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생님과 나는 부천시의 한 중학교에 근무하며 같은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하였다. 하지만 박선생님은 나보다 십 년은 어려 서로 어울리는 선생님들은 달랐다. 그리고 10년 후 우리는 같은 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마침 앞뒤로 아파트도 가까이 있어서 자주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퇴근 후면 동네 공원에서 만나 학교에서 있었던 일과 잡다한 가정사를 논하곤 하였다.
하지만 이듬해 내가 교감 발령을 받아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면서 박선생님과 헤어지게 되었다. 그 뒤 나는 정년 퇴임을 하였고 퇴임 후에는 급기야 남편을 저세상으로 보내는 끔찍한 일을 당하였다. 그때 나를 위로해준 사람은 바로 뒤에 사는 박선생님이었다.
박선생님은 그사이 명예 퇴임을 하고 병환 중인 시부모님을 모시며 가사에 전념하고 있었다. 지난 30년간 시부모님이 돌봐주셨기에 교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며 승진도 포기하고 퇴임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우선 그러한 그녀의 태도에 놀랐다.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으나, 병든 부모는 요양원에 모시고 직장을 놓지 않는 경우가 흔하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시어머님은 치매 환자가 아닌가? 내가 없는 동안 박선생님은 혼자 매일 공원을 돌았다며 건강과 마음도 다스릴 겸 같이 걷자고 하였다. 내가 돌아온 때가 마침 4월이라서 꽃이 만발하기 시작한 공원을 걷는 것만으로도 나의 슬픔도 치유가 되는 것 같았다.
화제는 주로 치매 시어머님에 대한 근황과 가정사였다. 선생님의 시어머님께서 얼마나 근면하고 검소한 분인지는 나도 안다. 가사와 양육을 전담하시고 공터에 갖가지 채소 농사를 지어 가족에게 유기농 음식을 제공하신 분이다. 학교에 가다 멈추어 서서 밭 구경을 하면 없는 채소가 없구나 할 정도였다. 고지식하신 시어머님과 삼십 년을 함께 지내는 동안 박선생님이 받은 스트레스도 상당하였으리라. 지엄하신 시아버님은 또 어떻고. 그러나 생전에 어려워하던 시아버님에 대한 존경심도 대단하였다.
선생님과 나는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공원을 한 바퀴씩 돌았다. 30분 정도 걷고 벤치에서 쉬며 끝없이 이야기를 나누다 다시 걷곤 하였다. 어디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었을까? 이야기는 새로울 것이 없었건만 늘 새롭게 감동하고 되새겼다.
“박선생님은 참 대단한 사람이야. 어떻게 그렇게 삼시 세끼를 꼭 해드리누?” “제 특기 적성이 가정주부라는 걸 퇴임하고 알았어요. 넘 재미있어요. 호 호 호.” 그렇게 웃음을 날리며 시어머니께서 식욕이 좋으셔서 다행이라고 하였다.
내가 간혹 걱정을 하면 “우리 시어머니는 예쁜 치매예요. 누굴 괴롭히질 않으셔요. 씻으시고 방바닥 닦고 애기처럼 주무시고 그게 다예요. 말이 없으셔요”라고 했다.
언젠가 한밤에 소파의 속을 다 뜯어 놓으시는 바람에 새 소파를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가 더 잘해드려야죠. 돌아가실 것 같은데 저렇게 버티시는 것이 다 의미가 있는 것 같아요.”
누군가 ‘노년에 꼭 필요한 친구는 이런 친구’라는 내용으로 메일을 보내준 적이 있다. ‘마음이 젊은 친구, 낙천적인 친구, 유머 감각이 풍부한 친구, 건강 관리에 철저한 친구, 전화하면 바로 올 수 있는 친구, 마음이 젊은 친구, 봉사하는 친구….’ 그대로 따르자면 약 열 명의 친구가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 모두를 다 갖춘 한 사람을 친구로 두었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겠는가?
동년배도 많건만 나를 가까이하고 듬뿍 정을 주고 즐겁게 해주느라 무던히도 애쓰던 그녀. 얼마 전 박선생님은 시어머님의 초상을 치르고 돌아와 집이 텅 비어 허전해 못 견디겠다며 대성통곡하더니, 먼저 살던 서울 집으로 이사를 했다.
남편을 잃고 박선생님에게 너무 많은 위안과 사랑을 받았음을 박선생님이 내 옆을 떠나고 나서야 더욱 느끼게 되었다. 나보다 십 년이 어린 친구이지만 정 많고 의리 깊은 그녀의 심성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녀는 나의 친구이자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