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s by "월간마음수련"

SBS-TV ‘힐링캠프’ 닉 부이치치가 던진 커다란 화두

선천적 ‘해표지증’을 갖고 태어나 ‘사지 없는 인생’을 살고 있는 세계적인 강연자 ‘닉 부이치치’가 힐링캠프에 출연했습니다. 팔다리가 없는 그의 몸은 수영, 축구, 골프 등 각종 스포츠를 즐길 수 있을 만큼 강인하고, 조그만 두 개의 발가락은 타이핑과 악기 연주를 할 수 있을 만큼 유능합니다. 신을 믿고 기적을 믿는다는 그는 팔다리가 자라길 매일 기도하지만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다 말합니다. 전 세계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선물하고 싶어 하며, 그것이 바로 신이 자기에게 주신 위대한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운명처럼 다가온 여인 카나에와 결혼하여 현재 4개월 된 아들 키요시를 두고 있는데, 아들이 태어나기 전 혹시라도 자신처럼 팔다리 없는 아이가 태어나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자, 아내는 “당신처럼 좋은 롤모델이 있으니 아무 문제없다”며 “설령 팔다리 없는 아이가 5명 태어난다 해도 모두 훌륭하게 키워낼 수 있다”고 대답했다 합니다.

닉 부이치치의 삶을 보면, 반드시 팔다리가 자라는 것만이 기적은 아닌 듯합니다. 보통사람들도 해내지 못하는 일들을 해내고 있을 뿐 아니라, 요즘 같은 세상에 보기 드물게 편견 없고 용기 있는 여성과 결혼까지 했으니까요. 게다가 감사하게도 아들 키요시도 팔다리가 있는 건강한 몸으로 탄생했으니, 지금 닉은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할 것입니다.

TV를 통해서지만 그의 모습을 보며 감동이라는 표현으로는 좀 부적절한,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충격과 의문의 여파가 마음에 끝없이 퍼져갔습니다.

나는 매사에 긍정적일 수 있는가? 나는 100전 101기의 자세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수 있는가? 나는 타인의 잘못에 너그러울 수 있는가?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가? 나는 도움이 꼭 필요할 때,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항목이 단 하나도 없더군요. 머릿속에는 해결되지 않는 물음표만 가득했습니다. “내가 그의 입장이라면 아침에 눈뜨는 순간마다 지옥 같은 고통일 텐데, 그는 어떻게 그처럼 활기차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일까?” 천천히 ‘힐링캠프’를 다시 보았고, 어렴풋이나마 한 가지 답을 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을 좀 더 사랑하세요!” “당신은 있는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닉 부이치치가 저에게 던진 커다란 화두는 ‘자신과의 화해’였습니다.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을 사랑해야만, 타인과 세상도 사랑할 수 있었던 거죠. 세상을 사랑해야만 삶을 즐길 수 있고, 긍정적인 마음이 생겨나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힘과 용기도 생겨납니다. 비뚤어진 자존심과 자기 연민, 자기 혐오가 엉망으로 뒤섞인 상태에서, 타인에게 당당히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자신과 화해하고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제게는 꽤나 익숙한 것이었지만 머리로 안다 해서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은 멀기만 했고, 여전히 자신과 화해하지 못한 저는 그 긴 여정을 감당해낼 힘도 용기도 없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닉은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으면, 당신도 할 수 있습니다!” 팔다리 없는 몸으로 풀썩 넘어졌던 그가 혼자 힘으로 벌떡 일어나서 이렇게 말하는데, 그 앞에서 “아니오. 나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할 사람이 있을까요?

유명해지기 전까지 그는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닉은 자신의 모습을 진심으로 사랑했지요. 그러니 누가 반박하겠습니까?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하듯, 당신도 당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라는 닉의 메시지를 말입니다.

지현정 문화칼럼니스트 & 사진 제공 SBS-TV

 

불가리아, 우리나라와 닮았네!

글&사진 이동춘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서 동쪽으로 240km 떨어진 얀트라강 상류에 있는 벨리코 투르노보(Veliko Tarnovo)는 불가리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마을이다.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았던 이곳은 중세 시대 불가리아 왕국의 수도(1185~1396)였고, 구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을 만큼 과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중세 도시를 연상시키는 차르베츠 언덕 위의 난공불락의 요새, 산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뾰족한 모양의 교회 등 동화 속 나라 어딘가에 와 있지 않나 싶을 정도다.

얀트라강이 우리나라의 안동 하회마을처럼 도시 중심의 협곡을 통과하여 굽이쳐 흐르고, 강을 따라 작은 집들이 절벽 위나 경사진 곳에 잘 지어져 있었다. 기복이 심한 지형과 풍부한 녹지, 전통적인 빨간 지붕에 흰 벽의 집들이 잘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차르베츠 요새로 가는 길. 고성 입구에는 십자 무늬의 방패를 든 돌사자상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곳은 얀트라강 위에 있는 차르베츠 언덕의 도개교를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천혜의 요새와 같은 성이다. 성안에서 바라보니 왼쪽 멀리 열차가 지나간다. 성 밖을 나오자 골목 마을엔 예술품·공예품을 볼 수 있는 공방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의 장인들은 개인 공방을 운영하며 직접 제작한 수공예품들을 판매한다. 과거 우리 가내수공업을 연상시킨다. 주말의 나른한 오후, 마을엔 골목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퇴근 후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 그들이 나를 보고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KOREA”라고 대답하자, 싸이의 ‘강남스타일’ 춤을 추자면서 주변에 있던 마을의 아이들이 뛰어온다. 순간 당황했지만,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어른, 아이 할 거 없이 여기저기서 부를 땐, 그야말로 감격이었다! 뿐만 아니다. 택시를 타거나 게스트하우스에 머물면서 볼 수 있었던 스마트폰, 가전제품 등 한국 제품을 보면 뿌듯함과 함께 우리나라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벨리코 투르노보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아르바나시(Arbanasi)를 찾아갔다. 지금도 1,000여 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는 수백 년을 이어오는 80여 채의 불가리아 전통 가옥들이 있는데, 그중 36개가 불가리아의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고 한다.

돌담길과 목조 건축물들, 500년 전에 축조한 그대로 남아 있는 마을의 모습 역시 우리 한옥과 많이 닮아 있었다. 한옥의 계자난간, 대청 위 대들보, 한옥 대문 문고리의 둥근 손잡이, 잘 쌓아 올린 돌담길과 골목, 기와 얹은 지붕의 암키와, 수키와 모양 등등. 또한 한결같이 돌을 가지런하게 쌓은 불가리아 전통 마을의 담장은 우리네 시골 돌담길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저곳에서 불가리아와 우리나라의 닮은 점들을 발견하다 보니, 문득 신용하 교수(서울대 명예교수)가 주장한 ‘불가리아의 원조상은 부여족’이라는 게 떠올랐다. 그들도 우리처럼 일부 사람들은 몽고반점이 있고, 불가리아의 동검과 우리 경주박물관에 보관된 동검이 매우 흡사한 데다 도자기의 문양 또한 우리 분청사기의 문양과 많이 닮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기와 얹은 집들 사이로 돌담길을 걷노라니, 마치 우리나라의 옛 한옥 마을에 온 듯했다.

사진가 이동춘님은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신구대 사진과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1987년부터 10년간 출판사 디자인하우스에서 에디토리얼 포토그래퍼로 일하며 여행, 리빙, 푸드 등 다양한 분야의 사진을 찍어왔습니다. 현재 한국의 전통문화와 관련된 종가 문화 사진을 촬영하며 선현들의 의(義)와 정신을 담는 데 주력하고 있으며, 사진집으로 <차와 더불어 삶> <한옥, 오래 묵은 오늘> 등이 있습니다.

 

환상적인 빛의 원형, 오로라를 찾아서

1988년 북극권 취재를 위해 시베리아 동쪽 끝 추코트카 반도를 여행하던 어느 날 밤 북쪽 하늘에 생긴 이상한 모양의 녹색 구름을 발견했다. 그 구름은 점점 넓어지면서 아주 빠르게 온 하늘을 휘젓고 다녔다. 그게 오로라인 줄 나중에야 알았다.

그 후 오로라를 찍어보겠다고 마음먹었으나 좀처럼 기회가 닿지 않다가 작년 가을부터 올봄까지 오로라를 찾아 북극 지방을 누비게 되었다. 올해가 바로 11년마다 한 번씩 돌아오는 태양의 활동이 왕성해지는 극대기이기 때문이다. 몇 년간 잠잠하던 태양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 많은 흑점을 발생시킨다. 태양의 흑점이 폭발하면 고에너지 입자가 우주로 흩어지는데, 그걸 태양풍이라고 부른다. 지구 가까이 다가온 태양풍은 지구의 자기력선에 끌려들면서 대기권의 물질과 반응하여 빛을 낸다. 그게 바로 오로라이다. 북반구와 남반구의 고위도 지방에서 오로라를 볼 수 있는 건 극지방의 자기장이 세기 때문이다. 지구는 거대한 막대자석과 같아 오로라는 북극과 남극에 같은 시간, 같은 모양의 대칭형으로 나타나는데 북극 하늘에 나타나는 현상을 ‘오로라 보레알리스’ 라고 부른다.

오로라를 볼 수 있는 지역은 남반구에선 대부분 바다여서 북극 지방으로 가야 하는데, 지구의 자북극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도넛 모양의 지역에서만 관찰이 가능하다. 위도상으로는 북위 62도에서 70도 사이에 해당하는 이 도넛 모양의 지역을 ‘오로라 오발’이라고 부르는데, 캐나다 북부, 알래스카, 시베리아 북부, 스칸디나비아 북부, 아이슬란드, 그린란드가 여기에 속한다.

오로라를 제대로 보려면 삼박자가 맞아야 한다. 태양에서 방출된 입자가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에 맞춰야 하고 구름이 없어야 하며 하늘이 어두워야 한다. 북극권은 여름철이 백야이기 때문에 밤이 없으므로 겨울철에만 관찰이 가능한데 날씨가 안 좋은 경우가 많다. 오로라 관측의 또 다른 어려움은 인공광이다. 아무리 하늘이 맑아도 빛이 있는 곳에서는 오로라 관찰이 어렵다. 사정이 이러니 멋진 오로라를 만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타나도 대개 아주 짧게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절정의 순간은 몇 분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오로라. 강렬한 오로라 폭풍이 밤하늘 전체를 뒤덮고, 대자연이 펼치는 너울거리는 춤, 그 황홀한 광경 앞에 내 가슴은 뛰기 시작한다.

