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모든 바람이 이곳을 지나간다 _몽골 1

글&사진 이용한 <시인, 여행가>

사람들은 종종 커피를 마시다 말고 카페 창밖을 보며 “아,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는 지금 여행을 갈 수 없기 때문에 여행 가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간이 남아 “어디로 가고 싶어?”라고 물어보면 “뭐, 글쎄 아무 데나” 하면서 얼버무린다. 어디론가 가고 싶지만 거기가 어딘지는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가고자 한다면 가야 하는 게 여행이다. 어디든 일단 떠나고 보는 게 여행이다. 굳이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여행은 ‘지금 이곳’의 나를 ‘여기’가 아닌 곳으로 잠시 데려가는 것이다. 이용한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중에서

몽골에 도착하면 우선 말 한 필을 산다.

몽골에서는 보통 말 한 필에 50만 투그릭(한화 50만 원가량). 이제 말안장 뒤에 배낭과 텐트를 싣고, 몽골어와 한국어로 된 지도를 각각 한 장씩 사서 가고 싶은 곳으로 말을 타고 간다. 며칠을 여행하다 말이 지치면 유목민 게르에 들러 말을 교환하자고 한다. 싸게는 2만 투그릭, 많게는 5만 투그릭이면 유목민들은 말을 교환해준다. 또다시 말 타고 여행하다 말이 지치면, 유목민 게르에 들러 말을 교환한다. 이런 식으로 여행을 마치고 울란바토르에 돌아오면 40만 투그릭 정도에 다시 말을 되판다. 1개월을 꼬박 여행해도 교통비로 나가는 돈은 10만 투그릭 정도면 해결된다. 실제로 이렇게 여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행 기간이 긴 유럽과 일본의 여행자들 중에는 더러 말 한 마리를 사서 몽골을 떠도는 이들이 있다.

 

몽골에서는 화장실을 갈 때 ‘말 보러 간다’고 말한다.
그것도 모르고 눈치 없이 ‘같이 가자’고 하면 곤란하다. 몽골은 대도시를 벗어나면 따로 화장실이 없다. 눈앞에 보이는 초원과 벌판이 그냥 화장실이다. 자연의 화장실. 그러나 지평선이 보이는 몽골 초원에서 여성들이 ‘말 보러 가기’란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다. 언덕도 없고, 바위도 없다면 더욱 난처하다. 이때 여행자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돗자리다. 한 사람이 돗자리로 가려주고 다른 사람이 돗자리 뒤에서 말을 보면 된다. 냄새는 어쩔 수가 없다. 몽골 여성들은 치마폭이 넓은 델을 입고 있어 혹시라도 초원에서 일을 볼 때면 치마폭으로 앞을 가린다.

몽골에는 이런 말이 있다. “델게르 초원에서는 모든 세상이 다 보인다.”

모든 세상이 다 보이는 초원.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델게르 대초원 한가운데는 오름 같은 봉긋한 언덕이 솟아 있고, 그 위에 어버(서낭당)가 자리해 있다. 과연 어버가 있는 언덕에 올라서자 사방의 초원과 지평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앞을 봐도, 뒤를 봐도, 옆을 봐도 초원과 지평선이다. 그 광활한 초원에 길이 몇 갈래 나 있고, 멀리서 푸르공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달려온다. 그건 마치 세상의 끝에서 또 다른 세상의 끝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 초원의 모든 바람이 이곳을 지나간다.

끝없이 펼쳐진 Wind-Road.

몽골은 단순하다. 이 단순함은 원초적인 느낌에서 온다. 이를테면 그냥 아무것도 없는 초원과 사막. 1년에 260일은 맑고, 1년에 7개월은 겨울이며, 두어 달의 봄날은 모래 폭풍이 휩쓸고 가는 몽골은 혹독하고, 혹독해서 더욱 눈물겹다. 몽골에서는 영하 30도의 긴 겨울과 모래 폭풍으로 범벅된 봄이 지난 뒤의 짧은 여름이 아름답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하다.

하늘에서 본 몽골 또한 그저 심심하다.

가도 가도 초원이 펼쳐져 있거나 그곳을 이따금 소 떼나 염소 떼가 지나가는 풍경! 그러나 홉스골로 올라가는 북쪽이나 알타이로 이어진 서쪽은 전혀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몽골에서 드문 산악 지대와 늪지와 호수가 이곳에 펼쳐진다. 특히 물이 풍족한 홉스골 인근에서는 산악 지대를 구불구불 흘러가는 강줄기를 흔하게 만난다. 알타이 쪽으로 방향을 틀면 푸른 초원이 산맥으로 이어져 만년설을 품에 안은 봉우리의 바다를 만나게 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몽골은 티베트나 동남아, 남태평양의 섬나라처럼 대단한 풍경은 존재하지 않는다. 단순하고 심심하며,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이 단순하고 순진한 풍경이 바로 몽골의 진면목이다.

 

이용한님은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순수한 풍경과 사람, 고양이를 담아온 사진가이기도 한 님은 그동안 시집 <안녕, 후두둑 씨>,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옛집 기행> 고양이 시리즈 <명랑하라 고양이> 등을 펴냈으며 영화 <고양이의 춤> 제작에도 참여했습니다. 여행 에세이로는 <티베트 차마고도를 따라가다>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등 다수가 있습니다.

이 겨울 가장 찬란하게 빛나리 _자작나무

사진 & 글 박강섭 국민일보 기자. <우리나라 그림 같은 여행지>의 저자

하얀 피부로 인해 ‘숲 속의 귀족’이라 불리는 자작나무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백두산 일대와 강원도 지역에서 볼 수 있다. 북위 45도 이상의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며, 기름기가 많아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낸다고 해서 ‘자작나무’다.

자작나무는 우아하다. 엄동설한의 추위를 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하늘을 향해 거침없이 곧게 뻗어 올라간 자작나무들의 희디흰 직선은 한겨울의 흰 눈과 만나 보석이 된다. 태양 빛을 받으면 또 그렇게 고스란히 붉은 빛깔과 하나가 된다. 추위 속의 당당함, 범접하기 어려운 웅장함, 그것이 자작나무다.

△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

△ 강원도 인제군 원대리 자작나무 숲

자작나무는 역사다. 얇은 껍질 9개가 겹겹이 싸여 있는 자작나무는 매끄럽고 질겨서 종이 대용으로 쓰기도 했다. 경북 경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진 것이다. 또한, 잘 썩지 않는 특징이 있어서 백두산 지역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묻었고, 심마니들은 산삼을 캐면 자작나무 껍질에 싸서 보관하기도 했다.

자작나무는 빠르다. 귀한 건축물의 기둥과 대들보로 쓰이는 소나무인 금강송의 경우 20m 자라는 데 200년이 걸리는 반면, 자작나무는 20년이면 충분하다. 다른 나무들에 비해 성장 속도가 5~10배 빠른 셈이다.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산불과 병충해로 인해 나무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자작나무를 심어왔다.

자작나무는 지혜다. 20~30m 높이로 자라는 자작나무는 햇빛을 흡수하기 위해 높은 가지인 우듬치를 제외하고는 스스로 모든 가지를 도태시키는 아픔을 감수한다. 가지가 떨어지면서 생긴 검은 생채기는 하얀 껍질과 어우러져 기하학적 무늬로 표현된다.

이 겨울, 자작나무 숲을 한번 거닐어보면 어떨까. 겨울철 낙엽마저 떨군 하얀 자작나무 숲을 마주하는 순간 빛으로 가득한 세상과 마주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따뜻한 햇살마저 비춰질 때 반짝반짝 빛나는 자작나무 숲은 그야말로 동화 속 설국처럼 은가루를 뿌려놓은 듯한 장관을 이룬다. 순백의 수직선들이 만들어내는 한 폭의 수묵화에는 고요함과 편안함이 나지막이 흐른다. 그곳에 세상의 모든 빛이 차곡차곡 저장돼 있다.

△ 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두문동재의 상고대가 핀 자작나무

극락조 열여덟 마리를 팔았다

목요일은 고단한 날이다. 저녁상을 물리자 포만감과 피로가 함께 밀려왔다. 목뒤로 팔베개를 하고 누웠으니, 옆에서 신문을 뒤적거리던 아들이 텔레비전 방송 편성표가 있는 면을 접어 내 코앞에 쑥 들이밀었다.   “아빠, 우리 오늘 밤에 이 프로 같이 봐요. 재미있겠어요.”

꼼짝 않고 누운 채 읽어보니 야생 동물 보호 다큐멘터리였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묵묵부답하였다. 옆에 있던 아내가 아들을 거들었다. “오랜만에 식구끼리 한번 봐요.”

나는 비스듬히 몸을 일으켜 신문 속 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사냥꾼이 야생 원숭이를 결박하고 송곳니를 제거하고 있었다. 인간의 무자비한 도륙이 단박에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모르긴 해도 동물판 ‘지옥의 묵시록’일 것이다. 피곤해, 잔인한 것을 보고 흥분하기도 싫어. 불쌍한 모습들도 귀찮아. 나는 신문을 접어 방구석으로 툭 던졌다.

“싫다! 안 볼란다. 징그럽다!”

다시 방바닥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다가 스르르 초저녁잠에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창밖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는 밤 열한 시를 넘어가고, 식구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나는 식탁에 있는 귤 접시를 들고 와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그리고 습관처럼 리모컨을 톡 눌렀다.

화면은 열대우림 속, 원주민이 숨을 죽이고 사냥총에 총알을 장전하고 있었다. 총구는 나무 끝 가장 높은 곳에만 앉는다는 극락조를 향하고 있었다. 초저녁에 가족들과 함께 시청하기를 거부한 프로그램을 우연찮게 혼자 보게 된 것이다. 다행히 잔인한 장면이 다 지나가고 프로그램은 마무리 중이었다. 그런데 해설자의 마지막 내레이션이 내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원주민들은 그날 숲속에서 잡은 극락조 열여덟 마리를 군인들에게 넘겼다. 군인들은 또 돈을 주지 않고 가버렸다. 다음 날 원주민들이 군인들을 찾아가 말했다. ‘당신들은 월급을 받지만 우리는 극락조를 팔아서 한 끼를 때우는 소금과 설탕을 사야 합니다.’”

