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사회를 위한 진정한 길일까?
평생의 의문, 그 답을 찾다
최상림 55세. <마음코칭센터> 이사,
전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
대학 시절 야학 교사를 시작했다. 공부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 못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학생들은 늦은 밤, 하루 12시간 일하고 온 피곤한 몸으로도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열심히 공부했다.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뛰었다. 가난해서 공부 못 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 모두가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내 한 몸 바쳐보자 결심했다. 졸업 후 교사 발령이 났지만 노동 현장으로 들어갔다. 노동자 스스로 자존감을 가질 수 있도록 교육하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목소리를 냈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그 신념 하나로 20년 이상 한길을 걸어왔다.
그러다 40대에 접어들면서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젊었을 때는 내가 원하는 사회 변화가 금방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고 정권이 바뀌어도 사회는 변화되지 않았다. 더더구나 내 마음이 문제였다. 사회 정의를 실현하겠다 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에는 정의가 없었다. 같은 뜻을 실현하려고 모인 사람들 속에서도 늘 남과 비교했고, 내 뜻대로 맞춰주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미움이 있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짜증이 나고, 사람에 대한 편견, 미래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무리 사회가 변한다 해도 내 마음이 그대로라면? ‘너가 잘못했어’ 하며 외부로 향하던 시선이 자꾸 나의 내면으로 맞추어졌다. 어떤 것이 사회를 위한 진정한 진리일까, 그걸 찾고 싶었다.
명상 서적을 읽고 관련 강의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마음은 다스려지지 않았다. 다 맞는 말인 것 같긴 한데 무척 어려워 가르침의 본질에 다가가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러다 어느 스님의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어 질문을 했다. 스님께서는 "동양의 가르침은 책에 있지 않고 깨달음에 있습니다. 진리에 대한 욕구가 있으면 시간을 내어 그런 프로그램을 직접 하십시오. 직접 하면서 본인이 느낀 깨달음의 내용을 가지고 삶을 사십시오"라는 답을 해주었다.
과연 그렇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마음수련을 택했다.
45년의 살아온 내 인생이 비디오 한 편처럼 펼쳐졌다. 나는 내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보고 버리고, 보고 버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내 무의식의 뿌리를 보게 됐다. 사회 변화를 위해, 여성 노조원들을 위해 일해 왔다고 했지만,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해 왔던 내 모습. 내 일생 전체가 ‘인정받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잘것없는 지식과 알음알이로 세상을 다 아는 양 판단하고 주장하며 살아왔던 내 모습이 부끄러웠다. 그런 내가 너무 싫어서 버리고 또 버렸다. 그렇게 버리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수련실에서 나와 바깥 풍경을 보는데, 일체 사물의 구분이 없어져 버렸다. 마당에 있는 차도, 소나무도, 하늘도, 바위도 그 경계가 사라지고 하나로 다가왔다. ‘너와 나의 경계는 내 마음이 만든 거였구나, 그 마음이 없으니 일체가 하나인 본래이구나.’
세상은 하나의 본성에서 나와 완전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있는 그대로 완전한 세상에 내가 이미 살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는 모든 관습과 규율을 벗어나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진정한 혁명은 내 자신의 변화로부터 시작되는 거로구나! 순간, 나는 내가 평생 동안 갈구했던, 정의롭고, 평등하고, 따듯한 세상이 되는 방법을 찾았음을 알았다. 각자가 내 마음부터 버리면 원래 세상은 하나였음을 알게 되고, 자연히 남을 위해 살게 되는 것이다. 나보다는 남을 먼저 살필 줄 아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친구야,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장현동 45세. 충청남도농업기술원 농업연구사.
충남 예산군 신암면
"김상원~! 정말 오랜만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했는지 아니?"
김상원! 17년간을 그토록 찾아 헤매던 고등학교 친구다. 간절한 그리움이 통했던 것일까. 스무 살에 헤어졌던 그 친구를 삼십 대 중반을 넘기고 다시 만났으니 말이다.
1982년, 상원이와 나는 대구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나는 경북 예천에서 친구는 경북 군위에서 대구로 유학을 온 것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상원이는 항상 흰 고무신을 신고 다녔다. 말수도 별로 없었던 그에게는 강인함과 순수한 인간미 같은 게 있었다. 자취방이 없어서 독서실 같은 곳을 돌아다니며 살면서도 언제나 의연했다.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어떤 지원 없이도 공부도 굉장히 잘했다. 그런 친구가 대단해 보였다.
고3 때는 같은 반, 내 짝이 되었다. 같은 시골 출신이어서 그런지 상원이와는 처음부터 통하는 면이 있었다. 도시락도 나눠 먹고, 공부도 함께 했다. 당시 나는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난 상원이에게 아예 나랑 같이 자취를 하자고 제안을 하였다. 몇 번을 거절했지만,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함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친구와 함께 지내는 동안은 힘든 고3 생활 속에도 의지가 되는 시간들이었다.
