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주지 않아도, 아무런 대가가 없어도, 어떤 조건도 내걸지 않고 무조건 사랑하고 무조건 도전해 본다면….

 

2년 2개월, 짧았지만 영원할 우리의 사랑

이금자 49세. 대구시 북구 태전2동

2009년 5월 남편이 뇌출혈로 쓰러졌다. 너무 심각해서 가망이 없다고 했는데 그 이후 2년 2개월이라는 짧디짧은 생을 살다 지난 7월 떠나 버렸다.

25년 전, 결혼하고 아이들 키우며 남편과 난 자주 싸웠다. IMF가 터진 후 일이 안 풀려 우리 부부 사이는 더 나빠졌고, 아이들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땐 그렇게 싸웠다.

그런데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 수술을 받을 때 병원에서는 아예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다행히 열하루 만에 깨어났다. 남편이 쓰러지고 보니 모든 게 내 탓 같았다. 이 모든 게 나의 부족한 사랑 때문에 일어난 일이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일을 그만두고 간호에 정성을 다했다. 처음 쓰러졌을 때는 나도 못 알아볼 정도였는데, 병원에서도 놀랄 만큼 조금씩 의식이 돌아왔다. 100일 정도 병원에 있다가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씻겨주고, 면도해주고, 손톱 발톱 깎아주고, 밥도 떠먹여주었다. 갓난아이 걸음마 떼듯 한 걸음 한 걸음 걷기도 가르쳐주었다. 그 덕분인지 남편은 혼자 밥도 먹고 혼자 걸어 다닐 정도가 되었다. 기특하게도 대학생인 두 아이도 아빠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벌고, 늦은 밤 피곤한 내색 하나 없이 집에 들어서는 아이들의 손에는 아빠가 먹고 싶다고 한 빵이나 치킨이 들려 있었다.

남편이 조금씩 좋아지자, 나 역시 잠깐씩 친척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날이 덥다 춥다 말할 시간도 없었고, 아플 시간도 없었다.

아이들도 나도 힘든 줄 모르고 남편에게 모든 정성을 다했다.

뇌 손상으로 인한 치매 때문에 대화가 조금 힘들었지만 우리 가족은 의사소통이 다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지인들, 친척들이 남편과 멀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하지만 나에겐 살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나에게 남편은 하늘이었고, 25년 지기 친구였고, 막 걸음마 배우는 사랑스러운 늦둥이(?)일 만큼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이었다.

남편을 보며 숨 쉬고 있는 이 순간이 얼마나 귀중한지도 새삼 깨달았다.

2011년 초, 딸애가 졸업을 하고 자리도 잡으면서 마음의 여유가 조금 생겼다. 2011년 6월, 결혼 25주년 기념일엔 딸이 케이크에 선물을 사와 자그마하게 가족 파티도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괜찮아 보였는데…. 남편은 의식 불명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젊었을 때 못 해준 사랑, 내 살아생전에 무조건 쏟아 주리라 마음먹었는데…. 이제 겨우 2년 2개월이 되었을 뿐인데…. 나의 사랑이 여전히 부족했던 것일까.

돌아보면 남편은 참 고마운 사람이었다.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였지만 우리의 첫 데이트 날이 언제였는지, 내 생일이 언제인지, 결혼기념일이 언제인지, 기억했다가 아무리 싸우고 났어도 꼭 챙겨주었다. 설거지하고 있을 때 뒤에서 가만히 안아주는 것도 잘했다. 외식이라도 하면 항상 엄마 먼저, 애들 먼저, 그다음에 자기가 먹었다. 그게 그 사람의 사랑이었는데…. 그때는 살기가 바빠서,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고마워할 줄도 함께 나눌 줄도 몰랐다.

지금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남편의 빈자리가 너무 크다. 이제 남편 없이 새해를 맞아야 하는구나, 그 허전함에 어쩔 줄 모르다 불현듯 알았다. 아직 내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 내 마음 깊숙이 아직도 그에 대한 사랑은 차고 넘치지 않는가. 남편은 곁에 없지만 사랑은 남았다. 남편을 향한 그 사랑이 나를 살게 한다.