나에게 오로라는 무엇일까. 이렇게 세상은 아름답고 살 만하다는, 우주의 티끌에게도 누릴 수 있는 나름의 행복이 있다는, 비록 꿈같이, 쏜살같이 지나간, 찰나에 불과한 순간일지라도 그 행복은 분명히 존재했고 앞으로도 소소한 행복의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그 순간을 즐기고 감사하라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사진 & 글 박종우

다큐멘터리 사진가 박종우님은 한국외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학교 신문방송대학원에서 영상매체를 전공했습니다. 11년간 한국일보 사진기자로 근무하다가 다큐멘터리스트로 전환한 후 티베트 지역, 몽골리안 루트 등 전 세계를 돌며 사라져가는 소수민족 문화의 기록을 남기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대표작으로는 다큐멘터리 영상물 <차마고도 1000일의 기록> <사향지로> <최후의 제국> 등이 있습니다.

오로라를 보러 떠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SBS 스페셜 <오로라헌터>가 7월 21일 일요일 밤 11시 15분에 방송됩니다.

계사년 대한민력

지난겨울, 어머니와 설장을 보러 갔다. 해가 떴는데도 엄청 추운 날씨였다. 우리는 방앗간에 들러 떡국 쌀 석 되를 맡기고 찹쌀을 빻았다. 그러고 나서 어머니는 다른 장거리를 보러 시장 속으로 들어가시고, 나는 찹쌀가루 봉지를 들고 주차장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도중에 서적 좌판을 벌여 놓고 앉아 있는 노인의 특이한 품새가 눈에 띄었다. 노인은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에 두툼한 잠바를 걸치고 있었다. 머리에는 망건을 쓰고 발목에는 요즘 보기 힘든 각반을 차고 있었다.

나는 잠시 쉴 겸, 찹쌀가루 봉지를 내려놓고 노인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대충 책을 진열해 놓고 앉아 있는 품새가 어찌 시들해 보였다. 장사라면 응당 자신이 진열해놓은 책을 마주 보고 앉아 손님을 기다려야 할 터인데, 노인은 토라진 양반 어른처럼 좌판을 등지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는 책을 꺼내 진열하다 말고 그냥 둔 책 박스가 입을 떡 벌린 채, 하염없이 주인장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어르신이 상심하거나 무심한 것이 아니었다. 그곳에 내가 알지 못한 깊은 뜻이 있다는 걸, 지나가는 바람이 일깨워주었다.

그때 시장통으로 얼음장 같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거친 겨울바람은 종이 상자를 휙 날려 보내고, 허술한 천막을 치마처럼 걷어 올렸다. 장꾼들은 허겁지겁 바람에 날리는 것들을 따라다녔다. 장마당 사람들 모두 갑자기 들이닥친 돌풍에 잔뜩 움츠려 몸을 피했다. 하지만 노인은 의연했다. 그는 이미 닥쳐올 상황을 예견한 듯, 불한당 같은 칼바람이 달려들자, 어느새 커다란 우산을 펼쳐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슬그머니 방향을 바꾸어 고쳐 앉았다. 그랬더니 우산은 방패처럼, 등 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을 막아주었고, 정면에서 사선으로 쏟아지는 겨울 햇살은 그대로 우산 안쪽으로 모여들었다. 그 평화롭고 안정된 노인의 모습을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바라보았다.

더 놀라운 것은 따로 있었다. 바람이 지나가자마자, 갑자기 ‘쾅!’ 하는 굉음이 들렸을 때였다. 그 소리의 출처는 노인의 바로 옆이었다. 노인 옆에 생선 좌판을 벌인 젊은 아낙네가, 꽁꽁 언 동태 상자를 해체하기 위해, 동태 상자를 번쩍 들어 올려 땅바닥에 패대기치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하도 커서 지나가는 사람이 흠칫 놀라 돌아볼 정도였는데, 노인은 바로 옆에서 터지는 굉음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러려니 편안한 자세로 마냥 아침 햇살만 즐기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노인이 파는 책을 사고 싶어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좌판에는 꿈 해몽, 약초한방민간요법, 천자문, 화초재배, 명심보감 등이 삐뚤빼뚤 제멋대로 누워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가격 면에서나 부피 면에서나 제일 만만해 보이는 얇은 책 한 권을 골랐다. 내가 계산을 치르자 노인은 또 다른 책을 권했다. 언뜻 보니 ‘한방민간요법’이라는 책이었다.

“요놈도 한 권 사. 총천연색이여. 싸게 해줄 텡게.” 하지만 대부분 책들은 너무 오랫동안 팔리지 않아 헌책 같은 새 책이었다. 나는 정중하게 사양하고 물러났다.

어머니를 기다리는 동안 차 안에서 책을 펼쳐보았다. 더듬더듬 표지를 읽어보니 ‘계사년 대한민력’이었다. 24절기와 농사, 예법과 명절 등 깨알 같은 한자로 쓴 가정 상식이 잔뜩 들어 있었다. 모르긴 해도 그 시절에는 한 해를 준비하는 요긴한 책력으로 대접받았을 성싶었다.

안타깝게도 한문에 약한 나에게는 ‘개발에 닭알’처럼 전혀 소용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나는 뜨거웠던 내 충동구매를 후회하지 않았다.

그날 우연히 목격한 노인의 여유로운 일상과 신선한 지혜가 책 속에 오롯이 담겨,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한 그 무엇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민족 문화유산의 수호자’ 간송 전형필

정리 김혜진

전 세계의 찬사를 받는 고려청자, 겸재 정선의 산수화, 신윤복의 풍속화, 훈민정음 원본….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일제강점기 이 땅의 문화유산이 훼손되고 약탈당하던 당시 문화재 지킴이를 자처한 간송 전형필에 의해 우리에게 남겨진 소중한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간송(澗松) 전형필(1906~1962)은 전 재산을 팔아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를 찾아 모았다. 가치 있다고 판단되면 일본으로 찾아가 다시 이 땅에 돌아오게 했다. “간송의 수집품을 거론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한국 미술사를 논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현재 간송미술관에는 그가 일생을 다 바쳐 모은 문화유산 5천여 점이 보관되어 있다.

“기필코 이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흩어져 사라지지 않도록 내 모든 것을 바쳐

지켜내리라. 이것이 금생에 내게 맡겨진 임무이다.” – 간송 전형필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종로에서 대대로 미곡상을 운영하는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해 장서 수집이 취미였던 그를 눈여겨본 휘문고보 시절 은사 춘곡 고희동(1886~1965)은 “글을 읽으며 학문을 닦는 선비가 아니라, 조선의 문화를 지키는 선비가 되라” 했고 전형필은 그의 조언에 따라 문화재 수호에 뜻을 모으게 된다.

당시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가 20년 가까이 지속되었고, 서화와 골동품 중 일급품들은 거의 일본 권세가나 재력가에게 넘어가 있었던 것. 고려청자의 우수성을 알아본 일본인 골동 상인들은 고려청자가 있는 고분을 닥치는 대로 파헤쳤고, 석탑을 분해해서 가져가는 등 문화유산 약탈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던 중 전형필의 나이 24세, 갑작스런 부친의 사망으로 그는 10만석(약 6천억 원)이란 엄청난 재산을 물려받게 된다. 이어 춘곡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문화재 감식안이었던 위창 오세창(1864~1953)을 만나 본격적으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을 키워간다. 위창은 간송에게 어떤 작품을 모아야 하는지에서부터 정신 자세까지 깊은 가르침을 주었다.

‘서화를 모으는 일은 재물도 있어야 하고 안목도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오랜 인내와 지극한 정성이 있어야 하네. 또한 수장가에겐 모으는 일보다 지키는 일이 더 힘들고 어려운 게야. 상황이 힘들면 처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거든. 잘못하면 자네가 오랫동안 애써서 모은 수장품이 자손들에 의해 뿔뿔이 흩어질 수 있으니 명심하게.”


왼쪽부터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단오풍정(신윤복 작)> <훈민정음>

_ 소장처 간송미술관

1932년 간송은 고서점 한남서림을 인수하여 고서화를 수집하고, 1934년 문화재 보관 및 연구를 할 수 있는 북단장을 개설하여 본격적으로 문화재 수집에 몰두한다. 겸재 정선의 <인곡유거>를 시작으로 삼국 시대부터 조선 말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 시대에 걸쳐 수집했고, 특히 서화는 화가의 대표작 또는 기준작이 되는 작품을 모아나갔다.

간송은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구입할 때는 금액을 깎지 않았다. 설사 물건을 파는 사람이 그 가치를 잘 몰라서 싼값을 부른 경우에도 제값을 치르고 구입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구하면 앞다퉈 그에게 보여주곤 했다. 그렇게 해서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등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은 물론 고려, 조선 시대의 뛰어난 자기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당시 군수 월급이 70원, 큰 기와집 한 채가 천 원이던 시절, 조선 후기의 대표작인 심사정의 <촉잔도권>을 거금 5천 원에 구매, 정밀한 복원 수리를 위해 6천 원의 비용을 지불했고, 풍속화란 이유로 낮게 평가되던 신윤복의 그림 총 30점이 수록된 <혜원전신첩>(국보 제135호)을 일본에 직접 건너가 되찾아왔다. 특히,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국보 제294호)은 서울의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장에서 열린 세계적인 고미술 상인 야마나카와의 숨막히는 경합 끝에 1만 4,580원에 입수,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며 큰 화제가 되었다.

또한 영국 출신 존 개스비로부터 고려청자 22점을 일괄 구매할 땐 40만 원(1,200억 원 상당)을 마련하기 위해 조부 때부터 내려온 논 1만 마지기를 내놓는 결단을 내린다.

현재 간송미술관 뒤뜰에 자리 잡은 ‘괴산 팔각당형 부도(보물 제579호)’를 되찾은 일화도 유명하다. 당시 일본인 골동품상은 우리나라 사람들을 시켜 폐사지(조선 시대 숭유억불의 정책으로 인해 폐허가 된 신라와 고려의 사찰들)를 찾아다니며 탑과 부도를 찾아내게 했다. 탑과 부도를 분해해서 밀반출하면 큰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소식을 접한 전형필은 급히 달려가 1만 2천 원의 돈을 건넨 후 찾아온다. 하지만 조선총독부는 정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구입한 선의의 취득에 대해서도 무효 판결을 내리고 부도를 압수, 조선총독부 박물관에 전시한다고 결정한다. 이에 간송은 일본인들의 불법 반출과 거래는 묵인하면서, 폐사지에서 최초로 불법 반출한 사람들이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총독부 박물관에 귀속시키는 건 부당하다며 반환 청구소송 제기, 3년간의 재판 끝에 승소한다.

