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이의 엄마이며 주부이자 화가인 김은희(60)씨. 그녀는 지난 10월, <우리 그림展>이란 제목으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민화의 매력에 끌린 지 10여 년. 갈대와 기러기를 그린 노안도(蘆雁圖), 서가를 그린 책가도(冊架圖) 등 26점의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것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 건 원래를 가리고 있던 셀로판지를 떼는 것과 같다고 하는 김은희씨. 마음을 비우며 그림을 그리는 게 더욱 편안해졌다는 화가 김은희씨의 마음 빼기 이야기입니다.
가을빛이 좋은 날, 인사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그림을 알리는 자리이기보다 조촐하게 지인들을 초대해서 편안하게 쉬어갈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어요. 다행히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탐스럽게 핀 노란 국화처럼 풍성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화가의 꿈을 갖게 된 건 초등학교 3학년 무렵이었어요. 인형을 그리고 옷을 만들어 입히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참 잘한다’고 하셨지요. 그 칭찬 한마디에 ‘아, 나는 그림을 그려야 되는구나’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다른 길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그렇게 미대 동양화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다가 남편을 만나 결혼하면서 10여 년 동안은 아이들 키우고 살림하느라 붓을 놓게 되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내 삶을 찾고 싶다는 마음에 그림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기뻤지요.
처음엔 그리는 것만으로 좋았습니다. 그러다가 전시도 해보고 싶었지요. 하지만 간단한 그룹전을 한다 해도 제겐 내세울 만한 경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공모전에도 내보고 그룹전도 참가했죠. 그런데 함께했던 사람들이 나보다 더 좋은 상을 받으면 속상한 거예요.
‘나도 잘 그릴 수 있는데… 저 사람이 나보다 더 특별하게 나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옹졸한 생각을 하는 나, 남과 자꾸 비교하는 자신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하지만 안 그래야지, 하면서도 계속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예요. 다음엔 어느 공모전에 내야지, 그때 이런 상을 받았으면 좋겠다, 하면서. 그렇게 그림이 나를 구속하는데, 이건 정말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러다가 2006년에 마음수련을 하게 됐습니다. 여동생 부부에게 소개받아서 아들이 먼저 하게 됐는데, 아들이 수련을 하더니 마음가짐이 확 바뀐 거예요.
아들은 어릴 때부터 항상 전교 1등을 했지만 1등을 놓치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에 스트레스도 많아 했거든요. 근데 어느 날 “전엔 1등을 하려고 애를 썼다면 지금은 1등이란 목표를 놓고 하나하나 배워나가는 자체가 즐거워요. 그렇게 즐기면서 하는데도 결과는 똑같은 것 같아요”라고 하는 거예요. 아들 말이지만 배우는 즐거움을 알게 되니 힘이 안 든다는 얘기가 참 와 닿았어요. 아들의 변화를 보고 저도 얼른 마음수련을 했지요.
그렇게 저의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며 버리는데, 어느 날인가 저 마음 밑바닥에서 ‘자유다’ 하는 소리가 확 터져 나왔습니다. 제 자신조차 놀랄 정도로. 그런 느낌은 정말 처음이었어요. 나름 자유롭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마치 어디에 딱 구속되어 있다가 팡 터진 느낌이었어요. 그렇게 마음을 계속 버리니까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게 내가 아님을, ‘진짜 나’는 무한대 우주처럼 넓은 마음을 가진,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임을 알았을 땐 정말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사실 제 삶은 평탄했어요. 좋은 부모 밑에서 편하게 자랐고, 아이들도 잘 자라주었고, 남편 사업도 그럭저럭 잘되고, 시댁 식구들도 너무 좋았으니까요. 이 정도면 행복하다고 생각했죠. 그런데도 감사함은 잘 몰랐어요. 심지어 자기가 좋아하는 그림을 하면서도 자꾸 비교하고 열등감 속에 자신을 가두었으니까요. 사람이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이라 생각했더라고요. 결국 그림도 제 자존심이었어요. 남보다 잘 그려야 하고, 칭찬 듣고 인정받아야 한다…. 근데 그러는 순간 그림과는 멀어졌던 겁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건 내 마음세계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런 마음들이 그림에 덕지덕지 붙어버렸으니까요. 수련을 하면서 그렇게 곁가지처럼 달라붙어 있는 마음들을 하나씩 버려나갔어요. 붓, 화집, 다녔던 미술관 등 그림과 관련된 기억들도. 그러고 나니 어느 때부터인가 그림 그리는 게 자연스러워지고 편안해지더군요. 결국 마음을 비운다는 건 내 삶에 붙어 있던 셀로판지를 하나 떼는 것이었어요. 셀로판지를 떼도 원래 있는 건 그대로 있잖아요. 셀로판지란 마음의 색안경을 없애고 나니까, 마음 없이 하는 게 무엇인지 알겠더라고요.
이젠 그림 그리는 자체가 즐거워요. 잘 그려야겠다, 무슨 색을 칠해야겠다는 것도 없고요. 그냥 옆의 색에 맞춰서 칠하다 보면 어느새 그림이 완성되어 있으니까요.
문득 옛 선비들이 문인화를 그렸을 때의 마음가짐이 이런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우리 선조들은 누군가에게 평가받기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 그림을 그렸잖아요. 때문에 그리기 전에 먼저 마음을 비우려고 했고요. 그래서 요즘에 저는 빼야 한다는 말이 정말 와 닿아요. 그 무엇을 하든 생각이 많으면 그것에 휩싸여 집중하지 못하고, 이 순간에 충실하게 살지 못하니까요.
이번 전시회에 나이 지긋하신 한 남자분이 오셨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림에 사심이 없어서 좋다”고. 그 말이 정말 좋고 참 감사했어요. 또 어떤 분은 “갤러리에 그냥 편안히 앉아 있고 싶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고마운 일이지요.
제가 그린 그림은 집에 걸어놨을 때 가장 편안한 그림이었으면 좋겠어요. 옛날에 서민들이 가장 편하게 즐겨 그렸던 것이 민화이듯이, 집 안 어디에 붙여놔도 마치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 같은 그림,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그런 삶을 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