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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살아 있는 친환경 부케

어떻게 이런 생각을?

처음에는 옥수수, 한지 등 자연 소재의 섬유에 표백과 형광 처리를 하지 않는 등 친환경 웨딩드레스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미디어를 통해 알려지면서 결혼식 전반을 친환경으로 바꿔달라는 문의가 들어왔다. 그래서 ‘콩기름 인쇄 청첩장’ ‘화분 꽃 장식’ ‘공정신혼여행’ 등 하나 둘씩 친환경으로 바꿔 보던 중 부케도 한 번 쓰고 버리지 않고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뿌리가 살아 있는 부케를 플로리스트의 도움을 받아 제작하게 되었다.

장점은?

우선 버리지 않고 계속 기를 수 있어서 자연을 해치지 않고, 2~3일 정도 심지 않고 물을 뿌려만 줘도 되는 식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식물 키우기 어려워하는 사람도 쉽게 가꿀 수 있다. 일반 부케와 비용은 비슷하지만 친환경 부케는 예식 후에 분리해서 심었을 때 작은 화분으로 10개 정도 만들어 오래 기를 수 있기 때문에 더 경제적이다.

주변의 반응은?

특히 어른들께서 많이 좋아하신다. 보통 부케는 친구에게 던져서 선물로 주는데 친환경 부케는 촬영 후 직접 가져가는 신부님들이 많다. 식물에 물을 줄 때마다 결혼할 때의 추억을 생각할 수 있어서 더 소중히 여겨진다고들 한다.

하고 싶은 말은?

친환경 결혼식이 너무 유난스러워 보일까 봐 또는 비쌀까 봐 고민하시는 분들이 많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금 더 환경을 생각하게 되고 하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결혼식이 아닌 신랑 신부가 직접 만들어가는 결혼식이라는 점에서 그 과정 자체가 좋은 추억이 된다. 요즘 친환경 결혼식이 알려지면서 지방에서도 요청이 오는데 아직 여력이 부족해 못 해드리는 경우가 있다. 늦어도 내년 초에는 지방에서도 친환경 결혼식을 할 수 있도록  계획 중이다.

만든 사람 이경재 디자이너. 사회적기업 (주)대지를위한바느질 대표 www.ecodress.net

‘SBS-TV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

하롤트 뮐러 원작의 연극 ‘로젤’에는 아주 평범하면서도 인상적인 대사가 있다. 기구한 인생을 살아온 여주인공 로젤이 한 친구를 만나 모든 걸 털어놓은 후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정말 고맙다. 너 같은 사람이 꼭 하나 필요했었어. 아무도, 단 한 번도 지금까지 내 진실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누군가에게 내 진실을 다 말하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아무것도 없어. 너한테 다 말하고 나니까 너무 행복해. 정말 살 것 같아!”

놀랍게도 그녀에게 있어 가장 큰 고통은 아무도 자신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죽음보다 깊었던 사랑의 상처와 배신의 아픔도,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만큼 고통스런 일은 아니었다.

진정한 힐링, 즉 마음의 치유는 작위적인 설정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로젤처럼 우리의 가슴속에는 털어놓지 못한 말들이 가득 쌓여 있다. 아무도 귀 기울여 들어주지 않았기에, 쌓아두고 있던 말들은 점점 마음의 병이 된다. 따라서 그 말들을 밖으로 끌어낼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치유인 것이다. ‘힐링캠프’ 제작진은 어느 순간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달았다.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소, 즉 촬영 장소를 게스트가 임의로 정할 수 있게 한 것부터가 대단한 파격이다. 게스트는 가장 마음 편한 장소를 스스로 정하고, 마치 친한 친구에게 하듯 가슴속의 말을 털어놓는다. MC들은 이따금씩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게스트의 말에 차분히 귀를 기울인다. 세 명 MC 또한 게스트가 마음 편히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게 만드는 최상의 조합이다. 이경규의 넉넉한 연륜은 인생 선배의 든든함을, 김제동의 섬세한 배려는 좋은 친구의 고마움을 느끼게 해준다. 게다가 진지하면서도 엉뚱 발랄한 한혜진은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 하기 어려운 이야기도 부담 없이 꺼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

최근 ‘힐링캠프’에 출연한 게스트들은 자신의 마음을 치유받고 돌아갔을 뿐 아니라, 보고 듣는 이의 마음까지도 치유해 주었다. 자기 잘못으로 빚을 지게 된 것이 아닌데도 지난 20년 동안 빚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신은경의 진실한 속사정과 긍정적 태도는, 억울한 이유로 경제적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따스한 격려가 되어줄 수 있었다. 데뷔 초부터 높은 인기만큼이나 루머와 차가운 시선에 시달려왔던 이효리 역시 진솔한 내면을 털어놓음으로써 상당 부분의 오해를 벗을 수 있었다. 아프리카 어린이들과의 1:1 결연을 촉구했던 차인표의 경우는 수많은 타인의 힐링까지 이루어낸, 상당히 특이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치유받은 사람, 힐링에 성공한 사람은 그 자체로서 빛을 내뿜기 때문에 마치 등불과 같다. 등불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세상이 더욱 밝아질 것은 자명한 이치다.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의 말을 우리가 진심으로 들어준다면, 상대 또한 나의 말에 귀 기울여주지 않겠는가? 어쩌면 이 어둡고 험한 세상을 밝히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아주 작은 일일지 모른다. ‘힐링캠프’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또 하나의 소중한 진리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무럭무럭 ‘하늘빛 꿈’이 자랍니다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 병풍도에는 동화 속 그림처럼 아름다운 하얀 학교가 하나 있습니다. 전교생은 모두 3명입니다.
사진, 글 김선규

학교에서 키우는 하얀 강아지 ‘똘이’가 교실 문틈으로 수업을 엿듣고 있네요. 정말 동화 속 이야기처럼 머지않아 똘이도 구구단을 외울 것 같습니다.