조선어 사용을 금지시키는 등 일제가 극단적인 문화 말살 정책을 펴는 상황에서, 애타게 찾던 <훈민정음>을 손에 넣었을 땐 그 가치를 인정해 요구하는 가격의 10배인 만 원을 주고 구매, 자신의 최고 보물로 여기고 한국전쟁 당시 피난을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잠잘 때는 베개 속에 넣고 지켰다. 그리고 훗날 <훈민정음> 원본(국보 제70호)을 통해 한글의 제자 원리가 밝혀지면서 그 우수성을 증명할 수 있었다. 현재 훈민정음 원본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되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제자 원리가 밝혀진 글자로 인정받고 있다.

수집한 문화재들은 그의 나이 33세인 1938년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 보화각(빛나는 보배를 모아두는 곳. 현 간송미술관)에 보관했다. 100년 이상 갈 수 있는 튼튼한 박물관을 지어 후손에게 우리 찬란한 문화를 보여주고자 했던 간송의 뜻이었다.

그가 수집한 문화유산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12점의 국보와 10점의 보물, 4점이 서울시 지정문화재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광복 이후 그는 자신이 모은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왜곡되고 단절된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밝히기 위해 문화사 복원 계획도 세운다. 특히 간송이 영, 정조 시대 때 겸재와 현재, 단원, 혜원 등 진경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들의 작품을 집중 수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조선 후기 문화의 절정기인 진경 시대 문화를 탐색하여 조선왕조 문화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훗날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설립과 더불어 간송문화 발간으로 이어지며 우리 역사를 세상에 바로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그가 지켜낸 것은 그저 예술품이 아닌 우리의 민족문화, 우리의 민족혼이었던 것이다.

간송 전형필이 세운 간송미술관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해 있으며, 1971년에 개최한 ‘겸재전’을 시작으로 매년 1년에 두 번의 전시회를 통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전시는 봄, 가을에 약 2주간 진행되며 관람료는 무료. 위 기사는 <간송 전형필>(최완수 저, 간송문화 41호) <간송 전형필>(이충렬 저, 김영사) <KBS-1TV ‘한국사 전_ 국보를 되찾다 문화유산 지킴이 간송 전형필’> 등의 참고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국민 웹툰 <미생>의 윤태호 작가

한국 만화계 대표 스토리텔러이자, 최고의 웹툰 작가로 손꼽히는 윤태호(45) 작가. 자신의 한판 바둑(삶)을 승리하기 위해 한 수 한 수 돌을 잇는 사람들의 이야기, 웹툰 <미생(未生)>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는 일주일에 두 번 연재 중인 <미생>의 다음 회 탈고를 위해 밤샘 작업을 하고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취재진을 맞아주었다.

요즘의 커다란 성취에 큰 희열을 누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예상과 달리, 그는 덤덤했다. 만화가라는 직업 또한 살기 위해 하루하루 일을 해야 하는 직장인들의 삶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작가는, 인생의 출렁거림 속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미생 속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바둑이 있다’는 말처럼 그만의 바둑을 치열하게 두고 있었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처음부터 시작할 겁니다. 다시는 바둑처럼 실패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밝혀야 할 불빛이 있다면 책임질 겁니다. 내게 허락된 불빛이 있다면요….”

<미생(未生):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 2수, 열한 살에 한국기원 연구생으로 들어가 프로기사만을 목표로 살아가던 주인공 장그래가 입단에 실패하고 ‘회사’라는 전혀 새로운 세계에 들어서면서 다짐하는 말이다. 그렇게 <미생>은 이제 삶이라는 바둑판 위에서 세상과 바둑을 두며 주인공이 차츰 성장해가는 이야기를 그린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 넥타이에 하얀 와이셔츠, 다 똑같아 보였던 샐러리맨들 하나하나의 삶이 따듯하게 채색되어진다. 직장 생활을 하며 자기 삶이 훼손당하는 느낌,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고 싶은 느낌, 가정과 일과의 조화의 어려움, 일상의 고단함 등을 세세하게 묘사하며 직장인들에게 위로와 연민, 격려를 건네는 만화. 재미뿐 아니라, 잊었던 꿈을 생각나게 하는 만화,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돌아보게 하는 그 만화에 사람들은 감동했고, 2012년 1월 포털사이트 다음에 연재된 이후 온라인 웹툰 조회 수 4억 회, 직장인들의 필독 웹툰, 만화가 아닌 인생 교과서라고 불리며 큰 인기를 끌었다.

국민 웹툰이라 불리며 모바일 영화로도 만들어지는 등 <미생>의 인기가 대단합니다. 지금 심정이 어떠신지요?

너무나 감사하죠. 제 인생에 이런 빅 이벤트가 없었고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성취니까요. 그래서 해피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불안감도 있어요. 이런 걸 또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내가 하고 싶은 작품을 했을 때 또 지면은 나를 찾아줄까? 하는 불안감. 그런 건 대중 작가로서 항상 있는 것 같아요. 나이가 있다 보니 아무래도 마음이 급한 것도 있고요. 미생에도 나오지만 샐러리맨들이 사업 한 건 잘됐다고 그 메뉴얼대로 다음 사업이 저절로 되지 않잖아요. 작가의 삶도 궁극적으로 봤을 때 직장인들의 삶과 특별히 다르지 않은 거 같아요.

그런 불안감을 해소하는 방법이 있나요?

방법이 있다기보다 미생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그렇듯이 그냥 하루하루 도장 찍듯이 열심히 살아가는 것뿐인 것 같아요. 저는 ‘성공’, 이런 말을 싫어하는데 우리가 하는 일의 결과가 우리 손에 있지 않다는 게 제 생각이거든요. 그냥 열심히 하는 게 우리의 할 일이지 결과는 그 뒤에 오는 거 같아요. 마치 막 나무를 비볐더니 불이 붙는 이치처럼요.

“말하지 않아도 행동이 보여지면 그게 말인 거여.” “평생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체력을 먼저 길러라.” 등등 미생에는 와 닿는 명대사들이 많습니다.

스토리를 구성할 때 이야기를 하나로 정리할 수 있는 소박한 문장 쓰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런 문장들이 다 크고 작은 제 경험에서 나오는 거죠. 만화에 나오는 대사나 내레이션은 제가 공감하지 않는 것은 나올 수 없으니까요. 미생은 특히나 저에 대해서 돌아본다는 생각을 갖고 쓰고 있습니다.

‘우연은 기대하는 게 아니라 준비가 끝난 사람에게 오는 선물 같은 것’. (미생 29수 중) 요즘, 윤태호 작가의 인생에 찾아온 최고의 ‘빅 이벤트’ 또한 준비된 사람에게 필연적으로 올 수밖에 없는 선물 같은 것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학교 신문에 네 칸 만화를 연재하는 등 어렸을 때부터 그림 실력을 인정받았던 윤작가는 자연스레 미대를 꿈꿨지만, 고3 때 가정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미대를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만화가의 꿈을 안고 무작정 상경한다. 특별한 거처도 없어 낮에는 만화 학원에서 배우고, 밤에는 노숙 생활을 하며 ‘하루빨리 만화가로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에 불타던 그는, 우연처럼 어린 시절 자신의 롤모델이었던 허영만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게 되고, 다시 조운학 선생의 문하생을 거쳐 1993년 ‘비상착륙’이라는 작품으로 데뷔를 한다. 25살의 이른 데뷔, 그것은 문하생 시절 ‘연습의 신’이라 불릴 정도로 연습에 몰두한 결과였다.

자칫 자만에 빠져 있을 수도 있었으나, 지금의 윤태호 작가를 만든 힘은 바로 그 성취의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는 데 있었다. 그는 당시 자신의 작품을 보니, 그림에는 엄청난 공이 들어가 있었지만, 그 그림이 담고 있는 얘기는 형편없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다시 조운학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창작이란 무엇인가’부터 고민하며 드라마 <모래시계> 대본, 최인호의 시나리오 전집 등을 모두 베끼는 등 스토리 공부에 매진한다. 그렇게 2년여, 탄탄한 그림 실력에다 스토리 구성력까지 갖게 된 윤태호는 날개를 단 듯 화제작을 그려냈고, 1998년 발표한 ‘분노를 모르는 불감증 사회에 던지는 과거 시점의 SF’ 만화 <야후>로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한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웹툰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연재하게 된 웹툰 <이끼>. ‘본격 한국식 잔혹 스릴러’를 표방하며 선과 악, 그 본질에 대한 성찰을 담아낸 <이끼>는 강우석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지며 더욱 화제를 모았다. 구력이 쌓인 사람으로서의 노련미, 만화를 보고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몰입하게 하는 구성력, 인간과 삶, 사회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스토리, 매 작품마다 소재나 표현 방식에 한계를 두지 않는 신선함까지 더해지며 윤태호 작가는 한국 만화계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윤태호 작가는 직장 생활 경험이 없기에 <미생>을 준비하며 직장에서 쓰는 사소한 용어 하나부터 철저하게 발로 뛰며 배워갔다고 한다. 그러한 과정에서 딱풀 하나로 사고가 터지고, 내 물건을 누군가 허락 없이 쓰고 제자리에 안 두어 다툼이 생기는 에피소드 등 디테일이 살아 있는 만화를 그려낼 수 있었다.

<야후> <이끼> <미생>까지 작가님의 작품들 보면, 인물에 대한 묘사가 뛰어나 놀랄 때가 많습니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요?

저를 분석하는 작업이 창작에 도움이 됐어요. 저는 어릴 때부터 제 팔자, 운명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어요. 피부나 그런 면에서 약점이 많게 태어났고 가정 환경도 어려웠고. 괜한 열패감에 쌓여, 계속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을까에 대한 답을 찾는 걸 꿈꿨죠. 그러면서 저를 많이 돌아보고 사주, 관상, 별자리, 이런저런 공부를 많이 찾아서 했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저에 대해서 이해의 폭도 커지면서 다른 사람이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세상 만인의 모습이 바로 내 안에 있는 거라는 것도 알았죠. 내가 누군가를 볼 때 남을 보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이 남을 판단하고 규정짓는 거잖아요. 제가 만들어내는 캐릭터들은 언제나 제 안에 있는 어떤 조각이 나와서 그것이 구체화된 거라고 생각해요. 때로는 제 안에 있는 어떤 면을 극대화시켜서 그려 보기도 하지요.

