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열린 고민 상담소

고3이 되는 학생입니다. 저는 모범생도 아니고, 놀러 다니는 학생도 아닌 그 중간에 있는 흔한 인문계 학생인데요, 고3이 되니 가족도 친척도 괜히 부담이 되고 명절이나 행사에 참석하기도 꺼려지고 공부하라는 엄마의 말씀에도 짜증만 나고 학교에서 하는 자습도 답답해집니다. 대체 무슨 문제가 생긴 걸까요? 고3 시기를 경험하신 인생 선배분들이 조언해주시면 답답함도 덜고 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대학 졸업을 앞둔 4학년 여대생입니다. 저도 고3 시절을 겪으면서 우울감, 무기력함을 느끼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저를 다잡아준 건 ‘목표’였던 것 같아요. 현재 나의 성적을 정확히 진단하고 가까이는 내가 하고 싶은 전공이나 진로를 생각해보시고 멀리는 내가 계획하는 인생을 생각하면서 공부를 해보면 어떨까요? 또 하나 조언을 드리고 싶은 것은, 가장 취약한 과목은 10분이 되었든 20분이 되었든 매일매일 꾸준히 하라는 것입니다. 목표와 꾸준함으로 수능 때까지 힘내시길 바랄게요.^^ 손지현 대학생

저도 같은 고민을 해본 사람으로서, 조금 구체적인 조언을 드리고 싶네요. 길게 보고 갈 것, 절대 무리하지 말 것, 자신의 공부 리듬과 패턴을 찾고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노력할 것. 익숙해지면 관성이 붙어 크게 힘들다고 느껴지지 않거든요. 단, 수업을 듣는 시간을 제외하고, 혼자 공부하는 시간은 하루에 최소 3시간 이상 가질 것을 추천드리고 싶어요. 그리고 공부에도 단계가 있는 법. 개념부터 튼튼히 한 후에 문제를 접하면 좋겠네요. 무엇보다 조급함을 걷어내고 천천히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그도 했고, 그녀도 했습니다. 나라고 못 할 것 없지요. 포기하지 마시고 파이팅하세요. 이중철 대학생

고민을 들어보니 성과를 내지 못할까 봐 두려운 마음이 큰 듯합니다. 성취를 해본 경험이 크게 없다 보니,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부모님이나 주변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 미리 걱정하고 고민하는 거지요. 그런데 이 순간 한번 생각을 바꿔보세요. 답답하다 여기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후회하느니, 1년이란 시간 동안 적어도 나 자신에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보기로요. 먼저 이루고 싶은 목표가 무엇인지,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그리고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 등을 통해, 현실을 직시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조금씩 목표치를 정해서 한 단계 한 단계 해보는 겁니다. 그러다 보면 성취감도 느끼고 두려움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고3 수험생들의 담임을 몇 번 해본 교사로서 그렇게 변해갔던 학생들을 많이 보았거든요. 힘내세요~!! 류형주 교사

산을 오를 때도 제일 힘든 게 거의 정상에 오르기 직전이라고 하잖아요. 아마도 학생에게는 지금이 그런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다 왔으니까 조금만 더 해보자, 꼭대기에 올라 푸른 하늘과 온 세상을 자유로이 감상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면서 조금만 더 힘내세요. 앞으로 가질 성취감과 기쁨을, 자유로움을 생각하면서. 박영효 대학생

고3 수험생 아들 둘을 키워본 엄마입니다. 이제 큰애는 어엿한 사회인이, 작은애는 곧 군대에 가네요. 고3이 되면 정말 압박감이 크지요. 그런데 수험생보다 더 큰 압박감을 받는 게 바로 엄마이기도 해요. 고3 1년이 앞으로 자식의 평생을 좌우할 것만 같아서 마음이 조급해져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하게 된답니다. 작은아들이 한번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친구들이 나름 맘잡고 집에서 공부하다가 잠시 쉬고 싶어 게임을 했는데, 부모님의 잔소리에 공부하고 싶은 맘이 확 접어진다고 했다고요. 그 말을 들은 후로 더욱 믿음을 갖고 묵묵히 지켜봐주며 응원하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제 와 주변을 돌아보니, 대학이 인생을 결정하는 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러니 조급함도 놓고, 할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해 보세요. 박영실 주부

남편이 바람을 피웠습니다. 아직 진행형이구요. 과거에도 그랬단 걸 알았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게다가 당당하기까지 하네요. 중학생, 초등학생, 7개윌짜리 애가 셋인데 눈물을 머금고 친정에 내려와 있습니다. 가진 것 없는 남편에게 받을 것도 없고, 저도 현재 직장도 없지만, 애들 셋을 키우며 살고 싶은데 옳은 선택일까요? 눈물로 지새는 날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동화

백일성

저희 동네에 제가 형님으로 모시는 결혼 19년 차 부부가 살고 있습니다. 그날은 형수님 생일이었습니다. 평소에는 토요일 출근도 안 하시는 형님이 갑작스럽게 출근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늦은 오후에 퇴근하며 집에 계신 형수님한테 평소 잘 부르지도 않던 이름까지 불러가며 전화를 하셨다고 합니다.

