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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캠핑, 아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글 & 사진 김홍수 여행작가,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 저자

직장 생활로 바쁜 아빠들은 아이와 함께 지낼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느 주말, 소파에서 뒹굴다 보니 어느새 아이가 쑥 자라 있었습니다. 아빠로서 아이에게 무엇을 해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래서 주말은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으로 정해버렸습니다. 아이들은 모든 것을 놀이로 생각합니다. 놀면서 배우는 아이들은 심신이 건강합니다. 아빠와 함께하는 주말 나들이가 많을수록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그만큼 높아지고 가정의 행복지수도 올라갑니다. 1년은 52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아이와 함께 나들이를 떠난다면 이미 행복한 아빠이겠지요. 그 첫 회로 요즘 대세인 오토캠핑을 소개할까 합니다.

오토캠핑이란 ‘오토모빌(Automobile)’과 ‘캠핑(Camping)’의 합성어로 자동차에 텐트와 취사도구를 싣고 야영장까지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캠핑은 아이들에게 아빠의 멋진 모습도 보여줄 수 있어 좋습니다. 아빠가 무거운 짐을 척척 나르고, 텐트를 치고, 요리를 하고, 모닥불을 피우는 등 가족들에게 헌신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은 아빠의 존재감을 재발견하게 됩니다. 텐트를 치는 방법, 커다란 참나무 장작에 불을 붙이는 방법, 물고기 잡는 방법 등을 이야기하며 가족 간 대화의 장도 만들어지지요.

호텔과 펜션의 편안함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불편함이 있지만, 자연과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며 체험 활동도 하고 가족이 함께 신나는 추억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캠핑에 한 번 다녀온 아이들은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합니다.

캠핑 장비 구입은 한꺼번에 하지 말고 천천히 하나씩

대부분의 아빠들은 오래전 산이나 바닷가에서 텐트를 치고 코펠에 밥과 국을 해먹으면서 야영을 해본 경험이 있지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 시절에는 변변한 장비 없이도 작은 텐트에서 비와 바람만 피할 수 있으면 최고의 캠핑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 가족은 첫 캠핑을 떠날 때 15년 된 텐트, 집에서 사용하던 휴대용 가스레인지, 주방에서 사용하던 밥솥과 주방기구 몇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새로 구입한 것은 텐트 바닥에 까는 캠핑용 매트가 유일했지요. 이 장비들만 가지고도 추억을 쌓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캠핑 장비는 풀세트로 한꺼번에 구입하는 것보다는 작은 텐트만 하나 준비하여 캠핑을 해본 다음에 차근차근 하나씩 구입하는 것이 좋습니다. 텐트 하나만 가지고 캠핑을 떠나는 것이 망설여진다면 한 번쯤 캠핑 장비 대여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캠핑장에서 만나는 다양한 프로그램

최근에는 캠핑장에서도 다양한 문화 예술 체험 프로그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커피바리스타교실, 음악힐링캠프, 미술힐링캠프, 국악난타배우기, 미니콘서트 등의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고 있지요. 캠핑을 하면서 힐링을 하고 다양한 문화 체험도 할 수 있는 테마 캠핑이라 볼 수 있습니다. 먹고 노는 캠핑 문화가 아닌 즐겁고 유익한 프로그램을 통해 힐링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캠핑을 시작하는 캠핑 초보들에게 제격입니다.

캠핑 정보 도움: 네이버 카페 <홍반장의 에듀캠핑>

풍성한 가을, 스치는 바람이 고맙습니다

도회지 생활은 바빴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나이 사십을 넘어가면서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나를 채우고 싶었습니다. 운명처럼 지리산행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지리산에서 산 지 14년이 되었습니다. 농사는 단순하지만 농사가 일깨우는 것은 다양합니다. 논이나 밭을 지날 때 그곳에서 일어나는 많은 사연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갑니다. 농사의 깊은 속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드는 나는 행복합니다. 고된 육체노동이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음을 푸근하게 해줍니다. 스치는 바람이 고맙고 살아감이 고맙습니다.

사진, 글 이창수

명품 농부

모심기 전 논에서 해야 할 일은 가래질과 쟁기질과 써레질입니다. 가래질은 논둑을 다지는 일이고, 쟁기질은 묵은 땅을 뒤집는 일이고, 써레질은 흙을 잘게 부수어 고르는 일입니다.

논을 보아 하니 쟁기질은 끝나고 써레질은 아직 남았습니다. 담배를 문 아저씨가 등허리 빠지게 논둑을 다지고 있습니다. 논농사에서 제일 힘든 일이 가래질입니다. 겨우내 얼었다 녹았다 하며 힘이 빠진 논둑을 다지고 다져야 합니다. 쥐 새끼나 뱀이 낸 구멍으로 논물이 빠지지 않게 잘 다져야 합니다. 귀농해 논농사하는 후배에게 물었습니다.

“아침에 들판서 보니 어떤 이가 논둑을 방바닥 미장하듯 공들여 하던데.” “아이고 형님, 어디 논둑은 혓바닥으로 핥듯이 해놨어요. 저는 힘들어서 절대 안 해요. 이쪽 분들이나 하지 우리 같은 놈들은 못 합니다.” ‘이쪽 분’은 원래부터 살던 ‘명품 농부’이고 ‘우리 같은 놈’은 귀농한 약간 젊은 ‘짝퉁 농부’를 말합니다. 농부나, 흙이나, 물이나 쌀 한 톨 만드는 데 참으로 노고가 많습니다. 밥 한술 뜨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어 그냥”

해거름 들길에서 동네 어르신을 만났습니다. “어디 다녀오세요?” “어~어 논에.” “다 저녁에 무슨 논예요?” “어~어 그냥.” 대개 길에서 만나는 어르신과의 대화는 기름기 없는 담백한 말이 이어집니다. 지난밤 내린 비가 논에 가득합니다. 이른 아침 비 그치기가 무섭게 아랫마을 아저씨는 논에 들어갔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어~어 그냥”입니다. 내가 농사짓는다고 떠들고 다녀도 실패한 농사꾼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어 그냥”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도회지 출신이라 잡생각 많고, 이유도 많아 그들의 무심한 마음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농사는 마음으로 짓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내게는 참으로 멀고 먼 길입니다. 둔덕에 앉아 조용히 그를 바라봅니다. 그의 내딛는 발끝마다, 풀 뽑는 손끝마다 동심원이 일어 건너편 산 그림자가 깨집니다. 깨진 산 그림자는 그의 뒤를 따라 이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갑니다. 여름 해에 벼가 소리 없이 익어갑니다.

쨍한 햇빛

스치며 지나치는 길에 나무 사이로 농부를 보았습니다. 장마 중에 잠시 햇빛이 나니 서둘러 논에 나왔나 봅니다. 비는 벼도, 잡초도 무럭무럭 자라게 합니다. 비는 무엇에나 동등합니다. 자연이 그러하니 농사짓는 이는 제 노동만큼 결실의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꾸부정한 자세로 잡초를 뽑아내는 농부의 모습에는 고통과 행복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가을 빛 잔치

먼 길 달려 온 햇빛이 논에 내려 빛 잔치를 벌입니다. 건너편 둔덕에 앉아 빛 잔치에 젖어듭니다. 현란한 가을빛에 눈을 감습니다. “너는 지난여름 무엇을 했는고?” 감은 눈에 비친 밝은 빛이 묻습니다.

뜨끔합니다. 고추도 심고, 가지도, 토마토도 두루 심었건만 근무 태만에 결국 잡초로 뒤엉킨 밭을 만들었습니다. 열심히 일한 할머니의 다랑논은 이삭이 충만하지만 근무 태만인 우리 밭은 잡초가 충만합니다. 개미의 논에도 베짱이의 밭에도 빛은 고루 비추나 결국 준비된 사람만이 풍성한 가을을 맞이합니다. 자연은 분별함이 없으니 모두 제 할 따름입니다.

사진가 이창수님은 1960년생으로 중앙대 사진학과를 졸업하고 17년간 사진 기자로 근무해왔습니다. 1999년 지리산으로 내려가 수시로 산과 들을 걸어다니고 있습니다. 현재 지리산 악양골에 살면서 내년 6월 서울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는 <히말14, 희망14>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박하사탕

어린 시절 ‘인내는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달다’라는 명언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인내’라는 과일이 진짜 있는 줄 알았다.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다? 다음에 커서 돈 벌면 그 요상한 과일을 꼭 사 먹어 보리라 결심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내가 중학생이 되자마자, 신(神)은 ‘옜다! 네가 바라는 인내다’ 하고 인내를 주셨다. 그 맛은 이랬다.

중학교 때 집안이 사정없이 기울어졌다. 그래서 한때 아르바이트를 하였다. 나는 깊은 밤 자전거를 타고 읍내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는 밤 열두 시에 하동역에 도착하였다. 열차가 정차하면 나는 재빨리 수하물 칸으로 달려가서, 내 몸무게보다 무거운 신문 꾸러미를 내려 받아 자전거에 옮겨 싣고 신문보급소로 왔다. 그리고 내일 아침 우편으로 보낼 신문지마다 독자의 집 주소가 적힌 띠지를 끼우는 작업을 하였다.

