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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복 공유 서비스 키플

취재 & 사진 문진정

어린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하루가 다르게 ‘폭풍 성장’하는 아이의 옷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아이가 셋이 넘는 ‘다둥이’ 가정 엄마에게는 육아 비용 부담이 만만치 않은데 이런 엄마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탄생한 것이 바로 ‘공유 기업’ 키플(Kiple)이다.

2년 전 이성영 대표는 다니던 벤처기업을 그만두게 되면서 당시 미국에서 완전히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잡기 시작한 ‘공유경제’에 관심을 갖게 된다. 돈을 주고 사는 소비가 아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자신이 가진 것을 공유함으로써 효율적인 자원의 분배를 만드는 것이다.

특히 아이 옷의 경우 금방 작아져 못 입게 되는 데다 치수와 취향도 다양해 물려줄 사람도 찾기 어렵고 중고로 팔기는 더 번거롭다. 그래서 대부분 헌 옷 수거함으로 들어가는데, 이런 아이의 옷들을 공유하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서비스를 오픈한 것. 만 원이면 4~5벌은 거뜬히 살 수 있으니, 육아 비용 절감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 하루 평균 150~200벌, 한 달에 3~4천 벌이 새 주인을 만날 정도로 활발한 교환과 나눔이 이뤄지고 있다. 합리적 가격에 화학 물질 걱정 없는 옷, 아이들에게는 물건의 순환과 자원의 소중함을 알려줄 수 있는 교육적 효과까지, 단순한 교환 이상의 가치를 나누는 착한 소비다.

키플 나눔은 이렇게

1) 옷장에 쌓인 아이 옷을 정리해 키플로 보낸다.

2) 보내진 옷은 브랜드, 품질 등에 따라 평가를 거쳐 가격이 책정되는데, 가격은 무료부터 보통 2~3천 원 선이다. 그 가격만큼의 ‘키플머니(포인트)’도 적립받을 수 있다.

3) 옷의 사이즈 측정, 사진 촬영, 다림질, 택배 발송 등은 키플 직원에게 맡긴다. www.kiple.net

저는 중고, 구제 옷이라는 말보다는 ‘두 번째 옷’이라는 말을 씁니다. 한 번 입고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세 번째 주인을 만나서 계속 순환하는 거죠. 옷을 교환해서 입다 보면 지금의 내 옷이 6개월 후면 또 다른 누군가의 옷이 되기 때문에 옷을 깨끗하게 입게 되고, 옷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 달라지는 거 같아요.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엄밀하게 보면 우리의 것이구나, 인식이 바뀌는 경험을 하거든요. 한마디로 세상이 거대한 옷장이자 공동체인 거죠. 아직 오해 섞인 시선도 있고 참여하는 엄마들도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는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하지만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기쁨과 효용 못지않게 누군가와 나누는 가치와 기쁨을 더 많은 엄마들이 경험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려면 기존의 옷 시장보다 더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저희 키플이 세상의 눈에 맞게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는 적립된 키플머니로 공연 티켓이나 유기농 농산품, 세제로 바꿀 수 있는 등의 새로운 서비스도 계획 중입니다. 더 많은 부모님들이 ‘애들 다 클 때까지’ 만족하실 수 있도록 계속 진화해 나가야지요.^^

 김민정 님 키플 옷은 받으면 늘 기분이 좋아요. 누군가의 손길로 정돈되었다는 걸 알 수 있죠. 세탁도 잘되어 있어 입던 옷이라기보다 잘 물려받는 기분. 제 아이의 옷도 더 잘 정리해서 보내고 싶어져요.

 알밤맘 님 뉴스에서 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사실 전 중고 옷을 입힌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못해 참여하기가 선뜻 내키진 않더군요~. 괜한 자존심에 내 귀한 아이들에게 굳이 중고 옷을 입혀가며 키워야 하나 하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막상 보니 정말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더군요. 왜 그동안 새 옷만을 고집했을까 하고요.ㅋ 옷 상태도 너무 괜찮고 일단 취지가 너무 맘에 들어요~. 자원 절약에 제3국의 어려운 아이들까지 도와주다니,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앞으론 정말 키플 골수팬이 될 듯싶네요. 이런 좋은 문화들이 많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어요.

우리반 2.9(이쩜구) 그리고 진욱 오빠

2.9(이쩜구) 너무나 익숙한 이름. 의정부여고 2학년 9반. 이과반의 맨 끝 교실. 유난히 개성이 강했던 우리는 공부보다는 체육대회, 백학제(학예회), 연극회 같은 것들을 더 즐겼었어.

담임 선생님은 매번 꼴찌를 하는 성적 때문에 꽤나 골치 아파하셨지.

학기 초 게시판을 꾸밀 때였어. 우리는 노오란 주전자에 휴지를 휘휘 풀어 종이죽을 만들고 물감을 섞어 색을 낸 다음, 던졌지! 뒤편 게시판으로 던져지는 파스텔 톤 종이죽들은 ‘쩍!’ 하니 통쾌한 소리를 내며 들러붙으며 꿈 많은 여고생들의 꽃밭이 되었지. 다음 날 아침 게시판을 보고 당황하신 선생님은 뒷짐을 진 채 몇 번을 나갔다 들어왔다 안절부절못하셨지만, 작문 선생님과 가정 선생님은 “너희들~ 멋지다~”며 응원해 주셨었지.

공부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끼가 넘쳤던 2학년 9반은 언제나 최고였지. 학예회 때 부르던 몽산포타령, 그때 하나로 모아진 우리들의 예쁜 목소리가 참 그립네.