“은숙아~ 주차장으로 좀 내려온나.”

3층 집에서 계단을 내려오며 형수님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3층 계단을 내려오며… ‘토요일 갑작스럽게 출근을 왜 했지?’ 2층 계단을 내려오며…‘그냥 올라오면 되지, 왜 주차장으로 날 부르기까지 하지?’ 1층 계단 내려오며…‘ 혹시 이거… 쑥스러운 장면 연출되는 거 아니야? 어머머머!’ 형수님은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혼자 얼굴을 붉히고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후 형님의 차가 빌라 주차장으로 들어왔습니다. 와이셔츠 소매를 살짝 걷어 올린 오른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뒤를 돌아보며 멋지게 후진하는 형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라일락 나무 아래 오후 햇살을 잠시 피해 있던 형수님을 발견하고 형님은 차창을 내리고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여보~ 트렁크 좀 열어봐라~”

곧 운전석에서 트렁크 잠금장치 여는 소리가 들리고 형수님은 트렁크에 손을 얹으며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한번 둘러보게 되었습니다. 얼굴도 약간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진짜 풍선이라도 나오는 거 아니야? 이 양반이 생전 안 하던 짓을 하고… 어머어머… 나 표정 관리 왜 이렇게 안 되니, 가만 있어 봐, 이걸 살짝 열어야 되니, 아님 확 열어야 되니….’


그리고 조심스레 트렁크를 올리는 순간…. 다행인지 아닌지 풍선은 안 보였습니다. 그리고 오색 풍선 대신 눈에 들어온 건… 감자 세 포대. 어느새 형수님 옆에 바짝 다가선 형님이 얼굴에 너무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출장 갔다 오는데 국도에서 싸게 팔아서 사왔다. 엄청 싸게 샀데이~ 당신 감자 좋아하지?”

그리고 형님은 감자 두 포대를 양손에 차례로 들고 우두커니 감자를 바라보고 서 있는 형수님에게 나머지 한 포대를 턱으로 가리켰습니다.

“뭐 하노? 퍼뜩 안 들고?”

형수님은 감자 한 포대를 가슴에 꼬~~옥 안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1층 계단을 오르며… ‘아놔, 내가 뭘 상상한 거야. 아~~ 쪽팔려, 증말.’ 2층을 오르며… ‘아놔, 19년을 살면서도 매년 기대하고 매년 실망하면서 또 이런다 내가….’ 3층을 오르며… 앞에서 실룩이며 오르는 형님의 엉덩이를 보고 속으로 읊었다고 합니다. ‘감자에 싹이 나서 ♪♩~~ 잎이 나서 ♬~~ 하나, 둘… 에라, 처먹어라.’

그날 저녁 형수님은 1.4 후퇴 때 바람 찬 흥남부두의 금순이가 되어 생일에 감자를 한 솥 삶아 먹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날 밤 형수님은 꿈속에서 라일락 꽃잎 흩날리는 주차장에 하얀색 리무진이 들어오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검정색 턱시도를 입은 형님이 내려와 형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불러주는 세레나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얀색 리무진 트렁크가 열리는 순간, 형형색색의 감자들이 하늘 높이 두둥실 두둥실 떠올랐다고 합니다.

올해 마흔세 살의 백일성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재능 기부 단체 ‘끼친’

취재 문진정 사진 제공 끼친

매주 주말, 직장인의 로망 ‘늦잠’을 포기하고 이른 아침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잠실 석촌호수공원, 아이스링크까지 도심 곳곳에서 자신의 끼를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다. 청소년과 저소득층 소외 아동의 바르고 밝은 성장을 위한 재능 기부 단체 ‘끼친’의 회원들이다.

이들의 재능을 한데 모은 사람은 바로 ‘끼통령’이라 불리는 김영광 대표. 우연한 기회에 범죄자들의 대다수가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는 기사를 접한 그는 자주 가는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올렸다.