<미생>은 작가님 최초의 긍정적인 만화로 불릴 만큼, 전작들의 묵직하고 어두운 분위기에 비해 밝은 느낌인데요. 특히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술을 끊겠다 다짐하는 과장 등 가정 이야기들에 독자들도 뭉클해진다고 합니다.

미생의 테마 중 하나가 그거거든요. 나 혹은 가정을 위해 회사를 다니는데 일때문에 가정이 희생당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것을 되돌리지만, 결국 직장에 나오는 이유는 가정으로 가기 위함이라는 거거든요. 그러면서 저는 이삼 일에 한 번 집에 가는 상황이다 보니, 미안하고 마음이 무겁죠. 책이 잘 팔리고 영화가 되고 그런 것이 우리 아이들이 아빠하고의 관계에서 지금 이 나이에 경험해야 할 것들을 보상해줄 수 있나? 하면 그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아이들에게 아빠가 지금 자기 일에서만큼은 성실하게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은 보여주고 싶어요. 그것까지 놓치면 굉장히 괴로울 거 같아요.

미생, ‘아직 살아 있지 못한 자’라는 부제가 붙는데, 결국 완생으로 나아갈까요?

‘미생’은 원래 바둑 용어로 아직 완전히 살지 못한 말을 일컫는데, 누구나 살아간다는 게 미생 같아요. 돈이 적으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돈이 많으면 거기서 만족하는 게 아니라, 그걸 지키기 위해서 뭔가 하잖아요. ‘완생(完生)’은 결코 이룰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걸 지향해 가는 게 인간의 삶이라고 할까요.

매 작품마다 한계를 두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윤태호 작가는, 어떤 걸 의도하느냐에 따라서 그림체를 달리한다. 부조리한 뭔가를 파헤치는 만화인 <이끼>는 약간 음습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회색 톤으로, 샐러리맨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담고 있는 <미생>은 파스텔 톤에 하얀 여백이 많이 남는 느낌으로 그린다.

매 작품마다 한계를 두지 않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윤태호 작가는, 어떤 걸 의도하느냐에 따라서 그림체를 달리한다. 부조리한 뭔가를 파헤치는 만화인 <이끼>는 약간 음습한 느낌을 주기 위해서 회색 톤으로, 샐러리맨에 대한 연민과 위로를 담고 있는 <미생>은 파스텔 톤에 하얀 여백이 많이 남는 느낌으로 그린다.

인생에 가장 큰 슬럼프가 있었다면요? 슬럼프를 극복한 방법도 궁금합니다.

<이끼> 하기 전 3년 정도? 거부를 많이 당했죠. 그래도 계속 그렸어요. 그게 슬럼프 극복법이었죠. 누구한테나 일이 잘 안 될 때가 있잖아요. 그렇다고 피하는 버릇이 생기면, 자꾸 몸이 거기에 의지하게 될까 봐 항상 자리는 지키고 앉아 있었어요.

올 6월부터 연재하고 있는 <인천상륙작전>은 역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요즘 전쟁이라는 걸 화석화시켜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휴전을 고정시켜서 마치 두 개의 나라가 있는 것처럼 확정적으로 생각한다거나, 지금 상태가 좋다거나. 그런데 우리가 겪는 대부분의 불합리한 제재나 이런 것들은 분단 상황 때문에 생긴 것이 대단히 많거든요. 그런 지점에 대해서 조금은 객관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제대로 설득이 되어 있는가?” 기획서를 쓰기에 앞서 가장 중요하게 물어봐야 할 질문. (미생 39수 중)

그 질문처럼 스스로 설득이 되지 않는 작품, 대충 허투루 쓰는 작품을 용납하지 못하는 윤태호 작가는, 그만의 에너지가 들어 있는 만화를 만들기 위해 매 작품마다 취재, 자료 조사 등 치열한 준비 기간을 거친다. 처음 출판사의 제안으로 시작한 미생만 해도 준비 기간만 3년, 그 기원을 따지자면 10년이 걸려 숙성된 작품이다. 그는 미생 후속작으로 ‘신안 앞바다 보물선’ 이야기도 치열하게 준비 중이다.

작가님과 같은 길을 걷고 싶어 하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다면요?

정말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는 걸 인식하는 분에게는 굳이 제 이야기도 필요하질 않다고 봅니다. 자기 욕망이 자기를 가만히 안 둘 테니까요. 뭐라도 하게 만들고 모색하게 만들겠지요. 결국 욕망의 사이즈가 재능이고 그 사이즈를 구현하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재능이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학생들을 가르칠 때 첫 수업 때마다 하는 얘기가 있어요. “스스로 각오하고 있느냐”고요. 만화가의 길이라는 게 힘든 일도 많거든요. 그렇지만 진짜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가시밭길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어야겠지요.

2년째 미생을 연재하며 이런저런 작품과 일정을 병행하느라 제대로 잘 시간도 없었다는 윤태호 작가. 때로는 지치고 힘들어도, 새로운 작품을 기획할 때 가장 행복하고, 끊임없이 하고 싶은 작품이 샘솟는다는 그는 천생 만화가이다.

‘내가 한 수, 상대가 한 수… 한 판, 두 판, 세 판… 수많은 판을 거쳐 내가 가야 할, 도달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꿈꾸는, 도착하고 싶은 삶은 어떤 것일까?’ (미생 96수 중)

그 답은 작가도 아직 확실히 말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저 오늘도 열심히, 치열하게 한 수 한 수 인생의 바둑을 묵묵히 두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최선의 길이 아니겠냐고.

지난날들에 대해 실패다, 성공이다, 경계 짓지 말자. 그 또한 우리가 그토록 찾고 싶은 답, 완전한 삶으로 안내하는 길 중 하나일 뿐이니.

웹툰 작가 윤태호는 1969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1988년 허영만 문하로 만화계에 입문해, 1993년 데뷔한다. 이후 <연씨별곡> <야후 YAHOO> <로망스> <내부자들> 등 다양한 작품을 발표했다. 웹툰 <이끼>로 문화관광부 대한민국 만화대상 우수상, 제1회 대한민국콘텐츠어워드 만화 부문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미생>은 2012 문화체육관광부 오늘의 우리 만화에 선정되었으며, 201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만화상을 수상했다. 현재 세종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때로는 무모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60대에 시작한 컴퓨터로 고향 알리기

노삼래 70세. 농부, ‘고향을 지키는 농부(hatfarmer.com)’ 운영자

50대 후반, 나는 나의 고향, 충남 보령시 미산면으로 귀향을 했다. 목수일, 농사일로는 자식들 키우기가 어려워 46세에 상경해 경비원부터 건어물 장사 등 아내와 맞벌이를 하면서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러다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가 걱정돼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때부터 ‘컴퓨터로 고향을 알리고 지키는 농부’라는 도전 아닌 도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컴퓨터 전문가로 일하는 막내딸이 적적함도 달랠 겸 컴퓨터를 배워보라고 권유했다. 이 나이에 무슨 컴퓨터냐 싶어서 거절하다가, 하도 권유를 하니 배우게 됐는데 이게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만 원 주고 컴퓨터 책을 사서 독학을 시작했다. 막히는 것이 있으면 새벽에도 딸들한테 전화를 해가며 배웠다. 날도 많이 샜다. 타자를 배우려고 손가락 두 개로 두드리는 독수리타법으로 수십 만 장의 문서를 썼다. 그렇게 하니 타자 실력이 많이 늘어서, 독수리타법으로도 딸아이들과 인터넷 대화창에서 충분히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컴퓨터를 이용해 우리 고향을 알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욕심만 버리면 자연에서 사는 맛이 너무 행복한데, 젊은 사람들은 다 고향을 떠나려고만 하니 고향에 관한 홈페이지를 운영하면 조금이라도 고향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2001년 막내가 홈페이지를 만들어줘서, 홈페이지에 마을 이야기, 농사일지, 경작일지 등 꼭 필요한 정보, 내가 살아오면서 겪은 이러저러한 경험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곳 찾아주신 여러분 반갑고 감사합니다. 혹시 오타가 나서 글이 틀렸다 해도 흉보지 마시고 많이 배우신 여러분이 정정해서 감으로 읽어주시면 더욱 감사하겠습니다. 58세에 독학으로 ‘컴’을 배운 독수리타법으로 쓰는 글이 오죽하겠습니까.ㅎㅎ’

배운 게 많지 않다 보니 맞춤법도 틀리고 그랬지만, 그럴지라도 자신감 있게 썼다. 그런데 문제는 찾아오는 사람들이 드물다는 것이었다. 홈페이지만 만들면 알아서 찾아오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어렵사리 시작했는데 포기하기가 너무 아까워, 어떻게 알리면 좋을까 고민하다 다음 해부터 본격적인 홍보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고향 보령시에는 여름에 대천해수욕장을 개방하는데, 1주일에 한 번 해수욕장을 돌며 명함을 주었다.

“우리 보령에 이러한 곳이 있어요. 와 보세요. 제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지역과 홈페이지를 소개하고, ‘보령시 해수욕장에 왔는데 만족하느냐, 불만은 없느냐’ 등 간단한 취재를 해서 홈페이지에 소개하고, 시민들의 불만거리는 보령시에 시정을 요구하는 메일을 보냈다. 그렇게 홍보하면서 나눠준 명함만 올해로 10,000여 장이 넘는다. 그리고 평소에는 홈페이지 주소를 담아 전국의 블로그들을 돌아다니며 수없이 글을 썼다. 그러자 점점 소문이 나면서 방문자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홈페이지나 블로그라는 것이 자기 하기 나름이구나를 많이 느낀다.

홈페이지를 하려다 보니 사진도 찍게 되었고, 요즘에는 동영상도 배웠다. 특히 출향인들이 제일 많이 보는데, ‘홈페이지에서 부모님 얼굴을 뵈니까 너무 좋습니다’ ‘우리 고향 멋집니다’ 등의 응원 댓글들, 타 지역 사람들의 ‘보령에 그런 축제가 있는지 처음 알았습니다’ 등등의 댓글을 읽을 때면 가장 뿌듯하다. 이런 활동들이 알려지면서 방송 출연도 많이 했다. 그리고 지역 사람들이 70이 다 된 노인네에게, 어떻게 홈페이지를 운영하면 좋으냐고 자문을 구하곤 할 때면 또 뿌듯해지곤 한다.

