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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박선생님

박선생님과 나는 부천시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며 같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다. 하지만 박선생님은 나보다 십 년은 어려 서로 어울리는 선생님들은 달랐다. 그리고 10년 후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마침 앞뒤로 아파트도 가까이 있어서 자주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퇴근 후면 동네 공원에서 만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잡다한 가정사를 논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내가 교감 발령을 받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박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 뒤 나는 정년 퇴임을 하였고 퇴임 후에는 급기야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끔찍한 일을 당하였다. 그때 나를 위로해준 사람은 바로 뒤에 사는 박선생님이었다.

박선생님은 그사이 명예 퇴임을 하고 병환 중인 시부모님을 모시며 가사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시부모님이 돌봐주셨기에 교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며 승진도 포기하고 퇴임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우선 그러한 그녀의 태도에 놀랐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병든 부모는 요양원에 모시고 직장을 놓지 않는 경우가 흔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어머님은 치매 환자가 아닌가? 내가 없는 동안 박선생님은 혼자 매일 공원을 돌았다며 건강과 마음도 다스릴 겸 같이 걷자고 하였다. 내가 돌아온 때가 마침 4월이라서 꽃이 만발하기 시작한 공원을 걷는 것만으로도 나의 슬픔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화제는 주로 치매 시어머님에 대한 근황과 가정사였다. 선생님의 시어머님께서 얼마나 근면하고 검소한 분인지는 나도 안다.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시고 공터에 갖가지 채소 농사를 지어 가족에게 유기농 음식을 제공하신 분이다. 학교에 가다 멈추어 서서 밭 구경을 하면 없는 채소가 없구나 할 정도였다. 고지식하신 시어머님과 삼십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박선생님이 받은 스트레스도 상당하였으리라. 지엄하신 시아버님은 또 어떻고. 그러나 생전에 어려워하던 시아버님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하였다.

선생님과 나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공원을 한 바퀴씩 돌았다. 30분 정도 걷고 벤치에서 쉬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걷곤 하였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까?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었건만 늘 새롭게 감동하고 되새겼다.

“박선생님은 참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삼시 세끼를 꼭 해드리누?” “제 특기 적성이 가정주부라는 걸 퇴임하고 알았어요. 넘 재미있어요. 호 호 호.” 그렇게 웃음을 날리며 시어머니께서 식욕이 좋으셔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내가 간혹 걱정을 하면 “우리 시어머니는 예쁜 치매예요. 누굴 괴롭히질 않으셔요. 씻으시고 방바닥 닦고 애기처럼 주무시고 그게 다예요. 말이 없으셔요”라고 했다.

언젠가 한밤에 소파의 속을 다 뜯어 놓으시는 바람에 새 소파를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더 잘해드려야죠. 돌아가실 것 같은데 저렇게 버티시는 것이 다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노년에 꼭 필요한 친구는 이런 친구’라는 내용으로 메일을 보내준 적이 있다. ‘마음이 젊은 친구, 낙천적인 친구, 유머 감각이 풍부한 친구, 건강 관리에 철저한 친구, 전화하면 바로 올 수 있는 친구, 마음이 젊은 친구, 봉사하는 친구….’ 그대로 따르자면 약 열 명의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 모두를 다 갖춘 한 사람을 친구로 두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는가?

동년배도 많건만 나를 가까이하고 듬뿍 정을 주고 즐겁게 해주느라 무던히도 애쓰던 그녀. 얼마 전 박선생님은 시어머님의 초상을 치르고 돌아와 집이 텅 비어 허전해 못 견디겠다며 대성통곡하더니, 먼저 살던 서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을 잃고 박선생님에게 너무 많은 위안과 사랑을 받았음을 박선생님이 내 옆을 떠나고 나서야 더욱 느끼게 되었다. 나보다 십 년이 어린 친구이지만 정 많고 의리 깊은 그녀의 심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김재숙 69세. 시인. 경기도 고양시 마두2동

박선생님께는 ‘고마운 박선생님에게’라는

김재숙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예쁜 난 화분을 보내드렸습니다.

나에게 감동을 준 사람, 특별한 사람,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 사연을 소개해주세요. (edit@maum.org) 독자님의 마음을 대신 전해드립니다.

협찬 예삐꽃방 www.yeppi.com

보리밥과 두부버섯잡채

다이어트 때문에 푸짐하게 먹지 못해서 스트레스라고요? 포만감 있고 소화도 잘되면서 칼로리는 낮은 식재료를 선택해 보세요. 오늘은 버섯과 보리밥, 두부 삼총사가 다이어트를 도와드립니다.

필수 재료(1인분) 느타리버섯(50g), 표고버섯(1개), 양파(1/4개), 당근(1/4개), 피망(1/2개), 두부(1/4모), 보리밥(1/4공기), 소금(약간), 들기름(1큰술 반), 다진 마늘(1작은술), 간장(1작은술), 다진 파(1큰술), 통깨(1큰술)

1 느타리버섯은 가닥가닥 뜯고, 표고버섯은 밑동을 뗀 뒤 곱게 채 썰고, 양파와 당근, 피망도 곱게 채 썰어 준비합니다.

2 두부는 굵게 채 썰어 소금을 약간 뿌려 밑간합니다.

3 팬에 들기름(반 큰술)을 두르고 물기를 없앤 두부를 올려 센 불에서 노릇하게 구워냅니다.

4 팬에 들기름(1큰술)과 식용유를 두르고 중간 불에서 채 썬 양파, 당근, 다진 마늘을 볶다가 양파가 반 이상 익으면 피망과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간장, 다진 파를 넣어 볶아줍니다.

5 볼에 4의 버섯잡채와 구운 두부, 통깨를 넣어 고루 버무리고 넓은 대접에 보리밥과 함께 소복하게 담아냅니다.

이보은 요리연구가 & 자료 제공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요리연구가 겸 푸드스타일리스트 이보은님은 20여 년간 건강 요리를 알리는 데 힘써왔습니다. 현재 쿡피아쿠킹스튜디오 대표이며 저서로 <행복한 아침밥상>(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외 다수가 있습니다.

퀵 스탠드 & 락(Quik Stand & Lock)

● 이름은?

퀵 스탠드 & 락(Quik Stand & Lock). 자전거를 세우는 보조 용품인 킥스탠드라는 명칭에서 가져왔다. 자전거를 세움과 동시에 빠르게 잠근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친구와 함께 일주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편의점에 가거나 잠깐 휴식을 취할 때 자물쇠를 잠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귀찮고 번거로웠지만 한편으로 도난의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팀원들과 공모전 준비를 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고, 자전거 스탠드를 세울 때 추가적인 행동 없이도 자물쇠가 잠기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 가장 큰 장점은?

