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tvN에서 방송되고 있는 <꽃보다 할배>가 화제다. 노년의 예능이라는 새로운 시도, 웃음과 함께 잔잔한 감동까지 던져주는 프로. <꽃보다 할배>는 KBS-TV <1박 2일>을 이끌며 국민피디라 불렸던 나영석 PD가 올해 초 CJ E&M으로 회사를 옮긴 후 만들어낸 첫 작품으로, 역시 나영석이라는 찬사를 자아냈다. 좋은 프로그램이란 새롭고, 재밌고, 또한 그 안에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나피디. 방송을 통해 살짝궁 얼굴도 보여주는 센스로 어느새 연예인처럼 친근해진 우리들의 국민 피디, 나영석 피디가 말하는 예능과 인생의 이야기다.
“저는 뭐 그렇게 살아보려 했는데도 요지경에서 끝나지만 젊은이들은 지금 이 시대에 인정을 못 받더라도 새롭고 가치 있는 걸 시도해 보시면 훗날에 더 크고 명예로운 평가를 받을 거라 생각합니다.” – 프랑스 에펠탑 앞에서 신구 할아버지가 (‘꽃보다 할배’ 2회 중에서)
지난 7월 5일부터 방송된 <꽃보다 할배>. 평균 연령 76세, 우리나라 드라마 역사의 산증인이자 50년 지기인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 네 할배들의 배낭여행기.
“60대는 아직 애, 70대는 돼야 비로소 어른”이라 말하는 네 배우의 여행기는 웃음과 함께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인생의 이야기들로 잔잔한 감동을 전하며 케이블 채널로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것은 나영석 피디에게도 놀라운 일이었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무척 기쁘고 감사하다”고 말한다.
<꽃보다 할배>를 보며 우리들의 부모, 노년의 문화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제 대중들이 바라는 게 단순히 웃음,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미 웃음은 넘쳐나는 시대니까요. 어르신들이 주인공으로 나서면 훨씬 더 인생을 산 분들이니까, 우리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들을 말해줄 수 있겠다 했죠. 조금 재미가 덜하더라도 보는 사람들은 보겠다 싶었는데, 제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분들이 좋아해주는 것으로 봐서, 많은 분들이 이런 걸 알게 모르게 기다리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처음 이 프로를 기획할 때는 과연 잘될까? 하는 우려도 많았을 것 같은데요.
사실 처음 기획할 때만 해도 되겠어? 하는 의구심들도 많았습니다.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우연히 신구 선생님을 만났어요. 저도 긴장해서 프로그램 설명을 장황하게 하며 할 의향이 있으신지 여쭤보는데, 신구 선생님이 예의 그 온화한 미소로 “설명은 됐고…” 하시며 “그러니까 나하고 순재 형하고 몇 명을 늘그막에 여행 보내준다는 거 아니야? 그럼 너무 고마워. 그런 프로그램 계획해주면. 내가 언제 그 형이랑 동생들이랑 죽기 전에 여행을 가보겠어” 하시는데, 순간 저도 모르게 울컥했어요. 그러면서 잘되든 못되든 한 번은 하겠다, 같이 가서 기뻐하시는 모습을 너무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게 신구 선생님 미소 하나 믿고 다음부터는 다른 고민 하나 없이 진행되었습니다. 요즘은 특히 진심, 마음이 공감되는 순간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과 할 때와의 차이랄까, 다른 부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보통 예능과 다른 건 이분들은 서로 나서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거나 무엇을 더 하려고 애쓰지 않으세요. 오히려 하루하루가 너무 심심해서 이게 프로그램이 될까 싶을 정도인데요. 그런 와중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시점에 한마디씩 던지는 말씀에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아요. 누굴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 연륜이 묻어나는 소회를 밝히시는데 그런 말씀이 울림을 줄 때가 많죠. 이분들 인생의 깊이가 내가 참 가늠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경이롭다고 할까. 이 세상의 모든 어르신들이 차이는 있겠지만 그런 지혜나 연륜을 가지고 계신데 우리가 아무도 물어보려 하지 않았구나, 이런 좋은 콘텐츠가 옆에 있었는데 아무도 안 쓰려고 했었구나 싶죠. 저는 운 좋게 이분들과 일을 하게 됐구나 생각합니다.
