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주희 26세. 권투 선수, 라이트플라이급 세계 챔피언
매일 아침 나는 15킬로미터를 달린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달린다. 프로 데뷔 이후 지금까지 계속되는 하루의 시작이다. ‘오늘 하루쯤 빼먹을까?’ 하는 생각이 열 번도 더 들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나와의 약속을 떠올린다. 매일 아침 달리는 이유는 심장을 하나 더 만들기 위해서다. 10라운드를 뛰는 프로 선수가 되려면, 심장이 하나로는 모자란다. 강철 같은 심장을 만드는 건 하루하루 흘리는 작은 땀방울이다.
중학교 2학년. 한창 공부할 나이에 학교만 마치면 체육관으로 향했다. 작은 주먹에 피멍이 들 때까지 서너 시간씩 샌드백만 쳐댔다.
나는 열두 살 때 이미 간절히 원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아이었다.
IMF로 공장이 문을 닫자 아빠는 실업자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아빠와 사이가 안 좋았던 엄마는 집을 나갔다. 그런 데다 아빠는 당뇨에 치매 초기 증상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 했다. 5살 많은 언니가 나와 아빠를 보살피며 생활을 꾸렸다. 이혼한 부모, 벗어날 수 없는 가난…. 남들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삶이 나에게는 까마득히 높이 있었다.
그런 내가 운명처럼 권투를 만났다. 서너 시간씩 숨이 목까지 차오르도록 운동을 하고 나면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나는 30분 동안 줄넘기를 하라 하면 1시간을, ‘하나둘’ 연습을 1시간 하라고 하면 3시간을 하곤 했다.
‘나는 내일, 오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오늘이 아무리 고되고 힘들어도 희망을 꿈꿀 수 있었다. 그렇게 8개월 가까이 줄기차게 기본기만 익혔다.
어느 날 관장님이 내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세계 챔피언이요.”
아주 오랫동안 준비하고 있던 것처럼 나는 불쑥 대답했다. “나랑 꿈이 같네. 우리 같이 해보자.”
하지만 관장님은 권투를 가르쳐줄 생각은 않고 공부하라는 잔소리만 해댔다. “권투는 힘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전략으로 하는 거”라며 삼국지와 육군 군사작전 교본 같은 책을 읽게 하셨다. 새 기술을 가르쳐줄 생각은 않으시고 기본기만 지독하게 시키셨다.
왜 새 기술은 안 가르쳐주시는지, 혹시 나에게 실망하신 건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게 세계 챔피언을 만드는 관장님의 방법이었다.
그렇게 몇 년간의 트레이닝을 거치고 드디어 결전의 날이 다가왔다. 2004년 IFBA(국제여자복싱협회) 라이트플라이급 세계 챔피언전. 상대인 멜리사 세이퍼는 미국 선수로 8전 전승의 권투 천재였다. 모두 멜리사의 압승을 예상했고, 내가 이길 거라고 보는 사람은 관장님 한 분밖에 없었다. 관장님은 멜리사에 대항하기 위해 스타일의 변화를 요구했다. 긴 팔을 이용해 원거리에서 치고 빠지는 기술 대신, 1라운드부터 맞고 다운되는 한이 있더라도 바짝 접근하라고 주문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근접해서 멜리사를 강하게 압박해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멜리사도 나를 연구했다면, 내가 긴 팔을 이용한 잽으로 도망가는 스타일의 권투를 할 것이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1라운드부터 나는 멜리사의 예상을 비웃듯 밀착해 들어가서 복부 기술을 구사했다. 멜리사는 내가 가까이 붙어 있었음에도 제대로 한방을 먹이지 못했다. 결국 나는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만 18세 최연소로 손에 쥔 벅찬 타이틀이었다.
