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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그린 컵 Original Green Cup

● 이름은?

오리지널 그린 컵(Original Green Cup). 커피 찌꺼기를 원재료에 추가해서 만든 것은 ‘Coffee+Original Green Cup’이다. 보통은 세라믹 소재로 만들어진 컵을 에코컵이라고 부르는데 일회용 종이컵을 줄이는 효과는 있지만 폐기 시 자연 분해, 소각이 어렵다. 그래서 미생물에 의해 자연 분해되도록 옥수수전분을 원료로 만들고 일반적 그린 컵보다는 더 친환경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부각하기 위해 ‘Original Green Cup’이라고 이름 붙였다.

● 어떻게 이런 생각을?

우리나라의 커피 수입량이 2011년 기준으로 약 12만 톤이다. 커피 문화가 확대되면서 커피 수입량은 점점 증가되고 있는데 이 많은 커피 찌꺼기가 어떻게 활용될까 조사를 해보니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그냥 매립할 경우 대량의 메탄이 발생해 지구온난화를 더욱 가속화시키고, 비료로 사용될 경우는 폐기량에 비해 활용이 너무나 비효율적이었다. 또한 많은 양의 커피 폐기물은 동물과 가축 사료로 사용되는데 다량의 카페인이 동물의 몸에 들어가게 되면 가축들에게는 물론 인간에게까지 잠재적인 피해를 입힐 수도 있었다. 그린디자이너로서 이러한 생태 윤리적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폐기물을 자원화시키면 어떨까 생각하여 생분해성 옥수수전분과 커피 찌꺼기를 접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V’자 홈을 추가해 티백 음료를 마실 때의 불편함을 해결했다.

● 일반 컵과 가장 다른 점은?

원료가 친환경적일 뿐 아니라 제품 생산의 전 과정에서 환경 유해 요소를 최대한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제품 포장 등의 작업을 장애인 친구들이 정성스레 해주고 있다. 덕분에 작은 행복과 희망을 함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에코준컴퍼니 멤버들도 더 보람을 느낀다.

● 주변의 반응은?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 iF, red dot, IDEA를 모두 수상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고, 뉴욕현대미술관 MoMA 입점, 미국, 일본, 프랑스, 영국 등 수출도 확대하고 있다. 앞으로도 더 품질 좋은 그린디자인 제품을 개발하여 친환경 제품, 또는 사회적기업 제품은 상품성이 떨어진다는 일반 소비자들의 인식을 조금이나마 바꾸고 싶다. 그리고 그린디자인을 통해 환경, 사회적 가치를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

만든 사람 이준서 그린디자이너, ㈜에코준컴퍼니 대표

19집 음반 ‘Hello’ 발표, 조용필의 쇼케이스 현장에 가다

“19집 발매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축하한다’보단 ‘감사하다’가 맞는 것 같습니다. 좋은 말씀을 받은 기분이에요.(박정현)” “팬들은 물론 후배 가수들도 조용필 선배님의 새 음악을 기대했습니다. 멋진 앨범 발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자우림 김윤아)”

조용필이 10년 만에 낸 19집 ‘Hello’에 대해 후배 가수들은 ‘축하’가 아닌 ‘감사’를 표했다. 이것은 쇼케이스 현장에 찾아온 팬들과 기자들도 마찬가지 분위기였다.

왜 ‘축하’가 아닌 ‘감사’일까. 단지 선배라서? 아니다. 그것은 조용필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가수라는 데 있다. 그의 신곡 ‘Bounce’가 발표됐을 때 놀라웠던 것은 ‘조용필이 여전히 오빠’인 옛 세대들의 열광적인 반응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용필이 누군지 잘 모르는 젊은 세대들조차 ‘너무나 세련된 곡’에 매료되었다는 것이 감동의 실체였다.

지드래곤은 SNS를 통해 ‘Bounce’의 가사를 적어 자신의 팬심을 알렸고, 태양은 “Wow, 조용필 선배님… 미리듣기 음원이 이렇게 좋을 수가…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킬까 겁나~”라고 그 곡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것은 그저 젊은 가수들의 예우가 아니었다. 조용필 19집 앨범의 수록곡들은 그 음악적 트렌드가 모두 현재에 닿아 있었다. ‘Bounce’나 ‘Hello’는 모던 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하드록의 느낌까지 덧붙여진 데다, 조용필 특유의 지극히 한국적인 감성의 보컬이 만난 특정 장르를 얘기하기 어려운 그런 곡이다.

한국 나이 64세, 데뷔 45년을 맞는 조용필이라는 가수와 모든 음악적 장르와 요소들이 모두 녹아 있는 느낌이다. 사실 이미 그가 가수로서 쌓아올린 것들은 대단하다.

국내 대중가요 최초로 ‘친구여’가 교과서에 수록됐고, 국내 최초로 단일 앨범 ‘창밖의 여자’ 100만 장 돌파, 국내 최초 음반 총판매량 1천 장 돌파, 국내 대중 가수 최초로 미국 카네기홀 공연, 한국 대중음악사 최초로 팬클럽 ‘오빠부대’ 탄생, 건국 이후 ‘최고의 가수’로 선정 등 일일이 다 헤아릴 수 없는 기록들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각 방송사에서 5~6년째 가수왕을 연속 수상하던 그는 1987년 후배들을 위해 더 이상 상을 안 받겠다고 선언하며 진정한 가수왕의 면모를 보인 바 있다. 때문에 후배들조차 단순히 후배를 넘어 진정한 팬으로서 19집 를 통해 최고령 1위라는 또 하나의 기록을 세우고 있는 조용필에게 진심으로 존경과 감사를 표하게 되는 게 아닐까.

‘정말 아들 뻘인 내가 들어도 촌티는커녕 가슴을 울리는 뭔가가 있다.’ ‘아버지와 제가 함께 듣고 공감할 수 있는 앨범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곡에 쏟아지는 젊은 세대들의 공감은 그가 노래를 통해 세대와 시간과 국적과 장르를 넘어 소통시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어떻게 노래 한 곡으로 이렇게 모든 벽을 허물어낼 수 있을까.

조용필은 그래서 그 존재 자체가 감동이다. 그의 음악 속에는 무수한 장르를 통과해내면서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원숙함이 묻어나고, 어떻게 들으면 민요 가락 같은 한이 섞인 듯한 그 목소리는 강렬한 록에 얹어지면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는 모던하고 세련된 노래로 탄생한다. 그러니 그의 음악을 들으며 함께 살아온 이들에게나 그 세월을 앞으로 살아낼 젊은 세대들에게나 조용필은 그 자체가 희망이고 감사일 수밖에.

조용필이 가왕이라 불리는 이유는 단지 노래가 좋거나 노래를 잘 불러서가 아니다. ‘그’라는 존재 자체가 모든 걸 연결해주고 소통시켜주는 ‘노래’가 되기 때문이다.

쇼케이스에서 사회를 본 김제동은 조용필에게 “이제 19집을 내셨으니 열아홉 청년”이라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스무 살 청년 조용필의 노래 역시 또 듣기를 희망한다.

정덕현 문화칼럼니스트

 

모든 빛깔과 아름다움을 한번에 품다, 티베트

글&사진 이용한 시인, 여행가

해발 4,718m에 자리한 남쵸는 티베트에서 가장 높고 넓은 호수일 뿐만 아니라 가장 신성한 호수로 알려져 있다. 사실 티베트에는 남쵸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한 호수가 있긴 하지만 지금까지 티베트인들의 관념 속에서 남쵸는 티베트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높은 호수’로 인식되고 있다. 하늘과 맞닿아 있는 하늘호수. 남쵸는 워낙에 넓은 호수인지라 걸어서 한 바퀴 도는 데만도 20여 일이 걸린다. 그럼에도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라 순례자가 적지 않고, 심지어 호수 한 바퀴를 오체투지로 도는 순례자까지 있다. 해발 4,718m, 길이 70km, 폭 30km, 수심 약 35m. 이것이 눈에 보이는 남쵸의 모습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남쵸의 본질은 이곳이 하늘과 맞닿은 ‘하늘호수’라는 것이고, 티베트인의 관념 속에 가장 신성한 호수로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왜 그토록 남쵸를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지 남쵸에 가보지 않고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쵸에 이르러 하늘을 닮은 호수와 호수를 닮은 하늘, 연이어 펼쳐진 만년설 봉우리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숨이 턱 막힌다. 아무리 봐도 호수의 빛깔은 신비롭기만 하다. 푸른색이 낼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빛깔과 아름다움을 한꺼번에 품고 있다. 아름답게 빛나는 푸른 보석!

