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어디에 핀들 꽃이 아니랴, 야생화

왜개연꽃
주로 여름에 시골 작은 냇가나 연못에서 피어난다. 햇살 아래 반짝반짝 빛나는 수면 위의 꽃 무리들이 마치 노란 나비가 날아오르는 듯하다.

사진 & 글 이남희

수생식물은 어려운 조건에서 찍는 것 중 하나다. 허리까지 차는 물속에 들어가 몇 시간을 작은 물결조차 일렁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기다려야 한다. 그런 험난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만나는 꽃들의 미소는 가히 환상적이다.

▲▲ 으름
넝쿨식물로 가을이면 바나나 모양의 갈색으로 된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고 해서 코리안 바나나라고 불린다.

▲ 좀바늘사초
3~4월 눈이 녹을 때면 꽃대가 올라오는 사초과 식물로, 산자락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언 땅이 대수랴. 눈 덮인 대지가 문제랴. 물 위에서도, 진흙 속에서도, 돌산의 바위를 뚫고도 피어나는 것이 꽃이다. 꽃씨가 떨어진 그곳이 ‘바로 내 자리로구나’ 할 뿐, 자리를 탓하지도 주변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어디에 핀들 꽃이 아니겠소” 하며 빛나는 미소 머금을 뿐이다.

▲ 한계령풀
춘설을 맞으며 4월 봄날에 꽃을 피운다. 북방계 식물인데 한계령까지 내려와서 핀다고 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매서운 추위에도 고개를 떨구며 피어내는 자연의 생명력이 경이롭다.

▲ 변산바람꽃
서해의 작은 섬 풍도에서 핀다고 해서 흔히 풍도바람꽃이라고도 불린다.

꽃은 기다림이다. 이른 봄, 피어나기 위해 매서운 추위를 감내한다. 하지만 요란함도 서두름도 없다. 스스로 예쁘다고 자만하지도 않는다. 언 땅을 뚫고, 비바람에 맞서면서도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며 피어나는 한 송이 꽃처럼 살아갈 수 있다면…. 눈길 주는 이 하나 없어도 꽃은 핀다. 어느 자리에서도….

▼ 동강할미꽃
강원도 동강, 정선 일부 지역에서만 피는 꽃으로, 석회암 지대의 바위 겉에서 잘 자란다.

야생화 보호를 위해 구체적인 장소는 밝히지 않습니다. www.heephoto.kr

어느 날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애들아, 선생님, 동생들, 사정이 있어서 휴대폰을 이제 안 쓸 거야!!! 헤어지려니까 눈물이 나오네 ㅠㅠㅠㅠ  이제 문자는 못 하지만 연락처는 삭제하지 마라죠. 나도 전화번호 다 적어 노을 테니까!! 답은 안 해죠도 되…. 이제….ㅠ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게 저장되지 않는 번호였다. 우리 반 아이 같은데 대체 무슨 상황일까. 나는 갑자기 당황했다. 답을 보내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손만 떨렸다. 바보같이 안절부절못하다가 ‘아참! 통화!’ 하고 정신을 차렸다. 아이는 정말로 울고 있었다.

“선생님이다. 왜 그래?” “흑흑흑….” “왜 울어? 무슨 일인데?” “흑흑흑….”

전화 속의 우는 목소리는 나이도 성별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몰라서 미안하다며 네가 누구냐고 물었다.

“흑흑흑… 동수예요.”

아! 동수. 이태 전 학교의 제자이다. 야단을 맞아도 꿀밤을 맞아도 하회탈 웃음으로 넘기는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그런데 이 아이가 지금 꺼이꺼이 운다. 일단 슬픈 아이가 전화를 끊지 않도록 자꾸 말을 시켰다.

“키 크고 잘생긴 동수?” “흑흑… 예.” “요새도 축구 잘하나? 엄마 아빠 잘 계시고?” “흑… 예.” “이제 중학교 가지? 어느 학교에 배정됐냐?” “대양중학교요. 흑.”

아이는 울면서도 묻는 말에 꼬박꼬박 답해 주었고 나도 말을 걸면서 천천히 안정을 찾았다. 휴대폰 때문이었다. 아이는 그것 때문에 아버지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그래서 제 방에 들어와서 마지막 문자를 띄운 것이다. 나는 얼마나 속상하느냐, 원래 아빠들은 그렇게 버럭 하지 않느냐고 토닥거렸다. 하지만 내가 어찌 그 여린 마음까지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

위로가 길어지면 나도 모르게 노파심으로 중언부언할까 싶어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이내 불안해서 문자를 보냈다.

‘동수야, 소나기 같은 슬픔은 금방 지나간단다. 속 풀릴 때까지 실컷 울고 너답게 씩씩하게 일어서기 바란다.’

내가 그날 잔뜩 새가슴이 되어 아이를 달래야 했던 이유가 있다. 바로 며칠 전, 휴대폰 문제로 부모와 갈등을 겪던 옆 반 아이가 불현듯 사라져버린 일이 생겨서이다. 골마루 저쪽에서도 눈에 띌 정도로 키가 커서 ‘너는 진짜 국제적인 모델감이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던 아이.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만 늘 말수가 적고 쑥스러운 듯이 인사를 하던 아이. 나는 그 아이가 없는 옆 교실 앞을 지날 때마다 떨려오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천사들은 그 빛나는 미소로 우리를 쉬게 하고 그 고운 몸짓으로 우리를 위로하고 그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우리를 경이롭게 한다. 하지만 가끔 어떤 천사는 아주 바쁜 하늘의 부름 때문에 미처 작별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서둘러 우리 곁을 떠나기도 한다. 천사가 너무 바쁘지 않게 오랫동안 함께 있을 수 있게 어른인 내가 뭔가 해야 한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사진 인생 50년, 인간에 대한 사랑을 말하다

글 & 사진 최민식

출처 <휴먼 선집>(눈빛)

다큐멘터리 사진가 최민식 선생님을 직접 뵌 것은 지난여름입니다. ‘소년시대’라는 주제로 선생님의 사진을 담게 되면서였지요. 처절하게 가난했던 이웃들의 삶을 담아 오신 분이니, 매사 엄하고 진지한 분일 거란 예상은 빗나갔습니다. 마치 옆집 할아버지처럼 너무나 따듯하게, 유머러스하게 조근조근 말씀해주시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너무 남루하고 처절해서 때론 외면하고 싶었던 가난한 이들의 삶…. 하지만 선생의 카메라는 50여 년간 그들 곁에 머물렀습니다. 그것은 부디 행복해지길 바라는 선생의 간절한 기도였고,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었기에 선생의 사진은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해줍니다.

2월 12일 작고하신 사진가 최민식 선생을 추모하며, 선생님의 글과 사진을 게재합니다. – 편집자 주

내가 사진에 눈뜨게 된 것은 내 나이 28세이던 1955년, 미국의 사진가 에드워드 스타이켄(Edward Steichen, 1879-1973)의 사진집 『인간가족(The Family of Man)』을 접하면서부터다. 그때 받았던 감동은 지금 다시 되새겨 봐도 너무 생생하다. 사진가에 의해 포착된 삶의 순간이, 사진의 유한성을 뛰어넘어 훨씬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이후 유진 스미스(Eugene Smith, 1918-1978)의 사진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휴머니즘으로 일관해 온 작가 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나도 인간의 삶을 바탕으로 깊은 울림을 주는 그런 사진을 찍자고 굳게 마음먹었다. 그 길로 삶의 터전이었던 부산 곳곳을 누비며 서민의 일상을 찍기 시작했다.

나의 사진은 어린 시절과 청년 시절의 험난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다. 쌀을 사 놓으면 연탄이 떨어지고 연탄을 들여놓으면 쌀이 떨어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집도 팔아야 했기에 밤에만 수돗물이 나오는 달동네에 살기도 했었다. 이러한 경험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내 사진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흑백사진 속에는 희로애락이 공존한다. 가난한 사람들, 지울 수 없는 정겨운 얼굴, 참으로 극적인 순간을 그들과 함께했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진지한 사랑을 담으려고 했다.

부산 자갈치시장은 근 50여 년 동안 내 사진의 소재가 되어 온 장소이다. 최근에 현대식 건물로 변신하는 바람에 과거의 정감과 활력, 투박함 같은 것은 많이 사라졌지만 나에게 자갈치시장은 언제나 영원한 안식처로 다가온다. 왁자지껄한 목소리와 힘찬 몸짓으로 약동하는 자갈치시장은 비릿한 생선 냄새와 함께 생명력이 꿈틀대는 곳이다.

