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천년 견오백(紙千年 絹五百)이란 말이 있다. 종이는 천년을 가고, 비단은 오백 년을 간다는 말로, 한지의 우수성을 나타낸 말이다. 경북 무형문화재 한지장 김삼식(70) 선생은 이러한 한지를 61년 동안 전통 방식 그대로 만들어왔다. 쌀은 88번 손이 가야 하고, 종이는 100번이 넘는 손길이 가야 얻어진다는 말처럼 정성을 다해 만들어온 그의 한지는 2007년 ‘조선왕조실록 복원’과 2010년 ‘고려초조대장경 복원’ 사업에 선정될 정도로 우수한 한지로 알려져 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은 종이를 사려면 대한민국으로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는 ‘삼식지소’ 한지장 김삼식 선생을 만나보았다.
글 김혜진 사진 홍성훈
경북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 문경한지 작업장 한쪽에는 닥나무 재배가 한창이었다. 김삼식 장인은 닥나무 사이에서 잡초를 캐고 있었다. 그의 안내를 받아 작업장으로 향했다. <삼식지소(三植紙所)>, 오랜 세월을 보여주듯 빛바랜 간판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진실, 양심, 전통 이 세 가지를 지키겠노라, 자신의 이름을 걸고 만드는 한지장인의 다짐이 느껴졌다. 그렇게 묵묵히 걸어온 세월이 61년. 하지만 그만큼 외롭고 힘든 길이었다.
중국에서 값싼 한지가 들어오고, 화공약품으로 손쉽게 생산된 개량한지가 전통한지로 둔갑해 팔려나가는 시절에 모든 것을 수작업으로 한다는 건, 그의 표현대로 ‘조금 모자라야 할 수 있을 정도’로 고된 일인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최근 들어 고려초조대장경 복원, 조선왕조실록의 복원 등 국가 시책과 맞물려 한지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그의 한지가 주목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복원 사업 시 가장 중요한 건 옛날에 썼던 종이와 비슷한 종이를 찾는 일이었는데, 전국의 한지를 조사한 결과 김삼식 장인의 한지가 원본과 가장 유사할 뿐만 아니라, 종이 질 또한 가장 우수했던 것. 그렇게 2007년 문화재청의 조선왕조실록(국보 151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복원에 이어, 2011년 초조대장경 복원간행위원회에서도 1011년에 판각된 고려초조대장경을 복원하는 데 김삼식 장인의 종이를 선택했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오롯이 한길을 걸어온 그의 진실과 양심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요즘 들어 선생님의 한지가 많은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본심을 지키며 60년 세월을 지내다 보니 때가 맞았나 봅니다. 어느 천년이 다가와서 또 이런 날이 올까 싶어요. 사실 먹고살기 위해서 종이를 했고, 배운 게 종이뿐이라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는 기라요. 대단한 것은 하나도 없어요. 하지만 천년 문화유산 복원에 쓰인다는 것, 나라에서 최고의 종이라 인정해준 건 참으로 기쁩니다.
전통한지가 나오기까지 그 공정이 보통 정성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보통 백지(白紙)라 하면 아무것도 안 쓴 거라 보는데 우리는 그리 생각 안 해요. 백지는 백 번의 손길을 거쳐서 백지(百紙)다, 합니다. 그래야 종이가 만들어지니까요. 백 가지 손이 가는 게 거짓말 같잖아요. 사실 더 갑니다. 전 과정이 다 세밀해야 하고, 한 개만 틀려도 안 돼요. 또 몸에 푹 배야 돼요. 2년 전쯤 직공을 두었었는데 힘드니까 가만 못 있고 들고 날고 해요. 제일 오래 있던 사람이 5개월이라. 그래서 지금은 우리 가족 서넛이 하고 있어요.
김삼식 장인이 한지를 배우기 시작한 건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생계를 꾸리기 위해 자신의 사형(자형의 형님. 고 유영운 선생)에게 한지 만드는 법을 배웠다 한다. 그리고 그가 지금까지 제대로 된 전통한지만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의 뜻이기도 했다.
“일본 사람들이 한지 기술자들을 일본으로 데리고 갈 때 다행히 우리 어른들은 안 갔어요. 그래서 저한테 옛날 전통 방식을 그대로 전수해줄 수 있었죠. 나중에 일본에 갔다 온 사람들이 화공약품으로 종이 뜨는 걸 배워가지고 왔는데, 그 사람들은 돈이 있으니까 화공약품을 사서 종이를 만들었어요. 우리는 하루에 100~200장밖에 못 뜨는데, 그 사람들은 하루에 1,800장을 내요. 근데 우리 어른들은 화공약품 살 돈이 없었지. 덕분에 오늘날까지 온 거라요.”(웃음)
우리 전통 한지가
만들어지기까지
종이 뜨는 방식도 달랐다. ‘대나무 발을 손으로 한두 번 살랑살랑 흔들어 뜨는’ 일본식(쌍발뜨기)과 달리 ‘물이 일렁일 정도로 발을 푹 떠서 앞뒤 좌우(井)로 50번 이상씩 물을 뜨는’ 우리 식(외발뜨기)은 팔에 알통이 밸 정도로 고된 작업으로, 종이 한 장이 나오는 데만 20~40분이 걸린다.
