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다!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제목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1남 2녀의 막내이자 장남이었다. 아버지가 중학교 때 일찍 돌아가신 후 어머니, 누나들과 함께 아버지가 하시던 와이셔츠 공장을 이어받아서 열심히 운영했다. 덕분에 생활은 큰 걱정이 없었지만 그래도 아들이라는, 장남이라는 책임감이 컸다. 빨리 돈 벌어서 자수성가하여 어머님을 잘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유일한 희망이고, 소원이었다.

89년 6월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몸무게가 기준치보다 많이 나가서 면제를 받게 되어 그해 9월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일본 유학을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막연하게 일본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연고는 없었지만 그곳에 가면 뭔가 내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공장을 어머니께 맡기고, 유학길에 올랐다.
일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빨리 성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도 잘 모시고, 주위에 자랑도 하고 싶었다. 대학에서 일본어과를 졸업한 후 광고 회사에 취직하여 돈 모으는 재미도 알았다. 한국에 큰 아파트도 살 수 있었고, 외국인으로서는 흔치 않게 7년 만에 팀장급으로 승진도 했다.
일을 하느라 외롭다는 생각을 할 여유도 없이 18년이 흘렀다. 고향 생각이 간절해졌고 이제는 가족과 함께 사는 게 맞겠다 싶어 서른일곱에 한국으로 돌아와 광고대행 회사에 들어갔다. 이젠 따듯한 가정도 꾸리고 싶었다.
마음수련 명상을 하게 된 것은 큰누나의 권유였다. 2008년 2월, 어머니와 함께 논산 메인센터에서 수련을 하면서 마음을 하나씩 버려나갔다. 며칠 지나지 않아 가족을 위한답시고 돈만 바라보고 산 내 인생이, 이 몸 하나만을 위하여 참된 자신도 모른 채 살아온 내 인생이 슬퍼서 눈물만 나왔다. 할머니 장례식도 못 가고 친구들 결혼식도 못 가고 엄마의 생신도 못 챙겨드리고 조카의 돌잔치도 못 가고…. 삶의 중요한 순간들을 잊고 살아왔다는 것에 후회와 참회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렀다.
나는 늘 돈을 많이 벌어야 하고, 돈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휴가 때 제대로 놀러가 본 적도 없었다. 돈만 부모님께 갖다드리면 효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부모님이 원한 것은 물질이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했지만, 결국 내 명예를 위한 거였다. 가족들의 마음은 헤아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게 너무 미안했다. 명상을 하고 돌아와 어머니께 제일 먼저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눈시울을 적시며 “그래도 열심히 살았잖아”라고 말씀해주셨다.
예전에는 돈만 드리면 다 된다는 생각이었는데, 지금은 어머니 발이라도 한번, 손이라도 한번 잡아드리며 따스하게 말하게 되었다.
명상을 시작한 이후로는 친구도 동생도 누나도 형님도 많이 생겼다. 전에는 외톨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어느새 주위에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 있었다. 또 전에는 이 사람이 나한테 득이 되는가를 따졌는데 지금은 그런 게 전혀 없고 그저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 남의 말도 잘 듣는다. 내 생각에만 매여 있으면 잘 못 듣게 되기 마련인데, 그런 관념에서 벗어나니 남의 이야기도 잘 들어주게 된다.
평생의 반려자도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교사였는데 알고 보니 초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화가 잘 통했다. 지난해 봄에 결혼한 나는 아침이면 출근하는 아내를 위해서 아침밥을 챙겨주고, 오후에는 가게에 나간다. 저녁이면 같이 명상센터에 간다. 행복하다. 참 평범하지만 그 말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함께 마음공부를 하고 있으니 상대방을 마음 없이 대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보며 사랑하니까 싸울 일이 없는 것이다.
20년 전,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 면제 판정을 받았을 때 검사관은 “군에 안 가면 뭐 할거냐”고 질문했었다. 그때 무심코 했던 말이 “세상을 위해 열심히 살겠다”는 것이었다. 이제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짐을 내려놓자 마음이 따뜻해졌고 세상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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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7. July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