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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개그콘서트’ 예능의 뿌리 깊은 나무

지금 전체 예능의 산실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단연 ‘개그콘서트(이하 개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콘’은 어느새 예능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수많은 개그맨들을 배출해냈다. 물론 여전히 예능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명실 공히 최고의 프로그램이다. 가장 어렵고 조악한 현실에 놓여 있는 개그맨들을 넉넉히 품어주고 키워주는 이 거목은 1999년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10여 년이 넘게 장수하고 있으면서도, 늘 트렌드의 최전선에서 예능의 흐름을 만들어내고, 동시에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프로그램의 내적인 진화보다 더 중요한 건, ‘개콘’이 개그맨들의 사관학교가 됨으로써 전체 예능에 미치고 있는 영향력이다. ‘1박2일’의 중추가 된 이수근, ‘정글의 법칙’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김병만, ‘무한도전’의 미친 존재감이 된 정형돈처럼 이미 ‘개콘’ 바깥에서 확고한 자신의 위치를 구축한 개그맨들뿐만이 아니다. 현재 ‘개콘’의 수장 역할을 하고 있는 김준호를 비롯해, 각 코너에서 주목받고 있는 최효종, 김원효, 정범균, 허경환은 ‘해피투게더 시즌3’에 출연해 정체된 분위기를 일소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개콘’ 출신 개그맨들이 ‘개콘’ 안팎으로 활약할 수 있게 된 배경은 결국 ‘생존’에서 찾을 수 있다. 많은 개그맨들의 무대가 있었지만 내홍을 겪으며 전부 사라지는 와중에도 ‘개콘’은 굳건히 살아남았다. 그저 살아남은 게 아니라 예능을 대표하며 현재의 예능에 새 피를 수혈해주는 거의 유일한 프로그램이 된 것이다.

‘개콘’의 이런 경쟁력은 그 독특한 시스템에서 나온다. 마치 샐러리맨처럼 출퇴근제를 하고 있는 ‘개콘’은 매일 개그맨들이 모여 아이디어를 짜고 연습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과정에서 선후배 간의 독특한 위계질서가 생겨난다. 무조건 선배가 주인공을 하는 그런 식이 아니라 아이디어에 걸맞은 최적의 인물을 찾아서 서로 꽂아주고(?) 세워주는 협업시스템이 ‘개콘’의 진정한 힘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개콘’ 출신 개그맨들의 서로를 생각해주는 마음이다. 이수근은 ‘개콘’에서 봉숭아학당을 할 때만 해도 이미 그만두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서수민 PD의 “후배들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는 말 한마디에 아무 조건 없이 6개월을 버텨주었다고 한다.

‘개콘’ 출신 개그맨들의 우정과 선후배 관계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각자의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도 늘 각별한 우정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여져 있는 이수근과 김병만, 김대희나 김준호처럼 이제 ‘개콘’의 왕고참이 된 개그맨들의 유별난 후배 사랑이 그렇다. 김준호는 최근 코코엔터테인먼트라는 기획사를 차려 후배 개그맨들의 뒷바라지를 자처하고 나섰다.

‘개콘’은 이제 하나의 개그 프로그램을 넘어 전체 예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콘’을 발판 삼아 성장한 개그맨들의 성공담은, 현재 ‘개콘’에서 묵묵히 조연 역할을 하고 있는 젊은 개그맨들에게는 하나의 꿈이자 희망이 되고 있다. 그리고 그 꿈은 전체 예능을 꿈꾸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때문에 ‘개콘’을 보면 ‘웃음’ 그 이상의 바람이 생기나 보다. ‘개그콘서트’가 재능 있는 개그맨들이 꿈을 펼칠 수 있도록 늘 열려 있기를, 선후배가 함께하는 노력, 따듯한 마음까지도 늘 전해지기를.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문화칼럼니스트 정덕현님은 대중문화평론가, 출판 편집자, 작가로도 활동 중이며, 푸른미디어상 심사위원,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심사위원이기도 합니다. 현재 문화비평 블로그 더키앙(thekian.net)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백만 송이 꽃을 피우겠어요

백합의 말

지금은 긴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만나 되살아난
목숨의 향기

캄캄한 가슴속엔
당신이 떨어뜨린
별 하나가 숨어 살아요

당신의 부재조차
절망이 될 수 없는
나의 믿음을

승리의 향기로
피워 올리면

흰 옷 입은
천사의 나팔 소리

나는 오늘도
부활하는 꽃이에요

이해인

사진, 글 김선규

백합은 알뿌리 백 개가 겹으로 쌓여 있다 하여 백합이라 불리며, ‘순결, 신성, 희생’을 상징한다 합니다. 그래서인지 성서에도 많이 나온다는군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흘린 눈물이 땅 위에 떨어져 백합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곱게 피어난 백합들의 모습이 에덴동산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백만 송이 꽃을 피워 그 은혜 보답하겠노라는, 하늘을 향한 고백인 듯도 보입니다.

2008년 6월. 충남 태안군 남면 신온리에서

사진가 김선규님은 1962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한겨레신문에 입사하여 시사주간지 한겨레21 초대 사진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문화일보 사진부 부장으로 재직중입니다. 보도사진전 금상, 한국언론대상, 한국 기자상 등을 수상했으며, 생명의 숲 운영위원과 서울그린트러스트 이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우리고향산책> <까만 산의 꿈> <살아있음이 행복해지는 편지93통> <희망편지>등이 있으며 <6시내고향>(KBS-1TV)에서 ‘강산별곡’을 진행했습니다. http://www.ufokim.com

반딧불이_ 별들처럼 빛나거라, 아름답게 춤추거라

1998년 여름 처음 큐슈(九州) 지역에서 반딧불이가 춤추는 광경을 보았을 때 정말 놀랍고 기뻤다. 작은 숲속에서 반딧불이 하나가 빛을 내기 시작하자, 어느덧 일제히 빛을 내기 시작했고 그것은 마치 빛의 물결과도 같았다.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후대에 남겨주고 싶어 매년 여름 반딧불이 촬영을 시작했고, 어느덧 12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진, 글 오하라 레이(Ohara Rei) 번역 오쿠토미 코우지

▲ 히메반딧불이가 안내하는 샛길이다. 나고야시 아이오이산 녹지에서 촬영. 반딧불이는 세계적으로 2,000여 종이 기록되어 있고, 일본에는 40여 종이 남아 있다. 반딧불이는 1년간 땅속에서 지내다 다 자란 후 약 일주일간 빛을 내며 풀숲을 날아다니다 생을 마친다. 빛을 내는 이유는 짝짓기를 위한 것으로, 주로 날아다니면서 빛나는 것이 수컷이다. 빛을 만들어내지만 열은 발생시키지 않는다.

해가 지고 30분 후면 최초의 반딧불이가 빛난다. 매일 반딧불이를 보고 있는 나조차도 두근두근 설레는 시간대이다. 작은 점이 콕 빛을 발하면, 빛은 점점 2개, 3개씩 늘어나고 반딧불이는 서서히 날기 시작한다. 그러다 일몰 후 한 시간이 지나면 모든 반딧불이들이 춤을 춘다. 눈 깜박할 새에 늘어난 빛들의 춤은 가히 환상적이다. 마치 한여름 밤에 쏟아지는 별빛 같다. 밤의 아름다움을 반딧불이를 통해 배운다.

반딧불이는 민가가 몇 채 있는 하류에선 쉽게 발견되지만, 민가가 아예 없는 상류에서는 잘 볼 수가 없다. 사람이 내보내는 생활하수의 양분이, 반딧불이 유충의 먹이가 되는 다슬기의 생육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반딧불이는 인간과 공생하는 벌레로 일컬어진다.

▲ 빛나기 시작하는 겐지반딧불이. 겐지반딧불이는 사람들이 생활하는 강 근처에서 주로 서식한다. 먹이가 되는 다슬기와 물고기가 많기 때문이다. 황혼 때 맨 처음에 빛나는 반딧불을 ‘처음 반딧불’이라고 한다. 그 시간대에는 인공적인 빛을 안 써도 반딧불을 크게 찍을 수 있다. 카고시마현에서 촬영.

그래서 산속보다 마을 가까운 곳에 서식하지만, 최근엔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인공조명과 콘크리트로 만든 수로, 그리고 농약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무엇보다 안타까웠던 건 반딧불이 난무하기 시작할 때 연달아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켜고 온다는 점이다. 차의 헤드라이트는 너무 밝고, 눈부시다. 그런 빛들이 잇달아 비춰지면 반딧불이들은 춤추는 것을 그만두고 어두운 숲으로 돌아가곤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달보다도 밝은 빛을 그들에게 비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리의 밤이 밝아지면서 사라져간 아름다운 풍광을, 지금 남아 있는 반딧불이의 서식지에서나마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 개양귀비 밭에서 빛나는 히메반딧불이. 밤이 되면 뒤쪽에 있는 숲에서 나와서 춤을 춘다. 나고야시 아이오이산 녹지에서 촬영.

