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꼴망태를 메고 아버지 뒤를 쫓아 나섰다. 안개가 유난히 자욱한 저수지 길을 돌고 돌아 산을 오르면, 한 편의 수묵화 같은 풍경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 기억 때문인가. 지금도 안개 자욱한 풍경과 마주하고 있노라면 그 시절의 풍경들이 아련하게 다가온다. 그 떨림을 느끼며 새하얀 화선지에 먹으로 채색하듯 오늘도 셔터를 누른다.
자연은 늘 변화한다. 한 번도 똑같은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분명 같은 장소임에도 똑같지 않다. 어제는 없던 구름이 지나가든, 순간 불어오는 바람에 낙엽이 흔들리든, 자연은 매 순간 변화한다. 여백이라는 주제로 사진을 찍는 동안 자연을 이해하며 순응하게 되었다. 화가는 작가의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지만, 사진가는 자연이 응해주지 않으면 그 어떠한 사진도 찍을 수 없다. 그 자연의 오묘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마음은 자연의 텅 빈 여백을 닮아갔다. 삶이 되어갔다.
여백은 비어 있는 미완성 상태 같지만 보는 사람의 생각과 감성에 따라 채울 수도 있고 비울 수도 있는 무한의 공간이다. 가득 차 있으면 담을 수 없듯이 비어 있지 않으면 채울 수도 없다. 여백은 누구에게나 무한한 상상력을 주고 그 안의 주인공이 되게 하며 자유롭게 생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