그렇게 13년째 고향을 지키는 농부로 살아가고 있다. 지금은 홈페이지 1개, 네이버 블로그 3개 등 총 9개의 블로그와 카페를 운영하고 있다. 내 인생 최고의 도전이라면 컴퓨터를 배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날려도 보고, 실패도 하고, 수없이 연습하고 고생하면서 배운 거라 컴퓨터에 관해서는 잘 까먹지를 않는다. 용어 이런 것은 까먹어도 컴퓨터 앞에서 몸으로 배운 것은 안 잊혀진다. 늘 물심양면으로 지원해주는 우리 자식들에게도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나이가 들어서 못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뭐라도 지금이라도 시작해보면 좋겠다. 무엇을 하든 모든 것은 본인 마음에 달려 있다. 행복을 거저 주는 일은 세상에 없다.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나만 있을 뿐이다. 후회하지 말고 즐겁게 행복한 날들을 만들면 좋겠다.

앤서니 브라운 작.

<고릴라 가족> 2012

‘고릴라 작가’라 불릴 정도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에는 침팬지, 고릴라 등 다양한 유인원이 등장한다. 그는 유인원이 종류별로 다양하고 다르듯 사람도 나이, 성별, 인종이 다르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모두 ‘하나’라 말하고 있다.

내 인생의 무(모)한 도전들

이중철 대학생. 23세. 경남 거창군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나는 종종 엉뚱하게 ‘무모한 도전’을 시도하곤 했다. 그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119 아저씨들이 고층 빌딩에서 사람 구하는 모습을 따라 한다고 절벽에다 노끈만 맨 채 내려오다 떨어진 일 등등, 나의 무모한 도전은 필연적으로 많은 사고들을 야기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 집은 과수원을 하고 있는데, 요즘처럼 기계가 발달치 못했던 초등학교 시절에는 산에서 내려오는 들짐승들을 쫓기 위해 일일이 몸을 움직여가며 쫓아야 했다. 요즘의 아이들처럼 그때의 나도 컴퓨터 게임이 너무 재미있었다. 그런데 자꾸 어머니께서 밭에 있는 까치 좀 쫓으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나는 게임을 방해하는 까치들에게 악한 마음을 먹었지만, 산으로 들로 쫓아다니며 상대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그러다 기발하게 폭죽을 이용해서 쫓아버리자 생각했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폭죽 한 다발을 놓고 불을 붙이면 되겠다 싶어서 그렇게 했는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마치 폭탄이 터지는 것처럼 빵빵~ 터지는 것이었다. 당연히 까치는 멀리 날아가 버렸다. 하지만 서둘러 뒤처리를 하고 다시 게임을 하러 집에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남아 있던 불씨가 바람에 번지면서 조립식 집이 홀라당 타버리고 만 것이다. 그땐 정말 죽고 싶었다(요즘 말로 멘붕 쓰리콤보였다).

이 밖에도 정말 사연들이 많다. 한번 해봐야겠다 싶으면 무모하게 도전을 해대는 통에 부모님 속도 많이 썩혔다. 하지만 나의 이런 호기심과 도전 정신이 빛을 발한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중학교 3학년 때 ‘전국 이야기 말하기 대회’에 나가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의 온갖 사연들로 사람들을 울리고 웃겼다. 그리고 그 결과 경남 전체에서 1등을 했다.

어릴 때는 엉뚱한 사고를 빵빵 터트리곤 했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나의 무모한 도전 정신은 진짜 큰일을 이뤄내기도 했다. 역시 중3 때, 우연히 유도를 접하게 됐고, 중학교 졸업 전에 유도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고 싶은 꿈을 갖게 되었다. 이를 악물고 연습한 끝에 3개월 만에 전국체전 경남 지역 선수 선발전에서 은메달을 땄고, 그 후 3개월 뒤에 나간 유도 대회에서는 금메달을 땄다. 모두가 깜짝 놀랄 성과였고, 그때 나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하면 그 결과는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원하는 대학에 가고 싶어 재수할 때, 나의 무모한 도전은 정점을 찍었다. 무식한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수리 영역을 만점 맞고 싶어서, 중학교 1학년 교과서부터 새롭게 시작했다. 하루에 17시간씩 공부한 끝에 한 주에 한 학년씩의 분량을 끝낼 수 있었다. 봄이 되면서 마음이 싱숭생숭해지자, 머리와 눈썹을 밀고 혈서를 썼다. 밥 먹으러 가는 시간도 아까워 라면을 2박스 사서 독서실에서 아침 점심만 먹으며 한 달을 버텼다. 잠도 독서실 바닥에서 자고, 심할 땐 27시간을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6월을 지나 9월 모의고사에서 원하는 성적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이 다른 누가 보기에 강박관념이었든, 어쨌든 상관없다. 목표가 있고 꿈이 있다면, 입 다물고 묵묵히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도 그때 그 시절 나의 모습이 자랑스럽다.

그 모든 순간순간들이 나에게는 얼마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자산이 되었음에 감사한다. 그때의 무모했던 내가 오늘의 멋진(?) 내가 되는 밑거름이 되었으니 말이다.

JUST DO IT!! 그것이 무모한 도전이 되었든, 무한 도전이 되었든, 나는 나의 목표를 향해 오늘도 ‘무척’ 열심히, 그리고 무모하게 달려갈 것이다.

에르베 튈레 작.

<책 읽기>

아크릴릭+잉크 / 2010

60일간에 걸친 미국 대륙 6,000km 자전거 횡단기

이동진 26세. 경희대 건축공학과 3학년

학창 시절 부끄러워서 질문도, 발표도 해본 적이 없었던 나는 이런 자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고 싶었다. 그래서 2008년 대학교 2학년 때 처음 도전한 것이 마라톤이다. 3시간 59분 기록으로 완주하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그 후 내 삶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울진에서 독도까지 240km 릴레이 수영 횡단, 히말라야 곤도고로라 5,800m 등정, 브라질 아마존에서의 222km 정글 마라톤 대회 참가…. 많은 도전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2011년 여름, 뉴욕에서 LA까지 자전거로 6,000km 미국 대륙을 횡단했던 일이다.

그해 여름, 나는 모 항공사에서 주최하는 대학생들의 꿈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하면서 미국행 왕복 티켓을 받게 되었다. 24살의 뜨거운 젊은 날, ‘타는 듯한 삶의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면서 나는 또 다른 도전을 계획했다. ‘도전이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을 기꺼이 해내는 것이다’라는 신념대로 미국 대륙 자전거 횡단을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많은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내겐 세 가지 면이 부족했다. 100만 원도 되지 않는 자금, 부족한 영어 실력, 아는 사람이라고는 LA 근처에 사는 지인 두 분 외에는 전혀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런 불리한 조건들은 오히려 도전하기에 충분한 명분과 이유가 되어주었다. 2011년 10월 22일. 미국 지도 한 장과 스마트폰의 GPS만을 가지고 무작정 서쪽으로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60일’이란 기간 동안 지도상에 매일매일 도착해야만 하는 소도시를 정해서 ‘최소한 이곳까지는 매일 달리자’며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지도상의 일직선과 달리, 수십 개가 넘는 오르막 내리막길과 구불구불 산등성이를 타고 가야 하는 길이 내 앞에 펼쳐졌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결국 길은 길일 뿐이었고, 계속 달리다 보면 북미 대륙 끝에 있는 LA가 나오는 것은 절대적인 사실이었다. 자전거 횡단을 할수록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는 길이 있다’는 말이 무수히 떠올랐다. 하루하루 갈수록 피로는 쌓여갔지만, 자신감과 확신은 더 가득 차기 시작했다.

‘나에겐 돈이 부족하니까, 미국인들에게 양해를 구해서 먹을 것을 얻고, 잠자리를 구해보자.’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과 해내고야 말겠다는 신념이 통했던 것일까. 첫날은 현지인들에게 묻고 물어서 2시간 만에 교회 목사님 댁에서 여장을 풀 수 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요령이 생기다 보니, 단 하루도 밖에서 텐트를 치지 않고, 60일 동안 40여 가구에서 홈스테이를 하게 되었다. 인디언 집에서도 자보고, 60억짜리 집에서도 자보고, 홈리스들과 함께 자기도 했다. 그 길 위에서 만난 사람이 300여 명. 돈과 계획이 없었기에 더 완벽한 여행이었다. 만났던 분들 중에는 헤어지기 싫어 눈물을 훔치는 분도, 돈을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시는 분도, 파티에 초대해주시는 분도, 다른 지역에 사는 자신의 지인들에게 연락을 해주시는 분도 계셨다. 대륙 횡단 여정을 통해 진정한 정이 무엇인지, 인간의 대가 없는 순수한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횡단 중에 캠핑카, 트레일러, 트럭, 4륜 오토바이, 요트, 경비행기 등 다양한 경험도 할 수 있었다. 직선 도로의 11개 주를 지나면서 한국에는 없는 시간 경계선을 3번이나 넘었고, 눈과 비를 맞아가면서 달리는 날도 있었다. 결국 60일 만에 무사히 LA에 도착할 수 있었고, 그동안 숙식에 쓴 돈은 30만 원이 채 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뜨거운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싶었기에,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통해서 삶의 기회와 가능성을 찾아내고자 했고, 결국 그런 무모함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못 해’란 생각에서, 생각한 모든 것을 바로 실행하는 자신감과 용기가 생긴 것이다.

앞으로도 도전을 멈추지 않으려고 한다. 결과가 어찌 되었든 도전은, 인생을 무한하게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가능성의 모습으로 바꿔줄 것이라 확신한다.

마르크 부타방 작.