시장 모퉁이에 모여 앉아 허겁지겁 점심을 때우던 아지매들, 비나 눈이라도 오는 날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혼잡했던 시장통, 그 치열했던 삶의 풍경이 이제 사라진 것 같아 몹시 아쉽다. 내 사진들을 보며 이거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여기면서도 못내 떠나보낸 옛 정경들이 가슴 한편을 시리게 하여 가만히 읊조린다.

“아지매들 다 어디 갔나 모르겠네, 사진 잘 나왔는데….”

나는 지난 50여 년간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진을 왜 하는가’라는 질문을 한시도 내려놓은 적이 없다. 쉽게 찍을 수 있는 사진, 돈이 되는 사진을 찍으라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었던 것도 항시 그런 질문과 싸워왔기 때문이다. 나의 영원한 테마는 인간이다. 사진을 찍으면서 세계 곳곳의 헐벗은 땅, 병들고 굶주린 자들을 목격해왔다. 그들에겐 진정 나눔이라는 배려가 필요하다. 나눔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보살펴줄 뿐 아니라 그들과 내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우리가 숨을 쉴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고, 비바람을 막아주는 안전한 곳에 있다는 현실에 감사하게 해준다. 어려운 사람을 보살펴줌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인간다워질 수 있다. 이렇듯 나는 사진을 통해 따뜻한 온기를 불어 넣어 휴머니즘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려는 신념으로 사진을 해왔다.

내가 행운아라 생각하는 것은 온갖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사진의 외길을 걸을 수 있는 바보 같은 신념이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욕심 없이 사진에 미칠 수 있게 해준 가난에 고마워하고, 나를 일깨워주는 이웃들의 눈물과 웃음에 고마워한다. 바로 그 이웃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이 오늘도 나를 이 땅에서 사진가로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되어주었다.

“사진가들이여, 부디 진실하기를….”

사진은 내부에 진실을 갖추고서야 비로소 출발한다. 눈에 보기 좋은 것으로만 만족하거나, 본질과 관계없는 것을 조작하고 표현하는 사진가는 결코 올바른 사진가가 될 수 없다.

내가 의도적으로 연출하지 않은, 생생한 인간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자 한 것은 그 현실 자체에 이미 예술이 추구하는 진실이 담겨져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가이기 이전에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인간을 존중하고 진심으로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

나는 수많은 책과 유명 사진가들의 사진집을 통해 끊임없이 사진을 배웠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나를 그토록 사진에 몰두하게 한 것은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가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갖고 태어난 신의 피조물이라고 믿는다. 성공한 인생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은 이 세상에 무엇을 남겼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남겼는가가 되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의 사랑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사진가 최민식(1928-2013)님은 1928년 황해도 연안에서 태어났습니다. 1957년 일본 도쿄 중앙미술학원을 졸업하고, 독학으로 사진을 연구하면서 인간을 소재로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총 14권의 <휴먼> 시리즈(1968-2010)를 출간하였으며, 2008년 13만여 점의 자료를 국가기록원에 기증하여 민간기증국가기록물 제1호로 선정되기도 한 님은, 한국사진문화상(1974), 예술문화대상(1987), 대한민국 옥관문화훈장(2000), 부산문화대상(2009) 등을 수상했습니다. 저서로는 <낮은 데로 임한 사진>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등 다수가 있으며, 최근에 출간한 <휴먼 선집>은 최민식 선생의 대표작인 <휴먼> 시리즈 14집을 총정리한 책으로서, 그의 사진 철학이 녹아 있는 마지막 유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천종호, 청소년회복센터 운영하는 소년범 치유판사

“소년법은 관용과 용서를 전제로 합니다.” 처벌을 하기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먼저라는 소년 사건 전문 천종호 판사. 그의 꿈은 부모의 사랑조차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청소년회복센터(사법형 그룹홈)라는 대안 가정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따듯한 배려를 받은 기억은 소중한 추억이 되고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소년범들의 아버지’라 불리는 천종호(49) 판사를 만나보았다.

올해 초,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룬 SBS 다큐멘터리 <학교의 눈물>이 큰 화제였다. “잘못했습니다, 사랑합니다”를 외치며 하염없이 우는 아이. 학교 폭력 가해자로 법정에 선 자식을 보며 통곡하는 부모….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천종호 판사. 그 순간 법정은 단순히 처벌이 아닌 치유의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소년범의 70%는 저소득층, 47%는 결손가정의 아이들이다. 특히 결손가정 아이들의 재비행률은 57%에 달한다. 무조건 처벌하기에는 너무나 안타까운 사연들. 가정이라는 최소한의 울타리조차 없고, 부모의 사랑 또한 받아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과연 엄벌의 잣대만이 옳은 일인가? 그는 고심했다.

2010년 창원지방법원에 부임하여 소년재판을 맡게 된 후, 스스로를 ‘만사소년’(萬事少年)이라 일컬을 정도로 자나 깨나 소년들만 생각해왔던 지난 3년. 모두가 외면하는 현실에서 그는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고, 그 결실은 청소년회복센터 설립 등으로 이어졌다. 어느 곳 하나 마음 둘 데 없는 아이들에게 기꺼이 아버지가 되어주었던 그는, 결국 대법원에 ‘평생 소년재판만 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청소년회복센터 설립에 적극적으로 뛰어들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그동안 6,000여 명의 소년범들을 만나면서 느낀 건 대부분이 ‘한 번도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는 거예요. 회복센터의 가장 큰 목적은 나는 가정에서 받지 못한 걸 사회에서 받았다, 그 추억을 심어주려 하는 겁니다. 초기 비행의 경우 회복센터에서 관리해주면 비행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애들이 많습니다.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를 돕는다는 점에서 우려의 시선도 있습니다.

소년법은 성인과 달리 아이들을 건전하게 육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요. 단순히 소년원 가는 게 엄벌이고 안 가는 게 선처다 해선 문제 해결이 어렵습니다. 통계 자료를 보면 소년원 출신 3명 중 2명이 성인범이 되는데, 그렇다면 과연 엄벌로 끝날 수 있느냐 하는 거지요. 아무리 큰 죄를 저질러도 소년원 보낼 땐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집단적이어서 한 명 한 명 치유가 어려운 데다, 오히려 상처 입거나 안 좋은 걸 배울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선처도 단순하게 해선 안 됩니다. 갈 곳 없는 애들을 사회에 내보내면 그게 더 망치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최종 결론을 내리기까지 그 과정은 굉장히 혹독하게 합니다. 얼마나 피해자의 아픔을 위로하고 이해하려 노력했는가를 보는 거죠.

아이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게 하기란 쉽지 않을 듯합니다.

짧은 재판 시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소통 방식이긴 한데, 무조건 10번씩 ‘사랑합니다. 잘못했습니다’를 반복하게 합니다. 처음엔 마지못해 하다가 두세 번 하다 보면 울컥하면서 정말 잘못했구나 인식할 때가 있거든요. 부모님도 깜짝 놀라 껴안고 울면서 같이 공명이 되죠. 반대로 부모님이 아이를 방치했을 경우 아이들 앞에 꿇고 앉아 잘못했다고 하라 합니다. 그 순간 원수였던 부모 자식 관계가 굉장히 가까워집니다. 물론 충분한 시간을 갖고 가족 전체가 화해하는 힐링 캠프가 되면 그게 가장 좋죠.

아버지의 폭력을 견디지 못해 집을 나와 비행을 일삼던 아이, 학교 폭력의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된 아이, 부모를 일찍 여의고 친척 집을 전전하다가 경제적 어려움으로 절도범이 된 아이….

그가 소년재판을 담당하면서 느낀 건 가정 해체의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거였다. 한부모, 조모, 조부의 슬하, 혹은 집조차 없어 떠도는 등 소년범들의 딱한 처지는 단순히 법 집행을 떠나 이 사회의 어른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돌아보게 해주었다.

때론 아이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마주하곤 했다. 7남매를 키우기 위해 일용직 노동을 하던 아버지, 가난 때문에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던 친구들, 공장에 다니며 생계를 이어가던 고향 사람들…. 육성회비를 제때 내지 못해 수업 시간에 쫓겨나던 학창 시절은,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이 자리하게 했다.