극락조 열여덟 마리가 제물이 된 것 또한 운명이다. 소금과 설탕을 얻기 위해 극락조를 잡아 파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원주민은 끝내 소금과 설탕을 얻지 못했다. 검고 커다란 눈망울을 가진 원주민과 높은 나무에서 추락하는 아름다운 극락조 생각에 가슴 한쪽이 아팠다. 텔레비전 화면에는 프로그램이 끝났음을 알리는 자막이 아래로 눈물처럼 쏟아졌다. 목요일은 역시 고단한 날이다. 텔레비전을 껐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김치버스 프로젝트

 글 류시형 30세. 김치버스 팀장

김치버스 한 대 타고 400일간 전 세계를 돌며 우리 김치를 알리고 온 젊은이들이 있다. 경희대 조리학과 선후배 사이인 류시형(30), 김승민(30), 조석범(26) 씨. 4년간의 준비, 27개국 130여 개의 도시, 390kg의 김치, 53번의 시식 행사. 8,000명의 시식 인원. 대다수의 사람들이 불가능하다 했던 김치버스 길에서, 그들은 우리 김치의 힘을 더욱 실감했고, 이젠 보다 큰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류시형씨가 전한다.

“우리는 한국의 전통 음식 김치를 알리기 위해 온 청년들입니다. 김치는 채소로 만든 발효 음식으로 세계 5대 건강 음식으로 꼽힌 최고의 웰빙 음식입니다. 배추김치, 겉절이, 깍두기 등등 김치 종류만 해도 400가지가 넘습니다.”

2011년 10월 30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김치버스 첫 행사. “오, 낌치?” 우리들의 설명에 그 자리에 모인 300여 분의 러시아인들은 큰 관심을 보였다. 그들에게 선보인 첫 메뉴는 ‘사과김치카나페’. 러시아 사람들이 즐겨 먹는 흑빵과 햄에 김치와 사과를 섞은 소스를 얹어내 만든 퓨전 요리. 맛을 본 러시아인들은 “낌치, 최고~!!!”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첫 행사였다.

김치버스를 처음 생각한 것은 군 제대 후, 2006년에 유럽으로 무전여행을 갔을 때였다. 조리학을 전공하던 나는, 유럽의 가정식 문화가 궁금했고 직접 체험해보고 싶었다. 무작정 부딪혀보자 생각하고, 달랑 26유로와 편도 티켓만 가지고 여행길에 나섰다.

“나는 유럽의 가정식 문화가 궁금해 여행을 하는 학생이다. 괜찮으면 집에 초대해줄 수 있느냐?” 그러면 흔쾌히 오케이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렇게 220일간 18개국을 다니며 문화를 직접 체험했다. 그러면서 아쉬웠던 건 한국 음식에 대해 궁금해하는 외국 친구들도 많은데 제대로 보여주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었다.

김치는 감칠배기에서 1년 이상 묵은 묵은지를 협찬받았다. 외국 김치는 깊은 맛이 부족해 한국 김치와는 맛의 차이가 많다고 한다. 러시아, 스페인, 미국 등 전 세계 TOP10에 꼽히는 조리학교들 중 6곳에서 행사와 한식에 대한 강의도 했다.

“우리 음식을 제대로 세계에 알려보면 어떨까?” 유럽 여행 후, 그런 생각이 구체화되었고 같은 과 후배인 승민이와 석범이가 마음을 합쳤다. 아무래도 김치가 한국을 대표하는 가장 중요한 음식이 아닐까 생각했고, 주 종목을 김치로 정했다. 하지만 처음 이 ‘김치버스 프로젝트’를 위해 드는 엄청난 비용을 후원해줄 곳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여러 곳에 제안서를 넣고 실무진들과 미팅도 시도했지만, 99%는 부정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고 준비하면, 언젠가 도와줄 사람이 나타날 거라는 것을. 그건 무전여행 길에서 수없이 느낀 확신이었다. 비는 오는데 갈 데는 없고, 밤은 깊어지고. 하지만 기다리면 언젠가는 도와줄 사람을 만나게 된다. 만나기 전에 포기하느냐, 만날 때까지 계속하느냐가 꿈을 이룰 수 있느냐 없느냐의 관건인 것이다.

역시나 제안서를 낸 지 5개월 만에 현대자동차에서 차량에 관한 것을 협찬해주겠다며 연락이 왔다. 그리고 광주 감칠배기에서 김치를, 배송은 광주시청에서, 코오롱에서는 침낭, 텐트, 옷 등을 협찬해주겠다고 했다. 정말 너무 감사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4년 동안의 준비 끝에 김치버스 팀은 2011년 10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시작으로 러시아 모스크바, 폴란드, 체코 프라하, 우크라이나, 헝가리 부다페스트… 등 동유럽 국가들부터 김치를 알려나갔다. 미리 계획을 잡고 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우선 그 나라에 가서 대사관이나 한국 문화원에 가서 요청하기도 하고, 시청, 공원, 해변 등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장소라면 어디든지 게릴라 홍보를 했다. 한국 마트가 있어 배추라든지, 고춧가루 등의 재료를 구할 수 있는 곳에서는 김장 행사도 진행했다.

새봄을 맞으며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 등의 서유럽 쪽으로 이동했다. 김치버스가 온다는 게 알려지면 현지 방송국, 신문사에서도 100% 취재 요청이 들어왔다. 우리는 우리의 일정을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의 SNS를 통해 알렸는데, 유럽에서는 특히 페이스북으로도 요청이 많이 들어왔다. 페이스북을 통해서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외국인들이 꼬리를 물고 계속 연결이 된 것이다.

2012년 1월에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세계적인 식품 박람회 ‘마드리드 퓨전 2012’에서 김치를 홍보할 수 있었다. 특히이번 축제의 주제가 발효 음식이라 우리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그 덕분에 스페인 북부 최고의 조리학교 루이즈 이리자(Luis irizar)에서 2번에 걸쳐 행사를 진행할 수 있었고, 큰 호평을 받았다.

사과김치카나페 만드는 방법

① 러시아식 흑빵과 전통 햄을 아래에 깔고 ② 감칠배기 묵은지를 약간의 설탕과 함께 달달하게 볶아 ③ 그것을 잘게 썰은 풋사과와 섞어 ④ 빵과 햄 위에 얹어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내면 끝!

유럽 김치버스의 마지막 종착역은 파리. 저녁에는 파리 비스트로(bistro) 1위를 차지한 레스토랑 <카페 데 뮈제(Café des Musées)>에서 김치버스만의 한식 4가지 코스 요리를 판매했는데, 100여 분의 손님들이 최고의 음식이었다며, 레스토랑 메뉴에 한식을 추가하라고 조언할 정도로 만족했을 때는 우리 한식의 경쟁력을 다시 느낄 수 있었다.

2012년 7월, 유럽 일대를 경유하던 김치버스는 이제 대륙을 이동해 미주에서 일정을 수행하게 되었다. 어느새 여름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동안 어려운 일들도 많았다. 비자 문제, 김치버스 차량 내부 절도 사건 등등. 제일 힘들었을 때는 김치버스가 고장이 났을 때였다. 김치버스는 차가 생명인데 차가 고장 나면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유럽에서는 구하기 힘든 차의 부품을 수배하고 수리하느라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 아무 대가 없이 도와주시던 분들도 만났고, 매번 위기라고 생각했던  순간은 또 다른 기회가 되어주었다.

어쩔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냥 빨리 순응하고, 인정하는 법도 배웠다. 마라톤처럼 긴 일정이었기 때문에 발목 잡히는 일이 생길 때마다 다시 일어서서 걸어가야 할 것만 생각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우리들도 성장해 나갔다.

2012년 11월, 우리는 LA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에서 마지막 행사를 진행했다. LA의 많은 미디어들이 취재해 더 뜻깊은 시간이었다.

▼ 98년식 현대 카운티를 캠핑카로 개조한 김치버스. 임무를 마치고 지난 12월 12일, 평택항으로 입항한 김치버스는 현재 경희대학교에 주차되어 있다. 외국인들은 한국 번호판을 달고 달리는 김치버스만 보고도 호기심을 보였는데, 주행 중에도 옆에 가는 차들이 김치버스 사진을 찍는 등 인기가 많았다.

시간이 흐르며 김치를 알리는 방식도 좀 더 과감하고 새로워졌다. 음식도 처음에는 김치브리또, 김치햄버거, 김치피자, 김치파스타 등 그 나라에 맞게 즉흥적으로 개발한 퓨전요리를 많이 선보였는데, 점점 외국 사람들이 한국 전통 김치 맛에 더 호기심을 느낀다는 걸 알게 되면서는 그냥 한식 그대로를 많이 재현했다. 김치볶음밥, 김치전, 김치말이국수 등등. 프랑스 남부나 스페인 등에서는 매워서 잘 못 먹겠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좋아해주시는 외국인들을 보면서 좀 더 잘 알려야겠다는 책임감을 많이 느꼈던 시간들이었다.

400일간 김치버스를 타고 김치를 알리고 왔다고 하면 “대단하다” 해주시는 분들이 많다. 평범한 젊은이들인 우리가 대단할 것은 없지만, 굳이 말한다면,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점인 것 같다. 우리의 도전으로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면서 살 수 있구나’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 수 있구나’ 하는 희망을 가졌으면 좋겠다. 새해에는 김치버스 사진 전시회, 책 발행, 김치버스 팀이 개발한 메뉴 판매 등등을 계획 중이다. 혹시 길 가시다가 김치버스와 마주치신다면 반갑게 아는 척해주세요!!^^

시각장애인 미술학도이자 스키 국가대표 양재림 선수

눈밭을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시각장애인 3급의 양재림(25) 선수는, 여자 시각장애인으로서는 유일한 장애인 스키 국가대표 선수다. 지난 2011년 1월, 국가대표가 된 이후로 놀랍게 성장한 그녀는 2012년 말, 네덜란드와 독일에서 열린 IPC 알파인스키 선수권 대회에서 각각 금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따는 성적을 거뒀다. 동양화 전공의 미술학도이기도 한 그녀는 스키와 그림이라는, 시각장애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두 가지 도전을 하며 ‘장애에 앞서 더 중요한 건 마음’이라는 걸 삶으로 보여주고 있다.