<무당벌레 새집 찾기>

디지털 / 2011

나도 ‘아티스트이다’ 展

작 가 들  경 계 를  허 물 다

2013년 8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의 작품은 앤서니 브라운, 세르주 블로크, 에르베 튈레, 나탈리 레테 등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들의 그림입니다. 현재 이 작가들의 그림책 원화들이 <나도 ‘아티스트’이다> 전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각 작가들마다 ‘경계 허물기’라는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작가와 감상자와의 경계, 다른 문화와 종교라는 경계, 인종과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 등 그들의 세계를 엿보며 그들의 창작 과정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앤서니 브라운과 그의 동반자인 한나 바르톨린이 함께 작업한 2013년 신간 <꼬마곰과 프리다>의 원화도 공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세계 일러스트 거장들의 원화뿐 아니라, 그들의 작업하는 모습, 작품 제작에 사용되는 작가별 다양한 재료들 등 참여 아티스트의 실제 아뜰리에 모습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만져보고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하면 좋을 다양한 무료 체험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나탈리 레테의 ‘꼴라쥬 조각놀이’ 세르주 블로크의 ‘빨간 실을 이용한 공간드로잉’ 크리스티앙 볼츠의 ‘애니메이션 만들기’ 에르베 튈레의 ‘12가지 감성놀이 책 읽기’ 등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전시 기간 5.1~8.21   장소 고양아람누리 갤러리누리(Tel. 031-901-4368)

자료 제공 (주)아트센터이다  www.artcenterida.com

때로는 무모해 보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한국, 항공 사진을 위하여

이태훈 여행 작가, 사진가. 서울시 영등포구 양평동2가

2008년 가을 어느 날, TV에서 항공 사진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프랑스에서 생태 전문가이자 항공 사진가로 활동 중인 그는 전 세계를 다니며 하늘에서 본 지구의 모습을 몇 십 년째 촬영하고 있는 유명한 사진가다. 그의 사진은 신(神)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빚을 수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미학(美學)들을 그려냈고, 나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이라는 사진가에 대해 존경과 경외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대한민국을 3년째 촬영하고 있는 모습을 TV로 보자, 내 가슴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로 저거다! 이때부터 나는 베르트랑처럼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를 우리만의 시각으로 촬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항공 촬영을 하기 위해선 과연 어떤 방법이 필요하고, 헬기는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구체적인 계획에 들어갔다.

헬기를 빌려서 한반도를 촬영하겠다는 기획안을 가지고 제일 먼저 찾은 곳은 국방부였다. 우리나라에서 헬기를 가장 많이 보유했고, 베르트랑에게도 헬기를 내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방부에서는 개인에게는 헬기를 내줄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래도 인내심을 가지고 내가 아는 모든 인력을 통해 국방부에 부탁을 드렸지만 헛수고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국방부의 한 분이 헬기는 국방부 다음으로 산림청에 많다는 말을 해주었고, 마음은 어느새 산림청으로 향했다. 백방으로 알아본 후 2010년 산림청 주관으로 세계 산림과학 박람회가 열린다는 정보를 입수해, 산림청에 새로운 제안을 하나 했다. 박람회 때 세계 산림학자 3,000여 명이 오는데 한반도의 산림과 조림 현황을 사진으로 보여주자는 내용의 기획서. 산림청 홍보실과 산림과학원의 박사들을 찾아가 열심히 설득했다. 헬기만 내주면 지상에서 들어가는 인건비나 사진 촬영에 대한 용역비는 한 푼도 받지 않고, 산림청이 원하는 사진이나 박람회 때 필요한 사진을 촬영해주겠다는 약속 끝에 마침내 2008년 겨울부터 2010년 여름까지 2년 동안 헬기를 타고 우리나라 전역을 촬영하게 되었다.

항공 촬영에 집중하기 위해서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우선 한반도 전역을 직접 다녀보았다. 그 이후 본격적으로 하늘에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나 헬기를 타 본 경험이 없는 나로서는 비행 첫날 무엇을 찍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땅에서 볼 때와 달리 하늘에서의 시각은 훨씬 넓었고 지상의 모든 것들이 작게 보이는 탓에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기 정말 어려웠다. 설령 셔터를 눌렀다고 해도 제대로 된 사진 한 장 없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우리나라의 독특한 사계절의 특성을 표현해야 한다는 의욕만 앞섰지 항공 촬영에 대한 지식도 없고, 요령도 없어 아주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만 했다. 그 후 몇 번의 실수를 반복하고, 하늘에서 보는 시각이 익숙해질 때 내 눈에 진정한 ‘한국의 미’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다.

특히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는 산으로 가든 들녘으로 가든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미(美)와 색(色)이 엿보였다. 그 자연의 소나타가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 퍼져 있는 모세혈관이 자극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가 가진 특유의 부드러운 선, 형형색색의 나무와 숲, 수백 년 동안 만들어진 논두렁, 인간의 따스한 마음을 품은 산길 등이 작은 카메라에 담기기 시작했다.

헬기는 지상에서 500m 정도 날지만 산을 촬영할 때는 최고 2,000m 이상 올라간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헬기에 난 창문이 책 크기만큼 작아 자유롭게 수직 사진을 촬영하기 어려웠고, 헬기가 적당한 속도로 날아야 하기 때문에 좋은 피사체를 봐도 제대로 촬영하지 못한 경우도 많았다. 특히 백두대간을 촬영하다가 갑작스런 돌풍에 헬기가 곧바로 수직 하강할 때의 느낌은 놀이동산의 자이로드롭보다 몇 십 배는 더 아찔했다.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을까?’ 할 정도로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촬영을 무사히 마쳤다.

사진가로서 의미 있는 사진을 찍기 위해 무수한 도전을 해왔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로도 마음을 내고, 지극정성으로 움직인다면 꼭 이뤄낼 수 있다는 것도 많이 경험했다.

대략 30회 정도 헬기를 타면서 남들이 경험하지도 보지도 못한, 한반도의 숨겨진 비경을 많이 보고 사진에 담았다. 이 사진들을 수십 년, 수백 년의 시간이 지난 후 우리 후세들이 보게 된다면 한반도의 지형과 우리 삶의 터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에르베 튈레 작.

<Hasard>

서른아홉에 이룬 파일럿의 꿈

조은정 중국 상하이 지샹항공사 기장, <스물아홉의 꿈, 서른아홉의 비행> 저자

내가 파일럿의 꿈을 꾸기 시작한 건 내 나이 만 29세 때였다. 그날은 우연처럼 찾아왔다. 2001년 3월 초의 어느 날, 서울 힐튼호텔의 호텔리어였던 나는 여느 때처럼 프런트 데스크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기서 금발 생머리의 여성 기장이 포부도 당당하게 호텔 정문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심장이 심하게 뛰었고 설명할 수 없는 충격과 설렘으로 그 자리에서 얼음이 되고 말았다. 당시만 해도 여자 파일럿이란 쉽게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중년 여성이었던 그녀는 미국 회사에서 20년가량 비행을 해온 기장이라고 했다. 여성도 조종사가 될 수 있구나, 몇 백 명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는 한 비행기의 최고 책임자가 될 수 있구나.

그 이후 파일럿을 향한 나의 도전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주변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그 나이에 어떻게 파일럿이 되느냐, 정신 차려라, 남자들도 되기 힘들다, 파일럿을 남편으로 두는 게 더 빠를 것이다…. 더구나 당시 한국에 있던 대표적인 두 항공사에서는 몇 년째 신입 파일럿을 채용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뽑더라도 나이 제한은 25세였고 시력도 양쪽 모두 1.5 이상이어야 했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아홉에 시력도 0.8이었으니, 자격 미달로 파일럿의 꿈이 원천 봉쇄된 셈이었다.

정말 터무니없는 꿈인가?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파일럿이 되고 싶다’는 메아리가 멈추질 않았다.

안정된 호텔리어라는 직업을 포기해야 하는 게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 마음속 목소리에 충실하기로 했다. 한국이 안 되면 다른 나라에서라도 시작해보면 된다는 생각에 호텔에 오시는 외국인 파일럿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어떻게 파일럿이 되셨나요?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나도 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 사람들과 달리, 미국인 파일럿들은 모두 긍정적인 답을 해주었다. 그 후 더 열심히 파일럿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모았고, 그렇게 해서 모은 정보만 책 몇 권 분량이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내 꿈을 향한 길의 윤곽도 잡히는 거 같았다.

한국에서는 어렵지만, 미국에서 비행 교육을 받아 비행 경력을 쌓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당장 미국으로 떠날 만한 돈도, 연고지도 없었던 나는 우선 한국에서 일을 하면서 비행을 배울 방법을 찾았고, 두드리면 문이 열린다는 말처럼 그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오산 미군 공군부대 내의 에어로클럽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곳에서 교육받기까지 실패, 좌절,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거쳤지만 결국 오산 에어로클럽에 들어가 자가용 면허증까지 취득했고, 그다음 단계인 계기비행 과정을 하던 중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3년 동안 일하며 알뜰히 모아놓은 돈이 기본 자금이 되어주었다.

미국에서 파일럿이 되려면 항공 학교에서 자가용면허, 계기비행 자격, 상업면허, 멀티엔진면허를 취득하고 이러한 면허 과정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관면허까지 취득한 뒤 비행 교관을 하면서 비행 경력을 쌓아야 한다. 그 과정 과정을 마스터하는 길은 오직 연습과 훈련뿐이었다. 그러한 과정을 통해 끝내 파일럿 자격증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11년, 파일럿의 꿈을 꾼 지 10년 만에 중국 항공사에서, 중국 최초의 외국인 여기장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에게 운이 좋은 거 같다고 하지만, 내가 이룬 그 어떤 것도 한 번에 된 것은 없다. 이 모든 행운은 아무리 상황이 어려워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파일럿이 될 수 있는 길을 찾으려 노력한 덕분이다.

파일럿 면허 과정 중에 계기비행이라는 게 있다. 말 그대로 비행기 내의 계기판을 보고 계기판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비행하는 것을 말한다. 계기비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것이 허상일 수도 있고 실제와 다를 수도 있는데 습관적으로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믿다가는 때때로 실수를 하게 되어 큰 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비행 중에 구름의 모양이 비스듬하면 비행기가 수평으로 날고 있음에도 구름의 모양에 영향을 받아서 기울어져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그때 구름의 기울기에 맞추어 비행기를 기울이다가는 오히려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이런 것들을 허상이라고 부르는데 허상을 믿고 위험한 조종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계기비행을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믿는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우리에게 불가능하다고 보이는 것들 또한 허상에 불과하다. 내 가슴속에 강하게 새겨놓은 목표와 계획의 계기판을 믿고, 아무리 힘들다 해도, 자신만의 계기판을 따라 도전하고 노력으로 정진한다면 언젠가는 시원한 활주로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는다.

앤서니 브라운 작.