“보살핌을 못 받는 아이들은 나가면 또 비행하는 악순환이 되거든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24시간 함께해줄 대안 가정입니다. 또 대부분이 학교를 이탈해서 직업 교육을 못 받았기 때문에 고등학교라도 졸업할 수 있도록 도와서 꿈과 희망을 갖게 해야 합니다.”

다행히 천종호 판사의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 현재 경남, 부산 등 7곳엔 청소년회복센터가 운영 중이다. 또한 2011년엔 아이들이 정규 학교 과정을 마칠 수 있는 국제금융고등학교 창원분교를 설립, 올해 처음 19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기도 했다.

2012년 ‘국제금융고 창원분교’ 입학식. 천판사가 보호소년의 입학을 축하하고 있다. 청소년회복센터는 소년법상에 보호처분중 1호 처분을 받은 소년들이 대개 6개월에서 1년간 머문다.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도움 없이, 법원에서 지급하는 교육비와 자원봉사자들의 후원금 등으로만 유지되고 있다. mansaboy.com

센터 설립 과정에서 어떻게 주위 분들의 공감을 얻으셨나요?

법정 현장을 공개하면서 치유 과정을 보여주었어요. 대개 결손 가정이 많다 보니 한 가족이 모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어요. 그런데 재판한다면 옵니다. 이혼한 엄마도 애가 걱정돼서 오고, 할아버지 할머니도 오고…. 관계 회복의 장이 되는 거죠. 가족들의 애환을 듣다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불쌍하다는 것에 공감하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소년범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소통’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소년재판은 사건재판 심리를 마치고 1~2주 뒤 재판하는 게 아닌 즉시선고를 하니까 소통이 정말 중요합니다. 형식적인 재판이 되지 않기 위해 마음을 비워야 하죠. 그래야 아이들의 사소한 말 한마디, 눈짓, 몸짓을 놓치지 않고 귀담아들을 수 있어요. 근데 안타까운 건 시간이 너무 부족해요. 2006년에 일본 교토가정재판소를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상담실 같은 구조에서 한 사건당 한 시간씩 아이들, 조사관, 부모님이 빙 둘러앉아 대화하면서 재판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우리나라는 2주에 한 번꼴로 하루 6시간 동안 평균 100명의 아이를 재판하다 보니, 한 아이당 불과 4~5분이거든요. 그나마 제 옆에서 정신심리전문가 국선보조인이 먼저 아이들과 충분히 대화하고, 도와주니까 정말 감사하죠.

처벌보다 치유를 강조하시는데, 그 치유의 힘은 어디에서 생긴다고 생각하시는지요?

가정의 사랑이죠. 저는 인성 교육의 핵심을 사람과의 부대낌이라고 생각해요. 이 아아들은 아침에 일어나서 이불 개는 것도 모르고 밥 먹고 자기 전에 양치질하는 것도 모릅니다. 옷을 벗으면 아무 데다 던져 놓고요. 그래서 밥상머리 교육이 중요합니다. 회복센터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엄마의 정이 그리워서인지 엄마 역할을 하는 센터장이나 여자 지도 선생님들을 엄마라고 쉽게 부릅니다. 처음 엄마라고 불러본 아이들도 많죠. 잘 때도 보면 엄마라 부르는 센터장님과 함께 거실에 나와 모두 껴안고 자요.(웃음) 아이들에게 엄마란 존재는 너무 큰 거 같아요. 사랑을 받아야 결핍된 부분이 채워지고 자존감을 가진 아이들로 자랄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선처를 베풀어도 기대를 저버리는 아이들도 있잖아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은 없으셨나요?

물론 재비행을 저질러서 다시 잡혀오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럴 땐 엄벌에 처하죠. 다른 한편으론 재판할 때 최선을 다했나 돌아봅니다. 아이의 마음을 못 읽은 건 아닌가 자책이 되면서 마음이 아파요. 그래도 희망적인 건 소년범 재비행률이 평균 37%인데 회복센터에서 생활한 아이들은 18%밖에 안 된다는 거예요. 한 번이라도 사회에서 배려를 받은 경험이 있는 아이들은 묵묵히 수긍하고 열심히 살려고 하거든요. 그런 애들은 눈빛부터가 완전히 달라져서, 우리도 놀랄 정도이지요. 그것이 변화의 가능성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아이의 인생이 걸린 중요한 순간…. 그는 법정에 들어가기 전 늘 기도한다. ‘비행소년 역시 애정으로 보살펴야 할 대한민국 소년이라는 걸 잊지 않게 해달라고, 편견과 아집, 건성에서 벗어나 소년들의 소리 없는 외침에까지 귀 기울이게 해달라고….’

시간이 날 때마다 청소년회복센터를 찾아가 운영자들을 격려하고 아이들도 챙긴다. 스스럼없이 ‘아빠’라 부르며 다가오는 등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볼 때 가장 행복하다는 천종호 판사. 친자식 이상으로 살갑게 보살펴주는 운영자들 덕분에 처음엔 애정 결핍으로 인해 하루에 8끼를 먹던 아이들이 식탐이 줄면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는다고 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대접을 잘 받았어요.” 한 번도 가족과 외식한 경험이 없는 아이들과 함께 밥을 먹다가 아이가 불쑥 던진 그 한마디에 뭉클해지고, 아이들이 정성껏 끓여준 삼계탕(삼양라면에 계란을 넣은 것)을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일들까지…. 흐뭇하게 ‘아빠미소’를 짓게 하는 아이들과의 만남은 어느새 그에게도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쉼터에 가게 된 건 큰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좋은 분들을 만나면서 안 좋은 습관도 고칠 수 있었고, 부정적인 마음도 긍정적으로 변했거든요. 먼저 죄송합니다,라는 말도 할 줄 알게 되었고요. 에어컨 설치 기술을 배워서 지금은 열심히 일하고 있어요. 앞으로 멋진 기술자가 되는 게 꿈입니다.”

지난 1년간 청소년회복센터에서 생활해온 조민규(20)군의 말이다.

법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다운 사회가 되려면 ‘법 위의 법’이 활성화되어야 하죠. 그것은 용서와 베풂, 헌신과 희생입니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우리가 따라야 하는 마음의 법입니다. 소년법도 마찬가지고 우리 일상에서도 그렇습니다. 가령 친구에게 천만 원을 빌려줬는데 안 갚아서 소송을 할 때, 법대로 하면 판사들의 권한은 원금 천만 원과 이자를 지급하라, 그것밖에 없어요. 근데 돈 빌린 사람이 오백만 원만 주고 끝내자 하면 꿔준 사람의 양보를 받아야 하는데, 그것은 법의 영역이 아니거든요. 친구 말대로 양보하면 관계는 회복되지만, 법대로 하면 관계가 끊어지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용서, 화해하고 양보하는 절차로 들어가야 하죠.

 

앞으로 어떤 법관으로
남고 싶으신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쭉 돌아보면 판사가 되고 소년 사건을 맡게 되기까지, 이 모든 게 제 힘으로 된 게 아니었어요. 늘 주변에서 도와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었기에 감사하죠. 사법시험 준비할 때 왜 공부하느냐고 물으면 힘들고 어려운 사람 돕기 위해서라고 했는데, 그 약속을 조금이라도 지키는 것 같아 행복합니다. 단 한 명의 아이라도 이 사회를 위해 제대로 봉사하는 아이로 길러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람이 없습니다.

사랑받아본 적이 없어서 사랑할 줄도 모르는 아이들. 천종호 판사는 그런 아이들에게 사랑의 기쁨을 느끼게 해준다. 그 순간이 비록 반딧불처럼 아주 작게 빛날지라도, 외롭게 살아온 아이들에게 때로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별빛이 되어줄 것이기에.

그렇게 이 사회의 어른이라면 우리도 아이들에게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천종호 판사가 무수히 아이들 앞에서 되뇌었다는 바로 그 말을 함께 되새기면서 말이다.

“외로운 네가 방황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은 우리가, 죽고 싶을 만큼 힘들어할 때 손 내밀어주지 못한 우리가 오히려 미안하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천종호님은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대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1997년 판사로 임관됩니다. 부산고등법원, 창원지방법원을 거쳐 현재는 부산가정법원 소년부 부장판사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소년재판 이야기를 담은 <아니야, 우리가 미안하다>(우리학교)가 있습니다.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나만의 보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엄마의 유물 놋대접과 인두

김동진 시인, 수필가. 중국 길림성 훈춘시

우리 집의 놋대접과 인두는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남겨놓은 유품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엄마가 보물처럼 아끼시던 물건인데 내가 엄마의 유물로 남겨놓은 것이다.

