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엄홍길. 1985년 첫 등정 이후 38번의 도전 끝에 2007년,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16좌 등정’ 기록을 세운다. 그 모든 것이 산이 받아주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하는 그는 이제 산이 보여준 그 큰 배려와 사랑을 히말라야에 사는 사람들과 동료들에게 나누려 한다. 새로운 인생길, ‘엄홍길 휴먼재단’이란 17번째 봉우리를 향해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는 엄홍길 대장을 만나보았다.
글 김혜진, 사진 홍성훈
+ 지구상 가장 높고 험준한 히말라야 8000m 산 16개 봉우리를 오른 산악인 엄홍길.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도전장을 내민 이후 2007년 마지막으로 16좌 로체샤르 등반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였다.
“히말라야는 왜 나를 살려서 보내준 것일까….” 22년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성취했다는 기쁨도 잠시, 돌아보면 인고와 고통의 세월이었다. 38번의 도전, 20번 등정과 18번의 실패. 그 과정에서 후배 6명과 셰르파(Sherpa, 히말라야 산악 등반 안내인) 4명을 먼저 보내야만 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히말라야를 오르지 않는다. 하지만 중요한 또 하나의 인생 목표가 생겼다. 그동안 산행에 도움을 준 가족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그 결실은 2008년 엄홍길 휴먼재단 설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는 다시 히말라야로 들어갔다. 새로운 목표인 8,000m 17좌 휴먼재단이란 산을 오르기 위해…. 살아남은 자로서, 영원한 산사람으로 남는 길을 ‘나눔’에서 찾은 것이다.
휴먼재단에서 하는 일은 어떤 것인가요?
제가 16좌를 완등했듯이 히말라야에 16개 학교를 짓는 거예요. 교실, 화장실, 컴퓨터실, 도서실, 양호실도 짓고, 그 밖에도 학교 선생님의 월급을 정기적으로 지급하고, 현지인에게 간호 교육을 해 보건소 같은 역할을 하도록 약품도 지원하고 있죠. 학교 준공식이나 기공식을 할 때는 의료 봉사도 병행해서 하고 있습니다.
+ 그에겐 학교 짓는 일도 ‘도전’이었다. 가장 어려웠던 건 교통의 열악함이었다. 대개 산간 오지 마을인데다 트럭이 갈 수 없어 헬기로 나르거나, 최종 목적지까지 자재를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자재 운송비가 건축비만큼 소요됐고, 건물을 짓는 사람들도 고산병에 시달려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간 오지에 학교를 지은 건 소중한 인연인 셰르파들이 살던 마을이기 때문이다. 특히 1986년 에베레스트를 오르다가 목숨을 잃은 셰르파 술딤 도르지와의 인연은 학교 설립에 큰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고향에 학교가 없다는 사실에 늘 가슴 아파했던 도르지. 그의 소원은 곧 엄홍길의 소원이 됐다.
2010년 5월, 드디어 휴먼재단의 첫 번째 학교가 술딤 도르지의 고향인 해발 4060m 히말라야 팡포체 마을에 세워졌다. 그리고 두 번째 학교 타르푸에 이은 세 번째 학교가 룸비니에서 한창 신축 중이다. 제대로 된 교육을 못 받아 가난을 대물림하는 셰르파의 아이들에게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주고 싶은 엄대장의 바람이 하나씩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지을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게 뭔가요?
제일 중요한 건 지형, 기후, 특성에 맞게끔 건물을 짓는 거예요. 세 번째 학교 룸비니는 완전 평야 지대인데 더 열악하더라고요. 아이들이 보리수나무 아래 땅바닥에 천막을 쳐놓고 공부하고 있고….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에 물도 없고, 화장실도 없어서 우선 동네 지하수 우물부터 파고 시작했어요. 그동안 NGO 단체에서도 학교를 지었지만 문제는 짓고 끝난다는 거예요. 그게 참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저희는 학교 옆에 마을회관도 짓고 있어요. 마을 사람들도 애들이 공부하는 걸 관심 갖고 지켜봐야 애들을 학교에 보내고 교육의 중요성도 알게 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지날수록 나아지는 게 아니라, 문짝도 망가지는 등 폐교가 되거든요.
꾸준한 관심을 통해서 학교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네요.
아이들의 변화도 느끼시죠?