겨울밤 추위는 혹독했다. 어둠이 내리자 바람은 도적같이 읍내를 휘젓고 다녔고, 사람들은 일찌감치 문을 닫아걸었다. 하지만 나는 춥고 어두운 밤길을 자전거로 달리고 있었다. 칼바람은 어리다고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손발은 얼고 코와 귀가 떨어질 듯 아팠다. 겨우 신문 보급소 앞에 자전거를 세우고 나는 울었다. 너무나 추워서 아무도 없는 길에서 엉엉 울었다. 얼떨결에 처음 맛본 인내는 그렇게 매웠다.

공업고등학교 3학년 때, 대구에 있는 방직공장에 실습을 나갔다. 일만 열심히 하면 공장에서 먹는 것과 자는 것을 다 해결해주었다. 감사하고 행복했다. 그즈음 울산조선소에 다니는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기능직 사원 모집이 있어서 담당 과장님한테 부탁해두었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다. 그곳은 방위산업체, 즉 월급 받고 5년간 근무하면 병역을 면제해주는 회사였다. 나는 곧바로 방직공장을 퇴사하고 울산으로 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철석같이 믿었던 담당 과장의 부름이 없었다. 나는 친구 기숙사에서 꼬박 보름을 기다리다가 고향으로 내려왔다.

집안 사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일자리를 찾아 이리저리 다녔지만, 나는 자꾸 지쳐갔다. 결국 첫 직장 대구 방직공장 부장님께 사정을 전하였다. 다행히 회사에서 재입사를 허락해 주었다. 그런데 옷가방을 싸들고 대구로 가는 버스에 올랐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다시 돈을 벌 수 있게 되었는데 왜 그리 서럽던지…. 나는 차 안에서 고개를 떨군 채 꺽꺽 울었다. 쓰디쓴 두 번째 인내였다. 그 후에 있었던 세 번째 인내는 아직은 말하지 못하겠다. 대신 이제 열매를 이야기하고 싶다.

대구 방직공장 담 너머에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날 나는 오전 작업을 끝내고 면장갑을 빨아 철제 구조물에 널고 있었다. 그때 멀리 학교 창문 밖으로 나온 아이 얼굴 하나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공장에 근무한 지 일년이 넘었지만 아이와 눈이 마주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도 이쪽 사람과 처음 눈길이 닿은 듯 재빨리 손을 흔들어주고는 다람쥐처럼 사라졌다. 사랑스러웠다. 아! 내가 선생님이 되어 저 아이들과 함께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신기루 같은 희망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딱 10년 후 어느  날, 내가 초등학교에서 부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운 시골 학교,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바라보는 조회대에 올라가서 이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어린이 여러분 반갑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함께 공부할 최형식 선생님입니다.”

젊은 날, 공장 담벼락 아래서 꿈꾸었던 희망의 뱃머리가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은 대체 얼마나 맛있는 열매를 주시려고, 이토록 오랫동안 쓰디쓴 인내를 맛보게 하실까’ 하고 내가 구시렁 구시렁거리던 어느 평범한 날, 불현듯 이곳에 나를 내려놓은 것이다.

부임 첫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뒤, 나는 교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슴을 펴고 한껏 숨을 들이쉬었다. 어릴 때 박하사탕을 오드득 깨물었을 때처럼, 콧속에서부터 시작한 상쾌함이 온몸으로 퍼졌다. 인내가 맺은 열매는 박하사탕 맛이었다.

최형식 & 일러스트 유기훈

한글 기계화에 앞장선 공병우 박사

공병우 & 자료 제공 송현,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최근 문화재청은 근현대 산업 유물 중 문화적으로 가치가 큰 18점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이 중에는 1949년 공병우 박사가 만든 세벌식 타자기도 포함돼 있다. 한국 최초의 안과 의사로 알려진 공병우 박사.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타자기 교육 등 인술을 펼친 의사였고, 한글 기계화 운동에 앞장선 시대의 선구자였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한영 겸용 타자기, 전동 타자기 제작, 한글프로그램 ‘아래아한글’ 개발 지원 등 한글의 과학화에 평생을 바친 공병우 박사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 편집자 주

눈병 고치는 일은 외국인도 할 수 있지만, 한글 과학화는 한국인이 해야 한다

1938년 서울 안국동에 개원한 공안과는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 개인 병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병에 걸린 중년 신사 한 분이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우리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었다.

“우리글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글인데 일본인들이 못 쓰게 탄압하고 있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까지도 제 나라 글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해요. 아예 한글은 글자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는 식자들도 많습니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았다. 학교에서도 배울 수는 없었지만 그때까지도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뒤늦게나마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알게 된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시력 검사표를 만드는 등 한글의 과학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은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천대해왔다. 그래서 나는 한글 기계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인들이 편리하게 즐겨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기계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타자기 발명, 식자기, 한글 워드프로세서 등을 개발해왔다.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 공병우 박사

공안과에 있던

한글문화원에서 작업하는 공박사

속도 빠른 세벌식 타자기 개발과 시각장애인 재활 교육에 힘쓰다

한글 타자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방된 이후였다. 해방이 되자 한국 의사들은 후배들을 양성해야 했고, 이를 위해 일본어로 만든 <소안과학>이란 책을 한글로 번역했다. 번역한 원고는 두 사람이 썼는데, 필체가 제각각이라 읽기가 어려웠다. 당시 이원익, 송기주씨가 발명한 한글 타자기가 있었지만 손으로 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속도가 무척 느렸다.

나는 속도도 빠르고 글씨 꼴도 간편한 가로쓰기의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고 싶었다. 우선 타자기를 다 뜯어 기본 구조를 익혔고, 우리나라 글의 음운 조직을 공부하였다. 한글의 기막힌 규칙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때부터 초성, 중성, 종성의 한글 고유의 특성과 자주 쓰는 소리를 분석, 인체공학적으로 자판을 배치하는 등 세벌식 타자기 개발에 몰두했다.

그로 인해 병원 운영이 부실해지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연구 작업은 계속되었고 6개월 만에 두 개의 가이드로 만든 쌍초점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그러나 발명품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냉담했다. 일반 사회는 물론 관공서에서는 한문을 섞어 쓰지 않고는 공문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완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타자기 보급에 어려움을 겪지만 한편으론 타자기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항공모함, 전함 등 군비 작동을 위해선 타자기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육해공군 합동으로 한글 타자 강습 요청이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한글 타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관심했다. 그런 와중에 ‘한글 타자기 경연 대회’를 여는 등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한글 사랑에 감동하여 ‘한글 기계화 연구소’ 설립을 후원했다.

공안과 앞에서 직원들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재활 교육에도 관심을 갖게 된 나는 구급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료 진료를 하고, 맹인재활센터를 만들어 점자와 한글 타자기를 치는 방법과 제작 기술을 가르쳤다. 이들의 손놀림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민첩하고 정확해 국산 한글 타자기 회사를 차렸을 때는 공장 일을 맡기곤 했다.

그러던 중 5·16 군사정변은 일약 한글 타자기 붐을 가져왔다. 서기가 펜으로 며칠을 걸려 쓰던 재판 기록을, 타자기가 하루 만에 해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공서를 비롯해 타자기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당시 시중에는 속도 타자기인 공병우식 글자판(세벌식)과 글씨 모양 위주의 김동훈식 글자판(다섯벌식)이 있었는데 글자판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한글 단체들과 만든 세벌식 자판을 표준 규격으로 신청했지만, 1968년, 1983년 두 번에 걸친 표준 글자판 규격에 탈락하면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타자기보다 효율적인 한글 워드프로세서(문서 편집기)를 개발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 쓰는 영어 워드프로세서를 보며 컴퓨터에서 영어처럼 한글도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해 1983년 봄부터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부 방침대로 두벌식으로 고안해 보았지만 비효율적인 방식임을 깨닫고 세벌식으로 연구, 매킨토시 컴퓨터로 한글을 쓰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된다. 그때가 내 나이 여든이었다.

워드프로세서는 속도도 빠르고, 힘도 안 들어 일의 능률이 몇 배로 올랐다.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을 손수레나 달구지로 비유한다면 수동식 타자기는 자전거라 할 수 있고, 전동 타자기는 자동차이고, 컴퓨터는 비행기였다. 나로서는 일생 잊지 못할 감격이었다!

평생 한글 기계화와 시각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내게 노년의 친구들은 조금 쉬면서 여생을 지낼 것을 권유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늘 같았다.

