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를 탓하지 않는, 심성 고운 내 친구
홍경석 54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성남동
올해부터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낭달뀌(양지)가 아닌, 음지의 비정규직 박봉으로 살다 보니 매양 ‘허겁지겁’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대학원생이 된 우리 딸이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해 8월 하순의 어느 날은 딸의 대학 2학기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었다. 역시나 돈이 부족해 주변에 융통을 부탁했지만 모두가 “돈이 씨가 말랐다”고 했다. 궁여지책, 한참의 망설임 끝에 이번엔 고향의 죽마고우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금세 받지를 않는다. 차라리 받지 말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바위와 같이 꿋꿋했던 나였건만 자식 교육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어떤 굴종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잠시 후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지?”라면서 내 안부부터 챙겨주는 친구가 참으로 고마웠다. 입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어렵사리 돈 부탁을 꺼냈다. 친구는 지금은 일을 하고 있는지라 이따 퇴근길에 송금을 해주겠노라고 했다.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힘든 노동일을 하는 친구였음에 돈 부탁을 하고 나서도 내 맘은 쓰디쓴 한약을 먹은 양 마음까지 쓰라렸다.
친구는 그날 저녁 즉시 입금을 해주었고 덕분에 이튿날엔 딸의 등록금을 납부할 수 있었다. 너무나 고마운 친구였기에 월급을 받자마자 친구의 돈을 우선 갚았음은 물론이다.
그해 만추의 일요일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고향의 죽마고우들과의 정기적인 회동 모임이었는데, 그 친구의 미간은 그날따라 유독 어두운 그늘이었다. 2차로 노래방에 끌고 갔는데 그 친구는 평소와는 달리 멜랑콜리한 곡조의 노래만을 부르는 것이었다. 급기야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부를 땐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는 가사에서는 금세라도 엉엉 울 듯한 표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여 술을 가득 따라주며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었으나 친구의 입은 여전히 닫힌 철문이었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담배를 권하니 그제야 친구의 입이 열렸는데.
장사 실패와 빈곤의 상륙 등으로 말미암아 그 친구는 오래전에 이혼을 했다. 자식 둘은 본가(本家)의 부모님께서 거두고 계시지만 연로하시어 약값이 밥값보다 더 들어가는 형국이라고 했다. 그러한 터에 장남인 자신의 생업은 늘 작업 환경이 위태롭고 한 달에 며칠 일하기도 버거운 공사 현장의 막일, 즉 노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과는 달리 돈을 모으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님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이었다.
전월(前月)엔 고작 며칠밖에 일을 하지 못해 여간 어려운 처지가 아니라고 했다. 아울러 친구는 두 자녀의 교육비 마련까지 생각하노라니 그처럼 자기도 모르게 침울해졌던 거라면서 그제야 겨우 얼굴을 펴는 것이었다.
사정이 약간이나마 펴진 내가 다만 얼마간이나마 빌려주겠다고 했으나 친구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리곤 밀린 임금을 받으면 해결된다면서 “나 때문에 술맛만 망친 건 아니냐?”며 되레 내 걱정을 해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출근을 했는데, 그 친구가 자꾸만 명치끝에 걸렸다. 전화를 걸어봤는데, 예상과는 달리 밝고 명랑한 음성이다. 나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더 기운 내라!”
미쉘 들라크로와 작.
<Le Canotier(노 젓는 사람)>
79.5×70.5cm, Lithograph on paper.
어언 50년 이상 변함없이 정연한 우정의 끈을 매달고 달려온 진솔한 친구다. 너무도 가난했음에 고작 초등학교만을 마치고 오늘도 시멘트 가루가 휘날리는 공사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친구이다. 하지만 지금껏 역시도 남에게 해코지 한 번 한 일이 없는,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인 것이다. 언젠가 그 친구는 이런 ‘명언’도 남겨 내 맘을 뭉클하게 했다.
“누군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도 모자라 좋은 직장에서 떵떵거린다고 하더구나. 나는 비록 가난과 불학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어렵게 살고는 있으되 그러나 부모님 원망은 안 한다. 부모님께서 날 낳아주신 덕분에 그나마 이 세상의 이모저모를 두루 구경할 수 있다 가는 인생이니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눈물이 핑 돌던지, 지금도 기억의 창고에서 생생하게 유효하다.