KBS <1박 2일>도 여행 프로였고, 이번에도 여행인데요. 특별히 ‘여행’을 좋아하나요?
사실 귀찮음이 많아 어디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막상 나서면 또 좋아하는데 돌아보면 아버지 영향이 컸던 거 같아요. 아버지로부터 ‘항상 겸손해라’는 말 외에 다른 잔소리는 들어본 기억이 없는데, 학창 시절에도 공부하라고 하기보다 주말만 되면 산으로 들로 데리고 다니셨거든요. 사춘기 때는 귀찮았는데, 나중에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뇌리에 남아 있더라고요. 새벽에 눈 떴을 때 들리는 계곡물 소리, 텐트 문 열고 나와서 보는 물안개 낀 풍경, 툭툭 비 내리는 소리…. 그래서 본능적으로 그런 걸 좋아하나 봐요.
평범한 가정에서 평범한 유년기를 보냈다는 나영석 피디.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뭔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대학 시절 우연히 들어간 연극반에서 연극에 미쳐 살면서부터였다고 한다. 4년 내내 연극을 하며 ‘과정은 재미있고 결과물은 올바른 작업을 하고 싶다’는 꿈, ‘자신이 만든 콘텐츠를 더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꿈이 생긴 것. 원래는 재미있는 코미디 대본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만 대본 공모에 낙방한 후, 결국 피디 시험에 합격한 그는 2001년 KBS에 입사한다.
지금이야 방송 속에서도 자연스럽고 소탈한 모습이지만, 입사 초에는 처음 보는 연예인과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웅얼거리다 돌아서기 십상이었다고 한다. 급기야 ‘연예인 울렁증’ 때문에 생각지 못한 큰 방송 사고를 낸 후 그는 결심했다고 한다. 한 사람 몫의 피디가 되자고, 더 이상 누구에게도 민폐 끼치지 말자고. 그 후 ‘무조건 열심히’ ‘닥치고 열심히’ ‘불평할 시간에 열심히’는 그의 모토가 되었다. 주말도 휴일도 반납하고 회사에 출근해 편집 연습을 하고, 자신이 맡은 프로그램을 방송할 시간이 되면 만화방으로 달려가 모니터를 했다.
점점 그는 단련이 되어갔다. 그리고 드디어 2007년부터 시작된 <1박 2일> 시즌1을 통해 그의 피디로서의 역량은 빛을 발한다. 복불복, 야외 취침, 멤버들과 제작진들의 자연스런 어우러짐, 주민들과의 소통…. <1박 2일> 특유의 재미와 감동 요소를 만들어내며, 진정한 리얼 버라이어티란 무엇인가를 보여주었고, 이 프로는 일요일 저녁이면 시청자들을 사로잡는 국민 예능 프로그램이 된다. 나피디에겐 대학 시절의 바람이었던 ‘과정은 재미있고 결과물은 올바른 작업을 하고 싶다’는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코미디 작가가 되고 싶었고 결국 예능 프로그램의 피디가 되었습니다. ‘웃음’의 힘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저는 다큐멘터리 같은 걸 굉장히 좋아해요.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은 참 좋은데 왜 많이 안 볼까? 저는 포장지의 문제도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알맹이를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편한 장치 중에 하나가 웃음이나 재미가 아닐까 합니다. 제가 어릴 때 가장 많이 영향을 받았던 프로도, 김영희 피디님의 ‘칭찬합시다’ ‘양심냉장고’ 이런 프로였어요. 뉴스에서 맨날 이야기해도 안 되는데 이경규씨가 나와서 정지선을 지키자 하면 붐이 일어나잖아요. 웃음이라는 포장지에는, 메시지를 굉장히 무리 없이 전이시키는 힘이 있구나, 그런 생각을 많이 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저도 단순히 웃음만 좇는 게 아니라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본 시청자들이, 보고 났더니 괜찮네, 가슴이 좀 따듯해졌어, 그런 느낌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신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기에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었다”는 나영석 피디. 그는 2012년 초, <1박 2일> 마지막 녹화를 끝낸 후 모든 것을 놓고 아이슬란드로 오로라를 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삼십 대 중반,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오로라처럼 나영석 피디의 인생에 예고도 없이 등장했던 <1박 2일>이라는 오로라. 하지만 그것이 어느새 자신에게는 커다란 짐이 되어 있었다. 1박 2일 피디라는 나, 성공을 거두었다는 나, 사람들의 칭찬과 명성을 유지하고자 고민하는 나, 그러한 무게에 짓눌려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볼까, 다음 작품을 실패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들로 머릿속을 채운 나….