“진정으로 푹 쉬는 날은 지금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있을 뿐이다. 남은 생애를 사회에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되돌려주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공병우(1906~1995) 박사는 1938년 공안과를 개원해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을 만난 것을 계기로 한글 사랑과 한글 기계화 운동에 눈뜨게 됩니다. 고성능 한글 타자기,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점자 한글 타자기 등을 개발했으며 1988년 한글문화원을 설립, 젊은 과학자들이 연구 개발하도록 아낌없이 지원하여 한글프로그램 ‘아래아한글’이 나오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이 글은 공병우 자서전 <나는 내 식대로 살아왔다>(대원사), <공병우>(송현 저, 작은씨앗)을 토대로 정리했음을 밝힙니다.

노년의 예능 <꽃보다 할배>로 돌아온 나영석 PD

최근 tvN에서 방송되고 있는 <꽃보다 할배>가 화제다. 노년의 예능이라는 새로운 시도, 웃음과 함께 잔잔한 감동까지 던져주는 프로. <꽃보다 할배>는 KBS-TV <1박 2일>을 이끌며 국민피디라 불렸던 나영석 PD가 올해 초 CJ E&M으로 회사를 옮긴 후 만들어낸 첫 작품으로, 역시 나영석이라는 찬사를 자아냈다. 좋은 프로그램이란 새롭고, 재밌고, 또한 그 안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나피디. 방송을 통해 살짝궁 얼굴도 보여주는 센스로 어느새 연예인처럼 친근해진 우리들의 국민 피디, 나영석 피디가 말하는 예능과 인생의 이야기다.

최창원 & 사진 김혜진

“저는 뭐 그렇게 살아보려 했는데도 요지경에서 끝나지만 젊은이들은 지금 이 시대에 인정을 못 받더라도 새롭고 가치 있는 걸 시도해 보시면 훗날에 더 크고 명예로운 평가를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 프랑스 에펠탑 앞에서 신구 할아버지가 (‘꽃보다 할배’ 2회 중에서)

지난 7월 5일부터 방송된 <꽃보다 할배>. 평균 연령 76세, 우리나라 드라마 역사의 산증인이자 50년 지기인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네 할배들의 배낭여행기.

“60대는 아직 애, 70대는 돼야 비로소 어른”이라 말하는 네 배우의 여행기는 웃음과 함께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인생의 이야기들로 잔잔한 감동을 전하며 케이블 채널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것은 나영석 피디에게도 놀라운 일이었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무척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꽃보다 할배>를 보며 우리들의 부모, 노년의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제 대중들이 바라는 게 단순히 웃음,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웃음은 넘쳐나는 시대니까요. 어르신들이 주인공으로 나서면 훨씬 더 인생을 산 분들이니까,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말해줄 수 있겠다 했죠. 조금 재미가 덜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은 보겠다 싶었는데,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는 것으로 봐서, 많은 분들이 이런 걸 알게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 이 프로를 기획할 때는 과연 잘될까? 하는 우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사실 처음 기획할 때만 해도 되겠어? 하는 의구심들도 많았습니다.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신구 선생님을 만났어요. 저도 긴장해서 프로그램 설명을 장황하게 하며 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보는데, 신구 선생님이 예의 그 온화한 미소로 “설명은 됐고…” 하시며 “그러니까 나하고 순재 형하고 몇 명을 늘그막에 여행 보내준다는 거 아니야? 그럼 너무 고마워. 그런 프로그램 계획해주면. 내가 언제 그 형이랑 동생들이랑 죽기 전에 여행을 가보겠어” 하시는데,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했어요. 그러면서 잘되든 못되든 한 번은 하겠다, 같이 가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너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신구 선생님 미소 하나 믿고 다음부터는 다른 고민 하나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요즘은 특히 진심, 마음이 공감되는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과 할 때와의 차이랄까, 다른 부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보통 예능과 다른 건 이분들은 서로 나서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거나 무엇을 더 하려고 애쓰지 않으세요. 오히려 하루하루가 너무 심심해서 이게 프로그램이 될까 싶을 정도인데요. 그런 와중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시점에 한마디씩 던지는 말씀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누굴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연륜이 묻어나는 소회를 밝히시는데 그런 말씀이 울림을 줄 때가 많죠. 이분들 인생의 깊이가 내가 참 가늠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경이롭다고 할까. 이 세상의 모든 어르신들이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지혜나 연륜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가 아무도 물어보려 하지 않았구나, 이런 좋은 콘텐츠가 옆에 있었는데 아무도 안 쓰려고 했었구나 싶죠. 저는 운 좋게 이분들과 일을 하게 됐구나 생각합니다.

KBS <1박 2일>도 여행 프로였고, 이번에도 여행인데요. 특별히 ‘여행’을 좋아하나요?

사실 귀찮음이 많아 어디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막상 나서면 또 좋아하는데 돌아보면 아버지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아버지로부터 ‘항상 겸손해라’는 말 외에 다른 잔소리는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학창 시절에도 공부하라고 하기보다 주말만 되면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사춘기 때는 귀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더라고요. 새벽에 눈 떴을 때 들리는 계곡물 소리, 텐트 문 열고 나와서 보는 물안개 낀 풍경, 툭툭 비 내리는 소리….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런 걸 좋아하나 봐요.

멤버들과 제작진들의 최강 호흡을 자랑하며, ‘국민예능’이라는 찬사까지 들었던 <1박 2일> 시즌1 마지막 녹화 날. 멤버들을 비롯 나영석 피디까지 녹화장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나영석 피디.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 시절 우연히 들어간 연극반에서 연극에 미쳐 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4년 내내 연극을 하며 ‘과정은 재미있고 결과물은 올바른 작업을 하고 싶다’는 꿈,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 원래는 재미있는 코미디 대본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대본 공모에 낙방한 후, 결국 피디 시험에 합격한 그는 2001년 KBS에 입사한다.

지금이야 방송 속에서도 자연스럽고 소탈한 모습이지만, 입사 초에는 처음 보는 연예인과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웅얼거리다 돌아서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급기야 ‘연예인 울렁증’ 때문에 생각지 못한 큰 방송 사고를 낸 후 그는 결심했다고 한다. 한 사람 몫의 피디가 되자고, 더 이상 누구에게도 민폐 끼치지 말자고. 그 후 ‘무조건 열심히’ ‘닥치고 열심히’ ‘불평할 시간에 열심히’는 그의 모토가 되었다. 주말도 휴일도 반납하고 회사에 출근해 편집 연습을 하고,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을 방송할 시간이 되면 만화방으로 달려가 모니터를 했다.

점점 그는 단련이 되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2007년부터 시작된 <1박 2일> 시즌1을 통해 그의 피디로서의 역량은 빛을 발한다. 복불복, 야외 취침, 멤버들과 제작진들의 자연스런 어우러짐, 주민들과의 소통…. <1박 2일> 특유의 재미와 감동 요소를 만들어내며, 진정한 리얼 버라이어티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이 프로는 일요일 저녁이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국민 예능 프로그램이 된다. 나피디에겐 대학 시절의 바람이었던 ‘과정은 재미있고 결과물은 올바른 작업을 하고 싶다’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코미디 작가가 되고 싶었고 결국 예능 프로그램의 피디가 되었습니다. ‘웃음’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굉장히 좋아해요.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은 참 좋은데 왜 많이 안 볼까? 저는 포장지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알맹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장치 중에 하나가 웃음이나 재미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어릴 때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던 프로도, 김영희 피디님의 ‘칭찬합시다’ ‘양심냉장고’ 이런 프로였어요. 뉴스에서 맨날 이야기해도 안 되는데 이경규씨가 나와서 정지선을 지키자 하면 붐이 일어나잖아요. 웃음이라는 포장지에는, 메시지를 굉장히 무리 없이 전이시키는 힘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도 단순히 웃음만 좇는 게 아니라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들이, 보고 났더니 괜찮네, 가슴이 좀 따듯해졌어,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에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는 나영석 피디. 그는 2012년 초, <1박 2일> 마지막 녹화를 끝낸 후 모든 것을 놓고 아이슬란드로 오로라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삼십 대 중반,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오로라처럼 나영석 피디의 인생에 예고도 없이 등장했던 <1박 2일>이라는 오로라. 하지만 그것이 어느새 자신에게는 커다란 짐이 되어 있었다. 1박 2일 피디라는 나, 성공을 거두었다는 나, 사람들의 칭찬과 명성을 유지하고자 고민하는 나, 그러한 무게에 짓눌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다음 작품을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들로 머릿속을 채운 나….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라는 걸 절감했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서른일곱. 이제 마흔을 준비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여행, 그리하여 다시금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여행, 진짜 나를 찾아서 여행을 떠난 것이다.

계속 피디를 해야 하나? 다른 일을 해야 하나?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여행의 시간들을 거치며 그는 잊고 있던 한 가지 진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한다. ‘일은 두근거림을 좇아서 하는 것’ ‘미치도록 두근거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 그에겐 피디라는 직업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꽃보다 할배>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토크쇼, 서바이벌 오디션 등등, 점점 예능 콘텐츠들도 다양화되고 경쟁률도 세지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스트레스는 없으신지요?  