시각장애인으로서

스키를 탄다는 게 놀랍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이제는 적응이 됐어요.(웃음) 근데 지형이 파이거나 울퉁불퉁한 데 가면 아직 좀 무서워요. 바닥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덜컹거림을 느끼니까요. 하지만 항상 평평한 바닥에서만 탈 수는 없으니까 꼭 극복해내야죠. 저는 스키가 그냥 좋거든요. 아무리 추운 날도, 이상하게 스키장만 나오면 하나도 안 추워요. 되게 힘들고 쉬고 싶다 하다가도, 뒤돌아서면 또 타고 싶고. 내가 타고 또 타도 이렇게 아쉬워할 만큼 하고 싶은 걸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참 행복해요.

어떻게 그 코스를 인지하고

스키를 타나요?

앞에서 이끌어주는 가이드랑 같이 타요. 가이드가 먼저 가면서 무선통신으로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는데, 그걸 따라가는 거죠. 경기 때는 선수와 가이드 사이에 간격이 멀어지면 실격이에요. 한쪽이 빨라도 한쪽이 느려도 안 돼요. 진짜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되게 어려웠어요. 제가 선수 생활할 때부터 거의 2년간 함께했던 가이드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못 믿겠더라고요. 그러다가 하도 많이 타니까 친해지고 자연스럽게 믿게 되더라고요.

스키 외에 대학에서

그림도 전공하고 있잖아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

궁금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림을 전공하게 됐어요. 제가 오른쪽 눈만 아주 약간 보이는데 사실 처음에는 멀리 있는 걸 그려야 하거나, 작은 걸 세밀하게 그려야 할 때는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그리나? 싶었어요. 그런데 점점 생각을 바꿨어요.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그리나. 내가 보이는 대로 그리자, 똑같이 못 그려도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그리면 뭔가 나오겠다 싶었어요. 저는 저만의 눈으로 보니까 좀 더 다른 표현이 나올 수도 있을 거 같았고요. 지금은 제가 볼 수 있는 정도 내에서만 그림을 그려요. 뿌옇게 보이면 뿌옇게, 제가 느끼는 대로.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제 그림의 주제가 스키, 눈 그런 거예요. 운동하면서 제가 느끼는 거를 그림에 표현하고 싶어요. 스키 타고 내려올 때의 속도감이라든가 그런 것도 표현하고 싶고, 제 그림을 보고 스키 타러 가고 싶다 그런 생각이 들 수 있게요. 앞으로의 꿈이 있다면, 스키를 전문적으로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어요.

“보이지 않아도 마음만 있으면 다 할 수 있다”고 수줍게 말하는 양재림 선수. 아직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건 자신 없다는 그녀지만, 스키장 위에 선 그녀는, 붓을 잡은 그녀의 손길은, 그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사실 양재림 선수가 이렇게 성장하기까지, 냉정하리만치 모진 어머니의 교육이 있었다. 임신 7개월 만에 미숙아로 태어난 재림이는 미숙아 망막증으로 왼쪽 눈의 시력을 잃었고, 오른쪽은 눈앞의 사물만 겨우 알아볼 정도였다. 처음에는 도저히 이 상황조차 받아들일 수 없어 힘들어했던 엄마 최미영씨는 곧 아이를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재림이를 ‘장애인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서 홀로 설 수 있게’ 교육을 시켰다.

우선 한쪽 눈만 약하게 보이다 보니 높낮이 조절이 안 되어, 내리막길을 못 걷는 어린 재림이를 설악산에 데리고 갔다. 대청봉에서 오색약수터까지는 다 내리막길. 그 내리막길을 혼자서 내려오도록 했다. 하루 종일 기다시피 내려오는 아이의 손을 한 번도 잡아주지 않았다. 속으로는 무수히 눈물을 흘렸지만, 그래야 아이 스스로 설 수 있었기에 냉정하게 바라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 혹독한 훈련이 끝나고 재림이는 계단을 막 뛰어다녔다.

“눈이 잘 안 보이는 건 인생의 장애가 아니다. 어떤 아이는 귀가 잘 안 들리고 어떤 아이는 키가 작듯이, 그건 하나의 특징일 뿐이지 그것 때문에 무엇을 못 하는 건 아니다.”

항상 재림이에게 그렇게 말하던 엄마는, 아이의 균형 감각과 재능을 키워주고자 이런저런 운동과 교육을 많이 시켰다. 기본적인 청소, 빨래, 요리도 스스로 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그리고 무엇이든 재림이 스스로 해보겠다고 하면, 엄마는 말했다.

“하고 싶으면 뭐든 해봐, 할 수 있어. 하지만 할 거면 너의 선택에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해.” 그중 하나가 스키였고, 다른 하나가 그림이었다.

오늘이 있기까지

가장 영향을 준 분이 있다면요.

엄마예요. 엄마는 되게 교육에 있어서는 냉철하셨어요. 장애 있어서 뭐? 그렇다고 못 할 게 뭐가 있는데? 못 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라고 항상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제가 뭐든 하겠다고 하면, 정말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대신 그 과정에서 게을러지는 모습을 보이면 화를 내셨어요. 이럴 거면 아예 하지 말라고. 저는 도저히 못 해서 그러는 건데, 그렇게 다그치는 엄마가 섭섭할 때도 있었죠.(웃음)

어머니께 가장 고마울 때는요?

저를 혼자서 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주셨다고 느낄 때죠. 엄마는 항상 “장애가 있다고 하면 남들이 자꾸 도와주려고 하는데, 그 도움도 받으면 안 돼. 너 스스로 해”라고 하셨어요. 그러다 보니, 꼭 필요한 도움은 받지만 웬만한 건 혼자 해요. 사실 외국 시합 나갈 때마다 그걸 느껴요. 스키 장비가 되게 많거든요. 근데 외국 선수들은 다리 한쪽이 없거나, 팔 한쪽이 없어도 다 자기가 챙겨요. 그런데 저희 같은 경우는 코치님들이 다 들어주거든요. 이번 세계 대회에 가서 놀랐던 거는, 한쪽 팔이 거의 없는데도 한 손으로 스키를 풀어서 조립을 하는 거예요. 진짜 저 선수들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하도록 교육을 받아서 그렇구나 싶고. 우리 엄마도 나를 그렇게 키워주었구나 싶어서 고마워요.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던 양재림씨는 이화여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다. 그녀가 갖고 있는 가능성을 알아본 학교에서는, 특수교육대상자 특별전형으로 그녀를 합격시켰다. 재림씨가 그림을 그릴 때 주로 사용하는 재료는 색연필. 색연필의 느낌과 색감이 좋다고 한다.

겨울이면 늘 스키장에 갔던 양재림씨가 스키를 제대로 해보고 싶다 생각한 것은 2009년 대학교 1학년 때였다. 스키를 탈수록 좀 더 전문적으로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러던 차에 대한장애인스키협회를 알게 되었고, 재림씨의 소질을 알아본 관계자는 선수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보통 시각장애를 가진 선수는 균형 감각이 떨어지는데, 재림씨의 균형 감각은 오히려 일반인보다 더 좋았던 것이다.

매일같이 스키를 연습하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헬스장에 나가고. 사실 시각장애인으로서 부딪쳐야 했을 어려움이 얼마나 많았을까.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탓하기보다 늘 그랬듯,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해나갔다. 그리고 2011년 초, 그녀는 여자 시각장애인으로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스키 장애인 국가대표 선수가 된다.

드디어 2011년 2월 제8회 전국 장애인 동계체육대회, 스키 선수로서 치르게 된 첫 경기. 알파인스키 부문에서 여성 시각장애인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여자부 모든 장애등급, 남자 시각장애인을 통틀어도 가장 좋은 기록이었다. 이어서 그해 12월 미국에서 열린 북미컵대회(NorAm Cup)에서는 동메달을 획득, 선수 생활 1년 만에 엄청나게 빠른 성장을 보였다. 당시 정인섭 감독은, “세계선수권 대회에 1위 한 선수하고 기록 차이를 비교해 보았을 때, 충분히 세계 5위권 안까지는 진입해 있다. 앞으로 열심히 하면 더 도약할 수 있다”라는 평가를 내렸다.

스키 선수가 되기까지

가장 힘들었던 건 무엇인가요?

아빠를 설득하는 거였어요. 선수가 되기까지 아빠가 굉장히 반대를 많이 하셨거든요. 스키장의 자외선 같은 거 때문에 눈이 더 나빠질까 봐, 다칠까 봐 걱정이 되셨던 거예요. 하지만 저는 너무 하고 싶으니까 처음에는 무조건 떼쓰듯이 위험하지 않다고, 시켜달라고 제 주장만 했어요. 그런데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무턱대고 싸우지만 말고, 하고 싶으면 그 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라고.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아무리 아파도 운동하러 가고, 그림도 운동하는 그림만 그렸어요.(웃음) 그러다 보니까 아빠도 나중에는 포기를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눈이 더 나빠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정말 눈이 안 보이게 되더라도 스키를 하고 싶었어요. 과연 나의 끝은 어디인가, 제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알고 싶은 마음도 컸던 것 같아요.

재림씨의 도전이

다른 장애인 친구들에게

희망이 될 거 같습니다.

진짜로 좋아하고 진짜로 하고 싶다는 마음만 있으면 다 되는 거 같아요. 엄마가 그런 말씀을 하세요. 베토벤은 귀가 안 들릴 때 어떻게 지휘를 하고 어떻게 심포니를 작곡했겠냐고. 본인이 하고 싶어 하니까 할 수 있었던 거고, 본인이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고. 정말 하고 싶으니까 어떻게든 하려고 방법을 찾게 되고 그만큼 노력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다른 장애인 친구들한테도 처음에는 어렵겠지만, 하다 보면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많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요. 앞으로 뭔가 좋아하는 걸 찾아서 활동을 하는 시각장애인들도 많이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저도 많이 도와주고 싶어요.

현재 양재림 선수는 2014년 3월, 러시아 소치 동계 패럴림픽(장애인 올림픽대회) 참가를 목표로 열심히 훈련 중이다. 그녀의 목표이자 꿈은 소치 올림픽 금메달. 가장 화려한 꿈을 꾸고 있는 지금, 하지만 양재림 선수에게 가장 위기의 시기이기도 하다. 지난여름부터 그나마 살짝 보이던 눈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어 활동을 쉬었으면 하는 의사의 권유, 그리고 그동안 2년여를 함께했던 감독님과 가이드 모두 바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여건에도 그녀는 올림픽 금메달의 꿈을 꼭 이루고 싶다고 한다.

