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삼류 소설보다 재밌다”
그 칭찬 한마디
그때 문예반 담당은 조미향 선생님이었는데, 선생님은 특별 활동 시간이면 중1 까까머리들을 데리고 박물관으로 화랑으로 데려가셨다. 집과 학교밖에 모르는 ‘샌님’이었던 나는 선생님 덕분에 처음으로, 경주박물관의 에밀레종도 작가들의 그림도 직접 볼 수 있었다. 당시 국어 선생님이신 조미향 선생님께서 꽤 이름이 알려진 화가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
선생님 덕에 처음 하게 된 것 중 최고는 바로 ‘글쓰기’다. 한번은 특별 활동 시간에 글을 직접 쓰라고 하셨는데, 그날 내주신 주제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내가 지금 학교를 그만둔다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나이 마흔이 됐다고 생각하고 상상해서 써 봐라.”
처음엔 황당했다. 지금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혼자서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많다지만, 그때는 그런 것은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어떻게 상상을 해서 썼는데 줄거리는 대충 이랬다.
<주인공이 가출을 하고 방황을 하며 몇 년을 보내다가 후회를 하고 농촌으로 가서 날품팔이로 일한다. 그렇게 열심히 일을 하다 보니 마을 주민들의 인정을 받아서 빈집도 얻고 소작도 얻어서 그럭저럭 살림을 일구고, 착한 마을 처녀와 조금 늦은 결혼을 해서 아들 하나 딸 하나 낳고 잘 살았다.>
선생님은 내 글을 읽으시더니 소리를 내서 웃으셨다. 그리고는 교실 앞으로 불러내 친구들한테 그 글을 읽게 하셨다. 쭈뼛거리며 글을 다 읽었을 때 선생님이 한마디를 하셨다.
“일간지에 실리는 웬만한 삼류 소설보다 재밌다.”
기분이 묘했다. 그냥 막 기쁜 것도 아니고 진짜 묘했다. 그때부터 한 번도 써 보지 않았던 글을 내 마음대로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 혼났을 때도 쓰고, 누나들과 싸웠을 때도 쓰고, 어디선가 잊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썼다. 이 말 저 말, 말 잘 ‘듣기’만 바라는 어른들한테 내 ‘말’을 해주고 싶을 때도 썼다. 그러다 보니 그 글을 통해서 ‘나’라는 사람의 존재감을 느끼게 됐다고 해야 할까? ‘무슨 중학교 몇 학년 몇 반 몇 번’으로는 표현되지 않는 ‘나’라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누가 쓰라고 하지도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도 않고, 돈도 안 되는 글을 계속 써 오고 있다. 지금 하는 일도, 시민기자 제도로 운영되는 한 신문사의 편집기자로서 한 달이면 수백 편씩 올라오는 글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선생님이 해주셨던 말씀 때문일까? “이 글은 별로네요”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웬만하면 “좋다, 재밌다, 진솔하다, 감동적이다” 하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된다. 선생님이 나한테 해주신 칭찬이 그랬듯이, 나의 짧은 한마디가 그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전에는 선생님이 보여주신 에밀레종과 화랑에서의 경험이 얼마나 소중한지, 선생님이 해주신 칭찬이 얼마나 고마운지 제대로 몰랐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시간들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점점 확인하게 되었다. 그걸 알기까지 15년이 걸렸다.
조미향 선생님, 앞으로 더 신명나게 말하고 글 쓰며 살아가겠습니다. 그것만이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갚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고맙습니다.
무공해 ‘까마중’을 다시 만나다
몇 년 전부터 산에 가면 꽃과 신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이러한 식물보다는 사람들이 먼저 보였는데. 혹자가 말하기를(사실은 내가 말한 것이다) 산에 가서 꽃이 보이기 시작하면 인생이 꺾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하기야 내 나이 벌써 40대 중반을 넘어버렸으니 꺾인 나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아파트 뒤편으로는 학의천이 흐른다. 그 옆 산책길은 나설 때마다 심심치 않게 나를 반겨준다. 봄이면 이름 모를 들꽃들이 기다리고 있고, 여름, 가을, 겨울도 제각기 다른 계절 색으로 나의 눈을 황홀하게 만든다.