전환점이 필요한 시기라는 걸 절감했고 여행을 떠난 것이다.
서른일곱. 이제 마흔을 준비하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는 여행, 그리하여 다시금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여행, 진짜 나를 찾아서 여행을 떠난 것이다.
계속 피디를 해야 하나? 다른 일을 해야 하나?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여행의 시간들을 거치며 그는 잊고 있던 한 가지 진리를 떠올리게 되었다 한다. ‘일은 두근거림을 좇아서 하는 것’ ‘미치도록 두근거리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 그에겐 피디라는 직업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는 <꽃보다 할배>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토크쇼, 서바이벌 오디션 등등, 점점 예능 콘텐츠들도 다양화되고 경쟁률도 세지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서 스트레스는 없으신지요?
가끔 다른 유의 예능을 해볼까 생각해도 결국은 제가 할 수 있는 걸 하게 되더라고요. 이런 게 많이 생겼으니까 해볼까, 저것도 만들어볼까 하다가는 인생이 끝나버리겠는 거예요. 어떻게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겠어요. 제가 지금까지 만들던 걸 더 열심히, 더 잘, 더 정교하게 만드는 수밖에 답은 없는 거더라고요. 성격이 그래서 그런지 모르는데, 잘될까 잘못될까 그런 부분이 묘하게 흥분되는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걸 즐기는 스타일이기도 해요. 망할 땐 망하더라도, 한번 들이대볼까 하는 스타일이라 그렇게 크게 스트레스받지는 않아요.
<꽃보다 할배>들과 함께하면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순재 선생님이 그런 말씀을 하세요. 나이가 든다는 건 결국 죽음에 가까워지는 거다. 그런데 내가 하루하루 어쨌든 남한테 빚 안 지고 부담 안 주고 내 인생 살면 잘 산 인생 아니겠냐고. 어떻게 보면 비관적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누구에게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거잖아요. 태어나는 순간 사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건데 그분들 보면서 그런 생각은 들죠. 어떻게 해야 멋지게 늙어가는 걸까. 급하게만 살 것이 아니라 천천히 주변도 둘러보고 가야겠다. 지금 이 시간이 되게 소중하구나 여러 가지 생각을 해요.
나영석 피디에게 인생이란? 삶이란?
시기가 그런지 진짜로 요즘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 잘하고 있는 건가? 삶이란 뭐지?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주변에서 대단하다는 이야기를 해주시기도 하지만, 저 또한 하루하루가 답답하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면서 오늘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보통 사람이죠. 다만 피디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끝없이 저를 갈고 닦아서 한 단계 한 단계 더 나은 경지에 올라가고 싶다는 욕심이 늘 있어요. 제가 했던 작업 중에 한두 개라도 고전이 될 수 있는 그런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앞으로도 그런 걸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상과 달리 기계치, 길치인데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을 무서워하고, 카카오톡도 후배가 깔아줘서 반년 전에 겨우 시작했을 만큼 아날로그적인 사람. 무엇보다 그런 매체를 통해 퍼지는 얇고 넓은 인간관계보다 자연스레 알게 되어 깊게 사귀기를 좋아하는 사람. 친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리지만 그만큼 더 친밀해지는 사람. 빠르게 배우지는 못해도 누구에게든 편견 없이 배우는 사람…. 어쩌면 나영석 피디가 만들어내는 프로들은 묘하게 그를 닮았던 것 같다.
나피디는 요즘 또 다른 배낭여행 프로젝트 2탄을 준비 중이다. 현실에 안주하기보다는 늘 새로운 두근거림을 좇아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는 나영석 피디. 또 한 번 그가 만들어낼, 그와 꼭 닮은 세상을 기다려본다.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