주동기 총각 선생님은 “이곳 아이들은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하고, 뭘 갖고 싶다고 떼쓰는 일이 거의 없다”며 자랑합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5학년 오다애와 2학년 오준영, 1학년 백예닮 어린이는 천사의 눈망울과 미소를 가졌습니다.

학원은 눈을 씻고 봐도 없습니다. 방과 후 활동이라면 주동기 선생님이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섬 한 바퀴를 걸어서 도는 것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 고사리도 따고 예쁜 야생화 이야기도 한다는군요. 저 외딴 곳 작은 섬마을에도 천사들의 하늘빛 꿈은 자라고 있었습니다.

2008년 5월. 전남 신안군 병풍도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한옥의 창문_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소통한다

지촌종택. 경북 안동_ 창문을 여니 맑은 바람 몇 줌이 봄기운을 전한다. 밖으로 산과 강이 그려지고, 나지막이 들어온 햇살은 선비 정신을 비춘다.

한옥에서는 창과 문의 구별이 없다. 그래서 창문이다. 창문은 안과 밖을 연결한다. 소통의 통로이다. 특히 한옥의 백미는 안에서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것이다. 분합문이든 바라지창이든 광창이든 크고 작은 창문을 통해 세상 밖을 보면 다양한 자연과 인간 삶의 궤적이 고스란히 펼쳐진다. 문틈 사이로 아기자기한 장독들이 눈에 들어오고, 여름이면 붉은빛을 토해내는 백일홍이 바람에 춤을 추고, 가을이면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들이, 겨울엔 하얀 눈 세상이 펼쳐진다. 그것은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할 만큼이나 아름답다.  사진, 글 이태훈

선교장. 강원도 강릉_ 현존하는 한옥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행랑채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는 3개의 중문이 인상적이다.

남평문씨본리세거지. 대구 달성_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라는 말에 등장하는 봉창으로, 주로 사랑채에 만들어졌다. 사랑채는 남자들의 공간으로, 겨울철에 사람들이 모이면 방 열기가 뜨거워진다. 이때 창문을 열면 너무 춥기 때문에 작은 봉창을 열어 통풍을 시켰다.

이남규 고택. 충남 예산_ 
부엌에 난 광창이다. 광창은 창호지를 바르지 않고, 문살도 수직으로 아주 단순하다. 광창을 통해 본 안채의 이미지가 색다르다.

초간정. 경북 예천_ 대청에 난 바라지창이다. 겨울철 칼바람이 매서운 북서풍을 막기 위해 창호지가 아닌 나무로 창문을 만든 것이 특징이다.

우리 한옥은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를 많이 따르고 있다. 특히 ‘창문(窓門)’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이다. 외국 건축물에서는 창(Window)과 문(Door)은 엄격하게 역할과 기능이 다르며, 명칭도 각각 다른 반면, 우리 한옥에서 창문은 때로는 창이 되고, 문이 되기도 한다. 대개 창은 채광과 공기 순환을 담당하고 문은 사람들이 드나드는데, 우리 한옥의 창문은 서양 건축에서 말하는 창과 문의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이다. 좌우상하 대칭으로 만들어진 창문들을 밖에서 보면 균제의 미와 절묘한 공간의 분할이라는 선현의 지혜를 느낄 수 있다.

대부분 오래된 한옥에는 종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 많다. 그래서 한옥을 촬영하다 보면 종손이나 종부님들과 친해지지 않으면 사진 한 장 찍기가 쉽지 않다. 봄이면 나무를 심어주거나, 가을걷이 때는 호박이나 쌀자루 등을 광으로 날라주기도 한다. 때론 홀로 사시는 종부님과 차 한잔 하며 말벗도 되어준다. 종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 한옥의 아름다움을 새삼 느끼게 되고, 그 집안의 가풍과 역사를 함께 배울 수 있어 좋다.

죽헌고택. 전남 장흥_
오래전 한옥은 창문을 열어야만 밖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100년 전쯤부터 문에 유리를 넣어 평소에도 밖을 볼 수 있도록 기능을 추가한 한옥들이 생겼다.

매산종택 산수정. 경북 영천_ 맨 위에 다락문이 있고, 그 아래 왼쪽에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창문이, 그 옆에 채광과 통풍만의 기능을 가진 작은 창이 하나 더 나 있는 것이 이색적이다.

운강고택. 경북 청도_ 유리는 빛을 많이 통과시켜 방 안을 환하게 만들어주지만 우리 한옥의 창문은 창호지를 한 번 거쳐서 빛이 들어오기 때문에 조금 어둡지만 굉장히 운치 있는 분위기를 연출한다. 밝음보다 은은한 멋을 강조한 우리 한옥의 창문이다.

김동수 가옥. 전북 정읍_ 크고 작은 다양한 창문들이 많다. 천장까지 들어 올려진 분합문을 비롯해 삼면으로 둘러싸인 미닫이문들이 한옥의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언제나 자연과 소통하게 할 수 있는 구조가 바로 한옥의 진면목. 덕분에 옛 선비들은 창문을 여는 순간 자연과 하나 되는 ‘물아일체(物我一體)’ 사상을 구현하고, 지혜와 용기를 배울 수 있었다. 창문은 세상의 변화를 깨닫게 하고, 닫히고 열리는 문의 기능처럼 때로는 절제와 때로는 개방으로 사람을 대하게 하고, 편협하지 않고 균형 잡힌 사람으로서의 역할을 다해야 함을 상징했다. 한옥의 창문은 그렇게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으며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 사람과 진리를 이어주는 숨길이었다.

이태훈 사진가는 1970년 강원도 태백 생으로 <스포츠서울>과 <월간조선>에서 12년간 여행전문기자로 활동했으며, 현재는 여행칼럼니스트,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0년부터 10여 년간 전국에 흩어진 한옥을 찾아다니며 우리 한옥에 대한 고증과 사실적 기록, 그리고 종갓집들이 가진 독특한 역사성에 주목하며 사진을 담아왔으며, 저서로는 <뷰티풀 코리아> <하늘이 내린 선물>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 100> 등이 있습니다.

