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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영주 무섬마을

‘육지 속의 섬’ 무섬마을!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는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해서 무섬마을이라고 불린다. 안동 하회마을, 예천 회룡포와 마찬가지로 강이 육지를 크게 휘감으며 절경을 빚고 있다.

강은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이다. 내성천은 경북 봉화에서 발원해 무섬마을 직전 500m쯤에서 소백산에서 내려온 서천과 합류해 무섬마을과 예천군 풍양면의 삼강주막을 지나 낙동강으로 접어든다. 무섬 앞을 흐르는 강은 폭이 100m도 넘는다. 백사장이 넓고 물길도 고와 보기만 해도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다.

마을의 집은 40여 채. 한국전쟁 전까지 주민이 400~500명에 이르던 마을이 현재는 주민 수 40여 명의 고즈넉한 한촌으로 변했다.

그러나 숲 아래 어깨를 맞댄 오랜 고택들을 보면 이곳이 양반촌이었음이 실감 난다. 마을 최초로 지어진 만죽재와 고종 때 의금부도사 김낙풍이 살았던 해우당을 비롯해서 김뢰진, 김규진, 김덕진, 박덕우의 가옥 등 기와채 9채가 민속자료나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있다. 영주선비촌의 만죽재, 해우당, 김뢰진 가옥, 김규진 가옥은 무섬마을의 원래 고택을 본떠 지은 것들이다.

마을을 풍수지리로 보면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형태다. 또는 매실나무 가지에 꽃이 피는 ‘매화낙지형’, 연꽃이 물 위에 떠 있는 ‘연화부수형’이라고도 하는데 그 덕분에 많은 선비가 나오고 대대로 부를 누렸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반경 30리 안에 무섬마을 소유 농토가 쫙 깔렸었다”고 회상한다.

무섬마을 토박이 김한세씨는 “무섬은 태백산의 끝자락이고, 마을 앞에 보이는 산은 소백산의 끝자락이며 근방 아홉 개 골짜기의 물이 한곳에 모여 마을 앞으로 흐른다”고 설명한다. 집들의 방향이 서쪽으로 많이 치우쳐진 것은 물의 정기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함이란다.

박정희 정권 때에는 이처럼 좋은 마을의 기운이 끊길 뻔했다. 굽이치는 강물을 직선으로 만들려는 토목공사가 계획되고 기공식까지 성대하게 치러졌기 때문. 다행히 주민의 결사반대로 공사가 무산돼 오늘날까지 수려한 풍광이 남게 되었다.

무섬마을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해 아도서숙(亞島書塾)이 들어서며 독립운동이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1928년 10월에 세워진 아도서숙은 일제의 창칼에 의해 폐쇄될 때까지 5년 가까이 계몽사상을 교육하고 독립 의식을 일깨우는 장소로 사용됐다. 물길에 의해 고립된 지리적 장점이 아도서숙의 탄생을 가능하게 했다.

마을을 외부와 연결하는 것은 오로지 외나무다리였다. 마을이 번창할 때에는 문수초등학교와 분교 두 곳 등 초등 교육 시설이 주변에 3개 있었고 학생 수도 500명 안팎으로 시끌시끌했다. 그때 등굣길로 이용되던 다리가 현재의 시멘트 다리(수도교) 자리에 있었고, 그 외에도 다리가 2개 더 있었다.

외나무다리는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상징물이었다. “무섬은 한번 시집오면 죽을 때까지 나가지 못했어요.” 김한세씨의 설명이다. 유교적 규율이 엄격한 지역이라서 여성의 입지는  좁을 수밖에 없었다. 가마 타고 시집올 때 건넜던 다리는 생을 마치고 상여에 실려 나갈 때 마지막으로 통과했다. 인생의 처음과 끝을 의미하는 곳이 외나무다리다.

그런데 그 다리가 요즘은 낭만과 추억을 쌓는 상징물로 변해 관광객의 시선을 끄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무섬 사람들은 2005년부터 옛 정취와 전통을 되살리고 마을의 활기를 되찾기 위해 가을마다 성대한 축제를 벌인다. 여름 홍수 때 다리가 떠내려가는 것을 염려해 다리를 걷었다가 가을에 다시 설치하기를 반복한다.

초가지붕과 골목에 박덩이가 뒹굴고 다양한 꽃과 곡식이 숲과 함께 조화를 이뤄 옛 정취를 물씬 풍기는 전통 마을 수도리는 마음이 착잡할 때 조용히 가볼 만한 여행지이다. 바람이 스치는 너른 강줄기, 그 위로 노을 지는 석양이라도 바라본다면 부자 마을의 풍요로운 기운이 온몸에 전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무섬마을은 너무 현대화된 하회마을과 지세가 비슷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다른 고즈넉한 여행지다.

글&사진 이두영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의 저자

 

<여행 쪽지> 무섬마을을 한눈에 감상하려면 수도교에 다다르기 약 300m 전에서 ‘술미’ 이정표를 보고 산길로 올라가야 한다. 고갯마루에서 산으로 들어서서 10분 정도 걸으면 강물에 휘감긴 마을이 보인다.

여행문의 alps220@naver.com

한옥, 마음을 비우다, 삶을 채우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우리 반 아이들 절반은 한옥에 살았다. 자연을 닮아 더없이 아늑하고 편안했던 한옥.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춥고 불편해서 살기 힘든 곳이 되었고 점차 사라져갔다. 한옥이 사라지는 게 안타까웠던 나는 20여 년 전부터 안동, 경주, 보은, 강릉, 북촌 등 한옥의 정취가 살아 있는 지역의 고택(古宅)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한옥은 밖에서 들여다보는 공간이 아닌 우리가 살았던 공간이다. 그래서 한옥은 안에서 밖을 내다보았을 때 그 멋을 느낄 수가 있다. 한옥의 창문은 사람이 앉아 밖을 내다볼 때 창틀에 팔을 편안히 걸칠 수 있는 높이였다. 또한, 집안에 배치되어 있는 가구들도 사람이 앉을 때의 어깨높이를 넘지 않았다. 그래서 한옥의 방은 편안하고 넉넉하다.

북촌 한옥 북촌 한옥마을은 한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간혹 창호 문을 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새로운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서울 종로구 가회동.

