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아름다운 너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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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사랑이 되게 하는 향기로운 사람

세상의 아픔을 이겨내지 못한 상처 입은 것들조차도 스스로 아름다워질 때가 있다.
많은 희망들 속에서 서글픈 눈물이 그러하듯 지루함을 이기지 못한 깨달음이
한 번쯤은 세상의 꽃들을 사랑으로 바라볼 때 한 번 한 번쯤… 하면서
스스로의 고귀함이 모두의 고귀함으로 가녀린 눈물도 혼자만의 아픔이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꽃이기에…
生字之意 榮華可期(생자지의 영화가기), 생의 뜻은 살아 있음이니 영화로움을 기약하게 된다.

2010년 오순환 작가 작업노트 중에서

그림5_꽃

오순환 작. <꽃>
캔버스에 아크릴.
92x72cm. 1996.


 

상대를 사장님으로 모시는 사장님, 우리 아버지!

국지은 / 27세. 서울시 구로구

아버지! 아버지께 편지를 쓰는 게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어릴 때는 매해 기념일 때마다 써드리곤 했는데 명상을 시작하고 나서는 처음이네요.
대학생 때 어머니의 소개로 마음수련 명상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명상하면서 깨달은 지혜와 삶의 태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노력은 적었던 것 같아요. 중요한 건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것이라 하는데, 막상 생활 속에서 부딪칠 때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러한 삶을 직접 보여주는 분이 아주 가까이 계셨어요. 바로 아버지셨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 사무실을 이사하던 날이었어요. 막 비가 온 뒤라 습도는 높은 데다가 바람 한 점 없는 전형적인 여름 땡볕, 조금만 움직여도 짜증이 후끈 솟아오르던 날씨에, 새로 옮기는 사무실은 예전보다 비좁았고, 집안엔 무거운 가구를 선뜻 옮겨줄 듬직한 아들 하나 없었죠. 결국 아버지가 용달차 아저씨의 도움을 조금 받아서 짐들을 직접 옮겨야 했어요.
그날 저는 짜증이 앞서고 있었어요. 뻔히 지키고 있는데도 건물을 가로막으며 밀고 들어오는 차들에 ‘비켜 달라!’ 짜증 섞인 말투로 툭툭 던지게 되고 사람들이 뭘 파는 곳이냐, 사업한 지 얼마나 되었냐, 사장님은 어떤 분이냐, 시시콜콜 물어보면 ‘그만 좀 참견하지!’ 싶어 뚱하니 앉아 있었죠. 하지만 아버지는 달랐어요. 이 짐 저 짐 옮기면서 용달차 아저씨와 몸이 부딪치기도 하고 말이 꼬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아저씨에게 웃으면서 상냥하게 이야기하시고 누가 들어도 상대에 대한 배려가 듬뿍 묻어나는 따뜻한 말을 건네고. 아버지는 용달차 아저씨를 마치 사장님 대하듯 하셨어요.
놀라웠던 건 그 아저씨의 모습이었어요. 처음엔 굉장히 무뚝뚝하고 거치셨던 분이, 아버지와 일하는 동안 조금씩 태도가 바뀌시더니 나중에는 꼭 아버지처럼 되시는 거예요. 짜증 한 번 안 내시고, 제가 도와드리면 ‘무겁지 않냐’며 오히려 자상하게 되물어 보시고. 짐을 거의 다 내렸을 무렵 아저씨가 엄마와 저에게 해주신 말은 잊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일이 참 잘되실 겁니다. 사장님이 이렇게 좋으셔서.”
아버지, 명상을 하면 깨닫게 되잖아요. 상대가 곧 나이므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이 곧 나를 대하는 것과 같다고. 돌이켜 보면 저는 머리로만 알았지, 생활 속에서 부대끼는 사람들을 정말 진심으로 사랑한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정말 마음으로 상대방을 존중하셨고, 그 마음은 아저씨께 전해지고 결국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온 것이었어요.
아버지, 저는 정말 아버지를 본받고 싶습니다. 아버지처럼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대할 때나 진심으로 배려할 줄 아는 마음 넓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도록 열심히 마음도 비우고 노력할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전 아버지 딸이니까요~^^
– 아버지의 딸이라서 너무나 행복하고 감사한, 큰딸 지은이 올림.

