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바꾸어준 영화 <카모메 식당>
대학 졸업을 앞두고 고시원에 살면서 보고 싶은 영화를 다운받아 보곤 했다. 한 달 동안 40편은 본 것 같은데, 그중 일본 영화 <카모메 식당>도 있었다. 영화를 보기 전만 해도 1초의 클릭과 1분 30초의 다운로드, 그리고 106분의 러닝타임, 총 2시간이 채 되지 않는 그 시간이 나를 바꿔 놓는 계기가 될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영화는 내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할리우드 영화처럼 큰 사건, 절정은 없었지만 우리와 닮은 평범한 사람들이 핀란드라는 낯선 곳에 자리한 카모메 식당에서 만나 마음을 열고 조곤조곤하게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어떻게 보면 시시하고 미지근한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영화는 내게 영화 보는 관점을 바꿔주었고, 그 후로 일본 영화에 빠지기 시작해 많은 일본 영화들을 챙겨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일본 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일본이란 나라를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취업해야 할 나이에 ‘일본 워킹홀리데이’에 도전했다. 당시 경쟁이 아주 치열했는데, 합격 기준이 대학생, 일본 관련 전공자, 일본어 자격증 소지자 위주였다. 나는 그 어떤 기준에도 맞지 않았다. 하지만 1년 동안 딱 4번만 신청해 보자고 맘먹었다. 그래도 떨어지면 미련 없이 포기하고 취업하기로.
본격적으로 아침 8시부터 일본어 학원에 다니고, 9시엔 근처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10개월간 학원을 다니면서 단 한 번의 결석, 지각도 하지 않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3번이나 처참하게 떨어졌다.
연거푸 비자에 탈락하는 사이 나는 일본어능력시험(JLPT) 3급 자격증을 따게 되었고, 마지막 도전만이 남은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도전하는 날, 일본 총영사관으로 간 나는 접수창구에 있는 직원에게 “따로 인터뷰 신청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직원 역시 그 이유를 물었다. “제가 3번이나 비자를 신청했는데 다 떨어졌거든요. 이번이 마지막 도전인데 인터뷰라도 해야 후회가 없을 거 같아서요.”
간절한 마음이 전달되었던 것일까. 결국 일본어 인터뷰를 할 수 있었고, 한 달 후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펑펑 울었던 기억이 난다. 워킹비자를 발급받고 몇 달간의 준비 후 난 그토록 바라던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우물 안 개구리였던 내가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벌어 방값을 내고, 조금 남은 여윳돈으로 여행하며 경험했던 모든 과정들은 내적으로 더 강인해지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느꼈던 건 3번의 불합격이 정말 나에게 있어선 행운이었다는 거였다. 너무나 쉽게 합격했다면 과연 어땠을까. 어렵게 얻어낸, 정말 값진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낸 합격이었기에 일본에서의 1년을 그 어느 때보다 충실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때 인연을 맺게 된 친구들과는 나이를 불문하고 지금도 소식을 전하며 지낸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3년, 일본어 관련 일을 하고 싶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현실과 타협해 들어간 회사에 최근 일본인 손님이 오게 되어 전문 용어로 가득한 일본어 자료를 번역하게 되었고, 올 1월에는 통역 담당으로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오기도 했다. 이렇게 일본어를 쓸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구나 싶어 신기하면서도, 현재의 위치에서 열심히 하다 보면 어떻게든 길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열리게 되어 있다는 걸 실감하고 있다.
워킹홀리데이 합격, 이 하나만을 바라보며 준비하던 3년 전의 그때처럼 누구보다 절박하고 간절했던 마음을 기억하며 지금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국토 종단, 삶의 총체적 위기를 바꿔놓다
최근에 우연히 ‘결혼의 여신’이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다. 우리 집안에 시집왔으니 무조건 우리 가문의 가풍을 따라야 한다며 자신의 뜻만을 따르기를 요구하는 재벌 시댁을 가진 여자 등 여자(며느리)들의 이야기였다.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지만 시월드에 들어서면 그저 며느리일 뿐이다. 드라마이기에 좀 과장스러운 부분도 있으나, 드라마를 보는 내내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던 이유는 나 또한 그 ‘며느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이었다.
서른세 살 늦은 나이에 한 남자를 만나 사랑했고, 결혼했다. 더없이 다정하고, 헌신적인 남편이라고 자부하고, 내 남편을 너무도 사랑한다. 하지만 남편은 절대 나만의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결혼 후 바로 깨닫게 되었다.
결혼한 여자의 숙명인 줄로만 알았다. 그래서 시부모가 원하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했었다.
그러다 결혼 7년 차쯤 되었을 때, 우리 결혼 생활의 총체적 위기가 찾아왔다. 드디어 난 타인의 뜻에 의해 내 삶이 좌우되는 것이 절대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나’로서 완전하게 살고 싶었고, 내 남편과의 사랑도 온전히 지키고 싶었고, 내 아이들에게 훌륭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변화가 필요했다.
재작년, 어린 두 딸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남편과 함께 52일간의 국토 종단에 나서게 되었다. 국토 종단은 꽃샘추위가 막 시작되었던 3월 1일 해남 땅끝마을에서 시작해서 52일째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끝이 났다.