<꼬마곰과 프리다>

수채화+과슈+색연필 / 2013

귀가 들리지 않는 나, 4개 국어에 도전하다

김수림 일본 도쿄 거주. <살면서 포기해야 할 것은 없다> 저자

나는 어린 시절부터 남들이 불행하다 말할 만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2살 때 부모님이 이혼하고, 4살 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먼 시골집에 버려졌다. 그리고 6살에 청력을 잃었다. 텔레비전을 틀어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어떤 누구의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돈 벌어서 돌아온다며 떠났던 엄마가 4년 만에 돌아왔고, 12살 때 엄마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역시 힘든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듣지도 못하고 말도 안 통하는 낯선 나라에서 학창 시절엔 따돌림을 당했고 극심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그러한 시련 앞에 나는 내 앞의 문제를 피해 돌아가기보다는 정면 돌파하는 방법을 택했다. 나는 듣지 못하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았지만 그럴수록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뭐든지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새로운 것들에 도전했다. 그중 하나가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었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일본어를 빨리 배우게 했다면, 영어는 장애를 가진 나의 진정한 독립을 위한 강력한 무기로 선택한 것이었다. 귀가 안 들리는데도 한국어, 일본어, 영어 3개 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주변의 많은 우려를 뒤로한 채 무작정 영국으로 떠났다. 당시 나는 알파벳조차 제대로 모를 정도의 수준이었다. 학창 시절 영어 수업은 영어 듣기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내가 배울 수 있는 건 없었기 때문이다. 영국 어학원에 와서도 처음엔 수업을 전혀 따라갈 수 없었다. 정말 큰 좌절이었지만, 귀가 들리지 않는 나에게 맞는 학습법이 무엇일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수업의 형태를 나에게 맞춰 조금씩 바꿀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다행히 어학원 원장님이 유치원 선생인 린다 선생님을 내 수업을 위해 특별히 초빙해주셨다. 그 이후 개인 교습을 통해 알파벳부터 배워나갔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내가 똑같은 소리를 만들어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선생님은 자기 입술의 움직임, 혀의 움직임, 목의 진동, 입에서 숨을 토하는 공기의 세기 등을 나에게 일일이 손으로 만지고 확인하게 하셨다. 그 느낌과 똑같이 내 입, 혀, 목, 이를 움직이게 하여 26개 알파벳의 소리를 완전한 내 것으로 만들어주셨다. 심지어 입속에 손을 넣어 확인하기도 했다.

그렇게 익힌 발음을 잊지 않기 위해, ‘A’를 배웠다면 하루 종일 ‘에이, 에이, 에이’ 소리를 내야 했다. 알파벳 하나를 배우기 위해 하루가 걸렸다. 그 이후 단어를 배울 때도, 24시간 계속 연습해서 잊지 않으려 애썼다. 새로 만난 단어는 포스트잇에 적어 방 안 벽과 천장에 붙여두었다. 말의 높낮이를 표현하기 위해 사람들이 단어 하나하나를 말할 때 입 모양, 표정 변화를 읽어가며 그대로 따라했다.

휴일에도 서재에 박혀 공부했고, 서재에서 나왔을 땐 누구든 붙잡고 수다를 떨었다. 상대방의 입술을 읽으면서 하는 말을 이해하고, 머릿속으로 소리를 만들어 목소리를 낸다. 이 과정이 수없이 반복되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내가 영어를 배우는 과정은, 사람들이 바보 아니냐고 생각할 정도의 지루하고 답답하고 긴 과정이었다. 하지만 기초를 충실하게 다지자 실력은 기하급수적으로 향상되었다. ABC도 모르던 내가 6개월 만에 영국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수준까지 올랐다.

그렇게 영어를 마스터하자 그다음 스페인어를 배우는 것은 더 쉬웠다. 그러고 나자 세상살이에 조금은 자신이 생겼다. 서른이라는 늦은 나이에 일본에 있는 세계적인 금융 회사에 취직했고, 좋은 남편 예쁜 딸과 행복하게 살고 있다.

듣지 못하는 내가 한국어, 일본어, 영어, 스페인어 4개 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걸 보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한다. 4개 국어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배운 것이 있다면 살면서 포기할 일이란 없고, 전력을 다한다면 그 마음이 결국 길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누구나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는 꿈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주저하지 말고 도전해본다면, 하면 된다는 마음가짐을 잃지 않는다면, 그 꿈은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되어줄 것이다.

나탈리 레테 작.

<Jeune fille sur le champignon>

실크스크린 / 2010

나도 ‘아티스트이다’ 展

작 가 들  경 계 를  허 물 다

2013년 8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의 작품은 앤서니 브라운, 세르주 블로크, 에르베 튈레, 나탈리 레테 등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들의 그림입니다. 현재 이 작가들의 그림책 원화들이 <나도 ‘아티스트’이다> 전에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각 작가들마다 ‘경계 허물기’라는 주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줍니다. 작가와 감상자와의 경계, 다른 문화와 종교라는 경계, 인종과 더 나아가서는 인간과 동물 간의 경계 등 그들의 세계를 엿보며 그들의 창작 과정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앤서니 브라운과 그의 동반자인 한나 바르톨린이 함께 작업한 2013년 신간 <꼬마곰과 프리다>의 원화도 공개합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세계 일러스트 거장들의 원화뿐 아니라, 그들의 작업하는 모습, 작품 제작에 사용되는 작가별 다양한 재료들 등 참여 아티스트의 실제 아뜰리에 모습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작품을 눈으로 보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실제로 만져보고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아이와 함께하면 좋을 다양한 무료 체험들이 준비되어 있는데, 나탈리 레테의 ‘꼴라쥬 조각놀이’ 세르주 블로크의 ‘빨간 실을 이용한 공간드로잉’ 크리스티앙 볼츠의 ‘애니메이션 만들기’ 에르베 튈레의 ‘12가지 감성놀이 책 읽기’ 등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전시 기간 5.1~8.21   장소 고양아람누리 갤러리누리(Tel. 031-901-4368)

자료 제공 (주)아트센터이다  www.artcenterida.com

쉬는 게 불안한 당신, 휴식하라!

이제 여름 휴가철입니다. 휴가, Vacation은 ‘어떤 것으로부터 해방되다’라는 뜻에서 비롯됐다고 하지요. 하지만 대다수의 한국인은 쉬면 불안해지는 증상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제대로 된 휴식이라면 오히려 일의 업무를 향상시키고 삶의 활력소가 되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올해는 반드시 나에게 딱 맞는 최상의 휴식의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 주는 선물, 휴식의 이야기를 모아봤습니다. – 편집자 주

노동 뒤의 휴식이야말로 가장 편안하고 순수한 기쁨이다.
– 칸트

휴식이란 밀도 있는 순간을 말한다. 이런 순간은 시간적으로 몇 시간 혹은 며칠까지 확장될 수 있다. 곧 단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오로지 자신만의 시간을 누리는 것이다.
– 헬가 노보트니


2011년 남녀 직장인 1천 명을 대상으로 ‘휴식에 대한 의식’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전체 직장인의 87.3%가 ‘휴식이 부족하다’고 답했고 ‘충분히 쉬고 있다’는 응답은 12.7%에 그쳤다. 특히 20대 직장인 70%는 법정공휴일 수가 ‘턱없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보장된 휴가는 자유롭게 사용하느냐’에 대한 질문에는 응답자의 68%가 ‘휴가를 사용할 때 눈치를 본다’고 답했으며, 그 이유로는 ‘혼자 쉬는 게 미안해서’(34.8%), ‘돌아왔을 때 밀린 일이 부담스러워서’(29%), ‘상사가 안 쓰니까’(20.3%), ‘인사고과에 나쁜 영향을 줄 것 같아서’(15.6%) 순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휴식을 갈망하는 직장인들은 일과 휴식 중 어떤 것을 선택할까? 조사 결과, 예상과는 달리 ‘휴식’보다는 ‘일’을 선택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200만 원의 상여금을 받는다면 연차 전부를 반납하고 일하겠다’는 사람이 과반수 이상이었다. 일 때문에 15일 연차 전체를 포기할 수 있냐는 질문에도 전체 응답자의 53.7%는 ‘그렇다’고 답했다.

현대 사회는 휴식도 소비 상품으로 바라본다. 마치 이국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면 들수록 더 편안한 휴식을 누릴 수 있는 것처럼 자극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장거리 여행은 준비 과정이 번거롭고, 예산도 넉넉히 마련해야만 한다. 또 현지의 기후는 물론 먹고 마시는 것에 적응해야 하는 등 엄청난 스트레스를 준다. 좀 적응하고 쉴 만하다 싶으면 다시 귀국길에 올라야 한다. 휴식은 자유 시간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에 달린 게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사랑하는 사람과 나누는 밀도 있는 대화, 음악을 즐기며 맛보는 기쁨, 심지어 긴장감에 넘쳐나는 사업 프로젝트 역시 ‘자신만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 시간은 놀이를 하듯 즐거울 수도 한껏 심각할 수도 있으며, 목적을 추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무엇을 목적으로 삼아야 할지 탐색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컨대 중요한 것은 나와 시간의 일체감이다.

– <행복의 중심 휴식>(울리히 슈나벨 지음 I 걷는나무) 중에서

휴식은 몸을 이완 상태로 바꾼다. 요동치던 심장은 느려지고 혈압과 혈당도 서서히 떨어진다. 반면 소화 기능은 촉진되어 장의 운동은 활발해진다. 이런 이완 상태에서 활동을 위한 에너지 생성의 기반이 마련되고, 지쳐 있던 세포들도 재생된다. 휴식을 통해 신체는 비로소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이다. 또한 적극적인 휴식을 취한 뇌는 행복과 안정감을 주는 세로토닌이란 신경 전달 물질을 분비한다. 이는 뇌관부터 시상, 대뇌피질, 해마까지 뇌의 전반적인 기능을 향상시켜 기억력, 창의력 향상으로 이어진다. 제품의 아이디어 90%가 직원에게서 나온다는 일본 미라이 공업은 연간 기본 휴가 140일, 일일 근무시간 7시간 15분이다. 다른 회사에 비해 업무 시간은 적지만 충분한 휴식으로 사원들의 업무 능력은 향상되었고, 직원들의 아이디어 제안 수만 한 해 1만4천 건에 이를 정도로 일본 내 전기 설비 자재 분야에서 1위를 지키고 있다.