모두가 함께 생각해보면 좋겠다. 어떻게 반딧불이와 함께 살아갈지를. 반딧불이라는 작은 벌레가 가르쳐주는 건 인간과 자연과의 공생이다. 반딧불이를 단지 빛이 나는 벌레로만 볼 게 아니라, 왜 예쁘게 빛나고, 어디에 살고 있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자연이 함께 가는 길, 그 첫걸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반딧불이야, 그렇게 계속 빛나거라, 그렇게 마음껏 춤추거라.

히메반딧불이의 빛으로 꽉 차 있는 작은 숲. 히메반딧불이는 삼림이나 풀밭에 사는 육생 반딧불이이다.
주로 옛날의 환경이 잘 보존되고 있는 장소에 서식한다. 오카야마현 니이미시 데쓰타초에서 촬영.

오하라 레이(Ohara Rei) : 1961년 일본 도쿄 출생. 보도사진가로 활동하다 아기물범과의 만남을 계기로 동물사진가로 변신, 마나티, 백곰, 반딧불이 등을 촬영하고 있으며 저서로 <반딧불이-light of a firefly> <유빙의 전언> 등이 있다.

납량 특집

 

 

 

 

먹구름이 온종일 학교를 뒤덮었다. 오후가 되자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빗방울들이 자꾸만 유리창을 두드리며 ‘비 오는데 무슨 공부냐’고 훼방을 놓았다. 아이들도 옛날이야기 하나 해달라고 보챘다. 그래. 쉬었다 가자. 나는 교과서를 덮고 실내등을 껐다. 그리고 이 학교와 나의 비밀스런 관계를 이야기했다.

나는 올해 이 학교에 처음 전근 왔다. 전근 온 첫날, 교장 선생님이 아무도 몰래 나를 교장실로 불렀다. 그리고 밑도 끝도 없이 이 학교에 관한 괴담을 들려주었다.

“원래 저기 보이는 3층 별관 자리가 공동묘지 터였습니다. 옛날에 교실을 짓기 위해 공동묘지의 묘들을 강제로 이장했지요. 그런데 그해부터 괴이한 일이 벌어졌지요.”

30년 전, 비바람 불고 천둥 치던 어느 날, 학생 한 명이 학교 운동장에서 실종되었다. 아이는 커다란 나무 아래에 책가방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듬해 장마철에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화장실에 간다던 아이가 오지 않아서 찾아보니 옥상에 그 아이의 신발 한 짝만 비를 맞고 있었다. 귀신이 곡할 일은 해마다 꼭 한 번씩 일어났다. 체육창고에서, 우물가에서, 뒤뜰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아이들은 끝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해, 마을 앞으로 군대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을 잃어버려서 실성한 어머니가 내 자식을 내놓으라며 길을 가로막았다. 군대를 지휘하던 장군이 백마에서 내려 자초지종 사연을 물었다. 장군은 병사들에게 여장을 풀게 하고 홀로 산꼭대기 바위에 올라 마음을 수련하였다. 며칠 후 장마가 시작되고 학교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장군은 갑옷과 투구를 입고 백마에 올라 쏜살같이 학교를 향해 달렸다.

학교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학생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장군은 시퍼런 칼을 빼어 들고 교실과 복도 그리고 장대비가 퍼붓는 운동장을 돌아다녔다. 그때 엄청나게 큰 벼락이 운동장을 때렸다. 온 천지가 진동하는 바로 그 순간, 장군은 학교에서 제일 커다란 나무를 향해 뛰어올랐다. 잎이 무성한 나무 속에서 칼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찢어지는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시커먼 물체 하나가 ‘쿵’ 소리를 내며 땅으로 떨어졌다. 천년 묵은 구렁이였다. 그 요물은 교실 천장에 똬리를 틀고 있다가, 옥상 난간과 큰 나뭇가지를 타고 옮겨 다녔다. 그러다 사방이 어둑해지는 궂은 날이면 혼자 있는 아이를 덥석 물고 사라졌던 것이다.

장군은 피범벅이 된 칼을 씻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33년 후 죽은 구렁이의 아내 구렁이가 남편의 복수를 하러 다시 올 것이라고 예언했다. 장군은 그때가 되면 보라면서 두루마리 족자 하나를 남기고 마을을 떠났다.

교장 선생님 목소리가 떨렸다. 올해가 바로 33년이 되는 해인 것이다. 올 정월, 교장 선생님과 마을 어른들이 비밀리에 모여 족자를 펼쳐 보았다. 그 속에는 과연 아이들을 지켜주기 위해, 과거에서 환생할 귀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아이들이 똘망똘망한 눈으로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나는 제자들을 위해, 족자 속에 있는 귀인의 이름을 칠판에 써주었다.

[崔亨植先生님]

아이들이 대체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 대신 비장한 표정으로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절대 큰 나무와 옥상과 국기 게양대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한 자씩 토를 달아주었다.

[최형식선생님]

그리고 “왜 하필 올해 선생님이 이 학교에 왔는지 생각해봐라” 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교실 천장을 응시하였다. 그런데 몇몇이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더니 빙긋빙긋 웃기 시작했다. 음…. 이 순간 귀청을 찢을 듯 천둥소리가 딱 한 번만 울려주면 그야말로 초특급 울트라 호러 납량 특집극인데, 매년 비 오는 날에 공개하는 내 이야기의 종결은 그게 좀 아쉽다.^^

최형식

세계분쟁지역 전문PD 김영미의 생명과 사람 이야기

김영미 다큐멘터리 PD

나는 밥하고 빨래하는 아줌마였다. 아기 이유식 만드는 것이 취미였고 아침에 설거지하고 동네 아줌마들과 커피 한잔 하며 수다 떠는 게 즐거운 대한민국의 보통 주부였다.

그러다 나이 30살에 늦깎이 피디가 되었다. 피디면 꽤 높은 지위라고 생각해왔던 나는 막상 피디가 된 후, 피디란 세상에서 가장 많이 머리를 숙여야 하는 직업임을 깨달았다. 섭외를 위해 무조건 출연자의 발밑에서 빌고 또 빌어야 했던 것이다. 나의 다큐멘터리에는 주로 힘들고 위험한 전쟁 지역 사람들이 많이 출연하기에 더욱 그랬다.

분쟁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이 황폐해져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나의 다큐멘터리를 배려해 줄 처지가 아니다. 나는 상관없었다. 내가 그들과 눈높이를 맞추면 되니까. 아프고 힘든 그들에게 나를 맞춰달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조건 그들 앞에서 비위와 눈높이를 맞추고 다가갔다. 이런 마음이 점점 그들과 친해지게 만들었다.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엄마들과 아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하루가 다르게 총소리가 나고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도 그들의 생활은 우리네와 다르지 않다. 엄마들은 아이들을 지키려 하고 아빠들은 아이들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다녔다. 그런 그들에게 취재진이 아니라 이 지구에 같이 사는 한 이웃이 되어주고 싶었다.

취재 다닐 때면 계란을 사들고 다닌다. 가난한 이들에게 계란 한 판은 엄청난 선물이다. 카메라와 계란을 들고 그들을 만난다. 계란에 얽힌 잊지 못할 이야기가 하나 있다.

2003년 이라크를 취재할 때였다. 나는 요르단에 일용직 노동자로 갔던 한 이라크 남편이 전쟁 통에 아내의 부고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촬영하는 중이었다. 그의 이름은 알리였다. 그가 들어선 집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전쟁 중에 초상집이 어디 한둘이겠냐만 이 집은 정말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죽은 아내가 남긴 아들을 붙든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물 흘리는 걸 촬영하며 나도 가슴이 미어졌다. 어렵게 촬영을 마치고 나서려는데 알리가 나의 팔을 붙들었다. 먼 길을 왔는데 요기라도 하고 가라는 것이다. 하루 종일 굶으며 알리 가족을 촬영했던 나는 그의 부탁대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이윽고 그가 내온 것은 커다란 쟁반에 가득 담긴 삶은 계란과 홍차였다.

나는 ‘밥을 준다더니 그냥 간식만 주네’ 하며 삶은 계란을 꾸역꾸역 먹었다. 한 5개쯤 먹었나? 더는 못 먹을 것 같아 그만 먹겠다고 하니 알리는 더 먹으라며 나를 재촉했다. 할 수 없이 두어 개를 먹었다. 그러다 화장실에 가고 싶어 그 집을 둘러보다 우연히 본 알리네 부엌에는 정말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소쿠리에 담긴 하얀 계란 껍질뿐이었다. 그때 나는 알았다. 알리네 집엔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나에게 대접할 수 있었던 것은 계란뿐이었다는 걸. 이 계란도 아마 힘들게 구했을 것이다.

