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정희 문화칼럼니스트
‘당신의 버킷 리스트bucket list(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는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까? 아마도 그동안 하고 싶었으되 할 수 없었고 이룰 수 없었던 것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내일 당장 죽는다면 혹은 당신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이 죽는다면 그때는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라고 질문이 바뀐다면, 적어도 ‘로또 1등 당첨이나 세계 일주’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나의 죽음이,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이 코앞에 있는데, 로또 1등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여기 ‘맷 킹’이라는 한 남자! 하와이 원주민인 그는 보트 사고로 졸지에 혼수상태에 놓인 아내의 침상 앞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젠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될 준비가 되었다’고. 하지만 늘 깨달음은 한발 늦게 온다. 들어줄 상대는 이미 없고, 그들 사이에 있는 딸아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만큼이나 도통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충격적인 사건은 그뿐이 아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뿔싸! 아내에겐 다른 남자가 있었단다. 그것도 자신과 이혼하길 바라면서 그 남자를 사랑했단다. 그러니 이 남자의 인생이 어디 하와이인들 유토피아이고 파라다이스이겠는가? 그래서 그는 하와이를 지상낙원쯤으로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고, 당신네들 삶과 내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디센던트(후예)’라는 제목처럼 그에게 주어진 중대하고도 골치 아픈 일은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엄청난 부동산을 처분할지 말아야 할지 최종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맷은 아내의 외도와 죽음을 통해 가족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고 친척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물려받은 땅을 그대로 지켜나가기로 결정한다.
땅을 처분해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들, 리조트가 들어서고, 하와이가 더 이상 하와이 원주민의 것이 아니게 될 때, 진정한 하와이언의 후예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추억의 땅을 잃고 각자의 섬으로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면 그것이 가족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땅을 팔아 없애려는 친척들에게 말한다.
“우리가 이 땅을 가졌던 것도 아닌데, 그저 물려받은 것뿐인데….” 그래서 아내의 침상 곁에서 눈물 흘리며 “당신은 나의 사랑이자 친구, 고통이자 기쁨이었다”며 나지막이 읊조리던 ‘맷’의 마지막 인사는 그가 지켜낸 것이 다름 아닌 가족들과의 추억, 그리고 가족 그 자체였음을 깨닫게 해준다.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다. ‘단 하루만이라도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청산해봤으면?’ ‘단 하루만이라도 다른 사람이랑 사랑에 빠져봤으면?’ 그럴듯한 망상의 바다를 헤매보지만, “내일 당장 죽는다면 무얼 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내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하지 않겠는가.
어쩌면 우리의 하루하루가,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공간이 늘 디스토피아(반이상향)인 이유는 그 누구도, 자신 혹은 가족의 삶이 어느 순간에 ‘올 스톱’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실상은 늘 유토피아 속에 살면서도 자신을 끝없이 디스토피아에 사는 불쌍한 인간으로 전락시킨다. 그 치명적인 오류를 깨닫고 후회할 때는 안타깝게도 이미 우리 인생은 종착역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결국 바로 지금 이 자리가 최상의 파라다이스임을, 우리가 살면서 진정으로 지켜내야 할 것들은 가족, 그리고 함께해온 역사임을, 이 영화 ‘디센던트’는 알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