학기 말이 되면서 어찌나 헤어지는 게 아쉬웠던지, 우리는 이쩜구라는 문집을 내고, 급기야는 이쩜구의 끝을 기념하며 연극 ‘파우스트’를 공연하기로 했지.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지 친구들과 선생님을 초대해 연극 공연을 마치자, 너무나 뿌듯했던 우리 담임 선생님은 십만 원이란 거금을 후원해주셨지. 평소에 표현도 잘 안 하던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속만 썩이던 우리들을 은근 자랑스러워하시고, 그저 묵묵히 모른 척해주시던 것이 우리 담임 선생님의 최선의 응원이 아니었나 싶어. 최고로 행복했던 여고 시절, 내 인생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내 학창 시절은 ‘이쩜구’가 전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풋풋한 20대를 보내며 너희들을 살짝 잊고 살기도 한 것 같애. 결혼식, 출산, 돌잔치…. 인생의 굵직한 행사들을 거치면서 너희들의 존재를 다시 깨닫게 되었지. 그러던 서른 살의 어느 5월. 딱 이맘때쯤 우리는 다시 만났지. 모두들 비슷한 시기에 결혼했던 우리에겐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있었고, 어린이대공원으로 소풍을 함께 갔지. 준비해간 맛난 음식들을 먹고 얼마 안 있자 갑작스레 소나기가 퍼부었어. 커다란 돗자리의 가장자리를 아빠들이 붙잡고, 우리들과 병아리 같은 아이들이 그 빗속을 돗자리 하나에 의지해 다 같이 뛰어가며 얼마나 즐거워했던지…. 그리고 십 년, 우리는 함께 그 시간을 같이 했지. 여고 동창생 여덟 명은 여덟 가족이 되었고, 스무 명이 넘는 대가족이 된 우리 모임(이쩜구).

일년에 서너 번의 만남, 바다를 갈까 계곡을 갈까? 새로운 계획을 짤 때마다 점점 너희들을 생각하는 나를, 그 안에서 꿈꾸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리고 아내의 여고 시절 속으로 들어와 준 사랑하는 우리 서방님! 장 보기 힘들다고 구시렁대면서도 “진호랑 창성이는 소주 마셔~ 맥주 6개짜리 3팩은 사야 해~ 바비큐 해먹을까? 애들 딸기 좋아해….” 그 넓은 오지랖을 펼치시며 두 카트를 가득 채우고, 계산할 때면 오천 원 할인 쿠폰, 맥주 500원 할인 쿠폰, 3배 적립 쿠폰 등등 꼼꼼히 챙기시고, 그걸 품목에 맞춰 집 냉장고에 넣었다가 가져가야 할 것, 차에 둘 것 구별해서 박스에 나누어 담고, 그렇게 몇 박스씩 차에 싣고 내리기를 수십 번. 정작 자신은 술을 못 마시는 바람에 누구를 마중 나가고 배웅하는 일도 늘 도맡아 하는, 언제나 믿음직한 심부름꾼.

이쩜구 친구 시어머님이 돌아가셨을 때, 평일임에도 당연히 가야 한다며, 신랑들을 모아 광양까지 다녀오는 사람, 누구의 고민이든 차분히 들어주고 충고해주는 카운슬러!!! 언젠가 한 번은 제대로 고맙다고 말해주고 싶었는데…. 이쩜구, 니네들이 나보다 더 좋아하는 ‘진욱 오빠’한테 꽃 보내는 거 절대 불만 없을 거라 확신한다~ 나는.^^

이쩜구 친구들(현주, 화순, 진숙, 현진, 윤진, 양희, 혜정)+α(변성식, 송진욱, 박진호, 박정환, 김창성, 오미종, 조성준) 그리고 예쁜 우리 아이들~ 모두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김수련 40세. 직장인. 경기도 고양시 대화동

김수련님의 남편 송진욱님께는

‘이쩜구의 최대 조력자 송진욱님께 감사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예쁜 꽃바구니를 보내드렸습니다.

감동을 준 사람, 고마운 그 사람의 사연을 소개해주세요.

그분에게 미처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담은 편지 형식의 글도 좋습니다.(edit@maum.org)

소개된 분께는 간단한 문구와 함께 꽃바구니 혹은 난 화분을 보내드립니다.

협찬 예삐꽃방 www.yeppi.com

채소 쌀가루크로켓

길거리 주전부리보다 영양가가 3~4배는 많은 쌀가루크로켓으로 아이에게 건강을 선물해주세요. 아이들 생일잔치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일품 간식이랍니다.

재료(4인분)

애호박(1/5개), 당근(1/5개), 양파(1/2개), 감자(1개), 현미밥(2공기), 달걀(3개), 쌀가루(2컵), 양념 소금(약간)

만들기

1 애호박, 당근, 양파는 사방 0.5cm 크기로 썰어 각각 마른 팬에서 소금을 약간 넣어가며 볶은 뒤 식힙니다.

2 감자는 껍질을 벗겨 냄비에 물을 붓고 완전히 삶아 뜨거울 때 으깨줍니다.

3 볼에 현미밥, 감자, 애호박, 양파, 당근을 넣고 소금으로 간해가며 버무려 지름 2cm 크기로 완자를 빚습니다.

4 달걀을 풀어 완자를 완전히 적시고 쌀가루를 입히는 과정을 두 번 하여 160℃로 달군 식용유에 넣고 노릇하게 두 번 튀겨냅니다.

이보은 요리연구가 & 자료 제공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요리연구가 겸 푸드스타일리스트 이보은님은 20여 년간 건강 요리를 알리는 데 힘써왔습니다. 현재 쿡피아쿠킹스튜디오 대표이며 저서로 <행복한 아침밥상>(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외 다수가 있습니다.

오리지널 그린 컵 Original Green Cup

● 이름은?

