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파도 괜찮아, 엄마에겐 착한 딸이 있잖아
황의선 34세. 직장인.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엄마는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다. 간경화, 류머티즘, 재생불능성빈혈, 갑상선에 비장비대…. 내가 핏덩어리였을 때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자, 엄마는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하셨단다. 젊은 엄마는 자식 셋을 홀로 키우기 위해 당신의 체력 이상으로 에너지를 소진하셨을 것이다. 덕분에 먹고살 걱정 없이 살게는 되었지만, 엄마는 건강을 잃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때는 내내 누워계셔야 했던 엄마. 아침이면 엄마 옆에 전화기와 물 등을 놓아드리고, 저녁에는 오빠들과 번갈아 엄마를 주물러 드렸다. 엄마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였는데, 깜빡 약 기운에 잠이라도 드시면, 큰오빠는 새벽까지 주물러드리곤 했다.
엄마는 약 기운으로 버티며 조금씩 생활을 하셨다. 운동회라든지, 방학을 맞아 우리들 코에 바람이라도 쐐주겠다고 집을 나설 때면, 그 전날 집에서 링거액을 맞으셔야 했다. 정신력이 강하시고 여장군 같았던 엄마는 가장의 짐 때문에 늘 묵직한 얼굴이셨는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그런 엄마와 나는 조금은 먼 사이가 되었다.
인간이 어디서 와서 왜 살고 어디로 가는지와 같은 의문이 엄마에게는 쓸데없는 생각이었고, 사춘기 딸의 핑크색과 초록색 옷 사이에서의 고민도 엄마를 힘들게 할 뿐이었다.
한껏 멋을 부린 엄마와 딸이 친구처럼 다니는 것을 보면 부러웠다. 무엇 때문에 실랑이를 벌였다느니 하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너희는 그러고 사는구나’ 싶었다. 내 의견을 주장하기엔 ‘편찮으신 가여운’ 엄마였기 때문에.
30여 년 내내 엄마는 편찮으신 모습이다. 종일 누워계셔서 헝클어진 머리, 속옷 차림, 개수대에 쌓여 있는 설거지거리. 어쩌다 시간이 나는 휴일에도 집안 청소에 빨래로 내 시간은 없지만 그렇다고 누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예쁘게 홈패션을 차려입고 가꿔져 있는 엄마를 보고 싶다고, 퇴근 후에는 친구들과 영화를 보고 데이트도 하고 싶다고. 휴일에는 엄마랑 산에도 가고 여행도 가고 싶다고. 이 모든 걸 하지 못한다 해서 누구를 마음 놓고 원망할 수 있느냐 말이다.
한 달 전 엄마가 갑상선 수술을 받은 후부터 이삼일 간격으로 30분간 떠오던 쑥뜸을 매일 떠드리고 있다. 다행히 쑥뜸 치료가 잘 맞아서 꼼짝없이 한 자세로 누워 있어야 하는 불편함에도 엄마는 잘 참으신다. 그런 모습을 보니 어쩌다 늦게 퇴근하거나, 녹초가 되어 피곤할 때도 쑥뜸 뜨는 일을 건너뛸 수가 없다. ‘피곤할 텐데 오늘은 건너뛰자’ 하시면 내심 좋으면서도 착한 딸은 아무 말 없이 쑥뜸기를 엄마 배에 올려놓고 1시간이 넘도록 펌프질을 한다.
“엄마는 의선이한테 제일 미안해. 엄마가 건강하지 못해서 여행도 한번 제대로 못 가고, 친구처럼 지내주지 못해서. 어쩌다 일찍 집에 와도 엄마 때문에 쉬지도 못하고. 너도 이런 엄마가 귀찮고 싫지.”
가끔 촉촉해진 목소리로 하시는 엄마의 말씀이, 습도가 가신 청량한 날씨 때문일까, 내 마음을 정확히 비추는 맑은 거울 같다.