“최근에 마음이 좀 힘들긴 했어요. 시력이 더 나빠지니까 실력도 조금씩 퇴보를 하는 것 같아 위축이 되었는데, 이번 유럽 대회에서 제가 타는 걸 보고 코치님이 가능성을 봤다고 말씀해주셔서 힘을 많이 받았어요. 언니도 이메일로 ‘네가 꼭 올림픽에 나갔으면 좋겠다고. 네가 좋아하는 그림과 스키, 둘 다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해줬는데, 그 말이 되게 힘이 됐어요. 상황을 탓하지 말고 어떻게든, 될 수 있게 앞만 보고 가야지요.”

양재림 선수를 지도하고 있는 김성택 감독은 “재림이의 최대의 장점은 본인의 의지”라고 말한다. 시각장애인으로서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을 통해 스키 선수가 되었고, 또 그림을 전공하는 학생이 되었다. 자신이 가진 한계를 하나씩 하나씩 조용히 극복해온 스물다섯 살의 청년 양재림. 그렇게 그녀는 자신만의 속도로 삶의 슬로프(slope)를 만들어갈 것이다. 때론 덜컹거리는 길도 만날 것이고 때론 평평한 길도 만나겠지만, 보이는 것 너머에는 또 다른 아름다운 세상이 펼쳐져 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씩씩하게 행복하게 계속 도전할 것이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따듯한 사람들이 함께 차려내는 ‘내 인생의 밥상’ 이야기

엄마의 김치와 마음수련

신윤경 34세. 직장인. 경남 하동군 하동읍

하동에서 생활하는 딸에게 김해에 계시는 엄마가 김치를 담갔다며 보내주셨다. 택배를 통해 받아보니 냉장용 플라스틱 박스에 여러 개의 봉지, 봉지에 갖가지 김치를 담고, 일일이 어떤 김치인지 알아보기 쉽게 견출지 같은 것에 파김치, 새김치, 찌개용김치, 무우김치, 도라지무침 등등 밑반찬까지 종류도 다양하게 다 적었다.

제일 눈에 띄는 건 엄마의 편지. 근데 봉투가 너무 웃기다. 중학교 때쯤 영화 시리즈 편지 봉투를 잔뜩 샀었는데, 아직도 다 쓰지 못했던 걸 잘 찾아내 쓰셨다. 봉투에는 영화 ‘시월애’의 전지현이 애처로운 표정으로 있고, 그 옆에 이렇게 쓰여 있다. ‘사랑이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편지 내용도 예사롭지 않다.

내 사랑, 경아

그 무엇도 자유와 사랑이란다.

인생에서 하고자, 이루고자 했던 마음들 다 내려놓고

오직 자연에 순응하면서 우주의 마음으로 마음 없이

추위 속에서도 온몸을 다 내어주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면서

나를 없애고 우주까지 없앤 속에서의 나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단다.

생활 속에서의 수련을 하고자 노력은 하고 있다.

춥고 서글플 때도 있겠지? 나가 없이 살아가자.

외로울 때도 항상 나와 함께하고 있는 우주가 있지 않는가?

난 언제나 하나가 아니고 우주 전체요,

그 우주일 테니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그래, 진리로 우주로 살아라. 그곳은 오직 완성이잖아.

경아, 김치 솜씨가 없어서 맛은 없지만 개체와 전체가 하나인 모두인 너에게 보낸다.

먹어주었으면 좋겠어.

내일 시골 가야겠다. 할아버지 입원 중이시란다.

추위에 감기 조심하고 건강하게 지내주길 바란다. 사랑해.

… 엄마가

이미경 작.

<나 어릴 적에> 100×60cm

Ink pen on paper / 2009

눈물이 핑 돌기도 하면서, 왜 이렇게 웃긴지 모르겠다. 편지 내용에 웃지도, 울지도 못하겠다. 엄마는 한창 마음수련 중이시다. 나의 소개로 수련을 시작하시고, 여리기만 하시던 엄마가 많이 달라지셨다. 떨어져 지내는 딸이 그리워서 많이 애태우셨는데, 요즘은 원래 모습, 소녀 같고 긍정적인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내 밥상에 택배 온 김치가 올라올 때마다 늘 함께하는 엄마에게 고맙고 감사하게 된다.

수능 날의 그 도시락

장하란 30세. 방송 진행자, 스피치 강사.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2002년 11월. 그해는 수능 한파가 찾아오지 않은, 따뜻했던 수능 날로 기억한다. 교문 앞까지 데려다 준 엄마는 나에게 책가방 두 개를 건넸고, 오른쪽 왼쪽 어깨에 각각 가방 한 개씩을 메고 난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그 가방 한 개에는 순전히 도시락과 각종 보온 통으로만 가득 차 있었으니…. 점심시간. 가뜩이나 긴장되어 잘 넘어가지도 않는 상황에서 나의 도시락으로 가득 찬 책가방에서는 정말 끝도 없이 무언가 계속 나왔고 친구들도 놀라면서도, 놀리는 듯 웃었다. 소풍 온 것도 아닌데 몇 단으로 된 도시락 속에는 내가 좋아하는 각종 반찬들, 보온 통에는 따뜻한 물, 따뜻한 차, 국이 종류별로 들어 있고 심지어 국을 덜어 먹으라고 집에서 먹던 국그릇까지 가방에 넣어놓으셨다. 친구들과 나눠 먹어도 다 먹지도 못해 절반은 남기고 점심시간은 끝났다.

시험을 무사히 마친 후, 내가 시험 보러 갔지 밥 먹으러 갔냐고 엄마에게 한마디 할 작정을 하고 집에 갔는데 엄마는 집에 안 계셨고, 그동안 고생했으니 친구들이랑 재밌게 놀라는 문자 메시지 한 개만 보내오셨다. 엄마 말대로 오랜만에 후련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밤 10시경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밌게 잘 놀고 있니? … 내일 새벽 5시 반까지 택시 타고 00병원으로 올 수 있지?”

내가 수능 시험을 보던 10시간 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것이다.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딸의 중요한 시험 전날 먼 곳으로 보내신 거였다. 나로서는 수능을 끝낸 그다음 날이 마지막 모습도 못 뵌 외할머니의 발인 날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본 엄마는 어제 내 시험장 앞에서 책가방 두 개를 건네주던, 종류별로 도시락을 가득 채워줬던 강인한 우리 엄마가 아닌, 엄마를 잃고 슬퍼하는 딸의 모습이었다.

이미경 작.

<애련리 가게> 55×45cm

Acrylicink pen on paper / 2012

그때로부터 어느덧 1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후에도 계속 나는 엄마의 정성과 사랑이 가득한 밥을 먹으며 20대를 보냈다.

엄마를 잃은 슬픔을 삼키며 딸을 위해 싸준 도시락을 먹은 그 딸은 원하는 학교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며,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지금 이렇게 서른 살 어른이 되어 있다. 그리고 날 넘치게 사랑해주셨던 부모님의 품에서 나와, 곧 나의 가정을 꾸리기 위한 준비 중이다.

남들보다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제 막상 결혼이라는 과제 앞에 서니 고마운 것을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았다는 생각이 지금에서야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누구보다 아낌없는 사랑을 받았기에 난 자신 있다. 그만큼의 사랑을 나도 내 새로운 가정에 쏟으리라. 그런 예쁜 모습으로 성장할 딸의 모습을 기대하며 그날도 엄마는 내 도시락을 싸고 계셨던 거겠지.

10년 전 그날, 죄다 남기고 왔던, 내가 좋아하는 파 송송 계란말이, 들기름에 들들 볶아 깨 솔솔 뿌려 있던 감자볶음, 햄이 들어 있는 김치볶음이 생각나는 겨울밤이다.

엄마가 계셨기에 행복했습니다

오지연 다음 요리 블로거.

blog.daum.net/01195077236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질 않고, 자식은 봉양하려고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은 세월이고, 다시는 볼 수 없는 것이 어버이다.”

풍수지탄의 참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일흔 살에 늙으신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려고 색동저고리 입고 어린이처럼 기었다는 반의지희(斑衣之戱), 그럴 수만 있다면 백 번이라도 할 수 있으련만 이를 즐겁게 여겨주실 부모님이 안 계시니…. 시아버님께서는 20년 전에 돌아가셨고 친정아버님도 10년 전에 떠나신 지금, 시어머님만 생존해 계신다. 전화를 드려도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음식을 만들 때면 올해 위암으로 돌아가신 친정엄마를 떠올리게 된다. 외할머니의 손맛을 물려받으셨던 엄마의 손은 요술 손이었다. 집 앞 채마밭에서 깻잎을 따다 계란 부침 안에 넣고 둘둘 말아 향긋한 맛을 내시는 센스는 기본이고, 시금치 물, 쑥물, 오미자 물 등을 내어 음식에 물을 들이곤 했다. 고추장, 된장도 직접 담그시고, 된장 속에 묵은지나 알타리무를 넣어서 곰삭혀 놓은 쩜장(충청도 말)으로 밥을 비벼 먹으면 너무나 맛있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김장용 채소를 심기 위해 채마밭 늙은 오이 넝쿨을 걷어내고 노각(늙어서 빛이 누렇게 된 오이)을 따다 무침을 만들고 싸리문 호박 넝쿨에 매달린 호박으론 조림을 만들어 백중 음식으로 차려내셨다. 김장철이면, 커다란 단지에 무, 배, 쪽파, 고추 등을 넣고 적당히 소금물로 간을 하여 시간이 지나면 사이다 맛이 나는 동치미를 만들어주었다. 동네 잔칫날이면 어김없이 과방엔 울 엄마가 치프(chief)가 되었고, 형형색색 여러 가지 음식들을 담아낸 모습이 너무 고와 손을 대기 아까웠었다.

내가 서울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친구들과 나눠 먹으라며 떡, 화전, 게장, 약식 등을 바리바리 싸오시곤 했다. 그런데도 “막상 풀어놓으니 먹을 게 없네” 하셨던 엄마. “먹고 싶은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것은 건강하고 풍요로운 삶을 위해 하늘이 준 축복”이라 여기셨던 엄마. 매일매일 블로그에 요리를 올리고, 우연한 계기로 다문화가정 엄마들과 아이들에게 한국 음식을 가르쳐온 지 10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엄마의 손맛을 따라가지는 못하겠다.

이미경 작.

<붕어빵 가게> 55×55cm

Ink pen on paper / 2010

얼마 전 엄마가 떠나시고 49재 탈상을 마친 후 처음 맞는 친정엄마의 음력 생신날이 왔다. 엄마 떠나신 후에도 한동안은 습관처럼 매일 집으로, 휴대전화 버튼을 누르곤 했었는데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 생일이 되어서야 이 세상에 아니 계심을 실감하게 된다. 세상의 딸들은 여리나 세상의 엄마라는 존재는 참으로 숭고하고 위대하다.