사용과 휴대가 간편하다. 기존의 자전거 자물쇠는 자전거에서 풀어서 자물쇠를 잠그고 다시 잠긴 것을 풀어서 자전거에 휴대하는 데 번거롭고 복잡함이 있다. 퀵 스탠드 & 락은 이러한 과정을 단지 자전거를 세우는 하나의 동작으로 만들어, 킥스탠드를 밟아 내리면 바퀴살을 가로질러 바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에 자전거를 세우면서 바로 자물쇠가 잠긴다. 사용자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따로 휴대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 아쉬운 점은?

이 제품을 만든 후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자전거를 그냥 들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이다. 그 점을 염두해서 퀵 스탠드 & 락을 기존 자물쇠처럼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고도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파트나 공원, 길가에 있는 자전거를 조사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자물쇠를 보관소에 연결하여 걸어두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걸지 않고 보관하거나 바퀴가 돌아가지 않도록 바퀴에만 걸어두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난의 경우에도 자물쇠가 걸린 바퀴만 두고 몸체를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 사람들은 자물쇠를 매번 걸지 않는다는 것과 도난하려는 사람은 자물쇠와 상관없이 훔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존 자물쇠와는 다른 새로운 컨셉을 제안하기 위해서라도 퀵 스탠드 & 락의 컨셉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 하고 싶은 말?

<마음수련>에 소개되어 기쁘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 디자인과 학생들의 작품이라 보완할 점도 많지만 이러한 과정들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하리라 생각한다.

만든 사람 김수환, 윤준호, 이도훈, 박효진(호서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김연아 선수의 복귀 경기를 보며

“정말 엄청나게 웅장한 공연이었습니다! 저 담담한 모습을 보십시오. 스포츠 선수가 1년 넘게 쉬고도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정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 혹독한 경쟁에서 벗어났다가 컴백해서 완벽하게 우승할 뿐 아니라, 올림픽 금메달을 땄던 자신을 능가하는 이런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 유니버설 스포츠 해설 위원

3월 17일, 전 세계의 이목은 피겨 올림픽 챔피언 김연아의 연기에 집중되었다. 프리 경기 출전 선수 24명 중 마지막으로 나온 김연아 선수는 ‘레 미제라블’의 아름다운 선율 자체가 되어 빙상 위를 날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 아이스링크를 가득 메운 9천 관중은 기립했고, 세계의 언론들은 ‘여왕이 돌아왔다’며 환호했다. 심판들은 수행, 안무, 음악 해석에 모두 6개의 만점을 주었고, 그것은 신채점제가 도입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올림픽 챔피언들 중 공백을 가진 뒤의 경쟁 대회에서 성공적으로 복귀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피겨계에 한 획을 그었다는 역대 챔피언들도 뚜렷한 동기 부여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탓인지 하나같이 실패로 끝났었다. 그래서 더욱 기대도 우려도 컸다. 김연아 선수 역시 오랫동안 고민하고 선택한 도전이었다. 선수로서의 그 길이 어떠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신중했다. 하지만 복귀를 결심한 후에는 그 어떤 고통마저도 기꺼이 감내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것처럼 담담했다.

2년 만의 세계선수권 복귀. 신혜숙 코치의 말에 의하면 김연아 선수는 인터뷰 등 피곤한 일정 때문에 만류를 해도 하루 7시간씩의 훈련을 매일 해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쇼트 프로그램 ‘뱀파이어의 키스’에서의 부당한 롱 에지 판정, 그리고 인색한 프로그램 구성 점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냈다. “피겨는 기록경기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면 된다”고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경기가 끝난 후 전 세계 피겨 팬들은 그녀의 스케이팅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해했고 각국의 해설 위원들은 ‘퀸 연아의 멘탈의 승리’라며 그녀의 정신력을 칭찬했다.

김연아 선수를 향한 찬사는 단순히 스케이트를 완벽히 탄다는 이유를 넘어선다. 피겨 100년 역사상 참가한 모든 대회의 시상대에 오른 유일한 선수, 신채점제 도입 후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4대륙피겨선수권대회,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모두 석권한 그랜드슬램의 선수. 그녀가 피겨 전문 빙상장 하나 없는 나라에서, 7살 꼬마 때부터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어떤 환경에서 피겨를 탔는지 안다면, 누구라도 그녀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김연아의 우승으로 우리나라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부문에서 출전권 3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대회 직후 CBC와의 인터뷰에서 김연아는 “꿈의 무대인 올림픽에 후배 선수들과 함께 뛸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으로 자신의 꿈은 이루었지만, 그녀를 다시 선수로 돌아오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에.

선수로 복귀한 후에도 그녀는 최고의 선수로서 해외의 멋진 빙상장에서 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의 한국 코치들에게로 돌아갔고, 후배들과 함께하는 한국에서의 훈련을 선택했다. 챔피언의 겸손함, 후배에 대한 배려,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 김연아. 그래서 김연아의 스케이팅은 더욱 아름다운가 보다.

김정수

사는 냄새가 난다, 라오스 루앙프라방

글&사진 이용한 시인, 여행가

루앙프라방에 가면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침에 먹는 빵은 맛있을 것이고, 어디서나 메콩강이 음악처럼 흐를 것이다. 가는 곳마다 고양이가 넘쳐날 것이고, 라오스의 미소가 떠다닐 것이다. 언제나 친절한 사람들이 ‘싸바이디!’ 하고 인사를 건넬 것이다. 걱정은 사라질 것이고, 한숨은 날아갈 것이다. 시간은 코코넛 열매처럼 야물게 익어갈 것이다. 마음은 한낮의 스콜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을 것이다. 고요함은 길가의 꽃 피는 소리를 들려줄 것이며, 저녁에는 마시고 싶은 비어라오를 마시게 될 것이다. 루앙프라방에서 가능한 것들은 루앙프라방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줘.

루앙프라방 싹카린 거리에 위치한 왓농 사원은 라오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원이다. 아침 공양이 끝나고 나면 사원에서는 하루 일과처럼 청소를 하는데, 8명의 어린 승려들이 법당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그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스님 한 분은 법당 바깥의 입구와 계단을 열심히 혼자서 빗자루질하고 있었고, 나머지 7명은 법당 안에서 제멋대로 눕거나 앉아서 청소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아예 한 스님은 천장까지 닿는 먼지떨이를 들고 누워 장난을 치고 계셨다. 이 순간만큼은 승려가 아니라 그저 놀고 싶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염불 대신 농담을 하고 불공 대신 장난을 치는 소년들. 청소가 아니라 청소 놀이를 하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부처님도 그저 흐뭇해서 미소가 번지실 거다. 그나저나 저렇게 놀기만 하면 이 넓은 법당 청소는 언제 다 하시려나.

