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서 환자로, 1년간의 투병 생활이 준 변화
2009년 2월 평탄하기만 했던 나의 삶에 커다란 사건이 생겼다. 의대 6년간의 공부를 마치고 인턴을 거쳐 내과 레지던트 1년 차를 무사히 마쳐갈 때 즈음, 하얀 가운을 입고 병원을 누비던 내가 갑자기 하얀 가운을 입은 환자가 된 것이다. 침상 머리맡에 붙은 종이에 쓰인 ‘만 26세’라는 글자에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 그렇게 나에게 유방암 3기의 진단이 내려졌다. 의사는 “앞으로 5년 후에 살아 있을 확률이 50%입니다”라는 매우 객관적이지만 매우 잔인한 말로 내 병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바로 치료는 시작되었다. 항암 치료 8번, 수술, 그리고 한 달간의 방사선 치료가 이어졌다. 치료를 받는 동안 외모가 변해갔고 마음은 하루에도 여러 번 불안과 낙심에 빠져 허우적대기 일쑤였다. 다행히 나에게는 좋은 가족, 선배 의사와 친구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나에게 서른 번째 생일이 올까?’ ‘나도 결혼할 수 있을까?’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마음속 깊은 불안과 우울을 해결해줄 수는 없었다.
8개월간의 치료를 마치고 나는 당당하게 병원으로 복귀했다. 환자로서 일년을 살았던 만큼 더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하고 싶었다.
인턴 시절, 나는 암 환자를 보는 종양내과 의사가 되고 싶었다. 암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선생님들이 그렇게 멋져 보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과 현실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공의 1년 차 때 처음 만난 암 환자들. 막상 이들을 보고 나니 두려웠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머리가 커지고부터는 감정적으로 의존하는 환자들이 부담스러워, ‘친절한 의사보다 실력 있는 의사가 더 좋은 의사야’라고 위안하며 냉정하게 그들을 대하곤 했다. 마치 나의 병을 객관적으로 잔인하게 말했던 그 의사처럼.
그랬던 내가 같은 암 환자가 되고 보니 그때의 내 모습이 얼마나 차가워 보이고 섭섭했을지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했다. 그걸 알라고 하나님이 이런 시련을 준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제는 실력 있는 의사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또한 친절한 의사도 되려고 노력한다. 힘들고 지친 환자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암 환자가 되고 2년 만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아이를 낳았다. 아가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이 작고 아름다운 생명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감격의 눈물…. 얼마 전, 이제 내년 2월이면 진단을 받은 지 5년이 지나기 때문에 암 환자 중증 등록이 만료된다는 편지를 받았다. 요즘은 소소한 일상이 모두 소중하고 행복하게만 느껴진다.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이 얼마나 값지고 소중한지…. 아마도 내가 환자가 되어보지 못했다면 느끼지 못했을 감정일 것이다.
왕따로 인한 상처를 치유해준 사람들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는 반장이 되었다. 그러다 1학기가 끝나갈 무렵 교통사고로 다리에 깁스를 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들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환하게 인사했던 친구들이 날 보고 인사를 하다가 멈칫하더니 그 후로 하루 종일 아무런 이야기도 하질 않았다. 그리고 그날 밤부터 욕설 전화와 협박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난인가 했는데, 다음 날 더 모질게 모른 척을 했다. 평소 성격대로라면 이유를 말하라며 화를 냈겠지만,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덩달아 소심해진 성격 때문에 그러질 못했다. 말 그대로 난 왕따가 되었고, 이유도 모른 채 괴롭힘이 지속되는 한 달간은 지옥 그 자체였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됐는데 내가 “차렷, 경례!” 소리를 너무 크게 해서 거슬렸다는 거였다.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사람을 못 믿게 되고, 창문을 보면 뛰어내리고 싶어졌던 이유가 인사 구령을 크게 해서라니!
불행 중 다행으로, 깁스를 풀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서 이런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오진 않았다. 활발하던 내가 어두워졌고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누군가 나에게 칭찬을 하고 웃어도 의심했고, 누군가 긍정적인 얘기를 하면 현실을 모른다고 조롱했다. 그러면서 부모님과의 사이도 멀어지기 시작했고 사춘기의 방황은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이런 내 모습에 지쳐가던 부모님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 나를 내보내야겠다고 생각하셨고, 처음으로 미국의 친척 집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때가 내 인생의 첫 번째 터닝 포인트였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친척 언니에게 털어놓았고 처음으로 누군가 앞에서 펑펑 울었다. 고모부, 고모, 작은언니, 큰언니 모두가 내 이야기를 듣고 공감해줬고 아파해주셨다. 처음으로 내 속을 털어놓으며 크게 울고 나니 웃는 것도 쉬워졌다.
미국에서 시작된 터닝 포인트는 캄보디아로 이어졌다. 조금은 달라진 모습으로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해외 봉사 면접을 보게 되었고 아무런 경력도 없는 내가 덜컥 붙게 된 것이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고아원에서 일주일간 봉사를 하게 되었다.