‘엄마 덕분에 이만치 착하다는 소리 듣고 살았잖아. 한 사람을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도 알았잖아. 이보다 더 인생 공부 잘 시킬 수 있는 엄마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엄마는 내 인생의 행운이야. 엄마 사랑해~^^’
행운이 찾아오게 하는 비결, 알려드리지요
김영삼 41세. 농업인. 전북 진안군 부귀면
25살 젊은 나이에 선택한 직업이 표고버섯을 생산하는 농업인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17년 차 농부의 길을 걷고 있다. 다들 힘들다고 떠나는 농촌으로 다시 돌아온 건 분명 희망이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내 마음속에, 몸속에는 어린 시절 산촌 마을에서 나고 자라면서 각인된 자연인의 기질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원래 전공을 살려 컴퓨터 관련 일을 하다 23살에 군 입대를 했다. 군 생활을 하며 진로에 대한 고민을 심각히 했다. 특히 내 머리에 떠나지 않던 대사가 있었는데, 오래전 드라마 ‘한 지붕 세 가족’에서 만물 수리점을 하던 순돌이 아빠가 습관처럼 하는 이야기였다.
“요즘 전자제품은 어려워서 못 고치겠다.”
그게 미래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내가 평생 행복하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일까 고민하였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 운명처럼 보게 된 방송이 KBS스페셜 ‘미래의 식량 버섯’ 4부작이었다. 버섯! 어린 시절 동네 어르신들께서 부업으로 짓던 표고버섯 농사, 이거야말로 내가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일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토리가 열리는 나무 중에 으뜸인 참나무! 그 참나무를 오염되지 않은 깨끗한 물과 바람으로 썩혀, 그 양분으로 표고버섯은 자란다. 처음엔 젊은 혈기에 자연을 위반하는 행위들을 많이 했다. 표고버섯은 주로 봄과 가을철에 나는데, 그 철이 아닐 때 나오는 것이 아무래도 더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제철이 아닐 때도 재배 하우스 안에서, 바람과 햇빛과 비를 막아, 습도와 온도를 조정해 버섯을 나오게 했다. 내 계획하에 버섯은 자라는 거라고 생각했고, 인위적인 힘으로 자연을 다스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한 해 두 해 지나면서 욕심으로는 안 되는구나를 느껴갔다. 버섯들은 미세한 곰팡이 균으로 키우는 생명이다 보니까 나오고 싶을 때 나오는 버섯이 통통하고 예쁘고, 영양가도 풍부했다. 그런데 억지로 나게 한 버섯은 버섯 자체가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모양도 작고, 기형 버섯이 많이 발생했다. 원래의 향이나 영양도 떨어졌고, 참나무 평균 수확 기간이 3~4년인데 2년 만에 폐목을 시킬 정도로 빨리 상해 버렸다.
그즈음 나는 결혼하고 5년이 흘렀는데도 아이를 갖지 못하고 있었다. 아이에 대한 소망이 너무 커서, 이런저런 방법을 다 써보고 인공수정도 해보았다. 하지만 그런 방법들이 우리에게는 안 통했다. 우리 부부는 아기가 없는 운명인가 보다 받아들인 후 여행을 갔는데, 여행지에서 자연스럽게 아이가 생겼다. 그때 내 마음에 들려온 소리는, “가장 자연스러운 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구나, 자연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구나”였다.
이제 아이들을 키우면서, 버섯을 키우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만 하고 나머지는 자연에 맡긴다. 가을을 기다리고, 봄을 기다리고…. 세월을 벗 삼아 유유자적할 줄 알아야 스스로 지치지 않고 오래 달려갈 수 있음도 알게 되었다.
화학적인 요인들로 망가졌던 농장에는 어느새 장수풍뎅이가 돌아오는 등 자연 생태계가 살아나기 시작했다. 예전처럼 주변 환경을 혹사시켰다면 30~40년 후쯤 이 농장에서 생명체가 살아가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농장 안에 있는 그 어떤 생명들도 불필요한 것들이 없음을 느끼게 된다. 다들 자기의 역할이 있고 자기 자리에서 열심히 활동해 줄 때 함께 행복해질 수 있음을 느끼게 된다.