가끔 다른 유의 예능을 해볼까 생각해도 결국은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게 많이 생겼으니까 해볼까, 저것도 만들어볼까 하다가는 인생이 끝나버리겠는 거예요. 어떻게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겠어요. 제가 지금까지 만들던 걸 더 열심히, 더 잘, 더 정교하게 만드는 수밖에 답은 없는 거더라고요.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는데, 잘될까 잘못될까 그런 부분이 묘하게 흥분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걸 즐기는 스타일이기도 해요. 망할 땐 망하더라도, 한번 들이대볼까 하는 스타일이라 그렇게 크게 스트레스받지는 않아요.

<꽃보다 할배>들과 함께하면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순재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이가 든다는 건 결국 죽음에 가까워지는 거다. 그런데 내가 하루하루 어쨌든 남한테 빚 안 지고 부담 안 주고 내 인생 살면 잘 산 인생 아니겠냐고. 어떻게 보면 비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거잖아요. 태어나는 순간 사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건데 그분들 보면서 그런 생각은 들죠. 어떻게 해야 멋지게 늙어가는 걸까. 급하게만 살 것이 아니라 천천히 주변도 둘러보고 가야겠다. 지금 이 시간이 되게 소중하구나 여러 가지 생각을 해요.

나영석 피디에게 인생이란? 삶이란?  

시기가 그런지 진짜로 요즘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삶이란 뭐지?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하지만, 저 또한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오늘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죠. 다만 피디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끝없이 저를 갈고 닦아서 한 단계 한 단계 더 나은 경지에 올라가고 싶다는 욕심이 늘 있어요. 제가 했던 작업 중에 한두 개라도 고전이 될 수 있는 그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앞으로도 그런 걸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상과 달리 기계치, 길치인데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무서워하고, 카카오톡도 후배가 깔아줘서 반년 전에 겨우 시작했을 만큼 아날로그적인 사람. 무엇보다 그런 매체를 통해 퍼지는 얇고 넓은 인간관계보다 자연스레 알게 되어 깊게 사귀기를 좋아하는 사람.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그만큼 더 친밀해지는 사람. 빠르게 배우지는 못해도 누구에게든 편견 없이 배우는 사람…. 어쩌면 나영석 피디가 만들어내는 프로들은 묘하게 그를 닮았던 것 같다.

나피디는 요즘 또 다른 배낭여행 프로젝트 2탄을 준비 중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늘 새로운 두근거림을 좇아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나영석 피디. 또 한 번 그가 만들어낼, 그와 꼭 닮은 세상을 기다려본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나영석 PD는 1976년에 청주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2001년 KBS 27기 공채 프로듀서로 입사, <여걸 파이브> <여걸 식스> <1박 2일>을 연출했다. 2011년 산의 날 국무총리 표창, 한국방송대상 작품상(연예오락 부문)을 받았다. 현재 CJ E&M 프로듀서이고, 저서로 <어차피 레이스는 길다>(문학동네)가 있다.

한순간이 내 인생을 바꾸어놓습니다. 내 인생을 더욱 발전적으로 성장시켜 준 사건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선물입니다.

나를 바꾸어준 영화 <카모메 식당>

김지혜 30세. 직장인. blog.naver.com/rldwp

대학 졸업을 앞두고 고시원에 살면서 보고 싶은 영화를 다운받아 보곤 했다. 한 달 동안 40편은 본 것 같은데, 그중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도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만 해도 1초의 클릭과 1분 30초의 다운로드, 그리고 106분의 러닝타임, 총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그 시간이 나를 바꿔 놓는 계기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영화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큰 사건, 절정은 없었지만 우리와 닮은 평범한 사람들이 핀란드라는 낯선 곳에 자리한 카모메 식당에서 만나 마음을 열고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어떻게 보면 시시하고 미지근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내게 영화 보는 관점을 바꿔주었고, 그 후로 일본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 많은 일본 영화들을 챙겨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이란 나라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취업해야 할 나이에 ‘일본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했다. 당시 경쟁이 아주 치열했는데, 합격 기준이 대학생, 일본 관련 전공자, 일본어 자격증 소지자 위주였다. 나는 그 어떤 기준에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1년 동안 딱 4번만 신청해 보자고 맘먹었다. 그래도 떨어지면 미련 없이 포기하고 취업하기로.

본격적으로 아침 8시부터 일본어 학원에 다니고, 9시엔 근처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10개월간 학원을 다니면서 단 한 번의 결석, 지각도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3번이나 처참하게 떨어졌다.

연거푸 비자에 탈락하는 사이 나는 일본어능력시험(JLPT) 3급 자격증을 따게 되었고, 마지막 도전만이 남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도전하는 날, 일본 총영사관으로 간 나는 접수창구에 있는 직원에게 “따로 인터뷰 신청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직원 역시 그 이유를 물었다. “제가 3번이나 비자를 신청했는데 다 떨어졌거든요. 이번이 마지막 도전인데 인터뷰라도 해야 후회가 없을 거 같아서요.”

간절한 마음이 전달되었던 것일까. 결국 일본어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한 달 후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워킹비자를 발급받고 몇 달간의 준비 후 난 그토록 바라던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 방값을 내고, 조금 남은 여윳돈으로 여행하며 경험했던 모든 과정들은 내적으로 더 강인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건 3번의 불합격이 정말 나에게 있어선 행운이었다는 거였다. 너무나 쉽게 합격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어렵게 얻어낸, 정말 값진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낸 합격이었기에 일본에서의 1년을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때 인연을 맺게 된 친구들과는 나이를 불문하고 지금도 소식을 전하며 지낸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3년, 일본어 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현실과 타협해 들어간 회사에 최근 일본인 손님이 오게 되어 전문 용어로 가득한 일본어 자료를 번역하게 되었고, 올 1월에는 통역 담당으로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오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어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구나 싶어 신기하면서도, 현재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어떻게든 길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워킹홀리데이 합격, 이 하나만을 바라보며 준비하던 3년 전의 그때처럼 누구보다 절박하고 간절했던 마음을 기억하며 지금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김영순 작.

<끝없이 이어지는 손길 99-06> 50×55cm.

천연염료, 모시, 자수사, 생사, 한지, 우표 /

패치워크, 손바느질 손자수, 미싱, 사라사. 1999.

국토 종단, 삶의 총체적 위기를 바꿔놓다

박현주 41세. 농부. 충북 영동군 황간면

최근에 우연히 ‘결혼의 여신’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우리 집안에 시집왔으니 무조건 우리 가문의 가풍을 따라야 한다며 자신의 뜻만을 따르기를 요구하는 재벌 시댁을 가진 여자 등 여자(며느리)들의 이야기였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지만 시월드에 들어서면 그저 며느리일 뿐이다. 드라마이기에 좀 과장스러운 부분도 있으나,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이유는 나 또한 그 ‘며느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서른세 살 늦은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더없이 다정하고, 헌신적인 남편이라고 자부하고, 내 남편을 너무도 사랑한다. 하지만 남편은 절대 나만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혼 후 바로 깨닫게 되었다.

결혼한 여자의 숙명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시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했었다.

그러다 결혼 7년 차쯤 되었을 때, 우리 결혼 생활의 총체적 위기가 찾아왔다. 드디어 난 타인의 뜻에 의해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절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로서 완전하게 살고 싶었고, 내 남편과의 사랑도 온전히 지키고 싶었고, 내 아이들에게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재작년, 어린 두 딸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남편과 함께 52일간의 국토 종단에 나서게 되었다. 국토 종단은 꽃샘추위가 막 시작되었던 3월 1일 해남 땅끝마을에서 시작해서 52일째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끝이 났다.

여행을 하며 결혼 후 내 마음속에 쌓여 있던 응어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알고는 있어도 회피하려고만 했던 문제들을 모두 꺼내어 마주 보게 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의 문제점들이 모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의 문제점 중 하나는 갇힌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육아도 갇힌 공간인 아파트에 한정되어 있었고, 어떤 사회적 생활도 차단된 채 아이를 낳고 기르는 힘든 시기를 고스란히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남편은 묵묵히 함께 걸으며 내 감정들을 전부 받아내 주었다. 처음 한동안은 투닥거리며 싸우고, 토라지길 반복했으나, 여행 후반 강원도 태백을 넘어갈 때 즈음에는, 높은 ‘재’ 꼭대기에 서서 함께 지나온 길들을 생각하며 눈빛을 마주했다. 그 눈빛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고, 함께 힘든 과정을 거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감대를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비로소 느끼는 순간이었다.

52일 밤낮의 온 시간을 남편과 함께한 여행. 분명 혼자였다면 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힘을 낼 수 있었고, 아이들을 위해서 힘든 와중에도 매일 밥을 하고, 옷을 빨았다. 남편은 무거운 짐을 나눠 들고, 일정을 챙기고, 길 안내를 하며 끝까지 함께했다. 그것은 엄마인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육아에 남편도 함께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온 가족이 정말로 ‘함께’ 하는 제대로 된 첫 여행이었다.