그처럼 ‘파도를 탓하지 않는 어부’와도 같은 심성 고운 내 친구, 그렇게 내 곁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내 친구야, 늘 고맙다. 도래하는 새해엔 네가 하는 일도 순풍에 돛을 달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줏빛 나팔꽃 같은 고은이 언니
이계환 26세. 대학생. 뉴질랜드 오클랜드시티 거주
“언니, 고마워요.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 전화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목소리 듣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 “그래, 나도 너가 그렇게 말해주니깐 힘이 많이 된다. 고마워.”
그렇게 한국과 뉴질랜드라는 대서양을 넘는 거리 너머로,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고은이 언니의 목소리. 나는 또 한바탕 드라마처럼 붉으락푸르락했던 마음을 고은이 언니한테 다 쏟아냈지만 언니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하다.
마치 비 온 후 막 고개를 든 자줏빛 나팔꽃처럼 언제나 환한 미소만 가슴에 남게 해주는 고은이 언니. 세상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지는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이 바로 장고은 언니다.
언니는, 사실 직접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내가 적성에 맞지 않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너무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때였다. 고은이 언니 아버지께서는 당신도 딸이 있는데, 영국에서 법대를 졸업했다고 말해주셨다. 하지만 당신의 딸도 법대가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아 굉장히 힘들어하다 그 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방향을 바꾸었다고 말해주셨다.
당시 진로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고 심각했던 나는 고은이 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었고, 그래서 언니를 만나기 전부터 왠지 언니라면 내 힘든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 같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어느 겨울날, 겨울 방학 때 한국에 잠시 들렀을 때 언니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너무 차가워서 오히려 맑게 느껴지던 그 겨울밤, 우리는 새벽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법대 이야기, 진로 이야기, 가족 이야기…. 아침 일찍 출근해야 돼서 피곤했을 법한데도, 언니는 그렇게 철없는 동생의 이야기 보따리를 들어주었다.
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둘 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서로 바빠 자주는 못 보더라도 내 마음이 정말 힘들 때면 유일하게 달려와주는 사람은 언니였다.
한번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지쳐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전 제가 왜 공부해야 되는지 그 목적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언니는 왜 언니가 법대 공부했는지 이제 알아요?” “응. 지금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
또 한 번은 부모님과 엄청 크게 싸우고 짐까지 다 싸서 집을 나왔을 때였다. 나는 결국 또 언니에게 엉엉 울면서 전화를 했다. 언니는 바로 달려와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역시나 내 한풀이를 들어주었다. 음식점을 나올 때쯤 결국 언니의 그 따뜻함은 내 마음을 돌려놓았다. “맞아요. 제가 부모님께 잘못한 것 같아요.”
미쉘 들라크로와 작.
<Winter in New England(뉴잉글랜드의 겨울)>
72×53.5cm, Serigraph on canvas.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힘들다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따스한 사랑으로 결국 세상에 대한 내 마음속의 미움과 원망을 다 녹여주었던 언니. 내가 어떤 불만과 한풀이를 해도, 결국 내가 다시 일어설 거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기다려준 언니.
그런 언니의 격려와 따스함을 받았기에, 나도 이제 힘든 일이 있어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다른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언니에게서 받은 똑같은 사랑과 따스함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난 호 월간 마음수련에 ‘코이그지스트(coexist)’라는 시가 실렸다. 그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서로 도와주는 우리가 아름답다. 항상 같이 있어 아름답다. 함께할 수 있어 아름답다. 아픔도 행복으로 만드는 우리가 아름답다. 서로 믿는 우리가 아름답다….’
이 시처럼 항상 같이 있어주고, 믿어주고, 도와주는 언니를 만나서 정말 좋다. 언니, 언제나 곁에 있어주세요. 그렇게 제가 철들어가는 모습 계속 지켜봐주세요.^^
511
하루만큼 더 사랑하고
더 닮아가는 우리 부부
김은정 39세. 주부. 부산시 동래구 안락2동
우리는 2012년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신혼 때처럼 다정해졌다. 그래서 다행이다.
첫아이를 낳기 전 누구보다 사이좋았던 우리는, 주변의 ‘아기 낳고 나면 사이가 나빠진다더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설마 우리가? 우린 아닐 거야. 우린 그러지 말자. 약속.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예민해진 우리는 서로에게 바라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커지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말다툼을 했고 상처를 주고받았다.
남편이 코를 골아도 사랑스럽게 배를 두들겨주며 책을 읽었던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퇴근하자마자 뽀뽀~ 하며 입술을 내밀었던 남편도 사라져 버렸다.
그 이유엔 갑작스런 남편의 직장 발령도 있었다. 첫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사이는 더 멀어졌다.