오리지널 그린 컵(Original Green Cup). 커피 찌꺼기를 원재료에 추가해서 만든 것은 ‘Coffee+Original Green Cup’이다. 보통은 세라믹 소재로 만들어진 컵을 에코컵이라고 부르는데 일회용 종이컵을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폐기 시 자연 분해, 소각이 어렵다. 그래서 미생물에 의해 자연 분해되도록 옥수수전분을 원료로 만들고 일반적 그린 컵보다는 더 친환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Original Green Cup’이라고 이름 붙였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우리나라의 커피 수입량이 2011년 기준으로 약 12만 톤이다. 커피 문화가 확대되면서 커피 수입량은 점점 증가되고 있는데 이 많은 커피 찌꺼기가 어떻게 활용될까 조사를 해보니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냥 매립할 경우 대량의 메탄이 발생해 지구온난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비료로 사용될 경우는 폐기량에 비해 활용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또한 많은 양의 커피 폐기물은 동물과 가축 사료로 사용되는데 다량의 카페인이 동물의 몸에 들어가게 되면 가축들에게는 물론 인간에게까지 잠재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린디자이너로서 이러한 생태 윤리적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폐기물을 자원화시키면 어떨까 생각하여 생분해성 옥수수전분과 커피 찌꺼기를 접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V’자 홈을 추가해 티백 음료를 마실 때의 불편함을 해결했다.

● 일반 컵과 가장 다른 점은?

원료가 친환경적일 뿐 아니라 제품 생산의 전 과정에서 환경 유해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제품 포장 등의 작업을 장애인 친구들이 정성스레 해주고 있다. 덕분에 작은 행복과 희망을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에코준컴퍼니 멤버들도 더 보람을 느낀다.

● 주변의 반응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 iF, red dot, IDEA를 모두 수상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뉴욕현대미술관 MoMA 입점,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수출도 확대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품질 좋은 그린디자인 제품을 개발하여 친환경 제품, 또는 사회적기업 제품은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일반 소비자들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싶다. 그리고 그린디자인을 통해 환경, 사회적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만든 사람 이준서 그린디자이너, ㈜에코준컴퍼니 대표

19집 음반 ‘Hello’ 발표, 조용필의 쇼케이스 현장에 가다

“19집 발매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축하한다’보단 ‘감사하다’가 맞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을 받은 기분이에요.(박정현)” “팬들은 물론 후배 가수들도 조용필 선배님의 새 음악을 기대했습니다. 멋진 앨범 발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자우림 김윤아)”

조용필이 10년 만에 낸 19집 ‘Hello’에 대해 후배 가수들은 ‘축하’가 아닌 ‘감사’를 표했다. 이것은 쇼케이스 현장에 찾아온 팬들과 기자들도 마찬가지 분위기였다.

왜 ‘축하’가 아닌 ‘감사’일까. 단지 선배라서? 아니다. 그것은 조용필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가수라는 데 있다. 그의 신곡 ‘Bounce’가 발표됐을 때 놀라웠던 것은 ‘조용필이 여전히 오빠’인 옛 세대들의 열광적인 반응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필이 누군지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조차 ‘너무나 세련된 곡’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감동의 실체였다.

지드래곤은 SNS를 통해 ‘Bounce’의 가사를 적어 자신의 팬심을 알렸고, 태양은 “Wow, 조용필 선배님… 미리듣기 음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킬까 겁나~”라고 그 곡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것은 그저 젊은 가수들의 예우가 아니었다. 조용필 19집 앨범의 수록곡들은 그 음악적 트렌드가 모두 현재에 닿아 있었다. ‘Bounce’나 ‘Hello’는 모던 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하드록의 느낌까지 덧붙여진 데다, 조용필 특유의 지극히 한국적인 감성의 보컬이 만난 특정 장르를 얘기하기 어려운 그런 곡이다.

한국 나이 64세, 데뷔 45년을 맞는 조용필이라는 가수와 모든 음악적 장르와 요소들이 모두 녹아 있는 느낌이다. 사실 이미 그가 가수로서 쌓아올린 것들은 대단하다.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친구여’가 교과서에 수록됐고, 국내 최초로 단일 앨범 ‘창밖의 여자’ 100만 장 돌파, 국내 최초 음반 총판매량 1천 장 돌파, 국내 대중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공연,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로 팬클럽 ‘오빠부대’ 탄생,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로 선정 등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기록들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방송사에서 5~6년째 가수왕을 연속 수상하던 그는 1987년 후배들을 위해 더 이상 상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며 진정한 가수왕의 면모를 보인 바 있다. 때문에 후배들조차 단순히 후배를 넘어 진정한 팬으로서 19집 를 통해 최고령 1위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우고 있는 조용필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표하게 되는 게 아닐까.

‘정말 아들 뻘인 내가 들어도 촌티는커녕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아버지와 제가 함께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앨범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곡에 쏟아지는 젊은 세대들의 공감은 그가 노래를 통해 세대와 시간과 국적과 장르를 넘어 소통시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어떻게 노래 한 곡으로 이렇게 모든 벽을 허물어낼 수 있을까.

조용필은 그래서 그 존재 자체가 감동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무수한 장르를 통과해내면서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원숙함이 묻어나고, 어떻게 들으면 민요 가락 같은 한이 섞인 듯한 그 목소리는 강렬한 록에 얹어지면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는 모던하고 세련된 노래로 탄생한다. 그러니 그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나 그 세월을 앞으로 살아낼 젊은 세대들에게나 조용필은 그 자체가 희망이고 감사일 수밖에.

조용필이 가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노래가 좋거나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모든 걸 연결해주고 소통시켜주는 ‘노래’가 되기 때문이다.