또 여행을 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오지 마을을 잇는 지방도로로만 걸었던 우리는, 쉬거나 잠을 자려면 마을에 들어가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상처투성이 자아를 조금씩 위로받을 수 있었다. 길 가는 나그네를 청해 먹을 것을 나누는 따스한 정을 교감하며 소통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뭐 그리 대단한 삶을 살겠다고 지금껏 이런 것들을 놓치고 살았는지! 이래서 세상은 아름답다고 하나 보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나 보다.

건강한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무탈하게 따라와 준 내 아이들에게도 감사했다. 비포장길에 끊겨버린 도로, 급경사의 비탈진 산길, 아이 태운 유모차를 둘이서 앞뒤로 잡고 하나씩 옮기고, 올리고, 내리고. 별의별 고생을 다 했지만 결국 우리는 해낸 것이다!

그 여행은 갇혀 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었고,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 여행은 나 자신을 만나고, 상처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해주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 부부는 바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두 달 만에 귀농을 했다. 그리고 이제 땅을 일구고 포도나무를 가꾸면서 흙과 풀 내음 속에서, 풍족하고 편안했던 도시 생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중이다.

김영순 작.

<끝없이 이어지는 손길 99-08> 160×234cm.

천연염료, 모시, 자수사, 면, 한지 /

패치워크, 손자수, 손바느질, 미싱. 1999.

소심해도 괜찮아

김진수 37세. 스노우볼엔터테인먼트 본부장. <소심인> 저자

나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남자라면 좀 대범해야지” “그런 성격 좀 바꿔봐”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자신감 없고 소심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쉽게 변할 수 없는데, 솔직히 지금의 내가 싫지 않은데….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런 사회의 시선에 주눅이 들곤 했다.

그렇게 소심한 내가 록밴드 보컬로서 연예계에 발을 디뎠고, 그 후 매니저로 일을 하며 어느덧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록밴드의 보컬, 매니저라는 직업 또한 소심한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오히려 ‘소심함’이 사회생활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사건들이 있었다.

한번은 <일밤> <느낌표> <무한도전> <황금어장> 등의 프로그램을 연출한 여운혁 CP를 <황금어장> 초창기에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담당한 배우의 캐스팅 건이었는데 아쉽게도 다른 스케줄과 겹쳐서 출연을 못 하게 되었다. 나는 안 그래도 어려운 분을 만나 거절의 뜻을 전해야만 했다. 살이 떨렸다. 방법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캐스팅이 불발되는 것은 프로그램에 큰 타격이다. 감독님과 작가분은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거절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순간의 죄송함을 무마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여지를 남기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오히려 결례라고 생각했다. 소심한 모습이었지만 조용히 끝까지 거절의 말을 전하자 마침내 여운혁 CP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 되게 소심하게 강한 사람이네?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흔들리지 않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공하신 분이 20대 후반의 일개 매니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스스로 굉장히 뿌듯했다. 그런 평가를 받고 나니 나 자신이 달라 보였다. 나의 소심함이 오히려 진중하게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이제 이렇게 보이면 되겠구나’ 하는 사회생활에서의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겐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소심해도 충분이 나의 길을 갈 수 있겠구나.’ 내 직업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나는 소심한 매니저로 생활을 하고 있다.

“매 순간 고민하고 남들보다 더 고민하고 남들보다 더 체크하고 남들보다 더 진심으로 일하자.” 매니저인 나는 때로는 소속 연예인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나와 같이 일하는 연예인이 나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마음에서 시작된 마음가짐이다.

누군가가 “소심해서 좋으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마음 깊은 곳까지 대범해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소심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이다”라고.

자신을 먼저 인정하고 신뢰할 때 타인도 인정하고 신뢰할 수 있다. 소심한 성격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소심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순간, 말이 없는 건 신중함으로, 수줍음은 순수함으로, 세심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습관은 성실함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건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음으로 다가온다.

내가 만약 소심한 성향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린 시절, 소심함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많이 있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소심하고 세심한 성격이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 같아 감사하다.

김영순 작.

<손길 08-09> 45×78cm.

천연염료, 모시, 실크, 아크릴, 자수사, 비즈, 자개 /

패치워크, 손바느질, D.T.P, 미싱. 2008.

한순간이 내 인생을 바꾸어놓습니다. 내 인생을 더욱 발전적으로 성장시켜 준 사건이라면 그것만으로도 크나큰 선물입니다.

의사에서 환자로, 1년간의 투병 생활이 준 변화

박경희 32세. 의사. 서울시 중구 중림동

2009년 2월 평탄하기만 했던 나의 삶에 커다란 사건이 생겼다. 의대 6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인턴을 거쳐 내과 레지던트 1년 차를 무사히 마쳐갈 때 즈음, 하얀 가운을 입고 병원을 누비던 내가 갑자기 하얀 가운을 입은 환자가 된 것이다. 침상 머리맡에 붙은 종이에 쓰인 ‘만 26세’라는 글자에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 그렇게 나에게 유방암 3기의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는 “앞으로 5년 후에 살아 있을 확률이 50%입니다”라는 매우 객관적이지만 매우 잔인한 말로 내 병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로 치료는 시작되었다. 항암 치료 8번, 수술, 그리고 한 달간의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다. 치료를 받는 동안 외모가 변해갔고 마음은 하루에도 여러 번 불안과 낙심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다행히 나에게는 좋은 가족, 선배 의사와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서른 번째 생일이 올까?’ ‘나도 결혼할 수 있을까?’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마음속 깊은 불안과 우울을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8개월간의 치료를 마치고 나는 당당하게 병원으로 복귀했다. 환자로서 일년을 살았던 만큼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인턴 시절, 나는 암 환자를 보는 종양내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공의 1년 차 때 처음 만난 암 환자들. 막상 이들을 보고 나니 두려웠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머리가 커지고부터는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환자들이 부담스러워, ‘친절한 의사보다 실력 있는 의사가 더 좋은 의사야’라고 위안하며 냉정하게 그들을 대하곤 했다. 마치 나의 병을 객관적으로 잔인하게 말했던 그 의사처럼.

그랬던 내가 같은 암 환자가 되고 보니 그때의 내 모습이 얼마나 차가워 보이고 섭섭했을지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했다. 그걸 알라고 하나님이 이런 시련을 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실력 있는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또한 친절한 의사도 되려고 노력한다. 힘들고 지친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암 환자가 되고 2년 만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아가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이 작고 아름다운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감격의 눈물…. 얼마 전, 이제 내년 2월이면 진단을 받은 지 5년이 지나기 때문에 암 환자 중증 등록이 만료된다는 편지를 받았다. 요즘은 소소한 일상이 모두 소중하고 행복하게만 느껴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아마도 내가 환자가 되어보지 못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일 것이다.

김영순 작.

<끝없이 이어지는 손길 06-01> 55×84cm.

천연염료, 모시, 자수사, 실크 /

패치워크, 손바느질, 미싱, 홀기기염. 2006.

왕따로 인한 상처를 치유해준 사람들

윤지우 22세. 대학생. 인천시 남동구 간석2동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는 반장이 되었다. 그러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교통사고로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환하게 인사했던 친구들이 날 보고 인사를 하다가 멈칫하더니 그 후로 하루 종일 아무런 이야기도 하질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욕설 전화와 협박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했는데, 다음 날 더 모질게 모른 척을 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이유를 말하라며 화를 냈겠지만,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덩달아 소심해진 성격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말 그대로 난 왕따가 되었고, 이유도 모른 채 괴롭힘이 지속되는 한 달간은 지옥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는데 내가 “차렷, 경례!” 소리를 너무 크게 해서 거슬렸다는 거였다.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못 믿게 되고, 창문을 보면 뛰어내리고 싶어졌던 이유가 인사 구령을 크게 해서라니!

불행 중 다행으로, 깁스를 풀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서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진 않았다. 활발하던 내가 어두워졌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에게 칭찬을 하고 웃어도 의심했고, 누군가 긍정적인 얘기를 하면 현실을 모른다고 조롱했다. 그러면서 부모님과의 사이도 멀어지기 시작했고 사춘기의 방황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이런 내 모습에 지쳐가던 부모님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나를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셨고, 처음으로 미국의 친척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때가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친척 언니에게 털어놓았고 처음으로 누군가 앞에서 펑펑 울었다. 고모부, 고모, 작은언니, 큰언니 모두가 내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줬고 아파해주셨다. 처음으로 내 속을 털어놓으며 크게 울고 나니 웃는 것도 쉬워졌다.

미국에서 시작된 터닝 포인트는 캄보디아로 이어졌다.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해외 봉사 면접을 보게 되었고 아무런 경력도 없는 내가 덜컥 붙게 된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고아원에서 일주일간 봉사를 하게 되었다.