남편은 새벽 4시 30분이면 출근해 밤 11시가 넘어야 들어왔다. 남편은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을 하기도 했고 그럴 때면 무관심한 나에게 꽤나 섭섭해했다. 나 역시 아기를 혼자 돌보느라 지쳐 있었기에 도와주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우리가 이대로 그저 그런 부부가 될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데면데면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둘째 임신, 6주 차에 계류유산. 아주 초기 유산이었지만 마음도 몸도 힘들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 것일까. 어느 때부터인가 남편은 나를 위해 칼처럼 퇴근해 들어오려 노력했다. 그리고는 저녁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아기도 씻겨주었다. 그렇게 내 곁에 있어준, 남편의 따스한 배려로 인해 그동안 섭섭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고 따듯한 온기로 채워졌다.
그렇게 남편이 달라짐과 동시에 나도 빨리 회복이 되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린 다시 또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남편은 더욱 열심히 첫애를 돌봐주고 분리수거며 요리를 해주었다. 가끔 내가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면 벌서는 기분으로 밥을 먹거나, “저쪽에 들어가서 먹을까?” 하며 나를 배려해 주었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La Nuit Bleue(푸른 밤)>
95.5×82cm, Serigraph on paper.
어느 날인가, 육아 파워블로거의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아기가 두 돌은 지나야 냉장고 속이 보이고, 남편이 입을 옷이 있나 없나가 보이고, 집이 보인다는 글이었다.
남편도 같이 읽어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몰라도 괜찮아.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하면 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만 남편에게 기대 펑펑 울고 말았다. “입덧 끝나면 다 보답할게, 미안해” 했더니 웃으면서 “뭐가 미안하냐”고 한다.
점점 나는 남편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남편 역시 나의 고충을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2년을 맞으며 약속이라도 한 듯 사이가 좋아진 우리. 참 신기하고, 참 행복했다.
하루 종일 귀찮을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는 남편. 퇴근할 무렵이면 ‘회식할까 봐 조마조마해’ 하며 빨리 집에 오고 싶어 하는 남편. 나도 내 남편을 다시 ‘귀염둥이’라 여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즐거웠다가, 좋아했다가, 심드렁해지기도 하면서 우리는 오늘 또 하루만큼 더 사랑을 하고, 하루만큼 더 닮아가는가 보다.
지난달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어서 이 시기가 지나 남편 와이셔츠도 잘 다려주고, 맛있는 술안주도 만들어주고 싶다. 우리에게 뜻깊었던 한 해도 벌써 저물어간다.
“남편, 너무 고맙고. 미안해. 새해부터는 내가 보답할게. 꼭!!”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이 삶이 마냥 좋다.
나만 바라보는 나바라기, 토토와 순돌이
양상훈 59세. 한지작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가을, 작업실 창밖엔 개미취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많은 벌과 나비들이 모여들어 꿀 잔치를 벌이는지 산속의 작업실은 왁자지껄하다.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홀로 머물고 있자니, 가끔은 외롭다. 하지만 나에게는 애완견 토토와 순돌이가 있어 행복하다. 강아지 얘기가 무어 대수냐 하겠지만, 내 곁에 항상 있어 기쁨을 주는 또 하나의 가족들이다. 늘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들. 토토는 못 말리는 비글, 순돌이는 똑똑한 진돗개 믹스견이다.
토토는 강아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막내가 조르고 졸라 키우게 됐는데, 어릴 때부터 동생처럼 침대에서 같이 자고 방에서 키웠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나를 보고 “아빠다, 토토야” 하는 막내를 보고 “내가 왜 강아지 아빠냐?”고 화를 낸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정이 들어 강아지 아빠임을 인정한다. 사냥견이라, 성견이 되니 목소리가 커져 아파트 대신 이곳 작업실에서 키우고 있다.
순돌이는 옆집의 잘생긴 진돗개가 바람을 피워 생긴 믹스견 새끼다. 아주 어릴 때 분양받아 키웠다.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지만, 마을 닭 한 마리를 해치운 후, 불쌍하지만 묶어 키운다.
열심히 작업에 열중일 때면, 토토는 내 옆에 붙어 나를 지켜주고, 순돌이는 창밖에서 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나바라기’들이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72×59.5cm, Serigraph on canvas.
몇 해 전 사랑하는 부모님을 연달아 여의어 며칠간 우울해 있는 나를 보고, 가만히 옆에 와 한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토토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어요. 너무 슬퍼 말아요” 하는 눈빛으로 연신 나의 볼을 핥아주었다.