작년 이맘때였을 것이다. 팔월 말, 더위가 꺾여가고 있을 무렵, 나는 또다시 주말에 학의천을 찾았다.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발견한 두 가지 식물, 그것은 늦게 올라오고 있는 들깨와 까마중이었다. 들깨는 깻잎으로 흔히 보는 것이었지만 까마중을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고, 나는 내 손으로 무언가를 직접 기르고 보살피고 싶은 생각이 들어 하나씩 조심스럽게 뽑아 아파트로 가지고 왔다. 새 화분에 하나씩 심었다. 다음 날 아침 물을 주고 출근했다. 퇴근해서도 화분부터 살피게 되었다. 근데 들깨는 없어졌고 까마중만 남아 있었다. 아내는 들깻잎에 벌레가 너무 많아 할 수 없이 버렸다고 했다.
사실 집사람은 화분 가꾸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원예니 농사니 하는 것에는 원래 깡통인지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물 주기뿐이었다. 물도 성의 없이 줬다. 가끔 생각나면 주고 물주는 양도 일정하지 않았는데, 나도 화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우리 집에서 새 둥지를 튼 까마중은 기대 이상으로 씩씩하게 자라났다. 자슥이 물만 주면 아무 소리 안 하고 쑥쑥 커 나갔다. 특유의 굴광성으로 해를 쫓아다니느라 줄기는 구부러졌고, 가을로 들어서자 벌써 첫 열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까만 열매.
가을이 지나고 겨울의 초엽이 되자 나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내 어릴 적 기억으로 까마중은 일년생 풀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죽어야 한다. 그런데 이놈은 죽지 않았다. 겨우내 베란다에 뿌려지는 햇빛과 나와 집사람의 물 주기로 겨울을 버텨냈고 봄을 맞았다. 당연한 결과인지는 몰라도 일년생이 다년생이 되는 순간이었다.
새봄이 되자 화분이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집사람은 큰 화분을 준비해 주면서 나더러 학의천에 가서 흙을 퍼 오라고 했다. 내 친구 까마중을 만났던 또 하나의 내 친구 학의천으로 비닐봉지를 들고 나갔다. 흙을 캐오는 일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람들 눈도 의식이 되고. 다리 밑으로 가서 공사 현장에서 쓰는 질 낮은 모래를 싸들고 집으로 왔다. 분갈이를 하는 내 맘속에 걱정이 앞섰다. 전문가는 아니더라도 이 흙은 영양가가 거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기에 생각보다 굵고 단단해져 있는 뿌리만이 위안이었다.
역시나 흙이 바뀌었건만 물만 주면 또 무럭무럭 자랐다. “고놈 참 신기한 녀석이야.” 아내는 까마중이 뭐에 좋다나 어쨌대나 하며 열심히 따 먹는다.
하지만 여름이 올 무렵 내 친구 까마중은 새로 들어온 이름 모를 화초에 집을 내주게 되었다. 나는 뽑혀진 까마중을 학의천에 갖다 버렸다. 시들어가는 까마중을 보면서 어린 시절이 다시 떠올랐다. 나의 어린 시절, 들판에 널려 있는 까마중은 실제로 노랑 까마중이었다. 노랑 까마중은 검정 까마중보다 더 달고 껍질도 부드러웠다. 술래잡기를 하다가 까마중밭에 숨으면, 숨기 위해 까마중밭에 온 건지 까마중을 먹기 위해 온 것인지 망각하고는 했다. 그런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들은 어느새 민주화의 주역이 되었고, 이제는 이 사회를 움직이는 주역이 되어버렸다. 무공해 까마중의 힘으로.
오늘은 비가 왔다. 회사 옆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던 나는 도시의 시멘트 틈 사이로 꿋꿋이 잎을 드러내고 있는 내 친구, 까마중을 발견하게 되었다. 갈등이다. 이 친구를 차에 모셔가야 하나 어째야 하나.
아버지가 주신 매직박스
“카메라는 사진만 만들 수 있는 박스가 아니라 매직박스이니, 방학 숙제로 카메라가 어떤 마술을 부리는지 알아내 보거라.”
그리고는 거리 맞추는 방법, 노출을 조정하는 요령 등 간단한 카메라 작동법을 설명하시고는 필름 몇 통을 주셨다.
카메라가 무슨 마술을 부린다는 것인가? 싶었지만, 카메라를 마음껏 사용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친구들을 다 불러 모아 사진을 찍어주었다. 그때만 해도 카메라가 여간 귀한 게 아니던 시절이라 아이들도 마냥 좋아라 피사체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을 찍어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 뭐 찍을 만한 것 없나,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면서 주변을 눈여겨 살피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신기하게도 항상 눈앞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이 서서히 보였다.