쇼케이스에서 사회를 본 김제동은 조용필에게 “이제 19집을 내셨으니 열아홉 청년”이라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스무 살 청년 조용필의 노래 역시 또 듣기를 희망한다.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모든 빛깔과 아름다움을 한번에 품다, 티베트

글&사진 이용한 시인, 여행가

해발 4,718m에 자리한 남쵸는 티베트에서 가장 높고 넓은 호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신성한 호수로 알려져 있다. 사실 티베트에는 남쵸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호수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티베트인들의 관념 속에서 남쵸는 티베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로 인식되고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하늘호수. 남쵸는 워낙에 넓은 호수인지라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만도 20여 일이 걸린다. 그럼에도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라 순례자가 적지 않고, 심지어 호수 한 바퀴를 오체투지로 도는 순례자까지 있다. 해발 4,718m, 길이 70km, 폭 30km, 수심 약 35m. 이것이 눈에 보이는 남쵸의 모습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남쵸의 본질은 이곳이 하늘과 맞닿은 ‘하늘호수’라는 것이고, 티베트인의 관념 속에 가장 신성한 호수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토록 남쵸를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지 남쵸에 가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쵸에 이르러 하늘을 닮은 호수와 호수를 닮은 하늘, 연이어 펼쳐진 만년설 봉우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숨이 턱 막힌다. 아무리 봐도 호수의 빛깔은 신비롭기만 하다. 푸른색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빛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보석!

라싸 버스터미널에서 시가체행 버스에 오른다. 라싸에서 시가체까지는 280km. 버스를 타면 5시간쯤 걸린다. 버스 안은 여기저기서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로 뿌옇고 매캐하다. 5시간이나 이런 버스를 타고 가자니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버스 안에서 ‘뽕짝’처럼 흘러나오는 티베트 노래가 짜증 난 마음을 달랬다. 버스는 예정보다 4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 험한 강줄기와 가파른 산굽이를 휘영청 돌아가는 길. 거의 300도에 가까운 굽잇길에서도 버스는 상관없다는 듯 추월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승객들은 이골이 났다는 듯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른다. 1시간 40분을 달려 버스는 노천 휴게소에서 10분간 정차했다. 건물이라곤 과자 부스러기와 음료수를 파는 쓰러져가는 흙집이 한 채 있고, 변변한 화장실도 없는 곳. 남자들은 모두 강을 향해 소변을 보고, 여자들은 건물 뒤로 돌아가 일을 본다. 라싸를 출발한 지 4시간 50분, 드디어 시가체에 도착했다. 티베트 제2의 도시임에도 시가체는 라싸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전혀 번잡하지가 않다. 나는 버스 정류장 인근의 여관에 짐을 풀고, 걸어서 외곽의 들판까지 나갔다. 유채밭과 감자밭이 펼쳐지고, 칭커밭이 에두른 시가체 들판은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우리나라 시골보다도 훨씬 시골다웠다.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우마차가 다니는 농로가 길게 뻗어 있고, 그 길로 농부가 마차를 끌거나 당나귀를 몰고 간다. 어떤 아낙은 푸성귀가 가득한 망태기를 지고 총총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손을 흔들면 이웃이라도 되는 듯 반갑게 손을 마주 흔들어준다. 시가체에 당도한 뒤부터 비로소 느긋한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서 나는 최대한 티베트의 시간을 즐겼다. 당나귀 걸음으로 그 시간을 따라갔다.

여행은 타임슬립 Timeslip(시간을 앞질러가거나 거슬러가는 일)이다. 이를테면 티베트의 산중 마을에서 나는 30년 전의 내 어린 시절을 경험했다. 몽골 알타이에서는 전혀 다른 행성에 와 있다는 희한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라오스에서는 원시의 풍경 속에서 벌거벗은 아이들과 멱을 감았고, 벨기에의 몇몇 도시에서는 갑자기 중세 시대로 떨어져 성당과 종탑을 기웃거렸다. 전혀 다른 지층 연대로 나를 이끈 타임머신은 종종 연착되긴 했지만, 커다란 고장 없이 나를 현실 세계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시차 적응에 애를 먹었다. 30년 전 지층 연대를 당나귀의 걸음으로 거닐다가 느닷없이 공항버스를 타고 시속 100km로 달리자니 현기증이 났다. 버려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컴퓨터 메일함에는 수백 통의 메일이 쌓여 있었다. 나는 다시 호전적이고 경쟁적이며 이기적인 세상에 던져져 있었다.

이용한님은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순수한 풍경과 사람, 고양이를 담아온 사진가이기도 한 님은 시집 <안녕, 후두둑씨>,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고양이 시리즈 <명랑하라 고양이> 등을 펴냈으며, 여행 에세이로는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등 다수가 있습니다.

 

고택의 정원

한여름 배롱나무 꽃이 활짝 핀 충남 논산 명재고택의 앞마당. 자줏빛 꽃이 핀 맥문동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원 하면 자로 잰 듯 잘 다듬어 놓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이탈리아의 빌라 정원 등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은 모습을 연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원은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원인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 선조들은 인위적으로 조경을 하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산과 개천을 정원으로 여기고 감상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한국 정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 & 글 황진수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이다. 그것도 숲으로 가득 차 있다. 해발고도 1km 안팎의 산들이 백두대간 산맥으로 북에서 남쪽으로 핏줄 흐르듯 뻗어 내려가며 수많은 작은 산들과 개천이 형성된 지형이다. 아기자기한 산들과 굽이치는 강과 개천, 그리고 절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다. 이렇듯 어디에 집 짓고 살든지 담장 너머 산이 보였기 때문에 굳이 집 안에 따로 정원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정원을 손수 집 안에 가꾸기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차경하여 자신의 정원으로 삼았다. 마당에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어봐야 앞산, 뒷산에 피는 꽃과 나무들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한옥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한국 정원을 자연 친화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이 만들어낸 독특한 정원 양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경남 함양 일두고택 안채 마당 한편의 굴뚝에 한여름 능소화가 싱그럽게 펴 있다.