 

김점선 작 <물고기와 나> Digital printed. 49×39cm. 2005.

 

영어! 기다려라, 몽땅 외워버릴 테니

최윤성 43세. 직장인. 서울시 서초구 잠원동

중학교 1학년 때 가장 좋아했던 과목이 영어였다. 영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그러나 좋아하던 영어 선생님이 한 학기도 지나기 전, 학교를 관두시면서 나는 영어의 마법에서 풀려나고 말았다. 한마디로 영어책을 완전히 덮어버린 것이다.

시간이 흘러 대학교 3학년이 되었다. 5살 때부터 한국 무용을 시작한 덕에, 체육학과에 왔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깊은 회의에 빠져 있을 때였다. 이것저것 배워보고 고민한 끝에 앞으로 세상은 글로벌해질 것이니, ‘해외 무역’ 일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의 영어 실력이 형용사와 명사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야말로 바닥 너머 더 아래 바닥이라는 거였다. 이제 영어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나의 진로를 바꿀 수 있느냐, 없느냐가 달려 있다는 사실에 화들짝 놀라며 나는 당시 가장 유명한 영어 학원에 무작정 등록을 했다.

첫 영어 수업.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떡이며 그 수업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나는 한마디도 알아들을 수도 없었고, 입도 뻥끗 못 하고 일주일이 지나갔다. 너무나도 창피해서 밤마다 동생에게 하소연하며, 울고 또 울었다.

1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조금씩 따라가기는 했지만, 졸업 시즌이 되었을 무렵까지 내 실력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단기로 영어를 배우기는 필리핀이 괜찮다”는 엄마 친구분의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필리핀으로 가기로 했다. 대학 졸업 일주일 후 나는 필리핀에 와 있었다. 처음에는 창피하기도 하고 두려움도 있었지만, “한국인이 영어 못하는 게 뭐 그리 창피한 일인가, 하면 되는 거야, 무조건 해보는 거야” 하며 부딪쳐보자고 결심했다.

드디어 본격적인 어학연수가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7시부터 4시간 동안 대학에서, 오후에는 4시간씩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집에 와서는 또 밤 12시까지 공부를 했다.

나의 공부 방법은 그날 배운 것을 통으로 무조건 외우는 것이었다. 문법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냥 외우고 또 외웠다. 그렇게 해서 내가 열 단어를 알면, 그 안에서 무조건 말을 했다. 문법이 맞다 안 맞다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의 수준을 막 꺼내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날 몰랐던 단어나, 숙어는 노트 한 권에 정리를 해갔다. 그걸 매일매일 반복해서 봤다. 집에 와서는 TV나 영화도 계속 보았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나니까 점차 귀가 뚫리는 느낌이었다. 점점 자신감도 생겼다. 풍토병으로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보름 동안 앓기도 했고, 화산이 터지고, 가슴께까지 빗물이 차는 천재지변도 많이 겪었다. 하지만 ‘영어’라는 하나의 목표에 몰입돼 있으니까 그런 것들이 하나도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하루하루가 소중했고, 매일매일이 충만했다.

10개월간의 짧은 체류 기간이었지만 나의 영어 실력은 놀랍게 변해 있었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와서 어느 수출 회사 해외영업부에 취업이 되었고 그 이후 대기업 해외영업부에 근무하면서 해외를 누볐다. 영어로 이메일을 주고받고, 영어로 회의를 진행하는 등 모든 의사소통을 영어로 했지만 한 번도 영어가 달렸던 적은 없다.

정말 할 수 없는 거라도 될 때까지 열심히 하다 보면, 어느 임계치를 넘는 순간 폭발적으로 실력이 뛰어오르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안 돼요”라는 분들이 있다면 감히 말하고 싶다. “무조건 하면 안 되는 게 없다고, 안 된다는 생각이 안 되게 하는 거”라고.

 

김점선 작 <모란불멸> Digital printed. 39×49cm. 2006.