그럼요. 열악한 상황에서의 아이들과 새 학교에서 공부하는 아이들 표정, 행동은 완전히 달라요. 진짜 해맑고 진짜 좋아해요. 마치 ‘우리들 세상이다’ 하는 표정을 보면 행복감을 느끼고, 후원해주신 분들께 감사하죠.
많은 분들의 후원으로 재단을 꾸리고 계신데요,
어떤 말씀에 선뜻 동참하시던가요?
제가 히말라야를 20년 동안 다녔잖아요. 거기서 무엇을 깨우쳤겠습니까. 결국엔 나눈다는 겁니다. 산이 저를 받아준 거잖아요. 산이 저한테 베푼 거잖아요. 산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감히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 이상부터는 뭔가 보이지 않는 자연의 힘과 동료들의 노력, 희생 덕분인 거거든요. 저는 제가 지금도 살아서 땅을 밟고 돌아다닌다는 것 자체가 진짜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에요. 이 엄청난, 기적보다 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해준 산과 동료들에게 저도 보답하고 싶다고 간곡히 말씀드리면 많이 공감해 주시더라고요.
산을 타는 것보다 마음을 모으는 게 더 어렵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해나가고 계신지요?
물론 힘들 때도 많아요. 사람들한테 실망할 때도 많고 감정이 통제가 안 될 때도 있어요. 근데 그 순간 뒤로 물러서서 생각해보면 아, 그래! 저 사람이 내가 아닌데, 나도 내가 생각하는 대로 안 될 때도 많은데, 어떻게 내 맘 같기를 바라느냐, 생각해요. 그리고 아침이면 산에 갑니다. 산에 가면 확 풀어지면서 정리가 돼요. 자연은 우리 인간에 생명력을 불어주는 신비의 명약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가리지 않고 모두 다 받아주잖아요. 바다도 모든 걸 다 쓸어안아 주지 않습니까. 산과 같은 바다와 같은 마음으로 살려고 노력을 합니다.(웃음)
+ 엄홍길, 그가 하는 일엔 늘 ‘휴먼’이란 말이 붙는다. 휴먼재단, 휴먼스쿨, 휴먼장학금….
그는 휴먼이란 말에는 가슴 아픈 사연이 녹아 있다고 했다. 8000m 등정을 네 번이나 같이하면서 생사고락을 함께 나눴던, 친형제보다 더 절친한 후배인 박무택 대원이 2004년 에베레스트에서 운명을 달리하게 된 것이다. 후배와의 깊은 인연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엄홍길은 세계 제3위의 거봉 칸첸중가에 도전하다가 무려 세 명의 동료를 먼저 떠나보내게 되었다. 엄청난 충격에 빠져 원정대의 사기도 바닥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럼에도 말없이 동행해준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후배 무택이었다.
그런 후배가 죽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지만, 더욱 안타까운 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 8500m 지점에 시신이 그대로 방치돼 있다는 거였다. 헬기도 갈 수 없는, 오직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곳. 결국 2005년 엄홍길은 자신을 포함한 18명으로 구성된 대원들을 결성, 산을 오르기에 이른다. 후배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초모랑마 휴먼원정대’라는 이름으로…. 세계 등반사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던 휴먼원정대의 활약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사람들은 감동했고, 훗날 휴먼재단 설립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휴먼원정대를 통해 삶과 등반을 대하는 태도에 큰 변화가 생겼다고 하셨지요.
‘죽음의 지대’ 8000m를 넘어서면 곳곳에 시신이 즐비해요. 전엔 공포와 연민은 잠시일 뿐 정상을 향해 앞으로만 나아갔어요. 성취욕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잊은 겁니다. 그런데 과연 동료들의 시신을 외면하고 히말라야 정상에 선다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그건 아니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간애, 우정, 의리, 약속, 희생과 같은 우리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을 잊고 살지 않았나…. 지금도 위기 상황에 처할 때마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들 10명의 이름을 주문처럼 외워요. 극한 상황에 처할 땐 더욱 간절하게 불러요. 너희들이 오르지 못한 산을 너희와 함께 올라가는 것이다, 나에게 힘을 달라, 용기를 달라….
