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문화재청은 근현대 산업 유물 중 문화적으로 가치가 큰 18점을 문화재로 등록했다. 이 중에는 1949년 공병우 박사가 만든 세벌식 타자기도 포함돼 있다. 한국 최초의 안과 의사로 알려진 공병우 박사.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무료 진료,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점자 타자기 교육 등 인술을 펼친 의사였고, 한글 기계화 운동에 앞장선 시대의 선구자였다. 공병우 세벌식 타자기, 한영 겸용 타자기, 전동 타자기 제작, 한글프로그램 ‘아래아한글’ 개발 지원 등 한글의 과학화에 평생을 바친 공병우 박사의 자전적 이야기이다.
눈병 고치는 일은 외국인도 할 수 있지만, 한글 과학화는 한국인이 해야 한다
1938년 서울 안국동에 개원한 공안과는 우리나라 최초의 안과 개인 병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눈병에 걸린 중년 신사 한 분이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불쑥 우리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그는 한글학자 이극로 선생이었다.
“우리글은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훌륭한 글인데 일본인들이 못 쓰게 탄압하고 있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들까지도 제 나라 글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해요. 아예 한글은 글자가 아닌 것인 양 무시하는 식자들도 많습니다.”
바로 나를 두고 하는 소리 같았다. 학교에서도 배울 수는 없었지만 그때까지도 전혀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덕분에 뒤늦게나마 우리 한글의 우수성을 알게 된 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시력 검사표를 만드는 등 한글의 과학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일부 지식인들은 한글이 세계적인 글자라고 자랑하면서도 천대해왔다. 그래서 나는 한글 기계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글 전용의 빠른 길은 일반인들이 편리하게 즐겨 사용할 수 있는 한글 기계화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해 타자기 발명, 식자기, 한글 워드프로세서 등을 개발해왔다. 한글 기계가 자꾸 나오면 한글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내겐 남을 돕는 일 중 가장 가치 있고 가장 큰 일이 한글의 과학화를 발전시키는 일이다.”
속도 빠른 세벌식 타자기 개발과 시각장애인 재활 교육에 힘쓰다
한글 타자기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해방된 이후였다. 해방이 되자 한국 의사들은 후배들을 양성해야 했고, 이를 위해 일본어로 만든 <소안과학>이란 책을 한글로 번역했다. 번역한 원고는 두 사람이 썼는데, 필체가 제각각이라 읽기가 어려웠다. 당시 이원익, 송기주씨가 발명한 한글 타자기가 있었지만 손으로 쓰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속도가 무척 느렸다.
나는 속도도 빠르고 글씨 꼴도 간편한 가로쓰기의 한글 타자기를 개발하고 싶었다. 우선 타자기를 다 뜯어 기본 구조를 익혔고, 우리나라 글의 음운 조직을 공부하였다. 한글의 기막힌 규칙에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그때부터 초성, 중성, 종성의 한글 고유의 특성과 자주 쓰는 소리를 분석, 인체공학적으로 자판을 배치하는 등 세벌식 타자기 개발에 몰두했다.
그로 인해 병원 운영이 부실해지자, 주위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까지 들었다. 하지만 연구 작업은 계속되었고 6개월 만에 두 개의 가이드로 만든 쌍초점 방식을 개발하게 된다.
그러나 발명품에 대한 국내의 반응은 냉담했다. 일반 사회는 물론 관공서에서는 한문을 섞어 쓰지 않고는 공문서가 아니라는 생각이 완고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타자기 보급에 어려움을 겪지만 한편으론 타자기의 중요성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에 필요한 항공모함, 전함 등 군비 작동을 위해선 타자기가 필수였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 육해공군 합동으로 한글 타자 강습 요청이 들어오긴 했지만, 여전히 한글 타자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무관심했다. 그런 와중에 ‘한글 타자기 경연 대회’를 여는 등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한글 사랑에 감동하여 ‘한글 기계화 연구소’ 설립을 후원했다.
다른 한편으로, 시각장애인들을 위한 재활 교육에도 관심을 갖게 된 나는 구급차를 몰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료 진료를 하고, 맹인재활센터를 만들어 점자와 한글 타자기를 치는 방법과 제작 기술을 가르쳤다. 이들의 손놀림은 보통 사람들보다 더 민첩하고 정확해 국산 한글 타자기 회사를 차렸을 때는 공장 일을 맡기곤 했다.
그러던 중 5·16 군사정변은 일약 한글 타자기 붐을 가져왔다. 서기가 펜으로 며칠을 걸려 쓰던 재판 기록을, 타자기가 하루 만에 해냈기 때문이다. 모든 관공서를 비롯해 타자기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당시 시중에는 속도 타자기인 공병우식 글자판(세벌식)과 글씨 모양 위주의 김동훈식 글자판(다섯벌식)이 있었는데 글자판을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졌다. 나는 한글 단체들과 만든 세벌식 자판을 표준 규격으로 신청했지만, 1968년, 1983년 두 번에 걸친 표준 글자판 규격에 탈락하면서 실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타자기보다 효율적인 한글 워드프로세서(문서 편집기)를 개발하다
하지만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미국에서 쓰는 영어 워드프로세서를 보며 컴퓨터에서 영어처럼 한글도 나오면 좋겠다고 생각해 1983년 봄부터 한글 워드프로세서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정부 방침대로 두벌식으로 고안해 보았지만 비효율적인 방식임을 깨닫고 세벌식으로 연구, 매킨토시 컴퓨터로 한글을 쓰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게 된다. 그때가 내 나이 여든이었다.
워드프로세서는 속도도 빠르고, 힘도 안 들어 일의 능률이 몇 배로 올랐다. 펜으로 글을 쓰는 것을 손수레나 달구지로 비유한다면 수동식 타자기는 자전거라 할 수 있고, 전동 타자기는 자동차이고, 컴퓨터는 비행기였다. 나로서는 일생 잊지 못할 감격이었다!
평생 한글 기계화와 시각장애인들의 재활을 위한 봉사 활동을 하고 있던 내게 노년의 친구들은 조금 쉬면서 여생을 지낼 것을 권유하곤 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늘 같았다.
“진정으로 푹 쉬는 날은 지금이 아니라 죽은 다음에 있을 뿐이다. 남은 생애를 사회에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되돌려주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