색종이 놀이

미술 시간입니다. 이번 시간 활동은 ‘색종이를 오려 모양 꾸미기’입니다. 형형색색 색종이를 교사용 책상에 펼쳐 놓고 은근히 아이들의 창작 욕구를 자극합니다. 당장 제 손에 없는 것은 언제나 샘나는 아홉 살 눈망울들이 초롱초롱 예쁩니다.

색종이 한 장을 집어 올려, 이리저리 마음 가는 대로 접습니다. 그리고 싹둑싹둑 오려냅니다. 그런 다음에 활짝 펼치니 정사각형 색종이가 멋진 문양으로 바뀌었습니다. 꼬마들의 탄성과 박수가 쏟아집니다.

이번에는 아이들 차례입니다. 아홉 살 인생들에게 당부합니다. 제발 덤비지 말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멋진 작품을 만들어 보자고. 하지만 말 떨어지기 무섭게 한 아이가 앞으로 나옵니다. 그 사이를 못 참고 뎅강뎅강 오려버린 색종이를 새것으로 바꾸어 달랍니다. 이럴 때는 본보기로써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지만, 미술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았습니다.

그래서 ‘옛다!’ 하고 인심을 씁니다.

잠시 뒤, 또 한 아이가 나옵니다. “이렇게 하면 맞나요?” “저렇게 하면 맞나요?” 연거푸 질문을 합니다. 하나하나 가르치고 수정해줍니다. “잎사귀 모양은 이렇게 자르면 되나요?” “저렇게 자르면 어떨까요?” 질문이 끝이 없습니다. 너무 소중한 색종이라서 선뜻 가위질 못 하는 참새가슴입니다. 급기야 손가락이 아프다며 가위질을 못 한다고 엄살을 피웁니다. 이러다가는 내가 다 해줄 판입니다. 그때 똘똘한 아이가 나서서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이 도와주면 감점되지요? 그렇죠? 선생님.”

아주 감사하고 적절한 질문입니다. 선생님은 더 이상 도와주지 않을 테니 각자 스스로 노력하라고 선언합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제일 처음에 나왔던 아이가 손을 내밉니다.

“선생님, 망쳤어요. 한 장만 더 주세요.” “안 돼! 넌 벌써 두 장 다 썼어!”

아이는 멈칫하며 손길을 거둡니다. 그리고 입을 삐쭉거리면서 교탁 위의 색종이와 나를 번갈아 봅니다.

슬프디슬픈 눈에서 금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습니다. 아무리 공공의 약조지만 색종이 한 장 때문에 아이를 울릴 수 없습니다. 필요한 색깔로 딱 한 장만 더 가져가라니까 얼른 초록색 색종이를 집습니다. 아이는 색종이 한 장을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며 저 혼자 발레를 하듯 빙그르르 한 바퀴 돕니다.

“나는 초록색이 좋아. 초록색이 좋아.” 작은 종이 한 장으로 그렇게 행복해할 수 없습니다. 색종이를 그냥 종이가 아니라 고운 빛깔로 보기 때문입니다. 꼬마들한테 용기를 얻습니다. 네모반듯한 세상살이에 주눅 들지 않고, 햇빛이 그려내는 세상 색깔에 무심하지 않으면, 내 일상 속의 고운 문양 하나를 거뜬히 오려낼 수 있을 듯의지가 생깁니다.   글 최형식

이웃과 내가 모두 행복해지는 ‘치과’

홍수연 치과의사, 서울이웃린치과 원장

서울이웃린치과에서는 토요일이면 저소득층을 위한 무료 진료를 한다.
무료 진료에 힘을 기울일수록 좋은 시설도 갖추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 병원에는,
개원 당시 전국에 5대밖에 없었다는 고가의 CT 촬영기도 있다.
비싼 치료비 때문에 치과 치료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200여 명의 환자들이,
틀니, 임플란트, 잇몸 치료 등을 받고 다시 웃음을 찾았다.
가난한 사람들이 돈 때문에 아픔 참는 일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홍수연 원장.
“내가 살고 싶은 어떤 세상이 있다면, 내가 먼저 그렇게 살아보자” 다짐했다는
그녀의 이야기. <편집자주>

중학생이던 1980년 5월, 내가 살던 광주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그때까지 나는 공부 잘한다는 칭찬이 제일인 줄 알았다. 그런데 동네에서 명문 대학에 진학한 삼촌, 고모들이 어디론가 잡혀가거나 소식이 끊겨 버렸다. 씩씩했던 동네 할머니들은 금쪽같은 자식이 옥에 갇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임을 당하자, 한 분 한 분 앓아누우시더니 결국에는 돌아가셨다. 10·26과 5·18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시간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내가 사람들의 아픔을 위로해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이것이 아마도 내가 나 외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게 된 첫 경험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그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공부밖에 없었다. ‘그래, 어쨌든 공부를 잘하자. 공부해서 힘없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 공부해서 남 주자.’ 그렇게 입시 준비를 했다.

대학 진학을 앞둔 어느 날, 아버지가 진지하게 물으셨다. “어차피 이런 시대에 대학을 제대로 다닌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혹시 시대가 좋아진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는 게 어떻겠니?” 그것은 내 생각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1985년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의 대학 시절은 집회와 시위의 연속이었다. 우리에게 내일이란 그저 살아남는 것이었고, 군사독재는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1987년 6월, 한국 사회는 거대한 시위의 물결에 휩쓸렸다. 그리고 여름이 지나면서 민주화 시위의 중심은 넥타이 부대와 노동자 대투쟁으로 이동하였다. 2학기가 되어 학교로 돌아온 나는 고민과 회의를 거듭했다. 과연 이런 교과목들이 민중의 고됨을 해결하는 데 무슨 도움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갔다. 열악한 현장 생활, 2년 동안 나름 공장의 여동생들과 즐겁게 지냈지만, 그것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그래, 공부해서 남 주자.’ 중학교 시절의 다짐을 다시 떠올렸다. 치과 공부를 하면서 가슴 아팠던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필수적인 치과 치료의 많은 부분이 건강보험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 ‘먹는 것’. 이를 가능하게 하는 수준의 진료에 수백만 원씩 갖다 부어야 하다니! 평소 내는 세금, 건강보험료, 이런 걸로 최소한의 실질적 보장이 이뤄질 수는 없을까?