이 외에도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요소도 정원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은 유교에 근간을 둔 성리학을 바탕으로 안정과 절제를 중요하게 여겼기에 사치스러운 정원을 억제하였고, 관직 생활을 하고 물러난 선비들은 궁궐의 정원을 모방하여 적당한 규모의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네모난 못에 둥근 섬을 가운데 둠) 정원을 조성하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을 중심으로 도교, 불교, 신선사상, 풍수사상 혹은 자신의 정신세계와 염원 등을 담아 정원 이름을 짓기도 하고 형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방지원 연못 또한 성리학적 세계관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 송화댁은 넓은 마당을 가진 덕에 소나무숲 길 사이에 집을 지어 놓은 듯 보인다. 마당엔 꽃들이 많이 심겨 있어 야생의 들판을 보는 듯하다.

↓ 충남 논산 명재고택 한편의 담장 아래 화원. 건축물과 식물의 공존이 아름답다.

정원은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곳이다. 산수정원은 정자를 지어놓음으로 완성되는데, 정자가 없는 자연은 단지 자연일 뿐이지만 경관이 좋은 장소에 정자를 세우면 그것은 정원이 된다. 정자는 인간이 자연에서 머물며 감상하는 곳으로 만들어주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원을 담기 위한 지난 4년여의 세월…. 자연의 품은 언제나 그렇듯이 넉넉하고 아늑했고, 일상 속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치유의 공간과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다.

황진수님은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수료했다. 2001년부터 패션사진가로 활동하였으며, 2007년부터 왕가제례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시작으로 <신의정원, 조선왕릉>(2009) <한국정원>(2012) 등 정원 연작 작업과 <10년간의 세계여행사진> 사진 작업을 병행하고 있고 서울을 주제로 한 사진집이 올해 발간 예정이다.

선생님과 선생놈

오래전, 나는 우리 반 한나를 데리고 ‘군내 가훈 자랑 대회’에 출전하였다. 애석하게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들과 인솔 교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은 늦어지고,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해진 목소리 하나가 풀 죽은 정적을 깨뜨렸다.

“무슨 심사를 그따구로 하고 말이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저 안쪽에 중학생을 데리고 출전한 인솔교사가 보였다. 그는 초면이지만 그 앞에 앉은 중학생은 알 만했다. 그 학생은 ‘내 어머니 두 눈에서 옥구슬 같은 눈물이 똑똑똑 떨어지고~’라는 식의 연설을 하였다. 중학생에겐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파극 분위기여서, 누가 들어도 인솔 교사가 써준 원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로 억울한 사람은 나였다. 한나는 내가 발굴하고 지도했다. 만약 청중이 아이의 발표를 귀담아 들어주기만 한다면, 입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 걸, 나는 확신했다. 한나는 어릴 때 서울에서 살았기에 세련된 표준말을 구사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도 있었다.

읍내 극장은 수많은 관중으로 꽉 찼다. 인솔 교사인 나는 청중석 맨 뒷줄에 서서 대회를 지켜보았다. 관에서 주관하는 계몽 행사가 그렇듯, 동원된 학생들은 연사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때로는 읍소로 때로는 웅변으로 계몽하려 했지만 청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마침내 한나 차례가 되었다. 관중들은 어린 연사에게 잠시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어수선해졌다.

열한 살 아이는 부끄러운 듯 단상에 섰다. 그리고 연습한 대로 심호흡 한 번을 하고 천천히 발표를 시작했다. 한나가 살고 있는 외딴집과 꼬부랑 외할머니와 착한 오빠 이야기가 동화처럼 흘러나왔다. 이전의 연사들과는 사뭇 다른 말투와 생경한 소재. 그것은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처럼 천천히 파문을 일으켰다. 한나는 힘들지만 외롭지 않은 이유와 가난하지만 행복한 까닭을 이야기했다. 보이지 않는 감동의 물결이 서서히 대회장을 적셨다. 어느새 모든 시선이 작은 연사를 향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한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어머, 어떻게! 원고를 잊었나 봐.”

관중석에서 안타까운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집중된 수많은 시선이 부담스러웠을까. 잠시 머뭇거리던 연사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그냥 단상을 내려왔다. 아뿔싸! 당황한 아이는 단상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다행히 아이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무릎을 털고 제자리로 들어갔다. 맨 뒷줄의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린 채 ‘어어’ 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짧은 순간에 끝나 버렸다.

“진짜로 아깝다, 그쟈?”

갈비탕이 나오자, 나는 비로소 심중에 있던 말을 하였다. 잘하는 법만 지도했지 실수했을 때 추스르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내 불찰이다. 한나도 그저 웃었다. 아무튼 갈비탕이 나왔고 나는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만 만땅 중학교 선생의 한마디에 내 목구멍이 ‘켁’ 하고 막혀 버렸다.

“아까 그 초등학생이 넘어질 때, 담임 선생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데? 그게 선생이야, 그게? 교육이 다 틀려먹었어!”

