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현이는 미술 시간에 수채화를 반도 못 그렸다. 수업을 마치고 아이들이 교실을 빠져나가고, 숙제 일기 안 해온 친구들도 남아서 숙제 일기를 하고 벌 청소까지 다 마쳤는데, 시현이는 아직도 수채화 작업 중이다. 이제 교실에는 우리 둘뿐. 녀석은 속도를 좀 내려는지 양손에 붓 하나씩 들고 채색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총을 의식한 동작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더 재미있게 그림 그릴 수 있다는 수작 같았다.
“시현아, 몇 시쯤 되면 완성하겠냐?” “밤 12시쯤요.”
녀석이 씨익 웃으며 농담을 하였다. 나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짜로 해볼 참이냐?”고 으르릉거렸다. 그때 마침 옆 반 학생이 비닐봉지를 들고 오더니, 아이스콘 하나를 꺼내 놓고 갔다. 마음씨 고운 옆 반 여선생님이 보낸 선물이다. 사람은 둘인데 아이스콘은 하나. 나는 시치미를 딱 떼고 천천히 아이스콘 아랫부분을 돌리며 종이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원뿔형 아이스콘을 트로피처럼 높이 쳐들고 입맛을 다시며 이제 곧 맛있게 잡수실 거라는 예고를 하였다. “음, 엄청시리 맛있겠군!”
크게 한입 베어 무는 시늉을 하다가 아이의 곁눈질과 마주쳤다. 이번에도 실눈을 뜨고 씨익 웃는다. “뭐 설마 혼자 다 드시겠어요” 하는 표정이다. 여우같은 놈이다. 할 수 없이 손짓을 하였다. 시현이가 붓 두 개를 놓고 쪼르르 앞으로 나왔다. 나는 손가락으로 아이스크림 가운데 부분에 선을 그었다.
“요만큼 너 먹고, 밑에 부분은 내 거다. 선 넘으면 땅콩 백 대!”
아이가 고개를 끄덕이고 제자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손에는 붓 다른 손에는 아이스콘을 들고 그림을 그렸다. 잠시 후 아이는 마치 칼로 반듯하게 자른 것처럼 아까 정해준 선까지 아이스콘을 먹고 반납하였다. 그 후 수채화 그리는 속도가 급상승하였다. 마침내 아이들이 하교한 지 한 시간 십 분 후, 작품을 완성한 시현이는 가방을 메고 교실을 나갔다.
나는 우리 반 모태 지각생 시현이가 참 좋다. 지난가을, 시현이 엄마가 수술을 받기 위해 멀리 떨어진 병원으로 가셨다. 아이 엄마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수술과 재활 치료를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얼마쯤 지나야 엄마가 돌아오시냐고 물어보았다. 아이는 담담한 표정으로 모르겠다 말했다. 나는 그런 시현이 손을 잡고 위로랍시고 정말 바보 같은 질문을 하였다.
“엄마 없이 얼마 정도 참을 수 있어?” 대체 열두 살 아이가 엄마 없이 지낼 수 있는 기간을 어떻게 가늠한단 말인가. 그런데 의외로 시현이 대답은 명쾌했다. “한 달요!” “우와! 대단해! 선생님은 어릴 때 일주일도 안 돼서 징징 울었는데… 넌 한 달씩이나? 대체 비결이 뭔데?” 정말 궁금했다. 솔직히 나는 그 순간 어느덧 꼬부랑 할머니가 된 내 어머니가 곁에 없는 어느 세월을 떠올렸다. 시현이는 내 마음을 아는 듯 싱긋 웃으며 답해 주었다.
“재미있게 놀면 돼요.” “아하!”
맞다. 엄마가 없더라도 재미있게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엄마도 걱정을 덜 하신다. 열두 살 시현이가 내게 맑은 깨달음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