참 추운 겨울날이었다. 한참을 찾다가, 해가 지고 어두워질 무렵 학교 교실에서 친구를 발견했다. 돌아가자는 제안을 완강히 거절했지만, 나의 간곡한 설득에 친구는 다시 나의 자취방으로 돌아왔고 우리는 함께 공부할 수 있었다. 속설과는 달리 우린 둘 다 모두 대학에 합격했다. 친구는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하는 영광을 안기까지 했다. 친구는 서울에서, 나는 대전에서 대학교 1학년을 보냈다. 그리고 여름 방학 때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친구는 과가 맞지 않아, 공과대학으로 다시 지원해서 가야겠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그해, 재수를 준비하는 그를 대구의 어느 독서실 앞에서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이후부터 소식이 끊어진 채로 17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대학 생활, 군대, 제대, 복학, 취직, 결혼…. 바쁜 생활 중에도 문득 친구 생각이 날 때면 그리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드디어 우리가 만난 것은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창일 때였다. 우연히 경북 군위가 고향인 사람을 만나, 그의 고향집 전화번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친구의 어머니를 통해 그가 서울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를 만난 날, 난 잃어버린 기억을 찾은 것 같아 정말 기뻤다. 1박 2일을 함께 지냈다. 친구는 대학 자퇴 후, 돈을 벌기 위해 원양어선도 타고, 죽을 고비도 넘기는 등 이런저런 인생의 고비를 거쳐 왔다고 했다. 가정환경이 워낙 어려워서 혼자 일어서기 위해 노력하다가 좌절도 했었다. 그러나 그 고비를 거쳐 지금은 두 아이의 아빠요, 안정된 직장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평탄하지는 않은 삶을 살았지만 고등학교 3학년 때의 그 모습과 행동 그리고 마음 씀씀이는 하나도 변하지 않은 듯했다. 정말 다행스럽고 감사한 일이었다. 그 뒤로도 우리는 몇 번을 만났다. 그리고 만나지 않을 때도 종종 그 친구를 떠올리면 참 좋다.
무엇이 그토록 그 친구를 찾아 헤매게 했던 것인가? 그것은 바로 내가 가지고 있지 못한 나의 다른 반쪽을 그 친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줄 수 있고, 나눌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그 순수함을 그토록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상원아. 우리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 어려울 때 서로 돕고 함께 서로의 꿈을 향해 힘차게 살아가자. 피보다 진한 우정을 간직하자. 항상 건강하고 행복해라.
인생 마지막 길에서 찾은 희망
추수연 83세. 서울시 방화11종합사회복지관 일본어 강사
비가 내립니다. 소리 없이 촉촉이 내 가슴에 비가 내립니다. 기나긴 세월 동안 구슬비는 내 가슴에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잃어버린 60년. 전란의 6·25사변. 그날도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요. 북한 인민군의 총소리가 내 인생의 영원한 한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꿈 많은 여대생으로 상경하여 1950년 5월에 숙명여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대학교수를 꿈꾸며 석사 과정을 밟으며 명륜동 단칸 하숙집에 몸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6월 25일 새벽 총소리가 심심치 않게 들렸습니다. 총대는 남자가 쥐고 전란의 바람은 여자가 맞고. 내 청춘도 움트지도 못하고 포(砲) 소리에 묻혀 버렸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며 교수의 꿈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국군이던 윤덕봉씨와 결혼을 했습니다. 남편은 종전 3개월 전에 부상을 입고 이후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지만, 너무 착한 사람이었기에 반세기를 함께 살았습니다. 꿈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여고에서 교편 생활도 하고, 기자 생활도 하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내 얼굴에는 주름이 가고 전쟁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던 남편도 3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작년 12월부터는 우리 동네의 복지관에서 정가든(‘정이 가는 든든한 우리 마을’ 활동) 회원을 대상으로 매주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민들에게 일어를 가르칠 사람을 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지원을 했지요. 왜정시대 때 일본어로 교육을 받다 보니 일어에는 익숙했으니까요. 어린애를 데려와서 배우는 주부도 있고, 세상 물정에 싫증이 난 사람도 있고, 환자도 있고,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어도 일어지만 그네들의 인생에 보탬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인생을 즐겨라, 팔십 고개 지나서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다. 이 체면 저 체면 잘난 척 못난 척, 다 필요 없다. 내 인생은 내가 살아야 된다. 울지 마라. 인생은 잠깐이다. 어느 시점에는 나를 버리고 간다. 내 식구를 사랑하고 내 주위를 사랑하고 인생을 즐겨라. 인생은 결국 간다. 살 사이에 즐겁게 살자."
그렇게 이야기하며 내 살아온 경험도 말해줍니다. 팔십 세가 넘은 사람이 이렇게 열정적으로 가르치니 희망을 가지게 되나 봅니다. 때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록 내 인생이 멋지지 않았지만 남의 인생이라도 도와주고 싶습니다. 그네들의 슬픔에 위안이 되어주고 싶습니다.
기초를 가르치지만 싫증이 안 나게끔 간단한 문장도 가르쳐줍니다. 일본 사람하고 단 한마디라도 대화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입니다. 배울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지 가르쳐주고 싶습니다. 나이가 들었다고 하는 게 줄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도와주면서 포옹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 마지막 길에서 내가 찾은 희망입니다.
한국의 보배 신세대들이여, 즐겁게 사십시오. 나와 내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십시오. 이 나라 대한민국을 빛나게 하시옵소서. 인생은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