▲ 후조당(後彫堂)

◀ 후조당 사랑채

후조당은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제청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경북 안동 군자마을.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무렵의 한옥은 겉보기엔 스산하지만 실제로 그 안에 들어가 대청마루에 앉아보면 따뜻하다. 우리 선조들은 태양의 남중고도(南中高度)를 감안하여 집을 지었기 때문이다. 남중고도란 태양이 정남쪽을 지날 때의 최고도를 일컫는데,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낮과 밤의 길이가 변하고 계절의 변화가 생기는 것을 말한다. 여름엔 해가 처마에 걸쳐 있어 햇볕이 덜 드는 반면 날씨가 추워드는 시기로 접어들면 해가 방 안 깊숙이 후미진 곳까지 비추고 있어 따듯하다.

그 따스함은 문득 한옥에서 지냈던 어린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외가의 대청마루에서 뒹굴며 숙제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외삼촌과 놀던 기억…. 창호지를 얌전하게 바른 문을 열면 외할머니가 아랫목에 앉아 뜨개질을 하셨고, 엄마는 동생들을 돌보고 있었다.

고택 촬영은 쉽지 않았다. 먼저 그분들의 마음을 열고 대문을 열어야만 했다. 그렇게 열린 문 안에서 문설주와 기둥을 찍고 툇마루와 대청마루를 찍고, 처마와 지붕도 찍었다.

한옥에서 마음을 비우고 카메라 앵글 가득 자연을 채워 넣었다. 한옥이 스스로를 열고 비우고, 그 자리에 자연을, 문화를, 그리고 삶을 채워 넣은 것처럼.

사진 & 글 이동춘

▼ 김동수 가옥 조선의 최상류층 가옥이라 할 수 있는 아흔아홉 칸 집. 전북 정읍.

사진가 이동춘님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구대 사진과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1987년부터 10년간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에서

에디토리얼 포토그래퍼로 일하며 여행, 리빙, 푸드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현재 한국의 전통문화와 관련된 종가 문화 사진을 촬영하며

선현들의 의(義)와 정신을 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진집으로 <차와 더불어 삶> <한옥, 오래 묵은 오늘> 등이 있습니다.

폭풍우 치던 밤에

태풍 볼라벤이 북상하던 날, 나는 시골 어머니 집으로 갔다. 어머니는 콩대, 고양이 밥그릇, 호미, 빈 화분 등 바람에 날릴 만한 것을 몽땅 창고에 넣었다.

심지어 마당에서 놀던 고양이 두 마리도. 당신은 아마 이번 태풍이 고양이도 날려버릴 것이라 판단하신 모양이다.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기 시작한 저녁 무렵, 진주 집에서 아내가 전화를 했다. 아내는 아무래도 유리창에 젖은 신문지를 붙여 보강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재난 대비 방송에서 방금 보도한 따끈따끈한 정보라는 말에 내 귀가 팔랑거렸다. 나는 슬그머니 현관으로 가서 아까 유리창마다 대각선으로 붙여 놓은 노란색 테이프를 과감하게 떼버렸다. 그리고 아내가 권장한 작업에 들어갔다.

세상에 말처럼 쉬운 것이 있으랴. 분무기로 물을 뿜고 신문지 양 귀를 잡아 유리창에 반듯하게 붙이는 작업은 천장 도배보다 더 힘들었다. 어찌어찌 겨우 창문 한 짝을 붙였을 즈음, 창원에 사는 누님한테 전화가 왔다. 그 집도 유리창에 신문지 붙이기가 한창이란다. 누님이 말했다. “신문지를 실내 쪽에서 바르면 소용 엄따. 바깥쪽에서 붙여야 된다 카더라!”

아뿔싸. 누님의 카더라 통신을 증명이라도 하듯, 유리창에 붙어 있던 내 작품들이 스르르 떨어져 내렸다. 물기가 증발되면서 유리와의 접착력이 저하된 것이다. 원래부터 팔랑귀였던 나는 누님의 말도 믿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신문지를 옆에 끼고 비장한 마음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아! 강풍이 깽판을 치고 있었다. 내 머리카락이 쑥대머리가 되고 옷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그 와중에 고군분투하여 어렵사리 붙인 신문지는 불법 전단지처럼 뜯겨 하늘을 날았다.

오기가 발동했다. 나는 분무기를 던져버리고 세숫대야에 물을 퍼서 유리창을 향해 뿌렸다. 그리고 떡메를 치듯 신문지를 발랐다. 태풍도 ‘진짜 한번 해보자는 거냐!’며, 내 옆구리에 끼고 있던 신문지를 낚아채 내동댕이쳤다. 결국 우리 모자는 항복하고 집 안으로 후퇴했다.

초대형 태풍 볼라벤이 밤새 지붕을 잡고 흔들었다. 나는 내 안의 불안과 공포를 다독거리다 거실로 나갔다. 그런데 휘청휘청거리는 유리창 너머, 누군가 외롭게 태풍과 맞서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나무였다. 무궁화나무 울타리가 강 쪽에서 들이닥치는 바람을 온몸으로 막고 있었다. 무자비한 태풍이 억센 손으로 나무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흔들었다. 나무는 뿌리가 뽑힐 듯 이리저리 휘둘렸지만 기적처럼 버티고 있었다.

제 분에 못 이긴 바람이 도적처럼 울타리를 넘어왔다. 마당 가장자리에 있던 관목들이 야윈 가지로 폭풍의 길을 막았다. 나무는 잎이 찢기고 가지가 부러지면서도 눈물겨운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숨을 죽인 채 중얼거렸다.

고맙다. 나무야. 미안하다. 나무야. 다음 날 아침, 마당은 상처 난 나무의 잔해들로 가득했다. 밤새 탈진한 나무가 파리하게 지쳐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 떼가 날고 있었다. 대열을 지어 나르는 새들은 사령처럼 날갯짓을 하였다. 태풍이 물러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새에게서 배우는 생명과 사랑

 

 
 
 

김성호 서남대학교 생명과학과 교수

 

1991년, 지금 근무하는 학교의 생명과학과에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대학이 개교를 한 해였습니다. 모든 게 처음이다 보니 하나씩 채워갈 수 있다는 기쁨이 컸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은 그 기쁨의 딱 절반을 가슴에서 도려내라 했습니다.

