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다섯 명의 현인이 삽니다

백일성

거실에 앉아 있는데 부모님 방이 시끄럽습니다. 두 분 다 극에 대한 몰입도가 굉장하십니다. 슬그머니 방으로 들어가서 두 분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극이 끝나갈 쯤 한마디 했습니다. “만날 그게 그거고 뻔한 드라마 뭐가 그렇게 재미있다고 보세요?” 어머니가 힐긋 고개를 돌리고 한마디 합니다. “그래서 너는 술맛을 몰라 만날 처먹고 다니냐?”

43살 범인이 물었습니다.

“뻔한 드라마 뭐 하러 보십니까?”

석수동에 75살 정분순 현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그 아버지는 아직도 아침에 눈뜨면 밥 달라고 한다…

83년 먹어 온 밥맛이 궁금해서 밥 달라고 하겠냐?

연속극도 다 그런 거다.”

아~~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저녁에 동네 아는 사람들과 술 약속이 있어서 아내와 같이 나가려고 하는데 아내가 거울 앞에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를 반복합니다. “자기야 이 옷 뚱뚱해 보이지?” “아냐 예뻐.” “안 뚱뚱해 보여? 뚱뚱해 보이는데?” “아니라니까.” “좀 이상한데… 뚱뚱해 보이지 않아? 여기 옆 라인 잘 봐.” “괜찮다니까~~ 늦겠다.” “딴 거 한번 입어볼까?” 참다 한마디 했습니다. “열라~~ 뚱뚱해 보여~~~ 됐냐?” 아내가 옷장 문을 다시 열며 중얼거립니다. “거봐… 뚱뚱해 보인다니까.”

43살 범인이 물었습니다.

“아줌마가 뭐 그리 거울 앞에 오래 있습니까?”

석수동 43살 복희 현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부터는 끝까지 예쁘다 그래라.”

아~~~~~ 네….

고1 아들 녀석이 컴퓨터를 하고 있습니다. 휴일이라 좀 풀어주려고 해도 너무 오래 하고 있는 거 같아서 잔소리를 시작했습니다. “형우야, 아무리 휴일이지만 주절주절… 그리고 취미 생활이나 독서라든지 주절주절… 운동도 하고… 주절주절… 인생이 말이다… 주절주절….” 5분간의 주절거림에 아들 녀석이 짧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43살 범인이 물었습니다.

“내 말 듣습니까?”

석수동 17살 형우 현인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묵언수행 중인 듯합니다.

아~~~~ 더럽게 말 없네, 시끼.


중2 딸아이가 휴일 아침부터 커피를 타오고 흰머리도 뽑아주고 면봉까지 들고 귀를 대라고 합니다. 과도한 서비스에 한마디 했습니다. “뭐냐? 원하는 게?” 딸아이가 면봉을 살짝 거두고 속삭입니다. “우리 오빠들 콘서트하는데 티켓하고 엄마 설득 좀….” 한 달 전부터 듣던 얘기라 내심 못 이기는 척 짧게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딸아이가 짧은 환호성을 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친구한테 전화 한다며 내달았습니다. 속으로 생각했습니다.‘반대편 귀까지 한 다음에 승낙할 걸.’

43살 범인이 물었습니다.

“중학생 딸들에게 아빠란 존재는 무엇입니까?”

석수동 15살 송이양이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다루기 쉬운 남자.”

아~~~~ 내가 쉬운 남자였구나.

밤에 아버지가 주방에서 서성이십니다. 곧 눈에 익은 장면을 연출하십니다. 아버지 전용 커피 잔에 소주 한 잔을 찰랑찰랑 담으셔서 한 모금 하십니다. “아버지, 이번 달부터 금주하신다면서요?” 갓김치 몇 조각을 그릇에 담으시고 식탁에 앉으시며 아버지가 한마디 하십니다.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말이다… 사람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 같더구나… 술을 술이라고 생각하면 술이지만 술을 물이라고 생각하면 물이 되는 거 아니겠냐? 이걸 물이라고 생각하고 먹으면 더 이상 술이 아닌 거지 그냥 물인 거야… 물!”

43살 범인이 물었습니다.

“그럼 아버지는 왜 물을 드시고

김치를 안주 삼아 드십니까?”

석수동 83세 백영춘옹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김치 먹고 물 먹는 거다….”

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요… 술도 물이로다….

올해 마흔세 살의 백일성님은 동갑내기 아내와 중딩, 고딩 남매 그리고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가장입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이야기 방에 ‘나야나’라는 필명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으며, 수필집 <나야나 가족 만만세>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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