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여름, 뜨거운 태양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누군가에게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여름 이야기들.

 

한여름 계곡에서의 첫인사

권종국 40세. 직장인. 경북 칠곡군 기산면 죽전리

무더운 여름이면 식은땀 났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2009년 8월 14일, 장인 장모님께 첫인사를 드리러 간 날이다. 서른일곱이라는 늦은 나이에 아내를 만나 연애를 시작한 나는, 결혼을 위해 은근슬쩍 일을 진행해 나갔다. 그렇다고 별난 건 아니고, 그저 여자 친구 집에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거였다.

당시 아내 역시 서른여섯이란 과년한 나이였기에 장인 장모님의 걱정이 많으셨던 터라 나는 아내에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만 말해라. 그래야 부모님이 걱정을 더신다”고 은근히 설득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목적은 오직 하나! 나이 많은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님께서 연애 사실을 알고 먼저 결혼 추진에 나서주시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를 통해 처가에서 연락이 왔다. 처가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서 물놀이를 가는데 시간 나면 잠깐 와서 인사라도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문제는 연락이 온 것이 물놀이 바로 전날 저녁이었던 것이다.

급하게 준비를 해야만 했다. 당시 나는 여름 정장이 없었다. 차도 누가 보면 굴러가나 싶을 정도의 고물 차를 몰고 다니는 처지였다. 그래도 첫인사인데 고물차에 편한 복장으로 갈 수는 없어 밤늦게 친한 친구에게서 내 차에 비하면 완전 멋진 자동차와 정장 한 벌을 빌렸다. 처가 선물은 전복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께서 “마침 좋은 게 있다”며 전복으로 준비를 해주셨다.

내심 불안하기도 했다. 아내는 1등 신붓감인 교사인데 반해 난 지역방송 외주제작 PD로 수입도 변변찮은 상황이었고, 모아놓은 돈도 한 푼 없이 빚만 있었기 때문이다. 어른들 마음에 안 들면 어떻게 하나 걱정도 많이 되었다. 수입 같은 걸 물어보시면 어떻게 대답할지 고민도 되었다. 긴장으로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8월 14일, 문경의 계곡으로 출발! 그런데 아뿔싸! 가는 도중 타이어 펑크가 나 차를 고치느라 1시간이 넘게 지각을 하게 되었다.

‘허걱, 첫인사부터 지각이라니!’ 안 그래도 긴장이 되는 상황에 지각까지 했으니 더욱 긴장이 된 나는 온몸이 땀에 흠뻑 젖었다. 생각해보시라. 한여름 계곡에, 모두들 꽃무늬 반팔티와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서 물놀이를 즐기는 그 와중에, 나 혼자 정장 차림으로 땀 뻘뻘 흘리며 계곡에 있는 모습을!!

 나로 인해 가족의 점심 식사가 늦어졌고 몸 둘 바를 모를 상황에서 첫 만남이 이뤄졌다. 슬하에 6남매를 두신 장인 장모님은 막내인 아내를 제외하고 모두 출가시켰던 터라, 어린 조카들까지 포함한 10명이 넘는 식구들이 나를 삥 둘러싸고 있었다. 막내딸이, 그리고 막내 동생이 데리고 온 남자 친구는 과연 누구인지 모두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일단 야외용 돗자리에서 어른들께 큰절을 올렸다. “그래, 일단 밥부터 먹으세.” 장모님의 첫마디였다. 처남네, 처형네 식구들도 그저 편하게 많이 먹으라는 말 몇 마디 건네신 게 전부였다. 식사가 끝나자 장모님이 다시 한 말씀 건네셨다. “여기 있어 봤자 불편할 테니, 가서 놀다가 오게.” 장모님 말씀대로 아내와 둘이 적당히 한 바퀴 돌고 어른들께 돌아갔다. “있어 봤자 불편할 건데 가서 더 놀다가 저녁 먹을 때 오게.”