순수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의 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관심 분야가 같은 몇 명의 학생이 있고, 그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며 연구를 하여 일년에 한두 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박한 꿈마저 시작조차 하지 못한 채 꺾어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게으름에서 비롯했음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신설 대학에서 고가의 분석 장비들을 짧은 시간에 마련하기 어려웠고, 학생이라고는 이제 대학에 갓 들어온 신입생이 전부였으며, 자고 눈을 뜨면 새로운 정보가 쏟아지는 학문의 특성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때 내 나이가 겨우 서른하나. 그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습니다. 곁에 있는 지리산과 섬진강이 품은 생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나의 발로 온 힘을 다하여 움직여 다양한 생명체를 직접 만나 글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일을 새로운 꿈으로 삼았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없으면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우리의 산과 들과 강이 품고 있는 생명체들을 15년 가까이 쉼 없이 만났습니다. 그러던 2007년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지리산 자락을 더듬다 내 삶의 모습을 또다시 완전히 바꿔놓은 친구와 인연이 닿게 됩니다. 큰오색딱따구리라는 새였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 한 쌍은 새끼를 키워낼 둥지를 막 짓고 있었습니다.

김성호님은 원래 식물학자였지만 어느 날 새에게 마음을 빼앗긴 후 새들의 번식 일정 전체를 세세히 기록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의 육아일기> <동고비와 함께한 80일> <까막딱따구리 숲>의 저자이며, 최근에는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만난 생명들의 20년 이야기를 담은 생태 에세이 <나의 생명 수업>을 펴냈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가 둥지를 완성하고, 알을 낳아 품고, 먹이를 날라 새끼를 키워내는 과정 전체를 관찰하기로 한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선 우리나라의 경우 큰오색딱따구리는 물론 새의 번식 일정 전체를 빠짐없이 살펴본 사례가 없었습니다. 지키고 싶은 약속도 있었습니다. 생명과학 연구의 출발은 관찰이며, 관찰은 대상에게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던져 바치는 과정이라고 항상 가르쳤고, 그것은 나와의 약속이기도 하였으니 스스로 부끄럽지 않을 기회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것저것 기웃거리며 조각난 정보를 얻는 것에 조금 지쳐 있었기에 하나를 보더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로 방향을 바꾸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이유만으로는 산속에 홀로 틀어박혀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며 하루 종일 둥지 하나만 바라보는 험난한 여정을 버텨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오색딱따구리와 함께하는 시간이 쌓이며 인간적 욕심은 자연스럽게 애정으로 바뀌었고, 하루하루를 설렘과 기다림 속에서 지내다 보니 마침내 50일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5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그들과 함께하면서 내 삶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내 삶의 방향도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 했던 ‘새와 동행하는 삶’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마흔 중반이 넘어 새로운 세계로 인생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꾸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저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들이 분명하게 남기고 떠난 것이 있었기에 그러했습니다.

생명은 이미 그 자체로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것이라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생명으로부터 다시 그를 닮은 새 생명이 온전히 완성되기까지 있어야 하는 간절함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경이로움과는 또 다른 것이었습니다. 큰오색딱따구리 한 쌍이 새끼를 키워내는 과정을 지켜보며 두 아이의 아버지인 나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알을 품을 때, 부모 새는 한쪽이 와야 비로소 한쪽이 나가는 철저하고 완벽한 교대를 통해 24시간 잠시도 쉬지 않고 알을 품었습니다. 알을 조금이라도 더 따듯하게 품기 위해 가슴의 털마저 뽑아 던지고 맨살을 알에 대며 말입니다. 부화한 어린 새에게 먹이를 나르는 모습은 가련하기까지 했습니다. 하루에도 60번 정도 먹이를 나르지만 그 먹이를 제 목으로는 하나도 넘기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알을 품고, 부화한 어린 새에게 먹이를 나르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둥지의 밤을 지킨 것은 언제나 아빠 새였습니다. 그런데 어린 새가 다 커서 독립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아빠 새는 더 이상 어린 새와 함께 있어주지 않았습니다.

먹이를 주지 않고 멀리서 보기만 하는 모습.

언제 품어주어야 하며, 언제 밀어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새가 독립하기 직전에는 아예 먹이를 주지도 않았습니다. 때로는 주는 것보다 주지 않는 것이 더 큰 사랑인 것을 저들은 몸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어린 새가 매에게 노출되었을 땐 제 온몸으로 막아서며 매에게 맞섰습니다. 분명 자신의 생명을 버려야 하는 위협이었지만 조금의 머뭇거림조차 없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유전자에 짜여 있는 본능이라고 한다면 더 이상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리 믿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사랑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분명히 알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큰오색딱따구리의 어린 새 둘째마저 둥지를 떠나 마침내 둥지가 비던 날 많이 울었습니다.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살았던 것과 아비로서 해야 할 일을 온전히 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죄송함과 미안함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떠나 다시 오지 않았어도 저는 그 빈 둥지를 완전히 떠날 수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어 지리산 기슭에 다시 번식의 계절이 돌아왔을 때, 이번에는 동고비라는 새에게 나의 온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동고비는 딱따구리의 옛 둥지에 진흙을 발라 제 몸에 맞게 다시 꾸며서 번식을 하는 무척 독특한 습성을 지닌 새입니다. 동고비는 아예 휴직까지 하면서 관찰을 했습니다. 강의로 인해 관찰에 더러 빈 시간이 생기는 것이 아쉬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동고비에 이어 최근 4년은 까막딱따구리에 미쳐 지내고 있습니다. 그 4년 중 1년은 또다시 휴직도 해야 했습니다.

▼ 알을 품기 위해 배의 털을 뽑아버린 큰오색딱따구리.

▶ 딱따구리의 옛집을 리모델링해서 살고 있는 동고비.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나의 심장이 여전히 뛰고 스스로 호흡할 수 있는 날까지 새의 번식 일정에 동행하려 합니다. 저들을 지키고 싶은데, 지키려면 알아야 하기 때문이며,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몸이 고단해도 저들을 지켜보며 스스로 느끼는 행복함은 덤입니다.

한 사람의 삶이 어떠한 모습으로 어디를 향해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살아가며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에 달려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구라는 것이 꼭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의 경우 그 누군가가 넓게는 자연이며, 좁게는 새입니다.

구혜선 감독

두 번째 장편영화 <복숭아나무>로 그녀는 다시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연기자, 가수, 화가…. 다양한 수식어를 갖고 있는 구혜선씨가 이번에 하고 싶었던 얘기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라 한다. 개봉을 하루 앞두고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영화를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 붙들고 있었기에 이제는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며 쑥스러운 듯 웃는다. 긍정의 힘을 믿는 사람, 그래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자신만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참 예쁜 구혜선씨. 그녀의 순수와 자유, 열정이 기분 좋은 에너지로 전해져왔다.

영화 <복숭아나무>에 담고 싶은 내용이
무엇이었나요?