– KBS1TV <생로병사의 비밀> ‘휴식의 힘’ 중에서

휴식은 어리석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한여름 나무 그늘 밑 잔디에 누워 졸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하늘을 떠다니는 구름을 보는 것은 결코 시간 낭비가 아니다.
– 설 J. 럽복

휴식이란 자신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는 장소에 이르는 것이다.
– 나탈리 크나프

휴식이란 쓸데없는 시간 낭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휴식은 곧 회복인 것이다. 짧은 시간의 휴식일지라도 회복시키는 힘은 상상 이상으로 큰 것이니, 단 5분이라도 휴식으로 피로를 풀어야 한다.
– 카네기


내 삶에 안식을 주자

나는 서른 살 결혼과 동시에 아내의 권유로 1년간 휴식 기간을 가졌다. 그 휴식의 첫 시작은 한 달 동안 아내와 함께한 중국 전국 일주였다. 여행 이후 우리의 수중에는 2,200만 원 전셋집과 40만 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여행을 통해 나는 내가 가진 욕구가 무엇인지 들여다보고 그런 욕구들을 채울 수 있었다. 그 여행 이후 그동안 하고 싶었지만 미뤄왔던 영어 공부도 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다. 시골 깡촌에서 자란 나로서는 비전을 크게 가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 덕분에 나 또한 도전과 열정을 키워갈 수 있었고, 대학원도 진학하게 되었다. 1년간의 안식은 내게 10년 동안 달려가야 할 인생의 방향을 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올해 마흔을 맞아 내 자신에게 또다시 1년간의 안식년을 주려 한다. 앞으로 내가 달려가야 할 10년, 그 인생의 목표를 정하기 위해! 마침 그 첫날이던 7월 1일 모처럼 10년 지기 친구들을 만났다. 먹고살기도 바쁜데…라는 말보다 한결같이 응원해주는 친구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꼈다. 올여름엔, 한 달간 가족과 함께 미국, 캐나다로 휴가를 계획 중이다. 가족(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하는 한 달의 여행이 지난 10년을 돌아보고 앞으로 10년의 방향을 깊이 생각하게 해줄 것이다. 경제적으로 많이 부족하지만, 여행 중 겪는 어려움 또한 우리 가족이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 될 거라 생각한다. – 파렐님(블로거)


휴식불안증에서 벗어나 온전히 쉬는 방법 ‘몸 놓아주기’

나는 치의학을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다. 우리나라에서 치의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대학교를 졸업한 뒤, 입문 시험을 거쳐야 한다. 시험 준비를 위해 정말 열심히 공부했던 몇 년 전을 생각하니 ‘그렇게 치열하게 산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생각해보면, 그때까지 나는 ‘휴식불안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입문 시험 공부 초반, 학점은 당연히 좋고 소위 ‘스펙이 빵빵한’ 사람들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자니 매시간, 아니 매초가 불안의 연속이었다. ‘사람들은 내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을 당연히 이해하고 넘어갔겠지?’ ‘나는 지금 겨우 이만큼 공부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더 많이 하고 더 자세히 했을지 모른다’는 생각들로, 책 내용이 눈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하루를 온전히 투자하고도 공부 진도는 ‘달팽이 달리기 수준’이었고, 잠을 줄이면서까지 책을 붙잡고 있는 시간은 늘어났다. 1주일은 열정과 패기로, 2주일은 오기로 버틸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체력도 허락해주지 않았고 공부 능률도 점점 떨어졌다.

고민하던 찰나, ‘아예 화끈하게 공부하고, 화끈하게 머리를 쉬어주자’라는 생각이 머리에 스쳤다. 그때부터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는 공부를 ‘화끈하게’ 하고, 10시부터는 집에 들어와서 아예 몸을 푹 놓아주었다. 따뜻한 물에 좋아하는 향의 오일을 떨어뜨리거나 음악을 틀어놓고 반신욕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욕조에서 눈을 감고도 온갖 생각이 떠올라 마음이 심란했지만, 그것은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그 생활을 1주일, 한 달, 두 달 계속하면 할수록 내일의 각오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체력은 일정 수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렇게 수험생 기간을 보낸 뒤, 무사히 입문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 현재 치과 의사의 꿈을 목전에 두고 있다. 지금도 공부하려고 책상에 앉으면 외울 것은 화수분에서 나오는 것마냥 많고, 할 일도 많지만, 예전처럼 많이 불안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온전히 쉼’을 실천하기엔 현실적으로 일이 너무 많고, 걱정거리도 많다고 하소연하시는 분들이 주변에 많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에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저 쉬어보면 어떨까. 오히려 머리를 잠시 ‘꺼두고’ 쉬는 것이,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온전히 쉼’을 실천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현실적으로 일이 많기보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닐까? 몸을 지치게 내버려두기보다 하루 종일 일하느라, 견디느라, 공부하느라 수고한 몸에게 ‘수고했다’며 한마디 건네주고, 다독여주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일 수 있다. 조급하게 사는 게 익숙해져 버린 삶에서 나 스스로에게 휴식을 선물하는 것만큼 값진 선물은 없다. 조금은 놓아보자. 그러면 더 많은 것이 돌아올 것이라 확신한다. – 양선인. 경희대학교 치의학전문대학원 3학년

후회 없는 쇼핑을 위하여

요즘 물건 하나 사는 것이 보통 노동이 아니다. 먼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수십 군데 쇼핑몰의 가격과 상품 평을 비교하고 제품을 선정한 후, 몇 군데를 추려 배송료는 없는지, 쿠폰이나 적립 혜택은 어떠한지 비교하다 보면 그에 들어가는 시간과 정신적인 피로는 어마어마하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합리적인 소비를 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물건을 살 때는 가격뿐 아니라 수많은 심리적 요인이 작용한다. 광고 모델이 예뻐서, 판매원이 친절해서, 친구들이 샀으니까…. 혹은 대형 할인 마트의 ‘70% 대박 할인’ 문구에 계획에 없던 쇼핑을 하고, 카드 결제일이 되면 어김없이 후회를 한다.

유명 연예인이 사용한다는 화장품, 화랑에서 딱 한 점 남은 그림, 날씬한 모델이 광고하는 다이어트 음료를 사기 전에 생각해보자. 나에게 꼭 필요한 물건인가? 과거에 비해 얼마나 싸졌던 간에 지금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물건인가? 자신의 심리적 결핍, 열등감을 채우기 위한 불필요한 소비는 아닌지, 소비를 부추기는 그 마음은 무엇인지 내 마음을 들여다보자. 그 심리적 요인을 제거한다면 어떤 할인 혜택보다 ‘잘 사는’ 똑똑한 소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 문진정 & 참조 도서 <스마트한 생각들>(롤프 도벨리 지음 | 비르기트 랑 그림 | 걷는나무)

● 화장품 모델에 대한 환상

돈으로만 얻기 어려운 것들, 많은 노력으로 얻어지는 탄탄한 근육, 아름다운 외모 등에는 사람들이 쉽게 호기심을 갖고 광고에 현혹된다. 아름다운 모델이 등장하는 화장품 광고를 보면 그 화장품이 사람을 아름답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그 모델들이 원래 아름다웠기에 광고 모델로 선발된 것이지 그 화장품을 써서 예뻐진 것은 아니다. 수영 선수 몸매에 반해 수영을 배우게 되는 심리도 마찬가지다. 수영 선수는 원래 좋은 신체 구조를 갖고 태어났을 뿐인데, 나도 수영을 하면 저런 몸매가 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수영 학원에 등록할 이유는 없다.

● 한정판 제품이 더 잘 팔리는 이유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스티븐 워첼은 학생들을 상대로 비스킷의 품질을 평가하는 실험을 했다. A그룹에게는 비스킷 한 상자를, B그룹에게는 달랑 두 조각의 비스킷을 주었는데 그 결과 A그룹보다 B그룹이 비스킷의 품질이 훨씬 더 좋다고 평가했다. 이것은 희소한 물건은 ‘특별하다’는 ‘희소성의 오류’ 때문인데 이는 객관적인 평가 기준을 상실케 한다. 백화점의 ‘빅찬스! 오늘뿐입니다!’ 한정판 광고 앞에서는 이성적으로 한 번 더 생각하자. 가격 대비 품질이 우수한지,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인지.

● 4백만 원짜리 가죽 시트가 싸게 느껴지는 이유

당신이 8천만 원짜리 고급 승용차를 산 후 카시트를 사기 위해 상점에 갔는데 판매원이 고급 차에 어울리는 4백만 원짜리 가죽 시트를 권했다고 하자. 당신은 십중팔구 쉽게 수락할 것이다. 8천만 원에 비해 4백만 원은 소소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개의 물건을 평가할 때보다, 가격과 품질이 차이 나는 두 가지 물건을 비교했을 때 비싼 상품이 훨씬 더 좋아 보이는 현상이다. 10만 원에서 7만 원으로 할인한 제품은 원래 정가가 7만 원인 제품보다 더 싸게 느껴진다. 그래서 마치 그것을 사는 것이 이득이라고 생각하게 만든다.

● 수백만 명이 샀다고 꼭 좋은 물건은 아니다

걸어가던 길에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과 마주친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당신도 똑같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름다운 연주가 진행되는 콘서트장에서 관객 중 누군가가 박수를 치면 갑자기 홀 안에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한다. 이것은 ‘사회적 검증’ 심리 때문인데 다른 사람처럼 나도 행동하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심리를 이용해 많은 회사들은 ‘가장 잘 팔리는 것’이라며 부추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선택했다고 해서 좋은 상품은 아니며 나에게 필요한 상품은 더더욱 아니다.

● 호감형 판매원은 지우고 물건만 생각하자

호감 편향이 생기는 이유를 학문적으로 분석했을 때 1)외모가 매력적인 경우 2)출신이나 인품, 관심사가 비슷한 경우 3)상대가 먼저 호감을 보인 경우가 있는데 호감이 생기는 확률도 1, 2, 3의 순서대로 크다. 그래서 광고 기획자들은 잘생기고 예쁜 모델뿐 아니라 비슷한 외모, 사투리 등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평범한 인물을 모델로 선정하기도 한다. ‘당신은 소중하니까요’라는 광고 카피도 호감을 표현하는 신호다. 사람들은 호감을 보이는 상대에게 호감을 주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뻔한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물건을 사고 만다. 그럴 때는 실제 상대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호감을 느끼지 않는 가상의 인물과 거래를 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렇게 하면 호감 편향에 빠졌었는지 아닌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