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도 원망도 놓아버리자 더없는 평화가 찾아왔다고 말하는 사람들, 그들의 진심 어린 이야기들입니다.

큰 슬픔을 아름다운 용서로
승화시킨 분들을 떠올리며

변종만 상당초등학교 교사.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1동

시내 변두리 고향을 지키며 농사일만 하던 외삼촌이 계셨다. 그때 외삼촌은 매일 아침 오토바이 뒤에 매달린 리어카에 채소를 가득 실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밖에 몰라 온몸에서 흙냄새가 나던 분이셨다.

벌써 1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그런 외삼촌이 교통사고로 응급실에서 사경을 헤매다 돌아가셨다. 사고의 내용인즉 그날따라 채소를 일찍 판 외삼촌은 1차선을 달려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앞에서 2차선을 달리며 친구와 통화를 하던 운전자가 길을 잘못 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외지에서 온 여자 운전자는 조급한 마음에 1차선과 중앙선을 넘어 반대편으로 차의 방향을 바꾸려고 했다. 하필이면 갑자기 1차선으로 넘어온 승용차와 외삼촌의 오토바이가 정면으로 충돌한 것이다.

피해자인 외삼촌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자리에 누워 있었다. 갑자기 당한 일이기도 했지만 회갑을 막 넘긴 나이셨고, 원래 정정하던 분이었기에 가족들은 넋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운전자를 원망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급하게 장례 절차가 논의되었고 가해자인 운전자 가족과도 합의가 진행되었다. 그때 슬픔에 싸인 사람들에게 운전자의 딸이 결혼을 며칠 앞뒀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어쩌면 미움을 동정으로 바꾼 소식이었다. 합의를 보지 못하면 운전자는 딸의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는 딱한 처지였다.

모두 착한 분들이라 바로 모여 해결책을 상의했다. 집안 식구들 모두는 엄마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하도록 해야 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집집마다 운전자가 있으니 우리 가족 누군가도 그런 실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사천리로 합의가 진행되었고, 운전자의 남편분은 결혼식을 며칠 앞둔 딸과 사위를 데리고 장례식에 참석해 슬픔을 같이했다.

주위 분들에게 법이 필요 없는 분으로 기억되고 있는 외삼촌의 일생이 아름답게 마무리될 수 있도록, 그때 쉽게 동조를 해준 외사촌들이 지금 생각해도 고맙다.

그때 나는 세상은 생각보다 몰인정하지 않다는 것과 어떤 일이든 상대방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더 쉽게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했다.

그 후 나는 상상도 하지 못할 아픔을 안겨준 사람조차 용서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자기 자식이 죽는 일을 누가 상상이나 할까. 이 세상이 끝나거나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킨 부모도 있다.

유의랑 작.

<휴식> 72.7×53cm

Oil on canvas / 2001

 

오래전 얘기이지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친구들과 집 앞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 외아들이 음주 운전자의 승합차에 치여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왔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을 잃은 슬픔을 어찌 삭일 수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법의 잣대에 맞춰가며 가해자에게 돈을 더 받아내는 방법을 열심히 알려줬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의 부모는 아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장기 기증을 결심했고, 시각장애인 2명에게 새 희망을 안겨주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로서 음주 운전을 한 운전자를 용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운전자가 군 제대 후 복학을 기다리는 학생이고,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위반으로 구속이 불가피하다는 담당 경찰관의 설명을 들은 아이의 부모는 젊은이의 장래를 생각해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운전자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합의를 해준 후 경찰과 검찰에까지 찾아가 선처를 부탁했다. 경찰은 피해자 부모의 간곡한 부탁과 운전자가 초범인 점을 들어 검찰에 불구속 지휘를 건의해 받아들여졌다. 피해자 부모의 아름다운 용서가 잘못을 뉘우친 운전자에게 7번방의 선물처럼 새로운 희망을 선물했다.

어려울수록 용기 있는 행동이 필요하다. 정말 어려운 일을 실천으로 옮겼기에 아이의 부모가 보여준 아름다운 마음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씨앗을 뿌릴 수 있었다.

이렇게 큰 슬픔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은 각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런 미담들이 우리가 사는 세상을 살맛 나게 만든다. 때로 누군가가 쉽게 용서가 되지 않을 때면, 이분들을 조용히 떠올려본다.

아버지 괜찮아요,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신용 39세. 직장인.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

나의 아버지는 현재 사업의 잘못으로 인하여 구치소에 있다. 5년 전 당시 나는 육군 공병 장교 소령 진급을 앞두고 있었다. 그즈음 아버지는, 직장까지 내려놓고 병간호를 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외로움을 잊으시려고 일에 집착하고 계시던 때였다.

