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백일성
17년 결혼 생활을 하다 보니 가끔 아내가 하는 말 중에 틀에 박힌 말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런 말투의 원조를 한번 찾아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만 해도 몇 가지 그런 말투가 나왔습니다.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하고 거실을 한가롭게 어슬렁거리는 제 곁으로 아내가 다가옵니다. 그리고 한마디 던집니다.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나한테 할 말 없어?…… 이 말…… 이 말 어떤 아줌마가 처음 한 건지? 그 집 남편은 아직도 묵비권을 행사하고 있는지? 아니면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참회와 갱생의 길을 걷고 있는지? 도대체 이 말을 들으면 어느 시점부터 생각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 할 말 없다 그러면 정말 더 이상 안 물어 볼 건지?……
“할 말 없냐니까?” 재차 이어지는 아내의 질문에 17년 차의 유연함으로 대답했습니다. “음… 사랑해…” 썩 분위기가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 사랑은 일단 좀 있다 하고 여기 좀 앉아봐.”
여기 잠깐 앉아봐…… 이 말…… 이 말 어떤 아줌마가 처음 했는지? 정말 잠깐 앉았다만 일어나도 되는지? TV 보면서 들어도 되는지? 소파에 기대어 조금 삐딱하게 누워서 들어도 되는 말인지? 물론 뻔하게 지난달 카드 명세서가 제 앞에 놓여졌습니다. 잠깐이란 아내의 말은 어디 갔는지 다리가 저려옵니다. 마침 반가운 인물이 현관에 들어섭니다. 수학 학원 테스트를 받고 늦게 들어온 고1 아들 녀석입니다. 아내의 관심이 돌아갑니다.
“야 너 지금 몇 시야? 꼴랑 수학 한 과목 테스트받는데 뭐 이리 오래 걸려? 너 어디 딴 데 들렀다 왔지?” 아들 녀석이 뭐라고 웅얼웅얼거립니다. 변성기 지난 지도 꽤 됐는데 요즘 아들 녀석만 들어오면 집안이 알타미라 동굴이 됩니다. 점점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듣겠습니다.
“뭐라는 거야? 너 이리 와서 엄마 눈 똑바로 쳐다보면서 얘기해봐.”
엄마 눈 보고 얘기해~~…… 이 말……이 말을 처음 한 엄마는 누군지? 아들 눈만 보면 정말 다 알 수 있는지? 그러다 눈 동그랗게 치켜뜬다고 패지는 않는지? 아들 녀석 어릴 때나 눈 내려깔면서 먹혔는지 몰라도 지금 고1 아들 녀석 한참 올려다보면서 고개는 아프지 않은지? 그리고 쟤는 왜 앉아서 얘기 안 하는지? 이 집 변변찮은 남자들의 훈계를 접고 잠깐 잠잠해지려는 찰나… 중2 딸아이가 장롱을 정리하다 말고 한마디 합니다.
“엄마 나 교복 조끼 사야 돼.” “뭔 조끼를 또 사?” “니트로 된 거 말고 단추로 된 게 유행이야. 그걸로 다시 사야 돼. 그리고 평소 입을 옷이 하나도 없다. 좀 사줘.”
아내가 한숨을 쉬며 한마디 합니다. “엄마 팔아서 사라, 가시나야.”
날 팔아라…… 이 말…… 이 말 처음 한 아줌마는 지금쯤 새우잡이 하고 계신지? 정말 팔아도 되는지? 팔면 얼마 받을 수 있는지? 옥션에다 내놔야 되는지 아님 벼룩시장에 내놔야 되는지? 전봇대에 전단지라도 붙여야 되는지……
이래저래 저녁 시간이 지나고 아내와 둘이 거실에서 TV를 보는데 주인공 남녀가 수줍은 키스를 합니다. 그 달달한 장면에 아내가 살며시 얼굴을 제 어깨에 기댑니다. 그리고 절 부릅니다. 아내를 잠깐 돌아봤습니다. 분명 아내와 눈이 마주치긴 했습니다. 그냥 뭐 그러고 다시 TV를 봤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한마디 합니다.
“술이나 한잔하고 들어와야 이쁜 마누라네 뭐네 찾고 그냥 맨정신에 좀 찾아봐라. 무슨 마누라 쳐다보는 눈빛이 여동생 쳐다보는 눈빛이냐?”
여동생 보는 눈길…… 이 말…… 이 말 누가 처음 했는지?…. 이 말은 제 아내가 처음 한 건지? 내가 여동생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여동생은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 건지? 아내를 여동생 보듯이 보면 정말 안 되는 건지?…… 지나가는 아들 녀석에게 물었습니다.
“넌 여동생을 어떻게 보냐?”
마침 딸아이가 오빠 옆을 지나칩니다. 아들 녀석이 물끄러미 딸아이를 바라보더니,
“너……… 집에 있었냐?” 이런……….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