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 주철장 원광식(70) 선생. 21살 때부터 종을 만들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종소리를 재현하기 위해 50년간 한길을 걸어온 그는, 그동안 2만여 개에 이르는 종을 만든 우리 종의 산 역사다.
그가 본격적으로 종과 인연을 맺은 건 1963년이었다. 8촌 형님은 종 만드는 회사 대표로, 마침 사찰과 교회가 급증하면서 종 만드는 일손이 부족해져 함께하게 된 것. 하지만 종을 만들수록 종소리에 대한 아쉬움은 커져갔다고 회고한다.
“초등학교 때 수원 용주사 새벽 예불 때 듣던 종소리가 잊혀지지 않는 거예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게 참 좋았는데, 내가 만드는 건 그런 소리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던 1969년 어느 날이었다. 1200도가 넘는 쇳물이 폭발하며 한쪽 눈을 잃고 절망과 방황의 시간을 보내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예산 수덕사 범종 제작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3년간 종과 씨름하면서 만든 노력의 대가일까. 종소리가 좋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전국 사찰과 관공서에서 그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때 정말 열심히 종을 만들면서, 나는 평생 종을 위해 살리라 다짐했지요.”
우선 그는 우리 종소리를 과학적으로 연구, 재현하기 위해 1976년에 한국범종학회를 설립했다.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종의 주조 방식의 맥이 끊기면서 일본식으로 종을 만든다는 사실에 답답했기 때문이다.
‘소리와 미학적인 면에서 세계 최고’라는 성덕대왕신종 소리의 비밀을 풀기 위해 크고 작은 종들을 수없이 만들어야 했다. 당시엔 무늬 하나를 배치하는 데도 종소리를 따져가며 새겼던 터라, 그가 만든 종으로 학자들은 완벽한 소리에 필요한 종의 구성 성분과 두께, 문양의 위치, 모양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데이터를 구축해갔다.
그중에서 특히 거푸집의 흙은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흙과 쇠의 절묘한 합방을 통해 비로소 아름다운 종이 태어나기 때문이다. 그는 흙을 찾아 나섰다. 중국을 비롯해 동남아시아는 물론 우리나라 전국 방방곡곡을 뒤진 끝에 결국, 경주 일대에서 찾아낼 수 있었다.
“거푸집을 만들 때 흙의 배합이 중요해요. 도자기처럼 점도가 강한 흙으로 만들면 공기가 안 통해 1000도가 넘는 쇳물이 들어가면 녹아버리거나 터져버리거든. 근데 경주 옥돌은 물을 묻히면 문양은 정교하게 잘 새겨지고 마르면 단단해지는 성질이 있어 높은 온도를 견딜 수 있어요. 결국 경주 토양이 좋기 때문에 통일신라 때 좋은 종을 만들 수 있었던 거지요.”
10여 년이 넘게 흙을 빚고 쇳물을 녹여 붓기를 수만 번…. 옥돌을 갈아 거푸집을 만들자,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렇듯 그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얻어낸 연구를 바탕으로 우리나라 거의 모든 종을 재현해왔다. 보신각종을 비롯해 산불로 녹아버린 낙산사 동종, 국내 최대 규모인 화천 ‘세계 평화의 종(37.5톤)’ 등 그가 재현하고 만든 큰 종만 7천여 개, 작은 종까지 하면 2만여 개에 이른다.
“무엇보다 종을 만들 때 어떤 마음으로 만드느냐가 중요해요. 마음이 깨끗하지 못하면 좋은 종소리를 들을 수 없거든. 나란 인간을 만들어준 게 종인지, 종을 위해 산 게 나인지 모르겠지만, 가급적 시비 안 하고, 말, 행동 조심하며 살려고 해요.”
“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을 만들고 싶다”는 그의 바람처럼, 천년의 소리를 이어가기 위한 그의 노력은 어쩌면 지금부터 일는지도 모른다.
“아직 종을 알려면 멀었어.” 한쪽 눈을 잃고도 50년을 한결같이 걸어온 장인의 마지막 말은, 깊은 울림을 전하는 종소리처럼 긴 여운이 되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