너무 미안하고 가슴이 아파 배가 부른데도 불구하고 몇 개를 억지로 더 집어 먹었다. 나는 알리네 집을 나선 후 가게에 들러 밀가루와 계란 한 판을 사서 몰래 그 집 마당에 들여놓고 도망치듯 떠나왔다.

지금도 하얀 계란만 보면 없는 형편에 나를 위해 삶은 계란이나마 내어온 알리가 생각난다. 아내를 잃고 경황이 없을 텐데도 나를 생각해준 그 귀한 마음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지구 어느 편에 있는지도 모르는,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온 이름 모를 취재진에 불과한 나를 생각해준 그 마음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후 나도 어느 곳에서든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게 되었고, 습관처럼 계란을 사들고 다니면서 내 마음도 보여주었다. 내가 마음을 열수록 그들도 나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이 내가 계속해서 세계 분쟁 지역을 찾아다니며 취재할 수 있었던 원천이다.

위험한 지역을 취재 다니다 보면 인생이 얼마나 무상한지 온몸으로 느낀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경험하면서 나는 생명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리 뛰어난 과학 기술도 인간의 생명을 제조하지는 못한다. 한 번 생명이 꺼지면 다시 되살리기는 불가능하다. 바로 옆에서 웃고 이야기하던 사람이 총 한 발에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마네킹처럼 굳어버리는 모습은 끔찍했다. 그 기억은 악몽이 되어 밤마다 나를 괴롭혔다. 그런 어느 날 이라크 남부 도시 나제프에서 이슬람 지도자 이브라힘을 만났다.

“왜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나는 이브라힘에게 물었다. “생명을 가진 존재는 모두 아름답습니다. 신은 우리가 그 죽음을 통해 생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시기를 바라십니다.” 그는 대답했다.

그의 말은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신은 사람들이 죽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막고 생명을 지키는 것을 보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장 기본적이지만 잊고 있었던 생명과 사람의 이야기. 나는 그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심부름꾼이구나, 취재하는 사람으로서 세상에 메시지를 전해주는 비둘기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 운명이구나, 느꼈다. 그 이후 나는 생명과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그 운명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었다.

그때부터 아무리 위험한 곳에 가더라도 그곳 사람들 때문에 힘들지 않았다. 그들에게 조금씩 카메라 초점을 맞춰가며 나는 사람을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 아프간이니 소말리아니 하는 나라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그저 소중한 생명을 지닌 사람들로만 보인다.

또한 전쟁터를 다니다 보면 돈도 명예도 부질없다는 것을 느낀다. 숱하게 죽어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한때 한 나라의 대통령도 있다. 그들은 황금이 산더미처럼 있어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죽어갔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의 궁에는 미국 달러가 방 안 가득히 쌓여 있었고 리비아 카다피는 황금 덩어리가 침실에 가득했다고 한다. 그들은 돈과 권력을 모두 쥐고 있었지만 다 쓰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비단 그들뿐만 아니라 죽은 사람 그 누구도 돈이나 재산을 가지고 떠나지 못한다.

나는 돈과 명예보다 내가 만난 사람들의 메시지를 더 많이 남기고 세상을 뜨고 싶어졌다. 내가 죽어도 나의 다큐멘터리와 메시지는 남길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내 이름으로 집도 그 어떤 부동산도 가지지 않기로 했다. 가죽이나 모피 옷도 사절이다. 생명을 죽이고 내 몸에 두른들 나는 행복할 자신이 없다. 또한 보석도 가지지 않기로 했다. 제3세계를 다니며 이 보석들 때문에 부는 피바람을 지켜봤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다이아몬드는 수십만 명의 죽음을 부른 내전을 만들었고, 미얀마의 루비는 아이들의 착취를 등에 업고 반짝인다. 콜롬비아의 마약 카르텔 손에서 나오는 사파이어나 남아프리카의 총성 속에서 캐낸 에메랄드가 과연 아름다울까.

나는 그 어떤 보석보다 사람의 생명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보석과 가죽옷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괜찮다. 나에겐 나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내게 들려줄 이야기들이 나에게는 더 값진 재산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울고 웃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운명이며 내가 이 세상에서 하고 가야 할 일이다.

김영미 PD는 지난 12년간 전 세계 60여 개 나라를 다니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에 담아왔다. 저널리스트들 사이에서 ‘작은 거인’으로 통하는 그의 주요 다큐멘터리로 <부르카를 벗은 여인들> <일촉즉발, 이라크를 가다> <미군들의 이라크> <히말라야 커피로드> 등이 있다. 저서로는 <세계는 왜 싸우는가?> <사람이 아프다>(추수밭)가 있으며 여성인권 디딤돌상, 일본 NTV 10대 디렉터상 등을 수상했다.

천년의 생명력을 떠내다, 전통 한지장 김삼식 선생

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란 말이 있다. 종이는 천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말로, 한지의 우수성을 나타낸 말이다. 경북 무형문화재 한지장 김삼식(70) 선생은 이러한 한지를 61년 동안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어왔다. 쌀은 88번 손이 가야 하고, 종이는 100번이 넘는 손길이 가야 얻어진다는 말처럼 정성을 다해 만들어온 그의 한지는 2007년 ‘조선왕조실록 복원’과 2010년 ‘고려초조대장경 복원’ 사업에 선정될 정도로 우수한 한지로 알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은 종이를 사려면 대한민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삼식지소’ 한지장 김삼식 선생을 만나보았다.

김혜진 사진 홍성훈

경북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문경한지 작업장 한쪽에는 닥나무 재배가 한창이었다. 김삼식 장인은 닥나무 사이에서 잡초를 캐고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작업장으로 향했다. <삼식지소(三植紙所)>, 오랜 세월을 보여주듯 빛바랜 간판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 양심, 전통 이 세 가지를 지키겠노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한지장인의 다짐이 느껴졌다. 그렇게 묵묵히 걸어온 세월이 61년. 하지만 그만큼 외롭고 힘든 길이었다.

중국에서 값싼 한지가 들어오고, 화공약품으로 손쉽게 생산된 개량한지가 전통한지로 둔갑해 팔려나가는 시절에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한다는 건, 그의 표현대로 ‘조금 모자라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된 일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근 들어 고려초조대장경 복원, 조선왕조실록의 복원 등 국가 시책과 맞물려 한지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그의 한지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복원 사업 시 가장 중요한 건 옛날에 썼던 종이와 비슷한 종이를 찾는 일이었는데, 전국의 한지를 조사한 결과 김삼식 장인의 한지가 원본과 가장 유사할 뿐만 아니라, 종이 질 또한 가장 우수했던 것. 그렇게 2007년 문화재청의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복원에 이어, 2011년 초조대장경 복원간행위원회에서도 1011년에 판각된 고려초조대장경을 복원하는 데 김삼식 장인의 종이를 선택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오롯이 한길을 걸어온 그의 진실과 양심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들어 선생님의 한지가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본심을 지키며 60년 세월을 지내다 보니 때가 맞았나 봅니다. 어느 천년이 다가와서 또 이런 날이 올까 싶어요. 사실 먹고살기 위해서 종이를 했고, 배운 게 종이뿐이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 기라요. 대단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천년 문화유산 복원에 쓰인다는 것, 나라에서 최고의 종이라 인정해준 건 참으로 기쁩니다.

전통한지가 나오기까지 그 공정이 보통 정성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보통 백지(白紙)라 하면 아무것도 안 쓴 거라 보는데 우리는 그리 생각 안 해요. 백지는 백 번의 손길을 거쳐서 백지(百紙)다, 합니다. 그래야 종이가 만들어지니까요. 백 가지 손이 가는 게 거짓말 같잖아요. 사실 더 갑니다. 전 과정이 다 세밀해야 하고, 한 개만 틀려도 안 돼요. 또 몸에 푹 배야 돼요. 2년 전쯤 직공을 두었었는데 힘드니까 가만 못 있고 들고 날고 해요. 제일 오래 있던 사람이 5개월이라. 그래서 지금은 우리 가족 서넛이 하고 있어요.

김삼식 장인이 한지를 배우기 시작한 건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자신의 사형(자형의 형님. 고 유영운 선생)에게 한지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한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전통한지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뜻이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이 한지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갈 때 다행히 우리 어른들은 안 갔어요. 그래서 저한테 옛날 전통 방식을 그대로 전수해줄 수 있었죠. 나중에 일본에 갔다 온 사람들이 화공약품으로 종이 뜨는 걸 배워가지고 왔는데, 그 사람들은 돈이 있으니까 화공약품을 사서 종이를 만들었어요. 우리는 하루에 100~200장밖에 못 뜨는데, 그 사람들은 하루에 1,800장을 내요. 근데 우리 어른들은 화공약품 살 돈이 없었지. 덕분에 오늘날까지 온 거라요.”(웃음)

우리 전통 한지가
만들어지기까지

1. 닥나무 채취
2. 닥나무 찌기
3. 닥나무 껍질 벗기기

4. 백닥 만들기
5. 백닥 말리기
6. 천연 재 만들기
7. 천연 잿물에 백닥 삶기

8. 닥섬유 만들기(두드리기)
9. 종이 뜨기(물질하기)
10. 종이 말리기

종이 뜨는 방식도 달랐다. ‘대나무 발을 손으로 한두 번 살랑살랑 흔들어 뜨는’ 일본식(쌍발뜨기)과 달리 ‘물이 일렁일 정도로 발을 푹 떠서 앞뒤 좌우(井)로 50번 이상씩 물을 뜨는’ 우리 식(외발뜨기)은 팔에 알통이 밸 정도로 고된 작업으로, 종이 한 장이 나오는 데만 20~40분이 걸린다.