엄마의 놋대접은 간장 종지처럼 앙증스럽게 생긴 작고 깜찍한 것으로서 나의 유년 시절의 지정 밥그릇이었다.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돌이 방금 지난 나를 업고 친정 나들이를 가셨는데 그때 엄마의 할머니 즉 나의 외증조할머니께서 친정에 왔다가 쇠붙이를 가지고 돌아가면 아이가 무탈하게 자란다고 하시면서 이 놋대접을 주셨다고 한다. 이렇게 이 놋대접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나의 성장과 연결된 인연의 고리가 되었고 기억에 없는 외증조할머니의 자상하신 성품을 느껴보는 실물이 되었다.

광복 초기, 당장 먹을 것이 없어 할아버지의 유물인 두 권의 의서(?)까지 좁쌀 한 되와 바꾸면서도 이 놋대접만은 다치지 않으셨다는 엄마, 아마도 엄마는 모름지기 이 놋대접을 나의 건강을 지켜주는 보호신쯤으로 여기신 듯싶다.

내가 크면서 식기를 사발로 바꾸게 되자 엄마는 이 놋대접을 볏짚수세미에 벽돌 가루를 묻혀 반짝반짝 빛이 나게 닦아 찬장 서랍에 장중보옥처럼 간수하시었다. 그런 놋대접을 내가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으랴.

이민 1세인 외증조할머니께서 살길을 찾아 괴나리봇짐을 이고 두만강을 건너오실 때 가슴에 품고 오신 놋대접, 손녀인 나의 엄마의 손을 거쳐 지금은 나의 재산이 된 놋대접, 조상의 기원을 담아 4대를 전해오면서 백년 풍진 세월을 이야기하는 놋대접임에랴.

엄마의 인두는 전기다리미가 나오기 전까지 엄마의 세간 필수품이었다. 전기다리미가 유행되면서 엄마는 이 인두를 기름종이에 싸서 농짝 밑에 감추어두시었다. 지금은 민속박물관에 가야 볼 수 있는 고풍스러운 옛날 인두를 엄마는 한사코 버리지 않고 보관하신 것이다.

인두란 우리네 앞 세대 여인들이 오랜 세월 천의 구김살을 펴거나 옷 솔기를 꺾어 누르는 데 쓰던 도구이다. 엄마는 매번 다림질을 할 때면 이 인두를 화롯불에 꽂았다가 꺼내어 엄지와 식지로 찬물을 튕겨보고 뜨거운 정도를 가늠하신 후 혼솔을 꽁꽁 눌러 바로잡아 놓으셨다.

무쇠로 만든, 바닥이 반질반질하고 한 자가량 되는 쇠자루에 나무 손잡이가 달린 이 인두는 엄마가 경주 김씨 가문에 시집와서부터 쓰던 것이라고 하니 적어도 70년을 우리 집에서 살아온 셈이다. 가난을 밥 먹듯 하던 구질구질한 세월에 한 가정의 옷만이 아닌 마음까지 반듯하게 다려주시던 엄마의 인두! 지금 이 인두는 놋대접과 함께 가난 속에서 깨끗하고 바르게 살아오신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은기 작.

<아기 곰의 꿈>

28×26cm

Oil on canvas / 2012

한생을 선량하고 반듯하게 살아오신 나의 엄마,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남에게 해코지되는 일은 손톱만치도 할 줄 모르신 나의 엄마, 그렇게 조용히 사시다가 운명하신 엄마께서 이 인두로 당신의 마음 갈피가 구겨지지 않게 누르고 또 눌렀다고 이야기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나더러 이 인두로 생명이 끝나는 그날까지 세속에 부대껴 자꾸만 구겨지는 심령의 구김살을 하나하나 펴면서 사람답게 살라고 타이르고 있는 것이다.

엄마의 유물인 놋대접과 인두, 폐품수구원의 계산법으로 값을 매기면 단돈 10원도 안 되는, 돈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이 유물을 놓고 나는 꼭 값진 것만이 유물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집에 유물이 있다면 가난에 젖은 유물밖에 더 있겠는가?

엄마는 백 년이 넘는 놋대접 하나와 70년이 되는 인두 하나를 나에게 남겨주시었다. 나는 지금 국보(國寶)와는 비길 바가 못 되는 이 값싼 유형의 유품에서 값진 무형의 가치를 본다.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엄마의 체취와 심성을 느끼는 것이다. 빈궁 앞에서 머리 숙이지 아니하고 바른 금 하얀 가르마 하나 곱게 지켜오신 엄마의 조선족 여인의 삶을 읽는 것이다.

나는 엄마의 유물인 놋대접과 인두를 우리 집의 민속 골동품이요, 유형문화재라고 말한다. 그만큼 귀중하고 소중한 것이다.

세상에는 앞으로 걷는 게도 있었다

정운용 80세.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나는 게를 무척 좋아한다. 옆으로 걷는 모습이 꼭 나와 같다. 퇴근하고 바로 집으로 오라 하면, 대답은 예스인데, 해가 저물면 옆으로 처져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다 보니 나와 비슷한 게가 애정이 간다.

게에 관한 웃지 못할 이야기가 생각난다. 옛날 국내 재벌 그룹의 K회장을 만났을 때였다. 그가 자랑하며 ‘게’ 포스터를 나에게 보이며 어때요? 물었다. 그 내용인즉 상부에 큰 게 한 마리가 우뚝 있고, 자그만 게 수십 마리가 밑에 그려져 있고, 포스터 표어는 ‘너희들은 옆으로 걷지 말고 바로 걸어라’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회장님, 이 표어는 잘못됐습니다. 게는 원래 다리가 옆으로만 걸어가게 구조가 되어 있어 바로는 걸어갈 수가 없습니다.” 회장께서 즉시 포스터를 회수하라고 지시하였다.

게들은 다리의 절의 폭이 넓어 사람의 무릎 관절같이 일방향으로만 구부러진다. 아무리 해도 앞으로는 전진할 수 없고, 자연스럽게 다리를 움직이면 옆으로 걸어갈 수밖에 없다.

그 게가 좋아 나는 게를 모으기 시작하였다. 현재 99마리를 모았다. 나무, 동, 플라스틱 등으로 만든 모형, 브로치, 장난감 등 세계 각국의 것이다. 내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게는 30년 전 명동 입구 노점에서 산 걸어가는 게이다. 세계에서 움직이는 게는 이것뿐이다. 한국 사람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이 게는 나의 보물 제1호이다.

게를 좋아하다 보니 게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하게 되었다. 게는 한국, 일본 근해에만 약 1,000종이 서식하고 있다. 세계의 게 종류 중 5분의 1에 달한다. 게는 교미 후 약 3주가 지나면 암게는 큰 밀물 때, 살던 곳을 떠나 바다로 대이동을 한다.

모든 암게는 알을 안고 있다. 한 마리의 암컷이 2~3만 개의 알을 안고 있다고 한다. 바다의 바위밭에 모인 게들은 바위를 꼭 잡고 알을 방출한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암게를 기다리던 숫게는 다시 교미를 서두른다. 한 마리의 암게는 1년에 수회 산란한다.

김은기 작.

<프로포즈>

73×61cm

Oil on canvas / 2012

게는 어릴 때부터 성체가 되어도 탈피를 되풀이한다. 등딱지가 딱딱하여 이것을 벗어버려야지 성장할 수가 있다. 탈피에는 3분에서 5분 정도 소요된다.

게를 잡은 경험도 있다. 베트남 해변가에서 컴컴한 밤에 게를 잡으러 갔다. 생닭 모가지를 쇠사슬에 묶어 바다에 넣고 약 15분간 플래시로 비추어 보면 닭 냄새에 게가 난리가 난다. 이놈, 저놈, 큰놈, 작은놈들이 닭 모가지를 뜯으며 탐색을 한다. 덩치가 같은 놈은 서로 싸운다. 나는 물고 늘어진 게들을 물통으로 옮기기만 한다. 삽시간에 물통이 꽉 찬다.

어느 날 일본에 앞으로만 걸어가는 ‘병정게’라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본 구주 남쪽의 섬 아마미오-지마(奄美大島)에 있는 친지 기이레례이꼬 여사가 ‘병정게’를 소개하며 자기가 사는 섬에 있다는 것이다. 병정게가 이동할 때면 파란 등딱지가 햇살을 받아 더욱 빛이 나고, 꼭 갯벌에 보석이 아로새긴 것 같다고 했다. 바닷물이 빠지면 무수히 떼를 지어 다니며 모래나 흙탕에 포함된 유기물을 입으로 가져간다고 한다.