우기로 접어든 여름 라오스에는 거의 매일같이 비가 온다. 하루에도 서너 차례 비가 내리다 그치고, 잠깐 해가 났다가 다시 비가 내린다. 우기의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잊지 못할 풍경 중 하나는 칸강의 고기잡이 풍경이다. 반도처럼 튀어나온 지형의 루앙프라방에는 거대한 메콩강이 북서쪽으로 흘러가고 또 하나의 강인 칸강이 동쪽에서 흘러와 메콩강으로 빠진다. 물살이 거칠고 폭이 넓은 메콩강에 비해 칸강은 비교적 수면이 잔잔하고 폭이 좁아서 루앙프라방의 원주민들은 주로 메콩강보다는 칸강에서 고기잡이를 한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물고기들이 강가로 나오는 습성이 있어 원주민들은 비가 오거나 비가 그친 직후에 고기잡이에 나선다. 비가 오는 날 칸강을 따라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고기 잡는 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이건 정말 그 자체로 환상적인 그림을 연출한다. 황토 물빛 위에서 그물을 던지고 통발을 건져 올리는 풍경! 하늘색 비옷을 입은 채 쪽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떠나는 풍경! 족대를 들고 물가에서 물고기를 모는 아이들! 그런 풍경을 멀거니 앉아 바라보는 소녀들! 고기 모는 소리, 그물을 던져 허탕을 치고도 기분 좋게 웃는 소리, 통발에 가득한 고기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소리, 칸강에서는 진실로, 사는 소리가 들리고 사는 냄새가 난다.

 

이용한님은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순수한 풍경과 사람, 고양이를 담아온 사진가이기도 한 님은 시집 <안녕, 후두둑씨>,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고양이 시리즈 <명랑하라 고양이> 등을 펴냈으며, 여행 에세이로는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등 다수가 있습니다.

한씨네 삼 남매

아버지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한치규,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큰아버지, 2009년 중국 장백에서 잠시 아버지와 상봉했었던 북한에 사는 고모, 할머니(작고), 할아버지(작고), 작은아버지(작고). 아버지는 60년 만에 만난 고모에게서 받은 이 사진을 보며 이산의 아픔을 달래셨다.

사진 한치규 & 글 한승원

어린 시절, 아버지는 주말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가족사진을 찍어 주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행복한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지난 50여 년간의 기록.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더 늦기 전에 보답해드리고 싶어 지난해 5월 어버이날을 기념해 <한씨네 삼 남매>란 이름으로 사진집을 내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헌사였다.

▲ 우리 언니 한정원. 강원 춘천, 1962. 5.

▶ 요강에 앉은 내 동생. 서울 내수동, 1967. 8.

▼ 최고의 별미 짜장면. 우리 것을 먼저

비벼주시고 사진을 찍으시던 아빠.

서울 내수동, 1969. 4.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 나, 남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이다. 실향민인 아버지는 가족이 당신 삶의 전부였고, 일과 가족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릴 적 흥남에 있는 일본인 중학교에 다녔던 아버지는 학교에 가기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 30분에 떠나는 화물 열차의 기관사 옆자리에 타고 50리를 달렸다. 그리고 중간 역에 내려서 다시 20분을 뛰어야만 잡아탈 수 있는 연결 기차를 타고 70리를 더 달렸다. 그렇게 모두 120리를 다니며 통학하면서도 항상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단 하나의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돈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으로 인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진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셨다. 등이 휘어지도록 남매가 동시에 덥석 올라타도 웃음 짓고, 무더운 여름이면 마당의 하수구를 막아 수영장을 만들어주셨다.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우애 있게 자랄 수 있었다.

▲ “이놈들아, 아빠 허리 휜다. 허허허.”

서울 경복궁, 1967. 9.

아버지는 당신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의 아이들도 따뜻한 눈길로 담아내셨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상, 풍경 등을 사진으로 기록하셨고, 이 모든 것들은 아버지 최고의 유산이 되었다. 몇 년 전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신 후 아버지도 많이 쇠약해지시고 연로해지셨다. 가끔 모시고 외출을 하면 어린아이처럼 너무나 좋아하신다.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사진집을 선물해 드렸을 때, 너무나 가슴 벅차해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 우리 집 앞마당 수영장. 서울 내수동, 1971. 7.

 

▼ 이제 저도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어요. 한씨네 삼 남매. 왼쪽부터 막내아들 한승혁, 둘째딸 한승원, 첫째딸 한정원. 서울 내수동, 1976. 4.

한치규님은 1929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월남했으며 이후 군에 입대해 1979년 보안사 기조처장(대령)을 마지막으로 예편하기까지 30여 년간 군 생활을 하였습니다. 1959년 카메라를 처음 장만한 후 독학으로 사진을 익혔으며, 사진집 <한씨네 삼 남매>(눈빛)는 1960~1970년대까지 한 가장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이웃 아이들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담긴 사진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사진 제공 눈빛

엄마를 잊는 법

 

시현이는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반도 못 그렸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가고, 숙제 일기 안 해온 친구들도 남아서 숙제 일기를 하고 벌 청소까지 다 마쳤는데, 시현이는 아직도 수채화 작업 중이다. 이제 교실에는 우리 둘뿐. 녀석은 속도를 좀 내려는지 양손에 붓 하나씩 들고 채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총을 의식한 동작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더 재미있게 그림 그릴 수 있다는 수작 같았다.

“시현아, 몇 시쯤 되면 완성하겠냐?” “밤 12시쯤요.”

녀석이 씨익 웃으며 농담을 하였다.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짜로 해볼 참이냐?”고 으르릉거렸다. 그때 마침 옆 반 학생이 비닐봉지를 들고 오더니, 아이스콘 하나를 꺼내 놓고 갔다. 마음씨 고운 옆 반 여선생님이 보낸 선물이다. 사람은 둘인데 아이스콘은 하나. 나는 시치미를 딱 떼고 천천히 아이스콘 아랫부분을 돌리며 종이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원뿔형 아이스콘을 트로피처럼 높이 쳐들고 입맛을 다시며 이제 곧 맛있게 잡수실 거라는 예고를 하였다. “음, 엄청시리 맛있겠군!”

크게 한입 베어 무는 시늉을 하다가 아이의 곁눈질과 마주쳤다. 이번에도 실눈을 뜨고 씨익 웃는다. “뭐 설마 혼자 다 드시겠어요” 하는 표정이다. 여우같은 놈이다. 할 수 없이 손짓을 하였다. 시현이가 붓 두 개를 놓고 쪼르르 앞으로 나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아이스크림 가운데 부분에 선을 그었다.

“요만큼 너 먹고, 밑에 부분은 내 거다. 선 넘으면 땅콩 백 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손에는 붓 다른 손에는 아이스콘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 아이는 마치 칼로 반듯하게 자른 것처럼 아까 정해준 선까지 아이스콘을 먹고 반납하였다. 그 후 수채화 그리는 속도가 급상승하였다. 마침내 아이들이 하교한 지 한 시간 십 분 후, 작품을 완성한 시현이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갔다.