김장인은 전통을 지킨 비결이 ‘먹고살기 위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지만,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 수 있는 전통 종이’ 외에는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성품과도 맞닿는다. 그저 본 대로 배운 대로 좋은 종이 만들기밖에 몰랐던 그는 지금도 여름에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한지는 대개 겨울에 만드는데, 여름엔 닥나무, 황촉규(닥풀) 등 재료가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지가 맞지 않아 늘 가난했던 터라, 살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벼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전통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구도(求道)에 가까운 과정이다. 특히 8시간 동안 삶은 닥나무 껍질(흑피)을 벗겨내는 작업은 하루 종일 긁어도 6kg 벗기기도 어려운 고된 일이다.

검은 겉껍질을 칼로 긁다 보면 푸르스름한 청태가 보이는데, 그것마저 깨끗이 긁어내야 비로소 백닥(백피)이 된다. 많은 한지 제조자들은 간단히 표백제로 표백하지만 김장인은 “하얗도록 청태를 빡빡 긁어내라”고 배웠다 한다. 마무리도 간단치 않다. 햇빛에 잘 말린 백닥을 잿물에 삶은 다음, 방망이로 두들긴 후 지통에 닥섬유와 황촉규(닥풀)를 넣고 전후좌우로 흔들며 종이를 떠낸다. 그 후 탈수를 하고 건조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한지 한 장이 완성된다. 단순한 종이가 아닌 장인 정신이 깃든 작품, 천년 한지의 생명력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현재 고려초조대장경 복원 작업에 참여하고 계시지요?  

2009년도에 고려초조대장경 원본을 가져오셨어요. 이 종이를 만들 수 있냐 묻는데, 진짜배기 고려지를 보니까 네 가지가 한 번에 보여요. 티, 청태, 섬유, 닥 껍데기까지. 그러니까 수명이 오래갈 수밖에 없지. 약품 처리 안 하면 전통한지에선 다 보이게 돼가 있습니다. 살면서 그날처럼 기분 좋은 날은 없었어요. 왜냐면 옛날 한지는 눈에 보기 좋은 것보다 잡아 땡겨가 안 찢어지고 질기고 오래가면 그게 좋은 기라. 근데 그 사람들은 또 깨끗하게 만들어 달라는 거라. 그러니 얼마나 애를 먹습니까. 사실 다들 서양 종이에 익숙해져서 그래요. 그래도 나라에서 필요한 데 쓰니까 좋은 기라요.

그렇게 세상이 알아주기까지 가장 힘든 시절이 있으셨다면요?  그야 가장 힘든 건 춥고 배고픈 때죠. 제가 지게에 종이를 짊어지고 시장에 팔러 왕복 120리를 걸어 다녔어요. 겨울철이 특히나 힘든 게 눈이 많이 올 때 산길로 다니니까 눈이 싹 덮어버리면 길을 모르는 거라. 종이 한 장도 못 팔면 밥도 못 사 먹고 그냥 오는 거예요. 배가 너무 고프고 피곤하니까 걷다가도 그리 잠이 와요. 눈 위에서 몇 번 자다가 동상도 걸리고, 여러 번 죽을 뻔했죠. 그걸 평생을 하다시피 한 거죠.

한지를 만들 때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 진실해야 돼요. 절대 돈 욕심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진실하고 양심하고 또 달라요. 진실로 하다가도 허욕이 생길 때는 양심이 생각나야 돼요. 아, 내가 양심의 가책이 있으면 안 된다. 그다음에는 전통이에요. 진실, 양심, 전통. 그래서 삼식지소(三植紙所)입니다.(웃음) 저는 종이 사러 오신 분들이 나를 살려주는 의사라 생각해요. 굶어 죽지 말라고 와 주신 건데 그보다 반가운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분들이 “종이 더 주이소, 선생님 종이가 최고제” 하면 용기가 나고, 힘든 게 다 날아가요.

2005년, 그는 경북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다. 막내아들이 대를 잇겠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6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온 아들 김춘호(38)씨는 당신의 명성으로 얼마든지 곁눈질하며 돈을 벌 수 있었는데도 정말 우직하게 한길만을 걷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기 위해 4년 전 34살의 나이에 목재종이학과에 들어갔다.

“제가 아버지보다 힘은 좋은데도 일하는 양은 반도 못 따라가요. 닥을 긁을 때, 닥나무를 벗길 때, 종이를 뜰 때, 딱 반밖에 못 하거든요. 50kg도 안 되는 몸무게로 일하시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플 때도 많지만… 진짜 대단하세요.” 아들 김춘호씨의 말이다.

김삼식(金三植) 장인의 작업장.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삼식지소(三植紙所)’라는 간판에는

진실, 양심, 전통, 이 세 가지만은 꼭 지키겠다는

한지장인의 정신이 담겨 있다.

아드님이 대를 잇겠다고 할 때 어떠셨어요?  

사실 제가 나이도 많고 몸도 약해져서 그만두려 했었어요. 그때 우리 막내아들이 아버지 저도 한지를 해야겠습니다, 하는 거라요. 그래서 나는 돈도 못 벌고 먹고살기에 애먹었지만, 니는 대학 졸업도 했으니까 객지에 나가 사회 진출을 해라. 죽어도 한지는 하지 마라 했어요. 근데 야가 전국을 다녀 봐도 아버지처럼 전통한지 하는 데가 한 곳도 없다고, 꼭 해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으면 객지에 나가 인생 공부 더 하고 온나, 그러면 받아주겠다, 해서 3년을 약속하고 나갔습니다. 2년간 자동차 판매원을 하면서 돈을 좀 번 듯하기에, 몇 십 원짜리 장사하는 데로 다시 들어가라 했죠. 작은 돈도 귀한 줄 알아야 하니까요. 그랬더니 주유소에서 장갑 팔고 세차하고 기름 주고 1년 반을 보내더라고요. 만약 막내아들이 없었다면 무형문화재고, 조선왕조실록이고, 고려대장경이고, 우리 진짜배기 종이가 어떻게 됐을까 싶어요. 아들에게 고맙죠.

요즘도 꾸준히 종이를 공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새벽 5시에 나와 저녁 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책 볼 시간도 없고, 누가 알려주지를 않으니까 그냥 저대로 연구를 해요. 사람들이 인간문화재 하면 대단히 높은 줄 알고 접근을 잘 안 하거든요.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사람이 다가오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먼저 내 신분, 입장을 다 밝혀야겠다,였어요. ‘저는 국민학교 3학년을 중퇴한 무식꾼인데, 닥 장사해서 오늘날까지 여러분들 덕분에 먹고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이 술술 자기 생각을 얘기해줘요. 그래서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사람이 백 명이 가면 나는 제일 뒤에 간다고 생각해요. 앞에 간다고 생각하면 배울 것도 못 배웁니다. 아들한테 시범 보일 때도 그래요. 날 따라온나 안 하고, 난 이렇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노? 물어요.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귀를 확 트이고, 머리를 자꾸 쓰도록 만들어줘야 해요.

한지, 종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종이는 우리 몸에 흐르는 피라 생각해요. 몸에 혈이 안 돌면 안 되듯, 종이가 없으면 한 개도 기록이 안 되는 기라. 어느 나라든지 무슨 일이든지 역사가 있으면 종이가 있어야 한다 말이요. 적는 게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질 않아요. 스승, 대통령도 글을 배워서 나오듯이 글씨를 모르면 말도 옳게 안 나와요. 종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해요.

한지를 만들 때 우리나라에서 자란

1년생 어린 닥나무를 쓴다.

닥나무가 백 번이 넘는 손길을 거쳐야

비로소 천년이 가는 한지가 탄생한다.

세계적으로 우리 한지가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전통한지가 우수한데도, 잘 알지를 못하니까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종이로 일본 화지를 많이 써요. 세상 사람이 “오래가고 질긴 좋은 종이를 사려면  대한민국 가야 한다”라고 해야 성공인 거 같아요. 세계에서 1등 가는 종이를 만들자. 그래서, 앞으로 10년은 더 살아야 해서 몸을 아끼고 있어요. 술, 담배 다 끊고….(웃음)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진실로 다섯 집만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애요. 나 혼자로는 안 돼요. 또 좋은 종이를 구분 지을 줄 알아야 하고, 나쁜 종이를 전통한지라고 팔지도 말아야겠지요. 전통한지의 기준이 바르게 돼서 진짜 좋은 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게 내 소원이요.