엄마와 친정엄마! 결혼하여 딸을 키워 본 후에야 그 엄마보다도 더 애틋한 것이 친정엄마였음을, 그리고 이제 그 친정엄마가 안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니, 마음속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또 훔친다. 지금껏 내가 행복한 것은 우리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었고 이 험한 세상을 야무지고 똑똑하게 살아가도록 내 딸을 훈육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이제 이 땅에 남겨진 내가 해드릴 수 있는 거라곤 살아생전에 즐겨 드시던 음식들을 기억해내 생신상을 차리는 것뿐이다. 돌아가시고 나서 첫 번째 맞이하는 생신은 살아계실 때처럼 차려 드리는 게 도리라 한다. 눈물과 아쉬움으로 정성껏 만든 친정엄마 생신상을 바라보면서 정작 생전에는 좋아하는 음식 한번 마음껏 드시지 못했던 엄마의 사랑을 별처럼 헤아려 본다.

같이 먹는 밥이 진정한 ‘집밥’

박인 27세. 함께 먹는 밥,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 ‘집밥’ 대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하루를 보내고 허기진 배를 간단한 인스턴트로 달래고 나면, 아무리 배가 불러도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아, 집밥 먹고 싶다.”

사실 나는 가족과 둘러앉아 제대로 집밥을 먹어본 적이 없다. 부모님이 인도에서 사업을 하셔서 고등학교 때부터 혼자 살았다. 이사도 자주 다니고 하다 보니 혼자 밥 먹는 일도 많았다. 영화 ‘카모메 식당’이나 ‘심야식당’에 보면 묵묵히 음식을 만들어주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먹는 모습들이 나온다. 그런 걸 보면서, 나도 저렇게 따듯한 집밥을 먹고 싶다는 막연한 그리움 같은 걸 품고 있었던 것 같다.

2012년, 3년 정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다른 길을 고민하며 한동안 백수로 있을 때였다. 혼자 집에 누워 있다 보니 왠지 우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냥 오가며 인사 정도 하고 지내던 이웃집 할머니께서 카레를 가지고 오셨다.

“젊은 처자가 혼자 고생이 많네. 카레를 많이 해서 조금 갖고 왔는데 한번 먹어봐” 하시는데, 어 이건 뭐지? 처음 받아보는 이웃의 친절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조금이라 하셨지만 혼자 먹기에는 양이 너무 많았다. 할머니 마음을 생각하니 남기기는 아깝고, 어떡할까 고민하다 페이스북에 ‘카레가 있는데 같이 드실래요?’ 하고 카레 사진과 함께 올렸다. 뜻밖에도 얼굴은 모르지만 인터넷 친구였던 사람들의 연락이 왔다. 그래서 카레를 싸들고 가서 나누어 먹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다 보니, 이게 정말 집밥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경험이 너무 좋아서, 이웃집 할머니께 음식을 부탁드리고 사람들과 함께 먹는 모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예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정을 쌓는 ‘소셜 다이닝(Social Dining)’ <집밥>(www.zipbob.net) 프로젝트라는 걸 시작하게 되었다.

함께 ‘집밥’ 먹고 싶으신 분들 모여라~!!! 모이는 주제, 시간, 장소를 공지해서 인터넷에 올렸다. 의외로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오셨다. 17살 고등학생부터 50살 아주머니까지 연령층도 다양했다. 집안에 화를 당해서 사람들에게 위안을 받고 싶어서 신청하신 분, 남편이 실직했는데 용기를 얻고 싶어서 오신 분. 그런 분들이 한 장소에 모여서 밥을 먹으며 고민을 나눴다.

이미경 작.

<밤나무골 가게> 180×120cm

Acrylicink pen on paper / 2012

“모르는 사람과 밥을 먹는다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여길 와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용기를 얻었고 위안을 얻었다.” “너무 외로웠는데 여기 와서 참 따듯해졌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 먹는 따듯한 밥상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솔직히 어릴 때부터 인간관계에 목말라 있던 내 콤플렉스도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먹는 밥이 집밥이 아니라, 같이 먹는 밥이 집밥이구나,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밥벌이’하느라 힘든데 ‘같이 밥 먹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 요즘 같은 세상에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일단 한번 같이 드셔보세요. 그럼 아실 거예요.”

따듯한 사람들이 함께 차려내는 ‘내 인생의 밥상’ 이야기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준

푹신한 부드러움, 오믈렛

이유석 셰프 33세.

<맛있는 위로>의 저자. 프렌치 레스토랑 운영

유난히 비가 많이 오던 날 밤, 열한 시 반을 넘길 무렵이었다. 가게엔 손님 한 분만 남아 있었다. 오랜 단골이지만 나이도 이름도 직업도 알지 못하는 손님이었다. 대략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중년 남자였다. 가게를 찾으면 늘 와인 한 병을 혼자 조용히 마시곤 했던 손님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을 걸어왔다.

“셰프님, 메뉴판에 없는 요리도 해줄 수 있나요? 혹시 오믈렛을 해줄 수 있을까요?”

이미 주방은 마감할 시간이었지만 처음으로 건넨 부탁이었고, 그의 눈빛에서 간절함이 엿보여 흔쾌히 수락했다. 오믈렛은 무척 단순한 요리다. 달걀과 버터만 있으면 집에서도 손쉽게 만들 수 있다. 반면 ‘제대로’ 만들기는 어려운 요리이기도 하다. 서양에서는 오믈렛을 만드는 걸 보고 요리사의 내공을 판단할 정도로, 탄탄한 기본기를 필요로 한다.

달걀을 푼 다음, 소금과 후추를 넣어 간한다. 부드러운 맛을 위해 생크림 약간 투척! 이제 기름을 두른 팬을 살짝 달군 뒤 소량의 버터를 넣고, 버터가 녹을 즈음 달걀을 붓는다. 약한 불에서 팬을 앞뒤로 흔들며 젓가락으로 잘 섞어주는 것이 포인트. 살짝 익었다 싶으면 팬 위쪽으로 달걀을 몰고, 팬을 잡은 손목을 박자에 맞춰 위아래로 탁탁 친다. 계란이 스르르 말리면서 자연스럽게 뒤집어진다. 이윽고 럭비공 모양으로 완성된 오믈렛을 접시에 담아 건네자 무척 고마워했다.

그는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천천히 아껴 먹었다. 음식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운 듯이 아주 천천히, 조금씩.

몇 주 뒤, 그가 다시 가게를 찾아왔다. 주방 마감 전의 짤막한 여유를 함께 즐기는데,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일전에 그가 떨어뜨려 놓고 간 사진이었다.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거기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와 교복을 입은 여학생도 함께 있었다. 사진을 받더니 한참을 묵묵히 바라보던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 사진 찾으려고 얼마나 동네방네 헤매고 다녔는지 몰라요. 정말 고맙습니다. 사실 지난번 여기 왔을 때 아내 기일이었어요. 그 사람이 암으로 떠난 게 5년 전이에요. 아내는 저랑 딸밖에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천생 여자였고 아내였고 엄마였죠. 음식 솜씨가 좋아서 집밥밖에 모르는 제게 늘 도시락을 싸줬어요. 제가 일 욕심이 많아서 평소엔 늦게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도서관에서 진급 시험이다, 자격증 준비다, 해서 늘 밖에 나갔거든요. 집에서 혼자 살림하고 애 키우느라 고단했을 텐데 싫은 소리 한번을 한 적이 없어요. 늘 정성스레 도시락을 준비해줬는데 특히 오믈렛을 자주 해줬어요. 내가 달걀을 참 좋아하거든요.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늦게 들어가도 그 늦은 시간에 오믈렛을 만들어주곤 했죠. 그냥 자면 속 쓰리다고…. 그때는 동료들 앞에서 도시락을 꺼내는 게 왠지 창피하기도 하고 도시락을 들고 다니는 자체가 귀찮아서 별로 반기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참 배부른 투정이다 싶어요. 이제는 아무리 먹고 싶어도 먹을 수가 없으니….”

이미경 작.

<개미슈퍼> 69×44cm

Ink pen on paper / 2007

그에게 오믈렛은 아내와의 소중한 추억이었고, 아내의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온기였다. 홀로 오믈렛을 먹으며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뼛속까지 시려오는 그리움으로 눈물을 흘렸을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음식이 지닌 소박하지만 위대한 힘을 나는 이런 순간에 느끼곤 한다. 누군가에겐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로, 혹은 마음을 전하는 선물로 자리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떠나고 딸만 바라보고 살았어요. 아내한테 못 해준 몫까지 딸아이한테 해주려고 최선을 다했죠. 혼자 집에 있을 녀석이 걱정돼 야근도 절대 안 했어요. 주말은 무조건 아이와 함께 지내죠. 집사람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았을 것을…. 요새 딸아이가 요리 학원에 다니는데 아빠가 좋아한다고 오믈렛을 배워 와서는 거의 매일 해줘요. 솔직히 평가해서 맛있는 편은 아니지만 묘하게 아내가 해줬던 그 맛이 나긴 합니다.”

얼마 전에 딸이 교제하는 남자가 있다고 하기에, 혹시나 못난 아비 밑에서 커서 음식 못한다고 구박받을까 봐 덜컥 겁이 나서 냉큼 요리 학원부터 등록시켰다는 그의 말에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혹시나 딸에게 채워주지 못하고 알려주지 못한 것은 없는지 전전긍긍하던 시간들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 고스란히 전해졌다.

1년 가까이 셰프와 손님으로 만나면서 그렇게 많은 대화를 나눈 건 처음이었다. 항상 어렵게 느껴지던 그가 그날은 마치 내 아버지처럼 가깝고 편안했다.

나를 키운 세 가지 밥상

배지영 41세. 주부. 전북 군산시 나운2동

내가 살던 곳은 읍내에서 더 깊이 들어간 시골, 하루에 버스가 세 번만 다니던 산골이었다. 동네에 텔레비전이 딱 두 대 있었는데 그중 한 대가 우리 집에 있었다. 저녁마다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토방으로 모여들었다. ‘개구리 왕눈이’부터 ‘타잔’ ‘김일 레슬링’ ‘전설의 고향’ ‘수사반장’을 봤다. 텔레비전을 본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감격하던 때였다.