순돌이는 먹이를 주면, 허겁지겁 먹지 않고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려 고마움을 표시한 후, 내가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어야 밥 먹기를 시작한다.
나의 발자국, 차 소리를 듣고도 반기는 순돌이는 예의가 무척이나 바른 강아지다.
장난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토토도 내 작품이나 재료들은 절대로 건들지 않고 피해 다닌다. 두 마리 모두 착함의 본성을 인간 못지않게 갖고 있다.
작가란 각박한 현대인들이 정서적으로 정화되게 도와주어 풍요로운 삶을 갖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미(美)란 곧 선(善)이다’라고 생각한다.
동물에게도 무한한 착함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언제나 나만 바라보는 나바라기들…. 토토와 순돌이와 함께 좋은 작업에 정진하고 싶다.
83세 노부부가 가르쳐준 따듯함
임해숙 65세. 요양보호사. 전남 화순군 화순읍
그 어르신들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봄이었다. 83세의 노부부. 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신 할아버지는 대장암 수술로 대소변 주머니를 차고 생활하셔야 했고, 할머니는 부축을 해야 겨우 화장실에 가실 만큼 거동이 불편했다.
요양보호사로서 처음 어르신들을 돌보기 위해 집에 갔는데, 집안 구석구석 먼지가 가득하고, 냄새가 어찌나 지독하던지, 6개월을 닦고 쓸었다.
거동이 어려운 분들이니 아침에 출근해서 밥 챙겨드리고, 온 살림 다 하고, 씻겨드리고…. 나로서도 64년 평생에 이런 일을 해본 건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힘들고 서러워서 울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든 건 어르신들이 마치 식모 대하듯 할 때였다. 정부에서 보조금을 주어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건데, 자기 부담금 조금 낸다고 마치 유세를 부리는 것 같았다. 너무 서러워서 이달만 하고 그만해야지, 매달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럴 때마다, 효성노인복지센터 김숙이 원장님은 “처음엔 다 그렇다. 하다 보면 좋아질 거다. 어떻게 처음부터 좋은 말만 하고 좋은 모습만 보이냐. 시간이 가면 해결될 거다. 우리 하기에 달렸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내 부모님 모시듯이만 진실하게 모시면 된다. 어르신들께 바라지 말고 기대하지 말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모시면 된다. 힘내라”고 하셨다.
그런데 진짜 원장님 말씀처럼,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6개월이 지나자, ‘늙고 병들고 거동이 불편한데, 얼마나 힘들까’ 나도 모르게 점점 그분들 입장에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몸이 건강해서 일할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3년 전, 돌아가신 엄마 생각도 너무너무 많이 났다. 이분들한테 하는 것 반만 해드렸어도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그리고 어르신들을 보니 미래의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까웠고, 최선을 다해 잘해드리고 싶은 마음만 들었다.
이후에는 항상 따듯한 말로, 따듯한 인상으로 대해드렸다. 음식도 입에 맞으시도록 더 신경을 썼다. 말씀은 잘 못하시지만, 밥을 먹여 드릴 때 조금 더 입에 맞는 반찬은 쉽게 꼴딱 넘기시는 걸 보면 뭘 더 맛있어 하시는지 알 수 있었다. 다음에 그 음식을 해드렸는데, 잘 드시는 걸 보면 어찌나 기분이 좋은지. 우연히 시작하게 된 요양보호사지만 사람이 사람을 돌보면서 느끼는 기쁨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뿌듯했다.
지난여름 볼라벤 태풍이 몰아친 날이었다. TV에서는 피해 없도록 단속을 잘하라고 야단이었다. 어르신들 댁에서 나오면서 단속한다고 하긴 했지만 새벽 2시경이 되니 폭우에 강풍, 번개까지 몰아치는데 정말 무서웠다. 어르신들이 걱정이 되어서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은 창문이 깨져도 되지만, 그 집 유리창이 깨지면 노인들이 얼마나 놀랄까.
일단 집을 나섰는데 비바람 때문에 나도 날아갈 것 같았다. 그런데 마침 택시가 잡혔다. 겨우 택시를 타고 가서 대기시켜 놓고, 가지고 간 테이프로 유리창에 안전막을 쳐놓았다. 어르신들은 치매기가 있으셔서, 저녁에는 잠 잘 자는 약을 드시는데, 방 안을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주무시고 계셨다. 휴~!! 다행이다, 생각하고 다시 집에 오니 머리고 옷이고 온몸은 흠뻑 젖었지만, 마음만은 훈훈하고 즐거웠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Noel de neige sur Paris
(파리의 화이트 크리스마스)>
58×94.5cm, Serigraph on canvas.