2011년 프랑스에서 145년 만에 조선왕실 외규장각 의궤(국가행사기록)가 되돌아온 바 있다. 당시 일각에서는 프랑스의 보존 기술에 찬사를 보냈지만, 진짜 비결은 천년을 가는 우리 한지에 있었다. 이후 프랑스 박물관 관련자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김삼식 장인의 한지 제작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한지를 만드는 노고와 정성에는 탄복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종이를 만드는 장인의 작업장이 조립식 판넬로 지어진 열악한 환경인 것에 모두가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던 한지장인 61년의 진심. 이제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

한지장 김삼식 선생은 1943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누님 집에 살게 되면서 사형을 통해 한지를 배우게 된다. 17살 되던 해 독립해서 본격적인 한지장인의 길을 걷던 그는 아들 김춘호씨가 대를 이으면서 2005년 경북 무형문화재로 선정됐으며, 2007년 조선왕조실록 복원, 2010년 고려초조대장경 복원 사업에 그가 만든 한지가 채택되면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제 여름, 뜨거운 태양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여름 이야기들.

 

한여름 계곡에서의 첫인사

권종국 40세. 직장인. 경북 칠곡군 기산면 죽전리

무더운 여름이면 식은땀 났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2009년 8월 14일, 장인 장모님께 첫인사를 드리러 간 날이다. 서른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 나는, 결혼을 위해 은근슬쩍 일을 진행해 나갔다. 그렇다고 별난 건 아니고, 그저 여자 친구 집에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거였다.

당시 아내 역시 서른여섯이란 과년한 나이였기에 장인 장모님의 걱정이 많으셨던 터라 나는 아내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만 말해라. 그래야 부모님이 걱정을 더신다”고 은근히 설득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적은 오직 하나! 나이 많은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께서 연애 사실을 알고 먼저 결혼 추진에 나서주시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를 통해 처가에서 연락이 왔다. 처가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물놀이를 가는데 시간 나면 잠깐 와서 인사라도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문제는 연락이 온 것이 물놀이 바로 전날 저녁이었던 것이다.

급하게 준비를 해야만 했다. 당시 나는 여름 정장이 없었다. 차도 누가 보면 굴러가나 싶을 정도의 고물 차를 몰고 다니는 처지였다. 그래도 첫인사인데 고물차에 편한 복장으로 갈 수는 없어 밤늦게 친한 친구에게서 내 차에 비하면 완전 멋진 자동차와 정장 한 벌을 빌렸다. 처가 선물은 전복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께서 “마침 좋은 게 있다”며 전복으로 준비를 해주셨다.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아내는 1등 신붓감인 교사인데 반해 난 지역방송 외주제작 PD로 수입도 변변찮은 상황이었고, 모아놓은 돈도 한 푼 없이 빚만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많이 되었다. 수입 같은 걸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도 되었다. 긴장으로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8월 14일, 문경의 계곡으로 출발! 그런데 아뿔싸! 가는 도중 타이어 펑크가 나 차를 고치느라 1시간이 넘게 지각을 하게 되었다.

‘허걱, 첫인사부터 지각이라니!’ 안 그래도 긴장이 되는 상황에 지각까지 했으니 더욱 긴장이 된 나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생각해보시라. 한여름 계곡에, 모두들 꽃무늬 반팔티와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서 물놀이를 즐기는 그 와중에, 나 혼자 정장 차림으로 땀 뻘뻘 흘리며 계곡에 있는 모습을!!

 나로 인해 가족의 점심 식사가 늦어졌고 몸 둘 바를 모를 상황에서 첫 만남이 이뤄졌다. 슬하에 6남매를 두신 장인 장모님은 막내인 아내를 제외하고 모두 출가시켰던 터라, 어린 조카들까지 포함한 10명이 넘는 식구들이 나를 삥 둘러싸고 있었다. 막내딸이, 그리고 막내 동생이 데리고 온 남자 친구는 과연 누구인지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야외용 돗자리에서 어른들께 큰절을 올렸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으세.” 장모님의 첫마디였다. 처남네, 처형네 식구들도 그저 편하게 많이 먹으라는 말 몇 마디 건네신 게 전부였다. 식사가 끝나자 장모님이 다시 한 말씀 건네셨다. “여기 있어 봤자 불편할 테니, 가서 놀다가 오게.” 장모님 말씀대로 아내와 둘이 적당히 한 바퀴 돌고 어른들께 돌아갔다. “있어 봤자 불편할 건데 가서 더 놀다가 저녁 먹을 때 오게.”

다시 장모님 말씀에 아내와 계곡을 돌다가,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어른들께 갔다. 또 별말 없는 저녁 식사.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장모님은 첫 질문을 하셨다. “그래, 자네 이름이 뭔가?” 만난 지 거의 6시간 만에 하신 첫 질문은 놀랍게도 그냥 이름을 물으신 거였다. “네. 권종국입니다.” “그래. 양반 성씨네.”

그게 끝이었다. 처음 인사를 드리는 거라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받게 될 것으로 짐작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이름 물으신 것 외에 다른 질문이 없어 조금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날 무렵에서야 겨우 두 번째 질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 자네는 우리 딸이 마음에는 드나?” “네.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가 내게 하신 질문의 전부였다. 이후에 아내에게 들으니 장인, 장모님은 한 번도 자식이 데려온 사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저 자식들을 믿고 결혼을 허락하셨다는 얘기였다.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했던 기우를 다 날려버릴 수 있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장모님이 아내에게 한마디는 하셨다고 한다. “사람이 시커먼 게 생긴 건 별로네.”^^;;

그런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믿음 덕분에 결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지금은 아이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지금도 무더운 여름날이 되면 계곡으로 인사드리러 갔던 그때가 떠오른다. “장인 장모님! 고맙습니다!”

 

강석문 작. <봄날> 68×50cm. 한지에 먹, 채색, 아크릴. 2011.

 

거머리 농활대여, 영원하라

손희정 33세. 특수교사. 경기도 이천시 송정동

갓 대학에 입학한 1999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해 보리라, 의욕에 가득 찼던 나는 망설임 없이 경남 창녕군 대합면 모지마을로 농활(농촌봉사활동)을 떠나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같은 마을로 배정된 사범대의 다른 과 사람들과 모여 우리 농활대의 이름을 ‘거머리 농활대’라 지었다. “거머리 농활대여~”로 끝나는 주제가도 만들어 부르며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즐기고, 처음 경험하게 될 세계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웬걸! 도착해 보니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농촌의 쌓여 있는 일이란 만만치 않았고, 평소 힘에 부쳐 하지 못했던 일들을 농활대에 의뢰하는 어르신들의 요청이 쇄도하여 여름 땡볕 아래 오전, 오후 작업을 마치고 나면 파김치가 되곤 하였다. 농사일에 대한 경험이라곤 전무했던 경우가 대부분인 우리들은, 열심히 그러나 잘못된 방법으로 일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다행히도 어르신들은 그런 모습도 귀엽게 너그러이 이해해주셨다.

좁은 마을 회관에서 30명이 넘는 청년들이 필통에 꽉 찬 연필들처럼 잠을 자며 설익은 밥을 해먹고,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해 정체 모를 냄새를 풍기며 생활하였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 노고 속에 생산되는지, 농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또 농작물 가격 하락 등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푸짐한 새참을 차려주시는 시골 인심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기억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자연 친화적 화장실과 밖에 줄서서 기다리는 이들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큰일을 보는 횟수를 최소화하고자 수분 외에는 섭취하지 않다가 4일째쯤 생애 첫 기절을 했던 일, 결명자 잎들을 하나씩 “숨가라(심어라)”는 할머니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열심히 결명자 잎을 흙에 완전 파묻어 숨겨버렸던 일, A대원이 렌즈를 빼서 소주잔에 고이 담가 두었는데 B대원이 청소를 하다 문밖 멀리 내용물을 뿌려 버렸던 일 등등.

어느새 마지막 날을 앞두고 우리는 어르신들과의 마을 잔치를 준비했다.

우리는 춘향전을 준비했다. 양파 망으로 얼굴 가린 이몽룡과 터프하고 부산한 성춘향, 뜬금없는 뱀 장사까지 등장하는 엉뚱신기 춘향전을 보면서도 함께 웃고 울어주시던 마을 분들. 짧고도 길었던 농활의 추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농활 첫날 ‘이렇게 힘드니 농촌으로 처녀들이 시집을 오지 않나 보다’ 생각했던 내가, 7년 후 그 옆의 시골 마을로 시집을 갔던 것이었으니~ 소개팅으로 만나 운명처럼 결혼한 남편이, 바로 그 옆 마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댁에 갈 때마다 모지마을을 스쳐 지나며 뜨겁게 벅차오르던 1999년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던 그 시절의 젊음’을 되새기다 보면 입가엔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거머리 농활대여~’라던 외침은 아마도 영원히 내 마음을 울릴 것 같다.