한번은 동네에 시집온 지 얼마 안 된 새댁이, 언제 낳았는지 갓난아이를 안고 나와 있었다. 아이가 칭얼대며 보채자 그녀는 저고리 앞섶을 풀더니 보름달처럼 둥근 젖가슴을 꺼내 아이의 입에 물리는 것이었다. 용기가 부족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아이가 쌕쌕이며 젖을 빠는 모습과 젖을 물린 엄마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때부터 나는 익숙하던 것들에 새로운 관심을 기울이며 다시 보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눈으로 새롭게 사물을 바라보자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이 수없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이 카메라라는 것이 사람을 보게 만드는 기계로구나!”
방학이 끝날 무렵 아버지와 마주 앉아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점을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 아버지께선 매우 기뻐하셨다.
“희중아, 사람들은 항상 눈을 뜨고 살지만 눈앞의 모든 것을 보는 것은 아니다. 카메라라는 것이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해주니 이게 마술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때부터 아버지의 매직박스와 함께 내 삶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시간만 나면 나는 카메라를 둘러메고 전국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 길에서 우리 농부를 다시 만나고, 우리 고향을 다시 만나고, 무심한 일상의 풍경들을 다시 만났다.
그렇게 새로 만나는 세상은 가슴 벅차리만큼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그리고 점차 내가 느낀 그 아름다움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사진을 처음 접하면서 발견한 1950년대 우리의 모습들을 주제로, 학창 시절 두 번에 걸친 개인전을 열었다.
그 이후 사진의 매력에 이끌려 60년이 가까이 되도록, 사진과 함께 살아왔다.
아빠의 마당
결혼하기 전까지 한 번도 아파트에 살아 보지 않았습니다. 6살 이후론 줄곧 한집에 살았으니 아파트에 살 기회도 없었지요. 제가 자란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주택은, 소위 ‘집 장사’들이 지은 것으로 이렇다 할 멋도 매력도 내세울 게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집을 처음 자식들에게 보여주시던 날 부모님의 흥분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집은 다 지어지지 않고 골조뿐이었고, 마당에는 전나무 한 그루만 덩그러니 심어져 있었지요.
“지금은 여기 나무가 하나밖에 없는데, 봄 되면 나무를 많이 심을 거다. 이쪽에는 목련을 심고, 집에는 대추나무가 있어야 되니까, 그것도 심고.”
그 집, 그 마당에서 아빠는 오래 바쁘셨습니다.
봄이 되면 마당에는 제일 먼저 목련이 꽃을 피웁니다. 그 후 진달래가 피고, 철쭉이 피고, 모란도 피고 장미도 피고 졌습니다. 가을이면 감이 영글고 대추가 익었지요. 겨울에는 전나무에 전구를 감고 크리스마스트리를 둘렀습니다. 어느 날이라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흙 삽을 들고, 또는 호스를 들고 있는 아빠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마당이 어린 제게는 얼마나 거대한 공원이었는지요. 작은 오솔길에서 언니, 오빠와 고무줄놀이를 하고 소꿉장난을 했습니다. 철쭉 피는 봄이면 돌에 올라앉아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장미 철에는 큰 종이에 장미 축제라 써 붙이고 가족끼리 파티를 벌이기도 했지요. 아빠는 어린 딸이 좋아한다는 핑계를 대며 새장을 걸고 닭도 키우고, 강아지도 키우셨습니다. 그 마당에서 대추를 따 먹고, 감을 따 먹는 동안 저는 중학교에 가고, 고등학교에 가고, 오빠가 결혼을 해서 아이 둘을 낳고, 언니가 결혼을 해 아이를 둘 낳았습니다.
어른이 되어 대학 다닌다고, 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 본 아빠의 마당은 얼마나 좁던지. 두세 걸음이면 성큼 현관에 닿을 만큼 좁디좁은 곳이었지요. 어린 저에게는 그토록 드넓은 마당이었지만, 아마 아빠에게는 처음부터 이렇게 손바닥만 한 마당이었던 걸까요? 아빠는 그곳에서 어떻게 그런 마법을 보여주신 걸까요?
오래 살던 집을 떠나, 지금은 아파트 11층에 살고 있습니다. 멀리 내다보는 전망도 좋고, 고층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잘 가꿔진 아파트의 정원을 내려다보는 일은 어쩐지 쓸쓸합니다.
온갖 벌레들이 윙윙대고 거미줄과 길고양이들이 활개 치던 아빠의 마당이 그립습니다. 내가 자란 곳은 그 마당이었음을, 그 시절이 내 삶의 씨앗이 되어, 오늘을 열매 맺게 해주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