그토록 꿈꾸었던 세계 챔피언. 챔피언이 되면 마냥 행복해질 줄로만 알았는데,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방어전을 치를 때마다 발톱이 6~8개씩 빠져나갔다. 발톱이 빠져도 훈련을 쉴 수는 없었다. 2년 후에는 급기야 오른쪽 엄지발가락 뼈를 3분의 1이상 긁어내는 수술을 받아야 했다. 빠진 발톱으로 세균이 침투해서 염증을 일으켰던 것이다.
수술이 끝나자 오른쪽 엄지발가락은 이제 반쪽도 남아 있지 않았다. 도저히 권투를 포기할 수 없어, 훈련을 시작했지만 균형감은 엉망이었고, 움직임이 둔해진 건 어쩔 수 없었다. 매일 밤을 주저앉아 가슴을 치며 울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시합을 해낼 수 있을지 너무 막막하고 무서웠다.
하루는 관장님이 체육관에서 가장 무거운 덤벨을 들고 오라더니 무겁냐고 물었다. 무겁다고 하자 관장님은 축 처져 있던 덤벨을 있는 힘껏 받쳐 올려주었다.
“아직도 많이 무겁니? 너 혼자 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여태 우리 둘이 해왔고 앞으로도 둘이 하는 거야. 이렇게 내게 의지해. 그래야 이겨낼 수 있어.”
그날 이후 몇 개월 동안 나는 이를 악물고 재활을 견뎠다. 5kg짜리 모래주머니를 찬 채 한강변을, 도봉산을 절뚝거리며 걸어 다녔다. 그러면서 예전의 기량을 서서히 회복해갔다.
9개월 후, 나는 WBA 챔피언 타이틀전에서 상대 선수를 어렵지 않게 이기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리고 작년 9월에 치른, 챔피언 타이틀 4개가 걸린 시합….
도전자 주제스 나가와의 좋은 펀치들이 사정없이 들어왔고, 4라운드 때는 왼쪽 얼굴이 화산처럼 밀려 올라간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피가 흐르기 시작해 타월 두 개를 적셨다. 도전자도 나만큼이나 절박했을 터, 상대는 부상당한 곳을 계속 공격해왔다. 왼쪽 눈은 아예 밀려 올라가 튀어나올 듯했고, 멀쩡했던 오른쪽 눈에도 이상 신호가 왔다. 아직 경기가 반이나 남아 있는 상황에서 주심은 링 닥터를 불렀다. 나는 ‘할 수 있다’고, ‘괜찮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1분쯤 지난 뒤, 주심이 다시 경기를 중단시켰다. 모두가 그 상황에서는 멈추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삶에도 연습이 있다면 그만둘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은 영원히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절대 물러설 수도 없고, 절대 질 수도 없었다. 계속 난타전을 치렀으므로 7라운드부터는 둘 다 체력이 바닥으로 내려가 있었다. 이제부터는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승자가 된다.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오랜 연습으로 몸에 밴 본능은 나를 움직이게 했다. 후반으로 갈수록 나의 공격은 살아났다.
10라운드, 마지막 1분.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순간 시합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승리의 여신은 내 손을 들어주었다. 나는 챔피언 벨트를 지켜냈다. 이 시합을 통해 4개 기구 통합 챔피언에 올랐고, 총 6개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최초로 따내는 기록을 세웠다.
살면서 다가오는 순간들은, 그것이 좋든 싫든 맞이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또 떠나보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왜 하필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 태어났을까? 왜 하필 무책임한 엄마, 능력 없는 아빠를 만났을까? 이런 것들은 답을 구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너무 억울하기 때문에, 너무 아프고 힘들기 때문에’라는 말도 이제는 하지 않을 것이다. 주저앉고 싶을 때 한 발짝만 더 나가고, 한 번만 더 손을 뻗으면 권투는 이긴다. 아마 삶도 그럴 것이다.
앞으로도 나의 도전이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다만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건 내가 흘리는 땀방울이라는 것. 계속해서 땀을 흘리는 한 나의 드라마도 계속된다는 것. 어떤 순간이든 도전함으로써 가장 빛나는 사람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자료 제공 <할 수 있다, 믿는다, 괜찮다> 다산책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