지금은 어르신들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원하시는지 알 수가 있다. 물을 드시고 싶구나, 덥구나, 간지러우시구나, 뭐가 잡숫고 싶구나…. 어르신들도 늘 “자네 아니면 못 산께, 같이 살면 안 되는가” 하시고, “자네가 다 알아서 하게” 하시며 모든 것을 믿고 맡기신다.
내가 올 시간이 되면, 두 분 다 현관문 쪽만 보고 계신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필요로 하고 나만 기다리는 그 어르신들을 보면 나도 힘이 난다. 그분들을 보면 모든 욕심 다 내려놓고, 정말로 순수하게 흐르는 냇물처럼 살고 싶어진다.
혼자 사는 사람은 없다. 사람 속에 사람이 산다는 말이 딱 맞다. 사람이 곁에 있을 때 참 힘이 된다. 진짜 사람이 힘인 거 같다. 처음에는 너무 힘들어서 울었는데, 지금은 모든 게 짠해서 눈물을 훔치게 된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렇게 어르신들을 도와드리며 살고 싶다. 그분들이 더 건강해지시고 더 행복해지시길, 날마다 기도한다. 그렇게 내 곁에 계속 오래오래 계실 수 있게 해달라고.
어느덧 연말, 벌써부터 동기 동창부터 비즈니스 관련 모임까지 다양한 송년회 모임 스케줄이 잡히고 있으신가요. 한 해를 잘 보냈는지 정말 궁금하고 보고 싶은 사람들과의 모임이 있는가 하면, 왠지 어색하고 불편한 모임도 있을 겁니다. 인간관계를 잘 유지하기 위해 수많은 모임에 참석하느라 지친 적이 있으시다면, 어느 순간 참석하기 부담스러워진 모임이 있었다면, 한번 점검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는 왜 이 모임에 나가는가, 왜 이 사람들과 만나는가. 나는 어떤 모임에 가고 싶은가. 지금 짚어봅니다.
– 편집자 주
모든 인간관계는 깊이 이해되고 체험되기를 원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빚어지는 갈등은 우리 자신을 치유하라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에바 마리아 추어호르스트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마음은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부모를 섬기면 그것이 효요, 그 마음으로 친구를 만나면 그것이 우정이요, 그 마음으로 어르신을 모시면 그것이 공경이요, 그 마음으로 사회생활을 하면 그것이 곧 인맥입니다.
– 김기남. <서른, 인맥이 필요할 때>(지식공간) 중에서
사람이 살아가면서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을 뿐만 아니라 관계를 끊는 능력도 있어야 한다. – 엘빈 토플러
인간은 저마다 신의 아들이므로 모든 인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 헨리 카이저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려는 사람은 누구의 친구도 될 수 없다. – 프페퍼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숫자, 150명
영국의 문화인류학자 로빈 던바(옥스퍼드대 교수)는 1990년대 초, 침팬지, 원숭이 등 영장류 30여 종의 사교성을 연구하다가 대뇌의 신피질이 클수록 교류하는 ‘친구’가 많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신피질은 대뇌 반구(半球)의 표면을 덮고 있는 층으로 학습, 감정, 의지, 지각 등 고등한 정신 작용을 관리하는 영역이다. 인간의 경우 신피질 크기를 감안할 때 친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 수는 약 150명이라는 것. 아주 사교적인 사람이라도 온전한 친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한계는 150명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던바 교수는 이를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온라인상의 ‘친구 맺기’에 적용해 보았는데, 페이스북 등 사이트에서 관리하는 인맥이 수천 명에 이르는 ‘사교적인 사람’과 몇 백 명 정도인 ‘보통 사람’을 비교했을 때(친구의 기준은 1년에 한 번 이상 연락하거나 안부를 묻는 것으로 삼았다.) 두 부류 간의 진정한 친구의 수는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친구가 1,500명쯤 된다는 사람들이나 수만 명에 달한다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150여 명과만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MIT의 사회학자 셰리 터클은 인터넷을 통한 가상 경험이 일반화되면서 나타나는 자아의 변화에 주목해왔다. 그는 수백 명의 젊은이들과 부모를 대상으로 새로운 매체가 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연구했다. 놀랍게도 이 연구에서 젊은이들이 부모와 친구들의 만성적인 주의력 분산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가까운 사람들과 집중해서 대화하고 소통하는 것이 이젠 애써 노력해야만 하는 일이 된 셈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한 사람과 온 마음을 다해 또는 주의 집중해서 만나지 않는다. 지금 어느 한곳에 머물러 있지만 곧바로 다른 곳으로, 즉 다른 친구나 가족, 사무실 등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이메일이나 페이스북을 통해 다른 대륙과도 연결되는 삶을 산다. 우리는 한 번에 네 사람이나 여덟 사람, 혹은 그 이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에 만족해한다. 심지어 건성이라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하고만 주의를 집중해 만나는 것은 오히려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고, 타인에 대한 주의 집중도는 약해졌다.
