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오지 않을 것처럼 오늘 감사하며 살기’ 사형수들에게 배우다
양순자 73세. <어른 공부> 저자
내가 사형수들을 처음 만난 것은 서른일곱 살 때였다. 젊은 나이에 나는 겁도 없이 서울구치소 사형수 담당 종교위원을 자원했다. 내 삶이 너무 버거워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을 때였다. 사형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집행을 기다리고 있을까, 알고 싶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을 때, 사형수들을 만났다.
사형 선고를 받고 나면 정신적으로 평안할 수가 없다. 잠을 자면서도 악몽에 시달린다.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다.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집행일을 두려워하면서.
종교위원은 매주 정해진 날에 찾아가 사형수를 면담하고 신앙 상담과 함께 위로하는 시간을 갖는다. 불안하고 고통스러워 잠 못 이루는 사형수를 형제처럼 다독거리면서 한 명의 사형수와 2~3년을 함께 보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 사형수를 만나 그가 죽는 그날까지 평안한 마음으로 생을 정리하도록 아주 조금 도움을 주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내가 30년 동안 종교위원을 했다 하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봉사를 했냐고 묻는다. 그것은 절대 잘못된 말이다. 그 시간은 봉사가 아니라 배움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의 증오를 한 몸에 받은 죄인이었지만 집행장 참관인들에게 감동을 주고 떠난 박철웅을 나는 기억한다. 1981년, 그러니까 벌써 30년이 넘은 일이다. 그를 2년 6개월간 서울구치소에서 상담했다. 한 사람을 바르게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건만, 사형수 박철웅은 구치소 안에서 동료 재소자들을 회개하게 하고 변화시키면서 그 자신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 사형을 면해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세상에 더는 미련 없습니다. 저만큼 세상 쾌락을 누려본 사람은 없을 겁니다. 철없던 때는 그보다 더한 행복이 없는 줄 알았지요. 구치소에 들어와서야 알게 됐습니다. 내가 누렸던 쾌락이 나를 죽음의 길로 몰고 갔다는 것을요. 이제 죽음 앞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감사함을 깨달았습니다. 세상의 쾌락과 지금의 감사함을 어찌 비교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사형수들에게서 감사함을 배웠다. 그들에게서 감사함을 배우며 ‘나’라는 사람도 변했다. 진정한 감사는 가진 것이 없어도 느낄 수 있는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나는 참으로 감사할 것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19년 된 고물차가 시동이 걸릴 때, 예금 계좌에서 필요한 돈을 인출할 때, 좁은 수납공간에 내 물건들이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볼 때….
이처럼 일상에서의 작은 감사와 마주할 때마다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꼈다. 세상엔 기뻐할 일이 너무나 많았고, 행복의 원동력은 바로 감사였다.
사형수들을 만나면서 무엇이 정말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풀어서 풀릴 수 있는 것은 괴로움이 아니요, 참고 기다려서 해결되는 것이면 고통이 아닌 것이다.
사형수들과 긴 세월을 함께해서일까, 내 머릿속에는 이런 말이 박혀 있다. ‘나는 언제든 죽을 수 있다. 그러니 내 사전에 내일은 없다. 바로 지금이 언제나 전부다.’
조금 먼 길을 나설 때는 물론이고 잠깐 외출을 할 때도 나는 항상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한다. 깔끔하게 정리해놓고도 현관에 서서 한 번 더 집안을 둘러보곤 한다. 마치 다시 돌아오지 못할 마지막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12월이 되면 의식처럼 하는 일이 있다. 카드나 연하장을 보내는 대신 나 때문에 마음 상한 사람이 있는지 헤아려보고 그 사람에게 편지를 쓰는 것이다. 평상시에도 마음에 걸리는 일이 생기면 미루지 않고 바로 해결해 버린다. 마치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사는 것이다. 되도록이면 약속은 하루에 하나만 잡는다. 바쁘다고 적당히 만나고 나면 반드시 후회가 남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칠십 평생 병원도 모르고 살만큼 건강하다 자부했던 내가, 2년 전 암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의사가 두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이미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 의연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형수들에게 일러준 대로 나도 가면 되는 것이다. 오늘 이렇게 살아 있으니 오늘이 있을 뿐이요, 내일은 와봐야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 이 순간이 내 생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렇게 암도 함께 안고 산다.
열여섯 살 우연히 다가와 나의 전부가 된 야구
이연수 49세. 주부.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야구에 썩 관심이 없었던 그에게 그 야구장 불빛은 자유롭게 생활하던 시절에 대한 향수이자 그리움이었고 다시 돌아갈 길을 밝혀주는 등대였다고 한다.
올해 마흔아홉인 나는 내 또래 중년 여성들과는 조금 다른 일상을 즐긴다. 부지런히 집안일을 마치고 저녁을 준비해 놓은 후 야구장으로 간다. 그리고 집에 오면 간단한 경기 리뷰와 후기를, 포털사이트 야구 게시판과 개인 블로그에 올린다.
그렇게 내 삶의 중심에는 ‘야구’가 중요한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연수를 따진다는 것이 좀 우습지만 야구에 푹 빠져 산 지 올해로 고작(?) 33년 정도.