그림6_꽃

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90x65cm. 1994.


 

평범한 언니의 신기한 능력 ‘진심’

여경진 / 39세. 변호사. 서울시 서대문구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투닥투닥 싸우기를 잘했다. 나하고 약 두 살이 못 되는 터울을 가진 아란 언니-언니라 부르기 시작한 것이 중학생이 되고 한참 후일 정도로 맞먹고 지냈다-여동생 선경이, 남동생 경구. 그러니까 나는 3녀 1남의 둘째였다.
언니의 초등학교 1학년 운동회 날이었다. 엄마랑 아빠 모두 첫딸 운동회니까 장하고 신기한 마음으로 구경을 하고 있었다. 달리기 순서가 되었다. 준비! 땅! 하고 호각이 울려 다른 아이들은 다 운동장 트랙을 돌며 뛰어나가는데 언니가 순간 운동장 바깥쪽으로 쭉 뛰어가더니, 담 안쪽으로 나 있는 느티나무 주변을 따라 뛰는 것이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선생님이 운동장 트랙 안으로 돌면 안 되고 바깥쪽을 돌라고 해서 학교 가장자리를 뛰었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우리 언니는 좀 모자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순하고 말도 잘 못하고 무슨 놀이를 해도 항상 먼저 죽고 빠릿빠릿하지 못했던 언니는 든든하다기보다 내가 챙겨줘야 할 동생 같았다.
엄마는 애들이 많으니 한 명이라도 빨리 학교에 가면 손을 덜까 해서 거의 여섯 살에 언니를 학교에 보냈다. 자기만 한 큰 책가방을 메고 학교에 간 언니는 학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힘들어 받아쓰기를 해도 십 점, 이십 점, 어떤 때는 빵점. 그래서 나머지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통지를 받으면 아빠도 “갸는 그냥 왔다 갔다만 해도 되니까 공부 더 시키지 마라”고 하셨고 언니는 그렇게 학교를 일삼아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만날 빵점 답안지가 뭐가 뭔지도 모르고 왔다 갔다 하던 언니는 5학년, 6학년에 올라가면서 점점 성적이 올라가더니 졸업할 때는 조합장상을 받기까지 하였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반항을 하고 온갖 말썽을 다 부렸던 나와는 달리 집안에 있는지 없는지 존재감마저 희미했던 언니는 점차로 학교 공부에 탄력이 붙으면서 대학교, 대학원, 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지금은 천문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전 세계 학술회의에도 참가하는, 그야말로 우리 집안에서 가장 빵빵하게 잘나가는 자식이 되었다. 나 또한, 누군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두말없이 ‘우리 친언니’라고 대답하게 되었다.
언니가 내 목숨을 구해주었거나 나를 곤궁에서 구해주었거나 잊지 못할 큰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냐고 물으면 딱히 그럴 만한 사건은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친구 앞에서 절대로 잇속을 못 챙기고, 형제들한테 모든 걸 다 해주어야 직성이 풀리고, 불의를 보면 대책 없이 정의의 사도가 되고자 해 우리를 당황시키고, 장녀로서 불끈 책임감을 느끼며 혼자서 집안의 모든 걱정을 지고, 음… 해결은 잘 못하는^^ 지금 그대로의 언니가 너무 좋다.
가끔 그냥 평범한 사람인 언니가 왜 이렇게 좋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 항상 진심이 느껴지기에 그런 것 같다. 언니는 크고 작은 모든 행동에 꾸밈이 없다. 현란한 잔머리가 돌아가는 세상에서 알아도 모른 척해주고 본인이 힘들어도 손해 보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남에게 모진 마음을 먹지 못한다. 옆에 있으면 그냥 편안하다. 며칠을 끙끙 앓던 고민도 언니에게 털어놓으면 그 순간 힘든 마음이 사라지니, 언니에겐 신기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언니가 참으로 행복했으면 좋겠다. 누구나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이고 상대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줄 아는 사람, 그런 사람을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림7_꽃

오순환 작. <민불(民佛)>
캔버스에 아크릴.
193x130cm. 2000.


 

영원한 나의 소울 메이트 지은 엄마 수정씨!