나는 우리 반 모태 지각생 시현이가 참 좋다. 지난가을, 시현이 엄마가 수술을 받기 위해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가셨다. 아이 엄마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수술과 재활 치료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쯤 지나야 엄마가 돌아오시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모르겠다 말했다. 나는 그런 시현이 손을 잡고 위로랍시고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하였다.

“엄마 없이 얼마 정도 참을 수 있어?” 대체 열두 살 아이가 엄마 없이 지낼 수 있는 기간을 어떻게 가늠한단 말인가. 그런데 의외로 시현이 대답은 명쾌했다. “한 달요!” “우와! 대단해! 선생님은 어릴 때 일주일도 안 돼서 징징 울었는데… 넌 한 달씩이나? 대체 비결이 뭔데?” 정말 궁금했다. 솔직히 나는 그 순간 어느덧 꼬부랑 할머니가 된 내 어머니가 곁에 없는 어느 세월을 떠올렸다. 시현이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싱긋 웃으며 답해 주었다.

“재미있게 놀면 돼요.” “아하!”

맞다. 엄마가 없더라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엄마도 걱정을 덜 하신다. 열두 살 시현이가 내게 맑은 깨달음을 주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감응의 건축’ 건축가 정기용

정리 김혜진

우리는 걷다 보면 무수한 건축물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 건물들은, 우리가 사는 집들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요? 근사한 건물, 가격이 높은 집, 행복을 꿈꾸는 집….

 

건축가 고 정기용. 그를 알게 된 건 지난해 개봉한 <말하는 건축가>란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멋진 건물’이기보다 ‘사람’의 삶에 가까이 다가간 그의 건축은 참 겸손해 보였습니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일방적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던 그는 자연, 사람과의 소통을 통한 건축을 꿈꿔 왔습니다. 그의 작업들은 대부분 예산은 적지만 손이 많이 가는 지역의 공공건축물입니다. 대통령 사저를 건축한 건축가이면서도 자신은 집 한 채 없이 소박하게 살다간 건축가 정기용. 그가 생전에 말해온 우리 건축과 삶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좋은 집이란 거주하는 사람의 삶의 흔적이 서서히 누적되어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나오는 집이다.’

<사람 건축 도시> 중에서

무주 등나무운동장 © 김재경

저는 두 살 때부터 15년간 을지로에 있는 한옥에 살았습니다. 프랑스에서 건축 수업 할 때 그 집을 그린 적이 있는데 모든 게 정교하게 떠올라서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은 사라지고 높은 빌딩이 들어섰지만, 그 기억이 나를 지금 살고 있는 명륜동까지 데려옵니다. 외갓집 툇마루에서 느낀 농촌의 풍경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에요. 맑은 금강이 흐르고 강을 에워싼 높고 낮은 산들. 봄날 멀리 상여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면 어린 나이에도 “여기가 천국인데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생각할 정도였지요. 하지만 1970년대 전국에서 새마을운동이 진행되면서 마을 길은 포장되고 초가지붕은 없어지고… 내 고향도 사라졌습니다. 충격이었죠. 그렇게 온 국토가 경제개발로 뒤엎어지면서 집은 한 지붕 아래 가족이 오순도순 살아가는 곳이 아닌 사고팔기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 돼 버렸습니다. 똑같이 찍어낸 듯한 아파트와 상가 건물엔 소통의 흔적이 없습니다. 도시도 그런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건축가들은 ‘있어온 것’으로부터 어떻게 새롭게 건축할지 고민하고, 기반을 다져야 합니다. 그것은 이 땅에 대한 예의를 갖추는 일이기도 해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좋은 건축, 좋은 장소에 대한 체험과 교감이기 때문입니다.

‘땅, 근원적 질문, 거기에 더해 시대적 시류, 거기다 또 더하면 건축주, 사용자들의 생각들을 가급적 존중하려고 하죠. 그 네 가지가 결합되는 방식이 ‘감응’입니다.’

<건축 작품집(1986~2010)> 중에서

건축은 단순히 건물만 짓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삶을 다루는 일’입니다. 건축가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어떻게 보살피고 반영할지 고민하는 사람이죠. 특히 공공건축물이 그렇습니다. 쓸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때문에 무엇보다 건축가는 세상과 사람에 감응해야 합니다. 건축가로서 가장 가슴 두근거릴 때는 처음 땅을 보러갈 때입니다. 과연 어떤 땅일까? 근원적인 질문과 함께 말입니다. ‘면사무소란 무엇인가?’ ‘어린이 도서관이란 무엇인가?’ 그 답을 찾기 위해 소통하는 과정은 제게 커다란 상상력과 기쁨을 안겨줍니다.

왼쪽부터 <동숭동 무애빌딩> 단면도

<무주 안성면 주민자치센터> 배치도

<무주 안성면 덕유 개발계획> 마스터플랜

자료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건축가는 설계자이기 전에 세상에 대한 번역가이고 사회를 제안하는 사람이다. 그 해법은 이 땅과 사람에게 있다.’
<감응의 건축> 중에서

무주마을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입니다. 무주 안성면사무소를 설계하기 위해 제일 먼저 한 일은 주민들을 만나는 거였어요. 필요한 공간을 물으니 대부분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목욕탕을 지어달라는 겁니다. 목욕할 곳이 마땅치 않아 봉고차까지 빌려 대전까지 목욕하러 간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지는 거 같았어요. 우리가 농촌을 몰라도 너무 몰랐구나…. 그렇게 해서 최초로 목욕탕이 결합된 면사무소가 들어서게 됩니다. 무주 공설운동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따가운 햇볕 때문에 주민 대다수가 행사에 참여하지 않은 걸 알게 된 군수는 운동장 둘레에 등나무 240그루를 심었지요. 우리는 거기에 등나무가 타고 오를 수 있는 철 구조물을 설계했습니다. 이제 그곳은 온갖 행사가 열리는 주민들의 친숙한 마당이자 무주의 명소가 되었지요. 당시 무주에서 배운 중요한 사실은 건축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과 식물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지, 건축가가 처음부터 완성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시간과 사람과 식물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건축은 생명력 있는 건축으로 전환됩니다.

© 김재경

기적의 도서관의 경우 동네 도서관을 맹렬하게 운영한 아줌마들한테 배운 것을 공간으로 번역한 겁니다. 출입구 중간엔 세면대를 두어 아이들이 손부터 씻고 책 읽게 하기, 바닥은 온돌로 해서 내 집처럼 편안하게 읽게 하기, 엄마들을 위한 수유실, ‘아빠랑 아기랑’ 책을 보는 방 등이 다 그렇게 함께 고민하며 나왔지요. 덕분에 일요일엔 엄마 대신 아빠가 아이와 도서관에 방문해 책을 읽어주기도 합니다. 가족 관계가 새롭게 거듭나는 거죠.

