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함께 해야 비로소 완전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아내야, 사랑하는 나의 아내야

정태하 55세. 구미상록학교 교장

나는 경북 김천시의 조그만 촌락에서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두들 그러했듯이 먹고살기가 힘들던 때라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을 하고, 어린 나이에 신문 배달, 구두닦이, 생선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그러다 스물셋에 나보다 한 살 어린 아내를 운명적으로 만났다. 마치 여고생마냥 머리를 양 갈래로 늘어뜨리고 웃음 띤 얼굴에, 보조개가 살며시 들어가는 아리따운 모습에 나는 한눈에 반했다. 너무나 가난해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였지만 이담에 꼭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10년 동안 아내와 함께 열심히 일을 했다. 포장마차, 과일 장사, 생선 장사…. 부지런히 일해서 돈도 모으고 어느 정도 성공도 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허전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못 배운 설움 때문이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하고 가정 통신란에 부모 학력을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서, 중학교 졸업 어떤 때는 고등학교 졸업을 했노라고 양심을 속이고 말았다. 여러 모임에 참석을 하곤 했지만 무슨 말을 해도 초등학교밖에 못 나온 사람이라며 무시를 받는 것 같아 항상 꾸어다놓은 보릿자루마냥 가만히 있는 경우가 많았다. 늘 배우지 못했다는 열등감과 설움에 사로잡혀 있던 나는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보! 빨리 갑시다” 아내가 내 손을 잡고 야간학교에 데려갔다.

“난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거야. 내가 식모살이라도 해서 도울 테니 공부를 시작해 봐요.” 내가 방황만 하고 있을 동안 오히려 아내는 이런저런 방법을 찾아본 것이다.

그것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처음엔 내가 서른이 넘어 무슨 공부를 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리고 남들에게 들킬까 봐 숨죽여 가며 야간학교에 다녔다. 굳어진 머리로 공부를 하는 것 또한 쉽지가 않았다. 힘들어지면 나는 또 술을 마셨다. “나는 안 돼” 하면서 창문 밖으로 책을 마구 집어던졌다. 그러면 아내는 무조건 내가 잘못했으니 이러지 말라며 남몰래 책을 주워다가 살며시 머리맡에 놔두고는 하였다. 그리고는 두 손을 꼬옥 붙들고 “배우지 못한 설움이 죄는 아니다”라며 내 마음을 어루만져주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바라지 덕분에 차츰 공부에 재미를 붙인 나는 3개월 만에 고입 검정고시 합격증을 받았다. 나는 아내에게 “여보! 고맙소” 하며 머리를 파묻고 엉엉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내도 말없이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흐느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싹텄고 대입 검정고시, 대학, 대학원까지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93년 나는 야학교를 설립했다. 나처럼 가난 때문에, 혹은 갖가지 형편 때문에 공부의 기회를 놓친 사람들, 배움에 목마른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었다. 90세가 가까운 할머니도 계시고, 주경야독으로 공장에서 일하면서 어렵게 공부하는 청소년들도 온다. 지금까지 천여 명이 넘는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한글도 깨우치지 못했던 어르신들이 글을 읽고, 손수 은행에 가서 통장도 만들고 스스로 버스를 타고 학교까지 등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나도 모르게 감개무량함을 느낀다.

2008년부터는 대안학교를 설립하여 정규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위기의 청소년들도 맡아 가르치고 있다. 처음에는 출석조차 안 하는 애들을 일일이 찾아가서 데려다놓고, 그러면 또 도망가고…. 그렇게 일년 정도 지나면 열심히 공부를 한다. 졸업할 때는 졸업식장이 온통 눈물바다가 된다. 그리고 자기를 붙잡아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할 때면, 내가 방황할 때 붙잡아준 아내 생각이 난다.

지난날 아내가 그토록 믿고 기다려주지 않았다면 나에게 이런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이제 아내와 나는 중년이 되어 마주하고 있다. 아내는 40대 초반에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아야 했다. 아내가 입원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내의 깊은 사랑을 깨닫게 된 나는 항상 받기만 하며 살아왔던 지난 세월이 너무 부끄러웠다.

아내가 퇴원한 후, 나는 아내에게도 공부하라고 독려했다. 그렇게 검정고시에 합격한 아내는 올해 사회복지학과에 다니는 대학생이 되었다.

가난하고 못 배운 게 죄가 아니라, 방법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고 환경 탓으로만 돌리던 나약한 내 삶을 바꿔준 진정 용기 있는 아내. 아내가 있었기에 나는 살아 있음에 감사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 아내를 만난 나의 삶에 감사한다. 아내야 사랑하는 나의 아내야.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닥종이에 혼합 채색. 65×52cm. 2008.

지금 소중한 나의 친구도

처음엔 낯선 사람이었다

이태희 30세. 직장인.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4년 전, 나는 일본으로 향했다. 똑같은 일이라면 외국에서 한번 해보고 싶었다. 일본 회사에 입사하여 신입 사원 공동 수련회에 가게 되었다. 장소에 도착한 후 같은 방을 쓰게 된 사람들끼리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목소리가 밝고 활발한 그 친구와는 동갑이었고, 취향도 비슷해서 우린 급속도로 친해졌다.

첫날부터 힘든 일정을 소화한 우리들의 마지막 코스는 목욕탕이었다. “등 밀어줄까?” 그 친구는 스스럼없이 등을 밀어주겠다며 다가왔다. 일본 사람이 선뜻 다가와 등을 밀어주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어서 놀랍고 고마웠다. 나는 보답으로 그 친구에게 양 머리 수건을 만들어주었고, 그 친구는 만드는 법도 가르쳐 달라고 하며 주위에 있던 다른 친구들도 데리고 왔다.