라싸 버스터미널에서 시가체행 버스에 오른다. 라싸에서 시가체까지는 280km. 버스를 타면 5시간쯤 걸린다. 버스 안은 여기저기서 피워 올리는 담배 연기로 뿌옇고 매캐하다. 5시간이나 이런 버스를 타고 가자니 저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버스 안에서 ‘뽕짝’처럼 흘러나오는 티베트 노래가 짜증 난 마음을 달랬다. 버스는 예정보다 4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 험한 강줄기와 가파른 산굽이를 휘영청 돌아가는 길. 거의 300도에 가까운 굽잇길에서도 버스는 상관없다는 듯 추월을 한다. 그때마다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승객들은 이골이 났다는 듯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른다. 1시간 40분을 달려 버스는 노천 휴게소에서 10분간 정차했다. 건물이라곤 과자 부스러기와 음료수를 파는 쓰러져가는 흙집이 한 채 있고, 변변한 화장실도 없는 곳. 남자들은 모두 강을 향해 소변을 보고, 여자들은 건물 뒤로 돌아가 일을 본다. 라싸를 출발한 지 4시간 50분, 드디어 시가체에 도착했다. 티베트 제2의 도시임에도 시가체는 라싸에 비해 훨씬 조용하고, 전혀 번잡하지가 않다. 나는 버스 정류장 인근의 여관에 짐을 풀고, 걸어서 외곽의 들판까지 나갔다. 유채밭과 감자밭이 펼쳐지고, 칭커밭이 에두른 시가체 들판은 내가 어린 시절에 보았던 우리나라 시골보다도 훨씬 시골다웠다.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우마차가 다니는 농로가 길게 뻗어 있고, 그 길로 농부가 마차를 끌거나 당나귀를 몰고 간다. 어떤 아낙은 푸성귀가 가득한 망태기를 지고 총총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손을 흔들면 이웃이라도 되는 듯 반갑게 손을 마주 흔들어준다. 시가체에 당도한 뒤부터 비로소 느긋한 여행자가 된 기분이었다. 거기서 나는 최대한 티베트의 시간을 즐겼다. 당나귀 걸음으로 그 시간을 따라갔다.

여행은 타임슬립 Timeslip(시간을 앞질러가거나 거슬러가는 일)이다. 이를테면 티베트의 산중 마을에서 나는 30년 전의 내 어린 시절을 경험했다. 몽골 알타이에서는 전혀 다른 행성에 와 있다는 희한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라오스에서는 원시의 풍경 속에서 벌거벗은 아이들과 멱을 감았고, 벨기에의 몇몇 도시에서는 갑자기 중세 시대로 떨어져 성당과 종탑을 기웃거렸다. 전혀 다른 지층 연대로 나를 이끈 타임머신은 종종 연착되긴 했지만, 커다란 고장 없이 나를 현실 세계로 복귀시켰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시차 적응에 애를 먹었다. 30년 전 지층 연대를 당나귀의 걸음으로 거닐다가 느닷없이 공항버스를 타고 시속 100km로 달리자니 현기증이 났다. 버려두었던 휴대폰의 전원을 켜자 수십 통의 부재중 전화가 와 있었고, 컴퓨터 메일함에는 수백 통의 메일이 쌓여 있었다. 나는 다시 호전적이고 경쟁적이며 이기적인 세상에 던져져 있었다.

이용한님은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1995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길에서 만난 순수한 풍경과 사람, 고양이를 담아온 사진가이기도 한 님은 시집 <안녕, 후두둑씨>, 문화기행서 <사라져가는 오지마을을 찾아서>, 고양이 시리즈 <명랑하라 고양이> 등을 펴냈으며, 여행 에세이로는 <잠시만 어깨를 빌려줘> 등 다수가 있습니다.

 

고택의 정원

한여름 배롱나무 꽃이 활짝 핀 충남 논산 명재고택의 앞마당. 자줏빛 꽃이 핀 맥문동도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원 하면 자로 잰 듯 잘 다듬어 놓은 프랑스 베르사유 궁의 정원, 이탈리아의 빌라 정원 등 사람의 손길이 많이 닿은 모습을 연상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원은 생활 깊숙이 스며들어 있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정원인지 확실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우리 선조들은 인위적으로 조경을 하기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산과 개천을 정원으로 여기고 감상했다. 이런 연유로 우리나라 사람들조차 한국 정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사진 & 글 황진수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지이다. 그것도 숲으로 가득 차 있다. 해발고도 1km 안팎의 산들이 백두대간 산맥으로 북에서 남쪽으로 핏줄 흐르듯 뻗어 내려가며 수많은 작은 산들과 개천이 형성된 지형이다. 아기자기한 산들과 굽이치는 강과 개천, 그리고 절묘하게 생긴 바위들이 많다. 이렇듯 어디에 집 짓고 살든지 담장 너머 산이 보였기 때문에 굳이 집 안에 따로 정원을 조성할 필요가 없었다. 우리 선조들은 정원을 손수 집 안에 가꾸기보다는 아름다운 자연을 차경하여 자신의 정원으로 삼았다. 마당에 꽃을 가꾸고 나무를 심어봐야 앞산, 뒷산에 피는 꽃과 나무들의 아름다움을 따라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한옥은 정원을 가지고 있다. 대개 사람들은 한국 정원을 자연 친화적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나라의 지형적 특성이 만들어낸 독특한 정원 양식이라고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경남 함양 일두고택 안채 마당 한편의 굴뚝에 한여름 능소화가 싱그럽게 펴 있다.

이 외에도 조선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요소도 정원 양식에 영향을 주었다. 조선은 유교에 근간을 둔 성리학을 바탕으로 안정과 절제를 중요하게 여겼기에 사치스러운 정원을 억제하였고, 관직 생활을 하고 물러난 선비들은 궁궐의 정원을 모방하여 적당한 규모의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 네모난 못에 둥근 섬을 가운데 둠) 정원을 조성하기도 했다. 또한 성리학을 중심으로 도교, 불교, 신선사상, 풍수사상 혹은 자신의 정신세계와 염원 등을 담아 정원 이름을 짓기도 하고 형상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방지원 연못 또한 성리학적 세계관인,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 송화댁은 넓은 마당을 가진 덕에 소나무숲 길 사이에 집을 지어 놓은 듯 보인다. 마당엔 꽃들이 많이 심겨 있어 야생의 들판을 보는 듯하다.

↓ 충남 논산 명재고택 한편의 담장 아래 화원. 건축물과 식물의 공존이 아름답다.

정원은 인간과 자연이 만나는 곳이다. 산수정원은 정자를 지어놓음으로 완성되는데, 정자가 없는 자연은 단지 자연일 뿐이지만 경관이 좋은 장소에 정자를 세우면 그것은 정원이 된다. 정자는 인간이 자연에서 머물며 감상하는 곳으로 만들어주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정원을 담기 위한 지난 4년여의 세월…. 자연의 품은 언제나 그렇듯이 넉넉하고 아늑했고, 일상 속에서 지친 마음을 달래주는 치유의 공간과 편안한 안식처가 되었다.

황진수님은 한양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홍익대학원 사진디자인과를 수료했다. 2001년부터 패션사진가로 활동하였으며, 2007년부터 왕가제례 다큐멘터리 사진작업을 시작으로 <신의정원, 조선왕릉>(2009) <한국정원>(2012) 등 정원 연작 작업과 <10년간의 세계여행사진> 사진 작업을 병행하고 있고 서울을 주제로 한 사진집이 올해 발간 예정이다.

선생님과 선생놈

오래전, 나는 우리 반 한나를 데리고 ‘군내 가훈 자랑 대회’에 출전하였다. 애석하게 입상권에는 들지 못했다. 대회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학생들과 인솔 교사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은 늦어지고,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해진 목소리 하나가 풀 죽은 정적을 깨뜨렸다.

“무슨 심사를 그따구로 하고 말이야!”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저 안쪽에 중학생을 데리고 출전한 인솔교사가 보였다. 그는 초면이지만 그 앞에 앉은 중학생은 알 만했다. 그 학생은 ‘내 어머니 두 눈에서 옥구슬 같은 눈물이 똑똑똑 떨어지고~’라는 식의 연설을 하였다. 중학생에겐전혀 어울리지 않는 신파극 분위기여서, 누가 들어도 인솔 교사가 써준 원고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진짜로 억울한 사람은 나였다. 한나는 내가 발굴하고 지도했다. 만약 청중이 아이의 발표를 귀담아 들어주기만 한다면, 입상은 따 놓은 당상이라 걸, 나는 확신했다. 한나는 어릴 때 서울에서 살았기에 세련된 표준말을 구사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도 있었다.

읍내 극장은 수많은 관중으로 꽉 찼다. 인솔 교사인 나는 청중석 맨 뒷줄에 서서 대회를 지켜보았다. 관에서 주관하는 계몽 행사가 그렇듯, 동원된 학생들은 연사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때로는 읍소로 때로는 웅변으로 계몽하려 했지만 청중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마침내 한나 차례가 되었다. 관중들은 어린 연사에게 잠시 관심을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어수선해졌다.

열한 살 아이는 부끄러운 듯 단상에 섰다. 그리고 연습한 대로 심호흡 한 번을 하고 천천히 발표를 시작했다. 한나가 살고 있는 외딴집과 꼬부랑 외할머니와 착한 오빠 이야기가 동화처럼 흘러나왔다. 이전의 연사들과는 사뭇 다른 말투와 생경한 소재. 그것은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처럼 천천히 파문을 일으켰다. 한나는 힘들지만 외롭지 않은 이유와 가난하지만 행복한 까닭을 이야기했다. 보이지 않는 감동의 물결이 서서히 대회장을 적셨다. 어느새 모든 시선이 작은 연사를 향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한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뚝 끊어졌다.

“어머, 어떻게! 원고를 잊었나 봐.”

관중석에서 안타까운 여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집중된 수많은 시선이 부담스러웠을까. 잠시 머뭇거리던 연사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그냥 단상을 내려왔다. 아뿔싸! 당황한 아이는 단상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 다행히 아이는 오뚝이처럼 일어나 무릎을 털고 제자리로 들어갔다. 맨 뒷줄의 나는 너무 놀라 입을 딱 벌린 채 ‘어어’ 하고만 있었다. 그리고 상황은 짧은 순간에 끝나 버렸다.