다시 장모님 말씀에 아내와 계곡을 돌다가, 저녁 시간이 되어서야 다시 어른들께 갔다. 또 별말 없는 저녁 식사. 식사가 끝나고 나서야 장모님은 첫 질문을 하셨다. “그래, 자네 이름이 뭔가?” 만난 지 거의 6시간 만에 하신 첫 질문은 놀랍게도 그냥 이름을 물으신 거였다. “네. 권종국입니다.” “그래. 양반 성씨네.”

그게 끝이었다. 처음 인사를 드리는 거라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받게 될 것으로 짐작하고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나는 이름 물으신 것 외에 다른 질문이 없어 조금 기운이 빠지기도 했다. 그리고 자리를 떠날 무렵에서야 겨우 두 번째 질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 자네는 우리 딸이 마음에는 드나?” “네. 참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두 가지가 내게 하신 질문의 전부였다. 이후에 아내에게 들으니 장인, 장모님은 한 번도 자식이 데려온 사람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말씀이 없으셨다고 한다. 그저 자식들을 믿고 결혼을 허락하셨다는 얘기였다.

아내의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했던 기우를 다 날려버릴 수 있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는 장모님이 아내에게 한마디는 하셨다고 한다. “사람이 시커먼 게 생긴 건 별로네.”^^;;

그런 장모님과 장인어른의 믿음 덕분에 결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지금은 아이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지금도 무더운 여름날이 되면 계곡으로 인사드리러 갔던 그때가 떠오른다. “장인 장모님! 고맙습니다!”

 

강석문 작. <봄날> 68×50cm. 한지에 먹, 채색, 아크릴. 2011.

 

거머리 농활대여, 영원하라

손희정 33세. 특수교사. 경기도 이천시 송정동

갓 대학에 입학한 1999년.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경험해 보리라, 의욕에 가득 찼던 나는 망설임 없이 경남 창녕군 대합면 모지마을로 농활(농촌봉사활동)을 떠나게 되었다.

출발하기 전, 같은 마을로 배정된 사범대의 다른 과 사람들과 모여 우리 농활대의 이름을 ‘거머리 농활대’라 지었다. “거머리 농활대여~”로 끝나는 주제가도 만들어 부르며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도 즐기고, 처음 경험하게 될 세계에 대한 기대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웬걸! 도착해 보니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농촌의 쌓여 있는 일이란 만만치 않았고, 평소 힘에 부쳐 하지 못했던 일들을 농활대에 의뢰하는 어르신들의 요청이 쇄도하여 여름 땡볕 아래 오전, 오후 작업을 마치고 나면 파김치가 되곤 하였다. 농사일에 대한 경험이라곤 전무했던 경우가 대부분인 우리들은, 열심히 그러나 잘못된 방법으로 일을 하는 경우도 허다했는데 다행히도 어르신들은 그런 모습도 귀엽게 너그러이 이해해주셨다.

좁은 마을 회관에서 30명이 넘는 청년들이 필통에 꽉 찬 연필들처럼 잠을 자며 설익은 밥을 해먹고, 며칠 동안 씻지도 못해 정체 모를 냄새를 풍기며 생활하였지만, 우리가 먹는 음식이 얼마나 많은 노고 속에 생산되는지, 농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또 농작물 가격 하락 등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도 푸짐한 새참을 차려주시는 시골 인심에 감동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새록새록 기억나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들도 많았다. 자연 친화적 화장실과 밖에 줄서서 기다리는 이들이 부담스러운 나머지 큰일을 보는 횟수를 최소화하고자 수분 외에는 섭취하지 않다가 4일째쯤 생애 첫 기절을 했던 일, 결명자 잎들을 하나씩 “숨가라(심어라)”는 할머니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열심히 결명자 잎을 흙에 완전 파묻어 숨겨버렸던 일, A대원이 렌즈를 빼서 소주잔에 고이 담가 두었는데 B대원이 청소를 하다 문밖 멀리 내용물을 뿌려 버렸던 일 등등.

어느새 마지막 날을 앞두고 우리는 어르신들과의 마을 잔치를 준비했다.

