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빠, 아빠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 추억들…. 우리들의 아빠 이야기입니다.

이젠 나의 신념이 되어버린 아버지

김구민 43세. 일본 야마나시현 거주. 학원강사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초등학교 앞에서 자그마한 구멍가게를 했다. 정말 코딱지만 한 가게였지만 문방구, 제과점, 슈퍼, 주거 공간이 결합된 ‘초울트라복합융합’ 구멍가게(?)였다. 그땐 그다지 의식하지 못했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못 살았던 것 같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지금도 오른팔을 어깨 위로 올리시지 못하는 후유증이 남았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반신불수로 살아야 할 거라는 진단이 내려질 정도로 큰 사고였다. 아버지에게 가혹한 운명은 연이어 다가왔다. 아버지가 입원해 있는 통에, 혼자 가게를 꾸려야 했던 어머니마저 고된 생활에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어머니의 장례식이 끝나고 운구가 나갈 때 아버지가 구급차에 실려 왔다. 그리곤 구급차 침대에 누운 채로 멍하니 관이 운구차에 실리는 모습을 지켜보곤 다시 병원으로 실려 갔다. 아버지는 울지 않았다.

몇 개월 뒤 아버지의 퇴원과 더불어 우리는 이사를 했다. 이른바 달동네였다. 베니어판으로 엉성하게 지은 방 한 칸짜리 판잣집들로 이루어진 달동네. 아버지는 요리 같은 것은 해본 적이 없는 분이셨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깍두기였다. 큰 함지박에 깍두기를 가득 해놓고 그것만 먹었다. 매일매일 맨밥과 깍두기였다. 아버지는 거의 집에 없었다.

어느새 나도 마흔이 넘은 나이가 돼 버렸다. 가정을 꾸리면서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 줄 미처 몰랐었다. 내가 당시의 아버지 처지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의지박약한 나 같은 인간은 자살하지 않았을까. 아내와 사별하고 성치 않은 몸으로 아들 3형제를 키우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환경이 아닌가.

한 번은 온 가족이 연탄가스 중독으로 큰일 날 뻔한 적이 있었다. 후일 아버지가 그때 일을 말하면서 한마디 하셨다.

“정말 아무 미련도 없었어. 그런데 실패했지. 한 번 실패하고 나니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역시 아버지도 인간이었다. 아버지는 재혼을 하셨고 중고 오토바이로 석유 배달을 시작하셨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기름보일러 대리점을 시작하신 아버지는 고향 후배에게 큰 사기를 당하셨다. 서울 본사에서는 내려보내기로 한 보일러들을 모두 동결시켜 버렸고 오히려 아버지를 사기죄로 집어넣겠다고 나섰다. 나도 잘 알던 그 후배 아저씨는 병을 핑계로 입원을 해서 아버지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서울로 올라가서 사장에게 자신의 말을 한마디만 들어 달라고 면담을 신청했다. 여관에 방을 잡고 몇 날 며칠을 비서에게 애원하자 사장이 한번 만나나 보자고 승낙을 하셨단다. 사장실에서 커피를 마시고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사장 앞에서 아버지는 정말 한마디만 하셨다.

“전 제 삶이 부끄럽지 않습니다, 사장님.”

사장은 한동안 물끄러미 아버지의 눈을 응시하고선 비서에게 아버지 앞으로 된 모든 어음을 돌리지 말 것이며 아버지가 필요한 만큼의 보일러를 당장 내려보내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각서라도 쓰겠다고 볼펜을 집어 든 아버지를 향해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당신 눈을 봤지 않습니까. 그걸로 됐습니다.”

후일 그 사장님의 사업이 어려움에 처했 때, 아버지 또한 집을 담보로 잡히면서까지 그 사장님을 도왔다고 하니 참 세상이 그렇게 더럽지만은 않은가 보다.

몇 년 전부터 갑상선으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는 형제들에게 ‘큰 병이라도 걸려서 자식들한테 폐 끼칠 바에는, 어느 날 갑자기 깨끗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단다.

작년에 한국에 갔을 때 상처투성이인 아버지의 손을 억지로 잡았다. 몇 번 뿌리치시다가 내가 힘을 꾹 넣어서 잡았더니 힘을 푸시고 손을 맡기신다. 그리곤 시선을 피하신다.

“구민아. 나는 지금도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은 내가 돼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잠든다. 힘들겠지만 넌 아직 젊잖아. 열심히 살아라. 힘들고 때려치우고 싶을 때가 있겠지만 너의 땀 흘리는 모습을 누군가는 지켜보고 있단다.”

아버지의 우는 모습을 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자식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할 줄 모르신다. 그냥 묵묵한 바위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의 이 말이 나에겐 신념이 되었다. 볼테르나 괴테가 아니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은 그 누군가가 아니라 오늘도 자식 같은 원장한테 온갖 심한 말을 들으면서도 후줄근한 차림으로 학원 봉고차를 몰러 아침 6시에 집을 나서는 아버지가 이제 내… 신념이다.