“진짜로 아깝다, 그쟈?”

갈비탕이 나오자, 나는 비로소 심중에 있던 말을 하였다. 잘하는 법만 지도했지 실수했을 때 추스르는 법을 가르치지 않은 내 불찰이다. 한나도 그저 웃었다. 아무튼 갈비탕이 나왔고 나는 아이와 머리를 맞대고 늦은 점심을 먹기 시작했다. 그런데 불만 만땅 중학교 선생의 한마디에 내 목구멍이 ‘켁’ 하고 막혀 버렸다.

“아까 그 초등학생이 넘어질 때, 담임 선생놈은 코빼기도 안 보이데? 그게 선생이야, 그게? 교육이 다 틀려먹었어!”

그는 그 선생놈이 나인 줄 모르고 애먼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이런 젠장! 신파극 변사 같은 선생 같으니라구!’ 달려가 상투잡이를 하고 싶은 마음이 꿀떡 같았지만, 어린 학생 앞에서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못 들은 척 갈비탕에 코를 박았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개미에게 배우다

글 & 사진 제공 김병진

개미는 우리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곤충입니다. 항상 무언가를 부지런히 나르고, 어디론가 바삐 움직이는 개미들. 그래서 개미 하면 ‘개미와 베짱이’ 우화에서 들은 대로 매우 부지런한 미물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빗대듯이 구약성경 잠원 6장에는 ‘이 게으른 자들아! 개미에게 가서 그들의 지혜를 배우라’고 쓰여 있습니다. 오직 개미 연구에만 30년 넘게 매달려온 분이 있습니다. ‘개미박사’라 불리는 원광대학교 생명과학부 김병진(67) 명예교수입니다. 현재 우리나라 최초로 세계곤충학회(ICE)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개미박사 김병진 교수가 전해주는 개미에게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 편집자 주

전 세계적으로 개미는 만여 종이 넘습니다. 그중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개미는 145종임을 연구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내 고향 강원도 횡성은 두메산골입니다. 그곳은 물속을 헤엄치는 물고기 비늘까지 보일 정도로 청정 지역일 뿐만 아니라 인구 밀도가 낮아서 자연이 잘 보존되고 곤충도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반딧불이를 여러 마리 잡아 호박꽃 속에 넣어 등불을 만들어서 책을 읽은 적도 있습니다. 여름철 집 앞에 있는 맑은 냇물에서 수영할 때 물 위로 암수 물잠자리가 교미하며 날아가는 모습은 마치 헬리콥터 같았습니다.

내가 살던 초가집 마루 밑에는 댓돌이 하나가 있었는데 비가 오려고 하면 댓돌 밑으로 엄청난 수의 개미들이 땅속에서 나와서 부지런히 움직이곤 했습니다. 볼거리도 없고 장난감도 없는 두메산골에서 살던 나는 너무나 흥미진진한 개미들의 행동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대학에 가서 본격적으로 개미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대학원 지도 교수님이신 김창환 교수님(당시 대학원장)이 개미를 연구 과제로 주신 것입니다. 개미를 채집하기 위해 우리나라 거의 모든 유명 산과 섬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군사 지역인 백령도로 개미 채집을 나갔다가 간첩으로 오인받아 고생하기도 했고, 알프스 산에서 채집하다가 미끄러져 난간에서 떨어질 뻔도 했습니다. 영국에서는 뿔개미를 채집하다 물려 손이 퉁퉁 부어 한 달 동안 고생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종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뭐라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개미는 2억 년 전에 지구에 나타난 것으로 추정됩니다. 인간이 4백만 년 전에 지구에 출현했으니 개미가 인간의 대선배인 셈입니다. 개미는 열대지방에서 극지방까지 정복하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그동안 지구 환경이 수없이 변해왔지만 그들은 멸종하지 않고 1만 종이 넘게 다양성을 보이며 진화해 지구를 덮고 있습니다.

지구 상에서 개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주로 땅속에 굴을 파고 사는 개미는 땅을 파서 위로 올리고 위의 흙을 밑으로 보내기 때문에 땅을 비옥하게 하고 통기성을 좋게 하여 식물을 잘 살게 해줍니다. 또한 목수개미는 죽은 나무를 파고 들어가 굴을 만들어 집을 짓기 때문에 나무를 빠르게 부식시켜 토양을 비옥하게 합니다. 수확개미는 풀씨나 작은 나무 열매를 물고 집으로 가져오는 중 여기저기 떨어뜨려 식물의 씨앗을 전파시켜 널리 퍼져 번식하도록 도와줍니다. 매우 빠르고 힘이 센 불개미는 농작물과 삼림을 가해하는 해충의 애벌레를 잡아먹어 농작물이나 산림을 보호합니다.

더욱 놀라운 건 개미는 이미 2억 년 전부터 농사를 지어왔다는 사실입니다. 개미는 섬유소를 소화시키는 셀룰라아제를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나뭇잎을 직접 먹을 수 없어, 나뭇잎을 잘라 땅속에서 곰팡이를 길러 먹고 사는 종들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진딧물의 알을 물어다 땅속에 파묻어 놓았다가 그 이듬해 봄에 잎이 피면 알을 물어다 놓아기르고 그 진딧물의 엉덩이에서 나오는 단물을 빨아 먹으면서 사는 종도 있습니다. 가축을 길러 먹는 목축업을 해온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이기적 유전자라고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유전자들은 자기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개미 집단은 군서를 형성합니다. 한집에서 살고 있는 모든 개체들은 하나의 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왕개미는 하늘에 올라가 수개미와 신혼비행을 하여 교미 후 땅에 내려와서 집을 짓고 알을 낳습니다. 이때 대부분의 여왕개미는 새나 다른 곤충에 의해 잡아먹히고 극히 소수의 여왕개미만이 땅에 내려와 안착합니다. 여왕개미가 낳은 소수의 알들이 부화돼 일개미가 되면 집을 짓고 먹이를 물어옵니다. 일개미는 온갖 정성을 다해 여왕개미를 보필하며 동생들을 키웁니다. 여왕개미는 계속 알을 낳고 가족은 점점 많아져서 완전한 개미집이 됩니다.

무엇보다 개미에게서 감동적인 것은 동료애, 우정입니다. 개미를 유심히 살펴보면 개미들이 더듬이로 의사소통을 한 뒤 앞다리로 서로 붙잡고 일어서서 입을 마주대고 뽀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대다수 종류의 개미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자신이 먹어치우지 않고 집에 있는 동료 개미들을 위하여 모이주머니에 일시적으로 저장하였다가 집에 가서 토해 동료에게 먹여줍니다. 개미에게는 자신의 먹이를 위한 위와 동료를 먹이기 위한 위가 있으며, 먹이를 먹을 때마다 자신을 위하여 먹을 것인가, 동료를 위하여 먹을 것인가 생각하면서 먹어야 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자신의 위로 보내지 않고, 어떻게 남을 위해 임시 저장소(사회성 위)에 저장시킬 수 있을까? 눈물겨운 이타적 행동입니다.

인간이 지구에 출현한 것은 4백만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지구가 생성된 지 46억년이 흘렀고 현재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들은 사람보다 늦게 나타난 존재는 거의 없습니다. 미국 하버드 대학교 윌슨(Wilson)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진다면 10년이 지나도 지구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개미가 없어진다면 생태계에 큰 교란이 일어나 장래를 예측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우리 주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고유한 역할과 기능이 있습니다. 개미 역시 이미 2억 년 전 지구에 나타난 이후 지금까지 묵묵히 농경문화를 정착시켰고 목축업의 창시자가 되었으며 자기가 먹은 먹이를 동료에게 토해주는 우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인간들이 겸손한 마음으로 개미의 지혜를 배울 때라고 생각합니다.

개미박사 김병진님은 1947년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나, 고려대 생물학과와 동대학원을 거쳐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원광대 생명과학부 교수, 영국 CEH에서 교환교수(1987~1988년)로 재직하며 개미 생태를 연구했으며, 2008년 대구에 세계곤충학회(ICE)를 성공적으로 유치, 개최한 바 있습니다. 2004년 한국 최초로 세계곤충학회(ICE) 운영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현재 원광대 생명과학부 명예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최종일 대표, 전 세계 아이들의 대통령 뽀로로 기획자

노란색 공군 헬멧과 주황색 고글을 쓴 귀여운 꼬마 펭귄 ‘뽀로로’. 2003년 11월 EBS를 통해 TV 유아용 애니메이션 <뽀롱뽀롱 뽀로로>가 첫선을 보인 뒤 아이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우는 아이들 울음조차 뚝 그치게 한다는 신통방통한 뽀로로는 순식간에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전 세계 130여 개국에 수출되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콘텐츠로 평가받았다. 8년간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뽀로로를 탄생시킨 ‘뽀로로 아빠’ 아이코닉스 최종일(49) 대표를 만나보았다.

