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사랑이 되게 하는 향기로운 사람
꽃처럼 어여쁜 사람, 곁에 두고 사시는지요.
힘들고 고단한 세상을 그래도 살 만한 세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어둠이 내려도 별처럼 환하고 따뜻하게 마음을 밝혀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있어 우리가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소리 없이 다가와 우리네 삶을 꽃피우게 하고는 흔적 없이 머물러주는 이들 덕에 꽃피운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나 봅니다. 어느 시인의 표현처럼, 그런 가을엔 너도 나도 익어 사랑이 됩니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그들은, 꽃보다 아름답습니다.
사람에게 사람이란 무엇인가
김형민 / SBS PD
방송국 PD로서 기구한 팔자와 사연을 지닌 분들을 일삼아 만나는 동안 어지간히 덤덤해졌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새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는 어머니를 구해 달라는 마흔의 딸과 함께 충청도로 내려가는 봉고차 안에서 나는 글썽거리는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차단하느라 무진 애를 써야 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그녀의 어조로 옮겨 본다.
“지금 만나러 가는 엄마는 사실 저 스무 살 때까지 만나지 못했어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이유 없이 집을 나가시고 엄마도 결국 저희를 버리셨거든요. 고아 아닌 고아가 됐죠. 초등학교 때부터 남의 집살이하며 밥하고 아기 보고 그랬죠.
그렇게 지내다가 아버지가 계신다는 제주도에 가게 됐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폭력적인 데다 일체의 돈을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학생 때는 아버지 친구분이 하는 레스토랑 곁방에서 잠을 자고 청소를 해주면서 먹고살았지요. 중학교를 간신히 마치고 부산에 있는 산업체 부설 학교로 갔어요. 공장 다니면서 졸업장만은 받겠다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어요.
서울에서 일을 하다가 남편을 만났어요. 말단 공무원이었지만 사람도 참 순하고, 그래서 알콩달콩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왜 이혼했냐구요? 남편이 경마에 미친 거죠.
엄마는 혼자 사시면서 장사를 하시다가 지금 새아버지를 만났어요. 엄마가 생활력이 좋으셔서 식당도 서너 개를 운영하셨대요. 그런데 새아버지가 다 깽판을 쳤어요. 술만 안 먹으면 그런 샌님이 없으신데 술만 먹었다 하면 괴물이 되는 거예요.
저 복도 지지리도 없는 여자죠? 부모 복 없는 데다 남편 복까지 없고, 내 한 몸 지탱하기도 어려운데 주변엔 도와줘야 될 사람밖에 없어요.
그래도 PD님, 저는 인복이 있는 사람이에요. 무슨 말이냐구요? 호호~ 눈 둥그레지시네요. 제주도에서 중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세요. 레스토랑 곁방에서 생활하다 보니 신발엔 구멍이 나고 옷에선 늘 냄새가 나고 그랬죠. 선생님도 그 사정을 아시고 제게 늘 잘해주셨지요. 하루는 선생님이 저를 부르시더니 심부름을 시키시더군요. 시장에 가서 어떤 가게들에 뭘 전해달라세요. 종종걸음으로 시장에 갔죠.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어요.
처음 간 데는 신발 가게였는데 제가 선생님 물건을 전해주자마자 가게 주인이 ‘아, 네가 걔구나?’ 그러더니 신발을 고르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이미 돈을 맡기고 가셨대요. 모자라면 나중에 더 치르고, 남으면 제게 주라고 하셨다는 거예요. 얼떨결에 신발 하나를 신고 왔는데 다음 심부름할 가게 간판을 보니 속옷 가게였어요. 거기서도 사장님이 똑같이 말씀하시더군요. 선생님이 그랬대요. ‘마음 같아선 같이 와서 사주고 싶은데 다 큰 여자애 속옷을 골라 줄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그러니 좀 이쁜 걸로 골라주세요.’ 그다음에는 옷 가게였어요. 심부름을 끝내자 저는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았죠. 미울 정도로 고마웠어요. 어떻게 사양하지도 못하게 상황을 꾸며 놓으셨잖아요. 사람이 기쁘고 고마워도 눈물이 솟구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서럽고 슬픈 것에만 눈물이 쓰이는 건 아니라는 걸.