조금만 더우면 짜증을 내던 내가 그곳에서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물 한 방울도 귀한 곳인데 땀 흘려 페인트칠을 하는 내게 한 캄보디아 고아원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물병을 건넸다. 자신의 목이 더 말랐을 텐데도 그 친구는 망설임이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경계심이 아닌 웃음으로 진심으로 대하는 그곳의 친구들을 보며 서로가 의심 없이 마음을 주고 믿을 수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배워 나갔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를 사람들로 인해 치유받을 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따듯하게 건네준 손, 따스한 눈빛이 그렇게 나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나는 봉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로 인해 나의 상처가 치유됐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정을 주었을 뿐인데, 점차 변하는 아이들의 눈빛과 행동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한다.

김영순 작.

<손길 06-08> 27×48cm.

천연염료, 모시, 실크, 아크릴,

자개, 비즈, 자수사 /

패치워크, 손바느질, 미싱, D.T.P. 2006.

빗속의 사고, 멈추고 다시 바라보게 된 세상

양선영 31세. 헤어디자이너. 서울시 관악구 인헌동

미용을 시작한 지 11년, 다시 찾은 설렘으로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지. 폭우가 쏟아지던 7월 11일 아침 전까지는. 비 오는 날, 출퇴근 걱정에 마음이 조급해졌어. 잠시 방심한 사이 2층 난간에서 미끄러지면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가 날 깨워줘. 숨이 탁 막히고 끊어질 듯한 고통에 119 호출. 통증도 잊은 채 이리저리 전화하기 바빴지. 오늘 스케줄은 어쩌나, 내일은? 약속을 못 지킬까 봐 조급해졌어. 그런데  진단 12주. 머릿속은 복잡하고 몸과 마음은 더 아픈데 큰언니가 마음 추스르며 다시 읽어보라고 챙겨준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그동안 병실 창가에 꽂아만 뒀는데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보이고 ‘언니의 독설’이 들려. 김난도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고. 며칠 후, 병문안 온 친구가 선물해준 게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는 책이었어. 그리고 오늘 직원 생일 때마다 대표님께서 책 선물을 해주시는데 ‘정글만리’가 택배로 도착. 정말 하나같이 책 제목도, 책에서 보내는 메시지도 마치 나한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져. 여기까진 첫 번째 터닝 포인트.

다시 사회에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고 지금의 나보다 마음가짐을 더 준비해서 퇴원해야지. 이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지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 멈추고 비우니까 그동안 몰랐던 수호천사들의 마음이 나에게도 점점 채워지는 거야. 첫 번째 수호천사=가족.

엄마는 봉사하며 사니까 하나도 안 아프다셔.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꾸준하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면 행복하다며. 엄마도 많이 아프신데 아픈 몸을 이끌고 요양병원에 청소와 목욕 봉사를 다니시는 거야.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작은언니가 강아지를 좋아해 어릴 때부터 키웠는데 유기견센터 가서 청소와 목욕 봉사를 하는지는 몰랐었어. 입양해서 식구가 늘었다길래 그냥 입양했나 보다 했지. 알고 봤더니 다리를 다쳐 절뚝이는 강아지와 폭력에 시달려 아파했던 강아지를 입양해온 거야. 우리가 더 사랑하며 품어야 한다고. 큰언니는 매일 길냥이들 배고프다며 밥 챙겨주고, 막내언니는 간호사인데 병원 밖에서도 조용히 봉사하며 나누고 있었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봉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지난 십 년 동안 떨어져 있다 보니 잘 몰랐었어.

또 한 명의 수호천사는 여기 병원에서 만난 샴푸할배. 월~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병원과 복지관에서 수많은 환자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봉사를 하셔. 머리 감겨본 사람들은 알 거야. 허리, 다리, 손목도 아프고 심하면 샴푸독에 피부병까지 생겨. 그런데 봉사하니까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더 젊어진다고 하셔.

나는 얼마나 내 것을, 내 시간을, 내 마음을 나누며 살아왔는가 돌아봤어. 학교 다닐 때 잠깐, 직장 다닐 때 잠깐, 교회에서 잠깐. 청소나 군부대 커트, 보육원 미용 봉사 등 잠깐잠깐 해놓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했다고 생각했어. 나 참, 창피해서. 가족들과 샴푸할배를 보며 내 방식대로, 나 편한 대로 봉사 활동을 하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기쁘게 진심을 다해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지. 이것이 나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 앞으로의 봉사 활동에 초점을 잡고 기쁨으로 나누는 삶, 내가 가야 할 길을 계획했어.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이 바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거!

‘조급함을 비우고 나눔으로 채워가기 위해 오늘도 달리다 잠시 멈춰봅니다.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봅니다. 오늘도 감사하며 시작하고 감사함으로 마무리해봅니다.’

김영순 작.

<끝없이 이어지는 손길 99-04> 32×33cm.

천연염료, 자수사, 모시, 생사, 베 /

패치워크, 손바느질, 미싱. 1999.

우리는 왜 소화가 안 될까?

머리가 아프거나 가슴이 답답할 때, 컨디션이 좀 안 좋을 때도 우리는 흔히 소화제를 찾습니다. 2009년 국내 의료기관의 처방전 중 절반 이상에 소화제가 포함되어 있고, 소화 관련 의약품은 판매량 1위를 달리고 있지요. 이는 OECD 국가 평균보다 약 30% 많은 것으로, 그만큼 우리나라에 소화불량 증세를 겪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소화불량의 가장 큰 원인은 스트레스로, 이를 해소하기 위한 폭식, 과식, 폭음 등의 안 좋은 생활 습관도 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약을 찾기 전에 답답한 마음부터 뻥 뚫어주면 ‘신경성’ 소화불량쯤은 금세 사라지지 않을까요? 우리의 소중한 위장, 소화에 관한 이야기를 모았습니다. -편집자주

곡물 소화에 적합한 한국인의 위장

우리 조상들은 오랜 농경 생활로 쌀, 보리 등의 곡식과 야채를 주로 섭취했다. 또한 젓갈, 김치처럼 발효 식품을 즐겨 먹었으며 가축은 농사의 중요한 수단이었기에 육류 섭취량은 적었다. 자연스럽게 한국인의 위장은 곡식이나 채소 섭취에 적합하게 발달되었고, 초식 동물처럼 소장, 대장의 길이가 길어진 데 반해 육류를 소화하는 능력은 서구인에 비해 떨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최근 몇 십 년 사이에 육류와 자극적이고 기름진 음식, 인스턴트식품의 소비량이 급격히 늘면서 우리의 소화기관은 변화된 식단에 적응이 어려워졌다. 야근과 술자리가 잦은 직장인의 경우, 기름지고 맵고 짠 음식들이 밤늦게까지 위에 머무르면서 위는 24시간 쉴 새 없이 일하게 되었고 역류성 식도염, 위궤양, 위암 등의 발병률 증가로 이어졌다.

빨리 먹고, 많이 먹고, 늦은 시간에 먹는 식습관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산업화를 겪으면서 많이 잘 먹는 사람이 건강하고 복스럽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또한 직장, 군대, 학교 급식 등 단체 생활을 하면서 빨리 먹는 식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진국의 식사 시간에 비해 3배 정도 빠른 편이다. 실제로 고려대학교 김도훈 교수팀이 8,700여 명을 대상으로 식사 시간을 조사한 결과, 10명 중 9명이 15분 안에 식사를 끝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식습관은 위장에 가장 큰 타격을 준다. 음식물이 섞이고 잘게 쪼개지기 위해 위에 머무르는 시간은 2~6시간인데 하루 세 끼에 간식과 야식까지 먹는 경우 위는 24시간 쉬지 않고 혹사당하는 것이다. 2010년 우리나라 남성의 암 발병률을 살펴보면 위암이 전체 암 중에 19.6%로 1위를 차지했는데, 직장인 남성에게 특히 많이 나타나는 과식, 폭식, 야식, 음주와 흡연 등 잘못된 생활 습관이 위 건강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참조 도서_ <위가 살아야 내 몸이 산다>(이승후 | 이상)

검사로는 나타나지 않는 ‘기능성 소화불량’

내시경이나 CT 등의 검사로 아무런 증상이 확인되지 않는데도 1년 중 3개월 이상 소화불량 증상을 겪거나 배변과 무관하게 소화불량증이 해소가 되지 않는 경우, 이를 ‘기능성 소화불량’이라고 한다. 흔히 ‘신경성’으로 분류되는 증상이다.

우리나라 전 국민의 5~12%가 기능성 소화불량증인 것으로 조사되었으며 특히 1차 의료기관에서 3차 의료기관으로 의뢰된 소화불량증 환자 중 70~92%가 기능성 소화불량증으로 나타났다. 주로 상복부 쓰림, 조기 포만감, 만복감, 상복부 팽만감, 구역 등의 증상이 나타나는데 위 운동성 저하, 스트레스와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불안증, 우울증, 건강염려증, 히스테리, 강박증, 공포증을 유발하고 복통, 설사, 두통, 피로감 등을 촉진시키기도 한다.