보기만 해도 절로 미소가 번지는 사랑스럽고 귀여운 뽀로로. 도대체 어떤 마술을 부렸기에 아이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뽀롱뽀롱 뽀로로>에는 주인공 뽀로로를 비롯해 아기 공룡 크롱, 사막여우 발명왕 에디 등 여러 동물 친구들이 등장한다. 이들이 벌이는 좌충우돌 에피소드는 아이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고, 그 결과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2010년 서울산업통상진흥원에 따르면 뽀로로 브랜드 가치는 3,893억. 2006~2008년 대한민국 캐릭터 대상 수상, 장난감, 문구류 등 1,600여 개가 넘는 용품에 붙는 로열티만 연간 120억 이상을 벌어들이는 국내 순수 토종 캐릭터 뽀로로. 프랑스 공중파 방송(TF1)에서 41.7%라는 높은 시청점유율을 기록했고, ‘아랍의 CNN’이라 불리는 알 자지라 방송에도 방영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다. 덕분에 세계 애니메이션 시장에서 한국의 위상도 달라졌다. ‘애니메이션 하청 공장’에서 ‘창작 애니메이션의 요람’으로 바뀐 것이다. 2011년 ‘대한민국을 움직이는 창의성 아이콘’ 1위로 꼽힌 뽀로로는 현재 4차 시리즈까지 방영됐으며, 올 하반기부터 5차 시리즈가 방영될 예정이다. 올해로 10살이 된 뽀로로는 한국 방문의 해 홍보대사, 대한민국전자정부 홍보대사, 국제기아대책회의 홍보대사 등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이다.

그 뽀로로를 탄생시킨 최종일 대표. 한국 애니메이션 역사를 새롭게 썼다고 평가받는 그는, 동그란 안경 너머로 선한 웃음 지으며 한눈에 뽀로로 아빠임을 짐작케 했다.

세계적으로 뽀로로가 미치는
영향력이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애니메이션이 이렇게까지 아이들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구나 싶어요.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디자인을 할 때 아이들에게 정서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칠지 더욱 신중하게 고려해요. 정크 푸드라든지 무기류 장난감 같은 것은 라이선스 사업 자체를 안 하고, 아이들이 따라 할 우려가 있으면 방향을 바꾸죠. 저도 어릴 때 애니메이션을 보고 이층집에서 우산 들고 뛰어내린 적이 있어요. 우산이 낙하산처럼 될 거야 생각하고….(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위험했는데, 아이들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거든요.

뽀로로를 통해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예요. 나와 다른 게 틀리고 나쁜 게 아니라, 그 방식대로 착할 수 있고 사려 깊을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아이들도 나름의 세계관이 있거든요. 성격이나 관점이 다 다르니까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식도 다르죠. 때론 티격태격 다투기도 하지만, 어른들이 답을 알려주지 않아도 현명하게 그 방법을 찾아갈 수 있을 거다, 다른 친구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들어보면서 내가 틀릴 수도 있구나…, 하고 그렇게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면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뽀로로가 특히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이전의 애니메이션들이 주인공은 언제나 정의롭고 악당은 늘 악했다면, 저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담아보고 싶었어요. 아이들이 착해도 완벽하지는 않잖아요. 때론 실수도 하고 질투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뽀로로에 나오는 아이들은 기본적으로는 다 착하지만 개성이 강하죠. 내성적인 아이도 있고 호기심 많은 아이도 있고 나대는 아이도 있고. 그런 캐릭터들이 아무래도 자기와도 많이 닮아 있다 보니까 공감하고 좋아해주는 거 같아요.

사실 뽀로로가 나오기 전까지
한국 애니메이션은 성공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많았는데,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전에 광고 회사를 다녔는데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방향으로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러면서 생각했죠. 나는 무얼 원했을까. 무얼 좋아하나? 그러다 떠올랐어요. ‘아, 내가 만화 보고 애니메이션 보면서 꼬박 밤을 새웠는데… 이 일을 정말 좋아했구나.’ 근데 과연 직업으로 가능할까. 그걸 알고 싶어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시작했죠. 당시 저는 ‘미국은 애니메이션으로 디즈니랜드도 만들고, 디즈니채널도 만드는데 우리는 왜 제작만 할까?’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러면서 우리의 제작 노하우에다 기획력이 결합되면 좋은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 무렵 회사의 신규 사업으로 애니메이션사업팀이 꾸려지면서 그는 애니메이션 기획에 뛰어들었고, 첫 작품인 <녹색전차 해모수>를 선보인다. 당시 15%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그는 적잖은 좌절감을 느꼈다. 일본과 미국의 애니메이션에 비해 질적 완성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레스톨 특수구조대> 등 여러 애니메이션을 제작했지만 대부분 성과가 좋지 않았다. 많은 비용을 투자한 프로젝트가 실패할 때마다 ‘이 정도밖에 안 되나’ 하는 자괴감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그러다 1997년 IMF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적자를 면치 못하던 애니메이션팀은 해체가 된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2001년 그동안 동고동락하던 동료들과 의기투합하여 회사를 세웠고, 어린 왕자를 모티브로 한 <수호요정 미셸>을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90% 이상의 적자. 참패였다.

‘그동안 충분히 배웠고 더 좋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왜 망했을까? 그 이유라도 알아보자’는 생각에 바이어들의 의견을 물었고, 의미심장한 답변이 돌아왔다. “애니메이션 완성도는 인정해. 그런데 재미가 없어. 아이들이 애니메이션을 보는 건 즐기기 위해서인데, 미셸을 보면 인생은 무엇인가, 뭔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거 같아.” 아이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겠다고 했지만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는 것을 자각한 그는, 애니메이션은 재밌어야 한다는 원칙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연이은 실패로 많이 힘들고
두려웠을 텐데요. 그럼에도 계속
도전하게 된 힘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걸까요?

당시 회사 사정이 너무 안 좋으니까 망하면 어떻게 될까 상상도 했어요. 그러면서 드는 생각은 지금까지 아주 나쁘게 살아오지 않았으니까 지인들한테 최소한 1톤 트럭 정도의 중고 트럭을 살 수 있는 돈은 빌릴 수 있지 않을까, 거기에 과일하고 야채를 실어서 팔고 다니면 최소한 먹고는 살지 않을까?…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하면서 평탄하게 사느니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한 번은 해보고 싶었거든요. 실패한 결과가 풍족하게 살지 못하게 되는 정도라면 그건 감당할 수 있겠다, 그럼 됐다고 생각했죠.

아동용에서 유아용 애니메이션으로
방향을 바꾸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그동안의 실패를 경험하며 느낀 건 똑같은 방식은 안 된다는 거였어요. 미셸이 방영될 당시 포켓몬스터가 동시간대에 방영됐는데 그야말로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작품이었죠. 우리가 아무리 잘 만들어도 동시간대 더 재밌는 작품이 방송되면 소용이 없구나, 애니메이션을 하는 이상 일본과의 경쟁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해 본격적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을 연구했습니다. 일본은 애니메이션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경쟁력을 갖고 있고, 1년에 300여 개의 작품을 만들어내요. 치열한 경쟁을 거쳐 검증을 받은 작품들이 전 세계로 나가거든요. 하지만 취약점도 있었어요. 유아용 애니메이션은 상대적으로 적었거든요. 그게 뽀로로 기획의 출발이었습니다.

어쩌면 마지막일지 모르는 기회. 그는 절박함 속에서 매일 자정이 넘도록 전 세계 유아용 애니메이션을 보며 치열하게 분석했다. 그 결과 해외 수출을 위해 사람보다 동물 캐릭터가 유리하다고 판단,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동물들을 추려나갔다. 그러다 눈에 띈 게 있었으니, 바로 펭귄이었다.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들 모습과 닮아 유아용 캐릭터로 적절했던 것. 하지만 당시 펭귄을 소재로 한 영국의 <핑구>란 작품이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기에, 그는 핑구와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핑구가 진짜 펭귄에 가까운 모습에다 가족들의 이야기를 담았다면, 뽀로로는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색을 쓰고, 다양한 친구들과의 이야기를 통해 재미있고 교육적인 스토리를 담았던 것. 드디어 2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뽀로로가 나왔고, 다행히 아이들 반응도 좋았다.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애니메이션의 성공이 곧 캐릭터 사업의 성공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 특성상 전체 매출에서 영상은 10%, 나머지 90%는 캐릭터 사업이 차지하기에 이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였다. 그것은 우리나라 애니메이션 산업의 숙원이기도 했다. 당시 국내 시장의 외국 캐릭터 점유율이 90%인 상황에서 그는 뽀로로가 된다는 걸 입증해야 했고, 우여곡절 끝에 동화책을 내기에 이른다. 다행히 한 달 만에 2만 부 이상 팔리면서 캐릭터 사업에도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상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잖아요. 끝까지 집중해서 완성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프로젝트를 하다가 지치거나 나태해질 때면 열정으로 극복해낸 작가들을 떠올려요. 지독한 끈기와 진정성으로 놀라운 작품을 선보이는 거장들이 있거든요. 제가 존경하는 분이 <나무를 심는 사람>을 만든 캐나다 출신의 애니메이션 작가 프레더릭 백인데 올해로 90세예요. 직접 기획하고, 시나리오 작업은 물론 수만 장의 그림을 일일이 그것도 아주 세밀하게 직접 그리시는데, 그건 일에 목숨을 걸지 않고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이거든요. 그런 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다시 집중하게 되죠.

<태극천자문> <꼬마버스 타요> 등 계속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계신데요, 가장 중점을 두는 부분은 무엇인가요?

중요한 건 소재가 아니라 어떻게 요리하느냐라는 걸 요즘 많이 깨닫고 있어요. 무엇보다 아이의 관점으로 보려 노력하죠. 처음에 <타요>를 만들 때도 ‘버스가 무슨 이야기가 되겠어?’란 말을 많이 들었어요. 근데 어른과 아이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거든요. 어른들에게 버스는 대중교통 수단지만 아이들에겐 택시보다 큰 차가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는 전혀 다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어른의 관점으로 많이 판단하는구나 느껴요. 여전히 실패와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배워가는 중입니다.