그런데 이 게가 바로 병정들처럼 앞으로 걷는다고 한다. 옆으로 걷지 않고. 그렇다! 세상에는 옆으로 걸어가지 않고 바로 직행하는 게도 있었다. 이미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바로 걸어갈까 싶다.

그 청년, 영구에서 장동건으로 변하다

홍수연 치과 의사, 서울이웃린치과 원장

그는 78년에 태어난 젊은이다. 준수한 외모에 사회단체 활동가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1년 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의 놀라움이 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하다.

얼굴은 20대의 풋풋함을 겨우 벗어난 것 같은데, 치과 병원에 처음 내원했다는 그의 입 속은 70대인 내 아버지보다도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 만성 성인형 치주염이라 부르는 잇몸 질환으로 흔들리지 않는 치아가 거의 없었다. 뿐만 아니라 방사선 사진 촬영을 했더니 치아를 붙잡고 있는 뼈(치조골)가 위 앞니의 경우 치아 뿌리 끝에서 겨우 2-3mm밖에 남아 있지 않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게다가 앞니가 많이 벌어져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장동건인데, 입만 벌리면 영구 같았다. 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난감했다.

우선 그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는 울었다. 나도 먹먹해져서 처음 보는 젊은이 앞에서 눈이 시큰해졌다. 그리고 제안했다. 어차피 치아를 모두 잃을 각오를 하고 한번 도전해보자. 각각의 치아들이 견디기 어려운 힘을 받는 경향이 있으니 서로 의지할 수 있도록 묶어보자. 기왕 묶는 김에 앞니들은 위치를 움직여서 보기라도 좋게 해보자. 물론 교정 장치가 보여서 신경 쓰이기는 하겠지만, 이를 닦기 편한 쪽인 바깥쪽으로 붙여서 한번 해보자. 10개월가량 해보고 아닌 것 같으면 그때는 포기하자. 이런 말들을 주고받는 동안 그와 나 사이에는 갑작스런 오기와 팽팽한 긴장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기초적인 잇몸 치료부터 시작했다. 치석제거, 치근활택, 치주소파, 부분판막…. 말이 쉽지 일주일에 한두 번씩 병원에 와서 마취 주사 맞고, 한 사이클을 마치는 데 2개월 이상 걸리는 치주 치료의 단계를 통과하기는 정말 힘들다.

차라리 어느 부위가 너무나 아프다든지, 생사가 갈리는 질환이라면 모를까 평소에는 아무런 증상도 없다가 치아를 상실할 지경까지 되어야 뭉근한 통증이 있는 잇몸병을 치료하는 데 이다지 노력을 해야 하는 건가? 많은 치과 환자들이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가 결국은 치아를 다 잃고 후회하는 것을 나는 20년 동안 많이 보아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기초 치주 치료를 마쳤다.

다음은 교정 치료의 단계였다. 위아래 앞니 12개에만 교정 장치를 붙이고 월 1회 병원에 와서 힘 조절을 해주는 치료이다. 성인들에게 치주를 위한 부분 교정 치료를 할 때는 치아의 배열이 아름다워지는 것보다는 치아가 움직이다가 빠져버리지는 않을지 무척 신경이 쓰인다. 결국 성패는 교정 치료 기간 동안 환자가 얼마나 이 닦기에 목숨 걸고 도전하는지, 의사가 이를 어떻게 배려하는지에 좌우된다.

환자와 만나는 건 월 1회이므로 나머지 29일 동안 그가 이를 잘 닦는지, 장치에 이상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병원에서는 알 수가 없다. 내 생각에는 결국 환자의 노력이 치료를 완성해가는 게 성인 치주 교정의 핵심이다. 의사가 할 일은 정확한 진단과 치료 과정에서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공감 정도라고나 할까?

김은기 작.

<기다림>

53×53cm

Oil on canvas / 2012

그리고 10개월 만에 교정 장치를 제거했다. 유지 장치를 붙이고 치료 전후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들을 채득했다. 1년 전 처음 내원했을 때의 방사선 사진과 이번에 찍은 사진을 나란히 놓고 비교해 보았다. 정말 놀라웠다. 치조골이 전반적으로 3mm 이상씩 새로 생겼다. 전체적으로 치조골이 수평으로 새로 생기는 일은 정말 드문 일이라고 한다.

어떻게 이렇게 행복한 결과가 생겼을까?

그는 죽을 각오로 하루 세 차례 열심히 이를 닦았을 뿐이라고 한다. 가진 건 젊은 몸과 의지뿐인데 그 사소한 이 닦기 한 가지도 제대로 못 하면 앞으로 뭘 할 수 있나 싶더란다.

참 대단하다. 아니, 대견하다. 그리고 이런 ‘보물’ 같은 환자들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거울을 들여다보며 웃었다. 영구에서 장동건으로 변한 그의 웃음이 참 예뻤다.

무엇과도 바꿀수 없는 소중한 나만의 보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여행책

장혜진 31세. 은행원. 부산시 해운대구 우동

대학 졸업반 때 취업에 성공해 24살부터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아무도 나를 구속한 사람은 없었으나 취직과 동시에 묘한 해방감(?)에 사로잡혀 여행 적금을 만들어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국내외 가릴 것 없이 열심히도 다녔다. 주로 시간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였다.

하지만 왠지 허전했다. 그제야 가족 생각이 났다. 40여 년간 공직 생활을 해오신 아빠, 열심히 우리를 뒷바라지해오신 엄마, 가족과 떨어져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는 남동생.

어릴 때에는 가끔씩 근교 여행도 가곤 했는데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나만의 시간 갖기에만 급급해서 제대로 된 가족 여행 한 번 해보지 못했다. 그때부터 여행 적금에 열심히 더 돈을 모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나의 작은 소망이 이루어졌다.

2011년 8월 여름휴가. 우리 가족 첫 크루즈 여행!

6박 7일 일정으로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중국 상해, 청도, 제주도를 거쳐 다시 인천항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아침, 점심, 저녁 맛있는 음식도 먹고 같이 운동도 하고 게임도 하고 칵테일 파티도 참석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점잖으시고 좀 과묵한 선비 같으신 우리 아빠, 애교 많고 말을 재미있게 잘하시는 우리 엄마, 별로 애교 없는 나, 꽃미남에 성격 좋고 유쾌한 우리 동생!

잠자는 시간 빼고는 계속 같이 있다 보니 밀렸던 이야기도 많이 했고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사실 나는 27년 동안 부모님과 같이 살았다. 그러다 2010년 타 지역으로 발령이 났고, 회사에서 제공하는 아파트에 살게 되면서 부모님과의 동거 생활이 끝이 났다. 주말에만 집에 올 수 있는데 그것도 나의 취미 생활과 노는 데만 정신을 쏟다 보니 집에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의 빈자리를 많이 느꼈다고 말씀하시던 부모님과 밀린 이야기도 많이 했다. 온전히 6박 7일 동안 부모님, 동생과 함께하며 가족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행을 다녀오고 나서도 그때의 설렘과 행복은 계속되었다. 이 추억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다가 생각한 것이 바로 포토북! 여행의 기억을 꺼내어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사진을 실어 80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만들었다. 석 달이나 걸렸지만 완성하고 나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서 단 한 권밖에 없는 책이 완성된 것이다.

김은기 작.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60×50cm

Oil on canvas / 2012

 

부모님도 정말 좋아하셨다. 기분이 좋아 친구들, 직장 동료들에게도 보여주며 자랑했다. 반응이 꽤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추억을 포토북으로 만들어 보라고 강력 추천했다.

기쁠 때나 우울할 때나 심심할 때나 내가 만든 책을 보면 엔돌핀이 팍팍! 생겼다. 수십 번을 봤지만 지겹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녀석~ 넌 나의 보물 1호야~!’

그 책은 여전히 우리 집 거실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위풍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다. 오늘 저녁 식사 후 과일을 깎고 계시는 엄마를 지그시 바라보다 한마디 던졌다.

“엄마~ 우리 크루즈 여행 한 번 더 갈까?” “아니~ 그 비싼 거 한 번 갔다 왔으면 됐지~ 엄마는 충분히 만족한다. 그때만 생각하면 기분 좋다~” “딸내미 능력 된다, 괜찮다~ 이제 돈 잘 버는 사위도 있잖아~ 하하.” “아니~ 괜찮다 해도….”