글의 제목은 <‘끼’를 나눌 ‘친’구를 찾습니다!>. 누구나 재능은 하나씩 있으니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써보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2010년 9월, 20~30대 직장인 6명이 모여 한강에서 쓰레기를 줍는 봉사 활동으로 시작된 ‘끼친’은 현재 회원 수 700여 명의 국내 최대 재능 기부 단체로 성장했다. 교육자, 가구 디자이너, 벤처기업 대표, 하키 선수, 사진가까지, 70종류가 넘는 다양한 직업의 사람들이 모여 교육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 이것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끼친’의 형태이다.

아이들의 밝아진 얼굴만 봐도 일주일의 에너지가 충전된다는 끼친 회원들은 재능 기부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그래서 더 긍정적이고 만족스런 삶을 만들어가고 있다 말한다. 월급날만 기다리는 당신, 인생이 지루한 당신이라면 지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자. ‘나의 끼는 무엇일까?’ ‘이걸 누구와 나눌 수 있을까?’

드림하이

나눔아트마켓

청소년들의 진로 멘토링 프로그램 ‘잡(JOB)수다’, 소외 가정 어린이들을 위한 정서 지원 프로그램 ‘드림하이’, 아이스하키를 통한 스포츠 멘토링 ‘위키드’, 재능 기부를 통한 문화 마켓을 열어 운영비를 마련하는 ‘나눔아트마켓’ 등 다양한 재능 기부 행사가 매달 열리고 있다.

그 외에도 미디어 팀 ‘미친’, 멘토링 어플리케이션 개발과 홈페이지 구축을 담당하는 IT팀 ‘잇’, 디자인팀 ‘ㅁㅎ’, 대학생 팀까지, 인원이 많다 보니 언제든지 끼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다. 다양한 이들의 집단적 아이디어가 모여 기부의 가능성을 무한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끼친’만의 힘이자 강점이다.

cafe.naver.com/kkitchen

금옥여고 임한욱 교사 지금까지 진로 멘토링이라고 하면 대개 명문대 교수님을 모시고 성공담을 듣는 형식이 많았어요. 왠지 나와 멀게만 느껴지는 이야기라서 아이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고 할까요. 그런 면에서 ‘끼친’은 현직에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들으며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25개 직업별로 반을 개설하고 아이들이 두 개 반을 선택해 수업을 들었는데요. 아이들이 정말 원하는 것을 채워주고, 공감해주는 실질적인 멘토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인생관이나 직업에 임하는 마음가짐 등 깊이 있는 대화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끼친 잡수다’ 멘토링의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그래서 아이들의 만족도가 아주 높았던 것 같습니다.

김영광 대표 이야기 사실 소외 아동들의 교육 문제가 남의 일 같지만은 않았어요. 저도 청소년기에 갑작스런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대학 때는 한 선배님의 지원을 받았던 경험이 있거든요. 너무 감사했고 큰 힘이 되었죠. 그래서 저도 나중에 누군가에게 꼭 도움을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지금 가진 재능을 잘 쓰고 있나?’ 고민하게 된 거예요. 대학, 대학원 교육까지 받은 인재들이 그 재능을 돈 버는 데만 쓰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웠죠. 그것들을 필요한 아이들과 나누면 너무 좋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스스로 의미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행복한 삶을 만들어가는 주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요. 그것은 참여하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능 기부를 통해 직업과 삶을 더욱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생활의 활력이 되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뭔가 하나라도 잘하는 것, 좋아하는 것은 있잖아요. 그게 어떻게 쓰일 수 있을까 생각해보고 한번 참여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지만 세상에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많구나를 느끼고 사람의 가치와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처럼 많은 분들이 재능 기부의 기쁨을 함께 느끼셨으면 좋겠습니다.

귀한 주말 쪼개서 열심히 해주는 회원 여러분들께, 정말 고맙다는 말 전하고 싶습니다. 평생 감사해도 부족할 사람들~ 당신의 재능은 당신만의 것이 아니라는 거~^^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나의 스승 박선생님

박선생님과 나는 부천시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며 같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다. 하지만 박선생님은 나보다 십 년은 어려 서로 어울리는 선생님들은 달랐다. 그리고 10년 후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마침 앞뒤로 아파트도 가까이 있어서 자주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퇴근 후면 동네 공원에서 만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잡다한 가정사를 논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내가 교감 발령을 받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박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 뒤 나는 정년 퇴임을 하였고 퇴임 후에는 급기야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끔찍한 일을 당하였다. 그때 나를 위로해준 사람은 바로 뒤에 사는 박선생님이었다.