그는 그 선생놈이 나인 줄 모르고 애먼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이런 젠장! 신파극 변사 같은 선생 같으니라구!’ 달려가 상투잡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어린 학생 앞에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못 들은 척 갈비탕에 코를 박았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개미에게 배우다

글 & 사진 제공 김병진

개미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곤충입니다. 항상 무언가를 부지런히 나르고,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개미들. 그래서 개미 하면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서 들은 대로 매우 부지런한 미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빗대듯이 구약성경 잠원 6장에는 ‘이 게으른 자들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의 지혜를 배우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직 개미 연구에만 30년 넘게 매달려온 분이 있습니다. ‘개미박사’라 불리는 원광대학교 생명과학부 김병진(67) 명예교수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곤충학회(ICE)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개미박사 김병진 교수가 전해주는 개미에게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 편집자 주

전 세계적으로 개미는 만여 종이 넘습니다. 그중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개미는 145종임을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내 고향 강원도 횡성은 두메산골입니다. 그곳은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늘까지 보일 정도로 청정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인구 밀도가 낮아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곤충도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반딧불이를 여러 마리 잡아 호박꽃 속에 넣어 등불을 만들어서 책을 읽은 적도 있습니다. 여름철 집 앞에 있는 맑은 냇물에서 수영할 때 물 위로 암수 물잠자리가 교미하며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헬리콥터 같았습니다.

내가 살던 초가집 마루 밑에는 댓돌이 하나가 있었는데 비가 오려고 하면 댓돌 밑으로 엄청난 수의 개미들이 땅속에서 나와서 부지런히 움직이곤 했습니다. 볼거리도 없고 장난감도 없는 두메산골에서 살던 나는 너무나 흥미진진한 개미들의 행동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개미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대학원 지도 교수님이신 김창환 교수님(당시 대학원장)이 개미를 연구 과제로 주신 것입니다. 개미를 채집하기 위해 우리나라 거의 모든 유명 산과 섬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군사 지역인 백령도로 개미 채집을 나갔다가 간첩으로 오인받아 고생하기도 했고, 알프스 산에서 채집하다가 미끄러져 난간에서 떨어질 뻔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뿔개미를 채집하다 물려 손이 퉁퉁 부어 한 달 동안 고생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개미는 2억 년 전에 지구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간이 4백만 년 전에 지구에 출현했으니 개미가 인간의 대선배인 셈입니다. 개미는 열대지방에서 극지방까지 정복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동안 지구 환경이 수없이 변해왔지만 그들은 멸종하지 않고 1만 종이 넘게 다양성을 보이며 진화해 지구를 덮고 있습니다.

지구 상에서 개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로 땅속에 굴을 파고 사는 개미는 땅을 파서 위로 올리고 위의 흙을 밑으로 보내기 때문에 땅을 비옥하게 하고 통기성을 좋게 하여 식물을 잘 살게 해줍니다. 또한 목수개미는 죽은 나무를 파고 들어가 굴을 만들어 집을 짓기 때문에 나무를 빠르게 부식시켜 토양을 비옥하게 합니다. 수확개미는 풀씨나 작은 나무 열매를 물고 집으로 가져오는 중 여기저기 떨어뜨려 식물의 씨앗을 전파시켜 널리 퍼져 번식하도록 도와줍니다. 매우 빠르고 힘이 센 불개미는 농작물과 삼림을 가해하는 해충의 애벌레를 잡아먹어 농작물이나 산림을 보호합니다.

더욱 놀라운 건 개미는 이미 2억 년 전부터 농사를 지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개미는 섬유소를 소화시키는 셀룰라아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나뭇잎을 직접 먹을 수 없어, 나뭇잎을 잘라 땅속에서 곰팡이를 길러 먹고 사는 종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딧물의 알을 물어다 땅속에 파묻어 놓았다가 그 이듬해 봄에 잎이 피면 알을 물어다 놓아기르고 그 진딧물의 엉덩이에서 나오는 단물을 빨아 먹으면서 사는 종도 있습니다. 가축을 길러 먹는 목축업을 해온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이기적 유전자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유전자들은 자기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개미 집단은 군서를 형성합니다. 한집에서 살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하나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왕개미는 하늘에 올라가 수개미와 신혼비행을 하여 교미 후 땅에 내려와서 집을 짓고 알을 낳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여왕개미는 새나 다른 곤충에 의해 잡아먹히고 극히 소수의 여왕개미만이 땅에 내려와 안착합니다. 여왕개미가 낳은 소수의 알들이 부화돼 일개미가 되면 집을 짓고 먹이를 물어옵니다. 일개미는 온갖 정성을 다해 여왕개미를 보필하며 동생들을 키웁니다. 여왕개미는 계속 알을 낳고 가족은 점점 많아져서 완전한 개미집이 됩니다.

무엇보다 개미에게서 감동적인 것은 동료애, 우정입니다. 개미를 유심히 살펴보면 개미들이 더듬이로 의사소통을 한 뒤 앞다리로 서로 붙잡고 일어서서 입을 마주대고 뽀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 종류의 개미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자신이 먹어치우지 않고 집에 있는 동료 개미들을 위하여 모이주머니에 일시적으로 저장하였다가 집에 가서 토해 동료에게 먹여줍니다. 개미에게는 자신의 먹이를 위한 위와 동료를 먹이기 위한 위가 있으며, 먹이를 먹을 때마다 자신을 위하여 먹을 것인가, 동료를 위하여 먹을 것인가 생각하면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자신의 위로 보내지 않고, 어떻게 남을 위해 임시 저장소(사회성 위)에 저장시킬 수 있을까? 눈물겨운 이타적 행동입니다.

인간이 지구에 출현한 것은 4백만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구가 생성된 지 46억년이 흘렀고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은 사람보다 늦게 나타난 존재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윌슨(Wilson)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10년이 지나도 지구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개미가 없어진다면 생태계에 큰 교란이 일어나 장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이 있습니다. 개미 역시 이미 2억 년 전 지구에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묵묵히 농경문화를 정착시켰고 목축업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자기가 먹은 먹이를 동료에게 토해주는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인간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개미의 지혜를 배울 때라고 생각합니다.