불안함 버리니 체할 일 없어요

(전주희 / 29세. 기간제 교사. 경북 고령군 다산면)

중학교 때부터 내시경 검사를 받았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자주 체했다. 부모님께서 간혹 싸우기라도 하시면 불안하고 긴장된 마음이 쉽게 해소가 되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면접을 본다든지, 교장 선생님과 식사를 하는 등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 되면 소화가 안 되고 구역질이 났다. 심지어 내가 짝사랑하는 사람과 밥을 먹는 경우에도!

‘왠지 체할 것 같은데’ 하면 체했고 ‘체하면 어쩌지?’ 걱정만 해도 어김없이 체했다. 그러다가 그 긴장감이 해소가 되면 신기하게도 말끔히 편해졌다. 병원에 가도 특별한 이상은 없었기에 소화불량은 전적으로 내 마음의 문제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치료를 받거나 소화제를 찾기보다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려고 많이 노력했던 것 같다. 마음을 다스리는 책도 많이 보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하지만 그때뿐이었고 그 책을 놓는 순간 내 마음은 또 불안과 긴장에 조종당했다.

그러다 자주 가던 모임에서 ‘마음수련’을 알게 되었다.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 앞에서 실수하는 모습 보이면 안 된다, 일을 빨리, 잘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긴장이 많았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마음들과 불편한 상황을 떠올려 버렸다. 그 사람과의 관계가 나빠질까 봐 힘들다, 아프다는 표현도,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고 솔직한 이야기는 마음에 꼭꼭 담아두고 상대의 기분을 맞춰줬던 기억들. ‘아무것도 아닌 걸 내 마음에 쥐고 있었구나. 없는 것이구나’를 깨닫게 되자 그런 걱정과 불안들이 버려지면서 마음이 아주 편안해졌다. 그동안 이런 마음들이 가득 쌓여 있었기에 소화도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수련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서 나는 직장에서도, 여행을 가서도, 언제 어디서 누구와도 즐겁게 식사를 하게 되었다. 정말 신기하게도 마음을 다스리니 체할 일이 없었다. 불편한 사람을 만나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든 마음이 한결같으니 어려웠던 사람과도 편하게 밥을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인의 병 중에서 과반수가 마음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오는 것이 무수한 ‘신경성’ 질환들인 것 같다. 마음만 잘 다스려도 그런 병은 다 없어진다.

잡념을 줄이면 소화가 잘된다

(서정복 / 한의사, 동평한의원)

현대인의 소화불량은 대부분 스트레스가 원인이다. 걱정이나 생각이 많아질 때 어깨나 목이 딱딱하게 굳듯이 오장육부도 영향을 받는데, 단순히 긴박한 상황에서 식사를 하는 것뿐 아니라 식사 중 머릿속에서 딴생각이 많이 떠오르는 것도 위장에는 긴장과 스트레스를 준다. 이렇게 위장이 긴장하게 되면 위장 운동이 원활하지 못해 소화불량이 생기고 심해지면 위무력증, 위경련, 위하수도 발생하게 된다. 또한 한의학에서 비장은 생각을 담당한다고 보는데 생각이 많은 만큼 소화할 때 쓰일 에너지를 빼앗기게 된다.

한의원을 찾는 환자분들 중 70~80%가 스트레스로 인한 더부룩함, 소화불량을 호소하시는데 그럴 때는 원하는 것을 놓아버리든지, 아니면 못 했던 말, 못 했던 일을 뜻대로 해보면서 마음에 쌓인 스트레스를 풀 것을 권해드린다.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으면 폭식이나 과식, 폭음, 거식증 등 안 좋은 습관이 생기게 되고 그로 인한 다른 합병증의 위험도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우선적인 것이 스트레스 관리다.

음식 역시 소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한국인은 서양인에 비해 음인이 많아 체질적으로 비위에 열이 많지 않고 소화 능력이 떨어지므로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 기름지거나 차가운 음식을 먹어 소화를 더 어렵게 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몸에 좋은 웰빙푸드를 먹는 것보다 스트레스 관리, 식습관과 생활 습관 관리, 규칙적인 운동이 만성 소화불량에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다.

국민 소화제 활명수와 까스활명수

활명수는 1897년 세상에 나온 이래 116년간 꾸준히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제품이다. 동화약방을 창립한 노천 민병호 선생은 대중 구제에 뜻을 품고 궁중 비방과 서양의학을 접목하여 최초의 신약이자 양약인 활명수를 만들었다. 당시 가장 흔한 병이 소화불량이었기 때문이다. 일제 치하에는 활명수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조달하는 등 우리 역사와 함께해왔고, 지금까지 판매량은 83억 병, 대한민국 국민 4,800만 명이 1인당 170병씩 마실 수 있는 수량이며 빈 병을 일렬로 세우면 지구 25바퀴를 돌고도 남는다. 1967년에 출시한 까스활명수는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캠페인으로 브랜드차별화에 나섰고 현재는 99.8%의 인지도로 국민 소화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잡념을 줄이면 소화가 잘된다

· 무 주스: 무는 비타민 A, B, C 외에 소화 효소인 디아스타아제가 많고 섬유질이 풍부해 장내 노폐물 배출에 효과적이며 속이 쓰린 증상에도 도움이 된다. [무(150g)는 껍질째 깨끗이 씻어 무청(50g)과 사과주스(1/4컵)를 함께 넣고 믹서에 간다.]

· 마 주스: 디아스타아제가 무의 3배이므로 소화가 아주 잘되며 변비에도 좋다. [마(200g)는 껍질을 벗기고 깨끗이 씻어 우유(1/2컵)와 함께 간다.]

· 파인애플 주스: 섬유질이 풍부하며 단백질 분해 효소인 브로멜린이 장내 부패물을 분해해주어 고기를 먹은 후 파인애플을 먹으면 소화가 잘된다. [파인애플(200g)과 물(1/3컵)을 함께 믹서에 간다.]

피해의식과 강박장애 버리기

누구나 자기를 괴롭히는 마음이 하나씩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모든 고민의 원인은 대부분 산 삶의 기억된 생각, 즉 어린 시절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마음의 사진들 때문이지요. 이번 호부터는 그런 마음의 사진들을 빼내고 진정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리얼 토크를 진행할까 합니다. 본격 솔직 대담인 만큼 본인이 꼭 밝혀달라고 원하지 않는 한(^^) 인터뷰이는 밝히지 않을까 합니다. – 편집자 주

●○ 간단히 본인 소개를 해달라.  
군대 다녀와 대학에 다니고 있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청년이다.

●○ 살면서 자신을 가장 괴롭힌 마음은 무엇이었나?
나는 주로 원망, 피해의식에 많이 지쳐 있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웃으면 나를 비웃는 듯한 생각이 계속 들었다. 내가 옷을 잘못 입어서 그러나? 키가 작아서 그러나? 뭘 잘못했나? 계속 주위를 의식했다. 그러는 한편 승부욕은 또 굉장히 강했다. 학창 시절에는 성적이 조금만 떨어져도 용납 못 하고 공부라는 틀 속에 나를 넣으면서 강박장애가 생겼는데, 고2 때부터는 통제를 못 할 정도로 머릿속에 잡생각, 특히 음악이 끊이지 않았다. 이 증상 때문에 글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 정말 힘들었겠다. 그런 자신을 바꿔보기 위해 뭐든지 해보고 싶지 않았나?  
고등학교 때부터 정신과에 다녔다. 약물 치료를 받았는데 완치가 안 되는 병이라고 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져보려고도 하고, 책도 보고, 국토 종단도 해봤지만, 여전히 자신이 없고 세상이 두려웠다. 그러다 정신과 의사 선생님이 내 문제의 근본 원인을 알게 될 거라면서 마음수련 대학생 캠프를 권했다.

●○ 오~ 그래서 원인을 알게 되었나?  
수련을 하며 내 마음의 사진들을 하나하나 버리다 보니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이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께서 너무 자주 싸우셨다. 그걸 보면서 늘 나 때문에 누군가가 화를 낼까 두려워하며 눈치 보며 살았다. 결국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두 분은 이혼을 하셨다. 아버지는 생활비를 전혀 안 주시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아버지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 아버지 따위는 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살겠다고 했지만, 마음을 버리면서 이미 아버지에 대한 사진이 내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아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아버지로부터도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은 존재다, 나 같은 놈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늘 젖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내가 엄마랑 동생을 책임지고 잘 살아야 한다는 부담에 강박장애까지 온 거였다. 그래서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들을 버렸다. 처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조차 떠올리기 싫었다. 이런 마음을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점점 생각이 달라졌다. 정말 버려졌으니까.