그래서 치과대학 졸업 후 보건학, 공공정책 등을 공부했다. 하지만 열심히 연구해서 낸 정책들은, 번번이 정권에 의해, 관료들에 의해 무시당했다. 나는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했다.

그때가 내 나이 갓 마흔이 넘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내 삶을 돌아보았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가 늘 불편했다. 마치 이 세상에 빚 같은 걸 남겨놓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온 힘은 이웃과 세상에 있었다.

나는 어린 시절 병약했지만 온 동네 할머니들이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함께 키워주신 덕분에 큰 탈 없이 잘 웃고 잘 노는 아이로 성장할 수 있었다. 할머니들의 아낌없는 사랑이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큰 힘이 된 것이다. 그 이웃들과,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 보자고 마음먹었다. 이것이 다른 누군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행복해지기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

그즈음 간디가 자신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인정했던 제자, 인도의 비노바 바베의 말이 가슴을 쳤다. ‘당신이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지금부터 그 꿈꾸는 세상에 걸맞은 모습으로 살아라.’

그 후 지역 어린이집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수백 명의 아이들에게 무료 치과 진료와 교육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선의만 갖고 무료 진료를 하는 것은 자칫하면 일회적인 행사가 되기 쉬웠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아예 ‘공익형 병원’을 만드는 것이었다.

2009년 1월, 우여곡절 끝에 여러 분들의 도움으로 평일에는 치과종합병원, 토요일에는 무료진료병원으로 운영되는 치과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토요일이면 약 20여 개의 사회단체들에서 의뢰하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무료 진료를 한다.

이가 아프면 온몸이, 마음까지 아파지기 쉽다. 고가의 치료비 때문에 치과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 저소득층 환자들은 더욱 그러하다. 주말엔 장애인, 독거노인, 새터민, 외국인노동자 등 많은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다. 치료비 때문에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들의 목표는 부디 씹는 기능만이라도 회복하여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번은 설암(舌癌)으로 인해 혀는 물론 구강 기관이 모두 상실된 장애인이 온 적이 있었다. 그에게는 단 한 개의 치아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혀에 발생하는 암인 설암은 초기에 발견하면 방사선요법을 통해 쉽게 치료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환자는 주변의 무관심과 어려운 환경으로 인해 그 시기를 놓치고, 오랜 시간 방치된 터였다.

치료의 과정은 길고 길었다. 환자는 일주일에 한 번씩 복잡하고 고통스런 치료를 받았다. 틀니를 걸 수 있는 뼈조차 없는 환자의 잇몸에 티타늄으로 만든 인공 치근을 삽입하고, 잘 아물기를 기다렸다가 위와 아래의 완전 틀니를 제작했다. 틀니를 착용한 후에도 미관상 적합하게 되었는지, 씹는 데 무리가 없는지 적응 기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6개월 후, 음식물을 씹는 것조차 불가능했던 환자가 이제 깍두기도 씹을 수 있게 되었다며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분처럼 치료를 마친 분들이, 잘 드시게 되었다며 활짝 웃으실 때처럼 행복한 순간도 없다. 고맙다며 삶은 감자, 옥수수를 가져오시는 할머니, 한국에서 떡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 있다며 직접 만든 떡을 포장해 오는 외국인노동자들의 손길에서 살아가는 정을 느낀다.

치과의사라서 행복하다. 삶이 즐겁다. 환자들이 치료 전과 치료 후에 어떻게 변화하는지 볼 수 있어서 좋고, 내가 내 마음에 꽉 차게 잘할 수 있는 게 있고 그 결과 다른 사람의 삶이 좋은 쪽으로 변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아 기쁘다.

홍수연 원장은 서울대 치과대학, 서울대 보건대학원, 단국대 대학원 예방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교(UNC) 보건대학원, 미국 교정치과의사협회 정회원, 런던대학교(UCL) 연구교수를 역임했습니다. 현재 건강사회를 위한 치과의사회, 베트남평화의료연대, 건강과 대안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조정래 감독_ 국악 하는 아이들의 합창, 영화 ‘두레소리’

국악 하는 청소년들이 합창을 한다? 국악을 소재로 하면 고리타분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개봉도 되기 전부터 주목받고 있는 영화가 있다. 바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2008년 처음으로 생긴 합창 동아리 ‘두레소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두레소리>다.  국악과 양악이 조화된, 아이들의 목소리가 하나 되어 내는 순수하고 풋풋한 합창, 그 과정 속에 드러나는 아이들의 갈등과 고민, 그리고 성장…. 실제 고수로 활동하며, 많은 국악 공연과 국악인들의 삶을 다큐로 담아왔던 조정래 감독은 늘 국악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한다. 2009년 운명처럼 ‘두레소리’ 합창단과 만났다는 조정래 감독을 만나보았다.  최창원  사진 홍성훈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우리의 소리를 배우고자 국악의 미래들이 모여 있는 곳.

하지만 성적, 레슨, 대학 입시 이렇게 세 단어로 규정되는 고3 수험생의 현실은 다른 학교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요즘 누가 국악 듣냐? 아이돌 노래 듣지”라는 국악에 대한 자조적인 인식마저 팽배할 때, 고3 여름 방학, 이 학교에 합창단이 만들어진다. 생소할 수밖에 없는 서양 합창의 악보, 하지만 아이들은 국악의 장단을 넣어 부르는 합창에 빠지기 시작하고, 혼자만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익숙했던 아이들은, 함께하는 노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간다. 개성 강한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그들만의 목소리로, 하나 되어 부르는 노래를 듣노라면 관객들 역시 친구, 부모, 선생님과의 갈등, 미래에 대한 고민들도 녹아들어 가는 듯하다.