한여름에는, 우리 집에서 걸으면 1시간 거리에 있는 교회에서, 담벼락에다 영화를 쏘아서 보여주곤 했다. 긴긴 해가 떨어진 뒤에야 볼 수 있던 영화는 밤 10시 넘어 끝났다. 열 살도 안 먹은 나는 집으로 가는 길에 하품을 쩍쩍 했고, 눈가가 젖은 김에 울며불며 걸었다. 징징거리는 소리를 싫어했던 언니도 그때만은 야박하게 굴지 않았다.

동네 어귀에는 삼십 대 초반이던 우리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는 모기가 사정없이 물어뜯는 정지(부엌)에서, 불을 때서 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여 밥상을 차려놓은 뒤였다. 밥보자기를 들추면, 보리나 콩이 하나도 섞이지 않은 보드라운 밥이 있었다. 한 숟가락을 크게 떠서 먹으면, 엄마는 “오메, 내 가시내!” 하고 내 엉덩이를 토닥였다.

내 생일은 음력 9월 16일, 엄마는 꼭 쌀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팥을 듬뿍 넣은 시루떡을 해서 옆집, 건넛집까지 돌렸다. 엄마는 냇가에서 시루를 닦으며 “내 지영이는 아조 먹을 복을 타고난 사람이제이. 가을걷이 다 끝나고 생일 닥친 게 얼마나 좋은가이?” 하면서 해맑게 웃었다. 그렇지만 나를 따라다니던 별명은 ‘갈비씨’, 입이 짧았다.

내 먹을 복은 결혼으로 증명되었다. 남편과 나는 4년이면 졸업하는 대학을 몇 년씩 더 다니고 있었다. 양가 부모님들은 “즈그 살림하고 살면 철들겠지” 하는 마음으로, 학교 마치기 전에 혼인시켰다. 갑작스러운 결혼이라 집이 없어서 한 달간 시댁에서 살았다. 시부모님이 아침에 차려주신 밥 먹고 나왔다가 저녁이면 다시 차려주신 밥을 먹고 잤다.

큰애를 낳았을 때도 산바라지는 시부모님이 해주셨다. 어머니는 하루에 다섯 번씩 새 밥과 새 국을 끓이셨고, 아버지는 회복이 빠르라고 손수 가물치를 잡아다 주셨다. 처음 시부모님 댁에 갔을 때 부엌에 계시던 아버지가 “야, 야, 우리는 이렇게 산다” 하며 환하게 웃으셨던 얼굴 그대로, 우리가 아무 때고 시댁에 가도 꼭 밥상을 차려주셨다.

몇 년 전부터 어머니는 눈에 띄게 기력이 떨어지셨다. 뒤이어 대장암이라는 진단을 받은 아버지는, 병원에서 돌아와서도 어머니 밥상을 차리셨다.

밥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었다. 남편은 처음부터 시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부엌에 서는 게 자연스러웠다. 조신한 솜씨를 가진 그가 밥상을 차렸고, “내일 아침에 뭐 해 먹지?”도 그의 고민이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빠가 차리는 밥, 아빠가 싸 주는 소풍 김밥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란다.

이미경 작.

<사랑> 40×38cm

Acrylicink pen on paper / 2012

나는 두 달 동안 남편 밥을 끊은 적이 있다. 큰애와 열 살 터울로 임신한 둘째는 7개월째에 나오려고 했다. 아기의 건강은 알 수 없는 채로, 주사만 맞으며 대학 병원에서 누워 지냈다. 그게 그거 같았던, 집에서 보내던 일상이 가장 그리웠다. 처자식을 사육하듯, 부엌에서 음식을 하던 남편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식구끼리 평범하게 둘러앉아 밥 먹고 싶었다.

애태우고 태어난 꽃차남(^^)은 건강했다. 산후 조리 아주머니가 있어도, 남편은 아침저녁으로 흰밥을 하고 미역국을 끓였다. 내가 어릴 때 교회 영화를 보고, 먼 밤길을 걸어와서 먹던 엄마 밥보다 더 맛있는 남편의 밥. 살아가는 일을 기쁘게 만드는 그 밥은, 먹는 대로 아기 젖이 되었다. 아기는 빈약한 엄마 가슴에서 나온 젖만 먹고도 매혹적인 우량아가 되었다.

나도 밥 속에 들어가는 공력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남편이 자정 넘어 퇴근해서 새벽에 나가는 생활을 할 때는 확실하게 그의 밥 걱정을 덜어주었다. 내가 겁먹지 않고 할 수 있는 반찬을 찾아 식단표를 짜서 그대로 했다. 달랑 반찬 한두 가지인 밥상에 실망한 아이들은 “에이, 이게 뭐야?” 했지만, 배고플 때까지 최대한 기다리면, 달려와서 달게 먹었다.

남편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면, 그날부터 밥상은 달라진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오이소박이를 담근다. ‘육해공’ 음식을 총출동시켜 접시마다 정갈하게 음식을 담는다. 애들은 놀거나 책 읽으면서도, 맛있는 냄새에 이끌려 부엌으로 와서 이것저것 집어 먹고, 다시 거실로 간다. 현실적으로 치울 일이 걱정인 나는 남편에게 묻는다.

“여보, 음식을 왜 항상 이렇게 많이 해?” “각시랑 애들 먹고 나면, 나 먹을 게 없잖아.”

남편이 차린 밥을 먹고 산 지 십 수 년, 훈훈함만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어떤 병 치료가 끝나기도 전에 또 다른 병을 달고 와 버렸다. 중학생인 큰애는 아침에 입고 나간 바지가 저녁이면 짧아져서 돌아온다는 폭풍 성장의 기미조차 없어서 반에서는 두 번째로 작다. 그러나 남편은 개의치 않고, 밥을 한다. 우리 식구는 오늘도 최고의 밥을 먹는다.

내가 키운 채소 먹으니,

콜라는 멀어지고

박시현 13세. 신도림초등학교. 서울시 동작구 상도3동

‘치~ 익!’ 이 소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이다. 콜라 캔을 딸 때 치~익 하고 나는 소리를 들으면 짜릿짜릿한 탄산과 달콤한 콜라 맛이 떠올라 기분이 좋다. 우리 아빠도 나처럼 콜라를 좋아하신다. 덕분에 동글동글 불룩 나온 배도 닮았다.

아빠와 다르게 날씬한 엄마는 얼마 전부터 동네 분들과 텃밭을 일구기 시작했다며 바쁘셨다. 그리고 며칠 후 대학생 형들과 함께하는 텃밭이 있다면서 같이 가보자고 하셨다. 4학년 때 지렁이로 음식물 쓰레기 처리하는 실험을 해서 상을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농사짓기도 궁금했기 때문에 바로 토요일부터 함께 따라다녔다.

처음엔 땅에는 무엇이든 심기만 하면 자라는 줄로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 전에 먼저 흙을 살리고 우리 토종 씨앗을 심어 천연 비료인 오줌 액비를 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노래에서만 듣던 신토불이가 그냥 우리나라 것이라서 우리 몸에 좋은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우리나라에서 자란 농작물이라도 화학 비료를 주고 농약을 뿌린 작물은 오히려 몸에 해롭다. 그런데 내가 음식을 먹고 싼 오줌으로 퇴비를 만들어 다시 밭에 뿌려주면 그 밭에서 난 작물들이 내게 필요한 면역 인자를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그 작물을 먹었을 때 내 몸을 건강하게 해준다. 내가 열심히 오줌을 모으는 가장 큰 이유다.

처음 밭에 뿌린 씨앗은 상추였다. 몇 주가 지나자 싹이 생기고 6주가 지나자 상추의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 그래서 나는 드디어 처음으로 내가 키운 상추를 먹게 되었다.

농약이 안 들어 있으니 믿음이 가고 몸에도 좋은 것 같고 왠지 더 맛있었다. 상추는 따도 따도 계속 자라니까 먹는 게 아깝지가 않았다. 오히려 생명의 신기함이 느껴졌다.

상추를 키우면서 집에 있는 텃밭에 고추, 콜라비, 방울토마토를 키우고 집 안에서는 새싹 채소도 키워서 먹게 되었다. 아무래도 화학 비료를 안 주니까 먹을 수 있는 새싹 채소 양이 작은 접시 하나도 안 될 때도 있지만 가족들이 맛있게 함께 먹으니까 좋았다. 엄마, 아빠는 내가 수확한 채소들로 고기를 싸 드시면서 아들 덕을 톡톡히 본다고 하셔서 어깨가 으쓱했다.

이미경 작.

<송천상회> 50×40cm

Acrylicink pen on paper / 2012

가을에는 배추를 심었는데 얼마 전에 그 배추로 김장을 했다. 우리가 힘들게 키운 농산물이 잘 자라줘서 독거노인처럼 어려운 분들에게 나눠주게 되니 보람차고 뿌듯했다.

그동안 내 식성도 많이 바뀌었다. 밥을 먹을 때도 짜릿한 맛에 콜라를 함께 마셨는데 집에서도 새싹 채소와 쌈 채소를 키워 매일매일 먹을 수 있게 되니까 채소들이 더 좋아지고 내가 키운 쌈 채소를 자랑하다 보니 콜라도 점점 멀어져 갔다.

또 나는 건강에는 좋지만 맛은 별로 없는 해산물을 싫어했었다. 대표적으로 멸치와 다시마가 있다. 몸에 좋다고 해도 흐물흐물 씹는 맛이 기분이 안 좋아서 편식했는데 내가 키운 채소랑 섞어서 쌈을 싸 먹으니까 더 맛있다고 느껴졌다.

학교에서 급식 먹을 때 맛없는 반찬이 나와도 이걸 키우는 데 많은 자원이 드는 걸 알기 때문에 남기지 않는다. 아프리카 어린이들은 실제로 며칠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양인데 그냥 버리는 게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

내가 오줌 액비를 만든다고 하면 신기해하기도 하지만 ‘에이, 더러워’ 하는 친구도 많은데 그런 친구들에게 토종 종자를 잘 키워서 나눠주고 싶다. 식물들은 우리가 잎을 딴다고 해서 화내거나 반항하지 않고 평화롭게 사람 입으로 들어가 준다. 그리고 그런 약한 식물들이 우리 몸을 튼튼하게 해준다. 우리가 약한 식물을 키우다 보면 친구들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도 생기게 될 것이다.