박선생님은 그사이 명예 퇴임을 하고 병환 중인 시부모님을 모시며 가사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시부모님이 돌봐주셨기에 교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며 승진도 포기하고 퇴임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우선 그러한 그녀의 태도에 놀랐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병든 부모는 요양원에 모시고 직장을 놓지 않는 경우가 흔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어머님은 치매 환자가 아닌가? 내가 없는 동안 박선생님은 혼자 매일 공원을 돌았다며 건강과 마음도 다스릴 겸 같이 걷자고 하였다. 내가 돌아온 때가 마침 4월이라서 꽃이 만발하기 시작한 공원을 걷는 것만으로도 나의 슬픔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화제는 주로 치매 시어머님에 대한 근황과 가정사였다. 선생님의 시어머님께서 얼마나 근면하고 검소한 분인지는 나도 안다.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시고 공터에 갖가지 채소 농사를 지어 가족에게 유기농 음식을 제공하신 분이다. 학교에 가다 멈추어 서서 밭 구경을 하면 없는 채소가 없구나 할 정도였다. 고지식하신 시어머님과 삼십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박선생님이 받은 스트레스도 상당하였으리라. 지엄하신 시아버님은 또 어떻고. 그러나 생전에 어려워하던 시아버님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하였다.

선생님과 나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공원을 한 바퀴씩 돌았다. 30분 정도 걷고 벤치에서 쉬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걷곤 하였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까?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었건만 늘 새롭게 감동하고 되새겼다.

“박선생님은 참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삼시 세끼를 꼭 해드리누?” “제 특기 적성이 가정주부라는 걸 퇴임하고 알았어요. 넘 재미있어요. 호 호 호.” 그렇게 웃음을 날리며 시어머니께서 식욕이 좋으셔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내가 간혹 걱정을 하면 “우리 시어머니는 예쁜 치매예요. 누굴 괴롭히질 않으셔요. 씻으시고 방바닥 닦고 애기처럼 주무시고 그게 다예요. 말이 없으셔요”라고 했다.

언젠가 한밤에 소파의 속을 다 뜯어 놓으시는 바람에 새 소파를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더 잘해드려야죠. 돌아가실 것 같은데 저렇게 버티시는 것이 다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노년에 꼭 필요한 친구는 이런 친구’라는 내용으로 메일을 보내준 적이 있다. ‘마음이 젊은 친구, 낙천적인 친구, 유머 감각이 풍부한 친구, 건강 관리에 철저한 친구, 전화하면 바로 올 수 있는 친구, 마음이 젊은 친구, 봉사하는 친구….’ 그대로 따르자면 약 열 명의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 모두를 다 갖춘 한 사람을 친구로 두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는가?

동년배도 많건만 나를 가까이하고 듬뿍 정을 주고 즐겁게 해주느라 무던히도 애쓰던 그녀. 얼마 전 박선생님은 시어머님의 초상을 치르고 돌아와 집이 텅 비어 허전해 못 견디겠다며 대성통곡하더니, 먼저 살던 서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을 잃고 박선생님에게 너무 많은 위안과 사랑을 받았음을 박선생님이 내 옆을 떠나고 나서야 더욱 느끼게 되었다. 나보다 십 년이 어린 친구이지만 정 많고 의리 깊은 그녀의 심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다.

김재숙 69세. 시인. 경기도 고양시 마두2동

박선생님께는 ‘고마운 박선생님에게’라는

김재숙님의 마음을 담은 문구와 함께 예쁜 난 화분을 보내드렸습니다.

나에게 감동을 준 사람, 특별한 사람, 너무나 고마운 사람이 있으신가요?

그 사연을 소개해주세요. (edit@maum.org) 독자님의 마음을 대신 전해드립니다.

협찬 예삐꽃방 www.yeppi.com

보리밥과 두부버섯잡채

다이어트 때문에 푸짐하게 먹지 못해서 스트레스라고요? 포만감 있고 소화도 잘되면서 칼로리는 낮은 식재료를 선택해 보세요. 오늘은 버섯과 보리밥, 두부 삼총사가 다이어트를 도와드립니다.

필수 재료(1인분) 느타리버섯(50g), 표고버섯(1개), 양파(1/4개), 당근(1/4개), 피망(1/2개), 두부(1/4모), 보리밥(1/4공기), 소금(약간), 들기름(1큰술 반), 다진 마늘(1작은술), 간장(1작은술), 다진 파(1큰술), 통깨(1큰술)

1 느타리버섯은 가닥가닥 뜯고, 표고버섯은 밑동을 뗀 뒤 곱게 채 썰고, 양파와 당근, 피망도 곱게 채 썰어 준비합니다.

2 두부는 굵게 채 썰어 소금을 약간 뿌려 밑간합니다.

3 팬에 들기름(반 큰술)을 두르고 물기를 없앤 두부를 올려 센 불에서 노릇하게 구워냅니다.