사업을 하시려고 하던 중 한 다단계 업체를 만나, 다단계가 뭔지도 모르던 분이 순진하게 열심히 사람들을 소개하여 고위 직급으로 추천되었다. 그런데 그 업체의 회장은 순진한 아버지를 이용하였다. 우선 아버지가 추천한 기술을 가진 중소기업체들에게 투자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승인하여 협약을 맺도록 하였다. 그로 인해 아버지는 대표이사를 맡게 되었는데, 회장은 몰래 해외로 대규모 자금을 빼돌린 후 부도 위기가 났다고 했다. 기업들은 투자 자금 받기로 협약한 것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물어, 회장과 함께 아버지를 고소하였다.

아버지는 나의 군 생활 12년 동안 힘겹게 모았던 돈 1억2천 정도와 아버지가 평생 모은 본인 투자금, 형제와 친척들의 돈까지 끌어들여 35억의 돈을 그 업체에 투자했던 터라 너무나 당황했고 원금이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억울해하며 회장을 고소하였다. 천 명이 넘는 투자자들이 너무나 큰 손해들을 보았기에 오랫동안 재판이 진행되었다.

아버지는 법정 구속된 상태였고, 내가 전역을 하여 아버지를 도와야 했다. 고소자들과 합의하기 위해,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아보기 위해, 3년 가까이 분주히 쫓아다녔다. 하지만 만나는 사람들은 자신이 손해 본 돈만 찾으면 된다는 생각에 거짓 증언들을 해댔다. 회장과 가까운 사람들은 ‘나가면 돈을 되돌려주겠다’는 회장 말에 현혹되어, 법정에서조차 거짓 진술을 하였다. 아버지가 아무리 자신도 피해자이고 회장이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거라고 항변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는 회장의 잘못까지 덮어쓰고 형을 받았다.

너무나 억울한 마음에 아버지는 구치소 안에서 급격히 쇠약해지셨다. 우리 가정 또한 엉망이 되었다. 나는 군 전역 후 제대로 된 일자리도 가질 수가 없었기에 야간 막노동 작업 현장에 가끔씩 나가는 것이 전부였고, 아내가 가정의 생계를 대부분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두 딸과 행복하게 살던 우리는 자주 싸움을 했고 이혼의 위기까지 가야 했다. 그 몇 년간 내가 겪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본의 아니게 아내에게 큰 짐을 지우게 된 나 자신이 너무나 싫었고 차라리 아버지를 그냥 나 몰라라 하고 인연을 끊을까? 아님 그냥 내 목숨을 끊어버릴까? 별의별 생각을 수차례 하였다.

유의랑 작.

<꼼꼼> 33.5×21.5cm

Oil on canvas / 2004

하지만 면회 가서 아버지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나면, 그러한 생각들이 다 허물어지곤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계속 힘겨워하시던 아버지, 그래도 일을 하며 조금씩 회복되어가는 듯 보였던 아버지가 한순간에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져버렸다. 아버지의 축 처진 뒷모습을 보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리고 나는 점점 마음을 다잡았다. 이대로 억울함과 분노, 원망 속에서만 사는 것은 아니라고. 이런 마음으로 사는 게 오히려 더욱 억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아내와도 어렵사리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많은 상처가 있었지만 더 이상 지나간 일에 사로잡히지 말자. 희망을 포기하지 말고 아버지를 원망만 하지 말자. 그럴수록 우리 스스로만 망가져왔다. 진심으로 용서하고 잊자. 우리 마음에 미움을 선택하지 말고 용서를 택하자. 돈을 위해 살아가지 말고 사람을 더 소중하게 여기며 살자.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도 도우며 행복하게 살자.”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 많이 울었다. 아버지께도 면회를 가서 말씀드렸다. 아버지로 인해 겪었던 우리 가정의 아픈 경험들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하지만 이제는 다 용서한다고, 지난 일은 다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그리고 그 후 많은 것이 회복되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진정한 용서는 내 자신을 진정한 평안과 희망으로 안내함을 느꼈다. 아버지도 이런 어려운 시절들로 인해 가정의 소중함을 다시 느끼게 되셨고, 아들의 가정에 대한 미안한 마음에 그전의 독불장군 모습도 많이 바뀌셨다.

아버지가 형이 끝나 나오시게 되면 우리가 모시려고 한다. 서로 용서하고 아픔 준 것은 덮어주며 서로에게 힘이 되는 존재로 살아가려 한다. 우리는 가족이니까.

곰보빵과 우유,
세상이 보내온 용서의 손길

홍순재 드림비즈포럼 대표, 창업 교육가.
<당신이 은인입니다> 저자

나는 창업 교육가다. 그리고 노숙자 출신이다. 노숙을 하기 전, 나는 한때는 1억 이상의 현금을 차에 가지고 다닐 정도로 졸부의 생활을 만끽했었다.