계속해서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 나가는데, 그 창의력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창의력은 기발한 상상력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철저한 노력과 고민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뽀로로도 결국 무수한 실패를 통해 배운 교훈들을 바탕으로 창작된 거거든요. 결국 누가 조금 더 연구하고 준비하고 노력했느냐에 따라 창의적인 콘텐츠가 나오지 소위 천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기존 작품도 중요한 게 분명히 배울 게 있거든요.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거기에 생각을 더하면 새로운 게 나올 수 있으니까요.

꿈을 향해 도전하는 분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에디슨은 100번 이상의 실험을 거쳐 불이 켜지는 전구를 만들어냈다고 해요. 그 이후 기자들이 많은 실패에도 어떻게 좌절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냐고 물으니까 에디슨은 그동안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답했다고 하죠. ‘그동안 100가지가 넘게 불이 켜지지 않는 방법을 알았고, 마지막에 불이 켜지는 한 가지 방법을 알아냈을 뿐이다.’ 뼈아픈 실패조차 성공으로 가는 과정이구나 생각하면 도전 중에,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거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뽀로로 이야기 중에 ‘하늘을 날고 싶어요’ 편이 있다. 새인데도 하늘을 날지 못하는 펭귄 뽀로로는 하늘을 날기 위해 굉장히 노력한다. 번번이 실패했지만 좌절하지 않던 뽀로로는 어느 날 자신만의 특징을 알게 된다. 다른 어떤 새들보다 바닷속에서만큼은 훌륭하게 날듯이 수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뽀로로는 바닷속을 날듯이 헤엄치며 행복해한다. 수많은 실패를 통해 자신만의 장점을 찾아가는 뽀로로의 모습이 흡사 자신이 걸어온 길과 비슷해서일까, 최종일 대표 또한 이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한다.

“제가 어렸을 때 미국,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꿈을 키웠다면 이제는 많은 아이들이 우리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꿈을 키웠으면 좋겠어요.”

뽀로로는 어느새 ‘뽀통령(뽀로로 대통령)’이라 불릴 만큼 아이들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고 그 뽀통령이 꿈꾸는 나라는 생김새는 다 달라도 자기만의 장점을 잘 살리며 모두 친구가 되어 사는 나라다. 뽀로로는 반드시 그 꿈을 이뤄낼 것이다. 치열하게 연구하고, 고민하고, 포기하지 않는 아빠 최종일을 꼭 닮았으니 말이다.

김혜진 & 사진 최창원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스티벌은 언제였나요? 우리 삶은 늘 축제입니다.

일본 하나비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

안창규 37세.

다큐멘터리 <청춘유예> 감독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 나는 영화감독의 꿈을 안고 살아가는 20대 청년이었다. 하지만 가진 것이 없었던 나는 학비도 벌고, 카메라도 마련할 겸, 일본 아사히신문 배달 장학생에 지원했고, 일본 가나가와현 아츠기시에서 2년의 일정으로 신문 배달을 하며 공부를 했다. 하루에 4시간밖에 잠을 못 잘 정도로 고된 생활이었지만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생활한 지 17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신문 배달소 동료들과 함께 참가했던 하나비(불꽃놀이) 축제는 내 인생의 가장 뜻깊은 축제로 남아 있다.

그때 함께 갔던 배달소의 고토씨. 북해도 출신인 고토씨는 가족들을 북해도에 남겨 두고 이곳까지 와서 신문 배달을 하며 생활을 하고 있는 동료였다. 새벽 1시에 출근해서 신문에 전단지를 넣고 한정된 새벽 시간에 배달을 마쳐야 했기에, 10평 남짓한 공간은 16명의 배달원이 서로 말을 걸 틈새도 없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하는 곳이라 서로에 대해서 이름만 알 정도였다. 일본의 신문 보급소는 삶의 최전선에 놓여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1년에 한 번 고단한 노동에서 벗어나 동료들끼리 술을 마시며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있었다. 일본은 여름이 되면 전 지역에서 불꽃놀이 축제들을 시작하는데 내가 있던 곳은 2,000발 정도를 쏘는 하나비 축제로 유명한 곳이다.

내가 일했던 보급소도 이날만큼은 하나비 축제를 잘 볼 수 있는 옥상을 빌려 고단한 신문 배달에 지친 배달원들이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한다. 그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고토씨의 나이를 물었는데, 많아야 30대 중반이겠지 했다가 중학생 딸을 둔 40대 중후반이란 사실에 깜짝 놀랐다. 고토가 수줍은 듯 웃으며 말했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거든요.”

그 말을 들었을 때 잠시 멍해졌다. 흔히 신문 배달부 하면 일본에서도 밑바닥 인생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신문 배달을 하는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다큐멘터리를 통해 다 같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가졌던 나 자신조차, 내심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었구나 하는 사실에 부끄러워졌다.

옆에 있던 또 한 명의 일본인 아저씨도 잊을 수가 없다. 그에게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꿈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30살이 좀 넘게 되면 카메라를 메고 분쟁 지역을 다닐 거라고 이야기했더니 아저씨가 전쟁이 좋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일본이 벌였던 태평양전쟁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그건 명백히 일본이 저지른 잘못이었다, 내 딸들이 컸을 때는 전쟁이란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그런 직업도 없어졌으면 좋겠다며 맥주를 들이키셨다. 헤어질 즈음 아저씨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이렇게 함께 불꽃놀이를 봤던 걸, 죽는 그날 돌이켜보며 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거 같다. 국적은 다르지만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오늘 밤이 참 행복하다.” 그러면서 하늘로 올라가는 불꽃을 보며 소리치셨다. 나도 따라서 함성을 질렀다.

그날 나는 한 명의 신문 배달부와 평범한 아저씨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다. 그때 나는 고토의 꿈이 무엇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볼 필요가 없었다. 그의 환한 웃음을 보면서 40대 중반 한 사나이의 꿈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늘에는 불꽃들이 춤추고 그의 얼굴에는 아름다움 꿈이 스며들어 있었다.

2004년, 2년 동안의 일본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온 나는 그곳에서 모은 돈으로 카메라를 사고 2008년 대학등록금 관련 단편 다큐 <학교를 다니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란 첫 작품을 발표했고, 퍼블릭액세스 영상제에서 대상을 받았다. 여러 어려움 때문에 다큐멘터리를 포기하고픈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하나비 축제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곤 했다. 지금도 힘겨울 때면 그의 말을 떠올린다. “꿈이 있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스무 살, 브라질에서의

나의 성인식

김채현 23세. 대학생.

전북 익산시 모현동

누구나 그렇겠지만 스무 번째 생일은 내게 무척이나 특별했다. 단순히 ‘스무 살’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처음으로 우물 밖에 나가 더 큰 세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환상적인 축제와 함께.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한 덕분에 19살에 대학교 새내기가 되었다. 당시 나는 교복만 벗었지 여전히 철부지 십 대 여자애였다. 가족과 몇몇 또래 여자애들 품속만 맴돌았던 나는 새로운 사람들이나 환경을 접하면 부담감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이처럼 답답한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 아무 능력도 재주도 없었던 나는 모 기업의 해외 봉사 활동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새내기 파워 하나로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다.

2010년 1월 말에 약 20명의 대학생과 한 팀으로 브라질에 파견되었는데, 그중 내가 막내였다. 운 좋게 합격한 나를 제외하고 우리 팀원 모두는 굉장한 실력자들이었다. 모두가 다양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음악에 소질 있는 한 사람이 유난히 멋져 보였다. 어릴 때부터 비틀즈를 무지 좋아해서 음악에 엄청난 환상이 있었던 나는 그 오빠 한 사람을 더 눈에 담아두었다. 우리 팀은 브라질 파견 기간 동안 비교적 사물놀이에 재주가 있는 10명만이 사물놀이를 공연하기로 했는데, 그 오빠는 그중에서도 꽹과리를 맡았다. 브라질에 있는 동안, 낮에 집 짓기 봉사를 할 때는 노래를 좋아하는 그 오빠를 위해 큰 소리로 노래 부르고 밤이면 사물놀이 연습하는 모습을 구경 가곤 했다.

그러다 나의 스무 번째 생일이 찾아왔다. 그날 그 오빠가 “생일 선물이야” 하면서 비틀즈 앨범 두 장을 건네주었다. 그 순간 멈춰버린 것 같은 시간은 “네 오빠가 나보고 전해주라고 줬어”라는 그 오빠의 말과 함께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친오빠에겐 미안하지만 왜 이렇게 아쉽던지. 그날 밤 심란한 마음에 잠도 못 자고 밖에 혼자 계단에서 앉아 있었다. 그때 그 오빠가 잠깐 담배 피우러 나왔다가 나를 보더니 왜 그러냐고 물어봤고, “그냥 생각이 많아서”라고 대답하자 오빠는 “그럴 땐 별을 봐야 해”라고 해서 같이 별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오빠 눈에는 별이 많이 보였는지 몰라도 내 눈에는 하나도 안 보였다. 자꾸만 커지는 그 오빠와 너무 작아진 내 모습만 보였다. 그때 갑자기 내 입에서 “오빤 콤플렉스 같은 건 없나요?”라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오빠의 대답. “콤플렉스라 생각 안 하면 그런 거 없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설렘이었던지라 그 설렘 아래 열등감도 키워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오빠에 비해 너무나 부족한 내 모습에 괴로워했던 것이다.