근래 ‘나는 왜 살고 있는지, 왜 태어났는지’ 고민을 했었어요. 그러다 잠시 무기력증처럼 누워 있었는데, 곧 함께 사는 반려동물에게 먹이를 주기 위해서, 가족들과의 저녁 약속을 위해서 일어나게 되더라고요. 사랑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누워 있고 싶어도 움직인 거잖아요. 내가 살아가는 모든 이유는 그들이 있기에 가능했구나. 그날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어요. 몸은 하나, 머리는 두 개인 쌍둥이 형제, 갈등하면서도 서로가 있었기에 숨 쉴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관계. 누군가는 이들을 괴물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 또한 그렇게 오로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는 가장 특별하고 행복한 괴물이 아닌가. 그리고 비록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 할지라도, 존재 자체로 가치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소설 <복숭아나무>에도
‘나는 언제나 당신을 위해 달릴 거다’라고
썼는데요, 당신이라면?

일단 지금 저에게는 가족이 제일 중요해요. 가끔 그래요. 내가 이걸 정말 하고 싶을까? 하면 엄마 보여주고 싶어서, 아버지 언니, 가족들이 나로 인해 행복해졌으면 좋겠어요. 내가 인생을 만들어가는 건 ‘나로 인해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 거 같아요. 스무 살 때 혼자 살아보려고 집을 나와서 독립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게 행복하지만은 않더라고요. 싸우고 뭔가에 지쳐도 내가 사랑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 그런 존재 자체가 저에게 엄청난 큰 힘이 되더라고요.

쌍둥이 형제 중 형 상현은 순종적인 성격,
동생 동현은 불만 많은 캐릭터잖아요.
이런 양면적인 설정을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나요?

정상적인 앞모습을 가진 동현(류덕환 분)은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반면 머리만 있는 형인 상현(조승우 분)은 그런 생활이 불가능해요. 언뜻 보면 동현이 더 정상적으로 클 거 같은데 그 반대예요. 그게 우리 모습 같았어요. 우리도 편해지면 편해질수록 요구하는 것이 많아지잖아요. 사실 환경이 똑같아도 성격은 다르게 자라는 걸 보면, 이 모든 것들은 자기 안에서 나온다는 생각도 했어요. 우리는 너무나 남의 탓을 하고 살고 있지 않나. 내가 이 안에서 나의 행복을 찾으면 굉장히 행복한 일일 텐데 하는 거요.

2008년 단편영화 <유쾌한 도우미>를 시작으로, 첫 번째 장편영화 <요술> 등 벌써 다섯 편의 영화를 연출한 구혜선 감독. 놀라운 창의성, 오묘하고 미스테리한 감성, 감각적인 영상과 아름다운 음악 등으로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구축해가는 이 20대 감독은 영화계에서, “10년, 20년 이후가 더 기대되는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풍부했던 그녀는, 무슨 생각이든 그림과 음악, 글로 풀어내곤 했다. 10대 시절, 가수 데뷔를 준비하던 연습생에서 우연한 계기로 연기자의 길을 걷게 된 그녀는 2009년 <꽃보다 남자> 금잔디 역을 맡으며 한국을 넘어 아시아 한류스타로 떠오른다.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소설을 발표하고, 중학교 때부터 작곡한 곡들을 모아 소품집을 내고, 직접 자신의 영화 OST를 제작하고, 작업했던 그림들을 모아 개인전을 여는 등 그녀의 계속되는 도전과 변신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때로 “욕심이 과하다” “재능은 많은데 특별히 잘하는 한 가지가 없다” 등등 편견 어린 평가들도 있었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들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해 해나갔다. 그리고 그림, 음악, 작가로서의 멀티적인 그녀의 능력은 영화라는 종합예술 안에 녹아들었고 점점 그녀에 대한 평가도 달라졌다.

첫 영화는 어떻게 찍게 되었나요?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님께서 많은 것을 알려주셨어요. 처음 제가 쓴 시나리오를 들고 찾아뵀을 때, 그걸 집어던지시는데,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그때부터 삭제해나가는 작업들을 배웠어요. 그러면서 그분이 계속 숙제를 주셨어요. 구혜선이 감독을 한다면 하고 싶은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와라, 거기에 맞는 콘티를 그려 와라, 음악을 만들어 와라…. 그분의 말씀이 “생각하고 있는 것을 머릿속에만 넣어놓으면 그건 상상으로만 정체된다. 꺼내서 맞기도 하고 상처를 받아야 한다면 받아야 한다” 하셨죠. 그분 덕분에 24살 때 <유쾌한 도우미>라는 첫 작품을 만들었는데, 정말 그렇게 해야 배운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았어요. 그 작품을 보고 대표님이 “이것 봐, 되잖아” 하셨을 때 자신감을 많이 얻었죠. 그 후로 더 활발하게 영화를 하게 됐고요.

영화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자뻑’이요.(웃음) 자뻑으로 인한 자부심? 전에는 제가 작품을 만들고도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세요, 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부족한데 누가 봐줘야 해? 그럼 부족한 내 영화에 출연한 배우들은 뭐야? 내가 하는 일에 나를 낮추는 것이 참여한 사람들을 똑같이 만들게 되는 거더라고요. 전에 제가 ‘왕과 나’라는 드라마를 했을 때, 어떤 배우와 비교의 대상이 됐었어요. 너무 부끄러워하는데 작가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요. 우리 드라마 여주인공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 이 작품은 완성도가 없다고. 그 순간에 나를 낮추는 것만이 겸손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사실은 진짜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안 했겠죠. 개인적으로 부끄럽긴 부끄럽지만. 그래도 항상 프라이드는 가지고 있어요.(웃음)

그동안의 영화나 소설을 보면,
삶과 죽음, 관계와 소통 등에 대해
많은 성찰을 한 거 같아요.

2009년 탱고라는 소설을 쓸 당시 굉장히 사람을 많이 잃었어요. 정승혜 스승님도 돌아가셨고, 또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고. 참 힘들 때였는데 글을 쓰면서 치유가 많이 되었던 거 같아요.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생각하게 됐어요. 죽음은 나와 굉장히 가까이 있는 문제인데, 누구나 다 거부할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니까 그렇게 두려운 일도 아닌 것 같았어요. 저도 회피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잘 보내줄 준비를 해야겠다, 그런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되고, 오늘 밥을 먹자 했을 때, 좀 귀찮아도 내일 먹자, 그런 소린 안 하게 되더라고요.

연기자, 작곡가, 화가 등 구혜선씨 앞에
수식어가 많잖아요.
스스로 자만해질 때는 없나요?