조금만 더우면 짜증을 내던 내가 그곳에서 단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았다. 물 한 방울도 귀한 곳인데 땀 흘려 페인트칠을 하는 내게 한 캄보디아 고아원 친구는 환하게 웃으며 물병을 건넸다. 자신의 목이 더 말랐을 텐데도 그 친구는 망설임이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경계심이 아닌 웃음으로 진심으로 대하는 그곳의 친구들을 보며 서로가 의심 없이 마음을 주고 믿을 수 있다는 소중한 사실을 배워 나갔다. 그렇게 나는 사람들로 인해 받은 상처를 사람들로 인해 치유받을 수 있었다.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따듯하게 건네준 손, 따스한 눈빛이 그렇게 나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현재까지도 나는 봉사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누군가로 인해 나의 상처가 치유됐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가 되고 싶었다. 정을 주었을 뿐인데, 점차 변하는 아이들의 눈빛과 행동은 나를 더욱 행복하게 한다.
빗속의 사고, 멈추고 다시 바라보게 된 세상
미용을 시작한 지 11년, 다시 찾은 설렘으로 행복한 시간의 연속이었지. 폭우가 쏟아지던 7월 11일 아침 전까지는. 비 오는 날, 출퇴근 걱정에 마음이 조급해졌어. 잠시 방심한 사이 2층 난간에서 미끄러지면서 떨어져 정신을 잃었지.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빗줄기가 날 깨워줘. 숨이 탁 막히고 끊어질 듯한 고통에 119 호출. 통증도 잊은 채 이리저리 전화하기 바빴지. 오늘 스케줄은 어쩌나, 내일은? 약속을 못 지킬까 봐 조급해졌어. 그런데 진단 12주. 머릿속은 복잡하고 몸과 마음은 더 아픈데 큰언니가 마음 추스르며 다시 읽어보라고 챙겨준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 그동안 병실 창가에 꽂아만 뒀는데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보이고 ‘언니의 독설’이 들려. 김난도 선생님이 그러시는 거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라고. 며칠 후, 병문안 온 친구가 선물해준 게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는 책이었어. 그리고 오늘 직원 생일 때마다 대표님께서 책 선물을 해주시는데 ‘정글만리’가 택배로 도착. 정말 하나같이 책 제목도, 책에서 보내는 메시지도 마치 나한테 말을 거는 것처럼 느껴져. 여기까진 첫 번째 터닝 포인트.
다시 사회에 나갈 때, 조급한 마음을 다스리고 지금의 나보다 마음가짐을 더 준비해서 퇴원해야지. 이 시간을 소중히 보내야지 하고 생각했어! 그런데 정말 멈추고 비우니까 그동안 몰랐던 수호천사들의 마음이 나에게도 점점 채워지는 거야. 첫 번째 수호천사=가족.
엄마는 봉사하며 사니까 하나도 안 아프다셔.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꾸준하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하면 행복하다며. 엄마도 많이 아프신데 아픈 몸을 이끌고 요양병원에 청소와 목욕 봉사를 다니시는 거야.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작은언니가 강아지를 좋아해 어릴 때부터 키웠는데 유기견센터 가서 청소와 목욕 봉사를 하는지는 몰랐었어. 입양해서 식구가 늘었다길래 그냥 입양했나 보다 했지. 알고 봤더니 다리를 다쳐 절뚝이는 강아지와 폭력에 시달려 아파했던 강아지를 입양해온 거야. 우리가 더 사랑하며 품어야 한다고. 큰언니는 매일 길냥이들 배고프다며 밥 챙겨주고, 막내언니는 간호사인데 병원 밖에서도 조용히 봉사하며 나누고 있었어. 가장 가까운 가족들의 봉사하는 마음과 자세를 지난 십 년 동안 떨어져 있다 보니 잘 몰랐었어.
또 한 명의 수호천사는 여기 병원에서 만난 샴푸할배. 월~토요일,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병원과 복지관에서 수많은 환자들의 머리를 감겨주는 봉사를 하셔. 머리 감겨본 사람들은 알 거야. 허리, 다리, 손목도 아프고 심하면 샴푸독에 피부병까지 생겨. 그런데 봉사하니까 아프지도 않고 오히려 더 젊어진다고 하셔.
나는 얼마나 내 것을, 내 시간을, 내 마음을 나누며 살아왔는가 돌아봤어. 학교 다닐 때 잠깐, 직장 다닐 때 잠깐, 교회에서 잠깐. 청소나 군부대 커트, 보육원 미용 봉사 등 잠깐잠깐 해놓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했다고 생각했어. 나 참, 창피해서. 가족들과 샴푸할배를 보며 내 방식대로, 나 편한 대로 봉사 활동을 하면 안 된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기쁘게 진심을 다해 꾸준하게 해야 한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달았지. 이것이 나의 두 번째 터닝 포인트. 앞으로의 봉사 활동에 초점을 잡고 기쁨으로 나누는 삶, 내가 가야 할 길을 계획했어. 지금 이 순간 이 시간이 바로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는 거!
‘조급함을 비우고 나눔으로 채워가기 위해 오늘도 달리다 잠시 멈춰봅니다. 다시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봅니다. 오늘도 감사하며 시작하고 감사함으로 마무리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