파견 기간 끝 무렵, 우리 팀은 어느 도시의 작은 광장에서 사물놀이 공연을 했다. 객석 앞에 앉아 다른 팀원들과 공연을 보고 있던 나는 공연 중간에 한 번 ‘얼쑤’ 외쳤는데, 그 오빠가 웃는 모습이 좋아서 계속 ‘얼쑤!’ ‘좋다!’를 남발해댔다. 그리고 공연 마지막에 우리 팀 모두가 나와 함께 아리랑을 불렀는데 타국에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한국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정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과 뭉클함이 있었다.

그때의 경험은 나에게 처음으로 더 큰 세상을 보여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단순히 나이의 앞자리 숫자만 1에서 2로 변한 것이 아니라, 마음도 함께 스무 살로 변할 수 있었다. 앞으로 어른으로 살면서 누군가를 좋아하면서 느끼는 설렘, 그리고 그로 인해 상대에게서 열등감을 느끼며 괴로워할 수 있음을 나는 스무 살 생일 때 브라질에서 배웠다. 진실로 감사하게도 나는 그것을 너무나 특별한 경험 속에서 배웠기 때문에 남몰래 많이 속앓이했던 순간들마저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그 후 나는 집과 친한 친구들 무리 속을 벗어나 조금씩 다른 세상에 발을 디뎌 나갈 수 있었다.

2010년 1월. 나는 그렇게 스무 살이 되었다. 그것도 환상적인 축제와 함께.

영화 버킷 리스트

& 삶의 마지막 축제

윤영호 가정의학과 전문의,

<나는 죽음을 이야기하는

의사입니다> 저자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이라는 부제가 붙은 <버킷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잭 니콜슨과 모건 프리먼이 말기 암 환자로 등장해 의미 있는 인생의 마무리를 보여준 작품이다. 두 사람은 돈만 좇다가 내면의 공허함을 외면한 채 살아온 병원 재벌 에드워드와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다 보니 정작 자신을 위해 한 일이 없다는 생각에 허탈해하는 자동차 정비공 카터를 열연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조건 속에서 살아와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거 같았지만 죽음 앞에서 느끼는 절망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같은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어느 날, 카터가 종이에 ‘장엄한 것을 직접 보기’ ‘모르는 사람을 돕기’ ‘눈물 날 때까지 웃어보기’ 등을 적어 내려가다가 쓰레기통에 버린다. 아마도 이룰 수 없는 꿈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우연히 구겨진 종이에서 직감적으로 영감을 받은 듯 미소를 지으며 ‘스카이다이빙하기’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와 같은 자신의 희망을 추가하고 함께 여행을 떠나 하나씩 이루어 간다. 한 사람은 희망을 한 사람은 비용을 선물해 서로의 꿈을 성취했으며 그 버킷 리스트에 줄이 그어질 때마다 이들의 삶은 희망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특히 에드워드가 의절한 딸을 찾아가 사과하고 외손녀를 만나면서 영화는 극에 달한다. 외손녀를 안고 뽀뽀한 뒤 ‘가장 아름다운 소녀와 키스하기’에 줄을 긋던 에드워드는 죽음 앞에 절망하는 노인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이었다. 카터 역시 “여행을 떠날 때는 남 같았는데 돌아왔을 땐 다시 남편이 되어 있었다”는 아내의 말처럼 마음이 편안하게 정리되어 가족에게 삶의 아름다운 마무리를 통해 감동을 줄 수 있었다.

행복한 시간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도 죽음이 여지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먼저 떠난 카터의 장례식에서 에드워드가 했던 추도사, “카터와 저는 함께 여행했습니다. 카터가 살아 있던 마지막 몇 개월이 저에겐 최고의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인생의 참된 기쁨을 찾아준 거 같아요. 언젠가 내가 하늘나라로 떠날 때가 돼서 다음 생으로 가는 문 앞에 서게 되면 거기서 다시 카터를 만나고 싶습니다. 그가 나를 도와 저세상의 희망을 보여주길 바랍니다”라는 말처럼 나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희망하는 바이다.

가정의학과 전문의로서 말기암 환자들을 위한 호스피스 완화의료 일을 해온 지 24년이 되어간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겪는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영적 고통을 완화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인생과 화해해 나가는 시간을 가지며 웃으며 떠날 수 있도록 환자들을 도와주는 일이다.

내가 처음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겪은 누나의 죽음 때문이었다. 형제들을 뒷바라지하느라 정작 자기 몸은 변변히 챙기지도 못했던 누나는 스물넷 푸른 나이에, 위암 말기로 고통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누나가 떠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슬픔도 슬픔이었지만 마음 한가득 차오르는 것은 허망함 같은 거였다. 가족과 차분하게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버린 삶’,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화장실에서 눈물을 흘리며 의사의 길을 가리라 다짐했다.

임종의 순간 ‘삶은 참 아름다웠고 고마운 것이었다’는 미소를 보내는 환자들, 오랫동안 서먹했던 인간관계의 응어리를 풀고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 가족들과 환하게 웃으며 떠나는 사람들…. 그런 이들을 보며 우주의 순환 원리를 떠올려본다.

실존 속의 인간은 결국 죽고 사라진다. 누군가 떠나간 빈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해 채워질 것이고, 그 또한 언젠가는 떠나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를 이루었던 수많은 원소들이 다시 우주로 환원될 뿐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흩어져 존재한다고 믿는다. 또 다른 수많은 존재들 속에. 과거의 존재들의 내면에 깃들었던 본질은 지금도 내 속에, 나의 존재는 또 다른 인연 속에 남아 계속 이어질 것이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것은 오늘을 의미 있게 보내게 할 것이며, 하루하루의 삶을 아름다운 축제로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죽음조차도 가장 아름다운 축제의 순간으로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행복했다, 아름다웠다, 고마웠다.” 우리의 마지막 말이 이러하기를 바란다.

 

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페스티벌은 언제였나요? 우리 삶은 늘 축제입니다.

작은 드로잉 수첩이

가져다준 기적

이은경 47세. 경기도 과천

역경은 거꾸로 읽으면 경력이 된다는 말이 있다. 어릴 때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몰랐고, 늘 똑같이 평온한 삶이 지루하기만 했다. 그런 날들이 얼마나 행복이었는지도 모른 채….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면서 삶의 역경이 시작되었다. 경제적 무능력, 알코올 중독, 권위적인 분위기, 지인의 자살, 치매…. 결혼과 동시에 내가 감내해야 했던 여러 가지 상황들로 어두운 터널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지옥이 있다면 이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삶을 포기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처음엔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속내를 털어놓곤 했지만, 어느 순간 나에게 다시 돌아와 비수로 꽂혔고, 자존감은 더욱더 낮아져갔다. ‘나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하며 불평불만은 늘어갔다.

미술 교육을 전공한 나는 일반인들에게 그림 가르치는 일을 20여 년간 해오고 있었다. 회원들에게는 밝은 척 그림을 가르쳤지만, 하루하루 괴로운 시간들은 계속되었다. 그러다 내 인생에 변화를 준 한 사건이 발생했다.

작년 봄 그림 가르치는 곳의 한 회원님의 전화를 받은 것이다.

“선생님,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육십 평생 남편에게 무시당하며 살았는데, 드로잉 수첩에 자신이 그린 걸 본 남편이 그게 뭔지 물으며, 대화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듣는 순간 행복 바이러스가 온몸으로 퍼져갔다. 드로잉 수첩은 화가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간단한 스케치나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작은 손바닥 스케치북인데, 회원들에게도 가지고 다니면서 자유롭게 그려보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나부터도 그림을 가르치는 자세가 달라졌던 거 같다. 아~ 단순히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표현하고 대화를 나누는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겠구나. 그다음부터는 각자의 그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감싸 안아주고 격려해주는 시간이 늘어났다. 몰랐던 사람들의 아픔을 알아가면서, ‘나만 힘든 게 아니었어. 너도 그랬구나.’ 서로 치유하면서 얼마나 많은 위로를 받았는지 모른다.

나 역시 드로잉 수첩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루하루 그림일기처럼 내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해보자는 생각이었다. 화가 나도, 기쁠 때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에도, 우울할 때도, 여행을 가고 싶을 때도, 흔들리는 버스에도 몸을 맡기고 쓱싹쓱싹… 그렸다.

그리면서 예전엔 몰랐던 걸 깨닫게 되었다. 말은 예쁘게 포장할 수 있지만 그림은 자기도 모르는 심연의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회화적 언어이면서 본능적인 언어라는 걸.

그림을 통해, 보이지 않는 작은 것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게 되는 경험을 하면서 그동안 이 소중한 걸 놓치고 살았구나… 하는 후회와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해주신 부모님께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동안 사랑받지 못했다며 서운해했던 것이 부끄러워졌고, 원망해 왔던 것들 또한 남 아닌 나의 탓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과도 마주할 수 있었다. 어릴 때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했는지, 행복했는지, 무엇을 잘했는지…. 마치 순례자가 순례의 길을 기도하며 가듯이 천천히 내 안의 아이와 대화를 하며 그려나갔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한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다. 나의 작은 드로잉 수첩은 내 인생의 역경들이 하나하나 경력으로 쌓이면서 재창작으로 이어졌다는 걸 알려주었다. 그렇게 내 마음의 문이 점차 열리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진정으로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다가가게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 것이다.