 

늘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최신호 54세. 집배원. 인천시 남동구 간석동

인천시 화수동에 ‘민들레국수집’이 있다. 7년 전쯤, 그 부근에 우편물을 배달하러 갔는데 웬 사람들이 길게 서 있었다. 노숙자들이 밥을 먹으러 온 것이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점심값 칠팔 천 원이 나왔다. 그걸로 계란을 3판 사서 반찬이라도 하라고 그 집에 들여놓아 주었다. 그 뒤로는 매주 한 번씩 점심을 거르고 계란을 사드렸다. 요즘은 그 돈을 모아 일년에 한 번씩 갖다 드리고 있다. 점심을 굶으면 배가 고프지만 참을 만하다. 그리고 내 배가 고파봐야 남의 배고픈 사정도 이해하게 된다.

그곳에 가면 항상 그곳을 운영하는 수사님께 많은 걸 배우게 된다. 그분은 뭘 가지고 가다가, 누구하고 마주치면 그냥 준다. ‘내 것’이라는 개념이 없다. 그곳에는 직장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 심한 실패를 겪고 노숙자가 된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꾸준한 밥 한 끼의 사랑에 다시 자립할 힘을 얻고, 취직도 하고, 다시 가정을 이뤄 사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아무리 사랑을 줘도 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는데, 수사님은 그런 사람들에게도 늘 한결같다. 그분의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는, 조건 없는 사랑을 보며 ‘사람이 욕심이 없으면 부자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저절로 배운 것 같다.

재산이 많아서 부자가 아니고, 욕심을 버리면 풍족해지게 돼 있다는 것도. 욕심을 내면 사람이 거기에 얽매이지만, 욕심을 버리면 항상 감사해진다는 것도.

떠올려 보면 내 곁에는 늘 그렇게 아무 조건 없이 사랑을 베푸는 분들이 있었다. 우리가 어릴 때 가난해서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애들이 많았는데, 초등학교 때 선생님은 도시락을 모두 들고 나오라고 해서, 커다란 양푼에 비벼서 다 같이 나눠 먹게 하셨다.

할머니는 아침밥을 하시면 첫 그릇을 떠서 부뚜막에 올려놓았다. 따듯한 온기가 남아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오후쯤 되어 어려운 사람들이 밥을 얻으러 오면, 그 밥을 내주셨다. 사람들이 자주 왔지만 한 번도 내치시는 것을 못 봤다.

한번은 중학교 때 가출한 적이 있다. 친구 한 명과 전라도 남원까지 어떻게 어떻게 갔는데, 거의 일주일간을 굶다시피 했었다. 하도 배가 고파서 남원 기차역에 주저앉아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지나가시며 “니네 왜 여기 있냐?”고 물으셨다. 사정을 말하니, 아저씨는 곰탕을 한 그릇씩 사주시며 좋은 말씀도 해주시고, 집에 갈 수 있게 기차표도 끊어주었다. 참 어려운 시절이었는데, 생면부지의 아이들에게 아낌없이 주셨던 그 아저씨를 생각하면 찡해진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늘 조건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 일터에서, 내가 나이가 있어 힘겨워하면 주변 동료들이 도와준다. 아내도 항상 이렇게 저렇게 챙겨주고, 기도해준다. 아침 출근할 때 신기 좋게 신발을 놔주는 것 하나도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 사랑 속에서 살아왔고 그런 사랑을 봐왔기 때문일까. 나에게도 꽤 오래전부터 가져온 꿈이 하나 있다. 힘들고 지친 사람들이 아무 규제도 없이, 농사도 짓고 하며, 그냥 느슨하게 쉬어갈 수 있는 쉼터를 만드는 것이다. 혼자서 헤쳐 나가기 어려운 세상이라 느껴질 때 그곳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

전셋집을 팔아서 꼭 그렇게 하기로 아내와도 약속했는데, 지금은 땅값이 너무 비싸서 아직 엄두를 못 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꼭 만들고 싶다. 누구나, 무조건 와서 쉬어갈 수 있는 곳. 그런 소박한 쉼터 하나 만들고 싶다.

 

김점선 작 <휴식> Silkscreen. 47×47cm. 2006.