 배려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고요, ‘두레소리’ 말고도 자치 동아리가 여러 개 생겼대요. 이 영화를 통해서 아이들이 또 다른 꿈을 꾸게 된 것이 감사하죠.
이 영화를 통해 감독님 스스로도 어떤 변화를 겪으셨나요?
일적으로는 과거에는 바쁘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집중하는 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또 원래 제 꿈이, 되게 역설적이지만 꿈이라는 단어 자체를 잃지 않는 게 꿈이었거든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모든 것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니, 그저 꿈을 잃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게 가장 큰 가치 아닌가. 결혼하고 더욱 그걸 많이 느꼈는데요, 영화를 찍으면서 더 구체적이 된 거 같아요. 동료와 아내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재밌는 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즐겁게 살고 싶어요.(웃음)
“소띠 생이라 그런지 일복도 참 많다”는 그는 <두레소리>를 찍은 후로도 크고 작은 활동을 많이 했다. 2011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중요무형문화재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을 연출했고, 요즘은 국내 최초의 독립 야구팀 ‘고양원더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앞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한을 국악 등으로 풀어주는 영화, 조선 시대 광대 이야기를 다룬 사극 등도 준비 중이라니, 일복 많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아는 그로서는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다.
‘영화감독’과 ‘고수’ 다 떠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제가 만났던 사람들한테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예전에는 헛된 욕망을 꿈꿨죠. 사람을 좋아하고, 많은 만남을 갖다 보니 전화번호부가 엄청났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서 다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서 망가지기 시작했죠. 나보다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재작년쯤 갑자기 깨침처럼 마음에 닿는 게 있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럼에도 왜 이렇게 눈치를 보면서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처음에는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했었는데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점점 안 중요해졌던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사람들 시선의 노예가 되어버린 나를 되찾고 싶었어요. 그걸 영화를 찍으면서 찾아간 것 같애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에 매이기보다는 영화에 미친 듯이 집중했으니까요. 지금은 내 아내가 인정해주고 좋아해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애요.
힘들고 지칠 때 함께 웃으며 어깨를 걸고 서로의 희망을 노래해
너와 내가 우리 모두 어울린 소리가 잃었던 나의 꿈을 샘솟게 하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아파도 우리가 가야 할 이 길을
우리의 노래가 우리의 장단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고
잃었던 우리 꿈을 샘솟게 하네
‘두레소리 이야기’(작사 / 작곡 함현상) 중에서
“앞으로도 언제나 열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낮은 소리나마 내보고 싶다”는 조정래 감독. 과연 그가 내는 다음의 소리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예상보다 그 모습을 확인할 날이 빨리 올 것 같다. 세상을 향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의 신념은 확고했고, 그의 갈 길 또한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양악 음악 선생님과 국악고 학생들이 만났을 때 처음엔 어색함과 삐걱거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새 ‘우리가 하나 되는 꿈을 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관심 갖고 조금 더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하나가 되어가지요. 우리 또한 그렇게 세상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