 

강석문 작. <독서도> 93×65cm. 한지에 먹, 채색. 2009.

 

한여름 밤의 불청객

조건 59세. 부동산업. 캄보디아 거주

캄보디아는 사시사철 더운 나라다. 그중에도 2월부터 4월까지가 제일 더운 여름으로, 건기이자 우기가 시작되는 5월 초까지가 여름의 절정을 이룬다.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더운데 우리 피서나 갈까?” “웬 피서?” “더워서 도저히 잠을 못 자겠어. 올여름이 유난히 더운 것 같아. 갑시다, 시아누크빌로!”

우리는 열대의 나라에서 때아닌 피서길에 올랐다. 약간은 흥분과 설렘으로 7시간의 여행 끝에 해변에 도착하여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겸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우리는 사는 얘기며 고국에 대한 향수며 많은 얘기들로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셔댔다.

그랬다. 캄보디아 생활 8년 차, 외국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이런 시간을 낸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한껏 낭만에 젖어 한국에서 불렀던 해변의 노래들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식당 주인아주머니랑 모닥불도 피워놓고 달려드는 모기와 전쟁도 치르며, 야자수 늘어진 해변에서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바닥에 뒹구는 술병은 서른 병까지 세고 더 이상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잠을 깬 것은 방문 앞에서 질러대는 외마디 비명 소리에 놀라서였다. 뛰어나가 보니 후배가 어느 남자에게 맞고 있는 게 아닌가. 우선 때리는 남자를 말려 자리에 앉히고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에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도 한국 사람으로 식당 아주머니의 남편이었다.

“아니, 잠을 자고 있는데 저××가 우리 침대에서 자고 있지 뭡니까. 그것도 우리 와이프하고 나, 사이에서 말이요.” 식당 아주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 방이 원래 가족들이 쓰게 하기 위해 가운데에 문을 만들어놓았어요. 그걸 잠가 놓았어야 하는데 청소하는 아이가 깜빡하고 열어 놓았었나 봐요. 저 양반이 술이 취해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우리 부부 가운데로 들어가 잤던 모양이에요.”

사태는 파악이 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정중히 사과를 드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저 친구의 선배인데 술이 취해 들어가지 말아야 할 방에 들어갔습니다. 교육을 잘못시킨 저를 탓하시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아침부터 사과의 술판이 벌어졌다. 모두가 황당해했지만 사실 타국에서 만난 교포들의 그 마음에 무슨 악의가 있겠는가.

남편분 역시 결국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이 술 마시고 또 들어올 겁니까?” 했고,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시아누크빌의 해변가에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강석문 작. <사철나무> 93×65cm. 한지에 먹, 채색. 2009.

이제 여름, 뜨거운 태양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여름 이야기들.

 

남미 농장에서 보낸 뜨거운 여름

김나영 26세. 직장인.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야탑동

대학교 졸업 후 나는 갈 길을 못 찾고 방황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을 해봐도 그다지 나랑 맞지 않았다. 내 스스로 만들어놓은 높은 기준, 하지만 거기에 못 미친다는 열등감 때문에 무기력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 무렵 지인으로부터 ‘남미 농장 봉사 활동’ 제안을 받았다. 그곳은 아몬드를 키워, 남미나 아프리카 등 어려운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쓰는 곳이었다. 그곳에 가보면, 뭔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산 넘고 물 건너 장장 34시간이 걸려, 아르헨티나의 농장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이미 중국, 멕시코, 일본, 미국 등에서 온 약 300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첫날에는 짐을 풀고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듣고, 잠이 들었다.

‘빰 빰빰빠라 빰 빠라 빰빰 빰빰빰’ 다음 날 새벽 5시 30분. 기상나팔 소리가 울렸다. 해는 뜨기도 전이라 쏟아질 것 같은 별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설렘 반 기대 반으로 농장으로 나섰다. 그제야 뜨는 해를 바라보며 트럭을 타고 10분가량을 가는 내내 끝이 보이지 않는 드넓은 땅은 마치 바다의 수평선을 보는 것 같았다.

“우리의 임무는 풀과의 전쟁입니다.” 밀짚모자에 하얀색 반팔 면티, 선글라스에 팔토시를 착용한 농장 주인이 우리가 할 일을 설명해주었다. 실제로 아몬드 나무는 아직 우리 키보다 작았고, 그 주위에는 성인 남자보다 더 큰 가시덩굴과 잡초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잡초를 제거해야만, 아몬드가 제대로 클 수 있는 것이다.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 버거워 2인 1조로 팀을 꾸렸다. 그 드넓은 땅엔 아몬드 나무와 풀, 그리고 우리밖에 없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하루를 시작하고, 해가 질 때 농장 일을 끝냈다. 그리고 잠깐 눈만 감은 것 같은데 또다시 들려오는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농장 일을 시작했다. 하루, 이틀, 삼 일… 계속되는 풀과의 전쟁. 잡초를 제거하던 중 불현듯, ‘나는 아몬드보다 못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냥 참 미안했다. 아몬드도 세상 사람을 위해 쓰이는데 나는 진짜 아무것도 해온 게 없었다. 오직 내 틀 안에 갇혀 나만을 위해 살아왔다.

이 순간만이라도 세상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아몬드는 살리고,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자’는 마음으로 열심히 잡초를 제거했다. 나보다 더 큰 풀 하나가 뿌리째 뽑혀나갈 때, 내 안의 무기력함과 열등감, 자존심과 이기심도 같이 뽑혀나갔다. 예전의 나는 없어지고 아몬드처럼 세상에 필요한 존재로 당당히 새롭게 서는 것 같았다.

농장 일을 하며 틀도 많이 깨졌다. 깨끗한 것 좋아하고 매일 씻는 게 습관이었는데, 그곳에서는 그런 여건들이 풍요롭지 않았다. 때문에 씻을 수 있는 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누울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었다.

또한 나 혼자만 잘해서는 되는 게 없었다. 점점 서로 간에 의지하며, 정말 다양한 국적,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갔다. 나보다는 세상을 위한다는 한 가지의 목적으로 모인 300명의 사람들, 그곳에 내가 있다는 건 행운이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면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샘솟았다. 내가 있는 모든 순간, 내가 설 수 있는 어떤 자리도 감사할 줄 알게 해준 곳. 세상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알려준 아르헨티나의 그 드넓은 농장. 꿈같았던 4주간의 뜨거웠던 여름이 그립다.

 

강석문 작. <너와 함께> 76×72cm. 한지에 먹, 채색. 2007.

 

‘천상의 휴가지’제주에서 알려드립니다

임병도 43세. 전문 블로거. impeter.tistory.com

이제 나에게 ‘여름휴가 어디로 갈 건가요?’ 하고 묻는 사람은 없다. 재작년 아예 제주로 귀촌했기 때문이다. 여름철 열대야가 기승을 부린다는 뉴스를 보면,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 보고 웃는다. 제주에서도 중산간 지방에 사는 우리 집은 한낮에는 잠깐 덥지만, 저녁이면 서늘하고, 새벽에는 시원하다 못해 춥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사방팔방 모두가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침 해가 마당을 비추면 그 상쾌함은 말로 표현할 수조차 없다. 집은 낡았어도 잠시 낮잠을 자려고 거실에 누워 푸른 하늘을 보면, 신선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지인들이 놀러오면 깻잎이며 상추를 따놓고, 마당에서 고기를 구워 먹는다. 지인들은 ‘진짜 너무 환상적이다, 나도 제주도에 내려오고 싶다’고들 한다.

한창 덥다 싶을 땐 그냥 입고 있는 옷 그대로 차를 타고 나간다. 집에서 차로 딱 10분 거리에 바닷가가 있다. 나무숲이 우거진 비자림로를 타고 바다에 가서 몸과 마음을 한 번씩 씻고 오는 그 기분은 경험하지 않은 분들은 모르실 것이다.

예전에 강원도 동해로 바캉스를 떠났다가 고속도로에서만 8시간을 갇혀 있던 기억이 있는 나에게 지금은 하루하루가 휴가이고 여행인 셈이다.

그러나 그렇게 누구나 부러워하는 제주에 살면서 느낀 점은 이 세상에 천상의 낙원은 따로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다.