우리는 춘향전을 준비했다. 양파 망으로 얼굴 가린 이몽룡과 터프하고 부산한 성춘향, 뜬금없는 뱀 장사까지 등장하는 엉뚱신기 춘향전을 보면서도 함께 웃고 울어주시던 마을 분들. 짧고도 길었던 농활의 추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뿐만 아니라 농활 첫날 ‘이렇게 힘드니 농촌으로 처녀들이 시집을 오지 않나 보다’ 생각했던 내가, 7년 후 그 옆의 시골 마을로 시집을 갔던 것이었으니~ 소개팅으로 만나 운명처럼 결혼한 남편이, 바로 그 옆 마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시댁에 갈 때마다 모지마을을 스쳐 지나며 뜨겁게 벅차오르던 1999년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뭐든지 열정적으로 열심히 하던 그 시절의 젊음’을 되새기다 보면 입가엔 미소가 지어진다. 그렇게 ‘거머리 농활대여~’라던 외침은 아마도 영원히 내 마음을 울릴 것 같다.

 

강석문 작. <독서도> 93×65cm. 한지에 먹, 채색. 2009.

 

한여름 밤의 불청객

조건 59세. 부동산업. 캄보디아 거주

캄보디아는 사시사철 더운 나라다. 그중에도 2월부터 4월까지가 제일 더운 여름으로, 건기이자 우기가 시작되는 5월 초까지가 여름의 절정을 이룬다.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더운데 우리 피서나 갈까?” “웬 피서?” “더워서 도저히 잠을 못 자겠어. 올여름이 유난히 더운 것 같아. 갑시다, 시아누크빌로!”

우리는 열대의 나라에서 때아닌 피서길에 올랐다. 약간은 흥분과 설렘으로 7시간의 여행 끝에 해변에 도착하여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겸 게스트 하우스에 여장을 풀었다. 그날 밤 우리는 사는 얘기며 고국에 대한 향수며 많은 얘기들로 밤을 지새우며 술을 마셔댔다.

그랬다. 캄보디아 생활 8년 차, 외국에서 바쁘게 살다 보니 이런 시간을 낸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한껏 낭만에 젖어 한국에서 불렀던 해변의 노래들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식당 주인아주머니랑 모닥불도 피워놓고 달려드는 모기와 전쟁도 치르며, 야자수 늘어진 해변에서의 밤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얼마나 마셔댔는지 바닥에 뒹구는 술병은 서른 병까지 세고 더 이상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내가 잠을 깬 것은 방문 앞에서 질러대는 외마디 비명 소리에 놀라서였다. 뛰어나가 보니 후배가 어느 남자에게 맞고 있는 게 아닌가. 우선 때리는 남자를 말려 자리에 앉히고 흥분을 가라앉힌 다음에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도 한국 사람으로 식당 아주머니의 남편이었다.

“아니, 잠을 자고 있는데 저××가 우리 침대에서 자고 있지 뭡니까. 그것도 우리 와이프하고 나, 사이에서 말이요.” 식당 아주머니가 옆에서 거들었다. “그 방이 원래 가족들이 쓰게 하기 위해 가운데에 문을 만들어놓았어요. 그걸 잠가 놓았어야 하는데 청소하는 아이가 깜빡하고 열어 놓았었나 봐요. 저 양반이 술이 취해 화장실에 갔다 오면서 우리 부부 가운데로 들어가 잤던 모양이에요.”

사태는 파악이 되었다. 나는 그분에게 정중히 사과를 드렸다. “죄송합니다. 저는 저 친구의 선배인데 술이 취해 들어가지 말아야 할 방에 들어갔습니다. 교육을 잘못시킨 저를 탓하시고 너그럽게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아침부터 사과의 술판이 벌어졌다. 모두가 황당해했지만 사실 타국에서 만난 교포들의 그 마음에 무슨 악의가 있겠는가.

남편분 역시 결국엔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이 술 마시고 또 들어올 겁니까?” 했고, 터져 나온 웃음소리가 시아누크빌의 해변가에 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강석문 작. <사철나무> 93×65cm. 한지에 먹, 채색.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