전문 연기자가 아닌 실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학생들과 선생님들의 출연, 저예산 영화의 투박함 속에서도 진정성만은 통한 것일까. 이 영화는 2011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 제천국제음악영화제 등에 초청돼 큰 호평을 받았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 이후, 20여 년만에 나온 희귀한 국악 소재 영화” “생얼 미인을 본다면 이런 느낌일 것이다” “국악이 생소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였구나 느끼게 되었다” “이 영화를 통해서 나도 꿈을 꾸게 됐다” 등 쏟아지는 호평 속에서 지금 최고의 행복을 만끽하고 있다는 조정래 감독이다.

이런 반응 예상 못 하셨을 것 같은데, 이 영화의 어떤 점 때문일까요?

저도 깜짝 놀랐어요.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 처음 내봤는데, 보면서 우시는 분들도 있고, 어떤 분은 아예 일어나질 못하시는 거예요. 왜 그럴까. 일단 음악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전국 극장 개봉까지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감사하죠.

만들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함현상 음악 선생님에게 ‘두레소리’ 1기 아이들의 공연을 영상으로 담아달라는 부탁을 받았어요. 처음 노래를 듣는데 소름이 돋더라고요. 국악아카펠라라고, 국악인들 사이에 그런 작업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부르니까 다르게 다가오는 겁니다. 나중에 함선생님이 “이 아이들 얘기가 영화 같습니다” 그러는 거예요. 처음에 합창단 모집 공고를 냈는데 속 좀 썩이는 애들이 온 모양입니다. 그런데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거칠고 결석도 많았던 아이들이 전공 음악에 대한 영감도 얻고, 생활 태도가 바뀌는 모습이 혁명처럼 느껴졌대요. 하지만 처음엔 영화로 찍는 것까지는, 확신이 없었어요. 저는 당시 단편영화로 데뷔를 했고, 다큐멘터리 작업만 해왔기 때문에 겁이 났지요. 일단 애들이 부른 노래 ‘이사 가는 날’을 영상으로 찍어 외국의 UCC 포털 사이트에 올렸는데 그 반응이 놀라웠어요. “이게 어떤 음악이냐?” “너무 좋다” “정말 눈물이 난다” 그렇게 감동하는 걸 보면서 이게 가능성이 있구나, 확신을 가지게 됐어요.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아이들과 촬영하셨는데,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두레소리 1,2,3기의 이야기를 2,3,4기가 연기를 했어요. 더운 날씨에, 몇 번씩 반복해서 찍어야 했기 때문에 강행군이었지요. 힘든 부분은 있었지만, 실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는 거다 보니 영화 만드는 내내 축제 같았던 것 같아요. 처음엔 아이들과 친해지는 게 중요했어요. 그래서 리허설한다 해놓고 제가 먼저 북을 쳤더니,

<두레소리>의 주인공 김슬기, 조아름. 김슬기 양은 7살 때부터 국악을 시작했고, 0살 때 드라마 ‘대장금’의 주제가 ‘오나라’를 불러 주목받기도 했으며, 현재 국립전통예고 3학년이다. 조아름 양은 올해 전통예고를 졸업하고 중앙대 국악대학 1학년에 재학 중이다.

애들이 깜짝 놀라면서 마음의 문을 열고 공감대가 형성된 거죠. 대본도 아이들 언어로 많이 바뀌었어요. 아이들이 대본을 보더니 “우린 평소에 이렇게 말 안 해요” 하더라고요. 또 아이들이 전문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단독 샷, 투 샷 빼고는 여러 대의 카메라를 놓고 다큐를 찍듯이 영화를 찍었어요. 애들 쉬고 있는데도 찍고, 리허설한다 하면서도 찍고. 그러다 보니 결과적으로 화면이 흔들리거나 안 좋은 것들이 많아요. 그렇지만 오히려 연기가 너무 잘 나온 거, 예쁘게 나온 건 다 버렸어요. 아이들의 리얼한 모습, 이상이 나온 것만 모아놓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영화에 담고 싶고 영화를 통해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것은 무엇이었나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청소년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어요. 요즘 청소년 하면, 청소년 문제, 비행 청소년, 하면서 인식 자체가 부정적인 게 많잖아요. 그렇지만 아이들의 세계로 들어가 보면 우리 어릴 때랑 똑같거든요. 그래서 아이들은 이 영화를 보고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어른들도 있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알고 아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대화의 끈을 얻었으면 했습니다. 한편으로 어른들도 자신의 꿈을 되새김질 할 수 있었으면 했어요. 영화 속에서 아름이를 키워온 이모가 “내가 왜 이러고 사는데, 너 때문인데…” 하잖아요. 대부분의 어른들이 그렇게 살아왔죠. 하지만 이 영화 보면서, 나 이제라도 밸리댄스 배우러 갈래, 하는 이런 작지만 행복한 변화들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1992년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에 입학한 조정래 감독은, 대학교 1학년 때 캠퍼스에서 우연히 여학생의 판소리를 듣고 국악에 빠져들게 되었다 한다. 그 소리가 정말 ‘살아 있는 소리’로 다가왔던 것. 영화 <서편제>에 감동받아 몇 번이나 보고 또 본 그는 극중 송화(오정해 분)의 뒷이야기가 너무 궁금해 속편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으며 민족영화연구회, 국악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이 사회에서 영화학도로서 해야 할 일, 국악의 미래에 대해 고민했다.

2001년부터는 인간문화재 성우향 명창의 다큐영상을 찍은 것을 계기로, 아예 북과 소리를 배우고 익혔다. 그 이후로는 판소리공장(共場) ‘바닥소리’에서 고수로 활동하며, 나눔의 집 위안부 할머니와 노숙자, 장애우 등 사회 곳곳에 어려운 이들을 찾아가 위로 공연을 하고 있다. 언제나 사회와 호흡하며, 낮은 바닥에서 삶을 노래하는 사람이길 꿈꾸며.

