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아빠, 아빠와 함께 쌓아가고 있는 추억들…. 우리들의 아빠 이야기입니다.

아버지의 리어카를 밀어드리지 못했을까

이좌연 47세. 직장인. blog.naver.com/avimss

우리 부모님은 서울 구석의 동네 시장에서 그릇 가게를 하셨다. 하지만 내가 중학교 2학년부터인가 여러 문제로 장사가 잘되지 않았고, 다급해진 아버지는 가게를 어머니에게 맡기시고 따로 장사를 시작하셨다. 가게에서 파는 그릇들을 리어카에 싣고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셨지만 그것도 그닥 잘되지는 않았다.

한동안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다른 것들을 팔기 시작하셨다. 그중 가장 많이 파신 것은 신발과 곶감이었다. 곶감은 제일 이문이 나는 것이었지만 파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다. 지금이야 보관 기술이 발달해서 일년 내내 먹을 수 있지만, 늦가을부터 나오는 곶감은 겨울에만 팔 수 있는 품목이었다.

처음에는 도매상에서 물건을 사서 파시다가 어느 때부터인가는 직접 상주로 내려가셨다. 저녁 야간열차를 타고 상주로 내려가 역전에서 저녁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장에서 곶감을 사다가 서울로 부치고, 다시 아침 기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셔서 장사를 하셨는데, 일주일에 한 번에서 두 번, 횟수는 점점 늘어갔다.

아버지는 영등포부터 우리 동네까지 물건을 가득 실은 리어카를 끌고 다니셨다. 그 거리가 걸어서도 한 시간 이상인데 매일 다니시면서 물건을 파셨다. 많지 않은 돈이었지만 곶감은 우리 식구를 지탱해주는 일거리였다. 겨울 장사를 잘하면 한 해를 버틸 수 있을 만큼의 돈이 모였다. 하지만 낮에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고 밤 기차를 타고 상주로 가서 물건을 사서 부치고 다시 돌아와 장사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으신 건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방 두 칸짜리 집으로 이사를 하는 것! 학창 시절, 잠자는 머리맡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랑 그날 번 돈을 열심히 정산하시던 모습, 잠결에 들리던 돈을 세는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이었다. 해 지기 전, 일찍 도서관을 나와서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 길에 곶감을 팔고 있는 아버지를 집에서 가까운 버스 정거장에서 만나게 되었다. 날 보시고 환하게 웃으면서 곶감을 건네주시던 아버지. 순간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아는 아이들이 있나 살펴보았던 것이다. 그리고는 아버지에게 “집에서 만날 먹는데 무슨 곶감을 또 주냐”고 떼를 쓰고서는 집으로 돌아왔다. 공부해야 한다는 핑계로 얼른 자리를 떴는데 왜 그리도 창피하던지…. 집에 들어와서도 아버지가 곶감을 파시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동시에 가슴 가득 불만이 밀려들었다. ‘다른 동네에서 파시지 왜 우리 동네에서 친구들 다 보는데 파신담.’

혹시나 학교 가면 아이들이 놀리지 않을까…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아버지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시고, 장사를 하고 길에서 아는 아들 친구들을 만나면 선심으로 곶감을 한두 개씩 집어주시곤 했다. 그래서인지 난 곶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막내는 곶감을 진짜 좋아했다. 따로 놀 거리도 별로 없을 때 아버지 리어카를 만나면 계속 따라다니면서 곶감도 먹고 조잘조잘 이야기를 했다. 가끔 집 옥상에서 내려다보면 장사가 잘돼 콧노래를 부르시는 아버지와 리어카를 밀고 있는 막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때 난 막내의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결국 난 아버지의 리어카를 한 번도 밀어드리지 못했다. 세월이 지나서 이제 내가 아버지의 나이가 되었다. 돌아보면 정말 부끄러운 짓이었다. 자식 대학 보내려고, 그리고 조금이라도 넓은 방으로 이사하려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신 아버지에게 난 도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우리 아들들도 나에게 그런 생각을 가지지 않을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그 이야기를 하면 아버진 그냥 웃으신다. 그래도 말썽 안 피우고 공부 잘해서 대학 가고 직장 얻고 아이들 잘 키워줘서 고맙다고 하시는 아버지. 그 이후에도 아버지는 경비원, 막노동도 하시며 우리 삼 형제를 키우셨다.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 쭈글쭈글한 손은 훈장처럼 깊은 흔적으로 남았고, 그런 모습을 대할 때마다 죄송스런 마음뿐이다.