나는 이제 햄버거 피자 햄 같은 가공식품을 예전처럼 많이 먹지 않는다. 앞으로도 고기는 쪼금 들어가고 채소는 많이 들어간 건강한 밥상을 먹고 싶다. 그리고 내가 키운 농산물이 어려운 사람들의 반찬이 되었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을 하면서 우리 농산물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으면 좋겠다.

운동, 나도 한다

새해가 되면 세우는 목표 중 하나가 ‘운동하기’입니다. 거창한 목표를 세우기보다 집 주변 걸어보기 등 쉽고 간단한 운동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요. 특히 겨울철엔 몸 마음이 움츠러들기 쉽고 운동량이 줄어들면서 체력과 면역력도 떨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 자신감도 두둑이 챙길 겸 지금 당장 운동 Start!

편집자 주

우리 몸은 정원이다. 우리 의지는 정원사다. 현생에서 우리 육신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소중한 것이다. 주어진 정원을 가꿀 때 그것을 매일 돌볼 것인지 말지는 선택에 달려 있다. 실제 정원은 얼마나 정성을 들였는지 겉으로 드러나 보인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도 겨우 필요한 최소량의 영양분만을 공급했는지, 간혹 한 번씩 운동을 했는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자기를 돌보고 계획대로 정성을 들여 가꾸었는지, 스스로 들인 정성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매일 30분간 꾸준히 운동을 하면 매일 60분간 운동한 것만큼 체중과 체지방 감소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덴마크 코펜하겐대학 연구팀이 젊은 남성 62명을 세 그룹으로 나눈 뒤, 한 그룹은 매일 60분간, 또 다른 그룹은 매일 30분간 유산소 운동을 하게 했고, 나머지는 평소대로 생활하게 했다.

13주가 지난 뒤 체중을 재본 결과, 매일 60분간 운동을 한 그룹은 체중이 평균 2.7kg 감소한 반면 30분씩 운동을 한 사람들은 3.6kg 줄어들었다. 체지방은 60분 운동 그룹이 4.0kg 감소, 30분 운동을 한 그룹이 3.8kg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연구팀은 매일 60분 운동하는 걸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도 30분 운동으로 목표를 낮추면 더 쉽게 도전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이번 연구 결과에 주목했다.

운동은 아이들을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지난해 9월 6주간 자발적으로 운동에 참여한 미성중학교 학생 104명을 대상으로 운동이 학생들의 정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설문 조사한 결과, 삶의 만족도 점수(5점 기준)는 3.57에서 3.9로 높아졌고, 우울증은 1.52에서 1.47로 낮아졌다.

매일 점심시간마다 축구 경기가 벌어지는 서울 광문고등학교의 경우 1~2학년 전체가 참여하는 리그전 운동에 참여한 학생 중 평균 점수가 하락한 학생은 49명인 반면, 143명은 성적이 오른 것으로 나타났다. 10명 중 7명은 성적이 오른 셈이다. 또 한 가지 놀라운 변화는 흡연, 가출, 폭력 문제 등의 문제로 징계받은 학생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KBS1TV 수요기획 <당신의 아이, 얼마나 운동하나요?> 중에서

운동은 하루를 짧게 하지만 인생을 길게 해준다. – 조슬린

하루하루 규칙적인 운동을 하는 것은
하루하루 규칙적인 식사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 켈로그

이른 아침에 걷고, 점심 먹고 걷고, 저녁 먹고 걷고, 밤에도 걸어라.
땀이 날 때까지 걸어라. – 히포크라테스 처방전

우울증, 주의력 결핍, 불안, 약물 중독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좋은 약은 운동이다. 운동을 하면 혈액이 뇌에 공급돼서 뇌가 최적의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감정을 더 잘 조절하게 하여 충동을 억제하고 덜 공격적으로 만들며 지적 능력을 향상시킨다.

존 레이티 미국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교수

체온의 40% 이상은 인체 최대의 발열 장기인 근육에서 나온다. 고혈압, 당뇨, 자기 면역 질환 등 많은 질병은 체온이 낮은 데 그 원인이 있다. 체온이 낮으면 혈관을 위축시키고 혈액 순환을 나쁘게 하여 혈압을 상승시키기 때문이다. 저체온화의 최대 요인은 육체노동 감소, 운동 부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옛날에는 자가용 대신 걸어서 다녀야만 했고, 옷을 빨 때도 세탁기 대신 손으로 빨고, 청소도 걸레를 사용해서 하는 등 매일 상당량의 육체노동을 했지만, 근래 들어 노동할 기회가 줄어들면서 각종 질병이 발병하게 된 것이다.

근육 운동을 하면 운동 중에 체온이 오르는 것은 물론 운동 후에도 12~72시간이나 지속하여 근육 세포의 대사 활성이 촉진된다. 지속적인 운동은 근육세포 주변의 모세혈관 증생을 촉진시켜 혈류를 좋게 하기 때문에 체온 상승에 도움이 된다. 평열(건강할 때 사람의 체온)이 36.5℃에서 1℃ 내려가면 면역력이 30% 이상 내려가지만 반대로 평열보다 체온이 1℃ 상승하면 면역력은 5~6배 증강한다. 즉, 체온이 높아지면 암, 당뇨병, 고지혈증, 자기 면역 질환 등 각종 질병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시하라 유우미 <암보다 더 무서운 운동부족병>(랜덤하우스) 중에서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통증을 수년째 앓고 있다. 통증이 가장 심했던 시기에는 1년 가까이 외출조차 못 했다. 병원에서 내린 처방은 헬스와 사우나. 그때부터 재활 훈련을 하는 운동 선수처럼 1년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헬스장을 오갔다. 건강은 많이 회복되었으나 건강이 무너지면서 위축되었던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걷다 보면 자신감이 생길 거야.” 남편의 권유로 홀로 도보 여행에 나섰다. 중국의 윈난성 산골 오지 스토우청을 출발해서 모계사회의 문화가 깊게 뿌리내린 루구호까지 총 110km를 걸었다. 해발 2,000미터에서 3,400미터를 넘나드는 험로로 보통 걸음으로는 3~4일이 걸리는 길이다. 나는 그 길을 5일에 걸쳐 걸으면서 ‘걷기에는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는 힘이 있다’는 것을 가슴 뼈저리게 느꼈다. 고작 5일을 걸었을 뿐인데 ‘나는 지금 이대로의 내가 참 좋다’는 긍정의 마음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남편과 동네의 골목골목을 꾸준히 걷고 있다. 꼭 산티아고, 올레길이 아니어도 좋다. 시간을 내어 동네의 한산한 골목, 이름 없는 산, 약수터를 주저 없이 걸어보라 권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무력해진 자신이 달라지는 걸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고승희 37세. 서울시 은평구 대조동

내가 운동을 하는 진짜 이유

“요즘 우울하지요? 몸에서 보내는 신호들이 다 우울해요.”

일주일이 지나도록 체기가 내려가지 않고 가슴 언저리가 답답해 동네 한의원을 찾았다. 뜻밖에도 한의사는 내게 우울증이 아니냐 물었다.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꾹 참고선 “그런 것도 검사 결과로 나오나요?” 하고 말았다. 돌아오는 길에 명치 부근을 꾹꾹 누르며 가만히 생각해봤다. 대학 졸업하고 취업을 바로 하지 못하면서 서서히 가라앉았던 것 같다. 바닥을 치고 나면 올라오겠지, 하고 나를 내버려두다 보니 어느덧 수개월이 흘러버렸다. 예전의 밝고 활기차던 내가 지금은 생기를 잃고 이렇게 무기력해졌구나…. 스스로 한없이 가여웠다. 반면 몸은 살고 싶다며 계속해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하니 내 자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서야 지금의 모습으론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날부터 운동을 시작했다.

운동이라 해서 특별한 건 아니었다. 평소 걷던 길을 뛰기 시작했고, 평소보다 더 자주 움직이며 틈틈이 스트레칭이나 맨몸 운동을 해주는 정도였다. 별것 아니었지만 매일매일 해주니 기초 체력도 좋아지고 몸이 한결 가뿐해졌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마다 ‘삶에 대한 의지’를 뱉어내고 있는 것만 같았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몸도 마음도 이전보다 훨씬 좋아진다는 확신이 드니 시간 내어 운동하는 게 전혀 아깝지 않았다.

3개월 전부터 아침에 조깅 1시간, 저녁에 프리웨이트를 30분씩 하고 있다. 운동으로 체력이 붙어 하루 종일 지치지 않았고, 지방을 활활 태워버리니 몸의 맵시도 살아나 거울 앞의 내 모습에도 자신감이 붙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운동 패턴에 변화를 주려고 주말에는 부모님과 함께 등산을 다니면서 부모님과도 무척이나 돈독해졌다. 한 발 한 발 딛을 때마다 느껴지는 걱정과 배려에, 부모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던 어린 시절의 나로 돌아간 것처럼 비어 있던 마음 한켠이 채워졌다. 우울감에 깊게 빠져 있을 때에는 이 세상에 나 혼자밖에 없다 느껴서 외로웠는데 누구보다도 나를 진심으로 걱정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인생 참 헛살았던 셈이다. 한참을 쉬고 있다가 다시 뛰기 시작하면서, 내 곁에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게 이제야 보이기 시작한다. 혹여나 나와 같이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이 변화하고자 마음을 먹은 순간 이 세상 모든 것이 당신을 도와줄 거라고 격려하고 싶다. 오늘 하루도 나는 좀 더 생기 있는 모습이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운동을 한다.

이진아 26세. 취업준비생. 서울시 구로구 신도림동

누구나 의지력을 키울 수 있는 방법

한 해의 출발선상에서 우리는 늘 결심을 한다. 금연, 다이어트, 저축, 어학 공부 등 그동안 미뤄온 과제를 실천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첫날의 결심은 사흘을 넘기기가 무섭게 허물어진다. ‘지금 딱 한 대만 피우고 내일부터는 금연이야.’ ‘오늘은 운동을 빼먹지만, 내일은 꼭 할 거야.’ 이와 같이 미래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낙관주의가 나의 게으름을 너무 쉽게 허용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는 원래 의지력이 약하고 게을러’라며 자신을 나무라는 것도 도움을 주진 못한다. 자기비판을 하다 보면 자신감이 떨어지고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의지력을 탓하고 다그치기보다는 인간의 보편적 특성을 인정하고, 누구나 의지력을 키울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작심삼일을 벗어나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를 인정하고 용서하는 과정에서 실패의 원인을 차분히 돌아보게 되고 다른 사람의 조언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방대한 계획은 버리고 마음의 인식부터 바꿔나가는 것, 그런 성찰의 시간들이 쌓이면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갈 수 있게 된다.