+ 엄홍길은 유년 시절을 산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등산객을 상대로 식당과 숙박업을 했고, 고교 시절까지는 학교를 다니기 위해 매일같이 산을 오르내려야 했다. 등산객과 친구가 되면서 그는 자연스레 산사나이가 되어갔다. 그러다 1977년 고등학교 2학년 때 그의 표현에 의하면 ‘심장을 멈추게 하는’ 충격적인 뉴스를 접한다. 바로 ‘고상돈, 한국인 최초 에베레스트산 등정’이었다. 이후 그 역시 히말라야 등정에 대한 꿈을 품게 된다.
그렇게 시작한 산악 인생. 돌이켜보면 실패의 연속이었다. 1985년 에베레스트에 첫 도전, 결과는 실패였다. 1988년 등정에 성공했지만, 1992년까지 여섯 번이나 히말라야 정상의 품에 안기지 못했다. 에베레스트는 3번 만에, 세계 7번째의 고봉 로체샤르는 3번 실패 후에, 안나푸르나는 5번의 도전 끝에 올랐던 것이다.
산을 오를 때 가장 중요한 마음가짐은 무엇인가요?
젊은 시절엔 어떤 산이라도 오를 수 있다는 용기와 패기로 자신만만했었어요. 그러다가 동료들을 떠나보내면서 산이 무섭다는 걸 느끼고, 내가 산을 소유하려고 한 건 아닌가…. 무수한 실패를 통해 겸허함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두려움이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산을 오를 땐 마음을 비우고, 거대한 대자연과 동화돼서 하나가 돼야지, 나는 나다 너는 너다 내가 널 이겨야 한다, 욕심을 갖고 오르면 절대 안 돼요. 저는 이 순간부터 당신에게 귀의합니다…, 모든 것을 순리에 따라서 산을 오르겠습니다. 그랬을 때 비로소 산도 마음을 열어줘요. 정말 초심으로, 그리고 평상심 잃지 말고 한 발 한 발 내딛어야 합니다.
매번 목숨 걸고 도전한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산은 나에게 존재의 이유고, 삶의 전부예요. 태어났으니 살아가는 것처럼 산이 있기 때문에 오르는 거죠. 사실 산에 오를 때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 많겠어요. 그때 무섭다, 두렵다, 살아야겠다 하면 정상에 오르질 못하는 거죠. 고통스럽고 죽을 것 같은 순간이 오더라도 이겨내야 해요. 무아지경 상태로 그렇게 몰입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선을 딱 넘어서면 올라가는 거예요. 그 단계에 진입 못 하기 때문에 실패를 하는 거죠. 그만큼 모든 걸 비우고 완전히 거기에 몰입해야 해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길이 열려요. 그때의 기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선생님처럼 도전 정신과 자신감을 갖고 살고 싶은 사람들에게 해주실 말이 있으시다면?
자기가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갖는 것, 성취감을 느끼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성취감을 느꼈을 때 엄청난 에너지가 생기거든요. 그리고 저는 산이 거의 모든 것을 치유한다고 생각해요. 상처로 인해 갇혀 있던 마음들이 열리고. 초등학생도 히말라야에 갔다 오면 고등학생처럼 굉장히 의젓해지거든요. 모두들 산에 많이 다니셨으면 좋겠어요.(웃음)
최근에는 환경운동가로도 활동 중이신데요,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히말라야 기후가 엄청나게 변하고 있어요. 지구온난화로 빙하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녹아서 빙하 길이가 짧아지고, 겨울에도 3500m 1월의 기후가 영상 5도 10도니 그곳 사람들도 걱정을 하는 거죠. 생태계 파괴의 심각성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관심을 갖게 하고, 앞으로 장학 재단 기금을 마련해서 유자녀들의 학업을 돕고 싶습니다. 그렇게나마 그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하는 게 제 바람입니다.
+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으로 남고 싶냐고 물었다. 그는 ‘산 같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산에 미쳐, 목숨을 걸고 산에 오르며 그가 산에게서 배운 건 결국 ‘사랑’이었다 했다. 산이 자신의 모든 것을 안아주고 받아주었듯이, 자신도 그렇게 사람을 향해 다가갈 것이라는 엄홍길. 그가 두 손 모아 합장하며 모두에게 인사를 전했다.
“나마스떼!”
‘나마스떼’는 네팔어로 ‘당신께 귀의한다’란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