‘어느 누구도 자기 집만 오려내서 볼 수는 없다. 모든 땅은 연결되어 있고, 강과 산과 맞닿아 있다. 그래서 모든 풍경은 아무리 작아도 부분이면서 동시에 전체이다.’

<서울 이야기> 중에서

때론 건축가는 위험한 직업이기도 합니다. 어떤 태도와 관점에 따라 이웃과 소통할 수 있고 담을 칠 수도 있고 사회와 결별할 수도 있고 풍요롭게 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제 건축의 핵심은 한마디로 현장성입니다. 현장의 역사, 지형, 사람…. 모두가 함께 꿈꾸고 더불어 사는 공간을 지어나가는 것. 그게 제가 꿈꾸는 건축입니다. 이렇게 모두의 힘이 모여 전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등나무운동장, 한국형 어린이 도서관 등이 나오게 되었고, 이 기적 같은 일에 동참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나무도 고맙고, 바람도 고맙고, 하늘도 고맙고, 모두 모두 고맙습니다.

 

건축가 정기용(1945~2011)님은 서울대 미술대학 및 동대학원 공예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파리 장식미술학교 실내건축과, 프랑스 파리 제6대학 건축과를 졸업했으며 프랑스 정부 공인 건축사 자격을 취득하였습니다. 1986년 기용건축을 설립, 주요 작품으로는 계원조형예술대학, 동숭동 무애빌딩, 무주 공공 프로젝트(1996~2006), 기적의 도서관(순천, 정읍을 포함한 총 6곳)이 있으며 저서로는 <서울 이야기> <사람 건축 도시> <감응의 건축> 등과 영화 <말하는 건축가>가 있습니다.

정기용 건축을 돌아볼 수 있는 <그림일기:정기용 건축아카이브> 전시회가 2013년 9월 22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무료 관람)에서 열립니다.

개그맨 이문재, ‘나쁜 사람’의 착한 경찰

인터뷰 당일 여의도 KBS 앞,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한다는 이문재(32)씨가 여느 때처럼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했다. 수줍어하며 인사를 건네는 그는, TV를 통해서도 느껴지듯 참 착해 보였다. 현재 개그콘서트 ‘나쁜 사람’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그는 KBS 공채 26기로 3년 차 신인 개그맨이다. 그 스스로 “인생의 시작”이라 말하는 이 ‘개콘’ 무대에 서기까지 5년 동안 13번의 개그맨 시험에 탈락하는 등 힘든 20대를 보냈다는 이문재씨.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더없이 소중한 ‘웃음’의 시간으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한다는 그를 만나보았다.

요즘 일명 ‘웃픈(웃기면서 슬픈)’ 개그 ‘나쁜 사람’의 인기가 한창이다. 등장인물은 범인 한 명과 경찰 세 명. 취조를 당하는 범인과 경찰들의 묻고 답하기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은 범인의 구구절절한 사연에 빠져들며 함께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범인 : 아들 돌 반지가 필요했어요. 사진만 빨리 찍고 갖다 놓으려고 했는데….

경찰 : 동정심 유발하지 마. 직업도 있는 놈이 돌 반지 하나 못 산다는 게 말이 돼?

범인 : 집사람 병원비로 다 썼어요. (슬픈 음악이 흐르고)

“나는 피도 눈물도 아무 감정도 없는 놈”이라며 등장해 야심 차게 범인을 심문하던 형사 이문재는 결국 눈물을 흘리며 “불쌍해서 어떡하니, 풀어주자” 말한다. 그러다 이내 자기 대신 취조를 해대는 선배 경찰에게 “나쁜 사람~ 나쁜 사람~ 왜 그랬니~ 왜~” 하고 울부짖는 이문재씨의 일품 울음 연기를 보노라면, 범인 사연에 뭉클해지다가도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것이다.

코너에 맞는 음악을 찾기 위해 2주 동안 1,000곡이 넘는 OST를 듣는 등 많은 노력을 거쳐 만들어졌다는 이 코너는, 2월 초 방송되자마자 시청자들로부터 ‘나 왜 울면서 웃고 있지?’ ‘슬픔과 웃음이 함께하는 나쁜 사람 최고!’ 등의 평을 들으며 한순간 인기 코너가 되었다.

요즘 인기를 실감하겠어요. 처음 이 코너는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개그콘서트에 김준호 선배가 왕으로 나온 감수성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거기서 권장군이 “전하, 전쟁에 나갈 병사가 없습니다” 하자 왕이 “그럼 니 아들이라도 보내야 할 거 아니야” 하는데, 슬픈 음악이 깔리며 권장군이 “제 아들은 이제 돌 지났습니다” 말하는데 너무 웃긴 거예요. 슬픈데 웃길 수 있을까? 아예 이 사람이 더 힘들어지면 어떨까? ‘비극의 희극화’를 생각하면서 짜기 시작했죠. 이렇게까지 재밌어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감사해요.

범인이 진실을 말하는 건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하는 건지 궁금할 때가 있어요.

저희가 짜는 이야기에서는 범인은 죄가 없어요. 입양 간 동생 생일이어서 선물을 주려고 잠깐 만났는데, 헤어지기 싫어하는 동생 때문에 길게 데리고 있게 된 것. 양부모 입장에서는 납치라고 오해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는 안아줄 수 있는 죄인 거죠. 그런 식으로 정말 안 좋은 상황들이 이어져서 죄를 지은 것처럼 보이는데, 오히려 오해하는 우리들, 어떻게든 널 집어넣겠어! 하는 우리들이 진짜 나쁜 거 아닌가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웃음도 있고 감동도 있고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해 다시금 바라보게 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 말씀들도 해주시는데, 사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고민도 많았어요. 우리는 웃음을 주기 위해 짠 건데, 실제 그런 사연을 가지신 분들이 계신 거예요. ‘알고 계십니까, 그게 저의 상황입니다. 이런 게 웃음이 될 수 있다는 게 씁쓸하네요.’ 게시판이나 메일로 그런 글을 보내주시는데, 너무 죄송하고 진짜 난 나쁜 사람인가 싶은 게 괴롭더라고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거 같은 허구적인 상황을 만들려고 해요.