영화감독으로서의 본업도 잊지 않았다. 국악인들의 삶을 다큐로 제작하고, 국악클레이애니메이션 <청개구리 이야기>를 만드는 등 어떻게 하면 우리 음악과 소리를 대중들에게 많이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중 2009년 ‘두레소리’와 만났다. 처음에 제작비를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찾아가는 제작, 투자 회사마다 시나리오조차 보지 않고 퇴짜를 놓았고, 우여곡절 끝에 대학 선배가 제작비 8,000만 원 전액을 투자해주기로 했다. 그렇게 전체 제작 기간 1년 6개월, 촬영 기간 두 달에 걸쳐, <두레소리>가 만들어진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합창 소리가 심금을 울린다고 합니다.  

실제 동아리 지도 교사인 함현상 음악감독님이 직접 출연하고 음악도 만들었기 때문에 더 감동적인 거 같아요. 특히 주제곡 <두레소리 이야기>는 두레소리 영화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여 만들었어요. 전형적인 서양식 합창곡이지만, 초반부의 선율은 중요무형문화재 1호인 종묘제례악의 선율을 차용하였고요. 중반부 이후에 판소리창법에 의한 솔로를 넣어, 새로운 양식의 음악적 효과를 보이고자 했다고 해요. 원래부터 국악은, 예를 들어 판소리는 혁명적인 당시의 이야기들이었거든요. 함현상 선생님이 나중에 꼭 하고 싶은 게, 국악 안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다고 해요. 학생 주임한테 혼난 이야기, 남자 친구랑 싸운 이야기. 그런 것들이 자꾸 나오면 관객들도 아이들 소리를 듣지 않을까. 애들도 자신들의 전공에 대한 고민도 많았는데, 스스로 우리가 더 좋은 음악을 해야 한다,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두레소리가 6기까지 있는데, 학교의 배려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고요, ‘두레소리’ 말고도 자치 동아리가 여러 개 생겼대요. 이 영화를 통해서 아이들이 또 다른 꿈을 꾸게 된 것이 감사하죠.

이 영화를 통해 감독님 스스로도 어떤 변화를 겪으셨나요?  

일적으로는 과거에는 바쁘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스타일이었는데 영화를 찍으면서 집중하는 법을 배운 것 같습니다. 또 원래 제 꿈이, 되게 역설적이지만 꿈이라는 단어 자체를 잃지 않는 게 꿈이었거든요. 어차피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고, 모든 것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것이니, 그저 꿈을 잃지 않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게 가장 큰 가치 아닌가. 결혼하고 더욱 그걸 많이 느꼈는데요, 영화를 찍으면서 더 구체적이 된 거 같아요. 동료와 아내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내가 재밌는 거,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즐겁게 살고 싶어요.(웃음)

“소띠 생이라 그런지 일복도 참 많다”는 그는 <두레소리>를 찍은 후로도 크고 작은 활동을 많이 했다. 2011년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의뢰를 받아 중요무형문화재에 대한 다큐멘터리들을 연출했고, 요즘은 국내 최초의 독립 야구팀 ‘고양원더스’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앞으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한을 국악 등으로 풀어주는 영화, 조선 시대 광대 이야기를 다룬 사극 등도 준비 중이라니, 일복 많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를 아는 그로서는 참으로 행복한 날들이다.

 

 ‘영화감독’과 ‘고수’ 다 떠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다소 현학적으로 들릴 수도 있는데, 제가 만났던 사람들한테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예전에는 헛된 욕망을 꿈꿨죠. 사람을 좋아하고, 많은 만남을 갖다 보니 전화번호부가 엄청났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모든 사람들에게서 다 사랑받고 싶은 거예요. 그러면서 망가지기 시작했죠. 나보다는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를 신경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재작년쯤 갑자기 깨침처럼 마음에 닿는 게 있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럼에도 왜 이렇게 눈치를 보면서 아등바등 살아야 할까. 처음에는 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이 중요했었는데 아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점점 안 중요해졌던 거예요. 그래서 가능하다면 사람들 시선의 노예가 되어버린 나를 되찾고 싶었어요. 그걸 영화를 찍으면서 찾아간 것 같애요. 많은 사람들의 우려와 걱정에 매이기보다는 영화에 미친 듯이 집중했으니까요. 지금은 내 아내가 인정해주고 좋아해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거 같애요.

힘들고 지칠 때 함께 웃으며 어깨를 걸고 서로의 희망을 노래해
너와 내가 우리 모두 어울린 소리가 잃었던 나의 꿈을 샘솟게 하네
때로는 힘들고 때로는 아파도 우리가 가야 할 이 길을
우리의 노래가 우리의 장단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달래고
잃었던 우리 꿈을 샘솟게 하네
‘두레소리 이야기’(작사 / 작곡 함현상) 중에서

“앞으로도 언제나 열정적으로, 하나가 되는 세상을 만드는 데 낮은 소리나마 내보고 싶다”는 조정래 감독. 과연 그가 내는 다음의 소리는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예상보다 그 모습을 확인할 날이 빨리 올 것 같다. 세상을 향해 어떤 말을 해야 할지, 그의 신념은 확고했고, 그의 갈 길 또한 너무나 분명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양악 음악 선생님과 국악고 학생들이 만났을 때 처음엔  어색함과 삐걱거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느새 ‘우리가 하나 되는 꿈을 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고 서로에 대해 조금 더 관심 갖고 조금 더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하나가 되어가지요. 우리 또한 그렇게 세상과 하나가 되어 살아가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조정래 감독은 1973년 경북 청송군에서 태어났다. 1992년 중앙대학교 영화학과에 입학한 그는, 2000년 졸업 작품으로 냈던 단편영화 <종기>로, 제2회 세계단편필름페스티벌 관객상 수상, 프랑스 꼬떼필름페스티벌에 초청을 받기도 했다. 국악에 관심 많았던 그는 아예 ‘고수’가 되어 북채를 잡고 국악 공연에 나섰다. 끊임없이 국악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던 그는 국악인들의 삶을 다큐로 담는 등 다양한 영상을 제작했으며, 인터넷 포털 사이트 국악 카페 ‘얼씨구국악세상’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살면서 우리는 수많은 이별을 경험합니다. 이별을 통해 새로운 세상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늦둥이의 고백, 어머니를 보내고

공민호 38세. 미용사. 충남 논산시 상월면

 

어머니는 나이 마흔셋에 3남 3녀 중 늦둥이로 나를 낳으셨다. 바로 위의 형하고는 7살 차이, 큰누나와는 19살 차이가 났다. 다섯 살 때쯤 아버지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홀어머니는  혼자 힘으로 모든 걸 꾸려나가셨다.