정리 문진정  참조 도서 <왜 나는 항상 결심만 할까?>(켈리 맥고니걸 | 알키)

● 행동이 지속될 경우의 결과를 먼저 생각하라

행동경제학자 하워드 래클린은 항상 내일로만 미루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행동 자체를 금지하기보다 행동이 지속될 경우 그 결과를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예를 들면 실제 담배를 줄이라고 강요하는 것보다 매일 10개비의 담배를 피우라고 지시하면 흡연자들이 스스로 흡연량을 줄여나간다는 것이다. ‘내일부터 달라지겠다’는 생각에만 의존하던 흡연자들이 매일 같은 개수의 담배를 피우라고 하면 담배를 꺼낼 때마다 오늘도, 내일도, 6개월 후에도 몸에 안 좋은 담배를 피운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다. 그래서 ‘오늘 한 번은 괜찮겠지’라며 타협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러므로 ‘지금 담배를 피우고 싶은가?’보다 ‘내년에도 매일 10개비의 담배를 피고 싶은가? 그 결과는 어떻게 될까?’를 자문하는 게 훨씬 금연에 효과적이다.

● 5분 운동으로 의지력을 충전하라

의지력을 빨리 충전하고 싶을 때 가장 확실한 방법은 ‘5분 녹색 운동’이다. 녹색 운동이란 밖으로 뛰쳐나가서 푸른 대자연 속에서 하는 모든 신체 활동을 가리키는데 땀 흘리며 강도 있게 오래 하는 운동보다 기분 전환에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예를 들어 mp3플레이어에 좋아하는 음악을 담아 들으며 가볍게 걷기, 개를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기, 뜰이나 정원 가꾸기,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몇 가지 스트레칭 동작을 해보기 등 즐겁게 시작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의지력 충전에 아주 좋은 운동이 된다.

● 의지력을 기르고 싶다면 잠을 자라

뇌에서 에너지를 가장 많이 소모하는 작업 중에 하나가 자기 절제이다. 그런데 잠이 부족하면 신체와 뇌를 구성하는 세포들이 포도당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에너지 공급이 원활히 되지 않아서 몸이 기진맥진해진다. 스트레스를 조절하고 갈망을 억제하는 기능을 하는 뇌의 전전두엽 피질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게 되어 유혹의 영향을 받기 쉬워지는 것이다. 그때는 단 음식이나 카페인을 섭취해도 제대로 당분을 에너지화할 수 없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수면 부족에 시달리던 사람도 하룻밤만이라도 제대로 잠을 자면 전전두엽 피질의 손상된 징후가 거의 회복된다는 사실이다. 일주일 동안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면 주말에 충분한 수면을 취하거나, 잠깐 낮잠을 자는 것으로 집중력과 자기 절제력을 회복할 수 있다.

● 금지가 아닌 긍정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춰라

퀘벡의 라발 대학교 연구진은 ‘반드시 먹어야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 독특한 다이어트 실험을 진행해왔다. 금지 식품을 알려주지도 않고 칼로리 제한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다만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권한다. 그 결과 참가자 중 3분의 2는 실험이 끝난 뒤 16개월 동안 체중이 줄었고 빠진 체중도 유지했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그램을 마친 후 음식에 대한 갈망이 줄어들었고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자제력을 쉽게 잃지 않았다. 즉 금지하도록 강요받지 않을 때 자제력이 늘어난 것이다. 커피를 금지하는 대신 차에 관심을 돌리기, 지각하지 않기보다 5분 일찍 도착하기로 말을 바꾸면 훨씬 효과적이다.

통·번역가 이기욤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

외로운 학창 시절, 혼혈아라는 놀림. 이기욤씨는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고 합니다. 한국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나 자라며 ‘싸움 없이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는 없는 걸까’라는 생각이 늘 떠나지 않았다는 기욤(Guillaume)씨. 다행히 그는 아버지의 소개로 마음수련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인종이 다르다고 차별받지 않는 세상, 모두가 하나 되어 사는 평화로운 세상의 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이기욤(32)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입니다.

저는 늘 제 뿌리를 찾고 싶었습니다. 과연 나는 프랑스 사람일까? 한국 사람일까? 나는 누구일까? 하지만 제 힘으로는 어디에서도 답을 구할 수 없었어요.

그러다 마음수련을 하며 무한대 우주가 원래의 나라는 걸 알았고, 혼혈아라는 열등감에서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외로움도 원래는 없는 거란 것도 알게 됐고요. 본래 마음엔 외로움, 화, 슬픔 등 인간마음은 없으니까요. 그동안 나만의 마음속에 갇혀서 고통 속에 살았다는 것. 그걸 아는 순간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그 답을 찾았다는 기쁨이 너무나 컸습니다.

수련을 시작하고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날 아버지께서 그러시더군요. “부모로서 책임감 없이 어린 나이에 혼자 둬서 미안하다. 내 잘못이다”라고. 마음이 뭉클해지고, 미안했어요. 아버지한테 철없이 화냈던 게 떠올랐거든요. 부모님도 제게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주신 거였다는 걸 겨우 알았을 때였으니까요.

저는 10살 때(중학교 1학년)부터 부모님과 떨어져 지냈어요. 한국에 있는 사촌 형이 프랑스로 유학을 오면서 그 형을 따라 학교를 옮겨 기숙사 생활을 했거든요. 시골 학교에 다니다가 부잣집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로 간 거였는데, 친구들이 눈이 찢어졌다며 중국 사람 같다고 놀리기도 하고, 싸구려 옷을 입었다고 무시하기도 하고 그랬지요. 어린 나이에 되게 슬프고 외로웠습니다. 이후 고등학교 때까지도 학교를 자주 옮기다 보니까 친구들을 사귀기가 어려웠어요. 그러다 보니 늘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동떨어진 기분이었죠.

가장 힘들었던 건 내 이야기를 털어놓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였어요. 부모님도 사이가 안 좋아서 결국 이혼을 하셨거든요. 그나마 제겐 음악이 힘든 마음을 풀어내는 유일한 탈출구였어요. 랩 가사도 쓰고 작곡도 하면서 거리 공연도 했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며 공연했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슬펐습니다. 그런 내 마음이 관객들한테 고스란히 전달된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기까지 하더군요. 음악을 하든 무엇을 하든 내 마음부터 깨끗하게 정리하고 싶은 게 컸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마음은 외로움이었어요. 그래서 사람한테 집착했고요. 스무 살 때 만나 2년 정도 사귄 여자 친구가 갑자기 제 곁을 떠난 후엔 우울증이 더 심해졌어요. ‘세상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 혼자 남겨졌다는 배신감에 우울해하다가 어느 순간 화가 폭발하곤 했어요. 희망이라곤 하나도 없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프랑스란 나라가 너무 싫었고, 한국에서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2005년에 한국에 왔는데 아버지께서 마음수련을 권유하셨습니다. 마음수련은 진짜 세상과 하나가 되는 공부라면서.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불교에 관심이 많아서 원래 너와 나의 구분은 없고 모두가 하나라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고,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는데, 아버지께서 너무 확실하게 말씀하시니까 많이 놀랐어요. 어릴 때 제가 별똥별을 보며 빌었던 소원이 모든 사람들이 부처가 되는 거였거든요. 그러면 서로 다르다고 놀리지 않고, 싸움도 없고, 차별도 없을 테니까요.

마음수련을 하며 너무나 이기적인 제 자신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부끄러워 바닥에 엎드려 펑펑 울었죠. 사랑받지 못했다고 부모님을 원망하고 사람들한테 화내고 미워하고…. 왜 고통스럽게 살 수밖에 없는지도 알게 됐어요. 나만 아는 좁은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내 맘대로 안 된다고 세상을 원망했으니 힘들 수밖에요. 이런 나를 진짜 버려야겠구나, 그 생각뿐이었어요. 그렇게 잘못된 나를 계속해서 버리는데 어느 순간 내 마음이 없어지고 의식이 확 커지면서 ‘와, 모두가 다 하나구나’ 마음으로 알게 되니까 너무나 신기했어요.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도 함께 녹아내렸죠. 그러면서 알게 됐어요. 그동안 주위 사람들과 대화가 어려웠던 건 상대를 원망하면서 공격적으로 대했던 내 마음 때문이었구나! 그걸 알고 나니까 이젠 누구와도 대화가 잘돼요. 특히 어머니하고 편안해졌어요. 어머니가 그러세요. “기욤, 네가 참 행복해 보인다. 이제 네 인생의 꽃이 활짝 피는 시기인 거 같다”고요.

수련하면서 확실하게 안 것은 답은 내 안에 있다는 거예요. 내가 바뀌면 세상 전체가 바뀌는 이치를 알게 된 거죠. 세상은 거울처럼 나를 비추고 있듯이, 잘못된 나를 버리면 세상은 같이 밝아지고 변화된다는 것도요.

저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왜 세상은 불공평할까. 부자들은 너무 잘사는 반면,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해 굶어 죽을까.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아무리 제도, 사상이 좋아도 사람들 의식이 바뀌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결국엔 자기 명예와 욕심과 가짐으로 하니까요. 근데 수련해 보니까 이기적이고 부정적인 내가 없어야 긍정적으로 살 수 있고 세상이 평화로울 수 있었어요. 원수를 사랑해라, 남을 도우며 살아라 좋은 말들은 많이 하지만, 그런 건 마음을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비워 참마음으로 살아갈 때 저절로 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원래 모든 일들은 남을 위한 일이었더라고요. 농사를 짓든 음악을 하든 그 무엇을 하든 간에. 하지만 인간이 어느 때부터인가 자기가 있어서 자기가 했다고 한 순간부터 불행해지고 다툼이 생긴 거란 것도 알게 됐죠. 결국 남을 위해 산다고 하는 것은 내가 없어져서 모든 것과 하나가 됐을 때 가능하더라고요. 그랬을 때라야 국가 간의 경계도 없고, 너와 나의 구분도 없고,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차별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것도요. 사람들이 진짜 자기를 알고 의식이 바뀌어서 너나 구분 없이 평화롭게 살고, 모두가 하나 되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 그게 제가 꼭 하고 싶은 일입니다.

정리 & 사진 김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