4 팬에 들기름(1큰술)과 식용유를 두르고 중간 불에서 채 썬 양파, 당근, 다진 마늘을 볶다가 양파가 반 이상 익으면 피망과 느타리버섯, 표고버섯, 간장, 다진 파를 넣어 볶아줍니다.

5 볼에 4의 버섯잡채와 구운 두부, 통깨를 넣어 고루 버무리고 넓은 대접에 보리밥과 함께 소복하게 담아냅니다.

이보은 요리연구가 & 자료 제공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요리연구가 겸 푸드스타일리스트 이보은님은 20여 년간 건강 요리를 알리는 데 힘써왔습니다. 현재 쿡피아쿠킹스튜디오 대표이며 저서로 <행복한 아침밥상>(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외 다수가 있습니다.

퀵 스탠드 & 락(Quik Stand & Lock)

● 이름은?

퀵 스탠드 & 락(Quik Stand & Lock). 자전거를 세우는 보조 용품인 킥스탠드라는 명칭에서 가져왔다. 자전거를 세움과 동시에 빠르게 잠근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나타낸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친구와 함께 일주일 동안 자전거 여행을 간 적이 있다. 그때 편의점에 가거나 잠깐 휴식을 취할 때 자물쇠를 잠가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다. 귀찮고 번거로웠지만 한편으로 도난의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팀원들과 공모전 준비를 하면서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고, 자전거 스탠드를 세울 때 추가적인 행동 없이도 자물쇠가 잠기는 아이디어를 생각했다.

● 가장 큰 장점은?

사용과 휴대가 간편하다. 기존의 자전거 자물쇠는 자전거에서 풀어서 자물쇠를 잠그고 다시 잠긴 것을 풀어서 자전거에 휴대하는 데 번거롭고 복잡함이 있다. 퀵 스탠드 & 락은 이러한 과정을 단지 자전거를 세우는 하나의 동작으로 만들어, 킥스탠드를 밟아 내리면 바퀴살을 가로질러 바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해주기 때문에 자전거를 세우면서 바로 자물쇠가 잠긴다. 사용자의 움직임을 최소화하고, 따로 휴대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없다.

● 아쉬운 점은?

이 제품을 만든 후 사람들에게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이 ‘자전거를 그냥 들고 가면 어떻게 하느냐?’이다. 그 점을 염두해서 퀵 스탠드 & 락을 기존 자물쇠처럼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려고도 생각한 적이 있다. 그래서 아파트나 공원, 길가에 있는 자전거를 조사했는데, 흥미로운 점은 자물쇠를 보관소에 연결하여 걸어두는 경우도 있지만 그냥 걸지 않고 보관하거나 바퀴가 돌아가지 않도록 바퀴에만 걸어두는 경우도 상당히 많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도난의 경우에도 자물쇠가 걸린 바퀴만 두고 몸체를 가져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조사 결과, 사람들은 자물쇠를 매번 걸지 않는다는 것과 도난하려는 사람은 자물쇠와 상관없이 훔치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기존 자물쇠와는 다른 새로운 컨셉을 제안하기 위해서라도 퀵 스탠드 & 락의 컨셉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 하고 싶은 말?

<마음수련>에 소개되어 기쁘다. 아직은 많이 부족한 디자인과 학생들의 작품이라 보완할 점도 많지만 이러한 과정들과 다양한 경험을 통해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하리라 생각한다.

만든 사람 김수환, 윤준호, 이도훈, 박효진(호서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김연아 선수의 복귀 경기를 보며

“정말 엄청나게 웅장한 공연이었습니다! 저 담담한 모습을 보십시오. 스포츠 선수가 1년 넘게 쉬고도 이런 건 처음 봅니다! 정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 혹독한 경쟁에서 벗어났다가 컴백해서 완벽하게 우승할 뿐 아니라, 올림픽 금메달을 땄던 자신을 능가하는 이런 것은 본 적이 없습니다!”