개미박사 김병진님은 1947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고려대 생물학과와 동대학원을 거쳐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원광대 생명과학부 교수, 영국 CEH에서 교환교수(1987~1988년)로 재직하며 개미 생태를 연구했으며, 2008년 대구에 세계곤충학회(ICE)를 성공적으로 유치, 개최한 바 있습니다. 2004년 한국 최초로 세계곤충학회(ICE) 운영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현재 원광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최종일 대표, 전 세계 아이들의 대통령 뽀로로 기획자

노란색 공군 헬멧과 주황색 고글을 쓴 귀여운 꼬마 펭귄 ‘뽀로로’. 2003년 11월 EBS를 통해 TV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가 첫선을 보인 뒤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우는 아이들 울음조차 뚝 그치게 한다는 신통방통한 뽀로로는 순식간에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전 세계 130여 개국에 수출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평가받았다. 8년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뽀로로를 탄생시킨 ‘뽀로로 아빠’ 아이코닉스 최종일(49) 대표를 만나보았다.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뽀로로. 도대체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아이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뽀롱뽀롱 뽀로로>에는 주인공 뽀로로를 비롯해 아기 공룡 크롱, 사막여우 발명왕 에디 등 여러 동물 친구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는 아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그 결과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2010년 서울산업통상진흥원에 따르면 뽀로로 브랜드 가치는 3,893억. 2006~2008년 대한민국 캐릭터 대상 수상, 장난감, 문구류 등 1,600여 개가 넘는 용품에 붙는 로열티만 연간 120억 이상을 벌어들이는 국내 순수 토종 캐릭터 뽀로로. 프랑스 공중파 방송(TF1)에서 41.7%라는 높은 시청점유율을 기록했고, ‘아랍의 CNN’이라 불리는 알 자지라 방송에도 방영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덕분에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도 달라졌다. ‘애니메이션 하청 공장’에서 ‘창작 애니메이션의 요람’으로 바뀐 것이다. 2011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창의성 아이콘’ 1위로 꼽힌 뽀로로는 현재 4차 시리즈까지 방영됐으며, 올 하반기부터 5차 시리즈가 방영될 예정이다. 올해로 10살이 된 뽀로로는 한국 방문의 해 홍보대사, 대한민국전자정부 홍보대사, 국제기아대책회의 홍보대사 등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 뽀로로를 탄생시킨 최종일 대표.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를 새롭게 썼다고 평가받는 그는, 동그란 안경 너머로 선한 웃음 지으며 한눈에 뽀로로 아빠임을 짐작케 했다.

세계적으로 뽀로로가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이 이렇게까지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구나 싶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디자인을 할 때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더욱 신중하게 고려해요. 정크 푸드라든지 무기류 장난감 같은 것은 라이선스 사업 자체를 안 하고, 아이들이 따라 할 우려가 있으면 방향을 바꾸죠. 저도 어릴 때 애니메이션을 보고 이층집에서 우산 들고 뛰어내린 적이 있어요. 우산이 낙하산처럼 될 거야 생각하고….(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위험했는데, 아이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거든요.

뽀로로를 통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예요. 나와 다른 게 틀리고 나쁜 게 아니라, 그 방식대로 착할 수 있고 사려 깊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아이들도 나름의 세계관이 있거든요. 성격이나 관점이 다 다르니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도 다르죠. 때론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답을 알려주지 않아도 현명하게 그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거다, 다른 친구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보면서 내가 틀릴 수도 있구나…, 하고 그렇게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뽀로로가 특히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전의 애니메이션들이 주인공은 언제나 정의롭고 악당은 늘 악했다면, 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착해도 완벽하지는 않잖아요. 때론 실수도 하고 질투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뽀로로에 나오는 아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다 착하지만 개성이 강하죠. 내성적인 아이도 있고 호기심 많은 아이도 있고 나대는 아이도 있고. 그런 캐릭터들이 아무래도 자기와도 많이 닮아 있다 보니까 공감하고 좋아해주는 거 같아요.

사실 뽀로로가 나오기 전까지
한국 애니메이션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에 광고 회사를 다녔는데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나는 무얼 원했을까. 무얼 좋아하나? 그러다 떠올랐어요. ‘아, 내가 만화 보고 애니메이션 보면서 꼬박 밤을 새웠는데… 이 일을 정말 좋아했구나.’ 근데 과연 직업으로 가능할까. 그걸 알고 싶어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당시 저는 ‘미국은 애니메이션으로 디즈니랜드도 만들고, 디즈니채널도 만드는데 우리는 왜 제작만 할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우리의 제작 노하우에다 기획력이 결합되면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무렵 회사의 신규 사업으로 애니메이션사업팀이 꾸려지면서 그는 애니메이션 기획에 뛰어들었고, 첫 작품인 <녹색전차 해모수>를 선보인다. 당시 15%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그는 적잖은 좌절감을 느꼈다. 일본과 미국의 애니메이션에 비해 질적 완성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레스톨 특수구조대> 등 여러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지만 대부분 성과가 좋지 않았다. 많은 비용을 투자한 프로젝트가 실패할 때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다 1997년 IMF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적자를 면치 못하던 애니메이션팀은 해체가 된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2001년 그동안 동고동락하던 동료들과 의기투합하여 회사를 세웠고,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한 <수호요정 미셸>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90% 이상의 적자. 참패였다.

‘그동안 충분히 배웠고 더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망했을까? 그 이유라도 알아보자’는 생각에 바이어들의 의견을 물었고, 의미심장한 답변이 돌아왔다. “애니메이션 완성도는 인정해. 그런데 재미가 없어.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건 즐기기 위해서인데, 미셸을 보면 인생은 무엇인가, 뭔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거 같아.”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애니메이션은 재밌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연이은 실패로 많이 힘들고
두려웠을 텐데요. 그럼에도 계속
도전하게 된 힘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요?