두 번째 날은 호된 산행 훈련. 나는 그날 모든 훈련이 끝나기도 전에 몸져누워 버리게 되었다. 집 떠나 다른 나라에 온 지 며칠 안 되었는데 고열로 아파 눕게 되니 왠지 모르게 그리움이 밀려왔다. 복받치는 슬픔에 서러워하다 잠이 들었는데, 얼마쯤 지났을까? 방문이 조심스레 열리고 누군가 내 곁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내 이불을 꼼꼼하게 덮어주고는 다시 조용히 방을 나갔다. 그때 참 신기하게도 조금 전까지도 추웠던 침대가 갑자기 따뜻해져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본을 동경해왔지만 처음엔 많은 것이 힘들었다. 일본어도 서툴고, 일본 사람들이 원래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라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용기 있는 선택이었지만, 막상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먼저 따듯하게 다가와준 그 친구를 보며 그동안 힘들었던 마음이 녹아버리는 것 같았다.

수련회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 만남을 이어갔다. 당시 회사에는 원리, 원칙을 따지며 나를 싫어하는 여직원이 있었다. 쓸데없는 오해를 받기도 하고,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 때면 나는 그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그 친구는 언제나 나를 전적으로 믿어주었고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일본의 기본 예절들,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등 어디서도 가르쳐주지 않는 지혜로운 조언들을 해주었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장지에 혼합 채색.

장지에 혼합 채색. 53×45cm. 2010.

일본은 친한 사람과 안 친한 사람의 경계가 확실하다. 힘든 얘기를 할 수 있는 사람과 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가 확실해서, 얘기를 하면 안 되는 것을 하면 굉장히 큰 실례로 여긴다. 그런데 그 친구는 힘든 얘기를 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가 되어 소박하게 사는 것이 꿈인 친구, 하지만 작은 만남도 소중하게 가꿀 줄 아는 그녀에게서 내가 느낀 것은 그 어떤 사람보다도 넉넉하고 아름다운 마음이었다.

일본에서 2년 좀 넘게 일을 하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까지도 그 친구와 여전히 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있다. 그 친구를 위해서 해준 것이 없어 미안함이 많다. 언젠가 한국에 오면 이번엔 내가 많이 돌봐주고 싶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낯선 사람과의 만남의 연속일 것이다. 지금 잘 알고 지내는 누군가도 처음엔 낯선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첫 만남이 어떠했는가에 따라 친구가 될 수도, 계속해서 낯선 이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그 낯선 첫 만남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주었던 내 친구. 힘든 상황의 누군가에게 먼저 건네는 작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인생의 가장 소중한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걸 알게 해준 그 아이에게 고맙다.

만남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안수경 Ahn Studio 대표, 미술칼럼니스트

몇 년 전 지하철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동창 경미를 만났다. 나는 그 친구 앞에 서 있었고 앉아 있었던 내 친구는 책을 읽다가 우연히 고개를 들어 나를 알아본 것이다. 우리는 짧은 시간에 참 많이 반가워했다. 하지만 서로 행선지가 다르고 약속도 있는 상황이어서 전화번호만 주고받고 헤어졌다.

경미는 전공이 비슷했던 영미와는 일 때문에 자주 사회에서 만나는 상황이었나 보다. 그런데 영미는 또 우연히 신원이를 만났다. 신원이는 꽤 오래전에 미국에 간 친구이고 그래서 나와는 연락이 두절된 상태였다. 최근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정말 우연히 길에서 영미를 만났고 신원이는 나를 궁금해했다고 했다. 이 우연한 만남 때문에, 경미와 영미 때문에 나는 그동안 정말 죽었는지 살았는지 궁금했던 신원이를 드디어 만나게 되었다.

신원이가 더욱 반가운 것은 사실 상희 때문이었다. 신원이는 미국에서 상희와 왕래를 하며 지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민을 간 상희와 나는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다가 연락이 끊긴 지 20년쯤 된다. 그동안 그토록 연락이 닿기를 원했었지만 다시는 소식을 알 수 없을 것 같아 포기했던 상희와 다시 연락이 닿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꿈만 같았다. 우리는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상희와 나와의 만남은 더 큰 만남의 준비 단계일 뿐이었다.

회사일로 미술 전시회에 갔다가 나는 또 뒤에서 “너, 안수경이지?” 하는 한 여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뒤돌아보니 초등학교 동창 미경이었다. 미경이는 자녀들의 미술 교육 차원에서 전시회를 관람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로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다시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미경이는 그날 저녁에 전화를 했고 우리는 한참 동안이나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한두 달쯤 지났을까? 상희가 한국에 잠깐 온단다. 그것은 상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 했다. 아, 이렇게 척척 맞아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인가? 반창회를 할 만한 연락망이 바로 얼마 전의 모든 우연한 만남으로 준비가 된 것이다.

졸업한 지 벌써 30년. 우리는 서로 몇몇 친구들과만 연락을 주고받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최근의 우연한 만남들이 하나를 캐면 줄줄이 따라 나오는 고구마처럼 서로 이어졌고, 상희가 20년 만에 한국에 온다는 소식은 우리가 만나야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되었다.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 우연은 없다’라고 말한다. 정말 우리가 겪은 이 일련의 사건들은 우리의 이 만남을 위해 예정된 과정이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언제부터 이 우주는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에겐 살아가는 날만큼의 많은 만남이 있었다. 그 많은 만남 속에서 정말 멋진 우주의 어떤 힘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 같다.

정영모 작. <고향 이야기>

50×72.7cm.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