자만이라기보다 ‘자뻑’은 있는 거 같아요.(웃음) 그게 왜 생겼냐면 저도 원래 열등감이 굉장한 사람이었는데, 그게 하루하루가 괴롭고,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제 손해더라고요. 그다음부터 그냥 현실을 인정해 버리니까 제가 편하더라고요. 그리고 제 영화에도 많이 출연했던 서현진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거의 20살 이후부터 저를 키워줬어요. 저의 대모라고 할까.(웃음) 그 친구가 제가 위축될 때마다 “충분하다”는 얘기를 많이 해줬어요. 그 이후부터는 제 안에 있는 자부심 플러스 자뻑이 나오면서 내가 어떠한 예술가가 되려면 점을 하나 찍어도 이 점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하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남의 시선을 많이 받는 연예인인데
굉장히 털털하고 소박하다고 들었습니다.

주변 선생님들의 영향인 것 같아요. 특히 중학교 때 미술 선생님은 항상 저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게 하면서도, 그 안에서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들을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예를 들어 제가 중학생이 되니까 애들이 메이커 옷을 입기 시작했어요. 저는 그런 형편이 안 되는데도 저도 입고 싶었는데, 그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네 생각에 그게 진짜 예쁜 거니? 애들이 예쁘다고 하니까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는 거니? 그런 질문을 계속 하셨어요. 그런 것을 생각하게 되면서부터는 물건을 모시지 않게 됐죠. 외모는 변할 수밖에 없고, 그렇게 변하고 없어지는 것에 신경 쓰다 보면 괴롭잖아요. 외모보다는 내면을 가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웃음)

그녀는 작년 성균관대 영상학과에 입학해 늦깎이 대학생이 되었다. 한때 방송연예과에 입학했지만 필요한 공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두었다가, 영화 일을 하면서 공부가 필요하다 싶어 다시 대학에 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절실한 필요에 의해 갔기에, 아무리 바빠도 수업에 빠지거나 지각해본 적이 없는 그녀는 늘 다른 학생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학생이라 한다.

“자신은 평생 매일매일 배우는 사람일 거 같다”는 그녀에게 또 하나의 배움터는 바로 나눔이다. 지난 9월 구혜선씨는 두 번째 그림 전시회 수익금을 모두 백혈병 환우들의 무균 차량 제작을 위해 기부했다. 또한 반려동물과 사람 사이의 교감을 그린 다큐멘터리 ‘너는 내 운명’, SBS스페셜 ‘오늘을 사는 아이들-아동호스피스’ 편의 내레이션 출연료 역시 도움이 필요한 곳에 기부했다. 내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 자신을 쓸모 있는 사람, 세상에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으로 키워주기에 오히려 감사하다고 말한다.

여러 가지 활동들을 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을 텐데요.

그럴 때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런 생각을 많이 해요. 당시에는 너무 심각한 일도 지나고 보면 왜 그렇게 심각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나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대해서 생각을 크게 안 하려고 하죠. 그냥 가만히 놔두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편인 거 같아요. 왜 연애하다가 이별했을 때, 그때는 막 죽을 거 같잖아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기억에서 없어져버려요. 그러니까 나는 그 사람이 그 사람이어서 사랑한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사람이 아닌 누가 거기 있어도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요.

요즘 여러 가지로 힘들어하는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타인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지 않았으면 좋겠고. 스스로 자기가 가장 잘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다 보면, 좋은 날이 오지 않을까요. 자기가 자기를 가장 사랑하면 결국에는 뭐든 되는 것 같더라고요.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존재가 가장 가치 있는 거겠죠. 항상 그분들 덕분에 저는 또 다른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어요. 정말 감사한 것은 저를 좋아해주시고, 격려해주셨던 분들은, 저를 사랑해주심과 동시에 본인도 사랑하고 본인의 가족들도 사랑하는 분들이 대부분이셨어요. 그게 저는 너무 감사해요.

마지막으로 “타임머신이 있다면 언제로 가고 싶어요?”라고 물었다. 그녀는 “안 돌아가고 싶어요. 지금이 제일 좋아요”라고 답했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잘 살아가고 있으면 성공한 인생”인 것 같다는 구혜선씨. “자신의 삶 안에서 자유롭게, 온전히 나를 완성하고 싶다”는 그녀에게 언제 혹은 무엇이라는 수식어가 무슨 의미일까. 인기 연예인인가 하면 거기에서 벗어나 있고 화가, 작곡가인가 싶으면 그 범위에서 벗어나 있고, 영화감독인가 하면 그 타이틀에도 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구혜선은 진짜 예쁜 사람이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누군가에게 ‘내 곁에 있어줘~’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면,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하는 참 행복한 당신입니다.

자비원 아이들아,

너희 생각하며 끝까지 달릴게

이형모 35세. 직장인, 아마추어 자전거 레이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내 곁에는 항상 내 마음을 따듯하게 만들어주는 소중한 아이들이 있다. 강릉자비원의 아이들이다. 자비원은 부모가 돌보지 못하는 어린아이나 청소년들이 자립해서 클 때까지 함께 살아가는 곳인데, 10여 년 전 자비원 출신 후배를 만나면서 이곳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처음 만난 건 작년 4월이었다. 당시 나는 그해 6월에 있을 미국 대륙 횡단레이스(램, RAAM) 참가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국의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9일 안에 자전거로 달리는 세계에서 가장 힘든 사이클 경주 대회.

그런데 대회를 앞두고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가 났다. 2인 팀으로 함께 나가기로 한 파트너도 몸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 이대로는 힘들 것 같았다. 그때 우리가 힘을 내기 위해서 해보자 한 것이, 우리의 도전에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이었다.

우리가 램에 도전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뜻있는 사람들의 후원금을 모아, 사회봉사 단체에 도움을 주자는 것. 후원금은 우리가 달린 거리만큼 마일리지를 적립하는 방식이었다. 예를 들어 후원자가, 1킬로미터당 1원씩 후원하겠다 하면 우리가 약 5,000킬로미터의 레이스를 완주할 시 5천 원의 후원금을 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모인 후원금으로 도와주기로 한 단체 중 하나가 강릉자비원이었다.

자비원 아이들은 스스럼없이 안기며 손을 잡았다. 어떻게 보면 정에 굶주려 있나 싶기도 하고, 또 어린 나이에 상처를 안고 살아왔을 친구들인데 밝은 모습에 놀랐다. 그러면서 마음 한 켠이 따듯해져왔다. 아이들에게 “우리가 꼭 완주해서, 얼마나 너희들을 생각하며 달렸는지 보여줄게” 약속했다. 그러니 더 힘이 나고 용기가 생겼다.