내가 느끼고 경험했던 것들을 보다 많은 분들에게 알리고 싶어 페이스북을 시작했다. 드로잉 수첩의 그림과 사연들을 올리기도 하고, 코끼리 커피 그림을 프로필 창에 올리기도 했다. 코끼리를 그린 이유는 통통한 걸 좋아하기도 했고, 따뜻하고 귀여운 동물인 코끼리가 우리 아이의 태몽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커피 역시 소통의 도구가 된다고 생각해 좋아하는 것들을 접목해 보았다.

코끼리를 그리며 코끼리가 또 다른 나인 양 말을 걸며 ‘괜찮아 괜찮아’ 토닥토닥 위로해주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올해 초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코끼리 그림이 전시 기획자의 눈에 띄어 전시회 제안을 받게 된 것이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전시를 하면서 많은 관객들을 만나고, 어엿한 작가로서 그림 이야기를 나누면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지금까지를 이겨내지 못했다면 역경이 경력이 된다는 말의 의미를 몰랐을 것이다. 힘든 시기를 보내시는 분들에게 조금만 더 이겨보라고 응원하고 싶다. 조금만 더 가보면 인생의 멋진 페스티벌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나의 10분 축제

윤은노 39세. 젠나무민북스 편집장.

서울시 용산구 후암동

남편은 오늘도 터키식으로 아침을 차렸다. 터키 차, 소금에 절여 짭짤한 까만색 올리브, 오이와 토마토, 참치(팩), 내가 만든 빵. 때로는 삶은 달걀이 추가된 이 식단이 남편이 365일 먹는 아침 식사다. 반면 나의 아침 식사는 내 몸이 무엇을 원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오늘도 나와 남편 그리고 사랑스런 우리의 아이들 두 명은 식탁 앞에 앉았다.

사건은 7살 딸이 갑자기 터키 차가 담겨 있는 뜨거운 주전자의 손잡이를 잡으면서 시작됐다. 자기도 어른처럼 뜨거운 주전자로 직접 차를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남편은 딸의 이름을 외쳤다. 딸은 남편의 저지에 더욱 손잡이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내가 나설 때이다. 하지만 나도 오늘은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아이들에게 무엇이든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타입이다. 물론 딸이 다칠까 봐 얼른 상황을 정리하려는 남편의 마음은 알지만 어린 딸에게 차근히 설명하지 않고 무조건 그 행위를 저지하려는 남편이 못마땅했다.

결국 왜 아이에게 하나하나 차근히 설명해주지 않느냐고 남편에게 언성을 높이고 말았다. 참고로 남편은 터키와 한국에서 한국어를 전공하고 한국 생활 17년이 넘어가는 한국말을 매우 잘하는 터키 사람이다.

어찌 됐건 딸아이는 남편의 도움을 받아 주전자에서 무사히 차를 따랐다. 하지만 난 이미 더 이상 식사할 기분이 아니었다. 항상 긍정적인 에너지를 부르짖는 나이지만 오늘은 내 마음이 긍정적인 에너지가 바닥났으니 충전해 달라고 신호음을 보내고 있었다.

잠깐 발코니 쪽을 보았다. 햇빛은 찬란하고 날씨는 매우 좋았다. 자연을 느끼고 싶었다. 숲 속을 걸으며 신선한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바람을 포기한 채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버렸다. 그리고 사춘기 때 하던 행동을 아직도 하는 39살의 나 자신에게 더욱 화가 났다. 잠깐 잤나 보다. 3살인 아들이 나를 가만두지 않는다.

이미 오후 3시. 일어났다. 커피를 타려고 가스 불을 켜는데 남편이 다가와 “잘 잤어?”라고 묻는다. 내 기분이 나아졌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을 건네는 것임을 알고는 있었지만, “잠으로 시간을 낭비한 기분이야!”라고 야멸차게 답해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답변에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조심스레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말을 건넨다. “엄마, 기분 괜찮아? 나 잠깐 나갔다 올게. 내가 키우는 식물 친구에게 물을 줘야 하거든.” 하면서 작은 통에 물을 담아가지곤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돌아왔다.

커피를 타고 갑자기 딸아이가 키운다는 식물 친구가 보고 싶어져 다시 물을 받아 들고 나가는 아이를 따라가 보았다. 빌라에 사는 누군가가 심어놓은 걸 딸아이는 자신의 식물 친구라고 정한 것이다. 밖에서 커피가 마시고 싶어졌다. 속으로 “Why Not?”이라는 문장이 떠오르면서 용기가 생겼다. 대문을 열자마자 마치 높은 탑에 갇혀 있던 라푼젤이 처음 밖에 나온 것처럼 자유를 느꼈다.

7살, 3살 아이들을 둔 엄마에게 대문 밖을 자유롭게 나서는 일이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아는 분들은 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100% 햇볕이 내리쬐는 건너편 담에 몸을 살짝 기대고 눈을 감았다 떴다. 따끈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신선한 바깥 공기가 몸 안을 정화하자 어느새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지중해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햇빛이 찬란한 하얀색 집들 중 한 곳에 있는 느낌이었다. 파란색 머그컵에 담겨 있는 커피를 다 마실 때까지 그 순간을 만끽했다. 더 이상 햇빛 생각이 안 날 정도로 햇빛을 만끽한 나는 딸아이와 함께 집으로 들어왔다.

집에서 3초도 안 되는 거리로, 단 10분 만에 햇빛과 행복을 내 몸과 영혼에 충전하는 방법을 알게 된 나는 환호했다. 집으로 들어온 후 딸아이를 껴안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사랑스런 표정으로 “뭐가, 엄마?”라고 물으며 나를 쳐다보는 딸아이에게도 나의 행복이 전해진 것 같았다. 저녁 식사 시간에 밥을 먹다 갑자기 나는 남편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사랑해”라고 말했고, 남편도 “나도 사랑해”라고 답했다. 우리의 눈에 살짝 눈물이 고였다.

나는 오늘 노력하고 시도한다면 삶을 매 순간 축제같이 살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의 오늘을 축제로 만들면 나로 인해 다른 사람들의 오늘도 그렇게 될 수 있음을!

인생의 전환점 돼준

고마운 친구, 축제

안국현 43세. 축제닷컴 대표.

서울시 성북구 종암동

‘어떤 일이든 재미있어서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해야만 하는 일에서 하고 싶은 일, 재미있는 일로의 전환. 나에게 그런 계기는 아주 우연히 찾아왔다.

2008년 4월, 당시 소프트웨어 개발 사업을 하고 있던 내게 한 분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축제를 잘 홍보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요?”라며 조언을 구해왔다.

인천의 인천중구문화축제를 기획하시던 분이었다. 축제? 소프트웨어 개발에만 매달리고 있었던 나에게 축제는 전혀 생소한 분야였지만, 도움을 드리기 위해 찾다 보니 우리나라에만 1년에 1,300개가량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이렇게 축제가 많다니, 깜짝 놀랐다.

태백산눈축제, 자라섬국제재즈페스티벌, 진안군마을축제, 함평나비대축제, 담양대나무축제, 춘천마임축제, 고창청보리밭축제….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하는 축제, 각 시나 군에서 기획하는 축제, 지역 문화제, 마을 단위 축제 등등 매주 전국적으로 20개씩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고된 농사일에 앞서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풍류를 즐기는 풍류 사회였는데 그러한 전통이 그렇게 발전해온 것 같았다.

이런 좋은 축제들을 한눈에 보기 좋게 사람들에게 알려주면 어떨까, 나처럼 전혀 몰랐던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나의 인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5개월간 준비를 해서 2008년 10월에 축제닷컴이라는 인터넷 사이트를 오픈했고, 사이트를 홍보하기 위해서 ‘축제 이야기’라는 계간지도 발행하게 되었는데, 반응이 좋아 2010년 1월부터는 월간으로 발행하게 되었다.

봄에는 특히 축제가 많은데 요즘 같은 때는 매주 지방 축제에 참석한다. 하루에 1,000km를 달려본 적도 있다. 여수국제청소년축제, 하동야생차문화축제, 김해분청도자기축제에 갔다가 다시 서울로. 축제를 찾아다니다 보면 우리나라에 이렇게 좋은 곳이 많았나 하는 생각이 들며 이렇게 살 수 있는 나의 삶이 참 감사하기도 하다.

축제를 다니며,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취재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이 있다.

충북 옥천에 농수산물축제를 운영하는 군 관계자 분이다. 사실 축제를 만드는 사람들은 축제를 즐길 수 없다. 제대로 된 축제를 만들기 위해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티는 안 나는 일이라, 기피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분은 “꼭 이 축제를 발전시켜서 지역에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준비를 하였다. 그 모습에 주변에서도 감동을 받아 마음을 모으기 시작했고, 옥천 포도축제에서 농수산물축제로, 그리고 지금은 옥천의 대표적인 축제로 변모했다. 담당자의 열정 하나로 그렇게 변화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이 참 많았다.

가장 기억에 남는 축제는 재작년 봄에 참석했던 청산도슬로우걷기축제이다. 6시간 30분을 차로 달려, 다시 배를 타고 섬에 도착해 참석한 축제. 바다와 산의 조화, 여유롭고, 정겨운 마을 주민들, 참가하는 사람들의 온화한 표정…. 그 풍경을 바라보며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걷는 것만으로도 축제가 될 수 있구나, 알려준 축제.

생각처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포기할까, 할 수 있을까 조급했던 나. 뭐든지 빨리 해야 하고, 빨리 결론을 내야 마음이 편했던 삶. 그런데 그곳에서 느리게 걸으면서, 인생을 그렇게 빨리 안 살아도 되겠구나, 이렇게 느리게 사는 것이 인생을 축제로 만들 수 있는 거구나, 그런 마음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축제는 나에게 인생의 전환점을 선물해준 고마운 친구다. 매달 한두 번씩은 아이들과 같이 축제를 찾아다닌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행복해진다.