미국 유니버설 스포츠 해설 위원

3월 17일, 전 세계의 이목은 피겨 올림픽 챔피언 김연아의 연기에 집중되었다. 프리 경기 출전 선수 24명 중 마지막으로 나온 김연아 선수는 ‘레 미제라블’의 아름다운 선율 자체가 되어 빙상 위를 날았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 아이스링크를 가득 메운 9천 관중은 기립했고, 세계의 언론들은 ‘여왕이 돌아왔다’며 환호했다. 심판들은 수행, 안무, 음악 해석에 모두 6개의 만점을 주었고, 그것은 신채점제가 도입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올림픽 챔피언들 중 공백을 가진 뒤의 경쟁 대회에서 성공적으로 복귀한 예는 찾아보기 힘들다. 피겨계에 한 획을 그었다는 역대 챔피언들도 뚜렷한 동기 부여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한 탓인지 하나같이 실패로 끝났었다. 그래서 더욱 기대도 우려도 컸다. 김연아 선수 역시 오랫동안 고민하고 선택한 도전이었다. 선수로서의 그 길이 어떠한 것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더욱 신중했다. 하지만 복귀를 결심한 후에는 그 어떤 고통마저도 기꺼이 감내할 마음의 준비를 마친 것처럼 담담했다.

2년 만의 세계선수권 복귀. 신혜숙 코치의 말에 의하면 김연아 선수는 인터뷰 등 피곤한 일정 때문에 만류를 해도 하루 7시간씩의 훈련을 매일 해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쇼트 프로그램 ‘뱀파이어의 키스’에서의 부당한 롱 에지 판정, 그리고 인색한 프로그램 구성 점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냈다. “피겨는 기록경기가 아니다.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면 된다”고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경기가 끝난 후 전 세계 피겨 팬들은 그녀의 스케이팅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해했고 각국의 해설 위원들은 ‘퀸 연아의 멘탈의 승리’라며 그녀의 정신력을 칭찬했다.

김연아 선수를 향한 찬사는 단순히 스케이트를 완벽히 탄다는 이유를 넘어선다. 피겨 100년 역사상 참가한 모든 대회의 시상대에 오른 유일한 선수, 신채점제 도입 후 올림픽, 세계선수권대회, 4대륙피겨선수권대회, 그랑프리 파이널까지 모두 석권한 그랜드슬램의 선수. 그녀가 피겨 전문 빙상장 하나 없는 나라에서, 7살 꼬마 때부터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어떤 환경에서 피겨를 탔는지 안다면, 누구라도 그녀의 열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김연아의 우승으로 우리나라는 2014년 소치동계올림픽 피겨 여자 싱글 부문에서 출전권 3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대회 직후 CBC와의 인터뷰에서 김연아는 “꿈의 무대인 올림픽에 후배 선수들과 함께 뛸 수 있게 되어 기쁘다”고 말했다. 2010년 밴쿠버올림픽에서의 금메달 획득으로 자신의 꿈은 이루었지만, 그녀를 다시 선수로 돌아오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기에.

선수로 복귀한 후에도 그녀는 최고의 선수로서 해외의 멋진 빙상장에서 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어린 시절의 한국 코치들에게로 돌아갔고, 후배들과 함께하는 한국에서의 훈련을 선택했다. 챔피언의 겸손함, 후배에 대한 배려,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잊지 않는 김연아. 그래서 김연아의 스케이팅은 더욱 아름다운가 보다.

김정수

사는 냄새가 난다, 라오스 루앙프라방

글&사진 이용한 시인, 여행가

루앙프라방에 가면 사랑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랑이 없다면 사랑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침에 먹는 빵은 맛있을 것이고, 어디서나 메콩강이 음악처럼 흐를 것이다. 가는 곳마다 고양이가 넘쳐날 것이고, 라오스의 미소가 떠다닐 것이다. 언제나 친절한 사람들이 ‘싸바이디!’ 하고 인사를 건넬 것이다. 걱정은 사라질 것이고, 한숨은 날아갈 것이다. 시간은 코코넛 열매처럼 야물게 익어갈 것이다. 마음은 한낮의 스콜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을 것이다. 고요함은 길가의 꽃 피는 소리를 들려줄 것이며, 저녁에는 마시고 싶은 비어라오를 마시게 될 것이다. 루앙프라방에서 가능한 것들은 루앙프라방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줘.

루앙프라방 싹카린 거리에 위치한 왓농 사원은 라오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사원이다. 아침 공양이 끝나고 나면 사원에서는 하루 일과처럼 청소를 하는데, 8명의 어린 승려들이 법당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그중 가장 나이가 어려 보이는 스님 한 분은 법당 바깥의 입구와 계단을 열심히 혼자서 빗자루질하고 있었고, 나머지 7명은 법당 안에서 제멋대로 눕거나 앉아서 청소 시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아예 한 스님은 천장까지 닿는 먼지떨이를 들고 누워 장난을 치고 계셨다. 이 순간만큼은 승려가 아니라 그저 놀고 싶은,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염불 대신 농담을 하고 불공 대신 장난을 치는 소년들. 청소가 아니라 청소 놀이를 하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부처님도 그저 흐뭇해서 미소가 번지실 거다. 그나저나 저렇게 놀기만 하면 이 넓은 법당 청소는 언제 다 하시려나.

