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김혜진 사진 최창원
“4년간 경비 업체에서 일했어요. 청와대 경호원으로 일하는 삼촌이 멋있어 보여서 경호원이 되고 싶었던 건데 생각했던 것과 현실은 너무 다르더라고요. 영화에 나오는 보디가드처럼 누군가의 안전을 지켜주는 게 아니라, 대부분은 기계가 다 해주고 출동해서 가면 잔심부름이나 시키고. 회의를 많이 느꼈죠.”
박상준씨가 동대문 시장과 연이 닿은 건 4년 전. 이곳에서 일하는 친구를 만나러 온 게 계기가 됐다. 보기엔 1~2평 남짓한 자그마한 매장이지만 “열심히 하면 한 만큼 보람 있다”는 주위 분들의 조언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다”던 그의 바람과도 통했다. 박상준씨의 후배 라재원씨도 자기 얘기를 덧붙였다.
“친구들 보면 좋은 대학 나와서 취업하는 게 다잖아요. 자기가 뭘 해야겠다는 게 없고, 그게 싫었어요. 부모님은 공부해라, 했지만 내 인생을 남들처럼 떠밀려서 살고 싶지 않았어요.”
라재원씨는 옷을 사러갔다가 가게 직원으로부터 옷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듣고 재미를 느껴 동대문시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한다. 평소 월급의 반은 옷을 살 정도로 옷에 관심이 있고 좋아했던 자신을 떠올리며 순간 ‘이거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당시 일식집 주방에서 일하면서 월급도 괜찮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에 대한 의문은 끊이지 않았다 한다.
두 사람의 인연은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상준씨가 있는 점포로 라재원씨가 후배 점원으로 들어오면서 만나게 된 것. 라재원씨는 원단 보는 일, 영업 등을 세세하게 알려주었던 박상준씨를 가리켜 “든든한 지원군이자 의지가 되는 고마운 형”이라고 말한다. 이에 박상준씨의 라재원씨에 대한 칭찬이 이어진다.
“대개 여기 오는 젊은 애들 보면 10명 중 8명이 이틀 만에 그만두거든요. 그만큼 힘든 일이에요. 이 친구도 보니까 얼굴이 하얗고 비리비리하게 생겨서 며칠 못 버티고 갈 줄 알았는데, 의외로 항상 웃으면서 열심히 하는 걸 보니까 마음을 열게 되더라고요.”(웃음)
이곳에 처음 들어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속칭 ‘밑바닥 일’은 바로 원단 정리다. 밤새 지방에서 올라온 10~13kg이 넘는 수많은 원단을 창고로 나르고 자르고 정리하는 것. 하루에 많이는 200절(개)까지 나르는 등 고된 작업이지만,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도 묵묵히 하시는 걸 보면 마음을 다잡게 된다고 한다.
“시장 일은 다음 날이 없어요.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날 일은 그날 마무리해야 다음 일을 할 수 있거든요. 부지런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는 곳이죠. 나이, 지위 관계없이 사장님도 직접 원단을 나르는 걸 보니까 정말 대단해 보이고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하루 일과는 아침 8시부터, 하지만 퇴근 시간은 일정치 않다. 창고의 원단 정리, 점포 관리, 거래처 관리, 영업 등을 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하루가 간다. 일주일에 2~3번 동대문 밤시장(의류도매시장)으로 영업을 나가는 날엔 새벽 1시까지 일하는 게 다반사. 때론 힘들지만 발로 뛴 만큼 거래처 사장님들이 먼저 알아봐 주신다거나, 자신들이 다룬 원단이 옷으로 만들어지고 그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을 볼 때면 보람을 느낀다 한다.
“예전 같으면 조금만 힘들면 그만뒀을 거예요. 근데 이젠 그런 삶이 제일 두렵다는 걸 알죠. 인내가 주는 기쁨을 배우는 것 같아요. 요즘은 새벽 5, 6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떠지는데 부모님이 부지런해졌다고 인정해 주실 때 기분 좋죠.”
두 청년은 “몸은 고되지만, 선택한 일에 대해 후회가 없다”고 했다. 오히려 막연히 남들처럼 살아야겠다며 직장 생활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게 너무 아까웠다는 그들은, 이곳에서 결코 돈으로는 따질 수 없는 소중한 인생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아무것도 없이 하나하나씩 일궈가면서 자수성가를 하신 어르신들을 뵈며 삶의 겸허함을 배우고, 자신들의 처지를 잘 이해해주시는 동료이자 선배들의 깊은 애정 속에서 사람 사는 정을 깨닫고, 과거에 무슨 일을 했던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 땀의 결실을 인정해주는 이곳이 그들에겐 가장 소중한 일터이자 삶의 현장이라 한다.
이들의 앞으로의 계획은 동대문시장에 내 가게를 차리는 것.
“어른이 되어가는 거 같아요. 예전엔 참 개념이 없이 살았거든요. 지금은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제 모습이 참 좋아요.”(라재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니까 마음 자세가 달라져요. 하나라도 더 알아야 손님들한테 다가갈 수 있으니까 뭐든지 열심히 배우려고 하죠. 열심히 해서 앞으로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어요.”(박상준)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서 망한 사람을 본 적이 없어요” 하며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는 박상준, 라재원씨. ‘뿌린 만큼 거둔다’는 진리를 매 순간 목격하며 살아간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행운아가 아닐까. 비좁은 공간, 매캐한 먼지 속에 하루를 보내면서 흘리는 땀방울들이 진짜 삶의 결실로 무한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