오순환 작. <훈장을 단 아버지>

194×13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5

아빠가 삼촌이야? 나 아빠 딸 아니야?

박재윤 35세. 작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항상 꿈을 좇아다니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음악에 한평생을 다 바치신 분이기에 나는 딸로서 내 자리를 스스로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인생을 인정한다는 핑계로 말이다. 어린 내 눈에 비춰진 아버지는 항상 바람 내음이 짙은 분이셨다.

1년에 한 번 내 생일에나 볼 수 있었던 아버지는 코트 자락 안으로 차가운 바람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셨다. 그게 아버지를 표현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 까닭에 자라면서 아버지나 가족은 내가 기대야 할 사람들이 아니라, 나를 세상에 있게 한 사람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라 받아들이며 살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머리가 굵어졌다고 생각되었던 어느 해인가, 음악이라는 것을 해서 아버지가 얻은 것이 무엇이냐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눈에 보이게 이뤄놓은 것은 몇십 장의 앨범들과 오선지들밖에 없지. 그런데 말이다. 아빠가 너에게 다른 아버지들처럼 평범한 아버지의 삶을 보여주지 못한 건 평생 맘의 짐으로 짊어지고 있지만 그것 외에는 한길을 걸었던 인생을 후회한 적은 없단다. 하고 싶은 것을 못 하고 사는 사람들도 많은데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산다는 것만으로도 난 후회라는 말을 할 자격이 없지. 다만 가장 사랑하는 우리 딸을 많이 힘들게 한 것 같아서 미안하구나….”

태어나 처음으로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대화를 나누었고 아버지 또한 이 세상을 힘겹게 살아온 한 남자임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만을 위해 살았다 생각한 아버지도 나로 인해 포기한 것들이 있음을 알았다.

내가 한참 꼬물꼬물 아롱 짓을 할 무렵, 아버지의 밴드는 조금씩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었고 꽤 이름 있는 음반사에서 솔로 제의가 들어왔더란다. 그것은 아버지에게 ‘빛’이었다. 그런데 음반을 내고 라디오 방송부터 인지도가 쌓여갈 무렵, 회사에서 그러더란다. 무조건 방송에서는 미혼이어야 한다고. 그땐 그런 게 참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도 쉽게 생각해 수락을 했고 소녀 팬들도 꽤 따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집으로 걸려오는 전화였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면 어린 내가 다리에 매달려서 “아빠가 삼촌이야? 나 아빠 딸 아니야?” 하고 묻더란다. 그리고 어린 나의 그 말이 아버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왕방울만한 큰 눈에 그렁그렁 고인 눈물을 보며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지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드셨단다.

아버지는 노래하는 사람이 굳이 사생활을 속일 필요 없다며 고집을 부렸고 결국 회사며 방송국 PD들에게도 미운털이 박혔다. 그렇게 젊은 아버지는 쉬운 길을 포기했다. 그러니 그 이야기를 다 들은 내가 어찌 아버지의 꿈을 위해 나를 내버려두었냐 얘기할 수 있겠는가. 좀 독하게 마음먹지 그랬냐는 나의 말에 아버지는 내 등을 쓰다듬으며 말씀하셨다. “너도 결혼해서 아이 낳아보면 알 거다. 그 어린 것이 겁을 잔뜩 집어먹고 울먹이는데 세상에 어느 아버지가 자기 출세하겠다고 그걸 외면하겠니….”

인생에선 세 번의 기회가 온다는데 아버지의 첫 번째 커다란 기회는 그렇게 나로 인해 물거품이 되었고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오래도록 아버지를 괴롭혔다.

자신보다 더 어린 아내의 남편으로, 고집불통 홀어머니의 외아들로, 아무것도 모르는 한 아이의 아버지로 살게 된 젊은 아버지가 자꾸만 눈에 밟힌다. 철들면서부터 늘 누군가를 부양해야 했던 사람. 기댈 곳 하나 없는 그 심정,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이제 다 커버린 딸내미는 아버지의 어깨를 볼 때마다 가슴 한켠이 시려옴을 느낀다.

제주도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시며 조용히 곡 작업을 하고 계신 아버지.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이상에야 미완성으로 남은 그 꿈을 보상해 드릴 순 없겠지만, 인생의 기회를 반납한 대가로 얻은 ‘나’라는 존재를 통해 기쁨을 드리고 싶다. 아버지의 남은 일생에 언제나 손을 맞잡고 다정히 걸을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친구가 되고 싶다.

아버지, 이제 아버지의 인생을 이해합니다.

오순환 작. <소년>

72×53 cm. 캔버스에 아크릴

2003

아빠와의 걷기 여행 12년째

박진석 17세. 고등학교 1학년. 강원도 춘천시 신동

나는 12년째 아빠와 매년 걷기 여행을 하고 있다. 매년 적게는 1회, 많게는 4회까지, 때로는 하루, 때로는 4박 5일간의 걷기 여행을 해왔다. 아빠 말로는 내가 다섯 살, 정확히는 생후 3년 8개월 1일째 되는 날 처음 아빠와 걷기 여행을 출발했다고 한다.