우기로 접어든 여름 라오스에는 거의 매일같이 비가 온다. 하루에도 서너 차례 비가 내리다 그치고, 잠깐 해가 났다가 다시 비가 내린다. 우기의 루앙프라방에서 가장 잊지 못할 풍경 중 하나는 칸강의 고기잡이 풍경이다. 반도처럼 튀어나온 지형의 루앙프라방에는 거대한 메콩강이 북서쪽으로 흘러가고 또 하나의 강인 칸강이 동쪽에서 흘러와 메콩강으로 빠진다. 물살이 거칠고 폭이 넓은 메콩강에 비해 칸강은 비교적 수면이 잔잔하고 폭이 좁아서 루앙프라방의 원주민들은 주로 메콩강보다는 칸강에서 고기잡이를 한다. 특히 비가 내리는 날이면 물고기들이 강가로 나오는 습성이 있어 원주민들은 비가 오거나 비가 그친 직후에 고기잡이에 나선다. 비가 오는 날 칸강을 따라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고기 잡는 풍경을 만나게 되는데, 이건 정말 그 자체로 환상적인 그림을 연출한다. 황토 물빛 위에서 그물을 던지고 통발을 건져 올리는 풍경! 하늘색 비옷을 입은 채 쪽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떠나는 풍경! 족대를 들고 물가에서 물고기를 모는 아이들! 그런 풍경을 멀거니 앉아 바라보는 소녀들! 고기 모는 소리, 그물을 던져 허탕을 치고도 기분 좋게 웃는 소리, 통발에 가득한 고기를 보고 환호성을 지르는 아이들의 소리, 칸강에서는 진실로, 사는 소리가 들리고 사는 냄새가 난다.

 

이용한님은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순수한 풍경과 사람, 고양이를 담아온 사진가이기도 한 님은 시집 <안녕, 후두둑씨>,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고양이 시리즈 <명랑하라 고양이> 등을 펴냈으며, 여행 에세이로는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등 다수가 있습니다.

한씨네 삼 남매

아버지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 왼쪽부터 아버지 한치규,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큰아버지, 2009년 중국 장백에서 잠시 아버지와 상봉했었던 북한에 사는 고모, 할머니(작고), 할아버지(작고), 작은아버지(작고). 아버지는 60년 만에 만난 고모에게서 받은 이 사진을 보며 이산의 아픔을 달래셨다.

사진 한치규 & 글 한승원

어린 시절, 아버지는 주말이면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가족사진을 찍어 주셨다.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행복한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갈 수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지난 50여 년간의 기록.

아버지께서 베풀어주신 사랑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면서 마음 한편이 뭉클해졌다. 더 늦기 전에 보답해드리고 싶어 지난해 5월 어버이날을 기념해 <한씨네 삼 남매>란 이름으로 사진집을 내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존경의 헌사였다.

▲ 우리 언니 한정원. 강원 춘천, 1962. 5.

▶ 요강에 앉은 내 동생. 서울 내수동, 1967. 8.

▼ 최고의 별미 짜장면. 우리 것을 먼저

비벼주시고 사진을 찍으시던 아빠.

서울 내수동, 1969. 4.

우리 가족은 아버지, 어머니, 언니, 나, 남동생 이렇게 다섯 식구이다. 실향민인 아버지는 가족이 당신 삶의 전부였고, 일과 가족만이 유일한 낙이었다.

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릴 적 흥남에 있는 일본인 중학교에 다녔던 아버지는 학교에 가기 위해 새벽 2시에 일어나 2시 30분에 떠나는 화물 열차의 기관사 옆자리에 타고 50리를 달렸다. 그리고 중간 역에 내려서 다시 20분을 뛰어야만 잡아탈 수 있는 연결 기차를 타고 70리를 더 달렸다. 그렇게 모두 120리를 다니며 통학하면서도 항상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았다. 힘든 여건 속에서도 단 하나의 꿈은 열심히 공부해서 돈 많이 벌어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으로 인해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아버지는 사진을 통해 가족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주셨다. 등이 휘어지도록 남매가 동시에 덥석 올라타도 웃음 짓고, 무더운 여름이면 마당의 하수구를 막아 수영장을 만들어주셨다. 아버지의 사랑 덕분에 우리 삼 남매는 우애 있게 자랄 수 있었다.

▲ “이놈들아, 아빠 허리 휜다. 허허허.”

서울 경복궁, 1967. 9.