5월에는 정말 많은 축제들이 열린다. 가족과 함께 좋은 축제를 찾아서 떠나보면 좋을 것 같다. 그곳에는 또 다른 희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천진한 어린아이처럼

“어른이 되면 안 보이는 게 보여. 많이 알면 좋은 거 같지만 그럴 때는 겁쟁이가 돼서 아무것도 못해. 딱 한 번이야. 인생에서.” 영화 <늑대소년>(2012)의 주인공 순이가 세월이 한참 흐른 후 손녀에게 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웃음을 잃고 더 계산적이고 딱딱해지는 내 모습을 볼 때면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모습이 마냥 부러워지지요. 어린아이의 웃음처럼 화창한 봄날, 천진한 아이들의 지혜를 배워봅니다. – 편집자 주

모든 아이는 예술가이다.
– 피카소

어린이를 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자기 물건같이 알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인물인 것을 알아야 한다.
– 방정환

조그마한 어린이처럼 진실 앞에 앉아라. 그리고는 기존의 관념을 모두 던져버릴 준비를 하라.
– 토마스 H. 헉슬리

순진함과 모든 완전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태어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시무시한 곳으로 변했을까.
– 존 러스킨

물오리가 날 적부터 헤엄을 치듯 어린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천성을 지니고 있다. 어린이들을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물오리가 헤엄치는 것을 막는 것과 같다. 어린이들의 천성을 돕는 것이 교육이다.
 – 귀스타브 플로베르


아빠와 단둘이 떠나는 1박 2일의 여행
MBC 일밤 ‘아빠! 어디 가?’에서 건져 올린 동심들

“저는 마술로 민국이 형 집을 훨씬 더 크게 했으면 좋겠어요.”(5회)

– 춘천호에서의 얼음 캠핑 시간. 가장 작은 텐트 때문에 결국 민국이 형이 울어버리자, 윤후(8세, 가수 윤민수의 아들)가 한 말.

“하나님 비 안 오게 해주면 안 돼요? 그러면 이 감자를 던져서 하느님한테 줄게요. 제발 제발 제발.”(8회)

– 강원도 원덕천 마을.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나가서 놀 수는 없게 되자 간식으로 나온 감자를 먹다 말고 준수(7세, 연기자 이종혁 아들)가 한 천진한 기도.

“아빠! 우리 얘기 좀 하자. 지금은 대화할 시간. 오늘 기분 어땠는지 그 대화를 해보자.”(9회)

– 이날따라 낮부터 다툼도 많았던 날, 잠자기 전, 아빠에게 대화를 청하는 윤후.

“왜 맛있는지 알아 나는? 아빠가 주니까. 아빠가 주는 건 다 훨~씬 맛있어.”(10회)

– 제주도 면수동 마을에서 감자를 먹여주는 아빠에게 지아(7세, 축구 선수 송종국의 딸)가 한 말.

“힘들면 쉬다 가고 쉬다 가고 하면 되잖아.”(16회)

– 역사 속 위인의 흔적을 찾아 우리나라 산악현수교 중 가장 높다는 청량산 하늘다리까지 오르는 길, 중도에 힘에 겨웠던 아빠가 그만 포기하자고 하자 준(8세. 연기자 성동일 아들)이가 한 말. 결국 준이 덕분에 하늘과 산이 맞닿은 하늘다리의 수려한 전경을 맛볼 수 있었던 아빠.

“준비가 다 되었으면 그냥 아무 바람 없이 기다려”(17회)

– 오랜 기다림 끝에 여수 섬에서 전문가도 잡기 힘들다는 숭어를 잡아 올린 민국(10세. 아나운서 김성주 아들)이, 아빠가 낚시 노하우 좀 알려달라고 하자 의젓하게 해준 철학적인 말씀.^^



자신을 때린 친구도 포용하는 열 살 딸아이에게 배우는 용서 – 박선아

학교에 다녀온 딸아이의 얼굴이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우격다짐으로 아이에게 들은 ‘사건’의 자초지종은 대략 이러했다. 영어 수업 시간에 반 친구들끼리 율동을 하는데, 딸아이가 한 남자아이에게 “너는 정말 율동을 잘한다. 와~” 감탄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아이가 딸아이의 뺨을 때린 것이다. 놀란 선생님이 이유를 물으니 “야! 너는 그것밖에 못해? 진짜 웃긴다야~” 하며 놀렸기 때문에 때렸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반 아이들이 보고 있었기에, 그 아이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고, 담임 선생님은 친구의 뺨을 때리고도 거짓말한 것에 대해 몹시 화가 나 아이를 꾸중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딸아이는 “선생님, 제 잘못도 있어요. 저는 칭찬이라고 한 말에 친구는 자기를 놀리는 말로 오해를 했으니까요”라며 친구를 감싸주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아이는 전혀 반성하는 기색이라고는 없어 선생님도 아이들도 다 당혹스러워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들은 남편은 ‘금쪽같은 딸’의 뺨을 때린 ‘놈’을 가만 안 두겠다며 화를 냈고, 이를 본 딸아이는 나에게 불만스럽게 말을 했다. “아빠한테까지 말한 거예요? 엄마, 안 된다고요. 그 친구, 선생님께 정말 많이 혼났어요. 정말로 그 친구 엄마에게는 얘기하면 안 되는 거 알죠? 그 친구도 반성하고 있을 테니까, 한 번만 더 기회를 줘요. 1학년 때 ○○도 기억나죠? 엄마와 내가 그 친구에게 기회를 줘서 그 친구는 완전 착한 애가 되었다니까요.”

하지만 그날 하루 종일 어찌나 속상하던지 나는 결국 딸아이에게 화풀이를 해댔다. 그렇게 묵묵히 엄마를 받아주던 아이는 잠자기 전, 나를 꼭 안으며 말한다. “엄마, 미안해요. 마음 풀고 잘 자요. 그리고 많이 사랑해. 하늘만큼.”

부끄러워진다. 열 살 딸아이에게 배운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 있는’ 마음이고, 눈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사랑이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용서라는 것을.


아이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갖는다. 이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보려는 호기심 어린 아이들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점점 실패를 두려워한다. 다른 사람에게 어리석게 보이거나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런 사소한 삶의 비애와 좌절은 바위에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우리의 능력을 좀먹는다.

– <너만의 명작을 그려라>(마이클 린버그 지음, 한언)에서


어린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 양경만 / 직장인. 제주도 제주시 외도1동

얼마 전 새로 구입한, 앞이 막혀 있는 욕실 슬리퍼 때문에 아내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물에 젖은 슬리퍼를 세워두지 않고, 무심결에 그냥 나와 버리는 아내의 습관 때문이었다. 무심코 물이 고인 슬리퍼를 신는 느낌이란. 이러기를 수차례, 며칠 전엔 드디어 폭발하고 말았다. “슬리퍼 좀 세워두라 했잖아~!” 부부 싸움 일보 직전까지 가기 전, 마침 옆에서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초등생 딸애의 한마디.

“아빠~! 그만 싸우고, 슬리퍼 바닥을 뚫어~!”

생각해보니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다. 바닥을 뚫으면 슬리퍼에 물이 고이지 않고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가 지난 뒤 슬리퍼 바닥을 새끼손가락 정도의 홈을 내어 잘라내었다. 그 이후로는 신기할 정도로 물이 잘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본 딸아이가 한마디 한다.

“아빠, 이젠 물 안 고이지? 그니깐 이젠 아무것도 아닌 것 갖고 싸우지 마~! 알았지?” 어린아이처럼 생각할 수 있다면 세상에는 굳이 싸우지 않아도 될 일이 참 많을 것이다.


“제 소원은 산타할아버지를 안아주는 거예요”
나를 부끄럽게 만든 딸아이의 대답 – 김요한 / <어린아이처럼>(바이북스) 저자

나는 교회의 목사로서 늘 설교에 대한 부담이 있다. 한번은 아이디어가 궁핍해 그냥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만 네 살의 막내에게 물어보았다. “예진아, 아빠가 설교해야 되는데, 어떤 내용을 할까?” 그런데 뜻밖에도 딸 예진이의 반응이 즉각적이었고, 구체적이었다. 물론 처음 해준 말은 내가 찾는 대답과는 거리가 좀 있었다. “서로 인형을 만들어주라고 해.”

그래서 질문을 약간 바꾸어 “그런데 있잖아, 아빠는 설교를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한테 해야 되거든. 그것 말고, 또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그러자 이 아이가 연달아 말해준 내용이 그럴듯했다. “서로 사랑하라고 해.” “서로 책을 읽어주라고 해.” “서로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해.” “서로 선물을 주라고 해.” 결국 나는 막내의 도움으로 한 편의 설교를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우리 큰아이에게 물었다. “혜진아, 이번 크리스마스 때 산타할아버지한테 제일로 받고 싶은 선물이 뭐야?” 그때 내가 들은 의외의 대답은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산타할아버지를 꼬~옥 안아주고 싶어. 나는 산타할아버지를 안아주는 게 소원이야.”

성경에서는 어린아이처럼 자기 것을 나눌 때 하늘이 기뻐하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적이 일어나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아이들에게 배울 수만 있다면, 날마다 목격할 수 있는 크고 작은 기적들이 얼마나 많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