– 바스 카스트. <선택의 조건>(한국경제신문사) 중에서
인간관계도 넓게 보면 물건을 정리하는 것과 같은 결단력을 통해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나이를 먹다 보면 비즈니스 관계도 아니면서 진심을 공유하는 것도 아닌 사람이 주변에 있는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문제는 그들이 단순히 존재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인 쪽으로 내 삶을 휘저으면서 삶을 복잡하게 만들 때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사람은 많이 알수록 좋은 거 아니겠어? 저 사람이 언제 어느 때 도움이 될지 어떻게 알아?”라는 생각에 계속 내버려둔다면 삶은 결코 단순해지지 않는다. 곁에 있는 의도가 순수하지 않은 그들이 생색내기가 아닌 진짜 도움을 줄 리가 없을 뿐더러, 혹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감내하며 받는 인생의 손실을 보전할 만큼 가치 있을 수는 없다. 그런 이들이 주변에 있다면, 선 밖으로 정중하게 밀어낼 수 있어야 한다.
– 남인숙. <서른에 꽃피다>(이랑) 중에서
연말 모임, 이렇게 해보면 어떨까요?
연말은 모임이 많은 시즌이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한 해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작에 앞서 여러 인연과의 모임을 통해 한 해를 정리하고 안부를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모임들이 항상 반가운 건 아니다. 내겐 ‘동창 모임’이 그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5년 정도 되던 때, 우연히 친구로부터 동창 모임 연락을 받고 무척이나 설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함께 자율학습을 땡땡이치던 친구부터 전교 1등 하던 녀석까지, 어떻게 변했고 잘 살고 있는지에 대한 궁금함으로 모임 날을 기다렸다.
드디어 동창들의 첫 모임이 열렸다. 너무나 오랜만에 본 친구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한 모습에 신기해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고 얼싸안던 기억들. 사업 실패로 힘들었던 친구, 사고로 젊은 나이에 생을 달리한 친구들의 소식까지…. 하지만 그렇게 모임을 끝내고 다음 모임이 열린다고 연락이 왔을 때는 처음처럼 반갑지가 않았다.
한 해 두 해 모임을 할수록 부담으로 다가왔고, 서로 다르게 살아온 환경으로 인해 친구들과의 대화에도 공감이 어려웠다. 그 후 동창 모임은 반복된 옛날 얘기와 자기 자랑하는 모임이 되어갔다. 한둘씩 모임에 나오지 않는 친구들도 늘어났고, 직업이나 경제력이 비슷한 친구들만의 작은 모임들이 활성화되었다. 심지어 경제적으로 어렵거나 자랑을 하기에는 좀 부족한 ‘평범한’ 친구들은 동창 모임이 싫다고 할 정도였다.
그 무렵, 나는 동창들에게 제안을 했다. “아무 이해관계 없이 만난 친구라서 동창 모임이 좋고, 모두 편하고 기쁘자고 만나는 건데,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니. 앞으론 술만 먹지 말고, 1시간 정도는 2~3명 동창들이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 하는 일 등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소통’하는 시간을 갖자”고. 특히 나오기를 꺼려하는 동창(평범해서 자랑거리가 많지 않은)들에게 ‘작은 강연’을 하게 하자는 내용이었다. 40대 중반이다 보니 이야깃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면서 우리는 점차 소통하고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는 우정으로 발전하고 있다.
모임이 많은 연말, 구성원들을 이해하고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모임을 계획해보면 어떨까? 어떤 모임이든 무엇인가를 얻고, 서로 공감의 끈이 있어야 지속될 수 있다. 인간관계의 기본은 ‘관심’ ‘공감’ ‘배려’이기 때문이다. – 홍용준. 44세. 런어스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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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마무리하며, 일년간 받은 명함을 훑어본다. 인사치레로 받은 명함, 물건을 살 때 받았던 명함, 음식점 명함까지…. 차마 버리지 못한 이 작은 종잇조각들이 책상 여기저기에 수두룩하게 쌓여 있다.
