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박복하여 저는 생후 첫돌 즈음 그만 생모를 잃었습니다. 때문에 제아무리 공활하고 맑은 날의 파란 하늘일지라도 그걸 도화지 삼아 어머니의 그림은 원초적으로 그릴 수조차 없습니다. 삭막하고 모진 세월의 풍상이 휩쓸고 지나간 빈자리를 메운 건 제 나이 십 대 말에 만난 아내입니다. 첫눈에도 코스모스보다 더 곱고 잠자리처럼 연약한 몸매였지만 제 눈엔 그녀가 이몽룡이가 춘향이를 본 순간, 반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이에 즉시로 프러포즈를 했고 그녀가 흔쾌히 수락함에 우린 제가 군 복무를 마치자마자 가정이란 소중한 둥지를 꾸렸지요. 비록 가난했기에 보증금도 없는 반지하의 월세방을 얻어 입주했으나 서로 사랑했으므로 충분히 행복했습니다.
떡두꺼비 같은 아들과 금지옥엽 딸까지 얻어, 두 아이의 부모도 되었습니다. 두 아이의 아빠가 되니 돈을 더 벌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배움이 매우 짧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만날 그렇게 학력보다는 판매 실력이 중시되는 영업직이었지요. 20대 초반부터 시작한 출판물 등의 영업 사원, 즉 세일즈맨 생활은 작년까지 무려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한때는 ‘영업의 달인’이라느니 ‘판매의 귀재’라는 극찬도 들었지만,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었고 급기야 인터넷 문화가 생성되면서 돈을 내고 책을 사 보던 독자들의 반응이 엄동설한으로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문에 매달의 수입은 날로 하강국면으로 돌아섰고 아내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아르바이트 주부 사원으로 나서지 않으면 안 되었지요. 하지만 하루 종일 서서 근무해야 하는 특성의 백화점 일은 가뜩이나 연약한 아내의 건강을 좀먹는 치명적 악재로 작용했습니다. 그래요, 그건 바로 일종의 직업병이었습니다.
작년부터 건강이 더욱 크게 악화된 아내는 날이 갈수록 아예 일어서기조차 힘든 환자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무리하지 말고 쉬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작 아내를 쉬게 할 수 있는 장치는 없었지요. 제 벌이는 늘 시원찮았고, 두 아이의 교육비는 언제나 만만치 않았으니까요. 뭐든 마찬가지겠지만 이 세상에 공짜는 결코 없는 법. 대기업에 들어간 아들, 서울대 대학원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맘껏 하고 있는 딸아이의 ‘오늘’을 보자면 아내의 ‘지난날’ 음지의 간난신고가 덩달아 떠오릅니다. 여하간 고생이 막심한 아내를 보는 무능한 이 가장의 맘은 늘 찢어질 듯 아프기 그지없었습니다.
스마트폰의 출시와 급격한 보급은 결국 작년 가을, 오랫동안 몸담았던 출판 시장에서 완전히 몸을 빼게 하는 단초로 작용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못난 날 만나 고생만 한 불쌍한 아내를 봐서라도 앞으론 매달 급여가 또박또박 나오는 직장에서 일하자!’는 결심이 싹튼 건 사실 오래전부터였지요. 때문에 올 초부터 비로소 시작한 새로운 직업인 경비원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아내도 그동안 꾸준히 치료를 한 덕분에 건강이 많이 좋아져 참 고맙고요!
결혼 30주년을 맞았던 작년 10월, 만추 때 우린 그러나 여전히 가난했기에 어디 멀리 갈 수는 없었습니다. 30년 전 신혼여행을 갔던 보은 속리산을 찾아 점심만 달랑 한 그릇 먹고 왔을 따름이었죠. 어느새 다가오는 결혼 31주년…. 변함없이 곁에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마음 다져봅니다. 하나의 가지로 연결된 두 나무 연리지(連理枝)처럼, 사랑하는 아내 황복희 여사와 앞으로도 불변하게, 그렇게 화목하고 알콩달콩하게 잘 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