아빠는 아들인 나와 함께 우리나라 국토를 한 바퀴 돌겠다는 결심을 하셨다고 한다. 아빠는 늘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태어나면 우리나라를 두 발로 걸어봐야 한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야 국토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 때까지는 뭔지도 모르고 아빠가 ‘걷기 여행 가자!!’ 하면 별다른 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그때만 해도 우리 반 친구들 모두가 나처럼 아빠하고 걷기 여행을 다니는 줄 알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만 도보 여행을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걷는 게 힘들다는 것도 알게 되고 야영하는 것도 귀찮아 가기 싫다고 투정과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된 지금은 생각이 좀 달라졌다. 예전엔 갔다 오면 그냥 ‘힘들었다’ ‘몇 킬로미터를 걸었지?’였지만 지금은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중학생이 되고부터 ‘도보 여행 가자’ 하면 별말 없이 따라나섰던 것 같다.

춘천 집에서부터 시작한 걷기 여행은 어느새 가평, 서울, 인천, 충청도, 전라도를 지나 부산을 조금 지난 지점까지 걸은 상태다. 걸었던 마지막 지점까지는 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부터 다시 걷기 시작한다. 특히 아빠는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눈이 내리는 한겨울에도 야영을 하고 밤새 걷기도 한다. 걸으면서 아침을 맞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차를 타고 가면서는 도저히 보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발견하고 보기도 한다.

물론 힘들 때도 많았다. 제일 짜증 날 때는 지도를 잘못 봐서 걸어갔던 길을 되돌아올 때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힘든데 왜 실수했냐고 투정 부리고 그만 걷자고 심술을 부리기도 했다. 한번은 어느 더운 여름날 바닷가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내가 “에고… 힘들다~” “아빠! 그만 걷고 해수욕이나 하자” 하소연을 했더니 아빠가 “이런 아빠 만나서 고생이 많다”라고 하시는 거 아닌가. 난 그냥 한 말인데 아빠가 그런 말을 하니 엄청 미안했다. 그래서 그날은 더워서 땀이 나고 배낭이 무거워 어깨가 아파도 힘들다는 말을 하지 않고 계속 걸었던 것 같다.

아빠 발만 보고 따라가다 자동차 전용 도로인 마창대교라는 길로 잘못 들어가, 결국 경찰차를 탔지만 정말 멋있는 남해 바다를 봤던 일, 겨울에 야영할 곳을 찾지 못해 남의 집 옥상에 텐트 치고 잔 일 등 아빠와 함께 무수히 많은 일을 겪으며 많이 성장한 거 같다.

어릴 때부터 걷기 여행을 다녀서인지 힘든 일이 있어도 즐겁게 하게 된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시키는 모든 심부름을 내가 다 하고 있다. 이상하게 선생님들이 나만 시킨다.(^^;;) 그리고 사춘기 때 욱~ 하는 기분이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럴 때마다 잘 참고 잘 이겨낸 것이 도보 여행을 통해서 길러진 것 같다.

사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네 아빠는 무섭다, 대화도 못 하겠다, 바빠서 얼굴도 못 본다, 이런 말을 듣는데 나에게 아빠는 친구 같은 아빠라는 게 참 감사하다. 어떤 일이든 이야기하면 마냥 떠들 수 있고 그냥 서로 웃는 그런 친구. 아빠와 이렇게 친구가 된 것에는 걷기 여행이 많은 도움이 됐다. 일단 친구가 되려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걷기 여행을 떠나게 되면 대화를 많이 하게 되고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2011년, 10년 만에 부산 해운대에 도착했던 순간은 매우 기억에 남는다. 10년 동안 대한민국의 절반을 조금 더 걸은 셈이다. 그리고 10년간의 이야기를 담아 <아빠와 아들 대한민국을 걷다>라는 책도 발간했기에 더욱 기억에 남는다.

아빠가 한번은 “너도 나중에 결혼해서 아들 낳으면 걷기 여행 할 거니?”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때는 망설임 없이 “아니요”였다. 하지만 지금은 “글쎄요”이다. ‘아니요’에서 점점 ‘글쎄요’로 바뀌는 나 자신이 나도 신기하다.

다시 걸어서 국토 한 바퀴를 돌아 집에 도착하는 그 순간까지 아빠와 함께하는 걷기 여행은 계속될 것 같다. 하지만 그 목표가 달성이 된 이후에도 계속 아빠와 함께하고 싶다. 그때는 내가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이번에는 아빠가 따라오는 것으로 해야겠다.(^^)

아빠, 지금까지 이런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함께해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지금은 잘 모르지만 세상을 보다 넓게 바라보는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 아빠 같은 좋은 친구가 있어서 든든합니다.

오순환 작. <풍경>

100×72cm. 캔버스에 아크릴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