산업체 부설 학교에 다닐 때예요. 주경야독이라는 말이 있지만 낮에 일하고 밤에 책 편다는 거 참 힘들더군요. 힘겨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는데 갑자기 밤에 웬 남자가 찾아왔대요. 놀라서 나가 보니 선생님이셨어요. 서울에서 무슨 회의가 있어서 나오셨다가 ‘뭍에 나온 김에’ 부산에 들르셨다는 거예요. 뭍에 나온 김에…라니요. 서울 부산이 어딘데. 제가 잘 살고 있나 궁금하셨던 거지요. 선생님은 금세 밤길을 재촉하며 떠나셨어요. 그 뒷모습이 뭐랄까 제게는 큰 산 같았어요. 거인 같았어요.
졸업장을 타자마자 바로 제주도로 달려갔죠. 졸업장을 보여 드리니까 선생님이 저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며 하시는 말씀이, ‘고맙다. 이렇게 커줘서. 나는 네가 이렇게 이쁘게 클 줄 알았다’ 하시는데 저 어린애같이 울었어요. 엉엉 울었어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됐습니다, 멋있는 멘트까지 생각하고 갔는데 아무 말도 못 했어요. 선생님 댁에 가니까 사모님이 사법고시 패스한 사람한테도 차려줄 것 같지 않은 진수성찬을 차려 놓고 기다리고 계셨어요. 제 생애 처음이자 최고의 만찬이었지요.
지금도 그 상상을 하면 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킥킥 웃게 돼요. 생기기는 산적 두목급으로 생긴 선생님이 돈 들고 여자 속옷 가게, 양품점, 구두 가게 돌아다니면서 이러이러한 애가 올 텐데 알아서 좀 잘 골라주시라고 사정하고 다니시는 모습 말이에요. 그리고 제가 졸업장을 드렸을 때 그 험상궂은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 뚝뚝 떨어뜨리던 그 모습도 그렇구요. 아무리 팍팍한 상황이어도 한순간 그걸 제압해 버릴 수 있는 추억이 있다는 거, 그런 흐뭇한 추억이 머릿속에 뿌리박혀 있다는 거, 그것만 해도 저는 행복한 사람 아닐까요. 아무리 팔자가 기구해도 말이에요.”
이 얘기를 하면서 그녀는 일곱 번도 더 굵은 눈물을 보였다. 슬픈 얘기를 하며 통절하게 울었고 기쁜 추억에 들떠서 울었다. 그 눈물 앞에서 내가 든 생각은 한 가지 질문이었다. 사람에게 사람이란 무엇인가.
천사표 구멍가게 아주머니
김종필 / 65세. 대학 강사. 경기도 용인시
오전엔 강의실로, 오후엔 ROTC 훈련으로, 저녁엔 아르바이트로…. 이것이 1960년대 말 나의 대학 생활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정 무렵 파김치가 되어 생활관으로 돌아와서는 식당을 뒤져 겨우 저녁 한 끼를 해결하고서야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하지만 어느 때엔 아무리 뒤져도 먹을 것이 없었다.
이럴 때면 뒷동네 골목에 있는 허름한 초가집 구멍가게에서 라면-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삼양라면이 나왔을 때다-으로 때우곤 했다. “라면 좀 끓여주세요” 하면, 졸고 있던 젊은 대구집 아주머니는 반가이 맞이하면서 라면에 식은 밥을 듬뿍 넣고 여기에 김치까지 내놓아 허기를 면하게 해주었다. 그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아주머니는 끓여줄 땐 25원 하는 라면값을 15원만 받았다. 학비에 생활비에 심신이 지치고 한 푼이 아쉬운 학생에 대한 배려였으니, 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가?
이뿐만 아니었다. 이 동네에는 지방에서 올라와 사글세를 살면서 공장으로 출근하는 여공들이 많았는데, 아주머니는 치부책에 여공들 스스로 상품을 기록만 하고 생필품을 외상으로 가져갈 수 있게 했다. 그러다가 외상값을 갚지 않고 살짝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여공도 있었지만 아주머니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몇 푼 안 되는 돈을 못 갚고 이사 갈 때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겠나” 하면 그뿐이었다. 4년 동안 정이 들었다며 졸업식 때에는 꽃다발을 한 다발 안고 졸업식장에 직접 찾아오기까지 하셨던 아주머니. 천사가 있다면 이런 사람이 아닐까?