사회생활의 시작이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 명함이지만 무조건 많은 명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인맥 관리를 잘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친분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숫자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중요한 인맥의 명함이 책상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가 정작 필요한 순간에 명함을 못 찾거나, 잃어버리게 되어 큰 실수를 할 때도 있다. 관리되지 못한 인맥은 도리어 인간관계에서 신뢰를 떨어뜨리고 성공의 발목을 잡는다.
지금 당신의 명함첩, 주소록에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는가. 인맥 과시용으로, 자기만족용으로 누구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사람들의 연락처까지 마음의 짐으로 자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거품 인맥’들을 골라내서 과감하게 정리하는 것이 인간관계를 잘 꾸려가는 첫 번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 빈자리만큼 더 소중한 사람들에게 신경을 쏟을 수 있고 그것이 앞으로 평생을 함께할 수 있는 인연을 만드는 초석이 되기 때문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면, 에너지와 기회를 주는 사람들로 내 주변을 채우고 싶다면, 먼저 명함과 연락처부터 정리해보자. 내 주변 사람을 대하는 현재 나의 마음 상태를 점검하고, 새로이 다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명함을 정리하기 위해선 가장 먼저 명함 주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자신의 명함이 쓰레기통에 처박히거나 길거리에 떨어져 밟히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그 사람의 명함은 단지 종잇조각에 불과한 존재가 아니다. 만난 사람에 대해 애정을 갖고 특성에 맞게 그룹을 정하고, 메모 난에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을 남기는 게 좋다. 명함은 보관하기 위해서 정리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 위해서 정리하는 것임을 명심하자.
① 개인적인 활동으로 받은 명함인지, 업무 관련 명함인지, 서로 기억을 하고 있는지, 연락 가능한 번호인지, 명함 주인이 이직했는지 등의 질문에 따라 ‘필요’와 ‘불필요’로 나눈다. ② 확인이 필요하거나 망설여지는 명함은 중간 지대에 모아둔다. 시간이 지나면 판단 기준이 명확해진다. ③ ‘불필요’에 해당하는 것은 과감히 쓰레기통에 버린다.
명함을 받으면 일주일 이내에 스마트폰이나 이메일 주소록에 입력하는 등 사용할 수 있는 데이터로 바꾸어 정리한다. 무조건 최신 프로그램을 쓰기보다는 자신이 사용하기 가장 편리한 방법을 이용해 정리해서 자주 살피고 관리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주소록에 입력한 종이 명함은 회전식 명함 정리함을 이용해 150장의 명함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이 정리함을 돌려보며 그동안 소원한 이들에게 문자나 전화를 하면 된다. 새로운 명함 한 장을 추가해야 한다면 무조건 한 장을 빼자. 그래야 명함도 정리되고 인맥도 정리된다.
휴대전화 기기를 바꿀 때마다 수백 명의 번호를 이동하는 것이 하나의 업무가 되어버렸다. 자주 연락하는 사람, 편하게 불러내 밥 한 끼 먹고 싶은 사람은 몇 안 되지만, 수백 명의 전화번호를 돌려보다가 시간을 빼앗긴다. 새해 인사 메시지를 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 늘 불평불만하는 사람, 예전에는 친했지만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연락하기조차 어색한 사람들을 목록에서 지워보자. 6개월, 1년 등 기간을 정해 한 번도 연락이 없었던 번호, 없어진 번호, 누구인지 생각나지 않는 번호도 지우기로 한다. 그중 꼭 다시 보고 싶은 친구가 있다면 하루에 한 명씩이라도 연락을 시작해보자. 언제나 즐겁게 전화할 수 있는 사람들로 전화번호부가 채워져 있을 때 그 상쾌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정리 문진정 참조 도서 <하루 15분 정리의 힘>(윤선현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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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이의 엄마이며 주부이자 화가인 김은희(60)씨. 그녀는 지난 10월, <우리 그림展>이란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민화의 매력에 끌린 지 10여 년.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노안도(蘆雁圖), 서가를 그린 책가도(冊架圖) 등 26점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원래를 가리고 있던 셀로판지를 떼는 것과 같다고 하는 김은희씨. 마음을 비우며 그림을 그리는 게 더욱 편안해졌다는 화가 김은희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입니다.