●○ 마음이 버려진다는 것을 어떻게 아나?  
한마디로 기억으로부터 해방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싸우고 있는 그 상황을 떠올릴 때, 예전에는 생각만 해도 괴로웠다면 이제는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게 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버릴수록 점점 괴로움이 덜했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나를 철창 속에 가둬놓았다는 걸 크게 느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찍어놓은 마음의 사진들은 원래는 없는 것인데 나만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 마음의 사진들은 원래 없다는 게 무슨 뜻인가?  
예를 들어 나와 똑같은 환경이라도 나처럼 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기억의 사진이라는 것은 세상에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혼자 만든 사진세상에서 나 혼자 힘들어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사진을 버리면, 원래의 나를 만나게 된다.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를 만난 그 기분은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다. 해방감, 불만에서 풀려난 느낌, 자유, 세상과 하나 된 느낌이었다.

●○ 아버지에 대한 생각도 변했나?  
이젠 아버지를 봐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 아버지도 어쩌면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사랑을 못 받고 커서 그러시지 않았나 이해도 된다. 아버지를 만나면 그때 왜 그랬냐고 묻고 싶기는 하다. 하지만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부터 그냥 나올 것 같다.

●○ 피해의식과 강박장애도 없어졌나?  
전혀 없다. 열등감이 없어지니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겐 엄마, 동생도 있었고 친구들도 있었다. 나도 사랑받는 존재라는 걸 알면서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생각도 긍정적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생긴 가장 큰 변화는 웃게 된 거였다. 주위에서도 정말 많이 변했다고 했다. 대학생 캠프 일주일이 끝나고 300여 명이 단체 사진을 찍는데, 애들은 점프를 하며 포즈를 취했다. 나도 정말 높이 뛰며 나만의 포즈를 취했다. 웃음이 났다. 사실 나는 내 반쪽인 아버지를 떼어내고 싶어서 사진도 찍지 않았었는데. 그날은 세상 모든 것이 즐겁고 감사했다. 어머니께서도 얼굴이 많이 좋아졌다고 굉장히 좋아하신다.

●○ 정말 잘됐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나, 행복한가?
행복하다. 내 삶에 만족한다. 지금은 생각 없이 정말 즐겁게 살고 있다. 생각이 없다는 것은 잡념이 없다는 것이다. 내 머릿속에는 항상 생각, 공상, 망상이 많았는데, 마음수련을 하며 이게 정말 쓸모없는 독이라는 걸 느꼈다. 생각을 하면 뇌가 전체 에너지의 40%를 소비한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조금만 움직여도 피곤하고 지쳤다. 그런데 요즘은 생각 없이 살다 보니 많이 부지런해지고 건강해졌다. 생각할 시간에 몸을 움직이게 된다. 집에서도 먼저 집안일을 찾아서 하게 되고, 어디 가든 그렇게 된다.

●○ 똑같은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그 마음은 모두 다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기에 버릴 수 있고, 버리고 나면 그 마음의 짐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 수 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프랑스 한국문화원 강사 조용희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

 

프랑스의 한국문화원에서 10년간 한국어를 가르쳐온 조용희(54)씨. 때론 프랑스 학생들에게 상담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 등 엄마처럼 살갑게 대해주는 덕에 그녀는 ‘인기 많은 한국어 강사’다. 마음수련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프랑스에서 지내며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불안함 속에서 벗어나 진짜 행복을 찾았다는 조용희씨. 지난 7월 세계한국어교육자대회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그녀에게서 마음과 인생 이야기, 행복의 비결에 대해 들어보았다.

정리 & 사진 김혜진

저는 10년 전부터 프랑스의 한국문화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 5년 전부터 프랑스인들의 한국에 대한 관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어요. 특히 K-Pop에 대한 관심이 말도 못 하죠. 그러다 보니 100명 안팎이던 학생 수가 지금은 400명으로 늘어났어요.

학생들도 17세 젊은이부터 70세 어르신까지 다양한데, 그중에는 6, 7년 넘게 함께해온 분도 있고, 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에서 오는데도 1년간 단 한 번도 결석하지 않는 분들도 있죠. 그러다 보니 학생이라기보다는 정말 가족 같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 특히 지난 6월, 종강 파티가 있었는데 초급반 학생 40여 명이 옷을 맞춰 입고 한국어로 ‘스승의 은혜’를 불러주었을 때는 정말 감동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언어 수업이란 게 재미없잖아요. 딱딱한 문법 설명이 많고, 외워야 하는 것도 많고. 근데도 잘 따라주는 학생들이 고맙고, 요즘은 수업을 하면서도 언제 끝났나 싶게 스트레스 없이 하는 제 자신이 놀라워요. 이렇게 된 데에는 마음수련의 영향이 컸어요. 마음수련은 2004년 지인의 소개로 하게 됐죠. 이런저런 불편한 마음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프랑스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그해 가을 프랑스로 유학을 오면서였어요. 제가 간 도시는 끌레르몽페랑인데, 교수님께서 그곳에 있는 대학을 추천해 주셨거든요. 한국 사람이 거의 없어서 불어가 금방 늘 거라고 하시면서. 프랑스의 정 가운데 있는 산악 지방, 화산 지대인데 진짜 한국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고요. 처음엔 정말 외롭고 힘들었어요. 그때 전 혼자 살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었거든요. 늘 부모님과 살아서 밥도 못 하는 바보였고, 일상생활 언어를 겨우 할 정도여서 수업 시간엔 알아듣기 어려웠어요. 특히 주말이면 프랑스 친구들은 집에 가고 큰 기숙사 건물에 혼자 덩그러니 있는데, 방문을 열 때면 마치 방 안의 공기가 나를 밀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외로움이 컸어요.

하지만 무사히 6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을 때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더라고요. 내가 겪은 생활, 생각을 함께 공유할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그러다 1987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와 결혼을 하고 함께 프랑스로 가게 됐는데, 한 6년간 남편의 직장 문제로 떨어져 살아야 했어요. 그때가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애요. 돈 없이는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외국 땅에서 아이들 셋과 먹고사는 일이 막막했거든요.

힘든 나날이 계속되면서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였죠. 남편은 언제 돌아올지 모르고, 저는 일하고 싶어도 일할 수 있는 자격이 없었거든요. 그러다 큰아이가 프랑스 국적을 받으면서 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방인으로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건 외로움, 불안함이에요. 저 역시 남편 직장과 아이들 때문에 프랑스에 가서 그런지 마치 뿌리가 없는 삶을 사는 거 같았어요. 그래서 언제나 난 여기를 떠날 사람이다, 생각하는데 막상 한국에 가면 그곳도 내가 상상한 곳이 아닌 거예요. 어디에도 내 자리가 없었죠. 그래서인지 수련하면서 ‘나는 누구인가?’란 질문이 마음에 와 닿았어요. 오랜 기간 외국에 살며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던 제겐 꼭 풀어야 할 숙제와 같았거든요. 그렇게 마음수련 방법대로 산 삶의 기억들을 떠올려 하나하나 버리다가 ‘아, 우주가 나였구나!’ 알게 되는 순간 정말 큰 선물을 받은 것 같았어요.

마음을 비우며 깨달은 건 언제나 불안했지만, 실제로 나한테 일어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예요. 아이들도 잘 크고 있고, 매끼 잘 먹고 있고, 보람찬 직업도 가지고 있고, 너무 잘 지내는데도 왜 그리 힘들어했는지 나중엔 전혀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웃음) 그러면서 알게 됐죠.

‘아, 나는 현재를 살지 못했구나. 내 마음에 갇혀 바보처럼 살았구나. 신은 인간을 행복하게 살라고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조차 누리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구나.’

수련을 하며 제일 좋았던 건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냥 살게 되었다는 거예요. 성서에 보면 하늘에 나는 새에게도 먹을 음식을 다 마련해주신다는 말씀이 있잖아요. 내가 불안해하고 외로워하는 순간에도 먹을 게 주어졌고 잘 지냈음에도 결국 믿지 못했던 거죠. 내 마음 때문에.

그 마음들을 하나하나 버리자 마치 처음으로 눈을 뜬 기분이었어요.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웠구나, 꽃이 이렇게 아름답구나! 이 세상을 생전 처음 보는 거 같았어요.

봄이 오면 파리는 그야말로 마로니에 천지에요. 얼마나 아름다운지, 여유 있게 걸어가는 사람들도 아름답고 이런 아름다운 나라에 사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감사합니다~” 그런 소리를 매일 하고 다녔어요. 그 이후로는 프랑스, 한국, 한국 사람, 프랑스 사람… 구분 짓던 경계선이 허물어지면서 어디에 있어도 정말 편안합니다. 여기도 좋고 저기도 좋고요.

예전엔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렇게 살면 좋겠다 바라면서도 실제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내 모습에 무기력해지곤 했어요. 하지만 이젠 그게 마음먹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마음을 빼야 그 말씀대로 살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란 성서의 구절도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천국에 날 수 있고, 저절로 그렇게 살 수 있다는 말이잖아요.

마음수련이 좋았던 건 제 손을 잡고 마치 동반자처럼 한 발, 한 발 같이 가주었다는 점이에요. 마음수련 방법대로 하면 어른이건 아이건, 누구나 평등하게 그 행복의 자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 행복을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과 나누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