오늘은 아버지께 고기라도 한 근 사드려야겠다. “아버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안 그럴게요. 더 착한 아들이 되도록 할게요. 아버지 건강하세요.”

오순환 작. <바다>

100×80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치매 걸린 할머니 보살피던 아빠의 정성을 보며

김수미 43세. 직장인. 경북 구미시 진평동

내 나이 10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몇 년 후 재혼을 하셨다.

나는 새어머니가 생긴다는 게 기뻤지만, 상황은 생각과 달랐다. 새어머니는 우리와 함께 사는 게 불편했는지, 아버지와 다른 집에서 새 출발을 했고 나와 동생은 할머니와 함께 따로 살게 되었다.

그 후 새엄마와 살기 위해 자식들을 버린 아버지에 대해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은 쉽게 바꿀 수가 없었다. 내심 그냥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지냈으면 됐지, 하며 원망을 버려보려 했지만 어린 나이에 얻은 마음의 상처는 쉬이 없어지지 않았다. 성장을 하고서도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고, 나는 가족과 떨어져 다른 지방으로 가 독립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 아버지는 그분과 헤어지게 되셨고 아버지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할머니가 치매에 걸리셨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할머니를 돌보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살림에 익숙하지 않은 아버지가 할머니를, 그것도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돌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할머니를 요양 병원에 보내자 제안했지만, 아버지는 요양 병원에서는 정성스럽게 보살핌을 받지 못할 거라고, 또 낯선 환경에서 할머니도 불편하실 거라며 당신이 직접 할머니를 돌보신다고 강력하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모든 생활은 할머니 중심으로 바뀌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기에 아버지는 할머니가 잠든 새벽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셨다. 틈틈이 할머니의 영양을 생각해서 곰국, 추어탕 등 맛있다고 소문난 집을 찾아서 사다 드리고 과일은 직접 갈아서 드렸다. 목욕도 직접 시켜드리고, 손잡고 아장아장 걸음마 운동도 하루에 한 번씩 꼭 시켜드리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나오는 속옷 빨래도 직접 하셨다. 아버지에게 저런 바보 같은 모습이 있었나 할 정도로 최선을 다하셨다.

한 번은 아버지가 미숫가루를 드리는데, 가루가 목에 걸리지 않게 풀어서 드려야 한다며 20분 동안 수저로 저어서 할머니에게 드리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똑같은 미숫가루였지만 그냥 휘리릭 저어서 먹던 미숫가루와는 고소함과 부드러움, 맛의 차이는 완전 달랐다. 같은 미숫가루로 이런 다른 맛이 날 수 있다니…. 정말 정성이라는 것이 맛도 변화 시키는구나, 작은 기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성스런 보살핌에도 할머니는 몇 년 후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임종 직전까지 아버지만을 기억하시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곤 하셨다. 고모 역시 “어머니 좋은 데 가서, 복은 오빠한테 다 줘라”고 말씀할 정도였다.

지금도 아버지는 할머니를 생각하면 좋은 세상 못 만나고 고생만 하다 가셨다고 더 잘해드리지 못한 것을 죄송해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신다.

나도 나이가 들어 보니 어렸을 때 보이지 않은 것들이 조금씩 보이고 예전에 이해가 안 되던 것들이 이해가 되곤 한다. 이제 와 보면 아마도 아버지도 아버지가 외로우셨던 만큼 할머니에게 정성을 쏟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상에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치사랑을 나에게 몸소 보여주셨다.

사실 이제 와 보면 아버지도 그럴 수밖에 없었구나 싶으면서도,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았던 상처는 내 마음에 남아 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어릴 적 묻어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과감히 벗어던져 버리고 아버지가 할머니에게 해드린 헌신의 마음을 배워보려 한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한참 모자라겠지만 말이다.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삶은,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에도 모자란 시간들이니까.

오순환 작. <풍경>

100×72cm. 캔버스에 아크릴

2008

아버지, ‘호로록 팔팔’ 딸이 변했어요

민교순 59세. 직장인. 태국 방콕 거주

나는 8남매 중 다섯 번째인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 당시 남존여비의 사상이 강했던 사회 상황으로는 사랑받을 자격이 전혀 없는 조건이었는데도 꽤나 까탈을 떨며 자란 것 같다.