일주일에 한 번, 4~5분의 웃음을 주기 위해 개그콘서트 개그맨들은 누구보다 분주한 일상을 보낸다. 끊임없이 새 코너를 준비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을 때는 밤샘 연습을 하기도 한다. 개그맨들에게 꿈의 무대라 불리는 개그콘서트. 군 제대 후 20대의 열정을 모두 쏟아부은 5년간의 개그맨 지망생 시절, 각종 방송사 시험에 도전하지만 13번의 탈락 후 서른 살에 치른 시험에서의 합격. 그렇게 힘겨운 과정을 거쳐 서게 된 무대이기에 서른두 살의 신인 개그맨 이문재는, 더더욱 치열한 준비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개그맨 공채 시험이 항상 2월에서 3월 사이에 있어요. 그래서 저는 26살부터 30살까지 연말 연초 때 놀아본 적이 없어요. 항상 작은 지하 공연장에서 공연 연습을 하며 보냈죠. 가장 즐거워야 할 20대를 그렇게 보낸 게 아쉬울 때도 있지만, 그런 시간들이 있었기에 지금이 있을 수 있었고, 또 이 순간을 더 열심히 살 수 있는 거 같아요. 지금도 이 일을 위해 포기하는 게 많아요. 노는 거, 술 먹는 거, 늦잠 자는 거…. 하지만 하나를 얻고 싶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거 같아요.”

제일 먼저 사무실에 나와 준비를 하고,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찾고,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출퇴근길에도 연습을 하고…. 그렇게 노력한 결과 ‘그땐 그랬지’의 이름 없는 쫄쫄이맨을 거쳐 2012년 2월에는 신인으로서는 쉽지 않게 아이디어부터 모든 기획을 했던 ‘있기 없기’ 코너로 ‘있기 없기’라는 유행어를 배출하기도 했다. 스스로 해냈다는 자부심도 느꼈던 순간이었다.

2011년 KBS 26기 공채 개그맨이 된 이후로, 개그콘서트 그땐 그랬지, 있기 없기, 어르신, 만득이 등 여러 코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진 제공 KBS

계속 시험에 떨어지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 같은데, 끝까지 도전하게 만든 원동력이 있나요?

음… 자존심이랄까, 저 스스로한테 지고 싶지 않았거든요. 사실 주변에서 반대도 많았어요. 부모님도 서른이 다 되도록 개그맨 지망생 한다고 있으니까 걱정하시고, 친구들도 정신 차리라고 하고. 제일 힘들었을 때는 스물아홉 살 되는 해 시험에 떨어졌을 때예요. 나는 이것밖에 안 되나, 그때 절망감과 암담함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더라고요. 내년이면 서른 살인데, 꿈 찾아간다고 여태까지 해놓은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무서웠어요. 부산에 있는 친구에게 가서 제가 세상에서 먹을 수 있는 술은 다 먹었죠. 그리고 다시 돌아와서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마음으로 죽어라 했는데, 붙은 거죠.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죠. 지금은 부모님도 어디 가면 내 아들이 이문재다 그러세요.(웃음) 일단 한 번은 효도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죠.

개그맨으로서 가장 보람을 느낀 적이 있다면요?

준비한 걸 딱 보여주는 순간 관객들이 막 웃어주실 때, 그때가 가장 기쁘고 보람 있죠. 제가 지망생 시절에 있었던 일인데요. ‘옹알스’라고, 세계에 나가서 한국의 코미디를 알리고 있는 팀인데, 옹알스쇼의 사전 MC를 할 때였어요. 그날 오프닝을 하다가 오늘이 특별한 날인 분께 선물 드릴게요, 손 한번 들어보세요, 했더니, 어저께 생일이었어요 등등 여러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떤 여자분이 손을 들고 “어머니 항암 치료 끝나고 웃겨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하시는 거예요. 그 순간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그 모녀께 선물을 드렸죠. 비록 장난 선물이었지만. 그리고 선배들이 공연할 때 뒤에서 계속 어머니하고 딸을 보았어요. 계속 즐겁게 웃으시는데 병도 다 나은 거 같더라고요. 그때만큼은 비록 지금의 현실은 어둡지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일 한다, 제일 멋진 남자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웃음은 사람에게 활력을 주니까요. 그런 건강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착한 세상이잖아요.(웃음)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분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

무엇보다 절박해야 할 거 같아요. 장수생이라는 말이 있잖아요. 떨어져? 그러면 내년에 보지. 이번에도 떨어져? 그러면 다른 방송국 보지. 저도 어느 순간 떨어지는 것에 익숙해지더라고요. 근데 스물아홉 살 때 정신이 번쩍 드는 거예요. 절박함이 끝까지 차니까 그때부터 쉬지 않았죠. 계속 공연을 짜고, 무대에 올려보고, 안 웃으면 바꾸고 또 바꾸고. 밤새 연습하다가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면 또 짜고. 그렇게 해서 붙게 된 거죠. 돌아보면 뭐 이런저런 조건 때문에 될 수 있었는데 안 됐어, 이런 건 솔직히 변명이고 핑계였어요. 제가 그만큼 안 했던 거였더라고요. 절박한 마음으로 얻고자 하면 다 되니까, 더욱 힘을 내셨으면 좋겠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던 이문재씨는 고등학교 때는 합기도 선수로 전국 대회에서 우승을 할 정도로 실력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리고 군 제대 후 권투로 종목을 바꾸고 나서는, 지금은 아예 권투 선수 출신의 선배와 함께 체육관을 차려 사람들을 가르치고 있다. 집, 체육관, 개그콘서트 사무실. 이렇게 삼각 트라이앵글의 구도가 자신 삶의 대부분이라는 이문재씨. “저는 제가 하는 일 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편이거든요. 좀 고리타분한가요?” 지금 하는 일밖에 생각할 줄 모른다는 그의 모습이 참 순박해 보였다.

개그맨들마다 다 개성이 있잖아요, 개그맨 이문재의 가장 큰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아, 그런 건 정말 전혀 없어요.(웃음) 사실 저는 그렇게 끼는 없거든요. 사석에서는 잘 못 웃겨요.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고, 아직도 사람들 앞에 나가면 부끄럽고 쑥스럽고 그래요. 뒤에서 잘 준비해서 준비한 것만 하는 스타일이랄까. 그러니까 저는 죽어라 노력하고 연습하는 것밖에 없어요. 매번 코너가 끝날 때마다 항상 멤버들과 통화를 해요. 여기서 이랬으면 좋지 않았을까, 서로 조언을 해주면서 고쳐나가는 거죠.

개그콘서트 내에서도 서로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고 들었어요. 새로운 코너를 준비해가도 쉽게 통과되기도 어렵고, 녹화하고도 편집이 된다거나. 그럴 때 실망감도 클 거 같아요.