김장인은 전통을 지킨 비결이 ‘먹고살기 위해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고 했지만, ‘사람의 힘만으로 만들 수 있는 전통 종이’ 외에는 다른 건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성품과도 맞닿는다. 그저 본 대로 배운 대로 좋은 종이 만들기밖에 몰랐던 그는 지금도 여름에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한지는 대개 겨울에 만드는데, 여름엔 닥나무, 황촉규(닥풀) 등 재료가 쉽게 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수지가 맞지 않아 늘 가난했던 터라, 살아갈 방법을 찾기 위해 벼농사도 짓고, 소도 키우며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전통한지를 만드는 과정은 구도(求道)에 가까운 과정이다. 특히 8시간 동안 삶은 닥나무 껍질(흑피)을 벗겨내는 작업은 하루 종일 긁어도 6kg 벗기기도 어려운 고된 일이다.
검은 겉껍질을 칼로 긁다 보면 푸르스름한 청태가 보이는데, 그것마저 깨끗이 긁어내야 비로소 백닥(백피)이 된다. 많은 한지 제조자들은 간단히 표백제로 표백하지만 김장인은 “하얗도록 청태를 빡빡 긁어내라”고 배웠다 한다. 마무리도 간단치 않다. 햇빛에 잘 말린 백닥을 잿물에 삶은 다음, 방망이로 두들긴 후 지통에 닥섬유와 황촉규(닥풀)를 넣고 전후좌우로 흔들며 종이를 떠낸다. 그 후 탈수를 하고 건조 작업을 거쳐야 비로소 한지 한 장이 완성된다. 단순한 종이가 아닌 장인 정신이 깃든 작품, 천년 한지의 생명력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현재 고려초조대장경 복원 작업에 참여하고 계시지요?
2009년도에 고려초조대장경 원본을 가져오셨어요. 이 종이를 만들 수 있냐 묻는데, 진짜배기 고려지를 보니까 네 가지가 한 번에 보여요. 티, 청태, 섬유, 닥 껍데기까지. 그러니까 수명이 오래갈 수밖에 없지. 약품 처리 안 하면 전통한지에선 다 보이게 돼가 있습니다. 살면서 그날처럼 기분 좋은 날은 없었어요. 왜냐면 옛날 한지는 눈에 보기 좋은 것보다 잡아 땡겨가 안 찢어지고 질기고 오래가면 그게 좋은 기라. 근데 그 사람들은 또 깨끗하게 만들어 달라는 거라. 그러니 얼마나 애를 먹습니까. 사실 다들 서양 종이에 익숙해져서 그래요. 그래도 나라에서 필요한 데 쓰니까 좋은 기라요.
그렇게 세상이 알아주기까지 가장 힘든 시절이 있으셨다면요? 그야 가장 힘든 건 춥고 배고픈 때죠. 제가 지게에 종이를 짊어지고 시장에 팔러 왕복 120리를 걸어 다녔어요. 겨울철이 특히나 힘든 게 눈이 많이 올 때 산길로 다니니까 눈이 싹 덮어버리면 길을 모르는 거라. 종이 한 장도 못 팔면 밥도 못 사 먹고 그냥 오는 거예요. 배가 너무 고프고 피곤하니까 걷다가도 그리 잠이 와요. 눈 위에서 몇 번 자다가 동상도 걸리고, 여러 번 죽을 뻔했죠. 그걸 평생을 하다시피 한 거죠.
한지를 만들 때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첫째 진실해야 돼요. 절대 돈 욕심을 따라가면 안 됩니다. 진실하고 양심하고 또 달라요. 진실로 하다가도 허욕이 생길 때는 양심이 생각나야 돼요. 아, 내가 양심의 가책이 있으면 안 된다. 그다음에는 전통이에요. 진실, 양심, 전통. 그래서 삼식지소(三植紙所)입니다.(웃음) 저는 종이 사러 오신 분들이 나를 살려주는 의사라 생각해요. 굶어 죽지 말라고 와 주신 건데 그보다 반가운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분들이 “종이 더 주이소, 선생님 종이가 최고제” 하면 용기가 나고, 힘든 게 다 날아가요.
2005년, 그는 경북 무형문화재로 선정되었다. 막내아들이 대를 잇겠다고 해서 가능한 일이었다. 6살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온 아들 김춘호(38)씨는 당신의 명성으로 얼마든지 곁눈질하며 돈을 벌 수 있었는데도 정말 우직하게 한길만을 걷는 아버지를 존경했다 한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이어받기 위해 4년 전 34살의 나이에 목재종이학과에 들어갔다.
