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방문을 열면 베란다에서 시작하여 방문 틀로 솟구쳐 올라가는 달의 모습이 보인다.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은 달을 보는 것이다. 이스터섬에 들어앉아 변함없는 세월을 보내는
모아이 석상처럼 살아가는 나에게는, 뜨고 짐을, 그리고 차고 기움을 거듭하는 저 달의 모습은
동경의 대상이자 내 마음을 투영하는 거울인 것이다. 달처럼 높이 솟아 훨훨 날아갈 수 있다면,
시작과 끝을 반복하며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면…. 글 지현곤 카투니스트
초등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갑자기 허리에 신경마비가 오면서 할머니 할아버지처럼 힘이 없어져 버렸다. 척추결핵이라는 병. 그 이후 나는 이 작은 방에서 바위처럼 머물며 살아왔다. 내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게 된 내가 그 분노를 삭이는 유일한 방법은 만화였다.
처음엔 동생이 빌려온 만화책을 보다, 마음에 드는 장면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허구의 세계가 상상의 나래로 날아 제 의지를 자유분방하게 펼쳐내는 만화가 좋았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내 생각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책장을 넘기며 동경하던 세계, 휠체어를 타고 전망 좋은 곳으로 가보기, 바닷가에서 사진 몇 장 찍어보기…. 마음속 소망들을 자유롭게 한 장의 사각 틀 안에 채워나갔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한 장 안에 모든 내용을 담는 카툰 형식은 나에게 딱 맞는 것이었다.
한 장, 한 장 그림이 쌓여가자, 사보나 만화 잡지의 독자란에 그림을 보내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이삼 년가량 독자란에 꾸준히 실리기도 했다. 나도 내 힘으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구나! 기뻤다. 그러다 1991년, 서른 즈음에 <주간만화> 신인만화공모전 카툰 부문에 도전, 가작으로 입선을 하면서 나에게도 카툰작가라는 호칭이 붙었다.
나는 매일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연습장에 그 소재를 가득 채워놓고서, 다시 보면서 좋다, 안 좋다, 일일이 표시했다. 특히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풍자적인 표현에 긍정적인 그림, 극한 상황에서의 마지막 유머나 상황 반전’이었다.
어떻게 완성도 있게 작품을 마무리할 것인가. 원숙함이나 노련함의 부족함이라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것은, 꼼꼼하게 채워 넣는 방법이었다. 면을 한 색으로 덮는다 치면 잉크로 채워버리면 그만인 것을 나는 잔선을 끊임없이 겹치고 덧대면서 채워 음영을 드러낸다. 그러다 보니, 내 그림은 원본 크기로 보는 게 가장 좋은 작품이 되었다. 세밀히 관찰하면 실수로 떨어뜨린 잉크 방울까지도 다 드러나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작품의 주제도 좀 더 넓어져야 되지 않나 싶었다. 그중 눈을 주게 된 것이 전쟁, 그리고 테러였다. 오늘날에도 이 세계의 어느 한구석에서는 크든 작든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전쟁의 참상 속에 남은 자들은 모두 죽어가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그 폐허 속에서, 빨래를 널고, 비닐 속에서라도 자식을 키우고,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이어가는, 그런 생명력을, 삶에 대한 의지를 그려내고 싶었다. 그리고 평화와 화해, 작은 것에서 희망을 찾고 기뻐할 수 있는 소박한 사람들의 마음, 행복한 세상에 대한 바람을 담고 싶었다.
점차 내 작품을 사랑해주는 분들이 생겼다. 2007년에는 처음으로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주최의 첫 개인전이 열렸다. 그다음 해 3월에는 한국 카툰작가로는 처음, 미국 뉴욕 아트게이트갤러리 초청으로 전시를 열었다. 내 그림이 뉴욕에서 전시되다니! 이게 정말로 나에게 벌어진 일이 맞나 싶었다. 작품도 팔리고 실질적인 수익이 들어왔다. 처음으로, 내 힘으로 돈을 번 것이다.
나는 내 스스로를 ‘무인도에 사는 허수아비’로 생각했다.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소멸되기 전까지 그냥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진. 그래서 어느 순간 불리는 이름과 따스함을 전하는 눈빛들이 낯설고 어색했다.
나는 나의 이름 부르기를 꺼려왔었다. 매순간마다 서러움과 유아적인 미움, 그리고 혼자 있음을 느끼고는 말할 길 없는 초라한 서러움을 느꼈다. 하지만 돌아보면 정작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공주대학교 만화학부의 임청산 교수님, 그분을 빼고 내 삶을 이야기할 수 없다. 교수님은 내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볼 수 있게 도와준 분이다. 어디 그뿐일까. 내가 힘겨움에 비틀거리는 순간에 나를 잡아주신 분도 바로 그분이었다. 그리고 몇 년 전 폐렴에 가까운 증상에 빠져, 죽음의 문턱까지 가는 괴로움을 겪었을 때, 몇 번이고 찾아와 헌신적으로 도와주신 방문 간호사님. 그리고 내 작품을 인연으로 몇 년 이상을 꾸준히 연락을 해주시는 안민수라는 분도 있다. 한 번은 그분에게 어렸을 적 존경한 고우영 화백의 만화 <일지매>에서 일지매가 멋지게 산줄기를 타고 넘는 장면을 보며, 나도 그 산 능선을 따라 오르고 싶었다는 말을 메일로 전한 적이 있다. 그 후 취미가 등산이었던 이분이 자신의 산행 기록들을 내게 보내주기 시작했다. 그 사진들을 보면서, 그 산속을 훑어보는 심정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다. 나는 결국 혼자가 아니었고,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와 이어지고, 그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었던 것이다.
한때는 장애 사실을 감추고 싶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이기 위해 애썼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야 내가 왜 그 사실을 감추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장애가 있는 나도 장애가 없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 도시에서 나름의 역할을 품어 안고 살아가고 있다. 이 장애로 인해 내 자신이 고통을 받았으면 받았지 남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으니 좀 더 당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 더 솔직해지고, 나를 옥죄던 어리석었던 생각들과 내 삶을 속박하는 틀에서 자유로워지기로. 그런 마음으로 그린 것이 <나>라는 작품이다.
온전한 자의라고도, 철저히 타의라고도 할 수 없는 내 삶의 여건은 본의 아니게 면벽 수련이나 다름없는 인생을 내게 내밀어주었다. 내 인생 기록에는 서서히 고조되는 갈등도, 커다란 클라이맥스도, 드라마틱한 결말도 없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