제주도에도 나름 안 좋은 건 있다. 특히 우리 집처럼 숲에 둘러싸인 집은 여름이면 매일 밤 벌레와의 전쟁이다. 거실에 불만 켜놓으면 온갖 벌레가 모두 달려든다. 담배 크기만 한 나방은 아주 애교스럽고, 벼룩이나 바퀴벌레, 풍뎅이, 딱정벌레 등 자연도감에서나 봤을 법한 벌레와 곤충들이 집 안에 수시로 출몰한다. 벌레가 컴퓨터 위를 기어 다니기도 하고, 다리에 올라타기도 한다. 모기약, 모기향, 전자 모기 퇴치기, 바퀴벌레약 등 철저한 대비를 하고, 온 창틈을 테이프로 물샐틈없이 막아도, 어느새인가 벌레들에게 물리기 일쑤다. 만약 일직선으로 물리고 모기 물린 것보다 훨씬 가려우면 벼룩이 문 것이다.(^^)

습기가 많아 제습기를 온종일 틀어놓아도, 벽지에 곰팡이가 끼는 것은 다반사이고, 옷이며 가방, 심지어는 아기 유모차에도 자고 일어나면 곰팡이가 핀다는 문제도 있다. 이곳에서는 열대야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벌레와 습기인 것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벌레가 나를 일깨워주었다. 세상은 공평하고, 늘 좋은 면과 나쁜 것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려준 것이다.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한 채 필요한 것만 생각하면 끝도 없고, 불만과 불평이 나오는 것이 인간이다. 제일 무서운 것은 벌레가 아니라, 내 안에 들어 있던 불만과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었다. 무더위나 벌레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활짝 웃는 우리 딸아이의 미소와 지금의 삶에 행복하다고 느끼지 못하는 것이 제일 무섭다.

아무리 초호화 여행을 하고 나도 집에 도착하면 “아이고, 집이 제일 편하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지 않는가. 올여름, 최고의 휴가를 어떤 곳으로 갈 것인가 결정하기보다는 어떤 여행이 내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까지 쉬게 해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 같다. 그 역시 힘들다면 아이들과 방 안에서 텐트를 치고 함께 즐기는 모습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악의 여름휴가는 무엇을 해도 만족하지 못하는 마음이고, 최고의 여름휴가는 바로 내가 어디에 있든지 ‘이곳이 낙원이다’라는 생각으로 지내는 것임을, 천상의 휴가지 제주에서 주민으로 살며 깨닫게 되었다.

 

강석문 작. <붕붕> 50×68cm. 한지에 먹, 채색, 아크릴. 2010.

 

내 동생, 순철이

이기철 64세. 농부. 약물산토종농장 운영. 강원도 평창군 대화면

나는 팔 남매의 장남이다. 순철이는 두 살 차이의 바로 밑에 동생이었다. 천성이 착하고 순했던 순철이는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는 것을 항상 자기 일인 줄 알고 살았다. 집에서는 장남인 나만 고등학교까지 보내주었고, 동생은 그냥 국민학교만 나와 농사일을 도와야 했다. 나만 학교에 다니는 게 미안했지만, 동생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언제나 “형, 공부 열심히 해라” 하고 응원을 해줄 뿐이었다. 틈틈이 마을 서당에서 한문도 배우고, 혼자서 기타도 배워 칠 줄 알고, 농사일도 잘하고, 힘도 세고, 헤엄도 잘 쳤던 내 동생 순철이.

1974년 8월 23일, 그날은 억수로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군대를 막 제대하고 집에 와 있었는데, 잠시 나갔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이웃에 머물러 있었다. 비가 내리니 동생도 집에서 잠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식구들 주려고 올해 첫 수확한 감자를 삶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웃 아주머니가 다급하게 순철이를 찾았다. “애들이 떠내려가니 빨리 와서 건져 달라!”고. 당시 우리 마을 앞 강에는 다리가 없어서, 나룻배로 강을 건넜다. 그날은 비가 너무 많이 와서 학교에서 학생들을 일찍 귀가를 시켰다. 그런데 뱃사공이 그만 뱃줄을 놓쳐 버리면서 배가 뒤집힌 것이다. 당시 배에 타고 있던 학생들 11명과 할머니 한 분이 대책 없이 물에 떠내려가고 있었다. 서둘러 강가로 달려간 순철이는 온 힘을 다해서 학생들 한 명 한 명씩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일곱 명의 학생들을 구해냈다. 그리고 다시 강가로 뛰어든 순간, 그만 나룻배의 부서진 나뭇조각이 이마를 치면서 동생도 그대로 물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떠내려온 동생을 발견한 건, 오후 4시경. 동생이 그렇게 된 줄도 모르고 허겁지겁 강가로 나왔던 나는 그 자리에서 오열하고 말았다.

내 착한 동생 순철이. 어머니는 삶아놓은 감자도 못 먹고 갔다며 참으로 서글피 우셨다. 4명의 학생들과 함께 순철이를 산에 묻었다.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나면, 어머니는 항상 강가에서 다슬기를 건져와 장국을 해주셨는데, 동생을 그렇게 보내고는 장국도 끓이지 않으셨고, 생전 물고기도 입에 대지 않으셨다. 동생을 먼저 보낸 후 병이 나서 일찍 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나는 더 이상 고향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다음 해 서울로 나왔다. 하지만 5년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토종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토종이라고 하면, 그전에는 흔하고 진절머리 난다고 했는데, 막상 다시 귀농을 하니 진짜 애착이 갔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그렇게 토종 종자를 기르고 애를 쓰시던 게 생각이 났다. 토종 농사를 지으면서 토종의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을 많이 느낀다. 개량종은 조그마한 재해에도 금세 사그러들지만, 토종은 밟아도 다시 올라온다.

그러다 2006년 8월, 정말로 마을이 다 없어질 정도로 큰 수해가 난 적이 있었다. 강과 밭이 완전히 뒤섞일 정도였다. 그때 아주 희귀 토종인 조개콩도 다 떠내려가버리고 말았다.

종자를 완전히 잃어버렸구나 싶어 속상했는데, 한 달쯤 지나 깜짝 놀랄 일이 생겼다. 빗물에 쓸려 내려가다 전봇대에 걸렸던 조개콩이 그 틈에서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던 것이다. 그렇게 비가 쏟아졌었는데… 그 와중에 살아남다니!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기뻤다. 그걸 따서, 씨앗으로 보관한 후 다음 해 밭에 심었다. 그 조개콩은 지금도 풍성한 수확을 내면서 잘 자라고 있다.

그 조개콩 꽃이 피어날 무렵이 바로 동생의 기일이다. 동생의 희생 이후 마을에는 많은 발전이 있었다. 나라에서 다리도 놔주고, 지붕 개량도 해준 것이다. 또 동생에게는 공덕비도 세워주고, 대통령 훈장도 나왔다.

한 알의 씨앗이 썩어서 열매를 맺고, 그것이 다시 씨앗이 되고. 그렇게 모습은 없어지지만, 영원히 그 씨앗은 살아 있는 것처럼, 동생의 선량한 마음 또한 그렇게 영원히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순철이 덕분에 우리 형제들도 이렇게 화목하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네가 살아 있었다면 형제간에 훨씬 더 화목할 텐데. 순철아, 미안하고 참 고맙다.”

 

강석문 작. <꽃놀이> 63×72cm. 한지에 먹, 채색. 2007.

 

버리고 비우는 웰빙라이프의 지혜 (22)

 

석가모니에게 반특이라는 좀 우둔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동료들이 그의 머리 나쁨을 걱정하며 말했습니다.

“너는 어려운 것을 기억할 수 없으니, 이 글귀나 읽도록 하여라.”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일러주었습니다.

“신체의 동작, 언어, 의지의 작용을 악으로 하지 말지며,

모든 생명이 있는 중생을 상해하지 말 것이며,

오직 바른 생각으로 공(空)을 보면 무익한 고통이 없을지니라.”

그러나 반특은 이 간단한 말씀조차 외울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바보 천치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세존의 제자가 되기는 애당초 틀린 모양입니다.”

이 말을 들은 석가모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바보이면서 스스로 바보인 줄 모르는 사람이 정말 바보다.

너는 스스로 바보인 줄 알고 있으니 정말 바보는 아니다.”

그리고는 비 한 자루를 주며 동료들의 글귀를 더 쉽게 줄여

‘먼지를 닦고 때를 씻으라’는 한마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우둔하지만 정직했던 반특은 열심히 그 말씀을 외우며

동료들 신발의 때를 씻어주고

집 안의 먼지를 깨끗하게 닦았습니다.

그렇게 한 자루의 비와 한 구절의 말씀에 전념한 덕분에

반특은 드디어 자기 마음의 때와 먼지를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난 반특은

그 누구보다 가장 먼저 훌륭한 부처가 됩니다.

 

어떤 길을 가려 하든 엄청난 교리를 외우거나

학식과 지식을 쌓는 것이 능사는 아닌 듯합니다.