‘어르신’에서 ‘나쁜 사람’ 하기까지 새로운 코너 10개 정도를 피디님과 작가님께 보여드렸죠. 근데 다 별로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웃음) 밤새 의상이며, 음악이며 준비해서 갔는데 단번에 아니라는 소릴 들으면 힘들긴 하죠. 근데 그런 걸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야 해요. 자기와의 싸움인데 지면 못 하는 거죠. 제가 만날 후배들한테 하는 말이, 물론 후배라고는 한 기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웃기는 재미가 아니라, 아이디어 짜는 재미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말합니다. 그리고 운동한 것이 도움이 돼요. 운동도 정말 힘들 때부터가 운동 시작이거든요. 조깅할 때도 땀 떨어지면 그때부터 내 몸의 칼로리를 쓰는 거예요. 그래서 힘들다 느낄 때 스스로에게 말해요. 지금부터 시작이다, 힘들지만 난 할 수 있다, 다운당해도 난 일어난다.(웃음)

감옥에 갇힌 죄수와 여자 친구 이야기를 다룬 ‘있기 없기’, ‘나쁜 사람’ 등 어떻게 보면 좀 무거운 소재로 개그를 해왔는데요, 앞으로 하고 싶은 개그 스타일이 있다면요?

앞으로는 밝은 개그를 하고 싶어요. 이문재 코너를 보면 마음이 따듯해진다, 그런 느낌을 줄 수 있는 개그. 나쁜 사람이 ‘비극의 희극화’라면, 지금은 ‘희극의 희극화’ 기쁨에 기쁨을 더해주는 코너를 준비하고 있어요. 잘되면 가을쯤에 보실 수 있을 거예요.(웃음)

“어떤 일을 하느냐, 얼마나 버느냐보다, 무슨 일이든 즐겁게 재밌게 하면서,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큰 행복인 거 같아요.”

허황한 꿈 꾸지 않고, 한결같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최선을 다하며 인생의 행복을 만들어가는 정직한 사람, 이문재. ‘나쁜 사람’에서 이문재씨가 맡았던 형사처럼, 그를 대상으로 파고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착한 사람~ 웃긴 사람~ 왜~ 왜~” 하고 외치게 된다.

그가 앞으로 만들어 갈 기쁨에 기쁨을 더해줄 ‘밝은 개그’란 무엇일까. ‘웃픈’을 넘어서는 ‘웃웃(웃기디웃긴)’ 개그를 들고 나타날 그의 새로운 모습에 벌써부터 미소가 지어진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미움도 원망도 놓아버리자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들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용서할까 합니다

이한라 27세. 직장인. 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지난 1월, 나는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고등학교 때 대학에 들어가면 꼭 하겠노라고 공언했던 그 유럽 배낭여행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떠났다. 그리고 45일간의 여행 일정에 프랑스 니스와 모나코를 넣었다. 이유는 지금 생각해도 확실하지 않다. 아마도 그저 탁 트인 산호빛 에메랄드 지중해를 보면서 ‘힐링’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파리에서 떼제베를 타고 리옹을 거쳐 프랑스 최남단에 위치한 니스에 도착했다. 눈이 펑펑 내리던 파리와는 달리, 하늘하늘 흔들리는 야자수, 따스한 바닷바람이 나를 맞아주었다. 나는 무작정 해안으로 향했다. 아래로 펼쳐진 모래사장과 태어나서 처음 보는 에메랄드빛 바다색. 끝도 없이 펼쳐진 바닷물의 저 끝에는 수평선이 아스라이 그어져 있고, 지는 해는 바다에 그 색을 입히고 있었다. 밀려오는 파도가 하얗게 모래사장에서 부서지는 그 탁 트인 광경을 보는 순간 나는 눈물이 왈칵하고 쏟아졌다.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쉼 없이 눈물이 흘러내려 한참을 주저앉아 그렇게 울었다.

대학 시절, 나는 잠시 의사의 꿈을 꿨었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며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내가 선택한 길을 물심양면으로 지지해주셨다. 어머니께서는 매일 나에게 전화하셔서, 힘들지는 않는지, 공부는 잘돼가는지, 잘 먹고 잘 자는지를 물으셨다. 그리고 응원과 격려도 잊지 않으셨다.

“우리 딸은 할 수 있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 마.”

그러나 몇 달 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 길이 나에게는 맞지 않는 길임을 확신했다. 책상에 앉아는 있는데 집중할 수 없었고 계속 나태해져만 갔다. 부모님께 이 공부를 그만두고 싶다고 말씀드려야 했지만,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오히려 공부가 재미있는 척, 할 만한 척, 부모님을 속였다. 결국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시험 날짜는 코앞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부모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렸다. 못하겠다고, 시험을 포기하겠다고 말이다.

부모님의 실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무척이나 아쉬워하셨고 또 안타까워하셨다.

물론 내 의사를 존중하여 주셨지만 부모님께 너무나 죄송했다. 나는 그저 부모님의 기대를 거스르지 않는 착한 딸로 내비치고 싶어, 부모님을 속여온 것이 아닌가. 그리고 부모님께서 나에게 실망하셨던 만큼, 나는 나 자신에게 실망했고 분노했다. 의사가 되기 위한 공부가 나와 맞지 않음을 알고도, 그저 공부하고 있는 것이 편하고, 스스로의 틀을 깨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용기가 없어 주저했던 내 자신은 그야말로 소위 말하는 ‘루저’였다.

그 후, 회사 생활을 하고 시간도 꽤 흘러 이제 그 일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마음속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기에 그 일을 상기시키는 것조차 거부감이 들어 몸서리쳤다. 나는 그 기억 속의 루저였던 나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죄책감과 분노가 탁 트인 니스 바다를 보자 내 속에서 흘러나왔다. 흐르고 넘쳐, 나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나는 그렇게 한참을 나 자신을 놓아버렸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프랑스 어느 한 도시에서 나는 비로소 나를 용서하기 시작했다. 내 자신에 대한 분노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도 바닷바람에 실어 보냈다. 주위 사람 누가 의사가 되었다고만 해도 움찔했던 나의 옹졸한 마음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의 잔여로 괜히 그런 것들을 의식하지 않는 척했던 나의 위선도 다 놓아버렸다. 나는 개운해졌다.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부모님께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그리고 많이 감사하다고 말이다.

유의랑 작.

<휴식> 170×90cm

Oil on canvas / 1988

나는 ‘왕따’가 아니었던 게 아닐까

백혜명 31세. 직장인.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거주

어렸을 때부터 나는 대체적으로 안전한 길을 택하는 아이였다. 교우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되도록이면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의견을 주장하기보다 친구들의 의견을 들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학업 경쟁이 치열해졌고, 아이들은 각각 파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친구를 사귀기가 어려웠지만, 나는 괜히 그들 무리에 끼었다가 엄마한테 안 좋은 잔소리를 들을까 봐, 어느 그룹에도 속하지 않고 공부만 파고들었다.

반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가 돼 버렸고, 공부하다가 궁금한 게 있으면 곧잘 와서 묻곤 했지만 친구로서 다가오진 않았다. 그런 친구들을 보며, 나 역시 마음의 문이 서서히 닫히면서 간혹 친구들이 궁금한 것을 질문해도 잘 답변해 주지 않았다. 그런 게 화근이었는지 친구들은 불만을 갖고 뒤에서 수군거리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설마 내가 지금 왕따를 당하고 있는 건가 했는데, 정말로 나를 친구로 생각하는 애들이 없었다! 아예 두 명의 친구는 대놓고 나를 놀리기 시작했다. 충격이었다! 학교를 다니는 내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다. 공부하라고 잔소리하던 엄마도, 나를 못살게 구는 친구들도…. 그렇게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왕따 상황은 일단락이 되었다.