당시 부동산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나의 일은 완공된 빌라나 원룸을 분양하는 것, 그리고 부동산 주인도 포기한 부동산들을 매입하여 가공 임대 매각하는 일들이었다. 주로 산비탈의 저렴한 집이나 상가들을 경매나 공매를 통해 산 후, 그곳에 살던 채무자들을 내쫓아 새로 분양하는 식이었는데, 최대한 빨리 돈을 뽑아내고 내보내야만 했기에 나는 갖은 악랄한 방법을 동원했다. 갈 곳 없어 애처롭게 사정하며 매달리는 노인들도 매정하게 밀쳐냈다.

우리는 그저 먹이사슬의 밑바닥에서 서로에게 상처 주는 짐승 같았다. 차갑고 독하게 내쫓았고 악착같이 팔아치웠다. 어마어마한 금액의 돈을 쓸어 담으며 돈의 맛에 중독되었다.

그런데 2008년 가을 미국에서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지고 말았다. 주가는 수직 하강했고 한국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대출받은 돈은 고스란히 금리, 연체금리, 분양 참패로 빚으로 남았다. 신혼 7개월 만에 아내는 친정으로 피신시키고 나는 결국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 아파트를 급습한 사채업자들에 둘러싸여 목숨을 위협받게 된 것이다. 나는 그대로 집을 나와서 무작정 버스를 탔다. 서울역으로 가는 버스였고, 이후 9개월간의 노숙 생활이 시작되었다.

아스팔트에 누워 있으면 뼛속이 에이는 것은 물론이고 뇌가 얼어붙는 느낌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다. 점심은 직장인들이 먹다 남긴 밥을 먹고, 춥고 긴 겨울은 유기견을 찾아서 끌어안고 잔다. 그렇게 몇 개월…. 이젠 정말 죽음을 택하고 싶었다.

나는 땅바닥에 드러누워 물 한 모금 안 먹고 죽기로 결심했다. 그제야 냉정히 과거의 일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갑자기 닥친 가난 때문에 왕따를 당했던 기억, 비행을 일삼으며 어둠 속을 방황했던 시간, 부동산업을 하며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상처로부터 시작된 오기, 오기로부터 비롯된 도약. 어느 순간 만족하고 적당히 욕심을 거두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왜 나는 늘 그놈의 오기를 부리며 그 난리였을까. 내가 상처 준 모든 사람들, 내가 만나온 모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고 싶었다.

그렇게 누워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열흘째,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직감하며 의식을 놓으려는 찰나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근처에서 고물을 줍고 다니는 지적장애인이었다. 그는 리어카를 저 멀리 세워두고 나에게 와서 웃으며 말했다.

유의랑 작.

<새로운 휴식> 91×35.5cm

Oil on canvas / 2010

“너 죽어, 이 빵 먹어라.” 순간 멍해졌다. 내 손에는 어느새 곰보빵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빵만 주면 어떻게 먹냐?”고 원망의 목소리를 냈고 그는 냉큼 리어카로 달려가 바나나우유를 가져와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이미 말라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터져 나왔다. 내가 세상을 버렸을 때, 이 세상은 끝이라며 절망했을 때, 신은 가장 낮은 자를 통해 나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나는 그저 하염없이 울면서 참회하고 또 참회했다. 영문을 모르며 웃고 있던 그는 혼자선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나를 둘러메고 리어카에 싣더니 내가 평소 자던 다리 밑으로 데려다 주었다. 그리곤 내 이불 아래에 천 원짜리 두 장을 주고는 웃으며 갔다. 그 어수룩한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는 목이 메고, 코가 매워, 머리가 울려, 가슴이 터져서 다시 말도 못 하고 울었다. 그래, 내가 살아난 데는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겠지. 나는 어떤 신이든 나를 인도해달라고 외쳤다. 정말이지 앞으로는 내 욕심이 아니라 타인의 필요만을 채우며 살겠노라고 통곡을 하며 소리쳤다.

무언가 마음에서 씻겨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혹시 용서라는 느낌인가. 나를 보고 웃으며 자신의 빵과 우유를 나눠주는 바보의 얼굴에서, 나는 그제야 신이 나를 용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게 되면서, 나는 어머니 이외에 나에게 사랑을 주었던 이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가세를 기울게 만든 아버지, 나를 괴롭혔던 아이들…. 늘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만을 떠올리며 오기로 똘똘 뭉쳐 살아왔는데, 내 가파른 길에도 늘 사랑을 주었던 이들이 있었다.

노숙을 시작하고 4일이 지났을 무렵 무작정 찾아간 나에게 돈 5만원을 쥐어주셨던 단골 보쌈집 할머니, 나를 어둠의 비행에서 끌어내주신 고3 담임 장학순 선생님, 노숙 생활의 깨달음을 주었던 왕초도 떠올랐다. 나는 그토록 아버지를 원망했건만, 아버지는 채권자들 앞에 나와 함께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했었다. 그리고 나를 끝까지 믿고 기다려준 아내….

나는 이제 세상에 용서를 구하는 마음으로, 다시 걷고 있다. 세상이 보내온 용서의 손길, 그리고 많은 은인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왔다. 나도 이제 누군가의 은인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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