아버지는 당신 가족뿐만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의 아이들도 따뜻한 눈길로 담아내셨다. 그리고 사회의 발전상, 풍경 등을 사진으로 기록하셨고, 이 모든 것들은 아버지 최고의 유산이 되었다. 몇 년 전 큰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신 후 아버지도 많이 쇠약해지시고 연로해지셨다. 가끔 모시고 외출을 하면 어린아이처럼 너무나 좋아하신다.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사진집을 선물해 드렸을 때, 너무나 가슴 벅차해하시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 우리 집 앞마당 수영장. 서울 내수동, 1971. 7.

 

▼ 이제 저도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어요. 한씨네 삼 남매. 왼쪽부터 막내아들 한승혁, 둘째딸 한승원, 첫째딸 한정원. 서울 내수동, 1976. 4.

한치규님은 1929년 함경남도 정평에서 태어나 1.4후퇴 때 월남했으며 이후 군에 입대해 1979년 보안사 기조처장(대령)을 마지막으로 예편하기까지 30여 년간 군 생활을 하였습니다. 1959년 카메라를 처음 장만한 후 독학으로 사진을 익혔으며, 사진집 <한씨네 삼 남매>(눈빛)는 1960~1970년대까지 한 가장으로서의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이웃 아이들에 대한 따듯한 시선이 담긴 사진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사진 제공 눈빛

엄마를 잊는 법

 

시현이는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반도 못 그렸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가고, 숙제 일기 안 해온 친구들도 남아서 숙제 일기를 하고 벌 청소까지 다 마쳤는데, 시현이는 아직도 수채화 작업 중이다. 이제 교실에는 우리 둘뿐. 녀석은 속도를 좀 내려는지 양손에 붓 하나씩 들고 채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총을 의식한 동작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더 재미있게 그림 그릴 수 있다는 수작 같았다.

“시현아, 몇 시쯤 되면 완성하겠냐?” “밤 12시쯤요.”

녀석이 씨익 웃으며 농담을 하였다.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짜로 해볼 참이냐?”고 으르릉거렸다. 그때 마침 옆 반 학생이 비닐봉지를 들고 오더니, 아이스콘 하나를 꺼내 놓고 갔다. 마음씨 고운 옆 반 여선생님이 보낸 선물이다. 사람은 둘인데 아이스콘은 하나. 나는 시치미를 딱 떼고 천천히 아이스콘 아랫부분을 돌리며 종이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원뿔형 아이스콘을 트로피처럼 높이 쳐들고 입맛을 다시며 이제 곧 맛있게 잡수실 거라는 예고를 하였다. “음, 엄청시리 맛있겠군!”

크게 한입 베어 무는 시늉을 하다가 아이의 곁눈질과 마주쳤다. 이번에도 실눈을 뜨고 씨익 웃는다. “뭐 설마 혼자 다 드시겠어요” 하는 표정이다. 여우같은 놈이다. 할 수 없이 손짓을 하였다. 시현이가 붓 두 개를 놓고 쪼르르 앞으로 나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아이스크림 가운데 부분에 선을 그었다.

“요만큼 너 먹고, 밑에 부분은 내 거다. 선 넘으면 땅콩 백 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손에는 붓 다른 손에는 아이스콘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 아이는 마치 칼로 반듯하게 자른 것처럼 아까 정해준 선까지 아이스콘을 먹고 반납하였다. 그 후 수채화 그리는 속도가 급상승하였다. 마침내 아이들이 하교한 지 한 시간 십 분 후, 작품을 완성한 시현이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갔다.

나는 우리 반 모태 지각생 시현이가 참 좋다. 지난가을, 시현이 엄마가 수술을 받기 위해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가셨다. 아이 엄마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수술과 재활 치료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쯤 지나야 엄마가 돌아오시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모르겠다 말했다. 나는 그런 시현이 손을 잡고 위로랍시고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하였다.

“엄마 없이 얼마 정도 참을 수 있어?” 대체 열두 살 아이가 엄마 없이 지낼 수 있는 기간을 어떻게 가늠한단 말인가. 그런데 의외로 시현이 대답은 명쾌했다. “한 달요!” “우와! 대단해! 선생님은 어릴 때 일주일도 안 돼서 징징 울었는데… 넌 한 달씩이나? 대체 비결이 뭔데?” 정말 궁금했다. 솔직히 나는 그 순간 어느덧 꼬부랑 할머니가 된 내 어머니가 곁에 없는 어느 세월을 떠올렸다. 시현이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싱긋 웃으며 답해 주었다.

“재미있게 놀면 돼요.” “아하!”

맞다. 엄마가 없더라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엄마도 걱정을 덜 하신다. 열두 살 시현이가 내게 맑은 깨달음을 주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