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날한시에 경험한 일을 서로 다르게 기억해 다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내 기억은 너무나 또렷하고 생생한데 사람들의 생각은 왜 나와 딴판일까. 나의 기억은 어디까지가 진실일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이러한 기억의 오류는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생겨나는데, 근래의 여러 가지 실험들은 우리의 기억이 ‘언제나’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람의 뇌는 블랙박스나 카메라처럼 정밀한 기억 장치가 아니라 지금까지 보고 듣고 기억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정보를 재구성한다. 그래서 같은 상황을 경험하더라도 각자 자라온 환경과 경험의 틀 속에서 기억을 짜 맞추게 되는 것이다.
세제를 고를 때 포장지의 색깔을 보게 되고, 이름이 쉬운 회사에 주식 투자를 하고, 목소리가 낮은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등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비합리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대다수가 이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 이처럼 살면서 쌓아놓은 무의식의 단편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우리의 판단과 기억은 끊임없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렇기에 항상 자신의 기억이 틀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둬야 한다. 지금까지의 신념 체계를 뒤집어보고, 거기서 완전히 벗어나보는 경험도 필요하다. 그래야만 실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뇌는 기억을 재구성한다.
1990년대에 등장한 fMRI(기능적 자기공명영상)라는 기술 덕분에 우리는 뇌에서 벌어지는 일을 3차원 영상처럼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기존에는 무시되어왔던 무의식의 영역 또한 새롭게 주목받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어떤 장면을 볼 때 사진처럼 선명하고 윤곽이 뚜렷한 그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림의 일부만 또렷할 뿐이고 나머지는 뇌가 마음대로 빈 공간을 그려낸 것이다. 즉 기억하기보다는 무의식이 원하는 대로 새로운 정보를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제아무리 굳게 믿는 ‘사실’이라도 100% 객관적이지 않고 언제나 오류를 범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실험 1 뇌는 와인의 가격을 맛본다.
미국의 행동경제학자 안토니오 랑헬은 가격표만 붙은 여러 와인들을 한 모금씩 마신 뒤 어느 와인이 좋은지 평가하는 실험을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달러가 붙은 병보다 90달러가 붙은 병의 맛을 더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사실은 두 와인 모두 한 병에 90달러짜리였다. 그리고 와인을 맛보는 동안 fMRI 기계로 사람들의 뇌를 촬영한 결과 와인이 비쌀수록 눈 뒤쪽에 있는 ‘안와전두엽피질’의 활동이 증가했는데, 이 영역은 쾌락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같은 상품에 가격만 다르게 매겨도 뇌는 전혀 다른 맛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실험 2 기억은 쉽게 조작된다.
사람들의 관찰력과 기억력을 시험하기 위해 독일 베를린의 한 교실에서 학생으로 위장한 두 명의 배우가 논쟁을 벌이다가 총을 난사하는 연기를 펼쳤다. 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고 사건 직후, 학생들을 몇 집단으로 나누어 1집단에게는 방금 본 것을 즉시 글로 쓰라고 했고, 또 2집단과는 일대일 면담을 하고, 3집단에게는 조금 지난 뒤에 보고서로 쓰라고 했다. 그 결과 세 집단의 보고에는 26~80%의 오류가 나타났다. 하지도 않은 행동을 했다고 하거나, 중요한 행동을 빠뜨리기도 하고,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의 오류는 거듭 인식할수록 실제 사실로 믿게 된다는 것이 실험으로 증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