드디어 대회. 경쟁은 치열했고, 우리는 처음부터 밤낮을 쉬지 않고 달려야만 했다. 사막을 지나고 로키산맥을 넘었다. 그런데 점점 체력이 떨어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5일째가 되던 날 파트너의 교통사고로 자전거는 부서지고 파트너는 입원을 해야 했다. 정말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이들과의 약속이 생각났다.

너희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달리겠다던 약속. 결국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8일 1시간 15분이라는 기록으로 대륙 횡단을 마쳤고, 2인 팀 부문 1위를 차지했다. 첫 출전으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거둔 것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의 경기를 지켜본 후원자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다며, 자발적으로 후원금을 보내주었다. 다시 자전거를 타고 강릉으로 아이들을 찾아갔을 때, 아이들은 지난번처럼 다가와서 안기고 손을 잡아주었다. 너무나 따듯했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Une soiree inoubliable(잊을 수 없는 밤)>

43.5×54cm, Serigraph on paper.

 

그 경험이 너무 소중했기에 그러한 후원을 이어가기로 했다. 올해 초부터 아침 한 시간씩 자전거 운동 모임을 운영하는데, 자발적으로 회원들의 기부금을 받는다. 운동에 참여한 날, 돼지 저금통에 1천 원 이하의 기부금을 내는 것이다.

제법 모아진 금액을 전달해주기 위해 지난 8월에는 또 한 번 서울에서 강릉까지 기부라이딩 행사를 개최했다. 아이들을 보니 정말 힘이 났다. 갓난아이가 크기도 했고, 청소년 아이들은 금세 알아보며 좋아했다.

지난 8월 마지막 주,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자전거 대회 중 하나에 참가할 때였다. 생각지도 않게 자비원 아이들이 ‘이형모 선수 파이팅’이라는 응원 문구를 써서 온 것이 아닌가. 이런 플래카드는 처음이었다. 뭉클했다.

나는 대학 시절부터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등반 등 산을 좋아하고 도전하는 것을 좋아해왔다.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 속에서, 도전을 이루고 좋은 성적을 거두면 기뻤다. 하지만 이 아이들을 만나면서 승부를 위해서만 달려가는 것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내 명함에는 세잎클로버가 그려져 있다. 행운이 아닌 ‘행복’을 잊지 말자는 의미이다. 내년에는 자비원 아이들과 꼭 함께 자전거 레이스에 참가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다 보면 힘들게 오르막도 넘어야 할 때도 있지만 좀 더 멀리 바라보며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도 생기게 된다. 아이들과 함께 어떤 순간에도 행복해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파도를 탓하지 않는, 심성 고운 내 친구

홍경석 54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성남동

올해부터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낭달뀌(양지)가 아닌, 음지의 비정규직 박봉으로 살다 보니 매양 ‘허겁지겁’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대학원생이 된 우리 딸이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의 일이다. 그해 8월 하순의 어느 날은 딸의 대학 2학기 등록금 납부 마감일이었다. 역시나 돈이 부족해 주변에 융통을 부탁했지만 모두가 “돈이 씨가 말랐다”고 했다. 궁여지책, 한참의 망설임 끝에 이번엔 고향의 죽마고우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금세 받지를 않는다. 차라리 받지 말았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기도 했다.

그렇게 자존심이 바위와 같이 꿋꿋했던 나였건만 자식 교육 앞에선 어쩔 수 없이 어떤 굴종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잠시 후 친구가 전화를 받았다. “별일 없지?”라면서 내 안부부터 챙겨주는 친구가 참으로 고마웠다. 입이 잘 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어렵사리 돈 부탁을 꺼냈다. 친구는 지금은 일을 하고 있는지라 이따 퇴근길에 송금을 해주겠노라고 했다.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힘든 노동일을 하는 친구였음에 돈 부탁을 하고 나서도 내 맘은 쓰디쓴 한약을 먹은 양 마음까지 쓰라렸다.

친구는 그날 저녁 즉시 입금을 해주었고 덕분에 이튿날엔 딸의 등록금을 납부할 수 있었다. 너무나 고마운 친구였기에 월급을 받자마자 친구의 돈을 우선 갚았음은 물론이다.

그해 만추의 일요일에 그 친구를 다시 만났다. 고향의 죽마고우들과의 정기적인 회동 모임이었는데, 그 친구의 미간은 그날따라 유독 어두운 그늘이었다. 2차로 노래방에 끌고 갔는데 그 친구는 평소와는 달리 멜랑콜리한 곡조의 노래만을 부르는 것이었다. 급기야 ‘하숙생’이라는 노래를 부를 땐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는 가사에서는 금세라도 엉엉 울 듯한 표정이 되는 것이었다. 하여 술을 가득 따라주며 무슨 고민이 있냐고 물었으나 친구의 입은 여전히 닫힌 철문이었다. 밖으로 데리고 나와 담배를 권하니 그제야 친구의 입이 열렸는데.

장사 실패와 빈곤의 상륙 등으로 말미암아 그 친구는 오래전에 이혼을 했다. 자식 둘은 본가(本家)의 부모님께서 거두고 계시지만 연로하시어 약값이 밥값보다 더 들어가는 형국이라고 했다. 그러한 터에 장남인 자신의 생업은 늘 작업 환경이 위태롭고 한 달에 며칠 일하기도 버거운 공사 현장의 막일, 즉 노동이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과는 달리 돈을 모으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님은 나도 익히 알고 있는 현실이었다.

전월(前月)엔 고작 며칠밖에 일을 하지 못해 여간 어려운 처지가 아니라고 했다. 아울러 친구는 두 자녀의 교육비 마련까지 생각하노라니 그처럼 자기도 모르게 침울해졌던 거라면서 그제야 겨우 얼굴을 펴는 것이었다.

사정이 약간이나마 펴진 내가 다만 얼마간이나마 빌려주겠다고 했으나 친구는 한사코 사양했다. 그리곤 밀린 임금을 받으면 해결된다면서 “나 때문에 술맛만 망친 건 아니냐?”며 되레 내 걱정을 해주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다음 날 출근을 했는데, 그 친구가 자꾸만 명치끝에 걸렸다. 전화를 걸어봤는데, 예상과는 달리 밝고 명랑한 음성이다. 나 또한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들을 봐서라도 더 기운 내라!”

미쉘 들라크로와 작.

