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 문진정
베트남 중부의 광찌(Quang Tri)성 여린(Gio Linh)현. 이곳은 과거 군사분계선이 위치하던 곳이자 베트남전쟁 때 고엽제가 가장 많이 뿌려진 지역이기도 합니다. 고엽제 속 다이옥신은 아주 적은 양으로도 암과 백혈병을 유발하고, 기형아를 출산하게 하여 그 피해가 2, 3세대까지 이어지는 무서운 물질이지요.
여린현도 예외는 아닙니다. 인구 2만 명의 지역에 천 명이 넘는 장애인이 있다고 하니 한 집 걸러 한 집에 장애인이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런 시골 마을에서 아이들의 키다리아저씨를 자청하고 나선 한국인이 있습니다. 보건의료 전문 봉사 단체인 ‘메디피스’에서 베트남 현지 코디네이터로 일하고 있는 박연출(53)씨입니다. 번듯한 대기업 직원이었던 그가 베트남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2년 전, 베트남 출신의 이주 노동자들이 멸시당하는 모습을 보고서입니다.
‘베트남 사람이나 한국 사람이나 피는 붉은색이다’는 어느 이주 노동자의 한마디가 마음 깊이 와 닿았다는 그는 한국인들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이 조금이나마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때부터 베트남어를 배우고,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이들의 고충을 함께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는 ‘딸아이 얼굴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라며 눈물짓는 베트남 친구의 말을 듣고, 마침 집에 있던 캠코더로 수십 명의 이주 노동자들의 영상 편지를 찍어 베트남으로 날아갔습니다.
몇 년 만에 영상으로 소식을 접한 일가친척들은 밤새 비디오를 보며 눈물을 쏟았고 그 후로도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그들의 메신저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50대로 접어들며 그는 베트남과 자신과의 십 년간의 우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동안 알게 된 수백여 명의 노동자들, 결혼 이주 여성들, 밤낮으로 베트남어 통역을 도와준 유학생까지…. 더 나이가 들어 삶에 안주하기 전에 베트남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번뜩 스쳤습니다. 그렇게 승진을 얼마 앞둔 2010년, 그는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베트남으로 떠나게 됩니다.
“돌아보니 직장 생활도 전부 돈을 위해서 했더라고요. 근데 그게 다가 아니구나, 나 하나 채우기 위해 살았던 50년의 삶보다 내가 가진 걸 나누는 삶이 훨씬 소중하고 가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메디피스의 단원으로 일하게 된 박연출씨는 매달 한번 비행기와 기차, 택시를 갈아타고 여린현을 방문합니다. 마을을 돌아보며 장애 아동들을 메디피스 재활 치료사와 연결시켜주고, 화장실과 부엌 등은 편리하게 개조하고, 장애 아동의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공동체를 꾸리는 프로젝트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사람 간의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그는 도움을 줬던 모든 가정을 매달 잊지 않고 찾아갑니다. 여린현 아이들 역시 웃고 고함을 지르며 온몸으로 반가움을 표현하지요. 처음에는 냉랭했던 부모들도 아이들의 치료와 성장에 더 관심을 갖고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이때에 느끼는 행복 바이러스는 아무리 널리 퍼트려도 부족하다는 박연출씨. 십 년 후쯤에는 한국으로 돌아가 이주 여성들의 ‘친정 부모’가 되어 고민 상담을 해주는 것이 그의 최종 꿈입니다. 그래서 그는 베트남에 있을 동안 더 많이 느끼고 배우고 반성하고자 합니다. 최선을 다해 그들의 입장에서, 좀 더 다가가서, 진짜 원하는 부분을 도와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