계속 말하니 끝까지 거절하지는 않으시는 우리 엄마.ㅋㅋ 5년 뒤에 다시 한 번 크루즈 여행을 가자고 부모님과 약속했다. 그때는 우리 4식구가 아니고 인원이 더 늘어날 듯하다. 몇 달 전에 결혼을 해서 듬직한 남편과 정말 나를 친딸처럼 아껴주시는 시아버님, 시어머님도 생겼기 때문이다. 두 부모님을 모시고 남편까지 함께하는 여행이라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5년 뒤에 나만의 여행책2를 만들 수 있기를 기원한다.

무덤까지 갖고 가고픈 그 손수건

조건 60세. 부동산업. 캄보디아 프놈펜 골든시티 거주

1970년 여름 방학을 앞둔 고등학교 2학년의 파아란 꿈들이 포도송이처럼 익어가는 어느 날이었다. 친구인 창호 녀석이 허겁지겁 달려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야! 빅뉴스야!” “뭔데? 훈육 선생이 사고라도 났냐?” “그게 아니고 기독학생회에서 여름 방학 때 수련회를 부산으로 간단다.” “기독학생회에서 수련회를 가는데 개발의 달걀인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게 아니고 여학생이 반절이란다.” 그 말에 우리는 곧장 접수한다는 기독센터로 줄달음을 쳤다.

기독교면 어떻고 불교면 어떠냐, 여학생이랑 일주일을 그것도 정식으로 학교의 허가를 받아서 가는 여행인데 지옥이라도 가자고 우리는 금방 늑대 가족이 되어버렸다.

기차는 이리역(현 익산역)을 출발하여 부산을 향해 노인네 가래 끓는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천장에 달린 선풍기는 고장 난 지 오래고 발 디딜 틈조차 없는 공간에서 겨우 자리를 잡아 여학생을 앉혔다.

찜통이 아니라 압력밥솥에 들어앉은 것 같은 더위였건만 내 눈에 여학생 하나가 확 들어왔다. 더위에 지쳐 무릎에 의지하여 잠이 든 친구에게 신문지로 부채질을 해주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천사는 못 봤지만 분명 천사라고 믿어버렸다. 그것도 자기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면서 친구에게 부채질을 몇 시간을 해주는 그녀의 인내에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쁘지는 않지만 김태희 정도의 미모에(과장법을 써서) 키는 170을 넘기는 S라인, 세상에 못 갖춘 것이 없는 그녀에게 나는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나의 짝사랑 열병은 시작됐다. 수련회에서 어느 날 땀을 흘리는 나에게 “땀을 많이 흘리네? 땀 좀 닦아” 하며 내미는 물방울 무늬의 손수건을 음흉한 계산으로 “빨아서 돌려줄게” 하며 바로 돌려주지 않은 그 얄팍한 계산은 그걸 빌미로 작업을 해볼 셈이었다(도둑놈).

김은기 작.

<With snowman>

41×32cm

Oil on canvas / 2013

백사장을 걸으며 되지도 않는 문학이 어떻고 윤동주의 서시를 맞는지도(분명 몇 군데는 틀렸음) 모르면서 중얼거리며 개폼을 잡던 그 여름은 분명 신의 계산 착오로 인한 우리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그렇게 헤어지고 연락처 하나 없는 막막한 시간이 지나고 나의 그 열병은 더욱 발전하여 책가방에 매직으로 ‘문영미 사랑해’라고 써서 메고 다니고 그녀의 학교 앞을 수없이 헤매고 다녔다. 그런데 예비고사 시험장에서 우연히 그것도 같은 교실에서 만났다. 반가워하는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하고 싶었지만 하필 시험장이라 끝나고 해야지 했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학 입시 시험장에서, 또 같은 교실에서 우린 다시 만났다. 우리는 인연도 보통 인연이 아니라며 서로 반가워했다. 하지만 그날도 부모님이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바람에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1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 친구의 죽음으로 인해 찾아간 대학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멋진 수간호사가 되어 있었다. “결혼했어?” “응! 이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야. 아이는 둘이고.”

나는 지금도 그 물방울 무늬의 수건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 마누라 몰래 43년을 간직하느라 고초도 많았고 사연도 많았다.

“그 해진 손수건을 뭣 땜에 신줏단지 모시듯이 하는지 알다가도 모르겄어.” 그래 당신은 모를 거다. 아니 알아서도 안 된다. 이것은 나만의 비밀이다. 그리고 영원히 무덤까지 가지고 갈란다. 죽을 때 어디에다 숨겨야 안 들키고 가지고 갈지를 나는 매일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이다. 일간 좋은 생각이 떠오르기를 기도하며.

아빠의 사랑이 담긴 시계와 손난로

이준원 합천대병초등학교 4학년. 경남 합천군 대병면

안녕하세요? 저는 합천대병초 4학년 이준원이라고 합니다.

제가 제일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시계입니다. 저의 10번째 생일 선물로 아빠께 받은 것이라 그런지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랍니다. 아빠가 “생일 축하해” 하시며 시계를 주셨을 때 너무 기뻤고 빨리 껴보고 싶었습니다. 뭔가 좋고 명품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지금은 건전지가 다 닳아, 가지는 않지만 날짜를 나타내는 기능도 있어 그냥 차고 다닙니다. 디자인도 디즈니가 팔로 시간을 가리켜 예쁘고, 시계 줄도 가죽으로 되어 있어 착용감이 좋습니다.

아빠는 생일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와 각종 명절이나 기념일 때 저와 두 동생에게 선물을 주십니다. 손난로는 재작년 크리스마스 때 아빠께 선물을 받은 것인데, 기름을 한 번 채우면 5시간은 따뜻한 손난로입니다.

손난로를 처음 받았을 때는 손난로에 아직 기름을 넣지 않았는데도 따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건 바로 아빠의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겨울도 손난로 덕분에 따뜻하게 날 수 있었고, 이번 겨울도 따뜻하게 나고 있습니다.

제겐 이 두 물건이 보물 1호입니다. 두 물건 모두 아빠께 선물 받은 것이라 제가 더욱 각별히 여깁니다. 시계는 제 책꽂이에 못을 박아서 항상 거기에 걸어놓고, 손난로는 책상 위에 올려놓습니다. 한 번도 잃어버리거나 고장 난 적이 없이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보물이 앞으로도 잘 고장 나지 않고 나의 작은 친구로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보물을 주시는 아빠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평소에 저에게 정말 잘해주시고 장난도 잘 쳐주시고, 저를 키워주신 은혜에 감사하다는 말 이외에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은 아빠가 좋아하는 걸 잘 알지 못하니까 앞으로 아빠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와 동생들이 건강하고 엄마 아빠 말씀을 잘 들어야겠습니다. 아빠의 보물은 건강하고 화목한 우리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아빠가 건강하고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습니다.

김은기 작.

<행복한 정원>

65×53cm

Oil on canvas / 2011

첫인상, 좋은 편이신가요?

첫인상, ‘좋다’는 소리를 많이 들으면 기분 좋고, 그렇지 못하다 싶으면 왠지 시무룩해집니다. 사람들은 흔히 첫인상만 보고 평가를 내리니까요. 이왕이면 첫인상이 좋아야, 인간관계나 사회생활에도 유리하겠지요. 때문에 첫인상을 좋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하기도 하고, 개인의 인상이 곧 회사의 경쟁력이라며 ‘첫인상 교육’을 하는 회사도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수많은 학자들은 바로 이 첫인상의 함정에 대해 말하기도 합니다. 첫 만남이 많아지는 요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첫인상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 편집자 주


좋은 첫인상을 남길 수 있는 기회란 결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디오도어 루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 것. 첫인상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그 정확성은 그리 신뢰할 만하지 않다.
이드리스 샤흐

좋은 첫인상을 만들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사람들에게 친근하게 대하고 미소를 짓는 것이다. 이것이 첫 만남에 당신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인식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토도로프(미국 프린스턴대 심리학과 교수)

편도체가 눈매로써 첫인상을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7/1000초다.
왈렌(미국 다트머스대 심리와 뇌과학 교수)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인, 얼굴 표정이 74.5%

2012년 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 남녀 직장인 822명을 대상으로 ‘직장, 거래처와 동료 사이 첫인상을 결정하는 요인’을 조사한 결과, 1위가 ‘얼굴 표정(74.5%)’으로 가장 많았다. 외모의 준수한 정도는 49.4%로, 외모보다 표정이 훨씬 첫인상에 더 많은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 것. 그다음 차림새(40.0%), 어투와 자주 사용하는 용어(32.1%), 체격(24.5%) 순이었다.