논리와 사상에 매이기보다 먼저 몸을 움직이는 것,

한 자루의 비를 들고 동료의 자리를 쓸어주는 것,

그렇듯 참으로 살아 있는 행동이 먼저 나올 때,

비로소 내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의

‘첫걸음을 떼었다’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빼기가 대안이다

고정관념이 우리 행동에 미치는 영향 그 흥미로운 실험들 (1)

정리 편집부 출처 <마음의 시계>(엘렌 랭어 | 사이언스북스)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 생각을 제어할 수 있고 어느 쪽으로든 선택하여 방향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고정관념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50세가 넘으면 체력이 떨어진다”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나빠지기 마련이다” 등 우리가 살아오며 갖게 되는 수많은 관념들이 말이다.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마음의 시계>의 저자인 엘렌 랭어는, 30여 년 이상 여러 실험들을 통해 그러한 고정관념들이 우리의 행동과 잠재성을 얼마나 구속하는지에 대해 보여줘 왔다. 우리를 틀에 가두는 것은 신체가 아니라, 신체가 한계를 지닌다고 믿는 스스로의 사고방식이라는 것. 고정관념을 버리고 사소한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우리 삶이 얼마나 행복하게,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것이다.     

‘여자는 수학을 못한다?’

사전에 자극된 관념이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끼치는 것을 점화효과라고 한다. 예를 들면 ‘여성들은 수학을 그다지 잘하지 못한다’라는 관념을 자극하면, 그 여성은 수학 실력이 악화될 것이다. 동양인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수학 시험을 치르게 하면서, 한 집단은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으로, 다른 집단은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사전 자극했다.

동양인에 대한 고정관념은 수학을 잘한다는 것이고,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은 수학을 잘 못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여성이라는 정체성으로 사전 자극된 집단은 수학 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보였고, 동양인이라는 정체성으로 사전 자극된 집단의 점수는 매우 높게 나왔다.

‘높은 가격이 높은 품질을 의미한다?’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실험 참가자들에게 그들이 에너지 강화 음료라고 믿는 음료를 나눠주었다. 이때 한 집단에게는 음료의 값이 2.89달러라고 알려주었고, 다른 집단에게는 정가 2.89달러의 음료지만 도매로 단돈 89센트라는 할인가에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들이 운동을 마친 후 살펴본 결과, ‘할인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은 ‘정가’ 집단에 비해 운동의 강렬함이 낮았고 운동 후에도 피로감을 더 크게 느낀다고 나타났다.

‘가망 없다던 환자’가 ‘곧 퇴원할 환자’들의 병동으로 옮겨졌을 때  

10년간 말을 못 하는 상태로 보호 시설에 있던 여성이 병동을 개보수하는 동안 같은 건물의 다른 층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녀가 지내던 3층 병동은 환자들 사이에서 ‘가망 없는’ 병동으로 알려져 있었다. 반면 새로 옮기게 된 1층 병동은 곧 퇴원할 환자들이 머무는 곳으로, 그곳 환자들은 가까운 곳을 돌아다닐 자유와 같은 특권을 누렸다.

병동을 옮기기 전 검진 결과, 문제의 여성 환자는 말을 하진 못했으나 건강 상태는 탁월하다고 판단되었다. 그런데 1층 병동으로 옮겨 그곳의 특권을 일부 누리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자, 곧 말을 하더니 이윽고 퍽 사교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3층의 개보수는 곧 끝이 났고, 그 환자는 ‘가망 없는’ 병동으로 돌아간 지 일주일 만에 쓰러져 사망했다. 검시에서는 아무런 의학적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다.

이렇듯 살아오면서 갖게 된, 혹은 주입된 모든 관념들은, 실제 우리의 삶과 신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념을 바꾸고, 없애는 것이 왜 중요한가를 알 수 있는 실험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빼기가 나를 바꾼다

음식에 대한 편견을 깨다

 

30대 초반, 나에게는 정신적 멘토라고 여겼던 분이 계셨다. 그분은 요가, 명상에 일가견이 있었고 외모에서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겨져 나왔다. 하루는 그분께서 나에게 채식을 해보라며 권하셨다. 그분의 정신세계를 닮고 싶은 마음에 나는 곧바로 채식에 들어갔다.

그때부터 육고기는 물론 생선이나 계란도 먹지 않았다. 아침은 야채에 된장, 점심은 도시락을 싸다녔다.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명체를 죽이지 않으니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이론적으로도 내 행동의 당위성을 찾고 싶어 책도 많이 읽었다. 술도 자연스럽게 끊었다. 친구들이 ‘혼자서 천년만년 살 거냐’ 핀잔도 줬지만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단순히 먹고사는 즐거움만 추구하는 ‘그들’과 나는 다르다는 것을, 나는 내 입맛 하나를 위해서 사는 동물이 아님을 스스로 인지시키며 나와의 약속은 십 년이 넘게 계속 지켜졌다. 그러던 2010년 호기심에 시작한 마음수련은 내가 생각했던 음식과 마음의 평화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나는 과체중이라 열등감이 있었다. 그래서 스스로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등산, 헬스, 스쿠버 등 안 해본 운동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내 인생을 돌아보며 채식과 금주를 포함한 이 모든 것들이 열등감을 포장하기 위한 것임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고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너네와는 달라. 난 정신세계를 추구해.’ 마음에 우월함을 채우며 살아온 세월이 십 년이 넘어가다 보니 고집과 틀이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는 절대 피해 준 적 없다고 생각했는데 한 번도 가족 식사를 즐겁게 해본 기억도 없었다. 아빠와의 외식이라는 애들의 사소한 즐거움을 뺏었다는 사실조차도 모르는 아빠였음을 알고 너무나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진리는 무엇을 먹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 오히려 채식한다고 티 내며 나와 남을 구분 짓고 사는 동안 내 삶은 진리와 멀어져 있었다는 것도 알았다.

채식도, 내 삶에서 보고 배운 기준과 틀도, 그걸 가진 나도 다 버렸다. 그 후론 몇 달 사이에 먹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시비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나 자신부터 자유로워졌기에 가능해진 편안함이었다. 주위 사람들의 마음도 진실로 이해하게 되었다. 상대가 무엇을 먹든,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그것을 시비하고 구분 짓고 있는 내가 있다는 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알게 되니 이 몸뚱이만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세상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저절로 들었다. 어떤 높은 이상과 정신세계를 추구하기 전에, 먼저 나부터 참회할 때, 진정한 마음의 평화도 찾아옴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김철기 45세. 자영업. 제주도 제주시 봉개동

인간은 왜 허상인가

글, 그림 우명

세상에는 참과 허가 있다. 참이란 세상이고 인간은 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세상과 겹쳐진 자기의 마음속에

살고 있기에 세상 사는 줄 착각하지만 세상 아닌

자기의 마음의 세계인 허상세계에 살고 있기에

사는 세계도 허상이요, 그 속 사는 인간도 허인 것이다.

세상은 그냥 있으나

자기의 마음의 세계는 없는 것이라 허이듯,

지금 내가 살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허인 귀신의 생각이다.

그곳은 없는 세상이다. 또 자기도 없다.

참인 세상은 아무리 없애도 없어지지 않지만

허는 없애면 없어지니 참에서 보면 없는 것이다.

참에서 다시 나야 없어지지 않는다.

신이란 본래가 형체가 없는 비물질적 실체가 신이라

이 우주의 근원은 정과 신으로 되어 있다

이 존재는 물질이 아니나

이 존재는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라

사람이 아는 것은 자기의 마음에 있는 것을 알기에

이 존재가 자기 속에 가져야 알 수가 있는 것이라

참인 이 존재도 자기의 마음속에 가진 만큼

알 수가 있는 것이라

완전한 것은 이 존재 자체로 다시 난 자만

이 존재를 확실히 알 수가 있는 것이라

이 존재는 살아 있되 그 마음이 없어 일체를 넘어선 자리라

일체에 아는 것도 넘어서고

인간세상에 있는 일체의 것으로부터 벗어난 자리라

세상에 있는 것은 인간의 관념 관습인 마음이 있다

인간의 마음에 있는 것은 모두가 허상이라

인간의 마음에 관념 관습이 떠난

신의 자리는 완전한 자리라

세상의 것이 있되 있음 속에 있지 않고

그 마음조차 없어 자유고 해탈이라

삶을 살되 삶 속에 있지 않고

그냥 존재하는 존재이고 또 영생불사신이라

우 명(禹明) 선생은 마음수련 창시자로서, 인간 내면의 성찰과 본성 회복, 화해와 평화에 기여한 공로로 2002년 UN-NGO 세계 평화를 위한 국제교육자협회로부터 ‘마하트마 간디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 <이 세상 살지 말고 영원한 행복의 나라 가서 살자> <진짜가 되는 곳이 진짜다> <살아서 하늘사람 되는 방법> <하늘이 낸 세상 구원의 공식> <영원히 살아 있는 세상> <세상 너머의 세상> 외 영역본 등 다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