누나와 형들이 다 커서 객지로 나가자, 나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니는 묵 장사를 하셨고, 집안 형편이 부유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항상 늦둥이 아들이 필요한 것, 먹고 싶은 것을 사주셨다. 하지만 이런 고마운 어머니도 그때뿐, 난 항상 뭔가 부족해했고 어머니의 행동들이 불만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형 누나들처럼 어머니 품을 떠나 객지에 나가 돈을 벌고 미용 기술을 배운다고 한창 열심히 일을 했다. 그때쯤 어머니는 한평생 하시던 장사를 그만두고 홀로 시골집에서 지내셨다. 갑자기 시간은 많아지고, 자식들의 빈자리도 커서였을까.

어머니는 기운도 없어 보이고, 삶의 의욕도 점점 떨어지면서 우울증 비슷한 것이 찾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그러려니, 좋아지려니 하고 어머니를 잘 살펴드리지 못했다. 그저 내 삶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지켜보는 자식도 없이 갑자기 돌아가셨다. 난 뭐가 뭔지를 몰랐다. 막상 나의 곁에서 죽음이라는 게 일어나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냥 눈물만 흘러내렸다. 어머니 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어머니 모습이 이상하고 무섭기까지 했다.

내 앞에서 숨 쉬지 않고 계신 어머니가 정말 나의 어머니란 말인가? 이젠 싸늘하게 누워서 아무런 대답도 없고 어머니는 정말 어디에 계신 건가?

세상은 야속하게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장례를 치르는지도 모르게 지나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없는 생활이 이렇게 힘들어질 것이라고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어머니와 단둘이 지낸 시간이 많고 애증이 많았던 탓일까, 난 어머니의 빈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 말고 화장실에 가서 30분 넘게 눈물을 흘리는 등 눈물로 하루하루를 지냈다. 어머니의 죽음을 자책했던 나는 점점 몸까지 약해져 의욕도 없고, 허무해졌다. 날 괴롭히는 복잡한 생각들로부터 돌파구를 찾고 싶었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쉬고 싶었다.

그러다 ‘마음을 지우개처럼 지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마음수련 본원을 찾았다. 내 마음속에만 있던, 내가 사진처럼 찍어두었던 어머니와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좋아하는 우동 한 그릇 사드시지 못하고 아끼고 아껴 용돈을 주시던 어머니. 그런 어머니에게 형식적인 전화 한 통 하고 용돈 조금 드리는 걸로 자식 역할 다했다 여긴 나, 나이 많고 배움이 부족한 어머니를 부끄러워했던 나. 내가 내 미래를 위해 쏟아부은 열정의 반만이라도 어머니에게 관심을 가졌었더라면….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옛날 조상들은 부모가 죽으면 그 무덤 옆에 빈소를 차리고 삼년상을 치렀다는데 나도 어머니의 삼년상을 한다는 마음으로 수련을 계속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의 죄책감이 어머니를 편안히 보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미 어머니는 나를 용서해주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내 마음속에 어머니에 대한 사진들이 가득 차서, 공허한 마음세상을 만들고 그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죄책감은 어머니에 대한 감사함으로 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지났다. 이젠 어디서나 어머니 얘기를 편안하게 한다. 미용실에 오시는 할머니들을 뵈면 마치 어머니를 뵙는 것 같아 더 잘 챙겨드리게 된다. 요즘은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찾아가 봉사도 한다.

막내의 욕심이자 마지막 바람은 우리 누나와 형들도 마음속에 묻어둔 수많은 어머니에 대한 자기만의 사진 속에서 벗어나 더 자유롭게 살았으면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실로 어머니한테 감사하다고 한 적도, 형제들에게 사랑한다고 말 한번 한 적이 없는 듯하다. 이제라도 고백하고 싶다.

“어머니, 저 늦둥이 막내예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이라며 애지중지 키워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어머니에게서 받은 사랑이 헛되지 않게 더 많이 내 주변 사람들, 세상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형들, 누나들, 철딱서니 없는 막내 때문에 항상 걱정하는 것 잘 알아. 형들, 누나들에게 자랑스러운 동생이 되도록 열심히 살게. 사랑해, 고마워.”

장경숙 작. <기다림2> 혼합재료. 60×30cm. 2008.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좋아’ 나를 떠나보낸 여행길

신혜 29세. <먼지의 여행> 저자. blog.naver.com/nanyanya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재산의 잃음, 이런 상실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정체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뭘 할지도 몰랐다. ‘나’라고 믿고 있던 모든 것이 훅, 불면 날아가 버릴 먼지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사는지가 궁금해졌다. 그때쯤인가 학교 교정에서 우연히 돈 없이 전 세계를 여행하는 독일 순례자 부부를 만나게 되었다. 그들과 3개월 정도 서울 생활을 같이 하면서 그들의 삶을 배울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신에게 영감을 받으며 실천하려 했고, 사람들과 항상 이야기하고, 그걸 통해 자기 안의 메시지를 분명하게 만들어갔다.

언제나 돈이 있어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배워온 나에게, 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먹고 자는 게 매일매일 어떻게든 해결됐던 그들의 삶은 매우 새롭고 매력적이었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지만, 두려웠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집, 가족, 재산, 학력, 지위, 인맥 등 ‘나’를 구성하고 있다고 믿던 것들을 뒤로하고, 온전히 나를 내 마음 안의 영감에 맡긴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다행히도 난 새롭게 살고 싶었다. 남들이 바라는 삶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다. 온전히 내 안의 영감에 귀 기울이고, 그걸 통해 배우는 삶을….