지금이라도 자연에 맞서 이기려 했던 것이 얼마나 큰 오만이었는지를 깨달았다는 것에 감사드린다. 스스로 선택한 일 속에서 삶의 가치를 알게 되고, 자연의 위대함을 배웠다.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자연에 거스르지 말고 순리대로 사는 것, 그것이 행운을 찾아오게 하는 가장 큰 비결이라는 걸.
지지리도 운 없던 나, 대박 행운을 만나다!
최진희 39세. 간호사. 서울시 서초구 반포동
나는 단 한 번도 행운권 따위에 당첨된 적이 없다. 기필코 내가 가지고 있는 번호의 다음 번호가 불릴 때의 아쉬움은 너무도 많이 반복되어 언젠가부턴 아쉽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때 성적은 늘 0.1~0.2점 차이로 과목 등급이 떨어졌고, 공부를 열심히 해도 과외하는 애들을 따라잡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말을 잘 듣는다 해도 선생님의 관심은 늘 내 옆의 친구에게로 향했고, 부모님의 관심 또한 늘 어린 동생들에게 있는 것 같았다. 어느새 ‘난 운이 지지리도 없는 애’ ‘난 어떻게 해도 안 돼!!’라는 마음이 지배적이 되어 버렸다.
그런 마음은 직장 생활에서도 계속되었다. 안 그러려고 해도 일에 집중도 잘 안 되고, 늘 사고를 치어 상사에게 지적을 들었다. 내가 직장 상사에게 관심을 받거나, 잘한다는 칭찬을 듣는 것은 그동안의 나의 ‘운 없는’ 삶에 대한 배신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위축되고 자신감이 없는 스트레스는, 동료들과 함께 직장에 대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것으로 해소했다.
주변에는 나와 똑같은 불만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나는 그들을 진정한 나의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마음수련을 하게 되었다. 마음수련원이라고 내 맘에 들 리가 없었다. 나는 그곳에서도 걸핏하면 불평불만을 얘기했다. 그런데 뭔가 달랐다.
‘저 사람들, 저 여유, 저 편안함은 뭐지?’
그들은 어떤 말도 귀 기울여 들어주되, 먼저 내 마음을 돌아볼 수 있도록 안내도 해주었다. 어느 날부터 나는 한번 시키는 대로 해보자, 부정적인 마음을 버리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흉내라도 내보자 생각했다. 그러면서 투덜거리기보다는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짚어보고, 불평하기보다 그 일을 잘하려면 어떤 방법들이 있을까 하고 생각을 바꾸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조금씩 나는 변해갔나 보다. 어느 날이었다.
밑의 직원이 힘들다고 하자, 내가 맞장구치기보다 한번 힘내서 잘해보자고 격려의 말을 하는 거였다. 그러면서 어느 사이엔가 불평불만으로 내 시간을 채워주었던 사람들보다, 잘해보자며 힘을 보태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생겨났다.
내 안에서 나의 일을 조금 더 열심히, 그리고 조금 더 사명감을 가지고 해보자는 마음도 들었다. 마흔이 가까워진 나이에 대학원도 들어갔다. 알게 모르게 바뀐 나는 공부도 재미있어 했고, 재미가 있으니 더 열심히 했고, 그러다 보니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도 해주게 되었다.
“정말 열심히 하시네요.” “선생님은 이 일에 딱 맞아요.”
항상 지적을 받던 나로서는 생소한 칭찬들이 쏟아졌다. 그 후 난생처음 장학금도 받고, 과 대표가 되고, 교수님과 함께 연구 사업도 하게 되었다. 이제 교수님의 권유로 박사 학위를 생각하고 있다. 교수님 추천으로 정말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분야로 직장도 옮길 예정이다.
오 마이 갓! 그렇게 운이라고는 지지리도 없던 나에게 연속으로 행운이 찾아오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요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변화를 느끼는 중이다.
‘어떻게 내 인생이 이렇게 바뀌었지?’ 곰곰이 생각해본 적이 있다. 말 그대로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어서였다. 그리고 그게 가능했던 건 내 마음세계가 그렇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아, 내 인생의 가장 대박 행운은 바로 마음수련을 만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