싫어하는 콩이 입에 들어가면 벌레를 씹은 듯이 뱉어내고, 학교에 가져갈 빗자루가 마음에 안 든다고 떼를 쓰고, 월사금을 제때 주지 않으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울면서 팔딱팔딱 뛰어서 아버지께서 내게 지어주신 별명은 ‘호로록 팔팔’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 아버지는 “나는 내 자식들이 공부를 잘하면 외국에 보내서라도 공부하게 할 거야”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농사꾼의 딸이었던 나는 월사금조차 제때 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멀어져갔다. 그런 데다 학교에서는 남녀평등을 가르치는데 ‘여자는 삼종지도를 해야 한다’느니 하며 내 행동 하나하나를 간섭하는 아버지가 고리타분하고 창피하고 미웠다.

능력도 없으면서 자식은 줄줄이 낳아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하는 아버지가 나를 미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를 골탕 먹일까’ ‘내가 죽으면 마음 아파하고 후회하겠지’ 하는 엉뚱하고 삐뚤어진 생각을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내가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 사건이 있었다. 고2 때 수학여행을 가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집안 형편이 안 되는 것을 알기에 마음으로는 포기했으면서도, 아버지를 골탕 먹이기 위해 무조건 가겠다고 했다. 나는 당연히 안 된다고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엄마에게 “저 고집쟁이 안 보내주면 난리가 날 텐데 돈을 꾸어서라도 보내줘” 하시는 말씀을 엿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동안 무턱대고 아버지를 오해하고 미워만 했던 게 너무나 죄송했다. 작은 행동 하나하나까지 간섭했던 아버지의 잔소리들은 성질이 불같은 내가 어른이 되어 잘 살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진심 어린 걱정이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만큼 마음껏 해주지 못하는 아버지의 아픔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왜 이제야 아버지의 마음을 느낀 것일까.

이후 아버지를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마음이 바뀌니 모든 게 사랑이고 이해고 행복이었다. 농사꾼인 아버지는 항상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땀으로 흥건해진 모습이었다.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밤에 버스에서 내려 먼 거리를 걸어 하교해야 했는데 농사와 해소라는 질병으로 고생하시면서도 아버지는 ‘다 키운 딸 도둑맞으면 안 된다’며 매일 마중을 나오셨다. 요즘 아버지들조차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아버지는 나의 입학식, 졸업식, 입학 시험, 진로 상담 등 학교 행사에 꼭꼭 함께해 주셨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나라는 존재가 귀한 존재라는 걸, 삶을 사랑해야 한다는 걸, 아버지의 그 사랑이 느끼게끔 만들어주셨다.

내가 직장 생활, 결혼 생활로 바쁘다고 핑계대면서 자주 찾아뵙지 못해도 불평 한마디 안 하셨고, 어쩌다 용돈이라도 조금 드리면 “생활하기도 빠듯할 텐데 고맙다” 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 나만 특별한 사랑을 받은 것 같아, 형제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는데 아버지의 기일에 모인 형제들이 아버지께서 생전에 하셨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항상 감사해하는 걸 보면 아버지는 모든 형제들에게 사랑을 듬뿍 주셨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상 없는 살림에도 나누는 분이셨다. 우리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은데 누군가 그 당시 귀한 사탕을 사오면 ‘다른 아이들도 먹어야 한다’면서 가지고 나가서 나눠주고, 농한기가 되면 사랑방을 개방하고, 보릿고개에도 거지가 오면 꼭 동냥을 주라 하셨다. 어린 마음에 그런 아버지가 싫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자란 나는 어느새 “왜 그렇게 못 줘서 안달이냐”고 남편이 말할 정도로 어디서고 나누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지금은 남편과 함께 태국 방콕에서 나누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버지! 하늘나라에서도 기쁘고 흐뭇하시죠? 고집쟁이 호로록 팔팔이었던 딸이 결혼 생활도 행복하게 하고, 든든해하시던 사위와 함께 아버지가 가르쳐주신 나눔을 실천하고 있으니!

오순환 작. <父女佛>

130×89cm. 캔버스에 아크릴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