그것은 그때뿐이었다고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을 거라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그 경험은 트라우마로 자리 잡았다. 누군가 나를 또 왕따시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 무서웠고, 우연히 그 친구들을 마주치면 어떡하나 두려웠다. 그럴 때마다 내가 그 친구들보다 공부를 더 잘하니까 질투해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 그 아이들이 더 불쌍한 거라고, 그냥 훌훌 털고 살자며 나를 다독였고, 그게 용서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진짜로 나를 괴롭히던 친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이미 마음에서 용서했기에 그 친구를 만나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정말 생각에 불과했다.

그 친구를 보는 순간 원망과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그 친구는 나와 정반대였다.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고 진심으로 반갑다고 했다. 솔직히 그 순간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용서하기는커녕, 미움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건 나였다.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아이는 내게 원수였다. 친구는 계속 연락하며 지내자고 말했지만,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일 자신이 없었다. 그 후 많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친구가 잘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었을까? 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 미스터리한 상황이 궁금했고 알고 싶었다.

유의랑 작.

<결> 230×150cm

Oil on canvas / 2006

그즈음 마음수련을 하게 된 나는 내 마음에 앙금으로 남아 있는 그 사건을 떠올리며 버려보았다. 처음에는 그때의 일만 떠올려도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버리고 버리고 또 버리고 버리면서 나는 점점, ‘나’로부터 벗어나 중학교 시절의 ‘나와 친구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 친구는 두루두루 교우 관계가 좋은 아이였다. 그 친구는 혼자 외롭게 있는 내가 안타까워 그 또래의 방식으로 나를 주목받게 해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 친구에게는 그러한 놀림이 친구들 사이의 흔한 장난 같은 것이었는데, 나만 내 열등감에 사로잡혀 나를 왕따시킨 거라고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철석같이 그 친구가 잘못했고, 나는 불쌍한 피해자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착하고 바르다며 살아왔지만, 그게 얼마나 오만했던 건지도 깨달을 수 있었다. 실제 행동으로 하지 않았을 뿐 얼마나 많은 이들을 마음속으로 ‘왕따’시키고, 미워하며 살아왔던가. 그렇지만 언제나 세상은 똑같이 햇살을 비춰주고, 숨 쉬게 해주며 모든 것을 품어 안고 늘 용서해주고 있지 않았나. 용서의 가장 큰 수혜자는 바로 내 자신이었다. 내가 용서받았다고 생각한 순간 세상이 평화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세상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있었다. 용서란 이 세상이 내게 해준 것처럼, 있는 그대로 상대를 받아주는 거라는 걸 배웠다. 부끄러웠다.

나는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용서를 구해야 할 것은 바로 나였다. 그렇게 세상을 향해 진심 어린 참회를 하고 나서야, 나는 진정으로 그 친구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었다. 내 마음에도 완전한 평화가 찾아왔다.

50년 넘게 부재중인 어머니를 용서하며

홍경석 55세. 직장인. 대전시 동구 성남동

딸의 대학원 졸업식이 있던 날, 모처럼 강추위가 멀찌감치 나들이를 간 날이었습니다. 그날 졸업식에서 딸은 석사 학위를 받았지요. 지난 2005년 대학생 새내기가 되어 상경한 지 어언 8년여 만에 받는 참으로 영광의, 그러나 지난한 과정을 담보로 했던 졸업증서!

캠퍼스에 나와 기념사진을 찍던 중 근처에서 연방 눈물을 훔치는 어떤 노모 한 분이 눈에 크게 들어왔습니다. 그분 역시 저처럼 아들의 박사 가운과 모자를 쓰고 사진을 찍는 중이었지요. 만감이 교차하는 듯 그분은 마구 오열하셨습니다.

“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겠니!” “엄마, 이젠 그만하세요!”

유추컨대 그 졸업생의 부친께선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고, 따라서 그 홀어머니는 갖은 고생과 바라지 끝에 자신의 아들이 우리나라 제일의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게 되는 영광의 자리에 오게 됐으나, 남편이자 아들의 아버지의 부재(不在)라는 현실이 새삼 통탄스러우신 듯 보였습니다.

애처로운 그 모습을 보자 어떤 동병상련의 아픔이 제 폐부를 마구 찔렀습니다. 저를 낳은 지 불과 백 일여 만에 집을 나간 어머니. 그로 인해 아버지는 시나브로 알코올 중독자가 되어 불과 오십 살도 못 사시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셨지요. 따라서 참으로 오랫동안 어머니를 도무지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집 어머니들은 남편이 별의별 짓을 다 해도 자식들을 봐서라도 모두 참고 산다던데 당신은 왜 그랬습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50년이 넘도록 여전히 불변하게 일언반구 회신조차 없었습니다. 그랬던 어머니를 비로소 용서한 건 딸이 서울대학교에 합격하던 지난 2004년 겨울이었지요.

‘그동안 당신을 참으로 미워했고 심지어는 증오까지 했었지요. 그렇지만 이제부턴 그토록 미워했던 제 심지(心志)에서 증오의 촛불 심지까지를 말끔히 제거하렵니다. 당신은 그동안 내게 있어 너무도 견딜 수 없을 만치의 시련과 아픔을 켜켜이 쌓이게 한 단초 제공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젠 용서하렵니다. 왜냐고요? 따지고 보면 용서란 건 바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동안 당신을 용서할 줄 몰라서 그 숱한 나날 동안을 번민과 증오, 그리고 때론 자학의 밤으로 점철하곤 했거든요. 뿐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날 낳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커다란 상실감은 평생의 트라우마로 각인된 주홍글씨와도 같았지요. 근데 오늘날 아들에 이어 딸마저 소위 명문대학에 합격하고 보니 이것이 어쩌면 당신의 부재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는 억지춘향격 자기 합리화 당위성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즉 당신이 없었기에 나는 누구보다 아이들을 더 사랑할 줄 알았으며 아울러 당신의 몫까지를 채워 아끼고 배려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날 아무리 증오의 대상이라 할지라도 내가 먼저 용서하는 순간, 날 짓누르던 미움과 원망의 먹구름에서도 벗어나 참다운 평화와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이제 제 나이 올해로 55세.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진 모르겠으되 기왕이면 다홍치마랬다고 앞으로도 보지 못할 어머니에 대한 미움은 거두겠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용서와 관용이란 긍정의 비단으로 채우겠습니다.

유의랑 작.

<열매> 60×25cm

Oil on canvas /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