면접관 2.6분 안에 첫인상 판단, 90.7%가 면접에 첫인상 반영

취업포털 사람인이 2010년 4월, 인사 담당자 353명에게 설문 조사한 결과, 면접관이 지원자의 첫인상을 판단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6분인 것으로 조사됐다. 또한 응답자의 90.7%가 첫인상이 면접 평가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했다. 인상 자체가 지원자의 생활 습관 등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첫인상을 평가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부분으로는 얼굴 표정(25.6%), 말투(22.2%), 바른 자세(19.4%) 이목구비 등 외모(10.3%) 순이었다.

<첫인상>이란 제목으로 나올 뻔했던 소설 <오만과 편견>

영국 작가 제인 오스틴(1775~1817)의 소설 <오만과 편견>은 처음 <첫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집필한 책이다. 소설에서는 여자 주인공이 남자 주인공의 오만한 첫인상에 대한 편견으로, 가까워지지 못하다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 그 남자가 첫인상과는 달리, 너그럽고 생각이 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점점 사랑에 빠져가는 과정을 그린다. 첫인상은 콘크리트처럼 쉽게 굳어지는 특징이 있어 처음 형성된 인상은 쉽게 바꿀 수 없다고 하지만, 결국 그러한 판단이 편견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많다. 혹시 첫 만남에서의 인상 때문에, 기분이 상해 늘 나쁘게만 생각되는 사람이 있다면 잠시 그 편견을 버리고 그 사람을 새롭게 바라보면 어떨까.

첫인상이 우리의 판단에 미치는 영향

< MBC 스페셜>에서는 2009년 1월 4일 ‘첫인상’에 관한 기획을 방영했다. 실험 중 하나는, 피의자의 외모가 범죄의 판결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한국모의법정. 허름하게 입힌 피의자에게 배심원들은 평균 8.9년의 형을 내렸다. 반면, 같은 피의자이지만 깔끔한 화장을 시키고 정장으로 갈아입히자 배심원들은 평균 5.1년의 형을 내렸다. 이러한 실험들은 첫인상에서 받은 순간의 정보로 인해, 얼마나 많은 판단의 오류를 범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첫인상 안 좋은 사람들을 위한 위로

안 좋은 첫인상 때문에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신의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괜한 오해를 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인상이 안 좋은 사람은, 조금만 좋은 행동을 해도 사람들에게 더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애당초 그 사람이 좋은 사람일 거라는 선입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번 친분을 맺으면 더 깊게 맺는 경우가 많다.

첫인상이 평생 가는 것도 아니다. 심리학 용어로 빈발효과(Frequency Effect)라는 말이 있다. 첫인상이 좋지 않게 형성되었다고 할지라도, 반복해서 제시되는 행동이나 태도가 첫인상과는 달리 진지하고 솔직하게 되면 점차 좋은 인상으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다.

인상 때문에 고민이라면 무엇보다 많이 웃어라. 웃기만 해도 첫인상 점수가 30%는 올라간다. 그리고 진정으로 지금 하는 일을 즐겨라. 활력 있는 웃는 얼굴은, 인상 좋은 사람의 무표정한 얼굴보다 백배 낫다.


“첫인상으로만 사람을 판단하지 마라”
영업인이 절대로 가져서는 안 될 선입견

고객은 첫인상으로 영업인을 판단하더라도, 영업인은 절대 첫인상으로 고객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첫인상이 틀리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15년 전 직장 동료들과 강원도 쪽으로 단체 여행을 가, 축구를 하기 위해 학교 운동장을 빌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마침 근처에 초등학교가 있어 가보니, 초라하고 볼품없는 60대 노인이 운동장 구석에서 풀을 뽑고 있었다. 첫인상만으로만 보면 여지없이 막일을 하는 사람.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노인이 학교장이어서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첫인상 오류의 좋은 예로는 말콤 글래드웰이 쓴 <블링크>에 잘 나와 있다. 자동차 세일즈맨 보브 골롬은 한 달에 20대의 차를 파는 놀라운 저력의 사나이다. 골롬의 성공에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는 고객을 결코 외모로, 첫인상으로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문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차를 살 가능성이 똑같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최선의 시도를 해야 합니다. 풋내기 세일즈맨은 고객을 보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 사람은 차를 살 것처럼 보이지 않아.’ 이것은 최악의 자세입니다. 때로는 전혀 살 것 같지 않았던 사람이 대박인 경우도 있거든요. 제 주요 고객 중에는 농사를 짓는 분이 계시는데 여러 해 동안 그에게 모든 종류의 차를 다 팔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서 쇠똥 묻은 작업복을 걸친 그를 본다면 아마 귀한 고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이처럼 영업인은 절대 고객을 첫인상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 하지만 고객은 첫인상으로 영업인을 평가하니, 스스로 좋은 첫인상을 갖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필요가 있다.

오정환 / 오정환리더십아카데미 원장


첫인상의 중요성

심리학 용어로 ‘초두효과’라는 말이 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A 질투심이 강하다 / 고집이 세다 / 비판적이다 / 충동적이다 / 근면하다 / 똑똑하다
B 똑똑하다 / 근면하다 / 충동적이다 / 비판적이다 / 고집이 세다 / 질투심이 강하다

A와 B중 어떤 사람을 소개받고 싶은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B를 선택한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사람의 특징은 똑같고 순서만 바꿨을 뿐이다. 그런데도 B를 선택하는 건 초두효과 때문이다. ‘초두효과’란 먼저 제시된 정보가 나중에 들어온 정보보다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말한다. A는 질투심이 강하고 고집이 세다는 부정적인 내용이, B는 똑똑하다, 근면하다는 긍정적인 내용이 먼저 제시되어, B의 첫인상은 굉장히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첫인상이 굉장히 정확할 거라는 관념과는 달리, 이렇게 사소한 정보 나열의 순서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첫인상의 오류를 나타내주기도 하지만 스스로 첫인상을 잘 가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나타내주기도 한다.

허은아 / 글로벌 이미지전략가, <메라비언 법칙> 저자


항상 새 학기가 시작되는 게 두려웠다. 내 첫인상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한 아토피 때문에 스스로 위축돼 있었고 자신감이 없어서 친구들에게 말도 잘 걸지 못했다. 늘 표정이 어둡고 굳어 있어서 “좀 다가가기 어렵다”는 말을 듣곤 했다.

그러다가 방학 때 마음수련을 통해서 내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아토피로 심하게 위축되었던 마음도 버릴 수 있었고, 그러면서 내 스스로에게 좀 당당해지고 자신감이 생기게 되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게 되니까, 내가 먼저 사람을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그 후 새롭게 만나는 친구들에게 먼저 스스럼없이 다가가게 되었다. 친구들 모두 표정이 너무 밝아졌다고 했다. 항상 입꼬리가 내려와 있었는데 지금은 보기 좋게 웃고 있다고. 이제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너무 좋다. 지금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인상이란, 가식적인 미소보다는 꾸밈없이 자기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도희 / 16세. 학생. 서울시 노원구 상계동

내 머릿속은 오류투성이

한날한시에 경험한 일을 서로 다르게 기억해 다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기억은 너무나 또렷하고 생생한데 사람들의 생각은 왜 나와 딴판일까. 나의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기억의 오류는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데, 근래의 여러 가지 실험들은 우리의 기억이 ‘언제나’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의 뇌는 블랙박스나 카메라처럼 정밀한 기억 장치가 아니라 지금까지 보고 듣고 기억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를 재구성한다. 그래서 같은 상황을 경험하더라도 각자 자라온 환경과 경험의 틀 속에서 기억을 짜 맞추게 되는 것이다.

세제를 고를 때 포장지의 색깔을 보게 되고, 이름이 쉬운 회사에 주식 투자를 하고, 목소리가 낮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등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대다수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살면서 쌓아놓은 무의식의 단편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판단과 기억은 끊임없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에 항상 자신의 기억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지금까지의 신념 체계를 뒤집어보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보는 경험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 문진정 & 참조 도서 <새로운 무의식>(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 까치)

우리의 뇌는 기억을 재구성한다.