내가 야구라는 것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것도 그 야구장 불빛 때문이었다. 1979년 중3이던 열여섯 살, 한창 혼자 영화를 보러 다니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나는 그날도 학교와 집 중간에 있던 극장으로 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버스 속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고교 야구 중계가 매우 열광적이었고 운전기사 아저씨의 표정 또한 무아지경이었다. 얼마나 재미있기에 저럴까, 갑자기 그 이유가 궁금해졌는데 마침 버스가 동대문운동장을 지나갔다. 그 버스를 탈 때마다 동대문야구장의 불빛을 무수히 봤지만 그 라디오 중계 소리와 야구장 불빛에 끌려 극장이 아닌 야구장이라는 곳에 처음으로 들어가게 됐다. 그렇게 야구는 우연히 그러나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야구에 더 빠져 살라는 신의 계시였나, 하필 뺑뺑이 추첨으로 진학하게 된 고등학교가 잠실야구장 건너편에 있는 여고였고 1982년에 우리나라에도 프로야구가 생겼다. 당시 고3이었던 나는 입시 공부를 하랴, 프로야구를 보랴, 바쁜 일년을 보냈다.
고교 야구를 보던 시절에는 단순히 ‘야구’라는 종목에 미쳐 살았지만 프로야구가 생긴 이후에는 ‘오비베어스’에 미쳐 살았다. 왜 여섯 개의 팀 중에서 오비베어스를 낙점(落點)했는지 그 이유는 뚜렷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야구가 우연히 다가온 것처럼 우연히 내게 찍힌 팀이 바로 오비베어스였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운명처럼 다가온 오비베어스는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우승팀이 되었고, 야구장에서 직접 우승의 기쁨을 함께했던 경험은 첫사랑보다 더 의미 있는 순간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을 하고 두 아이를 낳으면서 살림과 육아에 지친 내게 야구는 한낱 사치에 지나지 않았다. 집에서 고작 이십여 분이면 갈 수 있는 야구장도 어느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 사랑 야구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다시금 야구와 사랑에 빠지기로 결심했고 그런 내 마음이 통했는지 1995년, 원년 우승 이후 13년 만에 오비베어스는 두 번째 우승을 했다. 나는 그 순간 또한 야구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렇게 또 그날의 야구는 삶에 지친 나에게 다시금 큰 힘을 불어준 내 어머니와 같은 존재가 됐다.
야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얘기를 할 때 가장 흔하게 나오는 말이 ‘야구는 인생과도 같다’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다. 그렇게 진부하게 얘기하지 않으려고 해도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게 되는 것은 정말 그 말이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맞다! 야구는 인생과도 같고 완전히 끝날 때까지는 결코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공으로 하는 스포츠 중에서 공이 아닌 사람이 홈에 들어와야만 득점이 나는 유일한 경기이기도 하다. 나는 야구 자체를 그냥 미치도록 좋아한다. 거기서 내 인생을 본다. 어느새 야구는, 그리고 두산베어스는 그렇게 내 그림자와 같은 내 동체(同體)가 되었다.
내 인생을 바꾸어주신 선생님
함은영 44세. 충남 태안군 소원면
바로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님. 과목 담당은 국어이고 글도 직접 쓰셨다. 나는 그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지만 선생님께서 권면을 해주셔서 다음 해 고등학교에 들어갔고 방송통신대학에 들어가 향학열을 불태울 수 있었다.
선생님은 힘들면 언제든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라고 하셨고 나는 스승의 날이면 늘 찾아뵈어 좋은 말씀도 듣고 힘을 얻어 돌아오곤 하였다.
그런 어느 날 선생님께서 선을 한번 보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당시 나는 동생들이 넷이나 되는 터에 어머니를 도와 가장의 책임을 져야 하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내가 이러한 힘든 생활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선생님 댁으로 가니 신랑 될 사람과 부모님께서 먼저 와 계셨다. 신랑은 목소리가 조용하고 술 담배를 아니하는 건실한 청년이었고, 시부모 되실 분들의 인품이 인자하시어 나의 어머님께서도 선생님 말씀이 틀린 데가 없다 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사월에 만나 유월에 결혼을 하였다.
신랑은 부모님께 순종하며 부모님의 일을 도우며 성실하게 사는 사람이다. 인터넷이나 TV를 보면 남편과 성격이 안 맞는다고 이혼하는 사람도 있는데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잘 맞는 사람으로 짝을 지어주셨는지, 선생님께 정말 감사하다.
몸이 약해서 아이를 낳지 못할까 봐 나는 물론이고 시어른들께서도 걱정을 하셨는데 오히려 진통도 별로 안 하고 쉽게 아들을 낳고 세 살 터울로 딸도 낳았다. 시부모님께서 직접 걷어 올린 싱싱한 생선과 정성껏 가꾸신 곡식과 채소로 훨씬 건강한 몸이 된 덕분인 것 같다.
시집을 오면서 시할머니를 모시고 십육 년을 살았는데 작년 여름에 시할머니가 노환으로 돌아가셨다. 힘들고 어려운 점도 있었으나 시할머니를 모시며 사는 동안 생활의 지혜도 터득하고 사랑도 많이 받았다.
물론 내가 자란 곳도 아니고 시골이다 보니 친구도 없고 외로울 때도 있지만 그럴 때면 선생님과 메일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요즘은 요양보호사로 일을 하는데, 지난 4월 말에 갑자기 선생님께서 전화를 하셨다. 여기 천리포수목원으로 친구들과 내려오고 계시다는 전화였다. 몇 해 전까지 가족 분들이 매년 두세 번씩은 오시곤 했는데 사부님 돌아가신 후에는 통 오시질 않았던 터였다. 선생님이 오신다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았다. 요양원에서 조퇴를 하고 나와 수목원으로 달려갔다. 수목원에서 만나 버스 타고 떠나실 때까지 두 손을 놓지 않고 꼭 잡고 다녔다. 너무 반가우니 눈물이 났다.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별명 하나를 붙여주셨다. ‘천리포의 작은 천사’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리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선생님의 사랑을 더더욱 느끼게 됨을. 학창 시절에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선생님들, 그중에서도 김재숙 선생님은 내 인생을 바꾸어주셨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