당시 회사 사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망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까지 아주 나쁘게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지인들한테 최소한 1톤 트럭 정도의 중고 트럭을 살 수 있는 돈은 빌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과일하고 야채를 실어서 팔고 다니면 최소한 먹고는 살지 않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면서 평탄하게 사느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 번은 해보고 싶었거든요. 실패한 결과가 풍족하게 살지 못하게 되는 정도라면 그건 감당할 수 있겠다, 그럼 됐다고 생각했죠.

아동용에서 유아용 애니메이션으로
방향을 바꾸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동안의 실패를 경험하며 느낀 건 똑같은 방식은 안 된다는 거였어요. 미셸이 방영될 당시 포켓몬스터가 동시간대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이었죠. 우리가 아무리 잘 만들어도 동시간대 더 재밌는 작품이 방송되면 소용이 없구나, 애니메이션을 하는 이상 일본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연구했습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고, 1년에 300여 개의 작품을 만들어내요. 치열한 경쟁을 거쳐 검증을 받은 작품들이 전 세계로 나가거든요. 하지만 취약점도 있었어요. 유아용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적었거든요. 그게 뽀로로 기획의 출발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 그는 절박함 속에서 매일 자정이 넘도록 전 세계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보며 치열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해외 수출을 위해 사람보다 동물 캐릭터가 유리하다고 판단,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물들을 추려나갔다. 그러다 눈에 띈 게 있었으니, 바로 펭귄이었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들 모습과 닮아 유아용 캐릭터로 적절했던 것. 하지만 당시 펭귄을 소재로 한 영국의 <핑구>란 작품이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그는 핑구와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핑구가 진짜 펭귄에 가까운 모습에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뽀로로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색을 쓰고, 다양한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재미있고 교육적인 스토리를 담았던 것. 드디어 2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뽀로로가 나왔고, 다행히 아이들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애니메이션의 성공이 곧 캐릭터 사업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특성상 전체 매출에서 영상은 10%, 나머지 90%는 캐릭터 사업이 차지하기에 이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산업의 숙원이기도 했다. 당시 국내 시장의 외국 캐릭터 점유율이 90%인 상황에서 그는 뽀로로가 된다는 걸 입증해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동화책을 내기에 이른다. 다행히 한 달 만에 2만 부 이상 팔리면서 캐릭터 사업에도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잖아요. 끝까지 집중해서 완성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프로젝트를 하다가 지치거나 나태해질 때면 열정으로 극복해낸 작가들을 떠올려요. 지독한 끈기와 진정성으로 놀라운 작품을 선보이는 거장들이 있거든요. 제가 존경하는 분이 <나무를 심는 사람>을 만든 캐나다 출신의 애니메이션 작가 프레더릭 백인데 올해로 90세예요. 직접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업은 물론 수만 장의 그림을 일일이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직접 그리시는데, 그건 일에 목숨을 걸지 않고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런 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중하게 되죠.

<태극천자문> <꼬마버스 타요> 등 계속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계신데요,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중요한 건 소재가 아니라 어떻게 요리하느냐라는 걸 요즘 많이 깨닫고 있어요. 무엇보다 아이의 관점으로 보려 노력하죠. 처음에 <타요>를 만들 때도 ‘버스가 무슨 이야기가 되겠어?’란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근데 어른과 아이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거든요. 어른들에게 버스는 대중교통 수단지만 아이들에겐 택시보다 큰 차가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어른의 관점으로 많이 판단하는구나 느껴요. 여전히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워가는 중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는데, 그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창의력은 기발한 상상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철저한 노력과 고민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뽀로로도 결국 무수한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들을 바탕으로 창작된 거거든요. 결국 누가 조금 더 연구하고 준비하고 노력했느냐에 따라 창의적인 콘텐츠가 나오지 소위 천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존 작품도 중요한 게 분명히 배울 게 있거든요.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거기에 생각을 더하면 새로운 게 나올 수 있으니까요.

꿈을 향해 도전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에디슨은 100번 이상의 실험을 거쳐 불이 켜지는 전구를 만들어냈다고 해요. 그 이후 기자들이 많은 실패에도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냐고 물으니까 에디슨은 그동안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답했다고 하죠. ‘그동안 100가지가 넘게 불이 켜지지 않는 방법을 알았고, 마지막에 불이 켜지는 한 가지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다.’ 뼈아픈 실패조차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구나 생각하면 도전 중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뽀로로 이야기 중에 ‘하늘을 날고 싶어요’ 편이 있다. 새인데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펭귄 뽀로로는 하늘을 날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않던 뽀로로는 어느 날 자신만의 특징을 알게 된다. 다른 어떤 새들보다 바닷속에서만큼은 훌륭하게 날듯이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뽀로로는 바닷속을 날듯이 헤엄치며 행복해한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자신만의 장점을 찾아가는 뽀로로의 모습이 흡사 자신이 걸어온 길과 비슷해서일까, 최종일 대표 또한 이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제가 어렸을 때 미국,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면 이제는 많은 아이들이 우리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꿈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뽀로로는 어느새 ‘뽀통령(뽀로로 대통령)’이라 불릴 만큼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뽀통령이 꿈꾸는 나라는 생김새는 다 달라도 자기만의 장점을 잘 살리며 모두 친구가 되어 사는 나라다. 뽀로로는 반드시 그 꿈을 이뤄낼 것이다.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하고, 포기하지 않는 아빠 최종일을 꼭 닮았으니 말이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