가을빛이 좋은 날,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림을 알리는 자리이기보다 조촐하게 지인들을 초대해서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어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탐스럽게 핀 노란 국화처럼 풍성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화가의 꿈을 갖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어요. 인형을 그리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참 잘한다’고 하셨지요. 그 칭찬 한마디에 ‘아, 나는 그림을 그려야 되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그렇게 미대 동양화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10여 년 동안은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느라 붓을 놓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을 찾고 싶다는 마음에 그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기뻤지요.
처음엔 그리는 것만으로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전시도 해보고 싶었지요. 하지만 간단한 그룹전을 한다 해도 제겐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모전에도 내보고 그룹전도 참가했죠. 그런데 함께했던 사람들이 나보다 더 좋은 상을 받으면 속상한 거예요.
‘나도 잘 그릴 수 있는데… 저 사람이 나보다 더 특별하게 나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옹졸한 생각을 하는 나, 남과 자꾸 비교하는 자신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하지만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계속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다음엔 어느 공모전에 내야지, 그때 이런 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면서. 그렇게 그림이 나를 구속하는데,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가 2006년에 마음수련을 하게 됐습니다. 여동생 부부에게 소개받아서 아들이 먼저 하게 됐는데, 아들이 수련을 하더니 마음가짐이 확 바뀐 거예요.
아들은 어릴 때부터 항상 전교 1등을 했지만 1등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스트레스도 많아 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전엔 1등을 하려고 애를 썼다면 지금은 1등이란 목표를 놓고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자체가 즐거워요. 그렇게 즐기면서 하는데도 결과는 똑같은 것 같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아들 말이지만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되니 힘이 안 든다는 얘기가 참 와 닿았어요. 아들의 변화를 보고 저도 얼른 마음수련을 했지요.
그렇게 저의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버리는데, 어느 날인가 저 마음 밑바닥에서 ‘자유다’ 하는 소리가 확 터져 나왔습니다. 제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그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었어요. 나름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어디에 딱 구속되어 있다가 팡 터진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마음을 계속 버리니까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게 내가 아님을, ‘진짜 나’는 무한대 우주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았을 땐 정말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사실 제 삶은 평탄했어요. 좋은 부모 밑에서 편하게 자랐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고, 남편 사업도 그럭저럭 잘되고, 시댁 식구들도 너무 좋았으니까요.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도 감사함은 잘 몰랐어요.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하면서도 자꾸 비교하고 열등감 속에 자신을 가두었으니까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이라 생각했더라고요. 결국 그림도 제 자존심이었어요. 남보다 잘 그려야 하고, 칭찬 듣고 인정받아야 한다…. 근데 그러는 순간 그림과는 멀어졌던 겁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내 마음세계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런 마음들이 그림에 덕지덕지 붙어버렸으니까요. 수련을 하면서 그렇게 곁가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마음들을 하나씩 버려나갔어요. 붓, 화집, 다녔던 미술관 등 그림과 관련된 기억들도. 그러고 나니 어느 때부터인가 그림 그리는 게 자연스러워지고 편안해지더군요. 결국 마음을 비운다는 건 내 삶에 붙어 있던 셀로판지를 하나 떼는 것이었어요. 셀로판지를 떼도 원래 있는 건 그대로 있잖아요. 셀로판지란 마음의 색안경을 없애고 나니까, 마음 없이 하는 게 무엇인지 알겠더라고요.
이젠 그림 그리는 자체가 즐거워요. 잘 그려야겠다, 무슨 색을 칠해야겠다는 것도 없고요. 그냥 옆의 색에 맞춰서 칠하다 보면 어느새 그림이 완성되어 있으니까요.
문득 옛 선비들이 문인화를 그렸을 때의 마음가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우리 선조들은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그림을 그렸잖아요. 때문에 그리기 전에 먼저 마음을 비우려고 했고요. 그래서 요즘에 저는 빼야 한다는 말이 정말 와 닿아요. 그 무엇을 하든 생각이 많으면 그것에 휩싸여 집중하지 못하고,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니까요.
이번 전시회에 나이 지긋하신 한 남자분이 오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림에 사심이 없어서 좋다”고. 그 말이 정말 좋고 참 감사했어요. 또 어떤 분은 “갤러리에 그냥 편안히 앉아 있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고마운 일이지요.
제가 그린 그림은 집에 걸어놨을 때 가장 편안한 그림이었으면 좋겠어요. 옛날에 서민들이 가장 편하게 즐겨 그렸던 것이 민화이듯이, 집 안 어디에 붙여놔도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 같은 그림,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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