이런 사람이 하늘 복을 듬뿍 받고 자자손손 행복하게 살아야 마땅할 터인데, 아주머니 큰아들이 사업을 한답시고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집을 경매당하고 옥탑방에 셋방으로 전전하던 적도 있었으니 세상 참으로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하며 마음속으로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생각일 뿐. 그런 때에도 어쩌다 찾아가면, 멀리서 온 자식 대하듯 반가이 맞아주고 늘 환하게 웃으며 생활하는 아주머니를 보면서 하늘은 마음이 큰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주고자 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행복하다 불행하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만이 느끼고 있는 마음의 세계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 것이다.
지금은 꼬부랑 할머니가 됐을 구멍가게 대구집 아주머니. 너나없이 춥고 배고프던 시절이 훈훈하고 따뜻하게 기억될 수 있도록 추억을 남겨주고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신 아주머니는 내 인생의 꽃보다 아름다운 존재이다.
천사표 구멍가게 아주머니
김도연 / 35세. 직장인. 충남 논산시
“처음 봤을 때 언니의 밝은 모습이 참 좋았어요.”
나는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아이는 나의 첫인상은 이러이러했다며 늘 좋게 이야기해준다. 약 6년 전, 이곳 충남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하며 만난 그 아이는 똘망똘망 맑은 눈망울에 조금은 수줍음이 많은, 나보다 네 살 어린 동생이었다.
같은 파트에서 일을 하고, 같은 기숙사를 쓰는 덕에 우리는 거의 24시간 붙어 지내게 되었다. 하지만 둘 다 성격도, 일하는 모습도 정반대였기에 처음에는 부딪힘도 많았다. 그 아이의 수줍은 성격과 자신의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 모습에 난 답답해했다. 한번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사람들이 지나가든 말든 큰소리로 싸운 적도 있었다. 그때는 일에 지치고 사람들 때문에 참 힘들다고 느꼈다.
그렇게 거의 한 해가 지나갈 때쯤이었다. 기침으로 병원을 찾게 되었고 폐결핵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내가 왜 그렇게 다른 사람들 모습에 힘들어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가 답답한 게 아니라 내가 그만큼 예민했었다는 것을. 오히려 그 아이는 말없이 나를 도와주고 있었다는 것을.
그간 그 아이의 노력이 어떠했는지는 훗날 다른 동료들의 입을 통해서도 수없이 확인할 수 있었다. 나의 가시 같은 말들에 상처받은 동료들에게, 그래서 나에 대해 불평하는 동료들에게, 그 아이가 얼마나 열심히 얼마나 조심스럽게 내 편을 들어주었는지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에게 왜 그리 예민하냐고, 왜 그리 사람들을 힘들게 하냐고, 한 번도 묻지도 않았고 탓하지도 않았다. 후에 내가 결핵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 그 아이는 도리어 나에게 잘 보살펴주지 못해 너무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또 나는 뭐든 잘 외우지 못하고 잘 잊어버린다. 그런 나를 그 아이는 알람처럼 챙겨주었다. 폐결핵에 걸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결핵은 약을 먹다 안 먹다 하면 내성이 생겨서 2차 약을 먹어야 하고 2차 약마저 내성이 생겨버리면 치료하기 힘들다. 그 이야기를 딱 한 번 했을 뿐인데 6개월 동안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나의 약을 챙겨주었다. 아파 누워 있으면 밥을 떠다주고 밤새 일을 해야 하는 날이면 같이 밤을 새워주고, 내가 힘들어할 때면 함께 밤하늘의 별을 보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주었다.
6년이 지나 난 한 아이의 엄마가 되고 이제 서로 다른 파트에서 일을 하게 되었지만, 지금도 그 아이는 나의 힘이 되어주고 길잡이가 되어주고 있다.
나에겐 꽃보다 아름다운 그 아이. 끊임없이 긍정적인 마음을 심어주던 그 아이 덕분에 나는 이제 세상 모두를 그렇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을 키워가는 것 같다.
주영아! ㅋㅋ. 이름 밝혔다고 펄쩍 뛰며 민망해할 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나는 꼭 말하고 싶다. 차주영,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