“제가 아버지보다 힘은 좋은데도 일하는 양은 반도 못 따라가요. 닥을 긁을 때, 닥나무를 벗길 때, 종이를 뜰 때, 딱 반밖에 못 하거든요. 50kg도 안 되는 몸무게로 일하시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플 때도 많지만… 진짜 대단하세요.” 아들 김춘호씨의 말이다.
아드님이 대를 잇겠다고 할 때 어떠셨어요?
사실 제가 나이도 많고 몸도 약해져서 그만두려 했었어요. 그때 우리 막내아들이 아버지 저도 한지를 해야겠습니다, 하는 거라요. 그래서 나는 돈도 못 벌고 먹고살기에 애먹었지만, 니는 대학 졸업도 했으니까 객지에 나가 사회 진출을 해라. 죽어도 한지는 하지 마라 했어요. 근데 야가 전국을 다녀 봐도 아버지처럼 전통한지 하는 데가 한 곳도 없다고, 꼭 해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하고 싶으면 객지에 나가 인생 공부 더 하고 온나, 그러면 받아주겠다, 해서 3년을 약속하고 나갔습니다. 2년간 자동차 판매원을 하면서 돈을 좀 번 듯하기에, 몇 십 원짜리 장사하는 데로 다시 들어가라 했죠. 작은 돈도 귀한 줄 알아야 하니까요. 그랬더니 주유소에서 장갑 팔고 세차하고 기름 주고 1년 반을 보내더라고요. 만약 막내아들이 없었다면 무형문화재고, 조선왕조실록이고, 고려대장경이고, 우리 진짜배기 종이가 어떻게 됐을까 싶어요. 아들에게 고맙죠.
요즘도 꾸준히 종이를 공부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새벽 5시에 나와 저녁 늦게까지 일하다 보니 책 볼 시간도 없고, 누가 알려주지를 않으니까 그냥 저대로 연구를 해요. 사람들이 인간문화재 하면 대단히 높은 줄 알고 접근을 잘 안 하거든요. 내가 먼저 마음을 열어야 사람이 다가오겠다, 그래서 생각해낸 게 먼저 내 신분, 입장을 다 밝혀야겠다,였어요. ‘저는 국민학교 3학년을 중퇴한 무식꾼인데, 닥 장사해서 오늘날까지 여러분들 덕분에 먹고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얘기하면 그 사람이 술술 자기 생각을 얘기해줘요. 그래서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사람이 백 명이 가면 나는 제일 뒤에 간다고 생각해요. 앞에 간다고 생각하면 배울 것도 못 배웁니다. 아들한테 시범 보일 때도 그래요. 날 따라온나 안 하고, 난 이렇게 하는데 네 생각은 어떠노? 물어요. 더 좋은 방법은 없을까, 귀를 확 트이고, 머리를 자꾸 쓰도록 만들어줘야 해요.
한지, 종이란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일까요?
종이는 우리 몸에 흐르는 피라 생각해요. 몸에 혈이 안 돌면 안 되듯, 종이가 없으면 한 개도 기록이 안 되는 기라. 어느 나라든지 무슨 일이든지 역사가 있으면 종이가 있어야 한다 말이요. 적는 게 없으면 세상이 돌아가질 않아요. 스승, 대통령도 글을 배워서 나오듯이 글씨를 모르면 말도 옳게 안 나와요. 종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해요.
세계적으로 우리 한지가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 전통한지가 우수한데도, 잘 알지를 못하니까 유럽 등 여러 나라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종이로 일본 화지를 많이 써요. 세상 사람이 “오래가고 질긴 좋은 종이를 사려면 대한민국 가야 한다”라고 해야 성공인 거 같아요. 세계에서 1등 가는 종이를 만들자. 그래서, 앞으로 10년은 더 살아야 해서 몸을 아끼고 있어요. 술, 담배 다 끊고….(웃음) 세계로 뻗어나가려면 진실로 다섯 집만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애요. 나 혼자로는 안 돼요. 또 좋은 종이를 구분 지을 줄 알아야 하고, 나쁜 종이를 전통한지라고 팔지도 말아야겠지요. 전통한지의 기준이 바르게 돼서 진짜 좋은 한지를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게 내 소원이요.
2011년 프랑스에서 145년 만에 조선왕실 외규장각 의궤(국가행사기록)가 되돌아온 바 있다. 당시 일각에서는 프랑스의 보존 기술에 찬사를 보냈지만, 진짜 비결은 천년을 가는 우리 한지에 있었다. 이후 프랑스 박물관 관련자들이 한국을 방문했고 김삼식 장인의 한지 제작 전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한지를 만드는 노고와 정성에는 탄복했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종이를 만드는 장인의 작업장이 조립식 판넬로 지어진 열악한 환경인 것에 모두가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언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냈던 한지장인 61년의 진심. 이제 우리 모두가 귀 기울여야 할 때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