여행을 하며 결혼 후 내 마음속에 쌓여 있던 응어리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알고는 있어도 회피하려고만 했던 문제들을 모두 꺼내어 마주 보게 했고, 그렇게 우리 부부의 문제점들이 모두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의 문제점 중 하나는 갇힌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육아도 갇힌 공간인 아파트에 한정되어 있었고, 어떤 사회적 생활도 차단된 채 아이를 낳고 기르는 힘든 시기를 고스란히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남편은 묵묵히 함께 걸으며 내 감정들을 전부 받아내 주었다. 처음 한동안은 투닥거리며 싸우고, 토라지길 반복했으나, 여행 후반 강원도 태백을 넘어갈 때 즈음에는, 높은 ‘재’ 꼭대기에 서서 함께 지나온 길들을 생각하며 눈빛을 마주했다. 그 눈빛 속에서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있었고, 함께 힘든 과정을 거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공감대를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에 대한 뿌듯함과 상대방에 대한 존경과 존중을 비로소 느끼는 순간이었다.
52일 밤낮의 온 시간을 남편과 함께한 여행. 분명 혼자였다면 할 수 없는 여행이었다. 아이들이 있었기에 힘을 낼 수 있었고, 아이들을 위해서 힘든 와중에도 매일 밥을 하고, 옷을 빨았다. 남편은 무거운 짐을 나눠 들고, 일정을 챙기고, 길 안내를 하며 끝까지 함께했다. 그것은 엄마인 나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육아에 남편도 함께 들어오게 된 계기가 되었고, 온 가족이 정말로 ‘함께’ 하는 제대로 된 첫 여행이었다.
또 여행을 하며 만난 수많은 사람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오지 마을을 잇는 지방도로로만 걸었던 우리는, 쉬거나 잠을 자려면 마을에 들어가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 과정에서 뜻밖에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격려와 응원을 받으며 상처투성이 자아를 조금씩 위로받을 수 있었다. 길 가는 나그네를 청해 먹을 것을 나누는 따스한 정을 교감하며 소통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뭐 그리 대단한 삶을 살겠다고 지금껏 이런 것들을 놓치고 살았는지! 이래서 세상은 아름답다고 하나 보다. 그래서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나 보다.
건강한 내 두 발로 걸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무탈하게 따라와 준 내 아이들에게도 감사했다. 비포장길에 끊겨버린 도로, 급경사의 비탈진 산길, 아이 태운 유모차를 둘이서 앞뒤로 잡고 하나씩 옮기고, 올리고, 내리고. 별의별 고생을 다 했지만 결국 우리는 해낸 것이다!
그 여행은 갇혀 있던 나를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계기가 되었고,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되었다. 그 여행은 나 자신을 만나고, 상처를 치유하고, 성찰하게 해주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리 부부는 바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두 달 만에 귀농을 했다. 그리고 이제 땅을 일구고 포도나무를 가꾸면서 흙과 풀 내음 속에서, 풍족하고 편안했던 도시 생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마음의 평화를 찾아가는 중이다.
소심해도 괜찮아
나는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남자라면 좀 대범해야지” “그런 성격 좀 바꿔봐” 하는 말들을 들을 때마다 자신감 없고 소심한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쉽게 변할 수 없는데, 솔직히 지금의 내가 싫지 않은데….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런 사회의 시선에 주눅이 들곤 했다.
그렇게 소심한 내가 록밴드 보컬로서 연예계에 발을 디뎠고, 그 후 매니저로 일을 하며 어느덧 10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록밴드의 보컬, 매니저라는 직업 또한 소심한 성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오히려 ‘소심함’이 사회생활의 강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준 사건들이 있었다.
한번은 <일밤> <느낌표> <무한도전> <황금어장> 등의 프로그램을 연출한 여운혁 CP를 <황금어장> 초창기에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담당한 배우의 캐스팅 건이었는데 아쉽게도 다른 스케줄과 겹쳐서 출연을 못 하게 되었다. 나는 안 그래도 어려운 분을 만나 거절의 뜻을 전해야만 했다. 살이 떨렸다. 방법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캐스팅이 불발되는 것은 프로그램에 큰 타격이다. 감독님과 작가분은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거절하기가 더욱 어려웠다. 하지만 순간의 죄송함을 무마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여지를 남기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 오히려 결례라고 생각했다. 소심한 모습이었지만 조용히 끝까지 거절의 말을 전하자 마침내 여운혁 CP님이 이렇게 말했다.
“이 친구 되게 소심하게 강한 사람이네? 아니라고 생각하면 절대 흔들리지 않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공하신 분이 20대 후반의 일개 매니저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데 스스로 굉장히 뿌듯했다. 그런 평가를 받고 나니 나 자신이 달라 보였다. 나의 소심함이 오히려 진중하게 보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내가 이제 이렇게 보이면 되겠구나’ 하는 사회생활에서의 방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에겐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소심해도 충분이 나의 길을 갈 수 있겠구나.’ 내 직업에 대한 확신도 가질 수 있었다. 그날의 기억이 나에게 터닝 포인트가 되었던 것 같다. 그날부터 나는 소심한 매니저로 생활을 하고 있다.
“매 순간 고민하고 남들보다 더 고민하고 남들보다 더 체크하고 남들보다 더 진심으로 일하자.” 매니저인 나는 때로는 소속 연예인의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나와 같이 일하는 연예인이 나 때문에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소심한 마음에서 시작된 마음가짐이다.
누군가가 “소심해서 좋으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마음 깊은 곳까지 대범해질 수 없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 소심할 것이다. 그렇게 계속 살아갈 것이다”라고.
자신을 먼저 인정하고 신뢰할 때 타인도 인정하고 신뢰할 수 있다. 소심한 성격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은 아니다. 소심함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순간, 말이 없는 건 신중함으로, 수줍음은 순수함으로, 세심하게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습관은 성실함으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건 독립적으로 일할 수 있음으로 다가온다.
내가 만약 소심한 성향의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어린 시절, 소심함 때문에 상처를 받는 경우도 많이 있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소심하고 세심한 성격이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 같아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