1990년대에 등장한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라는 기술 덕분에 우리는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3차원 영상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존에는 무시되어왔던 무의식의 영역 또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장면을 볼 때 사진처럼 선명하고 윤곽이 뚜렷한 그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림의 일부만 또렷할 뿐이고 나머지는 뇌가 마음대로 빈 공간을 그려낸 것이다. 즉 기억하기보다는 무의식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정보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아무리 굳게 믿는 ‘사실’이라도 100% 객관적이지 않고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실험 1   뇌는 와인의 가격을 맛본다.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안토니오 랑헬은 가격표만 붙은 여러 와인들을 한 모금씩 마신 뒤 어느 와인이 좋은지 평가하는 실험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달러가 붙은 병보다 90달러가 붙은 병의 맛을 더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사실은 두 와인 모두 한 병에 90달러짜리였다. 그리고 와인을 맛보는 동안 fMRI 기계로 사람들의 뇌를 촬영한 결과 와인이 비쌀수록 눈 뒤쪽에 있는 ‘안와전두엽피질’의 활동이 증가했는데, 이 영역은 쾌락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같은 상품에 가격만 다르게 매겨도 뇌는 전혀 다른 맛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실험 2   기억은 쉽게 조작된다.

사람들의 관찰력과 기억력을 시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의 한 교실에서 학생으로 위장한 두 명의 배우가 논쟁을 벌이다가 총을 난사하는 연기를 펼쳤다.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건 직후, 학생들을 몇 집단으로 나누어 1집단에게는 방금 본 것을 즉시 글로 쓰라고 했고, 또 2집단과는 일대일 면담을 하고, 3집단에게는 조금 지난 뒤에 보고서로 쓰라고 했다. 그 결과 세 집단의 보고에는 26~80%의 오류가 나타났다. 하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하거나, 중요한 행동을 빠뜨리기도 하고,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의 오류는 거듭 인식할수록 실제 사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의사 김경아의 마음 빼기 이야기

봄꽃처럼 소박하고 환한 웃음을 간직한 울산제일병원 가정의학과 전문의 김경아(33)씨. 그녀는 늘 환자의 입장에서 들어주며, 마음까지 보듬어주는 상냥한 의사로 통한다. 환자들의 병이 호전될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천생 의사 경아씨는 의대 재학 중 마음수련을 하며 진정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한다. 마음과 병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하고 있으며, 항상 ‘환자들이 있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김경아씨. 봄꽃처럼 화사한 그녀의 마음 빼기 이야기.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병원에는 생로병사, 그 네 가지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인간 삶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지요. 대구의료원에서의 전공의 시절, 당직을 설 때면 정말 응급 환자들의 죽음을 많이 보았습니다.

“0월 0일 0분 호흡 없고 맥박 없고 심장 박동 없고… 000님의 사망을 선언합니다.” 할 수 있는 모든 응급 처치를 동원하며 피 말리는 밤을 보내지만 결국 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나면 참 인간 삶이 덧없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생명이 있는 이 순간, 조금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가정의학과에는 여러 가지 내과 질환을 가진 환자분들이 많이 오십니다. 당뇨, 고혈압, 심장병, 갑상선 질환, 감기 환자…. 일단 그분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처방을 고민하면서 마음부터 보듬어주려고 노력합니다.

“병이 안 나으면 어떡하지” “앞으로 사회생활은 어떡하나” 하는 불안과 두려움…. 그런 것부터 놓으실 수 있게 충분히 설명해주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나을 수 있는 병이라고 말해드리는 것만으로도 환자분들의 표정도 밝아지고 치료도 훨씬 쉬워지거든요.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병의 증세도 달라진다.’

그렇게 마음의 힘을 알고 환자의 마음을 우선적으로 보듬어주려고 노력하게 된 건, 마음수련을 하면서였습니다. 수련을 하며 마음을 비우는 것만으로 질병이 낫는 수련생들을 정말 많이 보았거든요. 불안, 우울증, 불면증, 공황장애 등의 정신적인 증세뿐 아니라, 당뇨, 심장병, 관절염, 유방암, 백혈병, 위암 등 신체적 질병까지.

처음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많이 신기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인간은 소우주다, 몸과 마음은 하나다’라는 전체적 관점에서 병을 바라보지만, 서양의학은 이 병은 00바이러스의 침투로 인한 것이니 이 바이러스를 제거해줘야 한다 등의 진단적 사고에 익숙하다 보니, 마음을 비움으로써 병이 낫는 메커니즘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처음에는 어렵더라고요.

하지만 스트레스, 화 등이 호르몬이나 혈압 등 생체에 변화를 일으켜 지병을 만들고, 그런 마음들을 빼냄으로써 병이 호전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은 마음수련을 하신 의사들과 박사과정 연구생들이 모여, 마음과 병의 상관관계를 좀 더 과학적으로 밝히기 위해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병에 대해 단순히 몸의 증세만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요소까지 더해 전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됐다는 것은 저로서는 참 큰 행운이고 감사한 일이지요.

저는 의대생 시절에 마음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의대생이라고 하면 보통 꿈을 이룬 ‘드리머’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처음엔 많이 방황을 했어요. 군대식의 선후배 관계, 빽빽한 수업 일정, 강압적인 과 분위기, 그리고 왠지 돈과 명예를 좇는 듯한 모습….

정말 이게 내가 원하는 삶이었나? 꼭 의사가 돼야 행복할까? 내가 여기 있는 건 사회적 시선이나 부모님의 기대 때문 아닌가?

그렇게 치열하게 방황하던 중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죠. 뭔가 인생의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요. 수련을 하면서 내가 진짜 세상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차곡차곡 나만의 마음세계를 만들어놓고 그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빠져나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열심히 버려나갔지요. 그러던 어느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내 마음속 세계에서 벗어났구나, 이 세상은 원래 하나였구나, 이게 바로 진짜 세상이구나 하고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방황이 끝나더군요. 중학생 시절 막연히 ‘누군가를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선택했던 의사라는 직업, 나는 그 길을 걸어왔고 이렇게 나의 꿈을 이루어가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꼭 의사가 되어야 행복할까? 고민했지만, 내가 어렵게 공부한 의학 지식으로 응급 환자를 살려냈을 때면, 나는 이미 말할 수 없이 행복했으니까요. 그 행복에 감사하기보다 번뇌를 위한 번뇌, 방황을 위한 방황을 해왔던 순간들은, 내가 만든 마음세계 속에서 일어난 망념일 뿐이었습니다. 이제 과거가 아닌 현재에 발을 딛고, 남의 기준에 ‘좋아 보이는’ 삶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렇게 생각 자체가 바뀌자, 매일 아침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이 감사했습니다. 사실 제가 꿈꾸는 의사의 모습은, 각 환자의 가족사와 병력 등 어떤 문제라도 편하게 상의할 수 있는, 그 사람만의 주치의가 되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현실 속에 과연 그럴 수 있을지 너무나 막연했는데, 마음수련이 그걸 가능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도 생겼지요.

마음수련의료회 회원으로서 정기적으로 의료 봉사에도 참가했습니다. 예전엔 능력이든 돈이든 뭔가 많이 가지고 있어야 나눌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더라고요. 나누려고 하는 마음만 있으면 아주 작은 것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의료회 선배들 말씀이,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봉사하고 나누는 것은, 이 세상이 하나임을 깨달은 자라면 당연히 하게 되는 일이다”라고 하시더군요. 그렇게 언제나 가짐 없는 마음으로 참 의사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정리 최창원 & 사진 김혜진

그대가 빈 배라면

한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가 와서 그의 배에 부딪치면
아무리 성격이 나쁜 자일지라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배 안에 사람이 있으면
사공은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이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더욱더 큰 소리를 지르면서
저주를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난다.
만일 그 배가 빈 배라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강을 건너가는 그대,
자신의 배를 그대가 비울 수 있다면
아무도 그대와 맞서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그대를 상처 입히려 하지 않을 것이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에 소개된 ‘빈 배[虛舟]’ 이야기입니다.
시남자라는 사람이 노나라 임금에게 한 충고를 적어놓은 것이라지요.
그렇습니다. 비우면 가벼워집니다. 인생이 자유로워집니다.
하지만 비워야 할 것은 재물 욕이나 권력 욕에만 머무르지 않을 것입니다.
막연한 기대, 두려움, 외로움도 있고, 또 다른 무언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과연 내가 비워야 할 것은 무엇일까.
아무도 모르는, 하지만 반드시 비워야 할 그 마음….
나는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