그렇게 시작된 여행. 24살의 나는 돈 없이 1년 동안 인도, 네팔, 태국, 중국을 돌아다니며 고요하고 느린 시간을 즐기는 것을 배웠다. 그동안 무엇이든 해야만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바쁘게 살아야 하고, 그래야만 가치 있는 인생이라고 듣고 배워왔다면, 그 반대의 것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가만히 앉아 나무에 드는 햇살을 바라보고 물웅덩이의 잔물결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편안해지는 걸 느끼는 것. 가만히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그냥, 이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즐기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스스로에게 관대해지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졌고, 그들과 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행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랬다. 이 여행은 그저 돈 없이 하는 여행이 아니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버리고, 마음을 열어놓고,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이고, 그때그때 사는 것을 연습해야 가능한 여행이었다. 주어진 모든 상황에서 배우고 성장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여행 중 마음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고, 그들이 나눠주는 것을 받으면 정말 고마웠다. 빵 한 조각이라도 나에게 오는 모든 것은 축복이고 선물이 되었다. 이렇게 사는 데 필요한 것들이 그날그날 채워졌다. 내가 가지고 떠났던 것들은 무거워서 버리거나 누군가에게 주어서 사라졌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들이 준 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내가 입던 바지는 두 친구가 준 것이고, 기타는 순례자 친구가 준 것이고, 손목엔 여러 친구들이 만들어준 팔찌가 있고, 내가 덮던 담요는 다즐링에서 만난 친구가 준 거고…. 그들의 마음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고 따듯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도 내 것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에 무언가가 생기면 필요한 이들과 나눠 썼다. 이렇게 ‘내가 사라지는’ 경험들을 하는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나를 발견하는’ 경험들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순례자들과 여행을 하다가 헤어져 혼자서 인도 콜카타의 마더하우스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의 고아원에 있는 수녀님이 벽화를 그려줄 수 있겠냐고 했다. 나에게 주어진 일이 정말 즐거워서 스스로 열정을 내어 했다. 6개월 동안 작업하며, 그곳의 자원봉사자 친구들이 생활비를 조금씩 나눠주어 살아갈 수 있었다. 밤에 기도를 하고 자면 아침에 영감이 떠오르고, 그것을 스케치해서 벽에다 그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좋아하는 그림을 그리면서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여행을 계속하고 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하게 지낼 수 있게 된 가장 큰 힘은 먼지와 같던 나의 정체성 대신 과감히 선택한 여행 덕분이다.

 

장경숙 작. <바람이 분다>

캔버스 위 혼합재료. 73×117cm. 2012.

 

 

엄마, 이제는 후회 없도록 살게요

하순화 44세. 유기농숍 운영.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2011년 1월 10일 한파가 몰아치던 늦은 저녁. 휴대폰 벨이 울린다.

“119로 응급실에 가는 중입니다. 보호자분 빨리 오세요.” 불길한 예감은 했지만 떨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잠자던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엄마가 응급실로 가고 있대!”

병원으로 달려갔다. 별의별 생각과 함께 5분이 500분 같았다. 엄마가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딸이 힘들까 봐 요양원으로 가신 지 딱 11달째 되는 날이었다. 가끔 있는 일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예사롭지 않게 보이셨다. 엄마 얼굴을 보니 그래도 좀 위안이 됐다. 배가 아프시다고 했다. 그게 나하고의 마지막 대화였다. 응급 상황이 늘 있던 터라 또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괜찮아지시겠지, 스스로 위로를 했다. 엄마한테도 “엄마! 의사 선생님이 입원해서 치료받으면 금방 괜찮아진대”라고 말씀드렸더니 편안히 주무셨다. 그렇게 엄마의 모습이 편안해 보일 수가 없었다.

엄마를 보낸 지 일년이 다 됐지만 아직도 내 기억엔 엄마가 편안히 주무시는 모습으로 정지되어 있다. 그렇게 쉽게 가실 줄 알았다면 엄마 손이라도 꼭 잡고 못다 한 얘기라도 실컷 할 걸. 사랑한다고, 엄마의 딸로 태어나서 너무 행복했었다고. 같은 하늘 아래 엄마가 있다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났었다고.

보고 싶으면 엄마가 계신 요양원에 달려갔었다. 추운 날 엄마가 보고 싶어서 출근길에 들렀더니 내 손을 만지면서 꽁꽁 얼었다며 당신 이불 속으로 내 손을 당겨 녹여주시던 우리 엄마. 유난히 쌈 싸먹는 걸 좋아하셨던 우리 엄마! 매주 일요일이면 엄마 점심식사 시간에 맞춰서 우리 가족이 전부 맛있는 고기랑 쌈을 준비해서 갔었다. 이것저것 손자에게 먹이시던 엄마의 모습이 그립고 또 그립다.

요전 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연극을 보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보고 싶고, 만지고 싶고, 안기고 싶고. 왜 이제야 엄마의 소중함을 깨닫는 걸까? 후회와 죄책감만 남았는데. 엄마에게 해줄 게 너무 많이 남았는데.

 

엄마, 늦었지만 잘해 드리지 못한 거 용서하세요. 앞으론 더 열심히 살게. 여태껏 나를 가장 사랑해주고, 내가 잘됐을 때 젤 기뻐해준 사람이 엄마였는데. 지금껏 철부지로 살았나 봐. 엄마는 내 곁에 오래오래 계실 줄 알았어! 다들 후회 없는 삶은 없다고 하지만, 엄마는 나에게 너무 많은 교훈을 남겨주셨어. 소중한 게 뭔지. 사람 보는 눈도 생겼어. 진심을 담아서 사람을 대하고 최선을 다하는 거.

엄마 나 많이 철들었지! 아껴준 만큼 사랑한 만큼 나도 엄마 뜻 잘 이어받아서 우리 아이들 지혜롭고 바르게 잘 키울 거고, 엄마가 그토록 사랑했던 성규 아빠, 임서방 잘 섬기면서 행복하게 잘 살게. 지켜봐줘!

엄마 영원토록 기억할게요. 사랑합니다.- 막내딸 순화 올림.

장경숙 작. <서쪽하늘> 대리석 위 순금박. 60×60cm.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