현연실 / 53세. 회사원. 창원시

지은 엄마! 수정씨.
뭐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지 가슴이 먹먹해져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네요.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나의 둘째 아이 고은이가 유치원에 입학했을 때였죠. 첫 짝꿍 친구가 지은이였는데 그때 애들이 다섯 살이었으니, 벌써 14년이 흘렀네요.
유치원 3년을 다니면서 아이들도 정이 들었지만 어느새 엄마들까지 친구가 되어 틈날 때마다 만나고 같이 여행도 다니면서 많은 추억을 만들곤 했었지요. 하지만 얼마 후 저에게는 IMF 위기가 쓰나미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휩쓸고 갔어요. 허탈하게 맥 놓고 당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 참 모질고 모진 시간이 닥치고 있었죠.
가진 것을 한순간에 다 잃고 내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떠나서 어쩔 수 없이 시댁으로 들어가게 됐을 땐 죽는 게 차라리 낫겠다 싶어 목 놓아 울기도 많이 울었어요.
큰아이 결이는 한창 예민한 중2, 막내 고은이는 초등학교 3학년.
유난히 더운 여름이었을 거예요. 하루 종일 일하고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면 어린 딸 고은이는 긴 머리를 혼자 감고 채 말리지도 못하고 쓰러져 자고 있었어요. 그때 고은이의 머릿속에 생긴 상처와 딱지들이 아직도 제 마음에 흔적이 되어 남아 있습니다.
아이가 지쳐갈 무렵 지은 엄마가 전화를 했어요. 고은이를 집으로 보내달라구, 지은이랑 며칠 보내게 하고 싶다구요. 처음엔 망설였어요. 너무나 다른 환경 때문에 고은이가 혹여 주눅들까 봐 우리의 처지를 비관할까 봐요. 엄마의 못난 마음은 아이를 잡고 싶었지만 고은이는 지은이 집에 간다니까 너무 좋아 잠까지 설치더라구요.
며칠을 자고 왔었죠. 올 때 가방에는 예쁜 속옷도 들어 있었고 책도 들어 있었고 수영복까지 새로 사서 넣어주었잖아요. 아직까지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어요. 너무나 감사해서 가방을 열어 보고 남몰래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죠. 방학이면 내 자식도 귀찮을 텐데 지은 엄마는 한 번도 그런 내색 안 했어요. 바닷가도 데리고 가고 놀이동산도 데리고 다니면서 고은이의 황량한 유년 시절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채워주었어요.
고은이는 지은이네서 며칠을 보내고 오면 꽃처럼 환해진 얼굴로 엄마 엄마 호들갑을 떨면서 즐거웠던 시간들을 자랑하곤 했답니다. 여름 겨울 방학에 지은 엄마가 없었다면 고은이의 텅 빈 마음속에 무엇을 채워줄 수 있었겠어요. 그런 수정씨의 따뜻한 마음에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까,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잘 살아내야겠다고 다짐했답니다.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정말 인생의 선배 같고 등불 같은 존재였고 영원히 그런 사람으로 남아 있을 지은 엄마. 내 인생의 구원투수처럼 힘들 때면 홀연히 나타나 아무런 대가 없이 수렁의 늪에서 나를 건져주었던 거, 지은 엄마는 모르죠? 모를 거예요.
내가 밑바닥까지 가지 않았다면, 예전처럼 잘 먹고 잘살면서 오만하고 건방진 생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면, 지은 엄마 수정씨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의 인생은 절망의 끝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비록 지금도 해결해야 할 일이 산같이 많고 아직 반듯하게 서지 못했지만 결코 좌절할 수 없는 건 한결같이 나를 사랑하고 격려해주는 인생의 소울 메이트, 지은 엄마 수정씨가 있기 때문입니다.
수정보다 맑고 고운 지은 엄마!!! 너무나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우리 죽을 때까지 영원한 소울 메이트로서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늙어가요. 정말 정말 사랑합니다. ♥♥♥

2010년 11월호 에세이 앤 갤러리와 함께한 작가는 오순환님입니다. 1988년 경성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그동안 16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단체전을 열었으며, 아련한 여운이 남는 시 한 편을 보는 듯한 그림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이 꽃”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작품엔 유난히 꽃과 함께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2010. 11. November 월간마음수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