<Le Canotier(노 젓는 사람)>

79.5×70.5cm, Lithograph on paper.

 

어언 50년 이상 변함없이 정연한 우정의 끈을 매달고 달려온 진솔한 친구다. 너무도 가난했음에 고작 초등학교만을 마치고 오늘도 시멘트 가루가 휘날리는 공사 현장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친구이다. 하지만 지금껏 역시도 남에게 해코지 한 번 한 일이 없는, 말 그대로 ‘법 없이도 살 사람’이 바로 그 친구인 것이다. 언젠가 그 친구는 이런 ‘명언’도 남겨 내 맘을 뭉클하게 했다.

“누군 부모를 잘 만난 덕에 호의호식도 모자라 좋은 직장에서 떵떵거린다고 하더구나. 나는 비록 가난과 불학으로 말미암아 지금도 어렵게 살고는 있으되 그러나 부모님 원망은 안 한다. 부모님께서 날 낳아주신 덕분에 그나마 이 세상의 이모저모를 두루 구경할 수 있다 가는 인생이니 말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찌나 눈물이 핑 돌던지, 지금도 기억의 창고에서 생생하게 유효하다.

그처럼 ‘파도를 탓하지 않는 어부’와도 같은 심성 고운 내 친구, 그렇게 내 곁에서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내 친구야, 늘 고맙다. 도래하는 새해엔 네가 하는 일도 순풍에 돛을 달고, 아이들에게도 좋은 일만 가득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자줏빛 나팔꽃 같은 고은이 언니

이계환 26세. 대학생. 뉴질랜드 오클랜드시티 거주

“언니, 고마워요. 그 자리에 있어주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 전화 받아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요. 목소리 듣는 것만 해도 고마워요.” “그래, 나도 너가 그렇게 말해주니깐 힘이 많이 된다. 고마워.”

그렇게 한국과 뉴질랜드라는 대서양을 넘는 거리 너머로, 전화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고은이 언니의 목소리. 나는 또 한바탕 드라마처럼 붉으락푸르락했던 마음을 고은이 언니한테 다 쏟아냈지만 언니는 또 언제 그랬냐는 듯하다.

마치 비 온 후 막 고개를 든 자줏빛 나팔꽃처럼 언제나 환한 미소만 가슴에 남게 해주는 고은이 언니. 세상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지는 사람, 내게는 그런 사람이 바로 장고은 언니다.

언니는, 사실 직접 만나기 전부터 이미 이야기는 듣고 있었다. 내가 적성에 맞지 않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너무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을 때였다. 고은이 언니 아버지께서는 당신도 딸이 있는데, 영국에서 법대를 졸업했다고 말해주셨다. 하지만 당신의 딸도 법대가 너무 적성에 맞지 않아 굉장히 힘들어하다 그 후 결국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방향을 바꾸었다고 말해주셨다.

당시 진로에 대해서 굉장히 예민하고 심각했던 나는 고은이 언니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많은 힘이 되었고, 그래서 언니를 만나기 전부터 왠지 언니라면 내 힘든 마음을 잘 이해해줄 것 같았다.

그러다 몇 년 전 어느 겨울날, 겨울 방학 때 한국에 잠시 들렀을 때 언니를 처음 만나게 되었다. 너무 차가워서 오히려 맑게 느껴지던 그 겨울밤, 우리는 새벽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법대 이야기, 진로 이야기, 가족 이야기…. 아침 일찍 출근해야 돼서 피곤했을 법한데도, 언니는 그렇게 철없는 동생의 이야기 보따리를 들어주었다.

언니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둘 다 한국에 있을 때도 서로 바빠 자주는 못 보더라도 내 마음이 정말 힘들 때면 유일하게 달려와주는 사람은 언니였다.

한번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너무 지쳐서 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니, 전 제가 왜 공부해야 되는지 그 목적이라도 알았으면 좋겠어요. 언니는 왜 언니가 법대 공부했는지 이제 알아요?” “응. 지금 이 자리에 있기 위해서.”

또 한 번은 부모님과 엄청 크게 싸우고 짐까지 다 싸서 집을 나왔을 때였다. 나는 결국 또 언니에게 엉엉 울면서 전화를 했다. 언니는 바로 달려와서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역시나 내 한풀이를 들어주었다. 음식점을 나올 때쯤 결국 언니의 그 따뜻함은 내 마음을 돌려놓았다. “맞아요. 제가 부모님께 잘못한 것 같아요.”

미쉘 들라크로와 작.

<Winter in New England(뉴잉글랜드의 겨울)>

72×53.5cm, Serigraph on canvas.

 

아무리 바쁘더라도, 내가 힘들다 하면 언제든지 달려와서 따스한 사랑으로 결국 세상에 대한 내 마음속의 미움과 원망을 다 녹여주었던 언니. 내가 어떤 불만과 한풀이를 해도, 결국 내가 다시 일어설 거라는 믿음으로 묵묵히 기다려준 언니.

그런 언니의 격려와 따스함을 받았기에, 나도 이제 힘든 일이 있어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겼고, 다른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도 언니에게서 받은 똑같은 사랑과 따스함을 조금이나마 돌려줄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난 호 월간 마음수련에 ‘코이그지스트(coexist)’라는 시가 실렸다. 그중 이런 구절이 있었다. ‘서로 도와주는 우리가 아름답다. 항상 같이 있어 아름답다. 함께할 수 있어 아름답다. 아픔도 행복으로 만드는 우리가 아름답다. 서로 믿는 우리가 아름답다….’

이 시처럼 항상 같이 있어주고, 믿어주고, 도와주는 언니를 만나서 정말 좋다. 언니, 언제나 곁에 있어주세요. 그렇게 제가 철들어가는 모습 계속 지켜봐주세요.^^

누군가에게 ‘내 곁에 있어줘~’라고 말할 수 있는 삶이라면,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하는 참 행복한 당신입니다.

하루만큼 더 사랑하고

더 닮아가는 우리 부부

김은정 39세. 주부. 부산시 동래구 안락2동

우리는 2012년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신혼 때처럼 다정해졌다. 그래서 다행이다.

첫아이를 낳기 전 누구보다 사이좋았던 우리는, 주변의 ‘아기 낳고 나면 사이가 나빠진다더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설마 우리가? 우린 아닐 거야. 우린 그러지 말자. 약속.

하지만 아이를 낳자마자 예민해진 우리는 서로에게 바라는 것과 기대하는 것이 커지면서 이틀에 한 번꼴로 말다툼을 했고 상처를 주고받았다.

