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관 24세. 한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서울시 송파구 문정동 끝자락, 고층 빌딩들 사이에 낮게 모여 있던 비닐하우스들. 사람들이 ‘개미마을’이라 불렀던 그곳이 나의 고향이자 나의 마음을 길러준 뿌리이다. 개미마을은 1980년대, 집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빈 비닐하우스에 들어와 살게 되면서 생긴 마을이었다. 판자를 대고 그 위에 비닐을 덧씌운 판잣집들이었는데, 내가 갓 돌이 지날 무렵 우리 집도 사정이 어려워지며 이곳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다.
사람들 눈에는 ‘가난’한 마을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우리 마을이 좋았다. 주변으로는 논과 밭이 펼쳐져 있었고, 작은 도랑과 큰 나무들 그리고 많은 들꽃들이 있는 곳, 마치 도심 한가운데의 시골 같았다.
인심도 정말 좋았다. 어른들은 마치 동네 아이들을 자신의 아이들처럼 보살피셨다. 지저분한 교복이나 놀다가 찢어진 교복을 보면 무료로 세탁해주고 수선해주던 세탁소 아줌마, 아이들의 머리는 언제나 반값에 잘라주던 미용실 누나…. 그리고 달팽이건설 아저씨들이 있었다. 지물포집, 철물점, 인테리어 하시는 아저씨들이 마음을 모아 조합을 만들어, 사정이 어려운 집의 벽지도 발라주고, 장판도 깔아주고, 고장 난 곳도 고쳐주는 것이다.
그리고 ‘꿈나무학교’라는 곳도 있었다. 부모님이 거의 맞벌이를 하셔서 아이들을 돌봐줄 수 없는 집이 많았기에,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 아이들을 위한 공부방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항상 어른들께 받기만 하며, 또 그런 모습을 보며 자란 나는, 나도 모르게 함께 나누며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몸으로 체득이 되어갔던 것 같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나는 가난이 부끄럽지 않았는데 학교를 다니면서 점점 위축이 되어갔다. 하굣길이면 친구들과 갈림길에 서는 나. 친구들은 높디높은 패밀리아파트로 향하고, 나는 개미마을로 들어선다. 점차 나를 떳떳하게 드러내는 것도, 친구들을 집으로 부르는 것도 부끄러워져갔다. 항상 전해지는 철거 소식, 불안해하는 부모님과 마을 어른들, 가난한 자와 부자로 나뉘는 사회의 시선들 속에서 겪게 되는 억울함과 분노, 열등감…. 그런 것들이 마음속에 쌓여갔다.
그러다 내가 고1이 되었을 때 우리 마을에 ‘무지개빛청개구리’라는 청소년들을 위한 정식 공부방이 생겨났다. 이곳에 전담 교사로 오신 이윤복 선생님이 제일 먼저 추진한 것은 밴드를 꾸리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의 낮아진 자존감을 끌어올려주고, 자신감도 심어주고, 서로 간에 끈끈한 정도 심어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곳을 줄여서 ‘무청’이라 불렀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음악을 가르쳐주셨다. 기타, 베이스기타, 키보드, 드럼…. 내가 배운 것은 드럼이었는데, 처음에는 악기가 없어서 폐타이어를 가지고 연습을 했다. 음악을 잘 몰랐지만, 그렇게 연습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다.
“왜 우린 여기서 태어난 거죠?” “불쌍하게 보지 마.” “우릴 그냥 내 버려둬요.”…
노래를 하며 우리 속에 맺혀 있던 그런 것들을 풀어갔던 것 같다. 우리는 평소에는 걸어 다니면서 차비를 모으고,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모았다. 거기에 어른들이 후원해주시는 비용을 보태 점차 악기들도 구비가 되어갔다.
두 달 만에 첫 공연, 사람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청개구리밴드’가 잘한다는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서 우리를 불러주기 시작했다. 마을 할머니들을 모시고, 또 우리와 비슷한 비닐하우스 촌에 응원 공연도 갔다. 일년에 한 번씩은 어려운 이웃을 위한 모금 공연도 했다. 드럼을 칠 때마다, 사람들이 환호해줄 때마다, 내 안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우리도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구나, 나도 할 수 있구나~! 나는 가난하니까, 나는 과외를 받을 수가 없으니까, 나는 ~가 안 되니까, 그렇게 탓하고 핑계를 대기보다, 우리가 잘하는 것을 찾아 하면 되겠구나, 하는 자신감도 싹터갔다.
이제는 그렇게 같은 시기를 보냈던 친구들과 동생들이 다들, 대학생이 되고 직장인이 되었다. ‘우리에게 ‘무청’ 같은 공간이 없었다면?’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어떤 반항을 해도 언제나 그다음 날이면 아무렇지 않게 안아주던 선생님, 몇 번의 철거 위기 때마다 공간을 마련할 수 있게 도와준 마을의 어른들, 아무 대가 없이 우리의 공부를 봐주던 대학생 선생님들….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꿈을 찾을 수 있었을까?
그래서 우리는 특별히 약속을 하지 않았어도 이곳에 온다.
이곳에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듯한 아이들이 있다. 소극적이고, 자신 안의 열정은 있지만 스스로를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친구들…. 태곤이는 직장을 다니는데, 퇴근하면 항상 이곳으로 와서 동생들을 챙긴다. 미술을 전공하는 성욱이는 만화 동아리를, 성국이는 베이스기타를 가르쳐주고, 운동을 잘하는 상신이는 아이들과 같이 체육 활동을 한다.
나는 밴드 후배들을 가르치며, 몇 달 전부터, 동네 주부 밴드인 ‘꿈마밴드’를 만들어서 가르치고 있다. 주부님들이 스스로 나도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찾는 기회를 드리고 싶었다. 우리는 이런 활동들을 통해 한 사람이 마음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지 느껴가고 있다.
“꿈을 꾸면 온 우주가 너를 지지해줄 거야.” ‘무청’ 선생님들께 늘 듣던 말이다. 이 말은 늘 나에게 위로가 되어주었던 말이다. 좁은 골목 끝에도 푸른 하늘은 언제나 공평하게 펼쳐져 있었다. 조금 거창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공평하게 온 세상이 평화로워질 꿈을 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