남편이 코를 골아도 사랑스럽게 배를 두들겨주며 책을 읽었던 나는 온데간데없었다. 퇴근하자마자 뽀뽀~ 하며 입술을 내밀었던 남편도 사라져 버렸다.

그 이유엔 갑작스런 남편의 직장 발령도 있었다. 첫아이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가족 모두가 서울로 이사를 하면서 사이는 더 멀어졌다.

남편은 새벽 4시 30분이면 출근해 밤 11시가 넘어야 들어왔다. 남편은 구겨진 와이셔츠를 입고 출근을 하기도 했고 그럴 때면 무관심한 나에게 꽤나 섭섭해했다. 나 역시 아기를 혼자 돌보느라 지쳐 있었기에 도와주지 않는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나는 우리가 이대로 그저 그런 부부가 될 줄로만 알았다. 이렇게 데면데면해진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둘째 임신, 6주 차에 계류유산. 아주 초기 유산이었지만 마음도 몸도 힘들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 것일까. 어느 때부터인가 남편은 나를 위해 칼처럼 퇴근해 들어오려 노력했다. 그리고는 저녁을 해주고 청소도 해주고 아기도 씻겨주었다. 그렇게 내 곁에 있어준, 남편의 따스한 배려로 인해 그동안 섭섭했던 마음은 눈 녹듯 사라졌고 따듯한 온기로 채워졌다.

그렇게 남편이 달라짐과 동시에 나도 빨리 회복이 되었고, 몇 달 지나지 않아 우린 다시 또 아이를 갖게 되었다. 남편은 더욱 열심히 첫애를 돌봐주고 분리수거며 요리를 해주었다. 가끔 내가 냄새 때문에 힘들어하면 벌서는 기분으로 밥을 먹거나, “저쪽에 들어가서 먹을까?” 하며 나를 배려해 주었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La Nuit Bleue(푸른 밤)>

95.5×82cm, Serigraph on paper.

 

어느 날인가, 육아 파워블로거의 글을 읽고 눈물을 흘린 적이 있었다. 아기가 두 돌은 지나야 냉장고 속이 보이고, 남편이 입을 옷이 있나 없나가 보이고, 집이 보인다는 글이었다.

남편도 같이 읽어보더니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몰라도 괜찮아.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내가 하면 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그만 남편에게 기대 펑펑 울고 말았다. “입덧 끝나면 다 보답할게, 미안해” 했더니 웃으면서 “뭐가 미안하냐”고 한다.

점점 나는 남편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었고, 남편 역시 나의 고충을 이해해주기 시작했다. 그렇게 2012년을 맞으며 약속이라도 한 듯 사이가 좋아진 우리. 참 신기하고, 참 행복했다.

하루 종일 귀찮을 정도로 메시지를 보내는 남편. 퇴근할 무렵이면 ‘회식할까 봐 조마조마해’ 하며 빨리 집에 오고 싶어 하는 남편. 나도 내 남편을 다시 ‘귀염둥이’라 여길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즐거웠다가, 좋아했다가, 심드렁해지기도 하면서 우리는 오늘 또 하루만큼 더 사랑을 하고, 하루만큼 더 닮아가는가 보다.

지난달에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어서 이 시기가 지나 남편 와이셔츠도 잘 다려주고, 맛있는 술안주도 만들어주고 싶다. 우리에게 뜻깊었던 한 해도 벌써 저물어간다.

“남편, 너무 고맙고. 미안해. 새해부터는 내가 보답할게. 꼭!!” 서로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이 삶이 마냥 좋다.

나만 바라보는 나바라기, 토토와 순돌이

양상훈 59세. 한지작가.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가을, 작업실 창밖엔 개미취가 흐드러지게 피었다. 수많은 벌과 나비들이 모여들어 꿀 잔치를 벌이는지 산속의 작업실은 왁자지껄하다.

작업에 전념하기 위해 홀로 머물고 있자니, 가끔은 외롭다. 하지만 나에게는 애완견 토토와 순돌이가 있어 행복하다. 강아지 얘기가 무어 대수냐 하겠지만, 내 곁에 항상 있어 기쁨을 주는 또 하나의 가족들이다. 늘 나와 희로애락을 함께하고 늘 내 편이 되어주는 고마운 존재들. 토토는 못 말리는 비글, 순돌이는 똑똑한 진돗개 믹스견이다.

토토는 강아지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막내가 조르고 졸라 키우게 됐는데, 어릴 때부터 동생처럼 침대에서 같이 자고 방에서 키웠다. 외출하고 돌아오는 나를 보고 “아빠다, 토토야” 하는 막내를 보고 “내가 왜 강아지 아빠냐?”고 화를 낸 적도 있지만, 지금은 정이 들어 강아지 아빠임을 인정한다. 사냥견이라, 성견이 되니 목소리가 커져 아파트 대신 이곳 작업실에서 키우고 있다.

순돌이는 옆집의 잘생긴 진돗개가 바람을 피워 생긴 믹스견 새끼다. 아주 어릴 때 분양받아 키웠다. 자유롭게 풀어주고 싶지만, 마을 닭 한 마리를 해치운 후, 불쌍하지만 묶어 키운다.

열심히 작업에 열중일 때면, 토토는 내 옆에 붙어 나를 지켜주고, 순돌이는 창밖에서 나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나바라기’들이다.

미쉘 들라크로와 작.

<La Vie en Rose(장밋빛 인생)>

72×59.5cm, Serigraph on canvas.

 

몇 해 전 사랑하는 부모님을 연달아 여의어 며칠간 우울해 있는 나를 보고, 가만히 옆에 와 한없이 애처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던 토토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어요. 너무 슬퍼 말아요” 하는 눈빛으로 연신 나의 볼을 핥아주었다.

순돌이는 먹이를 주면, 허겁지겁 먹지 않고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려 고마움을 표시한 후, 내가 머리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 주어야 밥 먹기를 시작한다.

나의 발자국, 차 소리를 듣고도 반기는 순돌이는 예의가 무척이나 바른 강아지다.

장난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토토도 내 작품이나 재료들은 절대로 건들지 않고 피해 다닌다. 두 마리 모두 착함의 본성을 인간 못지않게 갖고 있다.

작가란 각박한 현대인들이 정서적으로 정화되게 도와주어 풍요로운 삶을 갖게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미(美)란 곧 선(善)이다’라고 생각한다.

동물에게도 무한한 착함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 언제나 나만 바라보는 나바라기들…. 토토와 순돌이와 함께 좋은 작업에 정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